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신의 탑 - 밤 x 쿤] 영원의 단면

신의 탑/단편

 

 

 

 

 

 

 

 

 

애니메이션이라던가 라이트 노벨 같은 가벼운 장르에서 보건실이 왜 학생들 간의 밀회에 쓰이는 지 몰랐는데, 진학을 하고 보니 알겠다. 보건교사는 일주일에 딱 이틀만 이 학교에 근무하고, 다른 시간에는 근방의 중학교에 근무하기에 보건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긴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 곳의 침대였다. 쟁탈전이 치열한 부분인데다가 최근에는 전학온 미남이 자주 그곳을 사용하니 말이다. 정규 수업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하교하지 않고 보건실 근처를 맴도는 여학생들이 많은 것을 보니 아게로가 이만큼 기다린 것도 다 소용이 없어질 모양이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보건실을 운영하지 않기에 문단속을 하러 온 아게로는 별 수 없이 목소리를 내어 방해꾼들을 내쫓았다. 이어 그곳에 자리한 꾀병 환자들을 내쫓을 차례가 왔다. 진짜 환자는 귀가조치 되므로, 지금까지 보건실에 붙어있는 녀석들은 다 꾀병을 부리는 중이라고 봐야했다. 늘 아게로를 헷갈리게 만드는 전학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야, 스물다섯번째 밤. 일어나."

전학올 때부터 몸이 약하다고 했고, 실제로 낮에는 창백한 얼굴로 양호실을 찾곤 하는 그는 꾀병이라고 하긴 모호한 구석이 있었지만, 야간자율학습에는 또 대부분 참여했다. 옆자리의 아게로에게 못 들은 수업의 필기 노트를 빌리거나 숙제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쿤 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됬나요?"

"넌 날 알람시계로 쓰냐? 조퇴할 거면 교무실 가. 난 이제 여기 정리해야돼."

밤 때문에 몇 배로 사람을 쫓는 게 힘들어진 보건위원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밤은 빨리 일어나 주지 않고 구급상자와 이미 비어있는 침대부터 정리를 시작한 아게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기만 했다. 사람들은 급우에게도 존대를 하는 밤의 독특한 말버릇마저도 귀족같다며 칭찬했지만 아게로는 밤의 성격에 대해 하등의 칭찬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신경써서 밤이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려해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도움을 청할 때 매몰차게 거절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의 행동은 밤을 대할 때 날이 선 구석이 있었다. 물론 밤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을 대할 때도 그는 사근사근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지만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몇몇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를 볼때면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정작 밤은 그가 필요한 모든 것과 가까이 있는 그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너 아직도 안 갔어?"

"쿤 씨는 제가 싫으세요?"

"너랑 내가 싫고 좋고 할 사이야? 귀찮기는."

"싫고 좋고를 따질만큼 특별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뭐래. 아프면 나하테 치근대지 말고 교무실 가라고."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 곳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밤에 대해서 잘생겼다거나 예쁘다고 이야기했지만 아게로는 인간들이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긴 시간을 살아온 밤에게조차 경이롭게 여겨질 만큼의 미인이었다. 성격 때문에 뛰어난 외모가 묻힌다고들 평하지만 밤이 보기에 그건 복에 겨운 소리였다. 이 곳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적을 둔 만큼 예전부터 그를 보아왔기에 익숙해져 감각이 무딘 것이겠지. 몸에 지닌 색이 엶어 항상 희게 빛나는 가운데, 빛이 부족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체모의 푸른 빛이 드러나는 이 즈음의 아게로가 밤은 좋았다. 그 와중에도 더 깊게 푸른 것은 밤을 향한 눈동자. 밤이 살아온 붉고 검은 세계와 확연히 대비되는 푸르고 흰 빛깔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라 시간에 풍화된 밤의 마음 마저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따라 말이 많다, 너? 아쉽긴 뭐가 아쉽냐? 너 좋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은 쿤 씨가 아니잖아요?"

"...뭐야, 너."

