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05
익셉셔널의 연말은 바쁘다. 한달 여 동안 특별 무대와 콜라보 무대의 연습이 빽빽하게 자리했고, 한류 문화의 대표 아이콘인만큼 연말연시 인사만 해도 수십번을 녹화했다. 한국 아이돌 특유의 대형을 맞추다보면 쿤의 빈 자리가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연말 일정이 끝나면 복귀한다고 했으니까 멤버들은 그에 대한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멤버들이 아니라도 올해의 시상식에서는 쿤을 볼 수 없다는 소식에 오열하는 익셉셔널의 팬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익셉셔널은 연말마다 레전드 무대를 갱신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완전체가 아니라는 게 그들을 슬프게 만든 듯 했다. 화려하고 퀄리티 좋은 무대의상과 특별히 편집된 타이틀 곡을 기대하며 기다렸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의식이 돌아오는데만 사흘이 넘게 걸린 쿤이었으니 회복이 우선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벌써 퇴원을 한다고요? 완치가 되는 병은 아니라지만 주치의가 좀 더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면서요?"
"위험한 상태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기자들이 몰려서 불편했던 모양이지."
"병실 취재는 금지사항입니다. 이미 발표한 입장문 이외에 다른 발표는 없다고 전부 잘라냈는데요."
"그걸로 되겠냐. 쿤 에드안이 있는데."
"그러고보니 그 노친네는 대체 왜 온 거랍니까?"
"아....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다."
"이사님! 제가 그렇게 부탁 드렸는데!!"
"아무튼 전화에 신경쓰라고 해 뒀으니까 계약 건은 불러서 진행하면 될거야. 애들한테 괜히 병문안이랍시고 그 근처를 기웃 거리지 말라고 전해주고."
연습생들과 소속 연예인들에게는 공포의 유한성 실장일지 몰라도 직급이 그렇게 높지 않은지라 하진성 이사 앞에서는 교수님 앞의 학생이나 다름없는 한성이다. 그의 간절한 부탁만 홀랑 까먹은 진성이지만 상사인 이상 한성이 뭘 더 어쩌겠는가? 어차피 진행할 계약이었으니 쿤을 불러서 직접 물어볼 밖에. 병문안을 갈 시간도 없어서 쿤의 소식이 궁금했던 익셉셔널 멤버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건 안중에도 없이 한성은 곧장 휴대전화를 두드렸다. 전화를 바로 받지 않으면 쉰 만큼 굴려주겠다고 중얼거리면서.
*
"Hola?"
쿤 씨...?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아! 너구나, 커피!"
쿤 에드안?! 당신이 거기 왜 있습니까? 쿤 씨는요?
"아게로 말인가.. 지금 자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대신 전해 주지."
잔다고요? 그 쿤 씨가? 당신 옆에서? 이봐요. 그래뵈도 그 도련님은 당신 아들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하다니. 마음 먹고 아버지 노릇 좀 해 보려는 차인데 섭섭하군. 샤워하자마자 더 자고 싶다기에 재웠을 뿐이야.“
샤워라고요?! 이 노친네가 정말!!!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블랙 커피. 병원에서 못 했으니까 여기서 한 건데. 정리할 게 산더미니까 용건이나 어서 불어."
뭘 못 하..... 됐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테니 그 땐 직접 받으라고 해 주세요. 먼저 끊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연장자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하던데. 작게 혀를 찬 에드안은 불이 꺼진 아들의 휴대전화를 다시 협탁에 내려놓았다. 사실 깨 있었어도 아게로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홀대를 대하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을 터다. 왜인지 이런 취급이 익숙한 에드안에게도 특별한 감흥은 들지 않았다. 만나던 여인들이 그를 떠날 때마다 겪어와서 그럴까?
"쯧. 머리 말리고 자라니까."
