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탑 - 자하드 x 쿤 x 밤] 공멸
신의 탑/단편자하드는 소년의 금빛 눈동자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직감했다. 저 작은 소년의 몸 속에는 자신과 같은 탐식의 괴물이 들어차 있음을. 그리고 그 괴물이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임을. 그의 예감은 곧 이 세상의 미래이기에 자하드는 가차없이 소년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촛불을 불어 끄듯 간단히 소년의 목을 꺾는 것이.
“밤!!”
분명 소년의 눈망울은 순수했다. 자하드에게 그의 내면에 웅크린 괴물을 들켰을 망정 적의는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눈동자였다. 자하드의 손이 마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라는 기대라도 하고 있는 양 올곧게 그를 올려다 보면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고 나서야 눈을 돌렸다. 참으로 순진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에도 자하드의 손은 소년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하드의 손이 움켜쥔 것은 온기가 도는 소년의 목이 아니라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방해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소년보다 먼저 희생된 얼음은 파편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빛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얼음 입자 사이로 소년을 찾는 자하드의 흉흉한 눈빛은 새파란 눈동자에 가려진 순간 잠시 흔들렸다. 익숙한 색채였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로브의 후드 밑으로 고운 은발이 흩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흑백의 사이에 자리한 요사스런 심청빛은 이번에도 자하드의 손이 닿기 전에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하드의 손이 허상만을 손에 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쿤의 아들이군.”
여전히 녹지 않고 바스라져 떨어지는 빛무리 속에 홀로 남은 자하드는 적색삼안의 안대를 벗으며 아주 오랜만에 맛본 허탈감을 흘려보냈다. 물론 당장 뜻대로 되지 않았을뿐 일은 곧 자하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곳의 시간은 자하드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
“쿤씨? 어떻게 아셨어요?”
“뭘.”
“제가 거기 있다는 거요.”
“당연히 물어물어 찾아갔지.”
“아....”
“아는 무슨 아야. 내가 항상 눈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랬지?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잘못 한 건가요?”
“말이라고 해? ‘왕’한테 들켜 버렸잖아. 또 이런 일 있기만 해봐. 그 땐 너도 나도 죽은 목숨인 거라고.”
“왜죠? 왕난씨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왕난씨는 친절하시잖아요.”
“친절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걔도 이제 아버지한테 혼쭐이 날거다, 아마.”
분명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쿤은 밤에게 왕난을 만나지 말라고 누누히 경고했었다. 왕난에게도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동료들이 치정극에서 주인공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그들의 부모님 같다며 놀래댄 통에 생각만큼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금빛 눈동자는 이세계에서 온 괴물의 상징이다. 그 눈을 하고도 멀쩡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이는 ‘왕’으로 불리는 탑의 군주, 자하드와 그 아들들 밖에 없었다. 때문에 금빛 눈동자를 타고난 아이들은 발견 즉시 자하드가 풀어놓은 감시자에 의해 척살당했다. 딱히 소속된 국가도 없는 자하드의 탑은 그가 가진 막강한 힘으로 인하여 중립지대이자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감시자에 의해 도륙당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오래된 전설을 믿기보다는 자하드가 그 찬란한 빛깔을 독차지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고 수군댔지만 그의 병적인 집착을 보면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걸까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저 때문에 왕난씨가 혼나야 하는 건가요?”
“그래. 걔는 혼나는 거고 나는 죽는 거지.”
“왜요!”
“말해줬잖아. ‘왕’은 금빛 눈동자를 가진 자는 다 죽이려고 한다고. 그걸 방해했으니 가만히 두겠어?”
“저는 차별 받는 건가요?”
“글쎄... 차별이 아니라 배척받게 아닐까.”
“너무해요.”
“억울해 하기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밤. 어서 가자. 감시자가 따라 붙기 전에 움직여야해.”
