[신의 탑] 미련
* 사망소재 주의하세요!
들어와. 그런 대답을 들었음에도 밤은 한동안 문고리를 잡은 채 문 앞에 멈춰서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어조. 가슴이 뛰었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밤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돌아온 것이다. 한참만에야 점멸하는 등대의 불빛으로 채워진 방으로 들어선 밤은 새하얀 셔츠와 단정한 은청빛 모발의 뒷모습에 살풋 미소를 입에 걸었다.
"다시 머리 자르셨네요, 쿤 씨. 몸은 좀 괜찮으세요?"
"아, 밤. 시간이 없어서 손을 못 댄 거였으니까. 그런데 왜 계속 서 있기만 한 거야?"
"별 일 아니었어요.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아직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까 무리하지 마시고요."
자하드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양동작전을 펴던 중 큰 부상을 입었던 쿤의 의식이 돌아온 게 바로 어제. 끝없이 쫓기는 입장이다보니 미처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는 추격을 피해 탑을 올라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탑의 꼭대기가 가까워진 지금, 지체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아직 선별인원의 신분임에도 랭커를 상회하는 전력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밤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서는 시간 여유가 있는지 간식을 만들어 쿤을 찾았다.
"아아.. 잘 먹을게."
"괜찮으시겠어요? 저 곳.. 쿤 가문의 '특별한 의식'에 사용되는 곳이라고 하던데요."
"거창한 이름 붙여봤자 잘 꾸며진 싸움터인걸. 없어진다고 아쉬워 할 사람은 아버지 밖에 없을 걸?"
"......."
그는 알고 있을 터다. 사실 밤이 묻고 싶은 건 예정된 격전지가 소중한 곳인지가 아니라 쿤 가문의 일원인 그는 그 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는지를 묻는 것이라는 걸. 본인의 입으로도 말했다시피 쿤 가문의 의식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기에, 억지로 전장에 밀어 넣어진 과거의 그가 힘들어하진 않았었는지를 묻고 있는 건데...
저는 이런 방법을 원하지 않았어요!!
쿤을 잃은 직후에 화련은 밤에게 충고했다. 선은 모든 것을 구할 수 없기에 각자의 방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결국 밤의 방법조차 틀려버리지 않았느냐고. 되도록이면 더 '많은' 것을 구하겠노라는 '욕심'이 스스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되돌아 보라고. 쿤은 분명 밤의 가장 소중한 동료였지만 밤에게 자신에 대한 걸 알려주는 일이 일절 없다는 걸 밤은 뒤늦게 깨달았다. 유일하게 들은 키세아의 일도 엔도르시가 물었으니 대답해 준 것이었고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라크를 통해서 알았다. 밤에 비해서 알고 지낸 시간이 짧았음에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던 왕난과는 다른 태도. 밤은 그것이 쿤의 성격이라고만 여겨왔지만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알 것도 같았다. 쿤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은 밤이었다. 밤이 여태 원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강하고,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가치가 있기에 그를 돕는 이들도 많았고 패권이 개입하며 늘 일반적이지 않은 전개가 되곤 했다. 가능성조차 잘려나간 상황을 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쿤은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의 자존심 문제였다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겠지. 이렇게 밤의 앞에서만 입을 닫는 것이 아니라.
"저.. 쿤 씨. 그 땐 죄송했어요."
"그 때? 어느 그 때?"
"으... 그러니까.. 쿤 씨한테 소리 지른 거요."
"아... 신경쓰지 마. 넌 착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상한 얘길 하시네요. 착한 사람은 그렇게 다짜고짜 화내지 않아요."
"생판 남을 위해서 화를 낼 수 있다면 착한 거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잘 잊어버려."
