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8
신의 탑/Exceptional
"하하하.. 안녕, 비올레?"
10시면 그렇게 이른 아침도 아니지만 일이 없는 날의 쿤이 깨어 있으리라 기대하면 안 되는 시간인 가보다. 분명 먼저 전화도 하고 문자도 했지만 받지도 않고 답장도 없었다는 점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왕난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방문이었는데 방송에서 보던 표정 과는 완전 다른 얼굴로 문을 열어주는 비올레가 왕난은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왕난이 쿤과 비올레가 함께 사는 쿤의 새 집을 자주 방문하게 된 건 사실 전적으로 쿤의 탓이었다. 여전히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아진 건 아니지만 FUG Ent. 자체를 위협하는 자하드의 행보에서 무언가를 읽은 건지 쿤은 자하드가 한국 에이전시의 사장으로 선택했던 그의 사생아, 왕난을 빼내어 자신과 합작 법인을 설립하게 만들었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성과 긴 면담을 가진 끝에 내린 결정이니 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는 할 터. 여하튼 업무 협의를 위해 주기적으로 쿤을 찾아오는 왕난을 막지 못하게 된 것 때문에 둘의 시간을 방해받는 기분인 밤은 왕난을 반갑게 맞아줄 수가 없었다. 왕난이 너무나 좋은 사람이라서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더더욱.
"쿤은 아직 자나봐? 올 때 이런 거 좀 사 오라길래... 이 정도면 되겠지?"
"아, 왕난씨한테 부탁하셨던 건가요? 충분할 것 같은..."
"보이길래 같이 샀어. 전에 보니까 너 그거 좋아하는 것 같더라."
일회용품을 잔뜩 부탁하기에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우연히 발견한 쫀디기도 밤을 위해 몇 개 주워담았더니 아니니 다를까, 간식 냄새를 맡은 강아지처럼 밤의 표정이 말갛게 개였다. 아무리 이 동네가 수준이 높아서 연예인에 대한 메너가 보통보다는 낫다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마트에 아이돌이 장을 보러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간식거리에 약한 밤은 왕난이 사 온 불량식품들 마다 꼬드김을 당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가 바로 저 쫀디기였다. 마치 신세계를 본 듯한 표정으로 왕난이 가르쳐준 대로 세로로 찢은 쫀디기를 토끼가 풀 씹듯이 오물오물하는 그 표정을 왕난조차도 잊을 수가 없더랬다. 그래서 보인 김에 집어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홀대하던 차가운 표정은 간 곳이 없고 구세주를 보듯 한다. 그러면 또 기대에 부응해 줘야지.
"내가 이거 더 맛있게 먹는 방법 알려줄까?"
*
아침형 인간인 밤과는 다르게 쿤은 늦게 잠드는 게 훨씬 바이오 리듬에 잘 맞았다. 더해서 해외 촬영으로 시차 적응마저 필요한 시기이다보니 답지 않게 계획보다 훨씬 늦게 일어났다. 집들이 준비에 필요한 물건들이 있어서 왕난에게 일찍 들러 달라고 얘기까지 해 놓고 말이다. 밤의 자리에 온기가 없는 걸 보면 그는 한참 전에 일어난 모양이니 왕난이 문 밖에서 떨고있거나 했을 리는 없겠다. 급한대로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 정리하고, 실내복 위에 가디건만 걸친 채 1층으로 내려왔다. 탄 것도 같고 단 것도 같은 묘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요리를 꽤 잘 하는 밤이 음식을 태울 리가 없을텐데 잊은 게 있나 싶어서 부엌으로 직행하니,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리며 쫀디기를 뜯는 두 남정네가 있었다.
"내 말이 맞지? 쫀디기는 역시 구워야 제맛이라니까?"
"그러게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죠? 바삭하면서도 엄청 달고 고소해요."
"요즘 나오는 옥수수 쫀디기도 아주 별미라고. 내가 다음에 보이면 한번 사 올게."
"쫀디기에도 종류가 있었어요?"
