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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8

신의 탑/Exceptional









 "하하하.. 안녕, 비올레?"


 10시면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지만 일이 없는 날의 쿤이 깨어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 되는 시간인 가보다. 분명 먼저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지만 받지도 않고 답장도 없었다는 점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왕난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문이었는데 방송에서 보던 표정 과는 완전 다른 얼굴로 문을 열어주는 비올레가 왕난은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왕난이 쿤과 비올레가 함께 사는 쿤의 새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된 건 사실 전적으로 쿤의 탓이었다. 여전히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아진 건 아니지만 FUG Ent. 자체를 위협하는 자하드의 행보에서 무언가를 읽은 건지 쿤은 자하드가 한국 에이전시의 사장으로 선택했던 그의 사생아, 왕난을 빼내어 자신과 합작 법인을 설립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성과 긴 면담을 가진 끝에 내린 결정이니 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는 할 터. 여하튼 업무 협의를 위해 주기적으로 쿤을 찾아오는 왕난을 막지 못하게 된 것 때문에 둘의 시간을 방해받는 기분인 밤은 왕난을 반갑게 맞아줄 수가 없었다. 왕난이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서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더더욱.


 "쿤은 아직 자나봐? 올 때 이런 거 좀 사 오라길래... 이 정도면 되겠지?"

 "아, 왕난씨한테 부탁하셨던 건가요? 충분할 것 같은..."

 "보이길래 같이 샀어. 전에 보니까 너 그거 좋아하는 것 같더라."


 일회용품을 잔뜩 부탁하기에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우연히 발견한 쫀디기도 밤을 위해 몇 개 주워담았더니 아니니 다를까, 간식 냄새를 맡은 강아지처럼 밤의 표정이 말갛게 개였다. 아무리 이 동네가 수준이 높아서 연예인에 대한 메너가 보통보다는 낫다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마트에 아이돌이 장을 보러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간식거리에 약한 밤은 왕난이 사 온 불량식품들 마다 꼬드김을 당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가 바로 저 쫀디기였다. 마치 신세계를 본 듯한 표정으로 왕난이 가르쳐준 대로 세로로 찢은 쫀디기를 토끼가 풀 씹듯이 오물오물하는 그 표정을 왕난조차도 잊을 수가 없더랬다. 그래서 보인 김에 집어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홀대하던 차가운 표정은 간 곳이 없고 구세주를 보듯 한다. 그러면 또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내가 이거 더 맛있게 먹는 방법 알려줄까?"








*







아침형 인간인 밤과는 다르게 쿤은 늦게 잠드는 게 훨씬 바이오 리듬에 잘 맞았다. 더해서 해외 촬영으로 시차 적응마저 필요한 시기이다보니 답지 않게 계획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다. 집들이 준비에 필요한 물건들이 있어서 왕난에게 일찍 들러 달라고 얘기까지 해 놓고 말이다. 밤의 자리에 온기가 없는 걸 보면 그는 한참 전에 일어난 모양이니 왕난이 문 밖에서 떨고있거나 했을 리는 없겠다. 급한대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 정리하고, 실내복 위에 가디건만 걸친 채 1층으로 내려왔다. 탄 것도 같고 단 것도 같은 묘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요리를 꽤 잘 하는 밤이 음식을 태울 리가 없을텐데 잊은 게 있나 싶어서 부엌으로 직행하니,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며 쫀디기를 뜯는 두 남정네가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쫀디기는 역시 구워야 제맛이라니까?"

"그러게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바삭하면서도 엄청 달고 고소해요."

"요즘 나오는 옥수수 쫀디기도 아주 별미라고. 내가 다음에 보이면 한번 사 올게."

"쫀디기에도 종류가 있었어요?"


쿤이 기억하기로도 값이 꽤 나가는 물건이었던 유명 가구회사의 포셀린 식탁에 앉아 하는 일이 겨우 구운 쫀디기 먹기라는 것도 기가차는데, 대화의 주제마저도 하찮다. 에드안과 같은 연배인 자하드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활비 걱정은 더 이상 않게 해 줬는데도 왕난은 왜 아직도 불량식품의 홍보대사란 말인가.


"자왕난."

"헉. 안녕, 쿤. 좋은 아침."

"아침은 무슨. 난 집들이를 도와달라고 했지, 집을 어질러달라고 한 적 없는데?"

"에이, 많이 안 어질렀어. 쫀디기 봉지만 치우면 돼."

"대체 둘이 그 불량식품을 얼마나 먹은 거야? 그래가지고 점심은 먹겠어?"

"불량식품이 아니라 그냥 과자지. 영어로 스낵."

"평생 그것만 먹게 해 줄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주섬주섬 빈 봉지들을 손에 모으며 저렴한 무릎을 광고하는 왕난을 보면 자하드의 피는 에드안의 유전자에 비하면 한참은 못 한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자하드의 사생아로 핏줄 빠고는 자하드와 관계 없는 삶을 살아온 왕난이라지만 둘이 어쩜 이렇게 다르냔 말이다. 유전보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증거 같은 건가? 왕난과 밤이 뒷수습을 하는 사이 물 한잔을 들이킨 쿤은 우선 왕난에게 부탁했던 일회용품들을 확인했다. 왠만해서는 쓰지 않는 게 좋다지만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밤에게 전부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리를 못하면 설거지라도 할 줄 알면 좋겠는데, 가사노동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쿤은 그 분야 한정으로 일을 훨씬 크게 벌이는 재주가 있었다. 세탁기를 세제결정 덩어리로 만든다던가, 싱크에 구멍을 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파괴적 재능 덕에 밤이 집안일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니 왠만하면 일을 줄이는 방향으로 하고 싶었다. 게다가 요즘은 파티용으로 화려한 다자인의 일회용품들도 즐비해서 모양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 누구누구 오는 거야?"

"익셉셔널 멤버들, 너, 악어."

"끝?"

"어."


조촐한 멤버지만 익셉셔널의 요즘 몸값을 생각한다면? 계산기를 두드려본 왕난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제야 장바구니의 내용물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접시와 컵, 식기와 테이블매트 등이다. 딴에는 파티 분위기를 낸다고 풍선과 가렌드도 사왔는데, 쿤에게는 매몰차게 무시당했다. 쓰레기를 많이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디서 가져온 지 모를 핸드 펌프로 풍선을 잔뜩 불고 있는 밤을 왕난은 무시해야 하는가 말려야 하는가? 밤은 분명 왕난을 기껍게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취향만큼은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모양이었다. 물론 쿤은 대체로 밤에게 무르지만 이렇게 되면 취향은 판이하게 다른게 되는 건가?


'하긴. 다른 걸 좋아하니까 서로를 좋아하겠지?'


쿤은 왕난을 탓할 때에도 공범이나 다름 없는 밤은 걸고 넘어지지 않는다. 본인 입장에서는 껄끄러웠을 룸메이트도 상대가 밤이니까 받아들였다. 밤의 입장이 곤란해 지는 게 에드안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싫은 것처럼. 쿤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는 속쓰린 일이지만 왕난은 지금 상황을 애써 비틀고 싶지는 않았다. 쿤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사람을 믿고, 그와 감정을 나누는 경험 자체가. 쿤은 원래가 신중한 사람이긴 했지만 사람과 관계된 문제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당장의 좁은 인맥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럼 치킨 네 마리에 피자 세 판 시키고, 탕수육 보쌈이면 충분하겠는데?"


배달어플을 꽤 사용해본 듯한 왕난이 추천메뉴를 중심으로 치킨과 피자를 고르는 걸 같이 지켜보던 쿤의 눈에서는 아까의 날선 감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간의 이미지에서와 같이 귀족적인 쿤 가문의 도련님은 이런 서민 문화에 대해서는 백지나 다름이 없어서, 왕난에게는 익숙한 일들이 퍽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왕난의 선택이 밤의 기호에 딱딱 맞는 것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었고. 새파란 눈동자가 왕난의 스마트폰 창을 따라 움직이는 게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왕난은 최종으로 완성된 메뉴판을 쿤이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보여주었다.


"일단 내 추천은 이렇게. 결제해?"

"어."

"좋아. 따로 상 펼거야, 여기서 할거야?"

"여기서. 의자 하나 가지고 내려올게."

"계세요, 쿤 씨. 제가 가지고 내려올게요."


왕난만 점수를 따는 게 불안했던건지 풍선을 바닥에 잔뜩 깔아놓은 밤이 움직였다. 대신 사측의 요청에 따른 카메라의 배치를 쿤이 맡았다. 준비부터 촬영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왠걸 자신이 아직 씻지 않았으니 안된다고 한다. 손님이 있으니 밤이 내려온 직후에 2층의 욕실로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이 사뿐한 게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역시 고양이과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쿤 씨랑 하신다는 사업."

"나는 아직 공부 중이라.. 계획은 쿤한테 물어봐야지."

"하.. 몸도 안 좋으시면서 일을 더 하시겠다는 건가요, 쿤씨는?"

"당장은 페이퍼 컴퍼니라고 했는 걸.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는 게 맞지."

"알고 계시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설마하니 왕난씨가 자하드와 관계가 있을 줄이야.. 노리고 접근한 거 아니죠?"

"전혀 아니긴 한데 안 믿어줄 거잖아? 좋을대로 생각해. 결과가 말 해 주겠지."

"........준비나 마저 할까요?"







*







비올레와 쿤이 함께 사는 집이지만 따지고 보면 쿤이 구한 그의 집이므로, 손님들의 집들이 선물은 보통 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 없이 바나나를 들고 온 라크만 제외하면 사소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수는 머그 워머를, 하츠와 라우뢰는 같이 구매한 빨래건조대와 실내화를, 왕난은 작은 실내 등을 선물했다. 쿤이 커피를 자주 마신다거나, 손발이 차고, 취침 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 등이었다. 평소에 집안일은 밤이 더 많이 한다 해도 집들이 준비는 도운 것이 별로 없는 만큼 당연한 전개였으나 오늘따라 밤은 마음이 좀 허전했다.


"어디보자.. 왕난이도 쿤이랑 동갑이면 술은 아직이네?"

"하하, 내년에 한 잔 주세요."

"그래그래. 준비 같이하느라 수고도.... 라크!"


밤이 손 가는대로 불어놓은 풍선은 라크의 손에 수시로 터졌다. 그 상황이 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쿤과 함께 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밤도 손님으로서 선물을 준비하거나 하는 편이 더 고민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이돌 가수 활동을 쭉 이어오면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소외감이라고 해야할까 박탈감이라고 해야할까. 모두들 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은데 자신만 그 기회를 얻지 못한 기분이었다. 준비를 대부분 도운 것은 왕난이고, 자신은 쿤에게 선물을 줄 명분도 없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밤?"


답답한 마음에 술잔만 늘어가는 밤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게 쿤이라는 점은 좋았지만. 기분이 좋아서라고 둘러대는 밤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쿤은 그래도 과음은 좋지 않다며 밤에게 맥주캔 대신 얼음물을 내밀었다. 가까운 친구들 간에 이루어지는 홈 파티인만큼 크게 꾸미지 않고 오버 핏의 상아색 스웨터에 독특한 장식 없이 깔끔한 워싱 진을 입은 쿤은 서운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올만큼 귀여워서, 밤은 미소를 드러내며 잔을 받아 들었다.


"애들이 어려서 술 게임도 못하겠네."

"너희끼리 하면 심판 봐 줄게."

"안되지. 이런 게임은 하는 사람이 약간 손해를 보게 되어있단 말이야."

"그냥 게임을 하면 되죠. 벌칙 같은 거 걸고 하면 재밌지 않을까요?"

"괜찮은 생각인데? 그럼 다음 콘서트에서 누가 여장할지를 걸고 보드게임이라도 할까?"

"그런 걸 이런 자리에서 정해도 되나?"

"어차피 회의 때 우리도 들어가잖아. 정해진 게 있다고 말씀 드리면 되지."

"아니 그걸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넣어야 하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의 콘서트에서 처음은 비올레가, 그 다음에는 이수가, 가장 최근의 콘서트에서는 하츠가 그 역할을 맡았으니 자연스럽게 유경험자와 비경험자로 편이 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벌칙을 걸면 라크와 왕난이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술게임과는 달리 그런 건 상관 없다고 한다. 쿤은 일관성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막간을 이용해 졸고 있던 라우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우뢰 녀석은 자게 두고 3대3으로 붙자. 왕난이나 라크가 걸리면 무조건 라우뢰인걸로 하면 공평하지 않겠어?"






*






게임의 결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쿤의 압승이었다. 고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십 수명의 형제가 있는 정글에서 자란 만큼 쿤은 왠만한 게임에는 도가 터 있었다. 술까지 나란히 걸친 주제에 어떻게 자신을 이기려 했냐는 쓴소리에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상이 공개되면 팬들의 기대가 어떤 방향이었을지 공개되겠지만 여하튼 다음의 여장은 비올레가 다시 맡게될 것 같다. 아쉬움 속에서 다 같이 자리를 정리하고, 친구들을 배웅하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유일한 스케쥴 같지 않은 스케쥴이 끝을 맺었다. 카메라들을 전부 꺼 한쪽에 치워둔 쿤은 오랜만의 과음으로 소파의 한 구석에서 졸고 있는 밤을 흔들었다.


"밤, 걸을 수 있겠어? 침대에 가서 자야지."


두 번이나 여장을 하게 생겼다는 절망도 잊었는지, 오늘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던 밤은 답지 않게 술에 절어 있었다. 멤버들과 스텝들이 이야기하던 그의 엄청난 주량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건만.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는 밤을 결국 쿤이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침실을 2층에 둔 걸 후회하면서. 불안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밤은 쿤과 체격 차이가 크지 않은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거기 조심하고, 밤."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밤을 층계참 어디에도 충돌시키지 않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 자체에는 성공한 쿤은 침대에 닿자마자 체력이 다 해 밤을 풀어놓았다. 쿤도 어엿한 준 성인이건만, 남의 몸까지 지지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밤이 아니었으면 그냥 거실에 뻗어 자게 내버려 두었을 것을 인생 계획에도 없던 친절을 베푸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쿤은 스스로를 추스를 겸 한참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다시 일어섰다. 묶은 머리도 풀어주고 이불도 덮어줘야 밤이 편하게 잘테니까 말이다.


"쿤씨.."

"아, 깼어? 그럼 네가..."

"쿤씨는 왜, 저를.."

"밤?"


쿤은 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사력을 다했건만 밤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는지 아차하는 순간에 침대로 끌어들여진 쿤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기어코 자신의 밑에 쿤을 두는 밤에게 제대로 저항한 반 하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이기도 했거니와 예상보다 밤의 완력이 너무 셌다. 셔츠 밑에 김춰진 탄탄한 몸을 쿤이 과소평가 했던 건지도.


"왜 저만 알아주지 않는 건가요."

"윽.."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단지 밤이 지금 의식이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좀 더 대화하기 편한 자세로 돌아가려 했었던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런 쿤을 다시 붙잡아 저지한 밤의 눈에는 억울함과 사운함이 가득했다. 쿤으로서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눈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밤."


밤의 방해가 생각보다 거세서 몸싸움에서 이기는 건 쉽지 않았지만 온치 못한 정신이라 약간은 둔한 밤에게서 틈을 잡은 쿤은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고 그를 크게 감싸 안았다.


"너는 내게 항상 특별했는데."


그래.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을만큼. 머뭇머뭇 느리게 밤이 자신을 마주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흐느끼는 것만 같은 밤을 안은 채로 쿤은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 기분이 풀린다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어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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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7

신의 탑/Exceptional










"그냥 내가 소파에서 잘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쿤 씨. 저랑 같이 자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집을 따로 구해서 나가고 싶다는 아들에게 에드안이 내 건 조건은 하나. 룸메이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안만이 아니라 거의 전 세계 사람들이 쿤의 지병에 대해서 알게된 지금,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을뿐인 쿤의 소망을 알아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에드안과의 대결에서 진 기분인 것도 짜증나는 노릇인데 독립은 시작부터 쉽지가 않았다. 사실 룸메이트라는 건 쿤의 한정된 인맥을 생각하면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에서 쿤의 지인이라고 하면 소속사 인맥과 왕난이 전부인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왕난에게 룸메이트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라크나 하츠와는 쿤의 성격이 잘 맞지 않아서, 서로 요구사항을 어느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라우뢰나 이수에게 이야기해 볼 생각이었는데 난데없이 밤이라니. 더해서 밤에게 휘둘려 밤의 본가 근처에 집을 구하고 보니 에드안과 그리 멀어지지도 못했고.


"아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저희 벤에서도 계속 같이 잤는걸요. 익숙해지면 괜찮으실 거에요. 아니면 쿤 씨가 잠드실 때까지 제가 기다릴까요?"

"그건 더 신경쓰이는데.."

"밖에서 기다리면 되죠. 어서 주무세요. 내일은 짐도 챙겨야하고 할 일이 많잖아요."


밤은 대외적으로 친절하고 순한 이미지지만 알고보면 상당한 고집쟁이라서 쿤은 자신이 져 주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밤의 말처럼 내일부터는 다시 스케쥴에 돌입할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을 너무 끄는 건 양쪽 모두의 손해. 하릴없이 쿤은 밤이 먼저 자리잡고 있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 한켠에 몸을 눕혔다. 에드안과 같이 있을 때는 약과 열에 시달리느라 거의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나마 나았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다른 사람과 같은 침대를 쓰려니 어색함의 끝을 달렸다. 시트도 제대로 덮지 않고 밤의 반대쪽 끝에 간신히 걸쳐있는 수준인 쿤을 끌어다 제자리에 둔 밤은 놀란 기색이 가득한 파란 눈을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불 꺼 드릴게요.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마음 편히 주무세요."


모두가 걱정하는 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밤의 생각대로 되어야겠지만 오늘부터 그랬다간 하루종일 이삿짐을 정리한 고단한 몸으로 쿤이 밤을 새울 것처럼 보여서 밤이 약간의 배려심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밤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민한데다 환자이기까지한 쿤에 비한다면야. 쿤과 함께 배달된 가구들을 하나하나 포장을 뜯고 배치하는 것도 즐거웠고, 파자마 차림의 쿤이 첫날밤을 치루는 새신부마냥 긴장하는 것도 귀여웠으니까 정신적으로는 풍족한 상태였다는 게 한 몫 했다.


'첫날밤이라니.'


그 순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모든 것이 밤의 음심을 제대로 건드리는 바람에 졸지에 밤은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어둠 속에서 홀로 분투해야 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자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밤이 자리를 피해주자 피곤했던게 분명한 쿤은 밤이 슬며시 침실을 다시 살피러 왔을 때엔 고른 숨소리로 이미 잠들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시트에 푹 파묻혀야 편히 잘수 있는 성격상 따로 가져온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잠든걸 보니 밤의 음험한 생각들을 쿤이 눈치챘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마치 신과 같다는 평까지 듣는 에드안의 핏줄인 만큼 천사라는 묘사가 아깝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하는 경우의 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쿤과 같은 병을 가진 이가 더 있는지, 이와 같은 경우에 쓸 수 있는 약이나 방법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 에드안이 알아보는 중이라고 하니 밤도 거기에 희망을 걸어봐야 할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쿤이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자리에 누운 밤은 모든 아쉬움을 뒤로하고 눈을 감았다. 품에 안고 싶지만 얕은 잠을 깨울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곱씹으면서.




*




겨울의 추위는 이제 한 풀 꺾였다고들 하지만 여름은 아직이니, 익셉셔널은 광고 촬영을 위해 휴양지로 유명한 태평양의 한 섬을 찾았다. 이번 광고는 대기업의 여름 빙과류 및 음료 광고로 익셉셔널의 멤버들이 휴양지에서 휴양지에 걸맞는 복장으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는 컨셉이다. 각자 빙과류 하나와 음료 하나를 맡아 이를 조합한 아이디어 음료를 서빙하는 컨셉인데, 이 빙과류가 토핑 기능한 얼음 형태로 나온 것이 특징이라던가 뭐라던가. 여러가지 조합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일단 추천 조합을 익셉셔널이 우선 선보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멤버들 개인으로 한 편, 단체로 한 편, 총 여섯 편의 광고 영상을 만들기로 계약이 되어 있는데 익셉셔널의 몸값을 생각하면 과연 대기업이라는 말이 나올법한 스케일이다.


"이수도 몸이 좋네! 이상한 옷만 입고 다녀서 몰랐는데."

"이상한 옷이라니요!"

"말 나와서 그런데 너 머리도 좀 길러보면 안 되냐? 그럼 따로 포인트 콘셉트 생각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날로 먹지 마세요.."

"이수랑 올레 먼저 가자. 제품은 저 쪽 아이스 박스에서 꺼내면 되고... 콘티 확인 다 했지?"

"저 아직 못 들었어요."

"그럼 다른 애부터 해야겠네.."


오랜만에 데뷔 때처럼 허리를 넘는 장발로 돌아온 리더, 비올레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 덕에 광고에서도 같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게 된 비올레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몇 배나 되는 헤어 세팅 시간을 갖게 되었다. 뒤늦게 콘티 확인을 위해 담당 스테프를 찾아가고 있노라니 이제 막 촬영용의 래시가드로 갈아입은 쿤이 보였다.