동료들이 부탁한 일은 기한이 그리 급박하지 않았지만 쫓기는 입장이라 여겨서인지 쿤의 시선은 등대의 영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총천연색으로 바뀌는 조명에 그대로 물들어 버릴만큼 엷은 색채. 본인이 스크린이라도 되는 양 빛무리를 뒤집어 쓴 쿤의 모습은 생각보다 익숙했다. 그는 동료들이 쉴 때조차 정보를 끌어모으며 뒷 일을 도모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밤에게는 항상 원하는 걸 하라고 말했으면서, 쿤은 스스로를 돌아본 적이 있을까 싶어진 것이다. 자하드가 밤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부터 쫓기듯 살아온 그는,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 밖에 볼 수 없던 그는, 결국 자신만을 희생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밤이 원했던 길은, 가장 소중하다 생각했던 친구를 제물삼아 이뤄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제가 너무 쿤 씨 입장은 생각 안 하고 무리한 일을 부탁드리는 거겠죠. 오늘은 이만 하시고 어서 쉬세요. 아직 안색이 나빠요."
"이거 먹고 쉬러갈테니까 걱정하지 마. 너나 몸조리 잘 하고. 전투가 계속 이어지고 있잖아."
밤이 가져온 간식을 핑계로 유연하게 빠져나가는 쿤에게 더는 할 말이 없었지만 밤은 아예 그의 곁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가르치면 흡수가 빠르다며 칭찬을 듣곤 했지만 기본적으로 밤은 자신의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은 많이 어려워했다. 어쩌면 그런 자의식의 부재가 더더욱 주변 환경에 많이 휘둘리는 결과로 나타났던 건지도 모른다. 그를 아껴준 주변 사람들까지도 그에 휘둘리게끔.
".....쿤 씨는 제가 답답하거나 원망스러웠던 적 없나요."
"오늘 왜 이렇게 반성 모드야? 무슨 일 있었어?"
".......쿤 씨는 제게 신이 될 필요가 없다고 하셨죠. 뭔가 알고 계셨던 건가요?"
"아아. 그 얘기였구나. 그냥 신이 된다는 건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서.”
“.......”
“대가 없이 소원들 들어주는 존재라는 건 많은 의견이 존재하는 이런 세상에서는 판단을 멈춰버린 존재여야할 거잖아. 애초에 그런 자들이 말하는 신은 자기를 구원하는 신이지 모두를 구원하는 거창한 개념이 아니었을 테니까 쓸 데 없는 걱정이겠지만 말이야.”
“쿤 씨를 구원하는 신이 있다고 해도요?"
“그건 너처럼 착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 신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증오하는지 나는 알거든.”
넌 그런 사람들도 외면하려 하지 않을 거잖아. 쿤은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의도를 눈치챈 밤은 시선을 피했다. FUG의 슬레이어들이 자하드와 10가문을 증오하는 자들에게 신이라 불린다면 자하드와 10가문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자하드와 10가문의 가주가 곧 신이다. 10가문의 자제로서 어쩌면 가장 가까이에서 한 사람의 신을 봐 왔던 쿤이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던 사실을 밤은 왜 이제서야 물었을까?
“여하튼 당장의 목적은 탑을 오르는 거잖아? 이미 FUG와 너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고, 그들의 힘에 기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결정은 마지막까지 미뤄두자.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쉬어, 밤”
“네, 안녕히 주무세요, 쿤 씨.”
밤이 곁에 있으면 쿤의 마무리가 더 늦어질 것 같아 하릴없이 밤은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왔다. 결정은 마지막까지 미뤄 두자. 부드럽게 밤을 달래는 그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서 돌아서는 걸음은 무겁고 또 무거웠지만.
*
밤이 짚었던 대로, 다음 격전지는 쿤 가문의 영토이다. 옛 기억과 공개된 몇 가지 정보를 토대로 지형에 대한 정리를 어느정도 마무리한 쿤은 이수와의 세부적인 논의를 진행하기 전에 오전에 간단한 셀프 브리핑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FUG가 제공한 부유선 내의 식당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쿤은 층계를 디뎌 그의 방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식사도 건너 뛰고 싶었지만 환자가 그러면 어떻게 하냐며 마음 씀씀이 좋은 동료들이 걱정과 함께 귀찮은 일을 벌일까봐 억지로 원래의 생활 패턴을 흉내내는 중이었다. 어제는 괜찮았는데 몸이 무겁고 졸음이 쏟아졌다. 어차피 이수와 합만 잘 맞는다면 오늘 내일 안에 끝날 일이니까 버틴다고 해도 길진 않겠다만....