밤은 말을 걸 때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서, 아게로가 그에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는 밤의 눈동자가 호박색을 띄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아게로가 지켜보는 동안에 그 투명한 금빛 동공이 붉게 변했다. 동시에 색채가 전하는 위협을 감지한 아게로는 뒤로 돌았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 쫓아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인물이 주변에는 없었으니까.

"못 도망칠 걸요? 인간의 움직임은 제 눈엔 너무 느리니까."

밤의 말대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뱀파이어에 대해 묘사하는 대로, 인간에 비해 월등한 운동신경과 악력을 지닌 밤은 아게로의 팔목을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그의 입을 막았다. 정체를 들키는 게 두렵지는 않지만 그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기에 쉬이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곳에 있어야만 밤이 아게로의 곁에 머물 수 있을테니까.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밤은 아게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공포감을 누르고 접근하려면 이런 과정이 한번은 필요하니 감수하는 것이지. 이성간에는 뱀파이어 특유의 위험한 매력이 잘 어필되는 편이라 수고가 적지만 아게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억지로 밤의 무릎에 걸터 앉은 꼴인 아게로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밤의 팔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딱하게도 인간인 이상 밤을 이길 수 없었다. 밤은 여유롭게 붙잡았던 팔을 감아 겹치며 아게로의 하복 셔츠에도 손을 댔다. 하복은 재질도 얇고 깃도 낮아서 단추 한 두개만 풀어내도 쉽게 목덜미를 드러내게 만들 수 있었다. 일을 할 때의 습관대로 뒤로 묶어 정리한 머리카락 때문에 윤곽이 깨끗하게 드러난 목선이 유혹적이었다. 입술을 축이는 대신으로 그 목선을 핥아올린 밤은 겁먹지 말라는 듯 두어번의 입맞춤을 남긴 후에야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프지도 않을 거고요."

흡혈을 당했던 일이 불편한 기억으로 남지 않게끔 뱀파이어는 피를 취할 때 혈액손실에 상응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아게로에게는 밤이 특별히 더 신경을 쓸 테니까 송곳니가 살을 꿰는 통증조차도 느낄 틈이 없을 터였다. 호감이 있는 상대는 밤에게도 꿀보다 단, 최상의 풍미를 가진 혈액을 제공해 줄 테니까 밤도 마땅한 배려를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다녀왔습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보이는구나, 비올레. 무슨 일 있는 거냐?"

"진성 씨... 쿤 씨가 오늘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좀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할 사이 같았으면 그렇게 다짜고짜 물어 뜯으면 안 되었던 거 아냐?"

"화련 씨도 계셨군요."

"물어 뜯어? 비올레가?"

"옆 자리 꼬마를 건드렸다고 했었잖아요. 의식을 잃어서 데려다 주고 왔다고."

"아.. 오랜만의 식사였으면 실수할 수도 있지. 너무 마음쓰지 마."

뱀파이어들은 인간처럼 무리지어 사는 습성은 없었다. 먹잇감들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아가려면 아무래도 다수 속의 소수인 게 이점이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한 약간의 교류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는 그나마 성격이 가장 유하다는 이유로 밤의 집은 꽤 자주 그들 사이의 교류회장으로 이용되곤 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쉽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정도라면 실수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약해."

"그렇군요.. 그럼 쿤 씨는 절 싫어하게 될까요?"

"그렇게 마음에 들면 데려와서 사육하지 그래? 불편하게 둘러 가지 말고."

"제가 원하는 건 사육이 아니에요."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취향의 풍미를 가진 인간을 사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르면 인간은 절대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걸 비올레,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떠 보는 화련이 비올레는 조금 불편했다. 뱀파이어들이 으레 그렇 듯 하나의 눈을 잃었어도 타는 듯한 붉을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충분히 매력적인 그녀는 집 주인인 양 탁자의 정 중앙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인 것 처럼 구는 진성과는 확연히 다른 스탠스.

"저는 인간들처럼 쿤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그럼 이빨부터 들이대면 안됐다는 얘길 하는 거잖아. 아무리 통증이 없어도 그런 경험을 하면 인간은 겁 먹는다고."

"하지만 확인해야 했는 걸요."