꽤 멀리까지 온 것 같은데도 쿤은 걸음을 재촉했다. 항상 그가 심각하지 않게 이야기해서 밤도 그렇게 진중히 ‘왕’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쿤의 뒷모습을 보니 밤이 뭔가 잘못하기는 한 것 같았다. 왕난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이 밤은 쿤의 뒤를 따랐다. 생활력이 없는 밤에게 의지할 사람은 쿤밖에 없었다. 모두가 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거부하던 이 땅에서 이야기를 나눠주고 먹고 입을 것을 가져다 준 게 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밤을 피하지 않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의 작은 집에서 밤이 함께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정말 그 사람이 쿤씨도 죽이려 할까요?”
“아마도. 탑의 왕은 엄청난 폭군이라 그의 앞을 막는 것들에게는 가차 없거든.”
“싫어요! 제가 쿤씨를 못 죽이게 할 거에요.”
“이제라도 내 걱정을 해 주니 고맙긴 하네.”
“정말이에요. 제가 쿤씨를 지킬 거라고요.”
“그래그래.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네가 잘도 그러겠다.”
“쿤씨!”
“농담 같은 게 아니야, 밤. 나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라고. 처음은 내 존재를 몰랐으니 당한 거지만 다음은 없어. 그런데 나보다도 훨씬 약한 네가 날 지킨다고? 현실성이 없는 얘기야.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쿤은 자하드의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였다. 직접 금빛 눈동자를 지닌 아이를 찾아서 그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완전한 치외법권에 속하기에 살인을 밥먹듯 해도 죄를 물을 수 없으며, 이 세상의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그 자하드에게 반기를 드는 건 다른 왕들에 대한 반역보다도 더 무의미한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운 좋게(혹은 운 나쁘게)도 이미 금빛 눈동자의 소년을 만나버린 쿤은 이제와서 손을 떼긴 늦어 있었다. 잠깐이지만 눈이 마주쳤으니 자하드는 이미 단서 하나를 손에 쥔 셈이다. 눈에 띄는 색채는 그의 출신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에 자하드는 곧 그의 아버지를 찾을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쿤의 아버지에게는 수 없이 많은 자식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버지조차 그들를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자하드의 수색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쿤들의 아버지인 쿤 에드안은 자하드 못지 않은 폭군이었기에 그의 성을 떠난 자식도 부지기수인지라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제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나요.”
“........”
아직 갈 길이 먼데 쿤의 옷자락을 움켜쥔 밤은 더는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금빛 눈동자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쿤조차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그렇기에 노을빛으로 차오른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그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실험 중인 쿤에게 밤의 그런 반응은 꽤나 고까운 것이었지만 당장 해야할 일이 있기에 그는 말을 고르는데 꽤나 신경을 썼다.
“강해지는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뭐든 한 순간에 해결되진 않아.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시간을 버는 중이지.”
“뭐든 할게요.”
“그래.”
“강해지게 해 주세요.”
“응.”
*
쿤 에드안의 성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덕에 꽤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드안은 탑의 왕이라는 자하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지만 자하드의 방문이 썩 내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늘 하던 대로 반라의 미녀를 양쪽에 끌어안은 채로,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자하드를 맞이하는 걸 보면 유흥의 단맛에 푹 빠지려는 찰나에 방해를 받은 것에 틀림없었다. 허나 눈치없게도 자하드는 마치 개선장군과 같이 푸른 우단 카펫을 밟아 나갔다. 세계의 손꼽히는 강자 사이에서 어느 쪽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생존율이 높은지 머리 굴리기에 바쁜 다른 사람들만이 분주했다.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둘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였지만 따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먼저 져 주기로 한 쪽은 놀랍게도 에드안이었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옷도 갖춰입지 못한 여인들을 먼저 내 보낸 에드안은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먼 옛날의 친우를 향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은 몇 남지도 않았건만 반갑기 보다는 하도 봐서 질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
“쿤의 아이를 찾고 있다.”
“하? 그래서?”
“네게 향방을 묻는 것이다.”
“내 자식이 얼마나 많은데 네 눈에 띤 녀석이라고 내가 기억해 줄 성 싶냐?”