“귀치장!”
“!”
걸어가는 중간에 졸기라도 했던 건지 억지로 멈춰선 순간에 올려다 본 하츠의 얼굴엔 당황과 염려가 뒤섞여 있었다. 거의 항상 같은 표정이던 하츠로서는 드물게 감정이 드러나 보이는 얼굴이 기묘했지만 그런 걸 지적할 타이밍을 주지 않고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은 거냐?”
“.....어...? 어... 너야말로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지?”
“무슨 대답이 그러냐 하여간.. 아침부터 어딜 돌아다니는 거냐, 부상자가.”
“단어선택 하고는... 아침도 먹었고 약도 먹었으니까 신경 끄셔. 어차피 난 10가문이라 그런 거 없어도 금방 낫겠지만.”
“...튼튼하다고 막 써서 될 일이냐. 아예 다치질 말았어야지.”
먼저 튀어나올 말을 씹어 삼키는 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쿤에게 신경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쿤도 더는 말꼬리를 잡지 않기로 했다. 하츠의 말처럼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있는 전력을 최대한 짜내어 싸우나가야 하는 지금, 등대지기조차도 뒤에서 사태를 관망할 수 만은 없는 입장이니.
“그래. 그건 앞으로 주의할게. 가는 길에 이수를 만나면 점심 먹자마자 내 방으로 와 달라고 좀 전해 줘.”
“너.. 너는 뭐 잘못 먹은 거 없냐?”
“뭐?”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할 말 있다는 게 뚝뚝 묻어나는 눈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반응에 위화감을 느끼는 순간이 오래 이어져봤자 좋을 게 없는지라 쿤은 하츠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성실한 하츠니까 이수에게는 쿤의 말이 제대로 전해지겠지. 당장의 피로감을 잊기 위해서는 바깥 공기를 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쿤은 자신의 방을 지나쳐 정박해 있는 부유선의 데크로 향했다.
*
“깼냐.”
“..라크?!”
잠을 깨러 밖으로 나왔지만 바깥 바람이 그리 선선한 것도 아니라서 그대로 선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쿤 혼자 있었다면 애가 또 쓰러졌다면서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건만 골치아픈 상황을 미연에 막아준 건 놀랍게도 라크였다. 오랜만에 압축을 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던 라크는 휑한 공간에서 잠든 쿤이 기댈 수 있게 몸을 기둥삼아 준 걸로 모자라 망토까지 벗어 어깨를 덮어 두었다. 늘 악어라고 놀리던 절친에게 이만한 매너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쿤은 본의 아니게 졸음이 싹 물러간 눈으로 그를 올려다 봤다.
“왜 여기 있는 거냐, 병약한 거북이가.”
“누가 들으면 내가 불치병에라도 걸린 줄 알겠네.”
“.......”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어.”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냐, 파란 거북이. 여길 빨리 떠나고 싶은 거냐?”
“잘 아네.”
“그래... 그렇군.”
“하츠 녀석도 그렇고 너도 오늘따라 순하다?”
“흥. 네 기분이니까 네 말이 맞는 거지.”
“오.. 몸이 크니까 생각도 자란거야? 우리 악어가 어른이 됬잖아?”
“냉큼 들어가기나 해라, 속 시커먼 사기꾼 거북이 녀석.”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난 파란 거북이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여정에 있어서 대부분의 지휘를 맡은 쿤이었지만 하츠나 라크처럼 자신의 생각과는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를 따른 경우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지난 며칠 간을 돌이켜 보니 깨닫는 바도 없지 않았다.