달리 갈 곳이 없다해도 확신은 없었는데, 순순히 에드안을 따라온 아게로는 에드안이 새로 구한 전세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바로 다시 잠들었다. 퇴원을 서두른만큼 몸상태가 완전치 않은 탓이다. 일차적 원인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이지만 진단에 과로가 들어있다는 건 면역력이 바닥이라는 뜻과 같아서, 아게로는 어제 저녁부터 열이 높았다. 에드안의 침대에 웅크리고 잠든 아게로의 이마를 짚어본 침대의 주인은 결국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여하튼 열이라는 것도 하나의 생명 반응이니 스스로 살아있다고 알려주는 건 나쁘지 않지만, 에드안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얘기하던 그를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작 한 줌 밖에 안 되는 생명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지.
"의사도 하나 불러야 겠군. 요리사도 필요하고..."
생모를 꼭 닮은 누이가 워낙 몸이 약해서 에드안이 노심초사했던 것에는 비할 바가 못되겠으나 이미 발병이된 이상 아게로 쪽도 미덥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당장은 에드안의 손 안에 있으니 괜찮긴 한데 거리를 두겠다 약속해 버렸으니 그게 문제다. 계획이 없는 건 아니라도 실행할 방법은 아직인 채로 말부터 꺼내버린 것이다. 그 때의 에드안은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만큼 절박했으니 돌이킨다고 해서 지금과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진 않을 테지만.
"만만한 건 역시 V의 아들인가?"
에드안이 필요한 건 아게로가 거부감 없이 곁에 둘만한 사람이자,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보살펴줄 인물이었다. 부모를 닮아 심성이 곱다는 밤은 게중에서는 에드안의 접근도 쉬워서 일을 맡겨봄직 했지만 바쁜 몸이라는 게 단점이었다. 익셉셔널은 활동 중엔 하나같이 바쁘지만 밤, 아니 비올레는 그 중에서도 개인 활동이 가장 많은 멤버였다. 공백을 채울 누군가를 따로 준비해야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만약을 위한 협력자를 스스로 구해줄 수도 있으니 일단 첫 순위에 올려보자.
"어떻게 불러야 하나.. 아게로가 없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잠깐 살 집이라도 연예계 생활을 제외하면 노동이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에드안은 가구를 주문하며 가사 도우미를 비롯하여 그의 저택에서처럼 필요한 인물들도 같이 쇼핑했다. 이제 숨을 필요가 없으니까 스페인의 저택에서 필요한 것을 공수하기도 쉬워졌다. 돌아가면 본처인 마스체니와 또 다시 전쟁을 치뤄야겠지만 재결합 때부터 경제적인 독립은 유지해 온 두 사람이니 에드안의 재산권 행사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다시 살 생각으로 캐리어조차 끌고 오지 않았던 에드안이다.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연예인 생활을 했던 그에게는 천문학적인 재산이 있었서, 그간 위자료를 그렇게나 지급했음에도 늙어 죽을 때까지 한 몸 건사하기는 충분했다. 한국 생활을 준비하는 것쯤은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이란 뜻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의 체격에 맞는 옷을 구하기 힘든 관계로, 부득이하게 의류는 즐겨 찾아가던 디자이너들에게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스스로를 단장한 에드안은 그가 도달한 연령에 맞는 미학을 개척하는 인물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인물 답게 여전한 매력을 자랑했다. 입으로는 문란하다 욕하던 사람들도 막상 에드안의 실물을 보면 저절로 시선이 그에게 붙어버릴 정도로.
"일단은 점심부터 시키고.. 설마 오늘 집 보러 가겠다고는 안 하겠지?"
하지만 에드안의 매력은 아게로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에드안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이전에 비하면야 행복한 고민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에드안이 가사노동 중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그는 자신이 아게로의 간병을 맡게 된 것 자체는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묻는 수고가 없을 뿐더러 예상 밖의 수확도 많았다. 예를 들면 무대 의상을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아게로가 에드안이 사 준 옷을 입어 줬다던가 이렇게 얌전히 그의 집까지 따라와 준다던가. 물론 이건 화해의 효과라기 보다는 다분히 아게로의 무기력함에서 기인한 일이지만.
"음... 그런데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지?"