"여, 쿤! 오늘은 컨디션 괜찮아?"

"아아. 다 나은지가 언젠데 이제 그만 좀 물어봐."


팬들이 이번 광고 촬영을 기대하는 이유는 비올레의 장발 말고도 또 하나가 있었으니 건강 문제로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쿤의 스케쥴 복귀가 그것이었다. 회복했으니 활동을 시작한 거겠지만, 퇴원을 했다 뿐이지 발작이 언제든 시작될 수 있는 만큼 주변 사람들은 안심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장 익셉셔널의 멤버들 부터가 볼 때마다 안부를 물으니.


"헤어랑 메이크업 체크 받고 저 쪽에서 쉬고 있어. 메이킹 비하인드도 찍어야 하니까."

"혹시 아이스크림을 못 먹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잘 못 먹긴 하는데 먹고 죽는다는 얘긴 아니야."

"쿤 씨 아이스크림 싫어하세요?"

"너무 달아서."


대채로 한 가지 맛이 너무 강한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그는 디저트도 많이 즐기진 않는 모양이다. 직접 괜찮다고 말했어도 스테프를 따라 촬영장 한 켠에 세워진 천막에 얌전히 따라 들어간는 쿤이 기운 없어 보인다거나 살이 빠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뒤를 이었다. 당사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이야기였고 스테프들도 걱정을 담아 하는 말이었지만 그들과 같은 마음인 밤도 걸음이 무거워 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쿤 씨, 컨셉 설명 들으셨어요? 괜찮으시면 먼저 브리핑 해 드릴까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 광고는 TOG제과의 가향 탄산수 라인과 빙과류 라인의 조합을 익셉셔널 멤버 분들의 칵테일 셰이킹으로 어필하는 내용인데요, '파스텔 아이시클'의 코팅 컬러가 탄산수에 들어가면 색이 바뀌는 효과를 일으키면서 무알콜 칵테일처럼 즐길 수 있게 나온 제품이거든요? 익셉셔널 분들이 평소에 사용하고 계시는 퍼스널 컬러에 맞춰서 광고는 진행되구요, 쿤 씨는 파란색, 파스텔 아이시클 블루 제품과 스파클 레몬 제품 제품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쿤이 광고할 제품을 내보이며 먼저 한번 해 보겠냐고 스텝이 눈으로 묻자 망설이듯 하다가도 하얀 손끝이 아이스크림 쪽을 향했다. 투명한 색에 가까웠던 탄산수에 얼음을 넣자 포말이 한꺼번에 일었다가, 거품 터지는 소리가 잦아들 때 쯤부터는 하늘빛으로 개이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은 없었지만 일련의 과정이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워서 지켜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작은 반응이었음에도 만족스러웠는지 이어 촬영 콘티에 대해서도 설명을 마친 스테프 또한 흡족한 얼굴로 다음 타자인 라우뢰를 찾았고 말이다. 자신의 차례라고 얘기해야 했지만 쿤보다 더 따뜻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밤의 얼굴에는 웃음이 만개했다. 쉽게 보여주지 않는 표정인 만큼 밤은 쿤이 웃을 때가 좋았다.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한 웃음일 때가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 재미있는지 간격을 두고 얼음 조각 하나씩을 추가하는 쿤을 비하인드 카메라가 열심히 촬영 중이었다. 물론 밤이 꾸물댄다며 스태프에게 잔소리를 듣는 통에 쿤의 장난도 오래지 않았지만.


"흐아암.."

"세팅 끝났어?"

"그러니까 잘거야."

"헤어.."


이미 정돈이 끝난 스타일링을 망칠까봐 주의를 주려는 쿤이 무색하게도 라우뢰는 늘 가지고 다니는 베개를 쿤의 어깨에 올리고 몸을 기댔다. 베개의 습격으로 말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한 쿤이었이만 앉아서 자면 괜찮다고 웅얼대는 라우뢰가 반박을 들어줄 리도 만무했다.


"환자한테 무슨 짓이냐."

"나 이제 환자 아니라니까."

"넌 운동이나 해라. 또 쓰러지지 말고."

"그게 운동이랑 무슨 상관이야?"

"자자, 얘들아. 촬영 전에 기운빼지 말자. 그리고 올레 본 사람?"

"아까 설명 들으러 갔는데?"

"그럼 라우뢰부터 가자. 빨리 찍고 쉬는 게 좋지. 올레는 시간 좀 걸릴 모양이네."

"머리 보면 딱 견적 나오지. 어떻게 올레 먼저 찍겠냐."


어차피 다 같이 촬영하는 부분도 있겠다, 해외 로케이션에서 빠른 퇴근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개인 촬영분을 먼저 찍으면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지는 건 사실이니까 잠이 고픈 라우뢰도 요청을 받아들였다. 헤어 디자이너의 잔소리도 촬영을 한차례 마치면 피해갈 수 있을테고. 라우뢰와 이수의 촬영으로 쿤과 둘만 남게되자 하츠는 뚱한 표정으로 맞은 편에 앉은 쿤을 살폈다.


"너는 설명 들었어?"

"당연하지. 날 저 잠탱이 녀석이랑 똑같이 보지 마라."

"라우뢰도 콘티 들었으니까 촬영 들어간 거 아냐?"

".....그랬나?"


하지만 언제? 하츠의 얼굴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읽은 쿤도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긴 했지만 누군가가 후다닥 붙어서 다이제스트 강의를 시작할 터다. 자느라 망가진 헤어와 메이크업을 또 잘생긴 본판으로 커버해서 팬들로 하여금 원래 컨셉이 그랬던건지 라우뢰가 자다 일어난건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것보다야 나은 결과 아닐까. 연기라고 하긴 부족하지만 천연덕스럽게 촬영에 임하는 이수와 이럴 때만 재능충임을 증명하는 라우뢰의 흠잡을 데 없는 촬영을 눈으로도 보고 모니터로도 보다보면 의외로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간다.


"이봐, 귀치장."

"응?"

"너는...... 무슨 운동을 할 거냐?"

"뭐?"

"신체 건강을 위한 투자를 해야할 것 아니냐."


그러니까 운동한다고 낫는 게 아니라니까? 비하인드 촬영을 위한 카메라만 아니면 멱살부터 잡고 보는 건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아니 쓰러진 것도 격한 운동인 춤을 추는 중이었건만 왜 자꾸 운동에 집착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몸을 움직여서 다 건강해질 것 같으면 쿤만 해도 이미 장수 예정일텐데. 하츠는 아예 불사신일 테고 말이다.


"흐아암. 운동이 아니라 잠이 문제지. 그러니까 난 이제 자야겠어."

"넌 좀 그만 자. 그런데 쿤. 일종의 저혈압 발작이면 오히려 격한 운동 같은 걸 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립성 저혈압 같은 병도 있잖아."

"그렇게 신경쓸 일은 아니야. 발작이 없으면 일반인인걸. 벌써 첫 신 끝났어?"

"나 말고 라우뢰만.. 난 메이크업 수정."

"제가 평소에도 쿤 씨를 잘 챙길 거니까 다른 분들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러고보니 이제 둘이 같이 산다고 했지. 집은 어때? 좋아? 집들이 같은 건 안 해?"

"집들이?"


일하는 시간만큼 공백도 많은 종일 촬영인지라 이야기를 오래 끌고갈 수 있는 화재는 당연히 이럴 때 대환영이다. 다만 익숙치 않은 단어에 궁금증을 표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겐 먼저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겠지.


"이사하면 주변 지인들을 초대해서 음식도 대접하고 대신 선물도 받고 그러는 자리야."

"아.. 그 생각은 못했네요. 어때요, 쿤 씨? 이번 촬영 끝나고 쉴 때에 간단하게라도 할까요?"

"어떤 선물을 주는데?"

"그거야 초대 받은 사람 마음이지. 가전제품 같은 거 중에 마련 못한 거 있으면 내가 고려는 해볼게."


티를 낼 일도 많이 없거니와 은근히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 쿤이지만 친구들과 놀기 좋아할 나이 아니던가. 새로 알게된 문화에 대한 호기심에, 반응이 크진 않아도 끌리고 있다는 게 형님들의 눈에는 보이는 지라 이수가 밑밥까지 깔자 쿤은 거의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어떻게 하는 거야?"

"뭘 어떻게 해. 맛있는 거 잔뜩 주문해 놓고 집들이니까 놀러오라고 하면 되는거지."

"선물은 항상 가전제품인가?"

"성의의 표현이지. 그게 선물 받는 재미 아니겠냐."


외국인 멤버둘이자 막내라인이 관심을 표하는 게 메이킹 필름에 담기면 조만간 회사 콘텐츠 팀이 카메라를 들고 집들이를 촬영하자고 할 것 같다. 해를 넘겨 4년차 짬밥이 된 이수의 예감을 뒤로하고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




"저기, 쿤. 누가 널 찾아왔다는데?"

"나?"


햇살이 찬란한 낮에만 촬영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하루는 리조트에서 묵게 되었는데 휴가같은 휴양지의 밤을 즐기는 멤버들의 비하인드 컷 촬영을 앞두고 이수가 쿤을 불렀다. 곧 화려한 저녁 만찬과 프라이빗 풀이라 기대감에 차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잠시 그 쪽으로 쏠렸다.


"음... 네 형제 같더라고?"

"누구?"

"많이 본 사람이긴 했는데 말이지... 네 형제가 좀 많냐?"


이수의 변명아닌 변명에도 쿤 반응 없이 쿤은 곧장 로비로 형했다. 남은 다른 멤버들만이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수를 재촉했다. 따라오라고 한 건 아니지만 에드안의 영향인지 그의 가족끼리 만날 때 뒤를 밟는 건 껄끄러웠으니.


"아, 왜 영화에 자주 나오는 사람인데.."

"배우? 어느 작품?"

"그 왜 쿤 가문 중에 액션 영화 자주 찍는 잘생긴 형님 있잖아."

"어, 저도 알 것 같긴 한데..."

"이름이....."

"쿤 마르코 아센시오."

"아!!"

"라우뢰 씨도 영화 자주 보시나봐요?"

"모르는 게 바보 아닌가? 여라튼 쿤이 올 때까지 촬영 시작 안 하는 거지? 깨우지 마. 좀 자야겠어."


오래간만에 연예인 다운 모습을 좀 보여주나 싶었던 라우뢰가 당연하다는 듯이 애착이불을 몸에 감자 남은 멤버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라우뢰에게 달려들어 이불 쟁탈전에 나섰다. 이름만 알려주면 다인가? 그에 대해서 더 아는 만큼은 알려줘야지!




*




"아센시오!"

"여, A.A. 잘 지냈.."

"여긴 왜 왔어."

"하여간. 아버지의 명령 아니고, 통보할 거리도 없어. 화보 촬영 차 왔는데 케이팝 아이돌이 왔다잖아? 혹시나 싶어서 와 봤지. 아버지랑은 잘 해결됬잖아? 내가 나설 거리가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표정 풀어."

"무슨 화보?"

"돌체앤가바나."

"......"


익셉셔널의 인기가 세계적이라고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작년 연말 앙케이트에서 월드 베스트 핫 가이로 꼽힌 아센시오는 탄탄한 몸으로 소화하는 수준높은 액션 연기와 매혹적인 페이스로 전 세계 여성 팬들을 사로잡은 인기 배우였다. 쿤 가문이 배출한 많은 연예인들 중에서도 마스체니와 더불어 포스트 에드안이라 불릴법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가 귀여운 동생 운운하며 아게로를 찾아온 덕에 한국의 스텝들이 어부지리 눈호강을 제대로 하게 생겼다. 위험한 아우라가 풍기는 쿤 가문이라 차마 대 놓고 보진 못하지만 여유있는 표정으로 까다로운 성격의 동생을 잘만 상대하는 걸 보면 쿤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면 동생의 건강이 걱정되어 찾아온건지도 모르지.


"여기선 그런 거 없어? 우리 스텝들은 너 데려오라고 난리던데 서비스 컷 넣어 주겠다고."

"내가 왜.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니고."

"달라면 줄걸? 리틀 에드안이 보고 싶... 컥!"

"가서 성질 머리도 똑같다고 전해."

"아야야.. 오랜만에 보는 형님한테 너무하네. 너 때문에 한국말도 배웠는데."

"아버지가 시킨 거잖아."

"그게 다가 아니다 이거지. 게다가 진심으로 널 걱정하는 녀석도 꽤 있다고? 란이라던가 하츨링처럼."


방심했을 땐 명치를 얻어맞았지만 최고의 액션배우 답게 이어지는 주먹질은 손쉽게 잡아내며 아센시오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동생을 안심시켰다. 집안 사람들에게 날을 세우는 이유라면야 모르지 않지만 아센시오가 아게로에게 사운할만한 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취급이 똑같은지 모르겠다. 에드안의 심부름을 몇 번 해 준 탓인가? 여하튼 체격 차도 있고 힘싸움으로는 애초에 될 일이 아니라 한번 붙잡히자 그 이상의 저항은 없었다.


"의심할만도 하잖아. 지금 타이밍이면."

"너만 그렇게 생각하거든? 애초에 그 일은 아직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누님이 귀뜸해줘서 그렇구나 했을 뿐이지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장 없어."

"......."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야?"

"모레. 너는 촬영 어딘데?"

"아야나 리조트. 내일 올래?"

"....갈게. 오늘은 촬영 있어."

"그래. 무리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훈훈함을 과시하는 스윗한 큰형님의 센스와 의외로 고분고분한 아게로의 신선한 모습 덕에 이 날의 짐귀한 쿤 가문 회동은 촬영에 참여한 스테프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전해진다.
















익셉셔널의 비하인드 컷까지 쓸까 했지만 내일은 다섯시 무렵에 깨야해서 이만 줄입니다.

오탈자랑 포스타입 업글도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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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6

신의 탑/Exceptional






시상식 이후로는 짧은 휴식, 그리고 콘서트를 위한 콘셉트 회의와 광고 촬영이 정해져 있었다. 광고주가 쿤을 포함한 익셉셔널 전체의 출연을 원했기에 그 무렵 쯤의 복귀가 정해져 있는 것이니 마찬가지였지만 쿤의 고열로 재계약 일정을 한차례 연기했다는 소식에 밤의 표정은 굳어 버렸다.


"유한성 실장을 불러 주세요."


익셉셔널의 리더이자 다방면으로 활약중인 이 시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 쥬 비올레 그레이스는 부모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을 FUG Ent. 의 경영진이기도 한 바. 소속 연예인이 아닌 이사로서 한성을 찾는 그의 표정에서 위기감을 느낀 직원은 빠르게 유한성 실장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직 한성과 같은 베테랑이 아니니까 경영진과 직접 마주하는 일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룸 메이트를 찾아줬으면 하는데.


에드안이 직접 나설 정도로 쿤의 지병이 만만치 않다는 건 이제 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에드안이 쿤의 고집에 져 주는 선택을 했으니 그가 그룹을 나간다거나 갑자기 본국으로 떠나버릴 염려는 덜었다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밤이 바라는 만큼, 언제까지라도 그의 곁에 쿤을 잡아두기 위해서 밤도 뭔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절 찾으셨다고요, 이.사.님."

"네. 한성 씨."

"보고 드렸다시피 계약이 연기된 건 쿤 씨의 몸상태 때문입니다만."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 닥달할 생각도 없고요."

"그럼 무슨 볼일이시죠. 저는 쿤 가문과 협업 건으로 쏟아지는 언론사 질문지 처리하는 것만해도 바쁜데요."

"저 이제 개인활동 중단할 겁니다."

"....네?"

"익셉셔널의 활동에만 매진하겠다고요. 제 스케쥴 관리 안 하셔도 되니까 유 실장님 업무도 좀 경감되지 않을까요."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그렇겠지만 당장은 쇄도하던 비올레 섭외 요청이 몽땅 질문지로 바뀔 테니 턱이 빠진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성은 입을 떡 벌렸다. 경영주랍시고 아버지고 아들이고 아랫사람의 노고를 너무 몰라주지 않는가!


"가, 갑자기 그런 선언을 하는 이유가 뭐죠?"

"FUG는 이제 작은 회사가 아니니까요. 제가 돈에 매달릴 이유도 이젠 없고 늦기 전에 후임도 양성해야겠죠."

"수작 부리지 마세요. 언제부터 그렇게 회사를 생각하셨다고... 쿤 씨 때문이잖아요. 대체 에드안 그 노친네한테 무슨 소릴 들은 겁니까!"

".....에드안 씨한테 따로 들은 말은 없습니다. 믿든 믿지 않으시든 이건 제 선택이에요. 번복하지 않을 겁니다."

"후.. 뭐 좋아요. 핑계 대는 게 제 일이니 어떻게든 쳐 내면 그만이죠. 하지만 기껏 키워놓은 바탕을 적당히 내세울 후임이 없는 때에 버리면 어떻게 되는 지는 이사님께서도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리고 자왕난이라는 분, 이사님 지인이죠?"

"왕난 씨요? 네.. 사실 저보다는 쿤 씨의 지인에 가깝긴 하지만요."


처음부터 연예인의 길만 바라보고 있던 밤과 달리 사실은 연예계와는 손을 끊고 싶었던 쿤은 밤의 초대로 한국에 온 직후에는 다른 사람들 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는 생활을 했었다. 왕난은 학교에서 만난 친구로 자하드의 사생아라는 소문만 무성한 채로 쿤 처럼 연예인이 아닌 다른 꿈을 쫓아 공부하고 있다고 했었다. 어머니가 한국계라 한국에서 지내게 되었다고도 이야기 했고.


"저희가 손을 뿌리쳤으니 자하드 쪽에서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분을 대표로 한국 법인을 설립한다고 하더라고요?"

"왕난 씨가 대표라고요? 하지만 왕난 씨는..."

"어차피 꼭두각시겠죠. 자하드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여하튼 중요한 건 자하드 가의 인물들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엔도르시 씨가 특별한 케이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 같군요."

"......."

"이왕 쉬신다면 쿤 씨라도 확실히 잡아주세요. 그 도련님이 에드안의 약점이라는 걸 이젠 천하가 다 알테니까요."



*



"그 예민한 애가 몸 상태가 나쁘다고 여태 잠들어 있다니.. 수면제라도 먹인 건가요?"

"걔가 잘도 먹어주겠다. 그냥 감기약이야. 독한 놈이긴 하지만. 너야말로 왠일로 네가 내 일을 도와주나 했더니 자하드 녀석의 사주였군."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부탁하신 일은 확실히 처리해 드렸으니."


쿤 가문의 일원으로서 한국에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던 쿤 마스체니 자하드는 그녀가 소집한 기자회견에서 폭탄발언으로 한국 연예계의 지각변동을 알렸다. 자하드가 한류의 본산인 한국에서 별도 법인까지 설립해 에이전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재능있는 신인들을 대상으로 인력 풀을 확보하는 한편 자하드의 공주라 불리는 그의 양녀들로 하여금 소속 연예인들과 멘토링을 맺게끔 주선한다는 말에 기자회견장에서는 정해진 시간을 가득 채운 질의가 쏟어졌다. 이어 바쁘게 찍어낸 기사는 당장에 한국을 뒤집어놓았다. 공격적인 투자에 기대감을 안고 연습생이 되고싶다는 지원자가 구름처럼 모이는가 하면 관련 주식도 요동쳤다. 자하드와 FUG Ent. 경영주 일가의 악연에 대해 짚어내는 기사도 함께 쏟아졌다. 마지막 건은 자하드에게 좋을 것이 없는 일이겠으나, 자하드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는 에드안이 보기에는 왕난이었다. 차가운 이미지 일색인 자하드 일가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인간미 있고 가슴아픈 사연까지 탑재한 왕난은 자하드의 연예인이 아닌데도 연일 재조명되고 있었다. 기대감에 동정론,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자하드의 공주들의 물밑지원까지. 한국의 언론을 자하드가 정복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예면을 넘어서 전반적으로 말이다.


"FUG를 위해 움직이실 건가요? A.A.가 그 곳에 있으니?"

"흥. 내가 나설 일이냐? V가 알아서 하겠지."

"제 입장에서는 아버지께서 본래의 뜻대로 그 애를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장녀의 소신 발언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로 잘 익은 포도알을 입에 넣은 에드안은 그 별 것 아닌 행동 조차도 화보로 만들 뿐이었다. 그리스의 신, 디오니오소스는 곧 그의 가장 알 알려진 별명. 무표정이 오히려 신성해 보이는 그의 마법은 그가 왜 나이 50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연예계의 절대강자인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자하드도 V도 소싯적에 한 가닥 했던 인물들이건만 그들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패권을 쥐고 있는 건 아직까지도 에드안이었다. 순수하게 연예인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만을 따진다면 아직까지도 그를 이길 자는 태어나지 않었으니까.


"난 케케묵은 치정극에는 관심 없다. 자하드 그 자식도 잘 알고 있을 거야."

"......."

"네가 심부름 하나를 해 줬으니 심부름 값을 주자면, 어차피 이 바닥은 나이 어린게 최고 아니겠니. 우리 같은 뒷방 늙은이들은 아들들 재롱이니 보면서 대리만족할 때지."


V는 비올레에게 자하드는 왕난에게 걸어볼 밖에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 중 유일하게 자식들보다 나은 아버지인 에드안 마저도 이리 말한다면 말이다.