"네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 감정을 먼저 확인 하란 말이야. 어차피 우린 시간 많잖아?"

".....제가 잘못했군요. 사과하러 가야겠어요."

"이래서 연하는 싫다니까. 직진이 다 정답인 줄 알고."

화련의 행동이나 말투가 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옳다는 것만은 인지한 그는 나서려던 발을 멈추었다. 이어 끼쳐오는 담배연기. 밤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성이 잠시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냈다.

"천천히 가자고.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

"그리고 난 네 그런 점이 싫지 않아. 인간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제부터 잘 하면 되지. 후회할 시간도 없다고.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아."

확실히 인간은 뱀파이어에 비해서는 여리고 순간만을 사는 생물이지만 닮은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는 선배들로서 전해준 가르침은 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랬다.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도 알았고 아게로의 시간이 자신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밤의 일은 그저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기회는 올 테니까.

*

'미치겠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에 웅크린 아게로는 몇 번을 고민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난데없이 학교에서 쓰러졌다며 낯선 친구의 등에 엎혀 돌아온 이후, 별 이상이 없다는데도 가만히 두질 않는 식구들의 열성적인 간호도 골치아팠지만 주말이 지나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아버지고 형제자매고 할 것 없이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학교를 쉬어도 좋다고 했지만 철두철미한 성격의 아게로에게 이런 꾀병 같은 상황은 불쾌감만 상승시켰다. 원칙주의자까지는 아니어도 자기관리에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A.A! 너 오늘 학교 안 갔다며?"

"나가, 변태."

"내가 뭘 했다고 변태냐. 쉬는 김에 형 좀 도와줘라. 누워만 있으면 몸 더 상해. 여름인데 덥지도 않냐?"

"꺼지라고."

남자 형제들 간의 예의범절은 이미 실종된 지 수 세기라, 아파서 누워있다는 동생 방으로 쳐들어온 하츨링에게서는 눈꼽만큼의 죄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이 쉰다는 말에 게임 노가다를 시키러 온 참이니 아게로가 더 기대를 해 무얼할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도 방해만 될 게 뻔해서 쫓아내려 했건만 하츨링은 꿋꿋하게도 아게로의 침대로 기어올라왔다.

"나 이제 구독자 천 명 넘었거든? 이 참에 노 저어야 한다고. 잘 되면 형아한테 용돈도 받고 얼마나 좋아?"

"용돈 타 가지나 말아라, 백수변태."

"형님한테... 누구랑 싸웠어?"

"너랑 싸우는 중이잖아, 이..!!"

"팔 안 부러졌냐? 컨트롤 좀 해야 하는데."

"멀쩡하다고!!"

"설마 학폭 같은 건 아니지 너?"

기어코 이불 속에서 아게로를 발굴해 낸 하츨링은 동생에 대한 것인지 노동력에 대한 것인지 모를 걱정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멍이 빠지는 중이라 면적이 늘어난 것이겠지만, 누가봐도 손자국인 게 분명한 왼팔의 상처가 눈에 띈 탓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맞고 다닐 것 같아?"

"그럼 덮치려고 했냐? 누가 이랬어?"

"그냥 꺼지라고! 마리아! 이카르디! 누가 이 변태 좀 치워줘!!"

하츨링의 머리 속에 게임과 유튜브 말고 다른 게 들어있을 리가 만무함에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아게로는 하츨링의 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츨링이 아게로보다 네 살이나 많긴 해도 키 차이는 별로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밀어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급기야 지금 시간에 학교나 직장에 나가지 않았을만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다행히 몇몇이 달려와 주었다.

"하츨링! 동생이랑 싸우지 말랬지!"

"싸운 거 아니거든? 얘 누가 이랬어. 친구가 아니면 아버지야? 가정폭력?"

"다 아니라고 했잖아!! 남의 말을 어느 구멍으로 듣는 거야??"

"진짜로 팔은 왜 그래? 다쳤어?"

"별로 아프지도 않고 괜찮으니까 좀.. 머리 아프단 말이야."
"...일단 조금만 더 자. 밥이랑 약 먹어야 되니까 한 시간쯤 있다가 깨워줄게."