자고로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쓰려면 본인의 집 주소는 기본. 하릴없이 이번에도 V에게 도움 요청의 전화를 거는 에드안이다.
*
에드안이 어디 있냐고?
"쿤 씨가 거기 계신 것 같아서요."
한성을 비롯해서 감히 에드안과 통화를 하려는 사람이 전혀 없기에 고민하던 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처음 에드안이 몸을 의탁했던 것도 밤의 부모님이었으니 그들이라면 에드안의 새로운 거처가 어디인지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안이 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들었지만 부자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있는 밤은 진성의 이야기를 듣고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일정이 바쁘지만 어떻게든 시간이 나면 쿤에게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아.. 에디가 아게로 군을 데리러 간다고 했었단다. 잠시 한국에 머물 생각이라면서 맞은 편 집까지 계약했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거기 있겠지.
"맞은 편 집이요? 그 파란색 대문이 달린?"
그래. 하루종일 사람이 드나들던데 지금은 정리가 대충 끝난 모양이야.
"쿤 씨도 거기 계신 건가요?"
거기까진 모르겠구나. 따로 집을 본다고 했었거든. 하지만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바로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점심 때 주소와 함께 배달 어플의 사용법과 환자식에 대해 묻던 에드안을 떠올리면 심증이 더 굳어진다. 에드안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한사코 거부하던 아게로가 잠깐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걸 보면 에드안의 고민은 헛되지 않은 것이겠지. 아게로도 아게로지만 평범한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V와 함께 하는 모든 것을 즐거워하던 소싯적의 친우가 떠올라 V는 혼자 웃음지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린 소년 같았던 에드안이 드디어 진정한 어른이 되는 첫 걸음을 내딛었나보다.
신경쓰인다면 한 번 물어봐 줄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뭘 이 정도로. 아게로 군이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너도 컨디션 관리 잘 하렴. 한창 바쁘잖니.
"전 끄덕 없어요. 회사 분들이 잘 챙겨주고 계신걸요. 이따 쿤 씨도 뵙고 하게 저녁 때 집으로 갈게요."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
단지 아버지가 쿤의 이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취했던 밤은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본가 가까이에 에드안이 잠시 살게 되었다는 건 장기적으로는 불편할 수 있겠으나 당장은 그 곳에 쿤도 있다니까. 그리고 아무리 V가 에드안의 친우라도 밤의 아버지는 에드안의 편을 들기보다는 나쁜 일을 하려는 걸 막아줄테니까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는 면도 있었다. 당장은 출연보다 연습과 녹화 일정이 주류라 시간도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말이다.
"아... 뭘 사서 가면 좋지..?"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문제가 밤을 덮쳐왔다. 물론 밤의 목적은 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지만 초면인 에드안에게 빈 손으로 다짜고짜 찾아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V가 같이 가 준다면 좋겠지만 의외로 V는 밤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직접 나서는 게 드물었다. 적당한 선물에 대한 조언 정도는 줄 지 몰라도 성격상 밤과 함께 에드안의 집을 방문해 주지는 않을 터.
“검은 거북이!”
“라크 씨!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세요? 곧 컴백이신가요?”
언제 들어도 호쾌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환하게 밝힌 밤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익셉셔널의 멤버를 제외하면 기획사의 동료 중에서 유일하게 쿤과도 친분이 있는 라크였다. 그만큼이나 사교성이 좋은 그는 복도를 걸으며 연습생, 연예인, 스텝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누구에게나 인사 및 시비를 걸며 헤쳐나가는 중이었고, 말미쯤에 밤을 발견한 듯 했다. 에반켈 부장이 승진 직전에 기획했다던 비주얼 락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그는 타고난 건강미를 유감없이 발휘해 익셉셔널의 데뷔 기반을 닦은 연예인 선배이긴 하지만 그 바닥의 칼같은 위계질서와는 상관 없는 행보를 걷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쿤과 구면인 만큼 해외에 국적을 둔 사람들 특유의 오픈마인드의 영향이지 않을까? 아무튼 밤에게도 그는 좋은 선배이자 직장동료였기에 오랜만의 재회가 반가운 것은 당연했다.