"그럼 아버지께서 걸어볼 아들은 역시 A.A.인 겁니까?"

"한다고 해야 지원도 하는 거지. 정말이지 그 성질머리를 그냥... 생긴 것만 봐도 이미 내 아들인데 왜 더 닮아가지곤!"

"자업자득이십니다."

"알아!"


여하튼 에드안이 중립이라면 마스체니 역시도 마음 편히 2세들의 전쟁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연예계는 언제나 별들의 전쟁이라지만 후임 양성으로 눈을 돌렸던 자하드와 V의 격전이 또다시 펼쳐진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의동생들의 재롱까지 기대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그녀가 자하드 측의 지휘관으로서 한국에 머물게 된다면 FUG의 하진성 이사를 공략하기도 쉬워질 테고.


'유일한 변수는 A.A.로군.'


자하드의 최측근인 마스체니지만 그의 수가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를 헤아리긴 어려웠다. 지금에 와서는 연예인보다 거대 에이전시를 거느린 사업가로 더 유명한 자하드는 끝을 알 수 없는 주도면밀함으로 매번 마스체니조차 놀라게 만들곤 했으니. 자하드의 사생아로 한국에서 생활하던 왕난이 자하드의 패라는 것도, 그가 동생의 지인이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된 마스체니로서는 그저 탄복할 밖에.


쿤 가문이시면, 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 그, 그, 러니까... 익셉셔널의 쿤이요.


병원에 실려갔다는 기사를 보고 걱정했다며 동생의 행방을 묻는 왕난은 자하드의 핏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곳을 찾았다. 선물을 비롯해서 에드안이 함께 있다는 말에 손까지 떨 정도로 긴장하는 모습에서 자하드와 같은 위엄은 찾아볼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만 에드안의 말을 들어보면 자하드 역시 그 점을 노렸다고 볼 수 밖에.


"그나저나 A.A.는 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자하드의 왕자님께서 꽤 오래 기다리고 계신데."



*



익셉셔널의 인기가 대단한 만큼 생방송 중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쿤에 대한 기사는 그가 의식을 되찾고 퇴원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까지 항상 포털의 최 상단에 위치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마음을 졸였기 때문에 날짜가 지났음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 터. 이제는 퇴원을 했다기에 한 시름 덜어냈던 왕난은 어렵게 어렵게 병문안을 오자마자 걱정을 놓기는 이르다는 생각을 했다. 열보다는 약기운 때문이라지만 잠든 모습이 썩 편해 보이지가 않았다. 왕난이 오기 전부터 에드안이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 확실히 열은 많이 떨어진 것 같다만.


"...쿤! 정신이 들어? 나 알아보겠어?"

"자.. 왕난? 여긴 어떻게 왔어?"

"다행이다. 계속 눈을 못 뜨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 옷은 뭐고. 너도 학교 때려치웠어?"

"하하.."


걱정하느라 다른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던 왕난과는 다르게, 눈을 뜨자마자 교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나타난 왕난이 그가 알던 평범한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걸 파악하는 걸 보면 쿤은 괜히 쿤 가문이 아니다. 에드안의 보석. 왕난에게 명령을 전하러 왔던 왕난의 생물학적 아버지, 자하드는 그를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에드안이 독보적인 재능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사업 수완이랄 게 없어 본의 아니게 한 우물만 파던 쿤 가문이 자하드와 비슷한 명성을 누릴 정도로 다른 방면으로도 성장한 건 아게로의 판을 읽는 식견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니 왕난의 파트너로도 적격이라고.


"때려치우다니. 그런 건 아니야. 내 사정보다 당장은 네 사정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쿤? 몸은 괜찮아? 이제 일어날만 하겠어?"

"내 사정이 뭐가 남았어. 너나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쿤은 연예인으로서의 스스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성심 성의껏 활동하고 팬서비스까지 선사하는 밤처럼 행동하는 건 성격상 불가능하고, 익셉셔널의 다른 멤버들처럼 후천적 노력으로 매꾸기에도 열정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애꿎게도 특출난 외모라는 이 바닥 최고의 천부적 재능이 쿤에게 있었지만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동료들에게는 그조차 미안하고 아버지와 닮은 외모라는 것때문에 칭찬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도 버겁다고. 쿤의 유일한 일반인 친구로서 왕난은 쿤이 벌이를 위해서 연예인 생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면 자신이 그가 있을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쿤은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였고, 왕난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로 이유는 정 반대였지만 같은 편이라고 느낄만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한국에서 비슷한 처지의 두 사람의 유대는 각별하다 여겨졌으니까. 그래서 결정한 일이었다. 반쪽자리 성공이라 하더라도 한 번 자신의 버렸던 아버지, 자하드가 손을 내밀었을 때 과거를 상기시키며 뿌리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이런 선택을 알면 쿤은 분명 쓸데없는 일을 했다며 왕난을 다그칠 터였다. 하지만 멱살을 잡힌 상황에서도 쿤이 잊지않고 왕난을 친구로 여겨주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왕난은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자왕난?"

"아무 일도 없었어, 쿤."

"....."

"너도 나도 여전히 각자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하는 중인 거잖아. 나도 선택한 거야. 네가 먼저 떠나버린 다음에 너무 힘들어서 도망친 게 아니라."


가까워진 거리를 더욱 좁혀서 쿤을 품에 안은 왕난은 친구답게 쿤이 가장 걱정했을 부분부터 지워나갔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있어본 적은 없지만 뜨거운 체온이라던가 보기보다 훨씬 가는 체형에 되려 조금 놀라면서.


"그리고 난 엄청 건강하다고? 아버지에게 내 힘으로 인정 받을 때까지는 절대 어떻게 되지 않을 거야."

"뭘 어떻게 안 돼 멍청아. 내 손에 죽을텐데."

"억!"

"네 힘으로 인정 받으려면 자하드한테 뭐가 됐든 일절 받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아는 거야, 너는? 내내 아파서 누워 있었다고 에드안 씨가 그러던데."

"그 인간 말고 너한테 돈을 쥐어줄 인간이 또 누가 있냐? 보면 바로 견적 나오지."


물론 환자에 가녀린 몸의 아이돌이라고 해도 익셉셔널의 격한 안무와 한국 예능의 강행군을 버텨낸 쿤은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라서 바로 명치에 주먹질을 박은 쿤으로 인해서 왕난은 꼴사납게 나동그라져 몸을 웅크렸다. 무연고인 왕난에게 큰 변화를 줄만한 인물은 확실히 자하드 밖에 없긴 했다. 왕난의 어머니는 왕난을 근근히 키워내는 게 고작인지라 아들의 성공을 한결같이 바랐을지는 몰라도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아들의 소망을 이뤄주긴 힘든 상태였으니.


"지원을 받은 건 맡지만 아버지한테 내 모든 걸 맡기겠다는 건 아니야. 아버지는 네가 FUG와 다시 계약하기 전에 내 회사로 데려오라고 했지만 난 그럴 생각 없거든."

"회사?"

"응. 기획사. 그쪽에서는 에이젼시라고 부르더라고."

"네가 기획사를 운영한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이유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FUG가 싫으신 것 같아."


이제야 바닥에 바로 앉으며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왕난을 쿤은 처음에는 놀란 눈으로 나중에는 뜯어보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하드가 한국에 회사를 세웠다. 동종 업종으로 FUG를 행해서 정면 도전을 예고한 셈인데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그 수장으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그의 사생아를 세웠다는 게 상당히 의미심장했다. 기업의 오너가 누구인지는 그의 역량으로 보아 중요치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긴 하지만 왕난의 사정을 알고 있는 밤이나 쿤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전개가 될 게 분명했다. 왕난이 그의 입으로 계약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망정이지 의지할만한 사람이 둘 밖에 없던 교실에 왕난을 홀로 남겨둔 게 늘 마음에 걸렸던 쿤은 왕난의 첫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 없었으니.


".....네 계획은 뭔데?"

"무슨 계획?"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자력으로 인정받을 계획 말이야."

"아직 생각해 둔 건 없는데.."

"그럼 내가 하자는 대로 해 볼래? 날 믿을 수 있겠어?"



*




이제 개인 활동은 전부 그만 두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최고의 아이돌 그룹, 익셉셔널의 멤버로서의 스케줄은 예정대로 진행해야 했기에 비올레의 귀가가 빠른 시간에 이루어 질 수는 없었다. 쿤과 소꿉친구이고 덕분에 에드안과도 특별한 허물이 없는 라크를 통해 왕난이 오늘 쿤의 병문안을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밤은 마음이 급했다. 속옶이 왕난과 함께 바나나를 나눠먹고 왔다는 라크가 오늘의 밤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밤이 아는 왕난은 그렇게 약삭빠른 인물이 아니라지만 한성의 경고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왕난이라면 쿤이 흔들릴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쿤은 확실히 사람 사귀는 게 서툰 면이 있었지만 대신 알고 지낸 사람과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라크가 그러했고 밤과 다른 익셉셔널의 멤버들, 그리고 왕난이 그랬다. 특히 왕난은 알고 지낸 시간에 비해서 쿤과 빠르게 가까워 졌다는 게 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쿤이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왕난의 제의를 거절하기 어려울 테니까. 첫 만남 때 그렇게 에드안을 어려워 했었나 싶게 초인종부터 누르고 보는 밤을 에드안을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바로 맞은 편이 본가건만 에드안의 집 대문 앞에 주차를 시킨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나보지.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세요.


물론 에드안은 첫 사랑에게 대차게 차인 기억을 안고 아직까지도 연적에게 앙심을 품은 자하드의 순정에는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보란듯이 자신의 딸내미를 강탈한 자하드에게 아무 감정이 없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주지 못한 부정을 자하드가 대신 주었다면 모를까, 연예계에서 성장할 밑거름은 마스체니가 천부적으로 가진 것 아니던가? 그걸 자신이 준 양 기만하다니. 자하드도 에드안의 심술 정도는 받아 줄 각오를 하는 게 맞다.


"들여보내라. 아게로의 병문안일테니 그 애한테 안내해 주도록."


FUG를 위해 움직이실 건가요? A.A.가 그 곳에 있으니?


"집을 오래 떠나 있어서 우리 큰 딸이 몰랐나본데, 지금 쿤을 움직이는 건 내가 아니라 아게로거든? 자하드."

















이런 걸 쓰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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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5

신의 탑/Exceptional

익셉셔널의 연말은 바쁘다. 한달 여 동안 특별 무대와 콜라보 무대의 연습이 빽빽하게 자리했고, 한류 문화의 대표 아이콘인만큼 연말연시 인사만 해도 수십번을 녹화했다. 한국 아이돌 특유의 대형을 맞추다보면 쿤의 빈 자리가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연말 일정이 끝나면 복귀한다고 했으니까 멤버들은 그에 대한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멤버들이 아니라도 올해의 시상식에서는 쿤을 볼 수 없다는 소식에 오열하는 익셉셔널의 팬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익셉셔널은 연말마다 레전드 무대를 갱신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완전체가 아니라는 게 그들을 슬프게 만든 듯 했다. 화려하고 퀄리티 좋은 무대의상과 특별히 편집된 타이틀 곡을 기대하며 기다렸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의식이 돌아오는데만 사흘이 넘게 걸린 쿤이었으니 회복이 우선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벌써 퇴원을 한다고요? 완치가 되는 병은 아니라지만 주치의가 좀 더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면서요?"

"위험한 상태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기자들이 몰려서 불편했던 모양이지."

"병실 취재는 금지사항입니다. 이미 발표한 입장문 이외에 다른 발표는 없다고 전부 잘라냈는데요."

"그걸로 되겠냐. 쿤 에드안이 있는데."

"그러고보니 그 노친네는 대체 왜 온 거랍니까?"

"아....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다."

"이사님! 제가 그렇게 부탁 드렸는데!!"

"아무튼 전화에 신경쓰라고 해 뒀으니까 계약 건은 불러서 진행하면 될거야. 애들한테 괜히 병문안이랍시고 그 근처를 기웃 거리지 말라고 전해주고."


연습생들과 소속 연예인들에게는 공포의 유한성 실장일지 몰라도 직급이 그렇게 높지 않은지라 하진성 이사 앞에서는 교수님 앞의 학생이나 다름없는 한성이다. 그의 간절한 부탁만 홀랑 까먹은 진성이지만 상사인 이상 한성이 뭘 더 어쩌겠는가? 어차피 진행할 계약이었으니 쿤을 불러서 직접 물어볼 밖에. 병문안을 갈 시간도 없어서 쿤의 소식이 궁금했던 익셉셔널 멤버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건 안중에도 없이 한성은 곧장 휴대전화를 두드렸다. 전화를 바로 받지 않으면 쉰 만큼 굴려주겠다고 중얼거리면서.

*


"Hola?"

쿤 씨...?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아! 너구나, 커피!"

쿤 에드안?! 당신이 거기 왜 있습니까? 쿤 씨는요?

"아게로 말인가.. 지금 자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대신 전해 주지."

잔다고요? 그 쿤 씨가? 당신 옆에서? 이봐요. 그래뵈도 그 도련님은 당신 아들입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무슨 짓을 하다니. 마음 먹고 아버지 노릇 좀 해 보려는 차인데 섭섭하군. 샤워하자마자 더 자고 싶다기에 재웠을 뿐이야.“

샤워라고요?! 이 노친네가 정말!!!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블랙 커피. 병원에서 못 했으니까 여기서 한 건데. 정리할 게 산더미니까 용건이나 어서 불어."

뭘 못 하..... 됐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테니 그 땐 직접 받으라고 해 주세요. 먼저 끊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연장자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하던데. 작게 혀를 찬 에드안은 불이 꺼진 아들의 휴대전화를 다시 협탁에 내려놓았다. 사실 깨 있었어도 아게로는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홀대를 대하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을 터다. 왜인지 이런 취급이 익숙한 에드안에게도 특별한 감흥은 들지 않았다. 만나던 여인들이 그를 떠날 때마다 겪어와서 그럴까?


"쯧. 머리 말리고 자라니까."


달리 갈 곳이 없다해도 확신은 없었는데, 순순히 에드안을 따라온 아게로는 에드안이 새로 구한 전세집에서 샤워를 마치고 바로 다시 잠들었다. 퇴원을 서두른만큼 몸상태가 완전치 않은 탓이다. 일차적 원인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이지만 진단에 과로가 들어있다는 건 면역력이 바닥이라는 뜻과 같아서, 아게로는 어제 저녁부터 열이 높았다. 에드안의 침대에 웅크리고 잠든 아게로의 이마를 짚어본 침대의 주인은 결국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여하튼 열이라는 것도 하나의 생명 반응이니 스스로 살아있다고 알려주는 건 나쁘지 않지만, 에드안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얘기하던 그를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고작 한 줌 밖에 안 되는 생명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했던 건지.


"의사도 하나 불러야 겠군. 요리사도 필요하고..."


생모를 꼭 닮은 누이가 워낙 몸이 약해서 에드안이 노심초사했던 것에는 비할 바가 못되겠으나 이미 발병이된 이상 아게로 쪽도 미덥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당장은 에드안의 손 안에 있으니 괜찮긴 한데 거리를 두겠다 약속해 버렸으니 그게 문제다. 계획이 없는 건 아니라도 실행할 방법은 아직인 채로 말부터 꺼내버린 것이다. 그 때의 에드안은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만큼 절박했으니 돌이킨다고 해서 지금과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진 않을 테지만.


"만만한 건 역시 V의 아들인가?"


에드안이 필요한 건 아게로가 거부감 없이 곁에 둘만한 사람이자,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보살펴줄 인물이었다. 부모를 닮아 심성이 곱다는 밤은 게중에서는 에드안의 접근도 쉬워서 일을 맡겨봄직 했지만 바쁜 몸이라는 게 단점이었다. 익셉셔널은 활동 중엔 하나같이 바쁘지만 밤, 아니 비올레는 그 중에서도 개인 활동이 가장 많은 멤버였다. 공백을 채울 누군가를 따로 준비해야했다. 귀찮은 일이지만 만약을 위한 협력자를 스스로 구해줄 수도 있으니 일단 첫 순위에 올려보자.


"어떻게 불러야 하나.. 아게로가 없을 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잠깐 살 집이라도 연예계 생활을 제외하면 노동이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에드안은 가구를 주문하며 가사 도우미를 비롯하여 그의 저택에서처럼 필요한 인물들도 같이 쇼핑했다. 이제 숨을 필요가 없으니까 스페인의 저택에서 필요한 것을 공수하기도 쉬워졌다. 돌아가면 본처인 마스체니와 또 다시 전쟁을 치뤄야겠지만 재결합 때부터 경제적인 독립은 유지해 온 두 사람이니 에드안의 재산권 행사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다시 살 생각으로 캐리어조차 끌고 오지 않았던 에드안이다.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연예인 생활을 했던 그에게는 천문학적인 재산이 있었서, 그간 위자료를 그렇게나 지급했음에도 늙어 죽을 때까지 한 몸 건사하기는 충분했다. 한국 생활을 준비하는 것쯤은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이란 뜻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의 체격에 맞는 옷을 구하기 힘든 관계로, 부득이하게 의류는 즐겨 찾아가던 디자이너들에게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스스로를 단장한 에드안은 그가 도달한 연령에 맞는 미학을 개척하는 인물이라는 찬사를 들어온 인물 답게 여전한 매력을 자랑했다. 입으로는 문란하다 욕하던 사람들도 막상 에드안의 실물을 보면 저절로 시선이 그에게 붙어버릴 정도로.


"일단은 점심부터 시키고.. 설마 오늘 집 보러 가겠다고는 안 하겠지?"


하지만 에드안의 매력은 아게로에게는 통하지 않으니까. 오랜만에 함께하는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에드안의 표정은 제법 심각했다. 이전에 비하면야 행복한 고민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에드안이 가사노동 중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그는 자신이 아게로의 간병을 맡게 된 것 자체는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소식을 묻는 수고가 없을 뿐더러 예상 밖의 수확도 많았다. 예를 들면 무대 의상을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아게로가 에드안이 사 준 옷을 입어 줬다던가 이렇게 얌전히 그의 집까지 따라와 준다던가. 물론 이건 화해의 효과라기 보다는 다분히 아게로의 무기력함에서 기인한 일이지만.


"음... 그런데 여기 주소가 어떻게 되지?"


자고로 배달 어플리케이션을 쓰려면 본인의 집 주소는 기본. 하릴없이 이번에도 V에게 도움 요청의 전화를 거는 에드안이다.

*


에드안이 어디 있냐고?

"쿤 씨가 거기 계신 것 같아서요."


한성을 비롯해서 감히 에드안과 통화를 하려는 사람이 전혀 없기에 고민하던 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처음 에드안이 몸을 의탁했던 것도 밤의 부모님이었으니 그들이라면 에드안의 새로운 거처가 어디인지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에드안이 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들었지만 부자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있는 밤은 진성의 이야기를 듣고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일정이 바쁘지만 어떻게든 시간이 나면 쿤에게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아.. 에디가 아게로 군을 데리러 간다고 했었단다. 잠시 한국에 머물 생각이라면서 맞은 편 집까지 계약했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거기 있겠지.

"맞은 편 집이요? 그 파란색 대문이 달린?"

그래. 하루종일 사람이 드나들던데 지금은 정리가 대충 끝난 모양이야.

"쿤 씨도 거기 계신 건가요?"

거기까진 모르겠구나. 따로 집을 본다고 했었거든. 하지만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바로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점심 때 주소와 함께 배달 어플의 사용법과 환자식에 대해 묻던 에드안을 떠올리면 심증이 더 굳어진다. 에드안과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한사코 거부하던 아게로가 잠깐이라도 아버지와 함께 하기로 결정한 걸 보면 에드안의 고민은 헛되지 않은 것이겠지. 아게로도 아게로지만 평범한 인간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V와 함께 하는 모든 것을 즐거워하던 소싯적의 친우가 떠올라 V는 혼자 웃음지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어린 소년 같았던 에드안이 드디어 진정한 어른이 되는 첫 걸음을 내딛었나보다.


신경쓰인다면 한 번 물어봐 줄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뭘 이 정도로. 아게로 군이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너도 컨디션 관리 잘 하렴. 한창 바쁘잖니.

"전 끄덕 없어요. 회사 분들이 잘 챙겨주고 계신걸요. 이따 쿤 씨도 뵙고 하게 저녁 때 집으로 갈게요."

그래. 그럼 저녁에 보자.


단지 아버지가 쿤의 이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연락을 취했던 밤은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본가 가까이에 에드안이 잠시 살게 되었다는 건 장기적으로는 불편할 수 있겠으나 당장은 그 곳에 쿤도 있다니까. 그리고 아무리 V가 에드안의 친우라도 밤의 아버지는 에드안의 편을 들기보다는 나쁜 일을 하려는 걸 막아줄테니까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는 면도 있었다. 당장은 출연보다 연습과 녹화 일정이 주류라 시간도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말이다.


"아... 뭘 사서 가면 좋지..?"