쿤이 기억하기로도 값이 꽤 나가는 물건이었던 유명 가구회사의 포셀린 식탁에 앉아 하는 일이 겨우 구운 쫀디기 먹기라는 것도 기가차는데, 대화의 주제마저도 하찮다. 에드안과 같은 연배인 자하드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활비 걱정은 더 이상 않게 해 줬는데도 왕난은 왜 아직도 불량식품의 홍보대사란 말인가.
"자왕난."
"헉. 안녕, 쿤. 좋은 아침."
"아침은 무슨. 난 집들이를 도와달라고 했지, 집을 어질러달라고 한 적 없는데?"
"에이, 많이 안 어질렀어. 쫀디기 봉지만 치우면 돼."
"대체 둘이 그 불량식품을 얼마나 먹은 거야? 그래가지고 점심은 먹겠어?"
"불량식품이 아니라 그냥 과자지. 영어로 스낵."
"평생 그것만 먹게 해 줄까?"
"죄송합니다, 대표님."
주섬주섬 빈 봉지들을 손에 모으며 저렴한 무릎을 광고하는 왕난을 보면 자하드의 피는 에드안의 유전자에 비하면 한참은 못 한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무리 자하드의 사생아로 핏줄 빠고는 자하드와 관계 없는 삶을 살아온 왕난이라지만 둘이 어쩜 이렇게 다르냔 말이다. 유전보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증거 같은 건가? 왕난과 밤이 뒷수습을 하는 사이 물 한잔을 들이킨 쿤은 우선 왕난에게 부탁했던 일회용품들을 확인했다. 왠만해서는 쓰지 않는 게 좋다지만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밤에게 전부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리를 못하면 설거지라도 할 줄 알면 좋겠는데, 가사노동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쿤은 그 분야 한정으로 일을 훨씬 크게 벌이는 재주가 있었다. 세탁기를 세제결정 덩어리로 만든다던가, 싱크에 구멍을 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파괴적 재능 덕에 밤이 집안일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니 왠만하면 일을 줄이는 방향으로 하고 싶었다. 게다가 요즘은 파티용으로 화려한 다자인의 일회용품들도 즐비해서 모양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 누구누구 오는 거야?"
"익셉셔널 멤버들, 너, 악어."
"끝?"
"어."
조촐한 멤버지만 익셉셔널의 요즘 몸값을 생각한다면? 계산기를 두드려본 왕난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제야 장바구니의 내용물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접시와 컵, 식기와 테이블매트 등이다. 딴에는 파티 분위기를 낸다고 풍선과 가렌드도 사왔는데, 쿤에게는 매몰차게 무시당했다. 쓰레기를 많이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디서 가져온 지 모를 핸드 펌프로 풍선을 잔뜩 불고 있는 밤을 왕난은 무시해야 하는가 말려야 하는가? 밤은 분명 왕난을 기껍게 생각하고 있진 않지만 취향만큼은 기가막히게 들어맞는 모양이었다. 물론 쿤은 대체로 밤에게 무르지만 이렇게 되면 취향은 판이하게 다른게 되는 건가?
'하긴. 다른 걸 좋아하니까 서로를 좋아하겠지?'
쿤은 왕난을 탓할 때에도 공범이나 다름 없는 밤은 걸고 넘어지지 않는다. 본인 입장에서는 껄끄러웠을 룸메이트도 상대가 밤이니까 받아들였다. 밤의 입장이 곤란해 지는 게 에드안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싫은 것처럼. 쿤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는 속쓰린 일이지만 왕난은 지금 상황을 애써 비틀고 싶지는 않았다. 쿤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사람을 믿고, 그와 감정을 나누는 경험 자체가. 쿤은 원래가 신중한 사람이긴 했지만 사람과 관계된 문제에서는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당장의 좁은 인맥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럼 치킨 네 마리에 피자 세 판 시키고, 탕수육 보쌈이면 충분하겠는데?"
배달어플을 꽤 사용해본 듯한 왕난이 추천메뉴를 중심으로 치킨과 피자를 고르는 걸 같이 지켜보던 쿤의 눈에서는 아까의 날선 감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간의 이미지에서와 같이 귀족적인 쿤 가문의 도련님은 이런 서민 문화에 대해서는 백지나 다름이 없어서, 왕난에게는 익숙한 일들이 퍽이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왕난의 선택이 밤의 기호에 딱딱 맞는 것도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었고. 새파란 눈동자가 왕난의 스마트폰 창을 따라 움직이는 게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며 왕난은 최종으로 완성된 메뉴판을 쿤이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보여주었다.