한 시간 가지고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당장의 최선을 받아들인 아게로는 눈을 감았다. 피를 빨렸으니 아게로에게는 빈혈이라는 진단이 놀랍지 않았지만 남학생에게 빈혈이라는 병이 흔하지 않은데다가 의식을 잃을만큼 급성으로 발현된 점, 아게로가 성장기의 청소년이라는 점을 의사가 강조한 바람에 집안에서는 형제들과의 먹이쟁탈전에서 패배한 가여운 생물 취급 당하게 되었다. 원래 입이 짧은 편이라 식구들이 과량의 식사를 강요하는 것도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같은 반 흡혈귀에게 물렸다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린 상처는 없던데.'

붙잡혔던 팔은 엉망이 됐어도 막상 밤의 송곳니가 박혔던 자리는 깨끗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겠지. 여하튼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아게로는 밤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나눠줘야하는 입장이 된 걸까?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게 무슨 친해지는 거야!'

맨살을 핥아 올리는 혀, 키스, 이어 휘몰아친,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감각. 회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

고민은 깊었지만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지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아게로는 다시 등교를 시작했다. 밤도 해치진 않겠다고 했으니 피만 주면 졸업까진 시켜주겠지 싶어진 것이다. 사교육에 신경쓸 만큼 자식 농사에 관심이 없는 이버지를 둔 탓에 쉰 만큼의 진도를 따라잡아야 하는 아게로를 이수가 흔쾌히 필기도 빌려주고 도와준다고도 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오늘부터 운동해라,귀치장. 운동을 안하니까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너처럼 스포츠맨인줄 아냐?"

"건강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아주 저주를 하는구나.."

"운동해라, 허옇게 뜬 파란 거북이!"

"넌 또 왜 왔어, 악어!!"

옆 반에서까지 찾아와 성대한 환영회(?)를 해 주시니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아게로가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도 실상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같은 반 여학생들까지도 밤에게 쥐어주던 사탕이나 작은 초콜릿을 아게로에게도 일부 나눠주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수업 시간마다 직언이든 돌려 말하든 교사들까지 안부인사를 새로 전하니, 아게로로서는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른 의미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진짜 아팠으면 이렇게까지 부끄럽다거나 자존심 상하는 느낌이 아니었을텐데 고작(?) 뱀파이어한테 물려서, 몰아치는 쾌감에 정신줄을 놓은 거였으니. 이제는 밤이 뱀파이어라는 걸 알았으니까 낮에 비실대도 절대 걱정하지 않을 거고, 보건실에 남아있으면 인류의 안전을 위해 그냥 격리해 버릴 테다. 무시무시한 결심을 곱씹는 아게로를 알아서인지 밤은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는게 보임에도 차마 다가서진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보건실에 안 가도 되겠어?"

"네. 요즘은 컨디션이 좋아서요."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식사를 챙기듯 피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본연의 영양 공급원인만큼 흡혈행위 뒤에는 확실히 몸에 활력이 돈다. 이전부터도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편의를 선택하는 기분으로 보건실을 찾았었고. 아게로의 피를 마신 후라서 그런지 최근의 밤은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게로의 건강과 맞바꾼 것 같아서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더해서 한쪽 팔에 붕대까지 감고 나타난 아게로를 보니 밤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저기, 쿤 씨."

밤이 드디어 둘이서 이야기 할 시간을 갖게된 건 일과를 마치고 보건실 정리라는 본연의 임무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 아게로를 따라 나선 후였다. 같은 장소에서 또 밤을 맞딱뜨린 아게로는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기에 밤은 차마 보건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서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멋대로...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욕할 뻔했네. 기척을 좀 내라고! 깜짝 놀랐잖아."

"피하려고 하실 것 같아서.."

"이게 더 문제거든!!"

"아... 죄송합니다. 너무 경계하진 않으셔도 되요. 애초에 전 피를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거든요."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할 말이 아주 없어진 밤은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이미 잔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아게로를 배려하려고는 노력하고 있지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야 다음이 있는 건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불만 가득한 아게로의 표정을 보면 사과를 더 한다고 밤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제 나름의 확인이었어요. 뱀파이어는 호감이 있는 상대의 혈액을 특별히 감미롭게 느끼거든요."