어중간하게 착하고 똑똑한 놈이 부탁에 치이다 보면 자주 하는 실수가 뭔 줄 알아?
‘파란 거북이....’
“솔직하지 못한 놈 같으니.”
망토를 다시 두른 라크는 그대로 팔짱을 끼며 먼 곳을 올려다 보았다. 탑의 꼭대기. 여하튼 저 위에는 지금까지 라크와 동료들에게 수많은 의문을 만들었던 비밀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쉬어가고픈 마음이 생긴 이유라면 여행을 중간에 그들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의문이 자라기 시작한 탓이다. 저 탑의 위해 모든 질문의 답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모두가 바라는 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은 동료들의 등을 떠미려고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영리하니까 예감한 것이겠지.
“이미 알고 있나보군.”
*
점심을 먹자마자 자신을 찾으라고 말을 전하게 시킨 건, 결국 본인은 점심을 먹을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을까? 식당에 쿤이 보이지 않아서 요기가 될만한 걸 챙겨온 이수는 노크를 했음에도 안쪽에서 대답이 없자 두어번 같은 행동을 반복한 끝에 결국 대답보다 먼저 문을 열었다.
“야, 쿤! 오라고 했으면서 왜 대답이 없어!”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어?”
“잤어? 어제 밤 샌거야?”
“그런 건 아니고. 앉아. 여기.... 뭘 가져 온거야?”
“점심. 너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길래.”
“...그래. 이따 먹을게. ‘제단’의 지형에 대해 정리한 건 여기. 보면 알겠지만 9개의 제단은 각각 다른 특정 행동에 제약을 거는 구조야. 신수의 운용에 핸디캡을 주는 거지.”
“흠... 제단이라고는 해도, 일종의 격투장이라고 했었지? 제약을 가지고 전투를 해서 이겨야 한다는 건가. 그런데 너무 빨리 자료를 준비한 거 아니야? 화련은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잖아. 고작 이틀 지났다고? 과로는 건강에 좋지 않아.”
“.......지금 내 건강에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난 죽었잖아.”
음식이 든 트레이를 미리 탁자에 내려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요란한 소음이 이수의 귓전을 강타했을 터였다. 생각을 할 떄의 버릇대로 이수의 옆에 턱을 괴고 앉은 쿤은 힘에 부치는 게 있는지 피로감이 짙은 얼굴로 등대를 움직였다.
“쿤.”
“한시적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주술이라니. 길잡이도 이런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면 아버지가 대단한 인간이긴 한가봐?”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내가 스스로 깨달으면 풀리게 되어있는 주술이잖아. 시간 없어. 빨리 일부터 마무리 지어.”
“그러니까 어떻게..! 우린 그래서 너한테 아무 말도....”
“못했지. 말은 말이야. 니들 표정이 얼마나 솔직한지는 모르고. 같이 한 세월이 얼만데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
“그게 아니라도 말이야. 나, 그렇게 불행하게 죽지 않았거든? 그 순간을 주술 따위로 잊을 리가 없지.”
상황 봐 가면서 알아서 수정하라는 말을 시작으로 쿤은 이수의 감정과는 관계없이 찬찬히 앞으로의 일을 설명했다. 당시에는 듣지 못한, 그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탓에 집중을 하고 있지 못한 이수를 위해 포켓에 녹음 기능까지 켜 둔 채로 말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해도 당사자에게만은 어떤 예감이 있는 것인지 쿤은 자신의 할 말을 적당히 마친 이후에야 가볍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제 됬다는 신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쿤, 우리는 말이야, 네가 이런 준비 해 주지 않았으면 했어. 그냥 아무 것도 모른 채 되도록이면 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길 바랬거든.”
“내가 그렇게 뒀겠어?”
“그러게 말이야.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네. 시간 문제일 뿐, 넌 분명히 우릴 더 높은 곳으로 보냈을 텐데. 하지만 마지막으로 대답해줘, 쿤. 아까 그 말.. 네 마지막이 불행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야? 우릴 보내려고 지어낸 말 아냐?”