하나를 해결하니 또 다른 문제가 밤을 덮쳐왔다. 물론 밤의 목적은 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지만 초면인 에드안에게 빈 손으로 다짜고짜 찾아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V가 같이 가 준다면 좋겠지만 의외로 V는 밤의 일에 대해서만큼은 직접 나서는 게 드물었다. 적당한 선물에 대한 조언 정도는 줄 지 몰라도 성격상 밤과 함께 에드안의 집을 방문해 주지는 않을 터.


“검은 거북이!”

“라크 씨! 오랜만이에요. 어쩐 일이세요? 곧 컴백이신가요?”


언제 들어도 호쾌한, 그러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환하게 밝힌 밤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익셉셔널의 멤버를 제외하면 기획사의 동료 중에서 유일하게 쿤과도 친분이 있는 라크였다. 그만큼이나 사교성이 좋은 그는 복도를 걸으며 연습생, 연예인, 스텝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누구에게나 인사 및 시비를 걸며 헤쳐나가는 중이었고, 말미쯤에 밤을 발견한 듯 했다. 에반켈 부장이 승진 직전에 기획했다던 비주얼 락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그는 타고난 건강미를 유감없이 발휘해 익셉셔널의 데뷔 기반을 닦은 연예인 선배이긴 하지만 그 바닥의 칼같은 위계질서와는 상관 없는 행보를 걷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쿤과 구면인 만큼 해외에 국적을 둔 사람들 특유의 오픈마인드의 영향이지 않을까? 아무튼 밤에게도 그는 좋은 선배이자 직장동료였기에 오랜만의 재회가 반가운 것은 당연했다.


“상을 준다니까 가 봐야지!”

“아아... 시상식 무대에 서게 되셨군요. 일정이 많이 겹치면 좋겠네요.”

“파란 거북이는 어디 있냐.”

“쿤 씨는 아직 회복이 필요하셔서 올 해는 회사에 나오지 않으실 것 같아요.”

“약골 거북이 같으니.. 허옇게 뜰 때부터 알아봤다.”

“하하...”


그건 쿤이 타고난 피부색이건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더니 라크의 입담은 거침이 없다. 모두가 일하는데 혼자 쉬면 재미있겠냐며 연락을 한다는 걸 에드안이 같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밤이 말렸다.


“그 늙은이가 뭐가 무섭다는 거냐, 너는!”

“아, 라크 씨는 에드안 씨도 알고 계시겠네요? 어렸을 때 자주 쿤 가문으로 놀러 가셨다고 하셨죠.”

“당연하지. 포도 거북이 쯤을 내가 무서워하겠냐?”

“저.. 그럼 저녁에 저랑 같이 쿤 씨를 만나러 가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선물 고르는 것도요.”

*



"열이 떨어질 때까지 집을 구하는 건 잠시 미뤄야할 것 같구나. 매물은 내가 먼저 골라둘테니 당장은 푹 쉬어라. 여기서는 네 방이 어느 곳이면 좋겠니?"

"방을 줄 거면 침대도 사 줘."

"그건 안 되지. 발작이 없어지면 다시 말하렴."


낫는 병이 아니라면서 무슨 수로? 불만이 가득해도 에드안과 입씨름 하는 것조차 피곤한 아게로는 몸 만큼이나 끓는 속을 삭힐 겸 호흡을 골랐다. 남다른 재력을 가진 아버지를 둔 덕에 채 10살이 되기 전부터 자신의 방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던 아게로에게 이제와서 아버지와 같은 침대를 쓰라는 건 확실히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하지만 어머니도 누나도 피곤하다며 잠든 뒤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했기에 에드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정 에드안과 자기 싫다면 사용인 중 하나를 골라서 함께 자라는데 아무나 얼굴만 보고 침대로 끌어들였던 아버지도 아니고 아게로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정말 그냥 잠만 자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일반적으로도 그건 상당한 친밀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들의 선택을 알기에 에드안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같이 잔다고 네가 내 애를 가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변태 영감이..!!"

"저런. 머리 아프니?"

"누구 때문인데..."

"다 먹고 약 먹으렴. 어차피 약기운에 곯아떨어질 건데 그리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만."


병원의 처방전은 대체로 일반 약보다는 효과가 좋다지만, 체력까지 바닥인 아게로는 약기운을 이기지 못했는지 점심 때도 두 시간 반 가량을 비몽사몽했다. 이번에는 그러다 보면 잘 시간이니까 더더욱 상관 없을텐데, 에드안의 말투 때문에 골이 난 아게로는 약까지 버릴 기색이었다. 그러고 나서 밤을 새는 게 좀 더 현실적이지 않나?


"감기는 나아야 집을 보러 갈 것 아니니. 서울은 좋은 집이 금방 없어져서 웃돈을 주고 구해야할 판이던데."

"........"

"허튼생각 말고 푹 쉬렴. 그래야 하루 빨리 네 집에서 지낼 수 있지 않겠니."

"난 내일 당장이라도 갈 수 있어."

"여하튼 오늘은 무리라는 뜻이지."


에드안은 상식이 없는 사람처럼 굴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말로 이기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싫은 것이지만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아버지를 이기려면 논리라도 있어야했다. 내일 이침에 눈을 뜨면 멀쩡해지길 빌면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다. 퇴원 후에 거의 종일을 잔 거나 다름 없음에도 약을 먹고 나면 또 졸음이 쏟아지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당장은 이 편이 나으니까 순리에 몸을 맡기겠지만. 표정은 불만 투성이였지만 결과적으로 얌전히 아버지의 말은 잘 들은 셈인 아게로의 잠자리를 돌보는 것으로 좋은 아버지 되기 1일차를 마무리한 에드안에게도 오늘은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자는 중에는 발견이 힘들어서 그렇지 발작은 급성 저혈압과 호흡곤란으로 시작된다. 혈압을 상시 모니터링 하는 게 혼자 앓는 건 막아줄 수 있다는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아들의 웨어러블 기기에서 해당 정보를 에드안이 실시간 열람할 수 있도록 조치도 했다. 나중에 아게로가 그 사실을 알게된다면 또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안전장치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에디. 밤이랑 라크가 저녁에 아게로 군 병문안을 가고 싶다는데.


게다가 이 일에서만큼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아게로의 편이 많이 않을 터다. 손님을 맞아야하니 에드안은 스페인에서 대려온 신뢰하는 사용인인에게 아게로의 감시역을 맡겼다. 8시쯤 온다고 들었는데 약속시간 10분 전부터 문간을 서성이는 머리통들을 보니 에드안이 일을 맡기기에는 확실히 수월할 것 같다.


“들어가려면 저걸 눌러야 할 것 아니냐!”

“잠시만, 마음의 준비를 좀 하게 해 주세요.”

“마음의 준비가 왜 필요하냐! 끄응.... 다 됐냐?”

“아직 10초도 안 지났거든요?”

“그럼 문은 언제 열어주면 되는 거냐, V의 아들.”

“네?”


쿤 에드안. 최고의 남자이자 최악의 남자. 뭍 여성들에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그는 외모에 대해서만큼은 남녀를 불문하고 칭찬 일색이었는데, 실물을 앞에 두고보니 밤도 그 화려한 미사여구들에는 전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밤의 아버지와도 별 차이가 없는 실내복에 가운 한 장만을 더 걸친 모습이었지만 소탈한 복장의 메이커가 궁금할 정도로 압도적인 분위기는 밤의 시선을 놓아주질 않았다. 얼굴만 놓고 본다면 쿤과 닮았다는 인상을 주긴 했지만 세월이 빚어놓은 카리스마와 풍채는 완전 다른 아우라로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한 세계를 평정한 숫사자의 모습이랄까.


“전기 거북이!”

“오, 너도 왔냐? 선물도 사 온거야?”

“이건 내 거다. 넘볼 생각 하지 마라.”

“나도 바나나는 됐거든. 사 올 거면 포도를 사 왔어야지.”

“저, 에드안 씨 선물은 여기... 이사 오셨다고 들어서요.”

“포도향 화장지? 한국엔 이런 것도 있나?”

“집들이 선물은 휴지라고 어머니께서...”

“파란 거북이를 내 놔라!”

“아게로는 지금 잔다. 어제부터 내내 열이 높았거든. 너희랑은 할 얘기도 있고 하니 깨우지만 않는다면 이따 잠시 보여주지. 들어와라.”


담 너머를 보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던 에드안이지만 그렇지 않았던 밤과 라크는 이제야 완전히 바뀐 정원과 화장지 한 묶음을 들고도 천연 모델의 포스를 풍기는 에드안의 뒷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질은 보장 되어야 하지만 디자인 자체는 심플한 것을 선호했던 쿤과는 다르게 에드안의 방식으로 꾸며진 정원과 실내는 화려하고 웅장했다. 아무리 값나가는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해도 에드안이 곁에 서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에드안의 것이니 당사자는 사물의 장식성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인지도.


“병원에 좀 더 계셨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퇴원시켜 달라고 한 건 아게로다. 이 곳에도 주치의가 따로 있으니 감기 정도는 걱정할 게 못 되지.”

“......하실 말씀이란 건..”

“아들 녀석 일이지 뭐겠냐. 콩알만한 녀석이 어른이 생각해서 말하는데도 양보가 없어. 왜 날 닮아가지곤, 쯧!”

“알긴 아는 구나, 거북이!”

“너도 똑같으니까 닥치고 있어.”


물론 라크는 누가 닥치라고 해서 닥칠 위인은 아닌지라 밤이 그를 달래며 마트에서 사 온 바나나가 약이었다. 남의 집에서 집 주인에게 권하지도 않고 앉자마자 바나나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라크를 보니 에드안도 포도가 땡긴다며 사용인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포도를 비롯한 과일안주를 주문하는 그다.


“쿤 씨를 본국으로 데려갈 생각이신가요?”

“원래는 그랬지만 지금은 됐어. 어디까지 갈 지 모르는 애라 우선은 달래놔야지. 당분간은 하고싶은대로 하게 둘 생각이다. 독립도 허락한다고 했어.”

“그럼 뭐가 문제냐?”

“아게로는 환자니까. 혼자 살게 두는 건 걱정되거든. 날 닮았으면 집안일도 못 할거고, 발작이 갑자기 시작되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이잖아."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에드안은 물론이고 바나나를 까 먹기 바쁘던 라크까지도 결연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밤을 놀란 눈으로 쫓았다. 의사도 아니고 초능력자는 더더욱 아닐텐데 마치 당장 어떻게 해 줄 수 있다는 듯한 당당함도 신기했지만 죽음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눈빛도 기대 이상이라 당황스러웠다. 아게로는 여러가지 의미로 에드안을 닮았으니 일단 스스로를 돌아보자. 내가 그렇게 불쌍한 척을 잘 하는가? 아니면 너무 의존적으로 살아서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체질인가?


“..룸 메이트를 찾아줬으면 하는데. 왠만하면 같이 자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친한 사람으로. 아게로는 이야기하지 않았겠지만 잠들어있는 시간이 그 애한테는 가장 위험하거든.”

*



“...........하아..... 네 아버지를 모셔가려고 왔다고 해 주면 좋겠는데.”

“제가 그 분을 무슨 수로요. 아버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A.밖에 없는데요.”

“하... 그럼 뭐냐. 네 어머니 이혼 서류라도 대신 전해 줘?”

“저는 독립한지 오래라서요. 두 분의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신경 껐답니다. 오히려 두 분 사이가 소원한 덕에 자하드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쿤 가문 녀석들은 하나같이 정말... 자립심이 넘치는 건지 성격이 꼬인건지.”

“성격이 꼬인거죠.”

“자랑 아니거든!!!”


별 일이 없어도 바쁜 연말연시. FUG Ent.를 발칵 뒤집어 놓을 사건이 또 하나 발생해쓰으니, 하진성 이사의 손님으로 찾아온 묘령의 여성이 바로 폭풍의 핵이었다. 연속으로 쿤 가문과 맞떡뜨린 한성이 게거품을 무는 걸 가뿐히 한 팔로 받아 안은 에반켈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듯한 예감에 가볍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이제 하진성 이사가 사내에서 연애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못 할지도?


“여하튼 비지니스는 절차대로 진행해야죠.”

“으으, 회장님은 정말..”

“회장님께서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으시니까요. 자하드님의 제안을 거절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잖습니까? 저흰 명백히 도와드리는 입장인 거라고요?”

“지금 저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이사님!!!!”

“하... 나만큼 골치 아프지 않으면 좀 가만히 있어라 너도. 둘 다 나가봐. 연애을 하든 데이트를 하든 오늘은 상관 없으니까.”

“오케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한성을 훌쩍 둘어 어깨에 둘러맨 에반켈은 걸음을 옮겼고 그제야 정신이 든 한성이 바둥대며 보기드문 활극을 연출했다. 닫히는 이사실의 문 뒤로 마른세수 중인 하진성 이사와 여전한 미모를 자랑중인 톱 모델 쿤 마스체니 자하드의 투 샷이 사라지고, 힘으로도 신장차로도 위치를 벗어나기기 힘든 한성은 목소리로만 상사에게 항의했다.


“에반켈님? 저기 에반켈님? 나갈 땐 나가더라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협업 계약이다. 자하드 쪽에서 먼저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의 해외 활동을 지원하겠다면서 제안해 왔었거든. 뭐 회장님 입장에서는 껄끄러워도 거절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에드안이 한국에 있으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야?”

“그럼 우리 회사가 쿤 가문과..?”

“뭐 다들 바쁘신 몸인데 별 일 있겠냐? 가끔은 오겠지만.”

“아니 그걸 맏습니까? 어떻게요? 에반켈님, 아니 부장님! 어떻게든 해 보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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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4

신의 탑/Exceptional

 

 

 

 

 

 

 

 

 

 

익셉셔널의 팬들이 그렇게나 고대하던 쿤의 생일파티는 아무래도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지만 쿤은 자신의 생일이 지날 때까지 그대로 잠들어 있었으니까. 이미 성인임에도 밤은 그보다 더 어른들의 이야기에는 낄 수 없었다. 그저 부모님이 잘 해결될 것 같다고 했으니 그를 믿어볼 밖에. 쿤은 아버지가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고만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들과 같은 병실에서 생활하며 정신이 들기를 기다리는 그를 보니 밤은 물론이고 쿤도 그에 대해서 뭔가 오해가 있었지 싶었다. 부모 노릇을 거의 해 주지 않는 아버지라는 세간의 평과는 다르게 그는 쿤이 앓고 있던 병이 어떤 건지도 알고 있었고 시의적절하게 한국에 와 있기까지 했으니.


"성격이든 외모든 아버지 쪽 판박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러게. 하필 닮아도 그런 걸 닮아서는, 쯧."

"어떻게 할 거냐? 넌 손해보는 계약은 안 한다고 했잖아?"


익셉셔널이 소속되어있는 기획사 FUG Ent. 의 실 소유주가 왕년의 대스타 V라는 건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한성이 쿤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하더라도 V의, 좀 더 현실적으로는 밤의 눈치를 살펴온 것인데 에드안의 기행에 이어 쿤도 제 알아서 계약 연장에 있어 흠결이 될만한 일을 벌여주시니, 밤이 자기 주장을 이어간다해도 한성 쪽의 근거가 더 탄탄할 것이다. 하지만 밤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최대한 몸을 기대 젖힌 한성은 의외로 매몰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글쎄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할 이야기도 아닐 뿐더러 별로 내키지도 않네요."

"호오?"

"에드안님이 싫은 건 여전합니다만, 유전병이라면... 쿤씨도 결과적으로 아그니스님 모녀처럼 될 확률이 높다는 얘기잖아요?"

"아아."

"에드안님의 관리를 어떻게 믿고 맡깁니까?"

"푸흡!"


마시던 물을 뿜은 건 밤도 아니고 에반켈 팀장도 아니고 이 사무실의 주인인 하진성 이사였지만 그가 추태를 보이기 전부터 에반켈은 호쾌하게 웃고 있었으니 대체로 한성의 대답에 대한 반응은 비슷하다고 봐야했다.


"쿤 가문으로 돌려 보내는 것 보다 여러 사람이 감시할 수 있는 환경에 두는 게 훨씬 안전할 겁니다. 애초에 발작이 시작된 것도 쿤 가문의 문제였잖아요? 또, 에드안님의 약점을 제가 쥐고 있는 격인데 좋은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릴 순 없죠."

"대체 쿤 에드안이 너한테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럼 예정대로 쿤이 눈을 뜨면 재계약을 진행하는 걸로 해 두지. 하는 김에 익셉셔널의 스케쥴은 다시 한 번 검토를 해 보고. 시상식 준비는 힘들지 않니, 올레야?"

"네. 저희는 문제 없어요. 지금은 다른 스케쥴도 없고 무대 준비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쿤에게 유독 짖궂게 구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한성의 지원은 매우 훌륭했다. 쿤의 사건이 있었던 이후에도 팬들이 익셉셔널의 휴식을 주장하지는 않을 정도로 바쁜 와중에도 잘 시간과 먹을 것은 확실하게 지원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일에 밤이 나서는 순간 해결이 되니 라우뢰의 비상식적인 요구를 제외하면 익셉셔널은 다른 아이돌에 비해서는 양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다. 극성 팬의 칼같은 차단에 팬들이 오히려 어려워 한다면 모를까.


"다행이구나. 그럼 하던 대로 열심히 해 주고... 병원에 한번 가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갈까 에반켈 팀장이 갈까?"

"그런 일은 제가 가도 됩니다만?"

"넌 됐다. 아픈 애 복장 터뜨릴 일 있냐."

"환자한테까지 치사하게 굴진 않습니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게 있는데 네 낯짝만 봐도 경기 일으키지. 뭐 팀장도 마찬가지일 것 같으니 내가 직접 가야겠군. 확인할 것도 있고."

"호오? 그럼 병문안 갈 시간에 데이트를 해도 되겠군."

"데이트는 퇴근하고 해야지..."


회사의 대주주임에도 입장상 경영에 직접 나서지 못하는 밤은 직원의 태만한 근무 태도도 소속 연예인에게 까다롭게 구는 행태도 지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처리해주는 하진성 이사가 있어서 이 회사가 문제없이 굴러가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그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밤은 에반켈 부장이 유한성 실장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장난을 치며 함께 멀어지자 혼자남은 진성을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만 스케쥴 있지 않니?"

"스케쥴은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이사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전... 쿤 씨가 에드안님과 둘만 있는 게 신경쓰여요."

"흠.. 뭐,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유 실장한테 잔소리 듣기 싫으면 그런 일은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에드안에 대한 소문이 많이 더럽기는 하지만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녀석은 에드안에게도 특별하거든. 계약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으니 네가 조바심 내지 않아도 꼬맹이랑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쿤 씨의 병은 치료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쿤 씨의 어머니도 누나도 같은 병으로 그렇게 되신 거라면!"

"그러니까 너희는 기다리는 게 좋다는 거야."


상황이 최악이라고 판단되었다면, 일단 에드안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거니와 눈치빠른 한성이 계약에 대해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당분간 지금같은 상황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모두에게 있다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환자인 쿤에게 해결해야할 짐부터 보여주는 것 보다는 들고있는 문제를 치워주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에드안이야 항상 예측불허인 사내였으므로 진성의 생각과 같을 지는 두고봐야 알겠지만, 여하튼 그도 소중하고 또 소중한 아그니스의 마지막 흔적을 자기 손으로 지울 생각은 없을 터다.


"내 생각엔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만."


모든 건 쿤이 언제 눈을 뜨냐에 달려있는 문제다. 그 일만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해결은 오히려 손쉽다. 익셉셔널이 그간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만큼 에드안을 제어해 온 쿤이니.


"다녀오마."



*



환자가 의식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에드안도 의외로 의식주에 까다롭게 굴질 않아서 쿤의 병실은 병원에서 마련한 그대로의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를렌이 꽃이라도 한 다발 보내줄까 물었을 때에도 에드안은 거절했다. 양육비를 내는 것 이외에는 자식들도 저 알아서 크게 버려둔 그다. 그가 다른 생물을 키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든 꽃이 있는 병실이라니. 그건 더더욱 상상하기 싫었고. 의료진의 빠른 조치 덕분에 호흡이 안정된 쿤은 겉보기에는 잠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도 남은 증상은 과로와 감기 정도라니까 머지않아 눈을 뜰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음에도 불안한 것은 에드안의 죄과 때문이려나? 자식에겐 져 주지 않겠다는 에드안의 아집이 결국 아게로와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을까봐?


'붙잡지 않아도 붙잡아도 결과가 같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에드안의 품에서 잠들었던 아그니스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붙잡을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반드시 지키겠노라 마음 먹었던 딸도 모래알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로 허망하게 빠져나가 버렸다. 그가 행동하는 게 항상 틀렸기 때문에라고 치면, 이번에 그는 어찌해야 옳은가? 고민하기에 한 달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라더니 진실로 그러했다.


"아게로."


이무런 의미 없는 호명이었다. 아직 에드안의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꿈에서 조차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여서인지 그는 기다리던 순간을 앞당겼다. 쿤이 눈을 뜬 것이다. 이제 막 눈을 떴을 뿐이고 아직 환자였지만 자식인 만큼 에드안을 발견하자마자 차츰 변해가는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읽은 에드안은 그대로 일어서 아게로의 손목을 꾹 내리 눌렀다. 도망치지도 자해하지도 못하게끔.


"아게로."

"당신이 왜!!"