"그래서 날 먹이로 쓰겠다고?"

"아뇨. 확인했으니까 쿤 씨가 원하면 다시는 손 대지 않을게요 . 그냥 지금까지 처럼 친구로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난생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그 이야기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 속에 위협의 빛은 없었다. 사과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종일을 기다린 거라면 확실히 연극이리 보긴 어려울지도.

"안 될까요?"

"너 하는 거 봐서."

힘으로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한 상대다. 저쪽이 먼저 안전을 약속해 주는데 그걸 거부해서 어쩌겠는가. 아게로의 애매한 대답에도 뛸 듯이 좋아하는 밤을 보며 언젠가 어린 시절에 길렀던 강아지를 떠올리던 아게로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오늘은 야자시간에 밀린 필기를 다 옮겨야 한다. 할 일이 많으니 어서 정리를 마쳐야지.

*

"쿤 씨. 이거 드세요."

"...뭐야?"

"시금치 빵이요. 철분 보충에는 시금치가 제일이라고 해서 만들어 봤어요."

"만들어? 네가?"

"네. 이래뵈도 왠만한 음식은 다 잘 하거든요."

자신은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1차 어필이 먹혔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밤은 이전보다도 아게로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음식에 무슨 관심이 있겠냐 싶었지만 한 입 크기로 정갈히 썰어 담은 빵은 건강해보이는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맛있었다. 병 주고 약 주는 작태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손을 뻗을 정도로.

"신기하네. 넌 이런 거에 크게 관심 없을 거잖아."

"관심 많아요. 쿤 씨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맛있는 걸 주고 싶거든요."

교실에서는 주목받기가 쉬워서 밤의 정체에 대해 애둘러 말하려 애쓰는 아게로와는 다르게 당사자인 밤은 상당히 직설적인지라 아게로는 갑자기 맛있게 먹던 빵이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아게로에게 줄 간식이었으니까 마실 것까지 신경써서 가져온 밤에게는 그 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설마 너희 집으로 오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럼 좋지만 쿤 씨가 싫어하실 것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랑은 자주 교류 하시나요?"

"교류..... 다른 데 놀러가긴 해도 집까진 잘 안 가지. 야자 끝나면 시간도 없고... 어쩌다가 피씨방이나 플스방? 가끔 오락실이나 코노정도? 보통은 먹으러 다니지만. 분식집이라던가."

"모르는 게 굉장히 많네요... 그런 건 학교에서도 안 가르쳐 주던데."

"애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노는 걸 가르쳐 주겠냐."

전학 올 때부터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설정이 붙어있었던 밤은 이 곳에서의 생활, 아니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뱀파이어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심신에 큰 상처를 입으면 오래 잠들어 있기도 하는데 지금의 밤은 막 동면에서 깨어난 참이라 모르는 것이 많다고 했다. 인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배우기로 했다던가. 부모라할 만한 존재는 멀리 있어서 주변의 뱀파이어들과의 교류로 필요한 정보를 모은 후 내린 결론이 그렇다고 했다. 무언가 어색하게 보이리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므로 들켜도 상관없다는데, 아게로가 보기엔 그 조차도 본인의 착각이지 싶었다. 무기를 구할 길이 없는 아게로야 뱀파이어라는 그에게 겁을 먹었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요즈음은 종족을 밝혔다가는 실험용으로 포획될 것 같으니.

"공부할 필요 없으면 야자 빼고 놀러다녀. 그게 너한테 더 도움이 될 걸?"

"쿤 씨는 진학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그래야 집구석에서 나올 수 있잖아."

"그런 이유라면야 제 집으로 오셔도 되는데요."