“못 믿겠으면 그것도 탑의 꼭대기에서 확인해 보시던가.”
원하는 모든 것이 거기 있다잖아? 꼭 그와 같은 말투가 꿈결처럼 잦아들어갔다.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가벼워진 마음으로 눈을 감은 쿤은 편안한 미소를 띤 채로 스러졌다. 현실이 오히려 꿈이었던 것처럼.
*
FUG에서 새로운 신으로 밤을 추앙하기 위해 꾸민 선전은 자하드 군으로 하여금 밤의 여린 심성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에 휘둘리지 않는 것도, 그러면서도 최대한 무고한 희생을 막는 것도 오로지 밤과 그의 동료들의 몫. 하나하나의 선택에 무고한 목숨의 생사가 걸린 상황은 심적으로 밤을 몰아붙였다. FUG의신도들이 그를 구원자로 여길 때마다 외려 죄악감이 깊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밤과 그의 동료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선택을 하는 과정을 쿤이 책임져 왔기 때문이었다. 기민하게 실리를 따지고 취사여부를 결정하는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는 현재의 상황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고 여기게 만드는 듯 했다.
“저는 이런 방법을 원하지 않았어요!!”
악역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므로 감정이 경계부터 바스라지는 상황에서 동료들은 맹목적으로 쿤의 인솔을 따랐다.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생각을 멈추고 팀에서 최고의 냉혈한이라는 그에게 모든 판단을 일임했을 뿐이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던 중에 밤이 폭발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동료들 중 일부를 버리는 선택을 했을 때였다. 동료라고 해봐야 하룻밤 같은 곳에서 숙식을 함께한 것 뿐이라는 쿤과 자신의 눈에 담은 인연들만큼은 잃고 싶지 않은 밤의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아무도 죽지 않는 방법이 없다면 최대한 적은 피를 흘리는 게 최선 아니야?”
“그게 최선이라는 걸 쿤 씨가 어떻게 장담하나요. 하다 못해 제가 그 분들이 도망칠 시간이라도 끌었으면!”
“그 동안에 자하드 군의 포위망에 갇힌 우리를 돌아온 네가 구하고? 같은 이론이라면 너는 그 방법이 100%의 정답이라고 장담한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좀 더 노력하면 최선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도박이라고 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현재의 자원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결론, 그 이상.”
“........”
“설마 네 가능성을 더 높이 쳐 달라는 얘기야?”
“아니오. 저는 쿤 씨를 비롯한 제 동료들의 가능성을 믿는 거에요.”
“그래. 그럼 누굴 좀 더 믿을만한지 다시 살펴봐야겠네.”
훈련 메뉴를 살펴봐야겠다는 쿤이 그 곳을 떠나자 다른 동료들의 위로가 줄을 이었다. 쿤이 말했듯이 그는 팀 내의 악역 담당이었으니까 그는 이런 구도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날의 일은 동료들의 가슴 속에 깊은 후회로 남겨졌다. 밤의 이야기가 지극히 옳은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중간하게 착하고 똑똑한 놈이 부탁에 치이다 보면 자주 하는 실수가 뭔 줄 알아?”
어젯밤 밤과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이야기였다. 밤의 손에 절명하기 직전이었음에도 자하드 군의 랭커는 억지로 쥐어짜낸 목소리로 밤과 그의 동료들을 도발했다. 아니,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치 않았지만 컨트롤 타워 역의 쿤이 다음 지시를 내리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막 깨달은 시점이었으니.
“자길 안전한 곳에 두는 걸 잊는 거야.”
“쿤 씨를 어떻게...“
“쿤! 우린 이제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고! 대답 좀 해봐!! 넌 어딨어? 쿤!!”