"우리 타협이라는 걸 해 보자."

"싫어!"

"어쩔 수 없잖니. 살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너도, 나도, 살아야 하니까. 남는 손이 없으니 에드안은 이미를 맞대왔다. 가만히 눈까지 감는 모양새가 마치 기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정적 속에 엉망이었던 호흡도 차츰 원래의 페이스를 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같이 죽을까?"

"싫어. 그건 최악보다 더 최악이야."

"그래."


아게로가 말한 것은 에드안과는 그 무엇도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겠지만 당장 에드안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살아있어 준다는 이야기와 같았으니까.


"당신이 어떻게 할건데, 타협 같은 걸."

"뭐, 처음이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보마."

"........"

"어찌 생각하면 거래와 비슷한 것 아니겠니."


두 사람의 시작부터 짚어보자면, 처음은 이렇지 않았었다. 시작은 남 부러울 것이 없는 화목한 가족이었고, 아그니스의 시후에도 에드안의 자식들 중에서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본격적으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누이의 사후. 에드안의 비정상적인(이라고들 이야기하는) 애정에 대한 집착이 잦은 결혼과 관계로 이어지는 걸 아게로가 알아챘을 때 부터였을까. 어렸을 때부터 영특한 아이였으니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치 채는 것도 빨랐고, 가정 환경이 이미 그렇게 꾸며졌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주요했다. 어머니나 누나는 몰라도 그 때의 자신은 에드안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았기에 엇나가기 시작했을테지.


"당신이 나랑 거래를 한다고?"

"그래."

"바보같은 소리."

"내가 진심이 아니었다면 네가 의식이 없는 동안 이미 잡아 가뒀겠지."

"......."

"나는 네게 독립을 허락할 생각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널 믿고 기다려보마. 대신 너도 하나는 포기해 줘야겠지."


에드안에게는 적지 않은 수의 아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버지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은 것이 아게로였다. 때문에 에드안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과 꼭 같은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딸은 아그니스와 무척이나 닮아서 쌍둥이 남매는 에드안 내외에게 있어서는 사랑의 결실, 그 자체로 여겨졌다. 행복이 너무나 짧아, 자랑마저도 빠르게 퇴색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게 두기엔 그 순간이 지나치게 찬란했다.


"살아남아 줄 테냐?"

 

 

*



"잘 해결된 모양이구나."


진성이 도착하기도 전부터 에드안이 서울에 집을 보러 다닌다는 찌라시가 돌기 시작했다. 한성이 학을 떼며 쿤에게 해명을 부탁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얌전히 병실을 지키고 있는 쿤을 보니 일단 진성의 마음은 편해졌다.


"너 같은 꼬맹이 생각은 알 수 없지만 그 늙은이 생각은 훤하거든."

"....그거 자랑 아닌데, 이사님."

"버르장머리 하고는 진짜.. 해서 넌 어떻게 하기로 한거냐."

"그냥 원래 대로야."

"몸상태는?"

"그것도."

"......괜찮겠냐?"

"당연하지."


살아보라잖아? 그럼 해 보는 거지. 그런 일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은 가능하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자기 나이의 반토막도 살아보지 않은 꼬맹이의 옆모습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진성은 이내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그만 두었다. 담배가 말리지만 병원에서의 흡연은 안 될 말인지라 짧은 한숨이 그를 대신했다. 쿤을 받아준 건 순전히 그를 데려온 게 은인이자 상사인 V의 아들, 밤이 데려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진성만이 아니라 FUG Ent.의 모든 직원들은 쿤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 요컨데 낙하산 인사라는 거였다. 그는 그들이 길러낸 연습생이 아니었으니. 따지고보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매정한지 그에게 가르쳐주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밤이 먼저 전전긍긍할 정도로 불쾌함을 티 내고 있었으면서 다른 말로 포장하면 끝. 에드안의 집에서 나고 자라 왠만큼 꼬인 생각도 한번 보면 파악해 버리는 그의 눈에 그 상황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이제와서라도 에드안이 노력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처음부터 살 의지도 성공할 의지도 없었던 쿤에게는 한국 생활도 도움된 건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우리도 우리지만 네 동료들도 걱정이 많다. 오늘도 면회 오겠다는 걸 혹시 싶어서 내가 말렸거든. 의식이 돌아왔으니 시간 날 때 들러보라고 하마."

"됐어. 내일 나갈거야."


조금 미안해진 감이 없지 않아서 괜히 한번 쓰다듬어주기라도 할까 했던 진성의 손은 공중에서 맘췄다. 진성이 들어오던 때부터 그대로인 투명한 옆 얼굴, 투명하게 푸른 눈동자. 하늘 빛이 너무 맑아서인지 얼핏 비슷한 색채의 쿤이 흐릿해지는 환상을 본 것 같았다.


"좀 더 쉬는 게 좋을텐데."

"어디서든 쉬기만 하면 되지."

"재계약은..."

"언젠데?"


분명 몇 분 전에 살아보겠다고 말했던 쿤이지만 붙잡아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진성은 급히 계약 이야기를 꺼냈다. 날짜를 받거나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아주 잠깐, 안 한다는 이야기를 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일기도 했었다. 말했다시피 진성은 젊은 세대의 생각을 읽는데는 서툴러서 지금 든 예감이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쿤은 계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한번 자리한 불안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장 내일 숙소로 돌아오겠다는 거냐?"

"아니. 애들 시상식 연습할거잖아. 가면 뭐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랑 정리할 것도 남았고."

"하... 한성이 그 녀석은 지금까지 뭘 믿고 너 같은 꼬맹이한테 다 맡긴 건지..."

"내가 뭐. 이제 성인인데."

"나이만 차면 다 어른인줄 아냐. 그리고 너, 그쪽 법으로 성인인거지 한국 법으로는 아직 1년 남았거든? 미성년자에 환자가 뭘 알아서 하냐. 에드안도 믿을 놈이 아니고 정말... 어휴."

"........."

"못 미덥긴 해도 보호자가 있다니까 이번엔 넘어가지만 휴대전화 챙기고 회사에서 연락하면 바로 받아. 있을 데 없으면 회사 게스트룸 빌려줄 테니까 거기 있던가 하고."


갑자기 잔소리를 늘어놓는 진성에게로 드디어 눈을 돌린 쿤은 뭐가 그리 답답한지 안 그래도 단정치 못한 머리를 벅벅 긁어 더 엉망으로 만드는 진성을 눈에 담았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도 혼자 비자며 숙소며 금융권 계좌에 계약까지 다 해결했는데 이제와서 저런 잔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에드안도 독립을 허락한 마당에 회사에선 뭐가 문제란 말인가?


"아무튼 알아 들었으면 됐다. 푹 쉬고. 다음에 보자."

"......저 아저씨는 또 왜 저러지."


진성이 이미 돌아나간 뒤였지만 들어선 좋지 못할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걸 끝으로 쿤은 다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평일 낮 시간대인데도 서울의 풍경은 복잡하고 바쁘다. 그만큼 소음도 심했고 간간히 자신의 이름도 들려왔다. 회사에서 시큐리티 팀을 파견했다지만 팬들 중 일부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병문안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방금 전까지는 의식불명의 환자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멀쩡한 일반인이니까 병원 사람들은 그가 빨리 떠나줬으면 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다른 연예인이 문병을 와 주는 것도 아닌데 기자에 팬이 몰려 업무만 방해하고 있으니. 역시 쿤에게는 한국도 오래 머물만한 곳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



V의 집에 의탁해 있는 기간이 길어질까봐 걱정하던 차에 에드안이 집을 보러 간다기에 흔쾌히 부동산까지 알아봐 주었던 아를렌은 단 하루만에 서울의 부동산 특강이라도 듣고 온 것 같은 에드안의 열변을 들어야했다. 청담은 값이 비싼 주제에 유럽에서와 같은 저택은 없고, 압구정엔 얼굴만 번지르르한 젊은이들이 너무 많으며, 서초는 아파트만 많고 동네 자체가 재미가 없다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너한테? 아예 당분간 한국에 살 거야?"

"어."

"뭐?"

"벌써 전세 계약도 했어. 너네 집 맞은 편. 내일 이사."

"그럼 다 끝난 얘기잖아. 잊어버려, 에디."

"안 끝났지! 이제 아게로가 살 집을 구해야 한단 말이야!!"

"하?"


밤이 숙소생활을 시작한 이래 한시적으로나마 V와 알콩달콩하게 신혼 때와 같은 생활을 즐기고 있던 아를렌에게 에드안은 분명 불청객이었다. 그가 온 뒤로 부부 간에 분위기 잡을 일은 눈 씻고 봐도 없다시피 했으니 근처에 산다 쳐도 집안에서 나가주기만 한다면 환영할 일인 것이다. 그건 분명한데...


"너, 부모 노릇에 생각보다 열심이다?"

"이렇게 얼굴도 보고 대외홍보도 하고 그러는 거지."

"...용케도 걔가 너랑 같이 다닐 생각을 했네."

"뭐, 반쪽짜리 성공이지. 사실은 잘 모르겠어. 나랑 있을 때보다 나아진 건지 어떤 건지."

"왜? 화해한 거 아니었어?"

"내가 붙잡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기분이야. 내가 신경 못 쓰는 동안 더 변했더라고. 안 좋은 쪽으로."

"에디..."

"그래서 나도 좀 확실하게 방법을 바꿔볼까 해."

 

 

 

 

 

 

 

 

 

 

 

 

 

 

 

 

 

 

 

에드안 캐붕 죄송합니다...
그래도 법의 테두리가 있는 현실패치 하면 일부 다처나 학대는 못하지 않을까요??(아무말
아무튼 저점을 찍었으니 다음부터는 살살 분위기 좀 띄워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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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3

신의 탑/Exceptional

 

 

 

 

 

 

 

 

 

 

 

 

모든 매체들이 연말 결산과 시상식 준비에 한창인 요즘, 이맘때에 늘 있는 특별 이벤트 격으로 진행되었던 한 방송사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가 온갖 매체에서 대서 특필되고 있었다. 몇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 앙케이트는 인기있는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연예인들의 연예인, 소개받고 싶은 동료 연예인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특별 무대는?

"쿤씨의 인기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인기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밤... 이건 거의 대기실 밖으로 좀 나와달라는 아우성 아닌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무대는 본인들 제외 압도적인 지지율로 '본인들과 Exceptional의 콜라보 무대'가 사심을 가득 담아 1위에 올랐다. 화제성이 돈으로 계산되는 이 바닥의 특성상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과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건 조사 대상이 누구인지를 헤아려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익셉셔널의 인기를 확인하는 기회였는지 모르겠으나 연예계의 생태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흥미거리조차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에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 당당히 첫 손에 꼽힌 쿤의 경우에는 인터뷰 대상의 코멘트 결과 정리가 다소 눈물겨워서 팀 메이트인 익셉셔널의 멤버들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가수든 배우든 희극인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그와 친해질 계기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는데, 쿤 본인이 가진 비현실적이기까지한 이국적 외모 덕에 항상 관심은 기지고 있었지만 친해질 틈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개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 익셉셔널 활동을 할 때에만 방송가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 팀 메이트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말을 걸기도 어렵고, 방송에서도 말수가 적다보니 한국말을 잘 모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먼저 접근하기도 마땅치 않다는 거다. 작년부터 팀 내의 유일한 미성년자였던 고로 알게모르게 팀에서 과보호를 하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박혀 버린 것 같아서 이수로서는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익셉셔널은 이제 데뷔 3년, 곧 4년차가 될 테지만 쿤의 연예인 인맥이라면 팀메이트들을 제외하면 같은 기획사인 라크가 유일했다. 암묵적으로 말하는 포지션은 리더인 이수나 인기의 주축인 비올레였으니 사람들이 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게다가 최근엔 대기실에서조차 대부분 졸고 있으니...

"밥 먹어라, 귀치장. 너랑 잠탱이만 아직 안 먹었다."

"음.. 어, 어디?"

"내 꺼는 거기 레이어 샐러드와 연어장 덮밥이야, 무사."

"넌 가져다 먹어라. 이 건 이 녀석 거니까."

"쳇. 내 꺼도 좀 가져다 주지."

라우뢰의 볼멘소리가 들리지 않는 하츠는 가져온 도시락을 쿤에게 건넸다. 먼저 자고 있던 라우뢰에게 기대 진짜 잠들었던 차였는지 비몽사몽 간에 그 도시락을 받아든 쿤도 라우뢰에게까지 신경쓸 정신은 없어보였다. 음악 방송은 가수를 하루 종일 잡아두기 십상이라 대기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돌 가수들은 도시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데뷔 후 3년이면 주문한 곳에 따라서 자신의 취향이 뭔지도 확실히 알 때가 되어서 어떤 메뉴가 누구의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밤이나 이수, 하츠와는 다르게 라우뢰나 쿤은 취향이 분명한 편이었으니까 더더욱.

"자,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힘 내자. 시상식은 아직 컨셉이 안 나왔으니까 2~3일은 여유가 있어."

"쿤씨.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세요? 올겨울들어서 부쩍 추위도 많이 타시고 피곤해 하시는 것 같은데."

"내일 병원에라도 한번 가 볼래? 내가 태워줄까?"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 괜찮아."

괜찮다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하게 된 건 어릴 때 부터의 가정환경 탓이다. 쿤 가문의 아이들은 내로라하는 연예인의 피를 타고난 만큼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했다. 형제자매가 많으니 집안에서도 자신이 더 많은 주목을 받길 원했기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데뷔에 대한 문제든 재산싸움과 관련된 일이든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쿤이 그들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게 된 건 분명 쿤이 그들에 비해서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치 않아도 항상 주목받았고 그랬기에 오히려 아버지의 눈에 별로 띄고 싶지 않았다. 딱 아버지에게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분노, 어찌보면 경멸. 사리분별을 좀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그는 자신의 생모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서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모에게 구혼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부와 결혼해 자식까지 보고도 끝내 이혼을 택한 이모이자 새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남남인게 더 나은 가족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목을 매던 누나. 세 사람 중 누구에게도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우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려 해도. 그러니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쿤..? 오늘 진짜로 안색이 나쁜데."

"방금 깨서 그래."

시간이 나는가 싶으면 어디서든 눈을 붙이는 게 이득인게 아이돌 생활인지라 잠에서 막 깬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니 그런 핑계는 어색하다. 음식을 입에 넣는 걸 보니 큰 일은 아닌가 싶은 정도지 무대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창백한 낯빛이 대기실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늘 뒤풀이 하려고 했는데. 힘들면 일찍 숙소에 데려다 줄까? 어차피 넌 술도 못 마시잖아."

"이따 봐서."

절대 당장 어떻다는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익셉셔널 멤버들과 스텝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곧 쿤의 생일이다보니 이른 시간부터 공개방송 입장을 기다리는 팬들 중엔 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간 응원도구를 든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아이돌 가수라면 응당 기획사에서 생일파티 행사를 열어주곤 하지만 작년에는 그가 해외에 있었으니, 팬들은 올해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시상식 준비로 바빠질 때라며 팬들 사이에서도 추측이 무성했지만, 행사가 없다면 익셉셔널 멤버들이 늘 올려주는 멤버들끼리 하는 생일파티 영상이라도 올라올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다. 일상을 자주 공개하지 않는 편인 쿤이라 생일을 맞은 막내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많은 모양이었다.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쿤을 부른 밤이 익셉셔널의 팬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켜보이며 손을 흔들자 한 번, 이어 쿤도 같이 손을 흔들자 또 한 번 자지러지는 팬들의 함성에서도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보통 굿바이 무대라면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시상식을 비롯해 그들을 더 볼 수 있어서인지 다들 표정이 밝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쿤씨도 생일파티 하나요? 뭐 선물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너는 이미 줬잖아?"

"그건 작년 거죠. 몸에 좋은 거나 따뜻한 옷 같은 걸 드려야 할까요."

"그럼 나는 종합 비타민으로 정했다!"

"내가 무슨 노인네냐?"

"요즘은 20대가 제일 영양부족에 활동부족이라잖냐."

"이거보다 활동을 더 어떻게 하라고."

숨가쁜 매일을 살고 있는 아이돌에게 운동부족이라는 말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량이 많다고 해서 쿤이 건강해 보이는 건 아니니까 밤도 그런 쪽의 선물을 생각하게 된다. 과로였다니까 피로회복제라던가? 혹은 추위를 많이 타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잠옷이나 목도리 같은 건? 이수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골을 내는 쿤은 아까에 비해서 나아 보였지만 시작부터 썩 좋지 않은 상태로 시작한 이번 활동의 말미라는 게 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 얘들아. 이만 옷 갈아 입고. 마지막까지 잘 하자."

시상식을 제외하면 이번 활동의 마지막 무대이자 공백을 예고하는 굿바이 무대. 일정은 밤의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본 방송은 타이틀 곡만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며, 방금 리허설을 진행한 곳에서 다른 노래들의 녹화를 마치고 특설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리더인 이수가 모두를 불러모았다. 다 같이 화이팅을 한 번 외치고 나면 마법의 주문처럼 정신무장이 이루어진다. 항상 애용하는 보라색 인이어를 귀에 꽂으며 밤, 아니 비올레가 무대로 제일 먼저 발을 내딛었다.

*

아게로를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한 밤은 당장 다가오는 휴일에 약속을 잡았다. 과거의 인연으로 밤에게는 무른 구석이 있는 아게로도 흔쾌히 그러마 했던 것 같다. 밤이 아게로를 데려오기로 한 게 바로 내일. V의 말처럼 에드안이 V 내외의 집에 숨어(?) 살기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뭐 보냐?"

"아, 에디. 오늘자 굿바이 무대. 밤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거든."

"익셉셔널?"

"그렇지. 내 아들이랑 네 아들은 같은 그룹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봐서 보는 거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아....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과, 그것도 쌍방이 아니라 혼자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에드안이 철없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분야를 석권한 그의 자존심은 아들의 반항을 쉽게 눈감아 줄 수 없게 만드나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 답게 컴백 방송의 순서도 그 날의 가장 마지막, 그것도 3곡이나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배정받은 익셉셔널은 준비된 무대를 화려하게 채워나가는 중이었고, 특별하게 야외 무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지막 타이틀곡은 이르러서는 방송을 타고 넘어오는 관객들의 함성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간에 오열하듯 울며 응원봉을 흔드는 여러 국적의 관객을 비워주는 것이 방해로 느껴질 정도로 무대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아들의 무대는 V도 아를렌도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은 챙겨보고 있지만 회가 거듭될 수록 화려해지는 무대 연출과 의상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말은 없어도 미소를 띤 에드안의 옆얼굴을 보면 그도 공연이 만족스럽기는 한 것 같았다. 적어도 곡의 엔딩이 가까까워 올 무렵까지는 그랬다. 돌연 여기저기서 높은 비명이 터져나왔고 그에 안무를 소화하던 멤버들이 곁눈질로 무대를 살피다 멈춰섰다. MR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끊겼다. 명백히 방송사고라 할만한 장면이었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관객은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무대의 뒷쪽에 익셉셔널의 멤버 중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으니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이수를 시작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라이브 무대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어차피 마지막 곡의 말미였기 때문에 무대는 급히 정리되었고 MC들의 사과와 마무리 멘트로 방송 자체는 무사히 정리 되었다. 다시금 엄청난 기사의 러시가 시작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관심이 없는 척 했어도 생방송에서 아들이 그렇게 되는 광경을 목도한 에드안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소리는 없어도 무척 놀랐겠지. 밤의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V 역시 심장이 철렁 했었는데 말이다.

"가자, 에디."

".....V.."

"가자.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라면서."

넋이 나가있는 에드안을 V가 이끌었다. 마침 남편에게로 달려온 아를렌도 에드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한 눈에 파악하고는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징소는 가면서 기획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은 출발하자고.

*

"쿤씨!"

"아무나 빨리 구급대부터! 쿤! 쿤! 정신 좀 차려봐. 쿤..?"

쿤을 제일 먼저 안아든건 마침 동선이 가장 가까웠던 이수였다. 보통의 경우라면야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스텝들도 어느정도는 대처가 가능한 과로나 급성 저혈당으로 여겼겠지만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하며 청색증으로 멍든 것 처럼 색이 변하는 입술을 보니 정말로 큰일났다 싶어진 이수의 외침에 스텝들이 헬기까지 불렀다. 이 시간에는 퇴근길 정체가 심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일이 커 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매니저와 이수가 쿤과 같이 먼저 병원으로 향했고, 다른 매니저와 밤이 기획사에도 연락을 넣었다. 어쩔 수 없이 뒤풀이는 다른 날 다시 잡거나 연말 회식과 합쳐야 할 모양이지만 당장 그런 일을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방송 현장이었으니 팬들이 쿤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었지만 정리는 기획사에서 파견될 직원들이 대신 맡아주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병원에 빨리 도착했는지 이수가 금방 위치를 메신저로 알려왔다.

"밤!"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일이세요?"

"네 무대를 보다가.. 아게로군은? 병실은 어딘지 알고 있니?"

"아직이요. 이수씨가 응급실에서 조치를 마치고 병실을 배정 받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고..."