이게로는 아직 밤을 두려워하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증거로 아게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을 짚고 산 밤을 흘겨볼 뿐 대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밤의 공간으로 그가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주지 않는 곳이라면 가능성이 있기에 밤은 오늘부터 아게로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

뱀파이어는 신체만이 아니라 뇌도 인간에 비해서 뛰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오랜 시간동안 살아왔다는 게 헛말이 아니라서 그간의 경험치로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거나. 수학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밤은 한 달 여만에 그에게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금방 진도를 따라잡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업을 빠지는 바람에 성적이 나빴구나하고 아게로조차도 혼자 착각할 정도?

"쿤! 오늘 일찍 끝나니까 이따 분식집 가자! 하츠가 닭꼬치 쏜데."

"쏜다고 안 했다! 너 한테만 사는 거야."

"에이, 하는 김에 좀 더 힘 내 보십쇼, 하츠님. 남자 둘이 가긴 그렇지 않냐?"

"남자 셋은 괜찮고?"

"피자집도 아닌데 뭘 그래. 아님 밤까지 넷?"

"입 더 늘리지 마라!!"

"하하하, 제 꺼는 제가 살게요, 하츠씨."

"그래! 너도 밤을 보고 배워라, 귀치장."

"하? 내가 뭐랬다고 쟤를 보고 배우래? 여태 한 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단지 야간자율학습이 일찍 끝나는 것이라지만 주말에는 들뜬 분위기가 아침부터 느껴진다. 이런 날에 소소한 약속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아게로가 말했던 여러가지 놀이가 이 때 이루어진다는 걸 눈치챈 밤도 은근슬쩍 그의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놀이문화인만큼 밤에게도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보지 못하는 아게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고, 또 잘 하지만 코인 노래방에서는 좀처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친구들에 비하면 입도 짧은 편이라서 보기보단 음식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 밤과는 궁합이 좋다. 물론 그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밤은 눈치를 보는 편이다. 아게로는 솔직한 성격이 아니라서 밤으로서는 그의 기분을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친구로는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윽.."

그리고 밤이 그간 쿤에 대해서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바로 이매것이었다. 그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살과 있고 그 중 둘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것. 둘 다 아게로와 무척 닮은 여성으로, 누나 쪽은 수험생이고, 한 학년 아래의 동생이 오늘도 찾아온 키세아였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아게로의 상처는 이제 씻은 듯 사라졌지만, 그 때의 일로 아게로가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그녀들이 한 번 아게로를 불시에 찾아왔던 일로 밤도 그들을 알게 되었다. 수험생이라고 하지만 아게로의 누나는 연예인으로 데뷔해 출석률이 썩 좋진 않은 모양이라 오빠의 못미더운 설명에 의심이 더 커진 키세아만이 마치 의무처럼 이렇게 종종 아게로를 찾아왔다. 아게로만 해도 밤이 첫 눈에 반할 정도의 미인이였던 지라 예상은 했었지만 그녀들이 등장할 때마다 급우들이 연예인 유전자는 다르다며 수군대는 걸로 보아 아게로의 형제들 중에는 연예인으로 데뷔한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왜 피하세요, 또!"

"너 내가 그런 말투 쓰지 말랬지?"

"옆에서 멀쩡하게 높임말 쓰는 친구분도 계신데 저한테만 너무하시네요."

"밤이랑 너랑 같냐.."

"아무튼 오늘도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건 그냥 내가 실수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러니까 '실수로' 오라버니의 가녀린 몸에 손자국을 낸 ㅇㅇ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나라고 나! 주어를 들어 좀!!"

아게로가 고생하고 있는 것이 너무 눈에 보여서 진범인 밤에게도 그녀의 방문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게로의 여동생이니까 밤으로서는 지켜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이므로 타인인 밤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게로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실직고 하는 것도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밤을 말린 것도 아게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예인이긴 해도 키세아(뿐만 아니라 사실 집안 식구들 전부)는 세간의 평판에는 관심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들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성격을 지닌 키세아는 만약 아게로가 의자에 부딪혀서 멍이 들었다고 하면 학교의 모든 의자를 부숴놓을 위인이라는 것이다. 오빠인 아게로도 쉽게 제압했던 밤이므로 여성인 키세아라면 더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밤은 생각했지만 아게로가 자신을 염려해준 것이 기분 좋아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었다. 이제와서라도 설득을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는 목 끝까지 차 올랐지만 아게로와 먼저 이야기하는 게 아무래도 우선이겠지.