온갖 생각이 뇌리를 뒤덮었다. 통신 장애가 있을 거야. 10가문이니까 함부로 대하진 않을 거야.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면 죽이진 않았겠지. 만약 죽을 상황 같았으면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자기 몸을 얼렸겠지. 자기 위로를 위한 하찮기 짝이 없는 변명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빗겨가는 법이 없어서, 밤이 그들의 부유선을 찾아냈을 때 본 풍경은 피 웅덩이 속에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쿤이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손질할 시간이 없어서 길게 기른 물색 머리카락은 핏물이 들어 손 쓸수 없을 지경이었고, 반대로 핏기 없이 새하얗게 질린 피부는 차게 굳었다. 그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표정만큼은 평온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갖게 했지만, 가느다란 희망마저도 머지않아 끊어져 버렸다.
“쿤 씨.. 왜...”
등대지기이자 팀의 머리 역할이었지만 그는 결코 다른 동료들에 비해 전투력 면에서 부족하지 않았었다. 습격이 있었다고 해도 동료들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낼만한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동료들도 믿고 전장으로 떠난 것이다. 분명 그러했는데, 어째서? 왜.
“아닐거야, 밤. 녀석은 자기를 그렇게 믿는 성격이 아니잖아.”
밤의 생각을 읽은 이수가 먼저 밤을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다른 동료들을 어떻게든 해 보라며 몰아붙였으면 모를까 쿤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는 성격은 아니었다. 차라리 동료들이 평소보다 어려운 미션을 수행 중이니 자신을 도울 틈이 없다고 결론 내렸으면 모를까.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누구도 원치 않았던 결말이었기에 다시금 내려앉은 침묵은 길고 길었다.
*
“불행하지 않았다는 건, 쿤 씨는 거기서 멈추고 싶었다는 말씀이셨을까요?”
“모르지. 하지만 그 때 녀석의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
“.....쿤 씨는 신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 싶으셨던 건지도요.”
점점 더 큰 힘을 원하게 된 밤.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신념을 포기한 하츠. 계속되는 선택의 기로에 피로감을 호소하던 동료들. 맹목적인 탑의 정상이 아닌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던 쿤은 그저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서 자신이 그들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게다가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라는 점을 자주 잊어서 쉽게 자신은 동료들과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곤 했으니까.
“가주가 되고 싶다는 건 결국 우릴 안심 시키려고 한 말이었나.. 아니면 이제 가주 같은 건 없어진다는 얘기였나. 하여간 알기 어렵다니까.”
정작 그는 표정 속에 담긴 동료들의 생각을 전부 읽어냈는데 말이다. 불공평한 일이다. 그 불공평함이 소소한 잘못에 대한 사과를 전할 기회마저 앗아갔다는 걸 생각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우리는 녀석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겠지.”
짧은 시간이지만 쿤은 쿤 에드안의 층 이후의 몇개 남지 않은 상층에 대해서도 정리할 수 있는 만큼의 자료를 모아 두었다. 그건 멈추지 말라는 그의 유언과도 같기에 밤과 그의 동료들이 탄 부유선은 탑의 상승기류에 몸을 던져 넣었다. 여하튼 모든 것은 이 탑의 위에 있으므로.
뭔가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본의 아니게 논컾 찌통물을 들고 왔는데 예전부터 한번 써 보고 싶었던 내용이라.. 놀란 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ㅠ
실력이 되지 않아서 뺀 부분이 조금 있는데,
난해한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자면 쿤을 죽이러 온 자객을 키세아로 등장시킬 생각이었습니다.
쿤은 자신과 키세아,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의 안식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죠.
밤이 바꿀 세상에 지배자 개념인 가주란 무의미한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저는 쿤이 가주가 되고 싶은 이유는 가문을 바꿀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으므로...
더 큰 변화가 예고된 마당엔 굳이 그 꿈에 매달릴까 싶기도 해서요.
물론 목적이 있으니 그 변화를 불러 오는 데에는 열심이겠지만! ㅠ
글이 부족하니 첨언이 길어졌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