"일단 내 추천은 이렇게. 결제해?"
"어."
"좋아. 따로 상 펼거야, 여기서 할거야?"
"여기서. 의자 하나 가지고 내려올게."
"계세요, 쿤 씨. 제가 가지고 내려올게요."
왕난만 점수를 따는 게 불안했던건지 풍선을 바닥에 잔뜩 깔아놓은 밤이 움직였다. 대신 사측의 요청에 따른 카메라의 배치를 쿤이 맡았다. 준비부터 촬영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왠걸 자신이 아직 씻지 않았으니 안된다고 한다. 손님이 있으니 밤이 내려온 직후에 2층의 욕실로 다시 올라가는 발걸음이 사뿐한 게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역시 고양이과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쿤 씨랑 하신다는 사업."
"나는 아직 공부 중이라.. 계획은 쿤한테 물어봐야지."
"하.. 몸도 안 좋으시면서 일을 더 하시겠다는 건가요, 쿤씨는?"
"당장은 페이퍼 컴퍼니라고 했는 걸.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는 게 맞지."
"알고 계시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설마하니 왕난씨가 자하드와 관계가 있을 줄이야.. 노리고 접근한 거 아니죠?"
"전혀 아니긴 한데 안 믿어줄 거잖아? 좋을대로 생각해. 결과가 말 해 주겠지."
"........준비나 마저 할까요?"
*
비올레와 쿤이 함께 사는 집이지만 따지고 보면 쿤이 구한 그의 집이므로, 손님들의 집들이 선물은 보통 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 없이 바나나를 들고 온 라크만 제외하면 사소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수는 머그 워머를, 하츠와 라우뢰는 같이 구매한 빨래건조대와 실내화를, 왕난은 작은 실내 등을 선물했다. 쿤이 커피를 자주 마신다거나, 손발이 차고, 취침 등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 등이었다. 평소에 집안일은 밤이 더 많이 한다 해도 집들이 준비는 도운 것이 별로 없는 만큼 당연한 전개였으나 오늘따라 밤은 마음이 좀 허전했다.
"어디보자.. 왕난이도 쿤이랑 동갑이면 술은 아직이네?"
"하하, 내년에 한 잔 주세요."
"그래그래. 준비 같이하느라 수고도.... 라크!"
밤이 손 가는대로 불어놓은 풍선은 라크의 손에 수시로 터졌다. 그 상황이 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쿤과 함께 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라리 밤도 손님으로서 선물을 준비하거나 하는 편이 더 고민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이돌 가수 활동을 쭉 이어오면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소외감이라고 해야할까 박탈감이라고 해야할까. 모두들 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은데 자신만 그 기회를 얻지 못한 기분이었다. 준비를 대부분 도운 것은 왕난이고, 자신은 쿤에게 선물을 줄 명분도 없으니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밤?"
답답한 마음에 술잔만 늘어가는 밤을 제일 먼저 눈치챈 게 쿤이라는 점은 좋았지만. 기분이 좋아서라고 둘러대는 밤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쿤은 그래도 과음은 좋지 않다며 밤에게 맥주캔 대신 얼음물을 내밀었다. 가까운 친구들 간에 이루어지는 홈 파티인만큼 크게 꾸미지 않고 오버 핏의 상아색 스웨터에 독특한 장식 없이 깔끔한 워싱 진을 입은 쿤은 서운함을 느끼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올만큼 귀여워서, 밤은 미소를 드러내며 잔을 받아 들었다.
"애들이 어려서 술 게임도 못하겠네."
"너희끼리 하면 심판 봐 줄게."
"안되지. 이런 게임은 하는 사람이 약간 손해를 보게 되어있단 말이야."
"그냥 게임을 하면 되죠. 벌칙 같은 거 걸고 하면 재밌지 않을까요?"
"괜찮은 생각인데? 그럼 다음 콘서트에서 누가 여장할지를 걸고 보드게임이라도 할까?"