"그리고 주말이라고 또 친구분들과 놀다 오려는 것 같으신데 오늘은 너무 늦지않게 돌아오세요. 언니께서 오랜만에 집에 오시거든요."

"알았어. 너나 많이 늦지 말고."

"언니께서 오시는데 제가 늦을 리가 있나요. 저는 저녁도 같이 먹을 거라고요."

"그래."

집을 나오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기에 처음에 밤은 아게로를 괴롭히는 형제라도 있나 했었는데 보면 볼 수록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밤이 그들을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형제들 이야기가 나올 때 아게로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다. 귀찮음을 호소하긴 해도 아게로도 그들을 꽤 아끼는 것 같았다. 그냥 혼자만의 공간을 한 번 가져보고 싶은 걸까?

"어, 이러면 닭꼬치 못 먹는 거야, 쿤?"

"아니. 하츠녀석이 산다는데 먹고 가야지. 어차피 집엔 10시 전에만 들어가면 돼."

"아까도 말했지만 십이수 것만 사 줄 거다. 너는 네 돈 내고 사 먹어라, 귀치장."

"그러고보니 누나가 용돈 안 줘? 아니, 넌 왜 데뷔 안 하냐? 키세아도 곧 데뷔라더니."

"누나 돈을 내가 왜 뺏어 쓰냐. 뺏으려면 아버지 돈을 뺏어야지. 아, 맞다. 나 정리. 아무튼 이따 봐."

보건실 정리를 방금 생각해 낸 아게로가 열쇠를 집어들고 사라지자 모여있던 무리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밤의 친절한 성격을 칭찬하며 농담처럼 아게로에게 성격 좀 고치라고들 했지만 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아게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사교성이 좋기에 밤의 인맥 또한 아게로가 구심점이라는 걸. 아게로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기에 밤이 키세아처럼 아게로와 닮은 이성을 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본인 마저도 모르는 걸까?

*

시금치 빵, 캐러멜, 그리니시, 다쿠아즈에 이어 오늘은 레몬 마들렌이다. 집안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요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사 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제과품을 만들어 오는 밤이 놀랍기만 한 아게로는 여전히 얻어먹는 재주 빼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이제 괜찮다고 해도 자꾸 아게로를 위한 간식을 준비해오는 밤에게 미안해서 아게로도 요리에 도전을 해 볼까 했으나 부엌에 발을 들이자마자 포기했다. 식기를 빼면 다른 주방용품은 어찌 쓰는지를 모르겠고, 일단 재료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형제들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겁을 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냥 피 값이라 치고 얻어먹기로 마음을 굳혔달까. 맛있다고 생각을 해도 기본적으로 군것질이 입에 맞지 않는 아게로는 많이 먹진 못하지만 사람들이 요리 잘 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이유에 대해서는조금 알 것 같아졌다.

"단 건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 덜 달게 만드려고 했는데.. 좀 입에 맞으세요?"

"너 야자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요리 유튜브 찍는 게 어때? 대학 안 가도 떼돈 벌 것 같은데."

"그럼 쿤 씨를 자주 못 보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돈도 아쉽지 않을만큼은 있는걸요."

저는 뱀파이어니까요.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밤의 모습에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순간이 떠올라 아게로는 시선을 피했다. 밤의 약속을 믿는 건 아니지만 친구로 지내면서 공포감은 많이 옅어졌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때는 쟤도 급했겠지 싶을 만큼? 문제는 같이 떠오르는 황홀한 감각이었다. 목선을 핥는 혀 끝과 이어 퍼지던 아뜩한 쾌감이 순간 다시 전신을 훑는 듯 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손으로 입술을 덮었다. 그러니까, 그건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아예 사귀는,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어야 가능한 관계라니까?

"쿤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 더 먹어도 돼?"

"당연하죠."