"다행이구나. 들었지, 에디?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야."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맞딱뜨린 어머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던 밤이었지만 다행히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에드안의 모습에 부모님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챈 밤은 우선 인사부터 건네고, 병실 번호를 알게되면 알려주겠다고 덧붙였다. 쿤의 말만 들어서는 에드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질래야 그럴 수가 없었지만 그는 쿤의 아버지니까. 온갖 매체 속의 그와는 달리 얼이 빠져있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보니 무른 밤의 성격으로는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주치의를 만날 수 있을까, V."

"정해지면. 네가 물어보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여긴 병원이니까 바로 대처할 수 있어. 제 때 알아채기만 하면 발작은 진정시킬 수 있다면서."

"발작이요? 쿤씨가 본가에 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밤."

이견은 있을 수 없었다. 신분과 상황을 고려하여 1인실을 배정받은 쿤을 멤버들이 보러 간 사이, 에드안은 V내외의 도움을 받아 쿤의 주치의와 먼저 면담을 가졌다. 앓고 있는 병이 있다면 주치의에게 이를 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하지만 잠들어 있는 쿤을 확인하고도 밤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에드안씨가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던 게 쿤씨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정확히 그들 부자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밤의 욕심보다 쿤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건 자명했다. 쿤은 익셉셔널에 남겠다 했지만 에드안의 대답에 따라서는 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쓰는 트랙 3입니다.
이번 편은 좀 짧은데 끊을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이제 한두편만 지나면 계획대로 연작모드로 갈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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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2

신의 탑/Exceptional

























방송에 오래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연예인의 눈부신 미모가 쉽게 빛바래지는 않을 터. 식당의 종업원들은 루프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를 향하고 있는 중년의 커플을 흘깃흘깃 곁눈질하기에 바빴다. 비싼 자리를 예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너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빗겨간 듯 잔주름 하나 없는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군더더기 하나 없이 피팅된 수트의 모양새까지 완벽하게 연예인.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인의 다갈색 머리와 중년 신사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에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식당은 소란스러워졌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쪽은 예약석이라 이미 다른 손님이 계세요.”

“내가 밥 먹겠다고 했냐? 그 손님한테 볼 일이 있다잖아!”

“그럼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릴 테니 잠시 저쪽 테이블에...”

“야, V!!!”

코트의 앞섶을 다 풀어 헤친 걸로 보아 추위를 그렇게 타는 체질도 아닌 것 같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무언가로 감싼 괴한은 그 수상한 차림새에 입구부터 막아서는 종업원들을 억센 손으로 뿌리치며 기어코 식당 안쪽으로 발 하나를 들였다. 종업원의 수가 좀 되는 곳인지라 곧 2차 저지선에 다시 붙잡히긴 했지만 190은 족히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완력에 젊은 장정들이 외려 진땀을 뺐다.

“....에드안?”

식당에 소란이 이는 와중이었으니 그림같은 잉꼬부부의 저녁식사도 당연히 순탄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 신사 덕에 종업원들은 수고를 덜었다.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아봤다는 게 그리 즐거운지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V를 반기는 모양새가 퍽이나 기뻐 보였다. 물론 얼굴마저도 마스크에 선글라스, 넥 워머를 하나 더 낀 상태로 가발에 후드까지 뒤집어써 그의 부모가 온다해도 알아볼 성 싶지 않은 괴상한 몰골이라는 게 문제였다. 코트 안쪽에 모자가 달린 조끼를 껴 입고 바지인지 롱스커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옷으로 발끝까지 감춘 옷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코트. 그 와중에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맨가슴을 드러냈으니..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기 전에 정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가 염려되는 차림새의 에드안을 보니 오랜 친구라는 V조차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곤란한 것은 식당의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괴한으로 인하여 그들이 궁금해하던 왕년의 슈퍼스타, V의 정체를 속 시원히 알게된 것은 좋았지만 기괴한 차림의 거한이 쿤 에드안이라니. 글로벌 대스타의 방문에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것이 원래의 수순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차림새가 아니라 부탁한 쪽이 더 민망해 질 것 같았다. 본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 큰 덩치로 방방 뛰며 V를 반기는 걸까?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일단 좀...”

“나 좀 숨겨줘, V!”

“........ 뭐라고?”

오랜만의 데이트를 방해받은 아를렌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에드안이 싹싹 빌 때까지 패 놓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꾹꾹 눌러참으며 남편과 불청객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는 건 과거의 빚이 있어서다. 양가의 반대를 무릎쓰고 맨몸으로 집을 나와 혼인신고를 하고 한국을 떠났을 때, 두 사람이 묵을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 에드안이었다. 집은 물론이고 그가 생활비까지도 지원해 준 덕에 두 사람은 양가의 허락을 얻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고, 외아들인 밤도 무사히 낳을 수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고작 데이트 한번 망쳤다고 타박하기는 그렇고 정말 그가 사기라도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찾아온 것이라 해도 한국에서 머물 수 있게 보살펴 주는 것이 도리겠지마는 천하의 에드안이 사기 같은 걸 당할 리가. 숨겨달라고 하는 이유가 빚쟁이가 아니라면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걸맞는 치정극 중이거나 몰상식한 경제활동의 대가로 원한을 가진 이가 뒤를 쫓고 있어야할 텐데 V에 비해서 그를 잘 모르는 아를렌이 생각하기에도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다. 애초에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저 괴상한 옷차림부터가 아를렌의 상식을 아뜩히 뛰어넘어 있었다. 아를렌과 같은 이유로 차마 나무라진 못하고 있어도 그녀의 남편 또한 지금 머리 속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아게로가 내가 한국에 온 걸 알면 안 돼.”

“아...”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저 멀리서 암레스트에 턱을 괸 채로 남편과 옛 친구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아를렌도 알겠다는 뜻의 탄성을 터뜨렸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부부의 외아들과 같은 그룹 소속으로 아이돌 활동 중인 에드안의 아들. 그 도련님이라면 에드안의 기행도 전부 이해될 수 있었다. 어째 이번엔 조용히 한국에 넘어왔다 싶더라니 또 에드안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 모양이다. 물론 아버지 못지않게 비상한 수완을 가진 아게로라면 작정하고 에드안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을 정상급 아이돌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데 기력을 낭비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비행기에서든 공항에서든 벌써 에드안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보냈겠지.

“에디. 일단 그것 좀 벗고 같이 식사라도 할까? 어차피 내가 이름을 말한 마당에 변장은 소용 없을 것 같은데.”

“헉! 그럼 어떻게 하지?”

“그 쪽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아게로군은 아이돌 가수니까 괜찮을 거야. 그 애 성격에 네가 움직이는 걸 알았으면 공항에서 이미 마주쳤겠지.”

“그런가... 설마 방송에 칼 들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칼? 아니, 일단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법에 저촉되는 일인 걸. 아게로군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 그런 게 허락되는 방송엔 못 나오잖아?”

운전면허야 곧 딸 수 있게 되겠지만 국내 법으로 성인이 되려면 아직 1년은 더 기다려야 할테니 에드안이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도 쿤이 흉기를 들고 방송에 나올 일은 없을 터다. V의 말에 납득한건지 에드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넥 워머와 마스크만 턱 밑으로 내렸을 뿐 변장을 아주 풀어 헤치지는 않았다. 한국은 인스타의 나라라는 걸 이미 조사하고 왔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이 부부의 데이트는 포기하고 에드안에게도 한 자리를 내어준 아를렌은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인 에드안의 몰골에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곤란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걸 가게 앞에 세워두는 건 더 문제니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에드안?”

시선 처리가 곤란할 뿐이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아를렌은 에드안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돌직구를 날렸다. 물 한모금 마시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V보다 담담한 반응의 에드안은 선글라스 속의 시선을 유리 와인잔의 수면으로 떨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

“자존심 같은 거 때문이겠지.”

“....그 꼴로?”

“아를렌.”

“흥. 모양새가 다 무슨 상관이야. 뭐라도 했다는 게 중요한거잖아.”

절제라는 걸 알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틀어질 부자사이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번엔 아를렌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에드안의 말처럼 지금은 행동할 때다. 자존심 따위의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도 두려운 거겠지. 이미 두 번이나 겪어봤으니 일이 벌어진 다음의 후폭풍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 터다. 아를렌은 잠시 눈을 감고, 먼 이국 땅에서 그녀와 V를 맞아주던 시절의 에드안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보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그는 야생마 같은 사내였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과 똑같이 바보 같고 똑같이 어리석었기에 더 행복했을 그를 생각하면 그녀 역시도 어쩔 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




익셉셔널의 정규 3집 활동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국내 팬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그들의 화려한 컴백을 반겨주었다. 정상급 아이돌의 증거라는 음원차트 줄세우기부터 이미 뜨거운 반응은 예고 되었다. 국내의 모든 음원 사이트의 1위부터 12위까지를 이번 앨범의 수록곡으로 채운 익셉셔널의 인기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어느 가게에서나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악으로 존재감을 다졌다. 최근의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컴백 쇼케이스와 특정 플랫폼의 사전 방송을 건너뛰었음에도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게스트를 초대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TV와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쇄도하는 출연 요청에 방송국의 전 스튜디오 순회라도 나서야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는 벌써부터 휴식기를 노리고 밤에게 드라마 촬영 제의마저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만하면 익셉셔널의 출연에 전 PD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비올레의 솔로 곡이 실물 앨범 특전 수록곡이라는 소식에 팬들의 성토가 쏟아졌지만 3집 음반이 날개돋힌 판매량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기획사든 유통사든 상술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 질 것 같다.

“어? 쿤씨는 같이 출연 안 하나요?”

“아직은 미성년자니까 심야방송 출연은 좀 그렇지. 쉬는 건 아니고... 너 그 때 라크랑 같이 다른 쇼 프로 사녹 있어.”

“악어랑?”

“악어.... 걔가 왜 악어냐?”

“보자마자 떠오르지 않아?”

“그런가....? 요즘 애들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여하튼 이제 이번 주 스케줄은 대충 알겠지? 이번 주도 화이팅 하고. 내가 있다가... 9시쯤 데리러 올테니까 옷 갈아 입고 헤어체크 받고 기다려.”

요즈음 아이돌 치고는 드물게 정규 앨범으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데뷔 2년 차에 3번째 정규 앨범이라는 것도 빠른 편이지만 데뷔부터 인기몰이를 했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숨가쁜 활동이 전혀 이상하진 않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시작부터 팀의 가장이었던 비올레가 여러 연예활동에 매진하며 성과를 올려 주었고 다른 멤버들도 뒤를 이었다. 그나마 개인사도 복잡하고 나이 때문에 방송 활동에 일부 제약이 있는 쿤만이 익셉셔널 이외의 활동이 없다시피 했는데, 조만간 모국 기준으로는 법적 성인이 되니까 휴식기에 접어든다고 해도 섭외 요청이 쇄도하지 않을까? 일단 미끼는 던져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 바닥의 특징이니. 활동이 있는 아침에는 거의 항상 숍에 들러서 정비를 받긴 하지만 오늘은 어제 저녁에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나오는 게 늦어서 일부 순서를 좀 뒤집었다. 그래서 더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벤에 올라타면 또 다들 깊은 잠에 빠진다. 물론 라우뢰처럼 그런 것과 아무 관계 없이 늘상 수면상태를 갈구하는 인물도 있긴 하지만.

“저기 쿤씨.. 주무세요?”

“아니? 왜?”

“엊그제 유 실장님이랑 무슨 얘기를 하셨나 해서요.”

“아..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네?”

“지금은 잘 해결 됐어.”

“진짜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의 밤이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밤의 귀여운 표정에 쿤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귀여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환경상 쿤은 귀엽다는 칭찬은 받아본 일이 거의 없이 자랐다. 작고 앙증맞을 시절부터 귀여움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성인이 가까워 온 지금에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귀여움이라는 건, 혹은 애교라는 건 사랑받고 자라온 사람들이라는 증거 같은 거라고 쿤은 생각했다. 그저 맛만 본 정도인 자신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무언가를 밤이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부럽다.

“응.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무슨 사고를 치셨던..? 건데요?”

“그 말은 좀 이상하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실장님 호출이라고 해서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물론 밤도 말을 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쿤이 짚어주니까 부끄럽고, 그 분위기 대로 쿤이 대답을 회피할까봐 억울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겉으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고 해도 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어울려 주고 있던 쿤이 이런 사건들을 빌미로 활동을 그만 두겠다고 할까봐 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쿤은 밤의 걱정을 몰랐으면 싶다가도 막상 진짜 모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면 이렇게 억울해져 버리는 자신을 밤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언제 말똥말똥 귀여운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이 쿤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을 들이미는 통에 정말로 놀란 쿤은 밤의 얼굴을 일단 밀어냈다.

“잘 해결 됬다니까. 그래서 이렇게 같이 활동 중인 거 아냐.”

“에드안씨가 정말로 위약금 물고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었어요?”

“뭐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였어?”

“아니요! 왜 그렇게 큰 일을 얘기 안 했어요?”

“안 한게 아니라 못 한거지. 스페인에 가 있을 때 알았고 그 길로 뛰어왔는 걸.”

“그럼 이제 괜찮은 거에요?”

“응. 어차피 곧 성인이니까 생일 지나면 바로 계약서 다시 쓰기로 했어. 혹시 모르잖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쿤 씨의 본가는 아르헨티나에 있지 않던가요? 스페인쪽으로 자주 가시네요?”

“국적이 거긴데. 난 어머니쪽 성을 쓰잖아?”

“그런 거였어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고 눈으로 이야기하는 쿤을 보니 할 말도 없고 머쓱해진 밤은 머뭇머뭇 쿤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집안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쿤이 싫어하니까 못 한 거지만 지금 시시비비를 가려 무엇할까? 일이 잘 해결 되었다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지. 밤이 납득한 분위기가 돌자 쿤도 곧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예민한 그 답지 않게 최근에는 잠을 잘 자고 있는 편이지만 과로로 입원까지 했던 몸이라 아직 피로한가보다. 졸다보니 자연스럽게 밤의 어깨에 기대는 쿤의 머리를 받혀주며 밤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결과적으로 밤이 그를 위해 한 일은 아직도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만 쿤이 스스로 밤의 곁에 남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벅차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성격에 정말 한국에서의 아이돌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에드안을 핑계로 우선은 이 팀을 빠져 나갔을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랑 비슷한 건가?’

앉은 채로 키를 가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의 어깨얹힌 눈부신 색채의 머리통을 보며 밤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의 성장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쿤의 나이가 더 어린만큼 곧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테니까 말이다. 촬영을 할 때는 정해진 배치가 있고 또 그 배치를 따라 갔을 때 전체 그림이 좋게 나오도록 여러장치를 하기 때문에 당장의 실제 키를 가늠하긴 어렵다. 에드안이 장신이라더니 유전자의 힘인지 쿤은 처음 팀에 힙류할 시점부터도 나이에 비해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한번 앞지르고 나니 따라 잡힐까봐 신경이 쓰이게 된 밤이었다. 솔직히 너무 남자답게 자라서 밤이 좋아했던 모습이 전부 사라지면 어쩌나를 걱정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의 쿤은 너무 말라서 그런 걱정은 아예 잊어버렸다. 그래도 따라잡히는 건 싫으니까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키를 키워야지. 애초에 다른 사람의 성장을 밤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였고 그럴 방법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보니 밤의 걱정은 기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밤의 첫사랑일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의 사랑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 모르겠네..’

키는 지금 정도의 차이가 딱 좋다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쿤이 더 크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활동이 이어지는 동안은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고있는 만큼 밤은 쿤의 몸 상태가 제일 걱정이었다.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쿤의 어머니도 쌍둥이 누나도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기에 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걱정이 앞서곤 했다. 쿤은 아버지 쪽을 많이 닮았다고 하고 그 아버지 되는 에드안은 아직까지 물 건너의 연예계의 패왕이라지만 어머니쪽을 본 적이 없으니 다들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이야기 하는 건지도 모르잖는가?

“올레야, 이제 애들 좀 깨워라. 거의 도착 했거든?”

여하튼 밤이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은 오늘도 길지 않았다. 3집 활동은 이제 시작이다. 요즈음은 한 곡의 활동이 길지 않지만 그만큼 더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힘을 내서 어서 해치우고 다시 숨 돌릴 틈을 얻어야지. 아이돌의 주말은 그렇게 얻을 수 밖에 없으니까.




-




에드안은 결과적으로 V와 아를렌의 집 손님방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밤이 본가로 돌아올 일은 당분간 없을테니 에드안이 무리하게 외출을 강행하지만 않으면 한국에 있어도 쿤에게 들킬 염려는 거의 없는 셈이었다. 남은 문제는 에드안이 과연 자기 성질을 얼마나 죽일 수 있느냐.

“에디, 마스체니한테는 이야기를 잘 하고 온 거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어차피 요즘은 안 좋을 때야.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걸.”

“그럼 아게로군이 더 힘들어 지는 것 아냐?”

“그래서인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 내가 직접 찾아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겠다는 거야? 대단하네... 우리 아들도 그런 건 좀 배웠으면 좋으련만.”

“넌 왜 아들을 못 쫓아내서 안달이냐. 자식이라봐야 하나 밖에 없잖아.”

“내 쫓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단력이 있다던가 심지가 굳다던가 하는 말들이랑은 거리가 멀거든 애가.”

자식을 상대로나 아내를 상대로나 팔불출 소리 듣기 딱 좋은 성격의 V가 왠일로 아들에 대한 푸념을 한다 했더니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는 흐름이다. 에드안이 아는 밤도 확실히 누가 등을 떠다 밀기 전까진 혼자 결정을 못하고 우유부단한 편이지만 어머니를 닮아서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밤이 아게로 같이 판단을 내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독불장군이 따로 없을텐데 차라리 지금이 낫지 않으려나? 여하튼 밤의 단점이 ‘우리 아들은 심성이 너무 고와서 말이야..’로 시작되는 아들 자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별 생각 없이 들어주며 에드안은 차 대신으로 V가 내어온 레드와인을 홀짝였다. 일단 친구의 취향을 잊지 않아준 것 까진 고마운데 아를렌이 없었다면 안목은 싸구려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친구답게 그렇게까지 고급스러운 풍미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도 물어봤지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만날 거야. 먼저 어떻게든 설득을 좀 시키긴 해야겠지만.”

어떻게든이라고 하는 걸 보니 계획 없이 일단 한국에 와서 생각하자는 식으로 무작정 입국한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만, 변장이랍시고 걸쳤던 괴상한 옷 더미를 풀어놓은 에드안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표정을 지운 그 얼굴을 언제 봤었는지 떠올린 V는 허점을 찌르려다가 그만 두었다. 평소의 가벼운 분위기가 사라졌을 때의 에드안은 실로 위험한 남자였다. 물론 V가 두려워 하는 건 그의 힘이나 권력을 이길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될까? 사정을 알아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달쯤 전에 아게로가 갑자기 쓰러졌었어. 아주 늦은 시간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발견했지. 뭐, 진탕 마시고 들어오다 문을 잘못 연 것 뿐이었지만 여하튼 운이 좋았어.”

“설마..”

“맞아. 그 설마지. 난 당장 입원시키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위험하니까. 그런데 아게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보다 본가에 붙어있는 게 더 싫었던 모양이야.”

“곤란하네.. 그러고 바로 한국으로 와 버린 거지?”

정확히 잘잘못을 가리지면 아게로가 본가에 있을 때 마저도 허랑방탕한 모습을 보인 에드안도 문제였겠지만 그것부터 나무라면 큰 맥을 짚을 수가 없다. V 내외의 외아들인 밤의 친구이기도 해서 그도 꾸준히 안부를 묻곤 했던 에드안의 아들이니 모르는 척 하기도 어렵다. 아니 그 전부터도 어쩌면....

“밤한테 연락이 닿으면 아게로군을 초대하라고 얘기를 해 볼게. 답답하겠지만 그 때까진 여기에서만 지내는 게 좋겠어. 들키면 안된다고 네 입으로도 얘기했었잖아?”

“으... 언제쯤 네 아들한테 연락할 수 있는데?”

“문자야 당장 해 보겠지만 애가 워낙 바빠서 말이지.. 이번 활동이 끝나야 하니까 한 한달쯤 걸리지 않겠어?”

“한달이나 걸린다고?!!!”

“네가 아게로군이랑 대화에 실패하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윽..”

“잘 생각해봐, 에디. 한달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야. 네가 좀 믿음직한 이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는게 아게로군을 설득하기엔 더 나을 거 아냐. 네가 변하지 않는데 아게로군이 본가에 돌아가려 하겠어? 그 집에 진짜 가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너 밖에 없는데 네가 잘 해야지.”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어 에드안의 머리는 V의 말이 길어질 수록 점점 더 깊이 숙여졌다. 에드안에게 아게로가 필요한 것이지 아게로는 아버지라면 학을 떼니까 노력해야 하는 쪽이 에드안이라는 건 정해진 사실이다. 다만 불리한 관계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 에드안의 본능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겠지. 긴 한숨을 푹푹 뱉어내긴 해도 에드안은 끝끝내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게로마저 없어지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곁에 있으면 그나마 눈으로 확인 하면서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참는다고 해도 기약이 없으니 그게 문제지.

“한 달만 참으면 될까? 네가 잘 말해주면 아게로도 마음이 풀릴까?”