“상을 준다니까 가 봐야지!”
“아아... 시상식 무대에 서게 되셨군요. 일정이 많이 겹치면 좋겠네요.”
“파란 거북이는 어디 있냐.”
“쿤 씨는 아직 회복이 필요하셔서 올 해는 회사에 나오지 않으실 것 같아요.”
“약골 거북이 같으니.. 허옇게 뜰 때부터 알아봤다.”
“하하...”
그건 쿤이 타고난 피부색이건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더니 라크의 입담은 거침이 없다. 모두가 일하는데 혼자 쉬면 재미있겠냐며 연락을 한다는 걸 에드안이 같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밤이 말렸다.
“그 늙은이가 뭐가 무섭다는 거냐, 너는!”
“아, 라크 씨는 에드안 씨도 알고 계시겠네요? 어렸을 때 자주 쿤 가문으로 놀러 가셨다고 하셨죠.”
“당연하지. 포도 거북이 쯤을 내가 무서워하겠냐?”
“저.. 그럼 저녁에 저랑 같이 쿤 씨를 만나러 가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선물 고르는 것도요.”
*
"열이 떨어질 때까지 집을 구하는 건 잠시 미뤄야할 것 같구나. 매물은 내가 먼저 골라둘테니 당장은 푹 쉬어라. 여기서는 네 방이 어느 곳이면 좋겠니?"
"방을 줄 거면 침대도 사 줘."
"그건 안 되지. 발작이 없어지면 다시 말하렴."
낫는 병이 아니라면서 무슨 수로? 불만이 가득해도 에드안과 입씨름 하는 것조차 피곤한 아게로는 몸 만큼이나 끓는 속을 삭힐 겸 호흡을 골랐다. 남다른 재력을 가진 아버지를 둔 덕에 채 10살이 되기 전부터 자신의 방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던 아게로에게 이제와서 아버지와 같은 침대를 쓰라는 건 확실히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하지만 어머니도 누나도 피곤하다며 잠든 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기에 에드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정 에드안과 자기 싫다면 사용인 중 하나를 골라서 함께 자라는데 아무나 얼굴만 보고 침대로 끌어들였던 아버지도 아니고 아게로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정말 그냥 잠만 자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일반적으로도 그건 상당한 친밀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들의 선택을 알기에 에드안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이 잔다고 네가 내 애를 가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변태 영감이..!!"
"저런. 머리 아프니?"
"누구 때문인데..."
"다 먹고 약 먹으렴. 어차피 약기운에 곯아떨어질 건데 그리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만."
병원의 처방전은 대체로 일반 약보다는 효과가 좋다지만, 체력까지 바닥인 아게로는 약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점심 때도 두 시간 반 가량을 비몽사몽했다. 이번에는 그러다 보면 잘 시간이니까 더더욱 상관 없을텐데, 에드안의 말투 때문에 골이 난 아게로는 약까지 버릴 기색이었다. 그러고 나서 밤을 새는 게 좀 더 현실적이지 않나?
"감기는 나아야 집을 보러 갈 것 아니니. 서울은 좋은 집이 금방 없어져서 웃돈을 주고 구해야할 판이던데."
"........"
"허튼생각 말고 푹 쉬렴. 그래야 하루 빨리 네 집에서 지낼 수 있지 않겠니."
"난 내일 당장이라도 갈 수 있어."
"여하튼 오늘은 무리라는 뜻이지."