얼굴도 잘 생겼고, 인기도 많고, 요리도 잘 하는 데다가 오늘 재산까지 많다는 사실을 밝힌 여성들의 완벽한 이상형, 스물다섯째 밤은 왜 자기 좋다는 여학생이 아니라 아게로에게 그런 고백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아게로는 몰랐다. 임기응변으로 택한 과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조차 말이다.

*

입이 짧은 이유 중에 하나가 체증에 걸리면 심하게 앓게되기 때문이었는데 그걸 잊었다. 덕분에 보건위원을 하고 지낸 이래 최초로 자신이 보건실 신세를 지게 된 아게로는 저녁을 먹기 전에 정규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러 밤이 내려왔을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좀 괜찮으세요? 담임 선생님께서 야간자율학습은 빠져도 된다고 하셨어요. 원래 몸이 약하신 건가요?"

"..아니.... 전혀. 한 번 아프면 끝을 봐서 그렇지 자주 아프진 않아."

"그것도 건강한 건 아니지 않나요. 걱정이네요. 가뜩이나 인간은 너무 약한데. 정리는 제가 거의 다 했어요. 쿤 씨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혼자 집에 가실 수는 있겠어요?"

차마 밤의 요리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점심까지 먹은 이후에 그 날의 아침까지 전부 토해낸 아게로는 오후 수업을 죄다 건너뛰고 진통제와 잠을 택했다. 내일이면 키세아가 애꿎은 급식 업체를 바꾸겠다며 길길이 날뛸 게 눈에 선하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진통제라는 게 당장을 통증을 덜어주는 약이지 올바른 치료법은 아니다보니 아직까지도 속이 쓰리다. 속을 비웠으니 기분이 영 아니긴 해도 더 게워낼 건 없겠지만. 자신이 불편한 건 잘 못 참는 성격이었는데 밤한테 빵 쪼가리를 못 얻어먹게 되는 것이 두려워 이 지경까지 왔나 싶다가도 점심 탓을 할 수 없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게 나은 걸 보니 아게로도 슬슬 인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건 보통 그런 의미였지 하고.

"응. 이제 괜찮아. 너한테 헌혈 못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그 때도 쓰러지셨던 분이 할 말인가요."

이제 낮이 최고로 길어질 즈음이라 그런지 일과가 끝났음에도 남아있는 햇살이 풍경을 붉게 물들였다. 어째서인지 속상한 표정인 밤도 아게로의 눈에 붉게 비쳤고, 모로 누워 밤을 올려다보는 아게로도 밤의 눈에 붉게 비쳤다. 그건 아게로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풍경일지 몰라도 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항상 밤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듯 했던 색체가 붉은 색으로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본래의 목적이 무색하게 아게로의 곁에 걸터앉은 밤은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저는 두 번 다시 쿤 씨의 피를 마시지 않을 거에요."

"사실 그거 엄청 기분 좋긴 했어."

"네?"

"계속 먹어도 된다는 얘긴 아니고 가끔은 할 만 하겠다 정도?"

"어...."

"그러니까 너 하는 거 봐서 한다고 했잖아. 해 볼래? 친해지는 건지 뭔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라 했던가? 그럼 허락이 떨어진 지금은 밤이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일 터. 얼떨떨했던 표정이 활짝 웃는 얼굴로 덮여갔다. 벌어졌던 거리를 다시 이마를 맞대며 좁혀온 밤은 눈동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웃음꽃을 피워냈다. 붉게. 그리고 찬란하게.

"당연히 저는 대환영이에요."

창 밖의 석양이 제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밤이 지닌 영원에서 지금은 푸르르게 남을 것이다. 그래, 영원의 단면은 분명 푸른 빛이다.

 

 

 

 

 

 

 

 

 

 

 

 

 

이번 들을 트친이신 해물탕님(@mulT_ang)의 리퀘스트였습니다.
이 뒤는 물탕님의 연성대로...
여러분 물탕님의 갓연성 꼭 보세요 ㅠㅠ

뭔가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다 담지도 못했고,
분량조절 실패는 점점 고질병이 되어가는 군요 ㅠ
이대로 계정 두 개 운영 잘할 수 있을지...
좀 더 화이팅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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