“솔직히 네가 지금까지 해댄 게 있으니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이야기할 마음 정도는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는 안 돼! 난 더 힘들더라도 성과가 좋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그게 다 네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잖아, 에디. 그 애와 무슨 이야기를 할 지 고민하는 데 한달 정도는 써야하지 않겠어? 그런데 대체 아게로군이 뭐라고 했길래 당장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 찾아오면 눈 앞에서 죽어버릴 거라고 했어.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못 할 것 같냐고.”

“...하.. 하하.... 무시무시한 협박이네..”

“걘 진짜 한다고! 쥐방울만할 때도 봐. 내 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한마디 했다가 정말 너희 집으로 가출 했잖아.”

생각해보니 V도 아게로의 결단력을 부러워해선 안될 것 같다. 밤은 지금의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을 고쳐쓰며 V는 드디어 한달간 모범적으로 살아갈 결심이 선 것 같은 에드안의 넓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행 온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긴 정말 멋진 곳이거든요.

도피생활이었지만 에드안과 V 내외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남편의 오랜 친구라는 말에 몸소 찾아왔던 아그니스는 그들의 기억 속에선 온기 그 자체였다. 그 날의 햇살이 지금의 에드안을 붙잡아주고 있다는 걸 V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에드안 내외가 V와 아를렌을 돌봐준 건 밤을 얻을 때까지 3년 여. 그 시간에 힘입어 여태까지 행복을 유지한 V가 그녀의 피붙이와 관계된 일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들인 밤도 아게로를 무척 좋아하는 눈치이기까지 하니까.




-




“쿤? 그렇게 졸려?”

“이제 시작인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군.”

“뭐래. 카메라 앞에서만 안 그러면 되는 거지.”

인기인이면 아무래도 아무것도 없는 시절보다는 나은 구석이 많지만 아이돌 가수의 뿌리깊은 위계질서상 불합리하게도 선배 가수의 일정에 많은 것을 맞추어야 했다. 존경할 구석이 있다거나 융통성을 발휘할 때도 있는 선배라면야 원래 이 바닥의 규칙이 그렇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후배의 인기를 질투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패를 부릴 때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나마 팀 메이트들의 성격이 좋아서 시간 떼우는 건 문제 없는데 피로감이 가시지 않아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 당장은 대기 중이니까 상관 없지만 쿤이 실수를 연발한다던가 리허설 시간을 길게 잡아먹으면 재수없는 유한성 실장이 이때다 하면서 호출할테니까 바짝 신경 써야겠다. 한성은 소문처럼 에드안 안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까지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는 타입은 아니라서 본업만 완벽하게 처리한다면 의외로 따로 귀찮게 하진 않는 스타일이다. 한번씩 있는 상담을 늘 더럽게 마무리하는 건 어쩔 수 없고.

솔직히 전 이렇게까지 해서 쿤씨와의 계약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생각하면 골치만 더 아파질테니 억지로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흩어버린 쿤은 이수의 이어폰 한 쪽을 빌려 귀에 꽂았다. 팀의 프로듀서 답게 선곡센스가 좋은 이수는 이번에도 처음 듣지만 느낌은 좋은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워 놓았기에 흡족하다.

난 너 까지도 그렇게 잃을 수는 없다.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 놀음에 겹쳐들리는, 두껍고 거칠지만 익숙한 그 목소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드디어 쓰네요...
이제 완결까지 한 우물을 팔 수 있을지에 대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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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1

신의 탑/Exceptional










“오늘은 진짜 고마웠어.”

 점심도 얻어먹고 선물이라며 차량용 방향제까지 받았는데 황송하게도 숙소에 거의 도착할 무렵, 밤은 추가로 감사 인사를 한번 더 받았다. 밤이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차를 태워 준 것에 대한 보답이겠지만 쿤의 성격상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을 할 때는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데, 콩깍지가 씌인 밤의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엽게 보여서 문제다. 다른 사람들은 인사가 성의 없다며 오히려 잔소리를 하던데.

“뭘요. 선물도 받았고 점심에 저녁까지 얻어먹게 생겼는데. 게다가 쿤씨는 아직 면허도 없잖아요? 제가 태워주는 게 당연하죠. 같이 쇼핑했는데 숙소로 돌아가는 건 쿤씨가 매니저 형을 불러서 따로 간다고 해 봐요. 금방 불화설 터질걸요?”

“그건 그렇지만.. 나도 어서 면허라도 따야 하는데.”

“올 해부터 딸 수 있잖아요? 어려운 건 아니니까 쿤씨라면 금방 할 거에요.”

 밤을 제외하면 평소에 서로 반말을 쓰기 때문에 오랜 팬이 아니라면 익셉셔널 멤버들의 나이를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부분의 예상과는 달리 팀에서 막내는 밤이 아니라 쿤이다. 비율이 좋아서 원래 신장보다 커 보이는 데다가 못 하는 게 없는 이미지라 쿤이 면허가 없어서 운전을 못한다고 하면 동료 연예인들조차도 깜짝 놀라곤 한다. 데뷔하고 2년 여가 흘렀으니 그도 곧 운전면허에 도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겠지만 의외의 귀여움을 주던 요소가 사라진다니 밤도 쿤의 팬들만큼이나 그 사실이 못내 아쉽다. 이렇게 가끔 오는 행운이 더 드물어 진다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면허야 그렇겠지만... 어? 내가 이것도 샀던가?”

“끼워주신 거 아닐까요? 다 같이 먹을 거라고 잔뜩 주워담았으니까요. 오늘 포식하겠는데요?”

 돌아오는 길에 숙소에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과도 나눠먹으려 간식을 잔뜩 샀는데, 분식집 주인분께서 뭔가 서비스를 주셨나보다. 종이봉투들을 들춰보던 쿤이 이제야 덤을 발견한 모양이고. 신호에 걸렸을 때 밤도 그 쪽을 흘깃 보니 김밥 두 줄이 따로 포장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떡볶이와 각종튀김, 이수를 위해 특별히 순대까지도 샀지만 김밥은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골고루 먹어볼 기회가 생겨서 기분이 좋다.

“그러게.. 이수 녀석은 컴백 전에 급조 다이어트 한다고 했는데 이런 거 사 왔다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겠지.”

“이수씨라면 말은 그렇게 해도 맛있게 드셔주실 것 같은데요.”

“그게 문제 아닌가? 난 두 배로 억울하다고.”

“하하...”

 분명 밤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억울했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먹고 싶어서 사 온 거니까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나보다. 뭔가에 빠지면 무섭게 집중하는 밤과 달리 쿤은 늘 주변사람들의 반응을 신경쓰니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겠지. 흔히 아이돌이 아닌 본래의 그를 아는 사람들은 쿤의 성격에 대해서는 재수가 없다거나 오만하다면 식으로 박한 평가를 내리곤 하는데 정말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같으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을테니까, 밤은 그 사람들이 외려 쿤을 잘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대신 변명을 해주면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며 밤의 진심까지도 매도당하기 십상이라 오래지 않아 그만 두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많이 먹어야죠. 컴백하면 이수씨 다이어트도 금방일걸요? 쿤씨도 좀 잘 드시면 좋을텐데요. 쓰러졌었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알아요?”

“뭐 별일이라고. 며칠 밤 새면 다 그렇게 되.”

“밤을 새요? 왜요?”

“이번에 좀 귀찮은 일을 맡게 됬는데 그렇다고 대충 하기엔 자존심 상하는 종류라서 말이야.”

“네?”

“요컨데 너무 열심히 해 버렸다는 거지. 아무튼 그 다음에 병원에도 다녀왔고 지금은 멀쩡해.”

 밤의 아버지이자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미남 배우라는 V가 쿤의 아버지인 에드안과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아들들의 인연까지도 이어지고 있다지만 솔직히 밤은 쿤의 집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에드안의 화려한 여성편력 덕분에 쿤의 형제가 상당히 많다는 건 꼭 밤이 쿤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관심이 있는 누구나가 알 법한 이야기였다. 그 중 몇몇은 쿤과 사이가 나쁜데, 쿤은 그게 에드안이 그들을 부추긴 영향이라고 했다. 쿤이 에드안의 뜻을 저버리고 한국에 머무는 게 아니꼬와서 별 시답잖은 사주를 한 것이라고. 여하튼 그들과 엮이면 피곤한 일이 생기기 십상이니 쿤은 그간 계속해서 독립을 노려왔는데 에드안의 허락을 받기가 어려운지 성공하진 못했다. 그 쪽의 법으로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독립이 어렵다는 것 같았다. 때문에 이번에 집을 구한다는 것도 곧 성년이니까 드디어 성공한 것인지 쿤의 독단인지 아직 확신이 없는 밤이지만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물러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럼 에드안이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데려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좀 덜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밤이 그런 걱정을 하는 지도 모를 쿤은 숙소로 쓰는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에 밤이 주차를 마치자 아까 챙겨두었던 순서대로 짐을 들고 그를 따라 내렸다. 먹을 걸 빼면 무거운 게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양 손 가득인 동행인을 두고 혼자 빈 손으로 걷는 건 민망한 일인지라 밤은 짐을 나눠달라고 했다. 굉장히 소소한 일상이지만 이런 일을 단 둘이 처음 한다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혼자서는 못한다는 이야기를 절대 입에 담지 않는 그와 함께하려면 이렇게 틈이 보일 때 잽싸게 끼어들어야 한다. 그걸 잘 해냈다는 점에서 밤은 오늘의 스스로가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게다가 따뜻하게 입는다고 두꺼운 코트에 목도리까지 꽁꽁 싸맨 쿤이 귀여웠으니까.

“아, 맞다. 들어가기 전에 줄 거 있어요, 쿤씨.”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밤은 야상의 주머니를 뒤적여 손바닥만한 병을 하나 건넸다. 정전기를 없애는 물건인데, 둘이 다녀온 곳에서 파는 물건 답게 유기농 성분이며 향이 고급스럽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계통의 향을 써 본 적이 없는 쿤이지만 부드러운 느낌의 비누향은 정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물건이었달까?

“애용하시잖아요. 외국에 계셔서 생일 선물도 따로 못 드렸고 해서 하나 샀어요.”

 객관적으로 이건 고맙다고 해야하는 상황이다. 쿤도 당연히 그리 판단하고 있었지만 작은 유리병, 이어 다정하게 웃고있는 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많은 생각이 덮쳐와 순간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생일 같은 걸 누가 챙겨준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겨울 즈음엔 늘 한국을 떠나 있었던데다가 자신의 수많은 형제들은 각별한 몇을 제외하면 생일 같은 걸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에드안 마저도 그런 것에 관심이나 있을까 싶었다. 그는 철창같은 본가에 자신을 가두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지 진짜 쿤의 마음을 헤아려주진 못했다. 항상 그랬다. 어머니가 사라지고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크기만 큰 집에서 쿤이 마음을 기댈만한 구석은 쌍둥이 누나밖에 없었다. 생일 선물이란 걸 받아본 것도 그녀가 있었던 때가 마지막. 그랬던 누나마저 사라지고 난 후엔 그 집에서 정을 붙일만한 게 쉬이 생기지 않았다. 가족과도 그런 관계인 마당에 타인과는 더 벽을 느꼈다. 그나마 먼저 물어왔기에, 생일을 이야기 해 준 것도 밤이 처음이었고 선물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연예인으로 살게 되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수한 선물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서라는 느낌이 나는 물건을 받아본 일은 없었으니까.

“고마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림음에 정신을 차린 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밤의 등에 대고야 겨우 감사를 전할 수 있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어차피 얼굴을 마주 대한 상황에서는 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밤이지만 목소리에 실려있는 감정이 밤의 기대와는 사뭇 달라서 뒤를 돌아본 밤은 그가 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말보다 손이 빨라 빈 왼손이 쿤의 얼굴을 감싸자, 촉감에 놀랐는지 쿤이 크게 뜬 눈을 들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있는 걸 또 드렸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똑같은 게 있어도 네가 준 게 더 소중하지.”

“하지만 표정이 어두우셨어요.”

“아.. 잠깐 누나 생각이 나서.”

“.......”

“어서 들어가자. 음식은 식으면 맛 없잖아.”

 가족들에게 정이 없는 쿤이 형제를 가리켜 형이나 누나, 여동생 등과 같은 가족적인 호칭을 써 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쿤이 누나라 지칭할만한 여성은 단 한사람. 지금은 세상에 없는 그의 쌍둥이 누나다. 그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유쾌할 수는 없겠지만 쿤이 그녀와의 추억을 그릴 때, 차가운 분위기가 누그러진다는 것만은 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밤의 선물은 합격이었다는 뜻일까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밤은 쿤의 새하얀 뒷 모습을 따랐다. 밤의 선물의 어떤 부분이 누나를 떠올리게 만든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환하게 웃어보일만큼 멋진 선물을 하겠다는 도전정신도 불태우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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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쿤의 예상대로 이수가 좀 툴툴거리긴 했어도 간식은 대 성공이었다. 컴백 직전까지 연습으로 몰아치다가 딱 하루 주어진 휴식시간이지만 밖으로 돌진 않는 성격들인지라 다들 숙소에 틀어박혀 있던 마당에 얻은 뜻밖의 선물은 격렬한 환영을 받았다. 한번의 외출이 녹록치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처지라 얼마만에 먹어보는지 모를 분식이 기꺼운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츠조차도 검도를 배우기 위해 여러 도장을 전전하던 시절에 가격이 저렴해서 즐겨 먹었다니 끝난 이야기 아닌가? 멤버들이 분식 파티를 벌이는 동안 새 모이만큼 주워 먹고 먼저 씻겠다며 방으로 들어간 쿤은 다른 멤버들과 함께 떡볶이 국물 한 방울까지 먹어치운 밤이 방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잠들어 있었다. 데뷔 이래로 밤은 늘 쿤과 같은 방을 사용했지만 쿤이 밤보다 먼저 잠드는 일은 손에 꼽는지라 눈 앞의 일이 낯선 밤은 이미 꿈나라에 가 있는 쿤에게 진짜 자느냐고 묻기까지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언젠가의 조공이었던 연회색 이불에 휘감긴 채로 잠든 쿤의 고른 숨소리가 바로 그 대답이었을 테니까.

“아, 밤. 너 내일 뒷풀이 가면 나 엔도르시 사인 한 장만. 얼라? 쿤은 벌써 자? 별 일이네. 피곤했나?”

“그렇게 여기저기 끌고 다니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에?”

“코스는 제가 짰거든요.”

“무슨 쇼핑하는 데 그런 거창한 준비를 해...”

“아프셨다니까 더 짧게 가야 했을까요?”

“아... 실장님이 내일 좀 보자더니 그것 때문인가?”

“유 실장님이요?”

“쿤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나한테 전화 왔었거든. 너희 없을 때.”

 유한성 실장이라면 학을 떼는 쿤이 아무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그는 잠든 게 확실하다. 내일 실장의 호출 사실을 알게 되면 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걱정된다만 드라마 종영 뒤풀이가 있는 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한성도 그걸 알고 호출을 내일로 미룬 것이겠지. 그는 밤이나 다른 멤버들에게는 공평한 편이었지만 쿤에게는 유독 냉정하게 구는 면이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유명한 쿤 에드안의 안티라 아들인 쿤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보다. 회사에는 한성만 있는 게 아니고 이수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마는 항상 밤이 없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밤에게는 좀 불만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쿤이 한성에게 유독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의 편애를 받고 있는 밤이 나서는 편이 제일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텐데 말이다.

“유 실장님이 너무 쿤씨를 괴롭혀서 쿤씨가 팀을 나간다거나 하면 어쩌죠?”

“글쎄. 우리가 열심히 말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누가 봐도 한성이 쿤을 괴롭히는 이유는 밤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꺼먼 속내를 들여다 보는 일에 유독 약한 밤이 스스로 그 사실을 깨우치려면 한참 멀었다. 밤이 깨닫느니 쿤이 성불하는 게 먼저일 거다. 정말로.

“그나저나 녀석답지 않게 우리가 이렇게 떠드는데도 잘 자네. 시차 적응이 덜 됐나?“

 익셉셔널에 외국인 멤버는 쿤만 있는 게 아니지만 바로 옆인 일본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스페인의 시차는 차이가 심하니까. 당장은 옆에서 누가 떠들던 잘 자고 있는 쿤이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어찌 될 지 모르니 밤과 이수는 곧 방을 나와 문을 닫아주었다. 아직까지 대중에게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익셉셔널의 숙소는 회사에서 임대한 평범한 아파트로 제일 큰 방에 스텝들과 라우뢰가 함께 지내고, 하츠와 이수, 그리고 밤과 쿤이 각각 하나의 방에 함께 지내고 있다. 독방인 줄 알고 좋아했던 라우뢰는 가장 번잡한 방에서 지내게 된 것을 알고 뒤늦게 자비를 들여 수면캡슐을 하나 들여 놓았는데 다행히 이후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인지라 회사에서 넣어준 기본적인 가구 이외에 멤버 개개인의 취향이 반영될만한 틈은 거의 없지만, 팬들이 준 선물 중 선별된 것이라던가 생활 필수품이라는 이유로 소품 중에서는 간혹 개성이 뚜렷한 물건들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도 멤버 의 이름이 적힌 선물과 팬레터 보따리가 도착해 있는 거실은 그 개성의 집합소로 이미 자러 들어간 지 오래인 라우뢰와 쿤을 제외하더라도 입고 있는 의상만으로도 존재감은 뚜렷한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비교적 평범한 후드티와 면 바지 차림의 밤과는 달리 하츠는 팬이 선물로 준 초록색 공룡 잠옷을 걸치고 있었고 이수는 오늘도 당당한 보랏빛 츄리닝 차림이었는데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재질이 벨벳이라 상당히 눈에 띄었다.

“쿤씨가 일찍 잠들어서 그런데 저 바깥 욕실에서 씻어도 될까요?”

“어어. 난 상관 없어.”

“괜찮다. 나도 아직 수련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넌 또 어디서 그런 옷을 주워 입었냐?”

“팬 분께서 주신 감사한 선물이다. 겉모습만 보고 모욕하지 마라.”

“모욕이라고 보다는 뭐랄까... 네 팬분들은 좀 대단한 분들인 것 같아.”

“그렇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

 뭔가 대화가 잘 풀리고 있지 않은 기분이지만 밤이라고 통역을 잘 해낼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욕실 사용 허락을 얻어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할까? 이수가 고집하는 츄리닝을 제외하면 다른 데에는 까다롭지 않은 두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욕실에는 딱히 밤의 시선을 끄는 물건이 없었다. 아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 하츠의 잠옷처럼 어느 팬의 선물일 것이다. 자신의 팬을 자처하며 보내온 선물을 하나도 허투로 대하지 않는 하츠는 그것이 아무리 괴상한 것일지라도 꼭 끝까지 사용을 하니까 말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그의 팬들이 점점 기이함의 레벨이 높은 선물을 보내온다는 게 익셉셔널의 최근 고민거리지만 사람의 성격이란 그리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수도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심하다 싶은 것은 거르는 기준이 있어서 하츠의 경우처럼 팬의 성향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오히려 그가 직접 고른 것들에 컬쳐쇼크를 느낄 일이 종종 있어서 문제지. 개인 사물도 없거니와 팬들의 선물을 바로 본가로 보내버리는 라우뢰는 남는 시간을 모조리 잠에 투자하는 지라 숙소에서는 마주칠 일조차 거의 없다.

“밤, 네 선물은 너무 많아서 팬레터만 빼고 바로 본가로 붙일까 물어보는데?”

“네. 제가 나가서 대충 나눠 놓을게요. 죄송해요, 이수씨.”

“네 인기가 우리 인기인데 뭘. 그래도 이번엔 좀 나아.”

 아마 스캔들의 영향이겠지. 밤의 선물은 항상 독보적인 양을 자랑했는데 최근에 터진 염문설의 영향으로 잠시 밤의 인기가 주춤한 게 선물의 양으로도 드러난 것 같았다. 해도 회사측에서 금방 해명을 했고, 한성이 재빨리 컴백 소식의 엠바고를 풀면서 진화가 잘 되었으니 조만간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 말이다. 컨셉이 정해질 때까지 길렀던 머리를 다시 단정하게 다듬고 나니 씻는 게 확실히 수월하고 가뿐해진 것을 느끼며 샤워가운을 걸친 밤은 파자마로 갈아입고 나와 스텝들과 함께 거실의 선물 분리를 시작했다. 밤도 본가가 가까워 대부분의 선물은 그 곳에 보내 놓는 편이고, 이수와 라우뢰도 비슷하다. 본가에 보내는 게 녹록히 않은 쿤과 하츠가 숙소의 공간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 차원인데 이게 숙소의 정리에도 훨씬 편하다. 다만 팬들이 준 선물만으로 한국 생활을 영위하는 하츠와는 다르게 쿤은 선물 확인은 해도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타인이 쿤의 취향에 맞는 선물을 하는 일이 그만큼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도 사용하기 보다는 모셔두는 성격이라 쿤의 팬들은 하츠와 같은 선물 인증을 바랄 수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선물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다들 궁금해 하지만 글쎄. 그건 밤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흠.. 이거 식탁에 올려둘까요? 다 같이 먹어도 될 것 같은데.”

“뭔데? 초콜릿 같은 거야?”