"그런 걸 이런 자리에서 정해도 되나?"
"어차피 회의 때 우리도 들어가잖아. 정해진 게 있다고 말씀 드리면 되지."
"아니 그걸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넣어야 하는 거야?"
지금까지 세 번의 콘서트에서 처음은 비올레가, 그 다음에는 이수가, 가장 최근의 콘서트에서는 하츠가 그 역할을 맡았으니 자연스럽게 유경험자와 비경험자로 편이 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벌칙을 걸면 라크와 왕난이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술게임과는 달리 그런 건 상관 없다고 한다. 쿤은 일관성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막간을 이용해 졸고 있던 라우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우뢰 녀석은 자게 두고 3대3으로 붙자. 왕난이나 라크가 걸리면 무조건 라우뢰인걸로 하면 공평하지 않겠어?"
*
게임의 결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쿤의 압승이었다. 고상한 이미지와는 달리 십 수명의 형제가 있는 정글에서 자란 만큼 쿤은 왠만한 게임에는 도가 터 있었다. 술까지 나란히 걸친 주제에 어떻게 자신을 이기려 했냐는 쓴소리에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상이 공개되면 팬들의 기대가 어떤 방향이었을지 공개되겠지만 여하튼 다음의 여장은 비올레가 다시 맡게될 것 같다. 아쉬움 속에서 다 같이 자리를 정리하고, 친구들을 배웅하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유일한 스케쥴 같지 않은 스케쥴이 끝을 맺었다. 카메라들을 전부 꺼 한쪽에 치워둔 쿤은 오랜만의 과음으로 소파의 한 구석에서 졸고 있는 밤을 흔들었다.
"밤, 걸을 수 있겠어? 침대에 가서 자야지."
두 번이나 여장을 하게 생겼다는 절망도 잊었는지, 오늘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던 밤은 답지 않게 술에 절어 있었다. 멤버들과 스텝들이 이야기하던 그의 엄청난 주량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건만.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는 밤을 결국 쿤이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침실을 2층에 둔 걸 후회하면서. 불안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밤은 쿤과 체격 차이가 크지 않은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거기 조심하고, 밤."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밤을 층계참 어디에도 충돌시키지 않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 자체에는 성공한 쿤은 침대에 닿자마자 체력이 다 해 밤을 풀어놓았다. 쿤도 어엿한 준 성인이건만, 남의 몸까지 지지한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밤이 아니었으면 그냥 거실에 뻗어 자게 내버려 두었을 것을 인생 계획에도 없던 친절을 베푸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쿤은 스스로를 추스를 겸 한참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다시 일어섰다. 묶은 머리도 풀어주고 이불도 덮어줘야 밤이 편하게 잘테니까 말이다.
"쿤씨.."
"아, 깼어? 그럼 네가..."
"쿤씨는 왜, 저를.."
"밤?"
쿤은 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사력을 다했건만 밤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는지 아차하는 순간에 침대로 끌어들여진 쿤은 자신의 어깨를 쥐고 기어코 자신의 밑에 쿤을 두는 밤에게 제대로 저항한 반 하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이기도 했거니와 예상보다 밤의 완력이 너무 셌다. 셔츠 밑에 김춰진 탄탄한 몸을 쿤이 과소평가 했던 건지도.
"왜 저만 알아주지 않는 건가요."
"윽.."
"제가 싫으신 건가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단지 밤이 지금 의식이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좀 더 대화하기 편한 자세로 돌아가려 했었던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런 쿤을 다시 붙잡아 저지한 밤의 눈에는 억울함과 사운함이 가득했다. 쿤으로서는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눈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밤."
밤의 방해가 생각보다 거세서 몸싸움에서 이기는 건 쉽지 않았지만 온치 못한 정신이라 약간은 둔한 밤에게서 틈을 잡은 쿤은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고 그를 크게 감싸 안았다.
"너는 내게 항상 특별했는데."
그래.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을만큼. 머뭇머뭇 느리게 밤이 자신을 마주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흐느끼는 것만 같은 밤을 안은 채로 쿤은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 기분이 풀린다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어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