에드안은 상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말로 이기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싫은 것이지만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아버지를 이기려면 논리라도 있어야했다. 내일 이침에 눈을 뜨면 멀쩡해지길 빌면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다. 퇴원 후에 거의 종일을 잔 거나 다름 없음에도 약을 먹고 나면 또 졸음이 쏟아지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당장은 이 편이 나으니까 순리에 몸을 맡기겠지만. 표정은 불만 투성이였지만 결과적으로 얌전히 아버지의 말은 잘 들은 셈인 아게로의 잠자리를 돌보는 것으로 좋은 아버지 되기 1일차를 마무리한 에드안에게도 오늘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자는 중에는 발견이 힘들어서 그렇지 발작은 급성 저혈압과 호흡곤란으로 시작된다. 혈압을 상시 모니터링 하는 게 혼자 앓는 건 막아줄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아들의 웨어러블 기기에서 해당 정보를 에드안이 실시간 열람할 수 있도록 조치도 했다. 나중에 아게로가 그 사실을 알게된다면 또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안전장치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에디. 밤이랑 라크가 저녁에 아게로 군 병문안을 가고 싶다는데.
게다가 이 일에서만큼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아게로의 편이 많이 않을 터다. 손님을 맞아야하니 에드안은 스페인에서 대려온 신뢰하는 사용인인에게 아게로의 감시역을 맡겼다. 8시쯤 온다고 들었는데 약속시간 10분 전부터 문간을 서성이는 머리통들을 보니 에드안이 일을 맡기기에는 확실히 수월할 것 같다.
“들어가려면 저걸 눌러야 할 것 아니냐!”
“잠시만, 마음의 준비를 좀 하게 해 주세요.”
“마음의 준비가 왜 필요하냐! 끄응.... 다 됐냐?”
“아직 10초도 안 지났거든요?”
“그럼 문은 언제 열어주면 되는 거냐, V의 아들.”
“네?”
쿤 에드안. 최고의 남자이자 최악의 남자. 뭍 여성들에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그는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남녀를 불문하고 칭찬 일색이었는데, 실물을 앞에 두고보니 밤도 그 화려한 미사여구들에는 전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밤의 아버지와도 별 차이가 없는 실내복에 가운 한 장만을 더 걸친 모습이었지만 소탈한 복장의 메이커가 궁금할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는 밤의 시선을 놓아주질 않았다. 얼굴만 놓고 본다면 쿤과 닮았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세월이 빚어놓은 카리스마와 풍채는 완전 다른 아우라로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한 세계를 평정한 숫사자의 모습이랄까.
“전기 거북이!”
“오, 너도 왔냐? 선물도 사 온거야?”
“이건 내 거다. 넘볼 생각 하지 마라.”
“나도 바나나는 됐거든. 사 올 거면 포도를 사 왔어야지.”
“저, 에드안 씨 선물은 여기... 이사 오셨다고 들어서요.”
“포도향 화장지? 한국엔 이런 것도 있나?”
“집들이 선물은 휴지라고 어머니께서...”
“파란 거북이를 내 놔라!”
“아게로는 지금 잔다. 어제부터 내내 열이 높았거든. 너희랑은 할 얘기도 있고 하니 깨우지만 않는다면 이따 잠시 보여주지. 들어와라.”
담 너머를 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던 에드안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밤과 라크는 이제야 완전히 바뀐 정원과 화장지 한 묶음을 들고도 천연 모델의 포스를 풍기는 에드안의 뒷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질은 보장 되어야 하지만 디자인 자체는 심플한 것을 선호했던 쿤과는 다르게 에드안의 방식으로 꾸며진 정원과 실내는 화려하고 웅장했다. 아무리 값나가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해도 에드안이 곁에 서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에드안의 것이니 당사자는 사물의 장식성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도.
“병원에 좀 더 계셨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퇴원시켜 달라고 한 건 아게로다. 이 곳에도 주치의가 따로 있으니 감기 정도는 걱정할 게 못 되지.”
“......하실 말씀이란 건..”
“아들 녀석 일이지 뭐겠냐. 콩알만한 녀석이 어른이 생각해서 말하는데도 양보가 없어. 왜 날 닮아가지곤, 쯧!”
“알긴 아는 구나, 거북이!”
“너도 똑같으니까 닥치고 있어.”
물론 라크는 누가 닥치라고 해서 닥칠 위인은 아닌지라 밤이 그를 달래며 마트에서 사 온 바나나가 약이었다. 남의 집에서 집 주인에게 권하지도 않고 앉자마자 바나나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라크를 보니 에드안도 포도가 땡긴다며 사용인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포도를 비롯한 과일안주를 주문하는 그다.