“누가 크래커랑 머랭 쿠키라는데요?”

“뭔진 모르지만 맛있을 것 같은데? 너한테는 먹을 게 유독 많이 들어온다? 선물 자체가 많아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제가 군것질을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닐까요...”

“그래도 살 안찌는 걸 보면 역시 축복받은 유전자구나. 왁! 그거 엄청 비싼 거 아냐? 명품이잖아?”

 곧 이어 자신은 옷걸이가 안 되어 그런 선물은 못 받는다며 한탄한 이수지만 줄을 잇는 고가의 디제잉 장비들에 부러움은 순간이다. 팀에서 유일하게 셀프 프로듀싱 실력을 인정받는 멤버인데다가 도구를 쥐어주면 반드시 그 이상을 보여주는 멤버이니 이런 기술지원을 받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절대적인 수는 적다고 해도, 군것질 거리만 잔뜩인 밤의 선물이나 별천지인 하츠의 선물들에 비하면 확실히 부러운 구성이다. 물론 하츠는 밤과 같은 생각을 할 위인은 아니라서 문제 없다.

“라우뢰 녀석이야 어차피 죄다 본가로 보낼 거니까 상관 없지만 쿤도 대충 정리 좀 해 주면 좋을텐데 오늘따라 일찍 잠들었네? 애가 어디 아픈가? 걘 항상 얼굴이 창백해서 구분이 안 간단 말야?”

“아까 시내에 데려다주면서 물어봤는데 아프단 소리는 안 하던데. 피곤하겠지. 얘네 연습 빡세잖아.”

“걔 말만 믿지 말고 신경 좀 써. 스페인에서 입원해 있다가 온 거라며.”

“입원이요?!”

“난 그렇게 들었는데. 너한테도 별 말 없었어?”

“네... 과로 같은 거였다고만....”

“과로? 희한하네. 스페인에서 부업 같은 거 돌리나? 별 활동도 안하는데 왠 과로야.”

“그거 계약 위반이라 유 실장님이 아시면 길길이 날뛸걸? 아, 그래서 호출인가?”

“설마. 이 바닥 소식이 얼마나 빠른데. 그런 일이었으며 우리도 벌써 눈치 깠지.”

 분류작업을 도와주던 스텝들에게서 뜻 밖의 소식을 접한 밤은 표정을 굳혔다. 쿤이 회사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따로 연예인 활동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밤도 생각하는 바였지만 입원은 간단히 ’병원을 다녀온’ 것과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내일 연습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캐물어 봐야겠다. 그리고 한성에게도 이야기해 두어야겠다. 부디 쿤을 곤란하게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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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쿤올레 #데이트

 어젯밤의 결심이 민망하게도 쿤보다 앞서 밤이 곤란해 지고 말았으니, 최근 각 소셜 네트워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해시테그에 민망하게도 당사자인 밤의 스마트폰에서 추천 글이라며 관련 메시지와 사진이 좌르르 줄을 이었다. 엔도르시와의 열애설처럼 컴백에 금방 묻힐 줄 알았는데,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이 당시의 일이 확대 재생산이 되고 있는 꼴을 보자면 밤이 직접 뭔가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회사에서는 밤의 생각과는 다른 의견을 내 놓았다. 어차피 팬들의 뇌 내 망상을 근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진행되는 축이 수입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니 내버려 두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당사자인 쿤이 조용한 것도 회사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물론 멤버들이 보기에는 쿤의 이 상황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앞서 두 번 정도 그가 본가에 다녀오고 난 뒤에 어떤 행동패턴을 보이는지 겪어 볼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은 전과 느낌이 많이 달랐다. 어차피 컴백 때까지는 다른 스케쥴이 없어서인지 충전도 받지 못하는 상태로 쿤의 스마트폰은 아직도 그의 캐리어에 처박혀 있으니 SNS 속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그가 무슨 상관이랴. 여태 들여다 보지도 않았을 텐데. 밤도 밤이지만 그 일로 이수나 같이 다음 앨범을 준비하는 스텝들도 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많이들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영 석연찮은 일은 여즉 캐 묻기도 곤란하여 지켜보는 중이다. 어차피 집안 사정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고, 성격이 불 같기도 유명한 에드안이 당장 들이닥치지 않은 걸 보면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컴백 기념 사전 방송이 다음 주 수요일이고 바로 다음 날이 첫방이야. 얼마 안 남았으니까 화이팅하고, 저 잠만보한테도 이따가 알려주고.”

“네, 제가 알려줄게요.”

“그래. 수고가 많다, 이수야. 올레는 드라마 종영 회식 가서 실수하지 말고. 열애설 또 터지면 곤란하니까 처신 잘 해.”

“네... 죄송합니다.”

“이미 또 터졌더만. 둘이 신사까지 가서 뭐 했냐? 스느스가 난리던데.”

“....나? 쇼핑하고 밥 먹었는데? 왜?”

“왜라니.. 너 폰 아직도 안 꺼냈냐? 보면 바로 알 텐데?”

“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뭐?”

 없는 게 또 없는 대로 편하더란 말이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쿤은 스마트폰 중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붙잡고 있을 수 있는 때는 거의 늘 붙잡고 있어서 없으면 못 살 줄 알았는데 말이다.

“흠.. 쿤올레면 내가 위인가?”

“야, 쿤. 넌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게다가 이 그룹은 이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것도 맞아서 쿤의 의식이 더 멀어지기 전에 현실로 데리고 돌아오는 것도 이수의 몫이다. 분명 공범(?)인데 이상하게 폐를 끼치는 기분이었던 밤은 쿤의 태도에 안심이 되긴 했지만 이유모를 서운함과 ‘위’에 대한 궁금증이 뒤섞여 고민이 멈추지는 않았다. 밤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매니저는 스케쥴에 대한 안내를 이어갔다. 신문사와 잡지사의 인터뷰도 잡혀있고, 광고 제의가 벌써부터 시작되어서 조만간 한 두 건은 계약이 체결될 것 같다고도 했다. 중간에 하츠는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발탁 되었기 때문에 새 공익광고 포스터 촬영이 있을 예정이며, 이번 활동에서 첫 예능 프로그램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토크쇼라서 개인기로 선보일 짤막한 춤을 미리 연습해 둬야 한다던가? 설명을 마저 듣기도 전에 엔도르시의 사인을 받아오라는 성화들에 못 이겨 밤은 뒷풀이 장소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어야 했기에 쿤과의 대화는 한참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유 실장님이 너 이따 내려왔다 가라던데?“

“와서 하면 되지 왜 또.. 내가 연예인이지 자기가 연예인인 줄 아나 그 커피중독자.”

“조심 좀 해라. 걸리면 잔소리 두 배로 들을 텐데.”

“제 명에 못 죽으면 아버지랑 유 실장이랑 염라대왕한테 고소할 거야.”

 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안이라는 생각이 든다만 아직 그는 살아있으니 염라대왕 얼굴을 볼 수 있을 리가. 밤이 아니고서야 한성을 만나러 가는 길에 상큼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연습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정돈해서 묶으며 연습실을 나서는 걸 보니 쿤은 피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건 한성이 무슨 이야기를 할 지 그가 예상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쿤. 성질 죽여. 그냥 들어야 빨리 끝나.”

“알아. 다녀올게.”

 정말 알고 있는지는 기다려보면 알 일이다. 한성은 훈계를 좋아하는 성격이니 쿤이 잘 한다고 쳐도 30분은 넘길테고 욱하면 1시간도 금방이다. 물론 전쟁터같은 현장에 같이 서 있는 것보다는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지만. 빈 시간에 춤 연습에 바로 이어 검도를 연마하는 하츠의 체력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수는 책상다리에 턱을 괴고 앉아 미뤄뒀던 걱정을 슬몃 꺼내 보았다.

‘입원까지 했다니까 원인에 대해서 회사가 알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녀석의 본가가 조용한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단 말야?’

 에드안이 수많은 자식들 중에서도 쿤에게 유별나게 군다는 건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다. 반작용인지 쿤은 아버지를 매우 싫어해서 에드안의 말은 일단 반대로 하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솔직히 먼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에드안이 청개구리 같은 아들을 여즉 내버려둔 것 부터가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생방송 무대에 쳐들어와서 끌고가도 이상하지 않을 성격이라고들 이야기했으니까.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하튼 쿤에게는 아버지를 꼼짝 못하게 할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된다. 매번 활동의 말미에 소환장을 받아도 꼬박꼬박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확실한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아.’

 팀 메이트로서 에드안의 사람을 몇번 마주쳐 본 입장에서 이수 또한 에드안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건 이미 파악하고도 남았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성질이 더럽기로서니 아들을 통제하지 못할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그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무언가가 쿤에게 있는 것이다. 아마 이번 일도 쿤과 에드안의 갈등 중에 터진 것일터다. 다른 일이 있었던 걸 과로로 덮은 건지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연결고리의 어딘가에 병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수에게는 찜찜하게 느껴졌다.

‘진짜 탈퇴하는 건 아니겠지? 쿤..’
















후기....로 말할 것 같으면..
0. 너 이따 두고보자 망할 아이폰
1. 이거 원래 연작입니다.
2. 제목 짓기가 너무 귀찮아서 연재처럼 보일 뿐입니다.
3. 오타수정 나중에....
정도입니다.
폰으로 업로드하는 건 태블릿보다 난이도가 높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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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신의 탑/Exceptional

 

 

 

 

 

 

 대세라는  설명하는 지표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느 매체, 어느 채널, 어느 방송을 보든 그 이름을 들을  있다는 것만큼 분명한 것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결성되었지만 인기는 전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향하는 중인 굴지의 아이돌 그룹, 익셉셔널(Exceptional) 당대에는 바로  대세 중의 대세라고   있겠다. 여러 국가에서 선발된 재능있고 뛰어난 미소년들로 구성된 그들은 사람들이 생각할  있는 모든 장르에서 빛을 발하는 중이었고, 덕분에 아이돌 가수들의  무대인 음악과 예능을 제외하고도 그들의 이름을 들을만한 일이 넘쳐났다. 물론 그들의 열렬한 후원자인 팬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다른 활동 보다는 음악, 개인보다는 그룹 활동을  주길 원하고 있었기에, 이번 컴백소식에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아마도 연기자로 활동 중인 비올레를 제외하면 방송에서 직접 보기는 어려운 분야에서 다른 멤버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우와, 쿤이다.”

 

 “!  !   어딨지?”

 

 “진짜 컴백하나보다. 쿤이 한국에 있는  보니.”

 

 게다가 인기 멤버 중의  사람이 활동 중이 아닐 때에는 국내에 붙어있질 않다보니 팬들이  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특이한 유전자로 널리 알려진 익셉셔널의 쿤은 해외에서는 이미 연예계를 점령하다시피한 유서깊은 연예인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푸른 빛이 도는 은발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덕에 외모부터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그가 같은 그룹의 멤버들  SNS 도는 일상 사진이 제일 적은  스케쥴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하는지   없는 비밀스런 사생활 덕이다. 한국에 머물지 않는 다는 것도 추측으로만 나돌다가 우연한 계기에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른 멤버의 폭로(?) 겨우 알려졌다. 아이돌 같은  하지 않아도 앞으로 먹고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만큼 부자지만 덕분에 투잡의 고충을 누구보다 제일   거라던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해서도 ‘알면 다친다 식의 마무리가 되어 자세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컴백을  준다는데!

 

 “쿤씨!”

 

 “?!”

 

 정작 이름을 불린 쿤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아마 숙소를 나서면서부터 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왔을 익셉셔널의 최고 인기멤버인 비올레,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의 등장 덕분이었다. 팀의 인기 원탑답게 연예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러브콜을 받는 어디든 모습을 드러내는 성실함과 그에 못지않은 활약으로 익셉셔널을 스타덤에 올린 일등 공신이었다. 최근 연기자로 유명한 엔도르시 자하드와의 염문설로 홍역을 치르긴 했지만  인기가 어딜 가진 않아서 컴백 소식과 함께 열애설은 묻히고 말았다. 모든 매체가 익셉셔널의 컴백과 3 앨범의 컨셉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케쥴 없었어?   나왔어도 됐는데.”

 

 “걱정되니까 그렇죠. 쿤씨는 여기 처음이라면서요. 제가 추천했으니 안내도 당연히 제가 해야죠.”

 

 “고맙긴한데 다음부터는 시간이 나면  쉬어.  컴백인데 몸을 아껴야지.”

 

 “괜찮아요. 대신 밥은 쿤씨가  주시겠죠?”

 

 “그래야겠네.”

 

 연예인으로서의 연차가  차다 보니 어딜가나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엔 신경쓰는 않는 경지에 달해 있는 쿤이었지만 밤이 몰고다니는 인파는 확실히 부담스럽다. 가식없이 순수한 모습이 사람을 끌어당긴다는 것이야 직접 당해본 사람으로서 쿤도 인정하고 있는 바였지만 태생적으로 그에 대한 자각 없이 자라온 밤과는 달리 쿤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펼쳐질 때도 많건만 밤은 그런 쪽으로는 배려심 없다. 여하튼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필요한 것이 소소하게 생겨서 현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가벼운 쇼핑이나 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예정보다는 일정이  길어지게 생겼다. 그렇다고 밤의 배려가 싫은  아니다. 미리 알아보고 왔으니 혼자서도   자신이 있었지만 밤은 밤이라서 좋다. 몸이  개라도 모자를 인기인이 쿤을 위해서 시간을 비워줬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쿤이  일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익셉셔널의 팬덤에서도 오늘을 기념일로 지정하지 않을까 싶다. 남자 아이돌의 팬덤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커플링 개념은 익셉셔널에도 통용되는 것이었고,   가장 많은 팬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이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사적인 대화도 많이 하고 친해보여서 자연스럽게 엮이는 일은 많았지만 비올레가 워낙 바쁘고, 쿤은 은거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 보니 수많은 떡밥들에도 불구하고 둘이 사석에서 함께 있는 모습을 포착하긴 어려웠었는데 오늘이  날이 되었다.

 

 “그런데 몸은  괜찮으세요? 따뜻하게 입고 나온  맞죠?”

 

 “아아,  때는 여러가지 일이 겹쳐서 그랬던거고.  원래 제법 튼튼해.”

 

 “그랬나요? 제가 아는 쿤씨 형제들 중에서는 쿤씨가 제일 연약해 보이는데요.”

 

 “연약이라니.. 물론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엄연히 남자거든?”

 

 “그건 그런데 저희 멤버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쿤씨가  여린 이미지가 있어요.”

 

 “ 픽션 같은  읽은  아냐? 그런   보는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매니저도 말했었잖아.”

 

 본인의 말처럼 쿤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는 선이 가늘고 고운 외모와는 달리 재수없는 냉혈한의 이미지지만 오랜시간을 함께하다보니 밤은 쿤이 그런 모습들로 감춰놓은 진짜 모습을   같았다. 성공이 보장된 길을 걷지 않고, 연예인이 되고 싶지 않다며 굳이 가문을 나온 그가  작은 나라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한 것은  힘든 선택이었을 터다. 그러니 억지로 졸라서 쿤에게 같이 데뷔하자고  밤이  신경써줘야 하지 않을까? 쿤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하다 뒤늦게서야 쓰러졌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 밤은 얼마나 불길한 예감들에 휩싸였었는데.  때는 밤뿐만이 아니라 이수도 당장 비행기 표를 끊을 기세였다. 하츠도 말은  했지만 비행기 표를 끊겠다는 이수를 말리진 않았고, 라우뢰야 ... 원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때문에 그의 집안에서 이때까지도 휴식기마다 군기잡기를 겸해서 괴롭히는 모양인데 멤버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을 알아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 답답했다. 적당히 눈치를 보아  앨범 준비를 핑계로  돌릴 틈을 주는  고작이니 말이다. 그렇게 만든 틈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이돌 활동이라는  아이러니일 뿐이다. 쿤이야 그쪽 일은  어떻거든 정리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쿤의 아버지인 에드안이 그를 언젠가 다시 본가로 데려올 계획이라고 유명 토크쇼에서 떠들었다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는 쉬울 리가 .

 

 “ 읽었어요. 것보다  사시려고요? ? 피어싱?”

 

 “아니. 잡화..라고 해야하나. 칫솔이나 수건, 베개같은 . 내가 직접   적이 없어서 어디에서 사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물어본 거야.”

 

 사소해도 정말 필요한 물건임에 틀림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에는 밤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지금 중요한  그런 것들을 사러 쿤과 함께  사람이 바로 밤이라는 것이었다. 이건 분명 옷이나 액세서리 따위를 사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다. 쿤의 일상이 밤과 함께  물건들로 가득  것이라는 의미였으니까. 사실 쿤은 그가 말한 팬픽 속의 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지만 많은 이들의 바람대로 밤은 쿤이 좋았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었다만, 처음 봤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 아닐까? 본가에서 도망쳐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왔던   , 밤은 몰래 서재를 훔쳐보며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었다. 나쁜 뜻이 있는  아니었다. 다른 나라, 아니 다른 세계에서 온, 인형같은 소년을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서 그랬다. 지금도 수많은 팬들로부터  미모에 대한 찬사란 찬사는  듣고 있는 쿤이지만 원래 어린 소년은 성별이  모호해지곤 하니까. 밤이 기억하는  당시의 쿤은 정말이지 예뻤다. 아름답다기엔 미성숙한, 그렇기에  때가 아니면   다시   없을 모습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으니 그가 밤의 첫사랑이라는  진짜인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가끔은  감정이 꿈틀댈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다. 잡화라는  요즘 세상에는   편의점만 가도 구할  있는 물건들이지만 그런 것들이  성격 까다로운 도련님의 취향을 만족시키지는 못할테니 직접 찾아 나선 길일텐데, 그런 소소한 것을 직접  적이 없을 정도로 고이 길러진 도련님의 생애  도전이라는게 포인트였다.

 

 ‘뭔가... 너무.....’

 

 “.. 물어본다는 것부터 이상했던건가.”

 

 ‘......귀엽잖아요?!’

 

 “아뇨아뇨. 그럴 수도 있죠. 숙소 이사   저희가 신경을  썼더니 뭔가 많이 없어졌나봐요?”

 

 “그런  아닌데.. 앞으로 혼자 사려면 미리미리 연습을 해야겠다 싶기도 했고.”

 

 “? 아예 나오시게요?”

 

 “원래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계획대로   모르지만 최선을   봐야지.”

 

 “.. 방은 구하셨어요?”

 

 “알아보는 중이야. 한번   하는데 시간 내기가 어려우니까 이번활동 끝나면 본격적으로 나서보려고.”

 

  동네는 연예인이 자주 출몰해서 사람들이 연예인이 떴다고 해서 그들의 사생활을 방해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막을 정도로 인파가 몰리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명색이 최고의 아이돌이다보니 그들을 힐끔힐끔 돌아보는 행인이나 멀리서 파파라치 샷을 노리는 팬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밤의 표정을 봤다면 대체 무슨 일인가 싶겠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당황하는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던 비올레가   크게 뜨고 같은  멤버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밤의 표정도 읽지 못한 채, 남자 치고는  듯한 머리를 뒤로 묶은 쿤의 뒷모습은 매대 위의 샤워 가운을 살피느라 살짝 기울어 있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니까 비록 잡화라 해도 심혈을 기울여서 평가하고 있는 중이겠지. 어떻게 하면 그의 근처에 집을 구할  있나를 고민하는 밤은 꿈에도 모르고.

 

 “여긴 진짜    파네? 나도  집이 생기면 고양이를 길러볼까. 스케쥴 때문에 무리려나?”

 

 “하하.. 근처에 사시면 제가 부모님께 부탁드리면 될텐데요.”

 

 “진짜? 신기하네.  부모님께선 분명히 고양이 보다는 강아지 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취향 쪽이라면 분명 쿤의 말이 맞겠으나 잠깐  주는  다른 이야기니까. 게다가 방금 분명 쿤이 혹했으니 밤은  한거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저희  근처에 방을 구하는 것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분명 도움이 필요한 일도 생길테니까요.”

 

 “말은 고마운데 그래도 되나... 이미  끼쳐도 괜찮을 만큼은  끼친  같은데.”

 

 “?”

 

 “ 계산이 그렇다고. 점심은  먹을래? 먹고 싶은  있어?”

 

 한창 때의 밤에게 먹고 싶은 음식은 항상 넘쳐났지만 쿤의 취향은 까다롭다. 정말 아무거나를 말해서 그를 곤란하게 해서는   것이기에 밤은 미리 골라 두었던 식당의 이름을 댔다.  곳을 쇼핑 장소로 추천할 때부터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를 같이 알아봐 두었던  이렇게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다. 이곳으로 차를 몰아 나오면서도 혹시 쿤과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갑자기 자신의 전화가 울리면 어떻게 할까에 대해서 고민했었는데 무사히 데이트를 즐길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곳의 지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밤을 따라 나섰다.  사람이 자리를 옮길 기색이자 따라붙는 인파가 많았지만 아직은 상관 없는 일이다. 이건  혼자만의 데이트니까.

 

 

 

 

 

 

 

 

 

 

 

 

 

 

 

조각은 대충 쓴 겁니다...

제대로 완성하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건 안 그럴 것 같습니다 ㅋㅋ..

분위기 캐치용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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