“쿤 씨를 본국으로 데려갈 생각이신가요?”
“원래는 그랬지만 지금은 됐어. 어디까지 갈 지 모르는 애라 우선은 달래놔야지. 당분간은 하고싶은대로 하게 둘 생각이다. 독립도 허락한다고 했어.”
“그럼 뭐가 문제냐?”
“아게로는 환자니까. 혼자 살게 두는 건 걱정되거든. 날 닮았으면 집안일도 못 할거고, 발작이 갑자기 시작되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잖아."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에드안은 물론이고 바나나를 까 먹기 바쁘던 라크까지도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밤을 놀란 눈으로 쫓았다. 의사도 아니고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닐텐데 마치 당장 어떻게 해 줄 수 있다는 듯한 당당함도 신기했지만 죽음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눈빛도 기대 이상이라 당황스러웠다. 아게로는 여러가지 의미로 에드안을 닮았으니 일단 스스로를 돌아보자. 내가 그렇게 불쌍한 척을 잘 하는가? 아니면 너무 의존적으로 살아서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체질인가?
“..룸 메이트를 찾아줬으면 하는데. 왠만하면 같이 자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친한 사람으로. 아게로는 이야기하지 않았겠지만 잠들어있는 시간이 그 애한테는 가장 위험하거든.”
*
“...........하아..... 네 아버지를 모셔가려고 왔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제가 그 분을 무슨 수로요.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A.밖에 없는데요.”
“하... 그럼 뭐냐. 네 어머니 이혼 서류라도 대신 전해 줘?”
“저는 독립한지 오래라서요. 두 분의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신경 껐답니다. 오히려 두 분 사이가 소원한 덕에 자하드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쿤 가문 녀석들은 하나같이 정말... 자립심이 넘치는 건지 성격이 꼬인건지.”
“성격이 꼬인거죠.”
“자랑 아니거든!!!”
별 일이 없어도 바쁜 연말연시. FUG Ent.를 발칵 뒤집어 놓을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해쓰으니, 하진성 이사의 손님으로 찾아온 묘령의 여성이 바로 폭풍의 핵이었다. 연속으로 쿤 가문과 맞떡뜨린 한성이 게거품을 무는 걸 가뿐히 한 팔로 받아 안은 에반켈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듯한 예감에 가볍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이제 하진성 이사가 사내에서 연애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못 할지도?
“여하튼 비지니스는 절차대로 진행해야죠.”
“으으, 회장님은 정말..”
“회장님께서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시니까요. 자하드님의 제안을 거절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저흰 명백히 도와드리는 입장인 거라고요?”
“지금 저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이사님!!!!”
“하... 나만큼 골치 아프지 않으면 좀 가만히 있어라 너도. 둘 다 나가봐. 연애을 하든 데이트를 하든 오늘은 상관 없으니까.”
“오케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성을 훌쩍 둘어 어깨에 둘러맨 에반켈은 걸음을 옮겼고 그제야 정신이 든 한성이 바둥대며 보기드문 활극을 연출했다. 닫히는 이사실의 문 뒤로 마른세수 중인 하진성 이사와 여전한 미모를 자랑중인 톱 모델 쿤 마스체니 자하드의 투 샷이 사라지고, 힘으로도 신장차로도 위치를 벗어나기기 힘든 한성은 목소리로만 상사에게 항의했다.
“에반켈님? 저기 에반켈님? 나갈 땐 나가더라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협업 계약이다. 자하드 쪽에서 먼저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의 해외 활동을 지원하겠다면서 제안해 왔었거든. 뭐 회장님 입장에서는 껄끄러워도 거절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에드안이 한국에 있으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야?”
“그럼 우리 회사가 쿤 가문과..?”
“뭐 다들 바쁘신 몸인데 별 일 있겠냐? 가끔은 오겠지만.”
“아니 그걸 맏습니까? 어떻게요? 에반켈님, 아니 부장님! 어떻게든 해 보세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