“충분히 눈에 띄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얼음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네 자식들 중에서도 손에 꼽지 않던가?”
“뭐냐 갑자기. 더위라도 타는 체질이 된 거냐? .....물론 흔한 재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십 수명은 될텐데, 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있을 시간 없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작은 아이다. 그런 주제에 순간이지만 사상(寫像)을 뒤집어 내 시계(視界)의 시간을 ‘얼렸다’. 분명 네 눈에도 찰만한 재능 아닌가?”
“........”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 아직 네 것이니 해치진 않는다고 약속하지.”
“후우.”
자하드가 보고 있든 아니든 긴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댄 에드안은 담배 연기를 뱉어내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하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에드안에게도 눈도장을 받을만한 아이지만 기억나는 얼굴이 없다는게 이상하게 분했다. 세상을 주름잡는 귀족가의 자제라 해도 성년이 되지 못한 아이는 부모의 소유이니 자하드의 말처럼 그가 성년이 되지 못했다면 아직 에드안의 수중에 있어야할 재산인데, 언제 주머니를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다니.
“찾아서 어쩌려는 거냐. 그저 재주를 치하하려는 건 아닐텐데.”
“그 아이가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
“......해서 그 괴물을 죽이려면 찾아야한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가관이라 에드안의 실소는 점차 광소로 번져갔다. 참으로 깜찍하고 요망한 아이다.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게끔 재능을 숨기고 한다는 짓이 세계를 삼킬 괴물을 거두는 것이라니. 자하드가 자신을 찾아오게끔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에드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을텐데 찾아내야 할 이유를 더해 주니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찾아봐 주지.”
“모르는 건가?”
“뭐?”
“당장은 알 수 없는 거냐고 물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자하드를 마주한 에드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주변의 기류에 에드안의 전기가 타고 흘러 파열음과 같은 소리를 만드는 간격이 짧아졌다. 자하드를 막아섰던 그 푸른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지만 에드안의 눈동자에는 또 다른 이채가 흘렀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신비로운 색이었지만 자하드의 머릿속을 채운 눈동자는 에드안의 것이 아니었다. 좀 더 투명하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깊은 눈동자였다. 이 땅의 생명이라면 자하드에 대해 모르지 않을텐데 그가 멸절을 선언한 괴물을 기르고, 또 자신의 손에서 앗아 도망친 맹랑한 아이의 눈동자 답게 아무런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던 눈빛. 두려움만이 아니라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공허라 해야 하려나?
“그럼 내가 직접 찾겠다.”
“흥. 그러던가. 대체 날 왜 찾아온 거냐.”
“네 우리의 권속이 아니라면 내가 데려가도 불만은 없겠지.”
“뭐?”
자하드는 에드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함께 영생을 누려온 친구이자 세계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인 에드안이라면 자하드도 손쉽게 제압할 수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당장 승부를 보기에 위험부담이 큰 쪽은 분명 에드안이었다. 자하드의 예상대로 에드안은 자하드의 돌발 선언에 퍽이나 당황한 듯 싶었으나 섣불리 주먹을 내 뻗지는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자하드! 야, 자하드!!”
당장은 대답 없이 멀어져 가는 친구의 등에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 이 일로 에드안과 얼마나 틀어질 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명분은 자하드 쪽에 있으니 별 상관 없었다. 분하기는 하겠지만 아직 자하드가 에드안의 아들을 손에 넣은 것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손으로 내다 버린 자식도 많은 만큼 에드안의 아들 중 하나가 자하드의 손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가 직접 나서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자하드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에드안이 자신보다 그를 먼저 찾아낸다면 금안의 괴물을 자하드가 죽일 수는 있어도 에드안의 아들을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는 힘들 것이다. 에드안의 물건에 대해서 자하드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말하자면 도박이었지만 자하드는 무엇도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도박의 결과가 어찌되든 그는 금안의 괴물만 죽이면 되었고 영생의 권태에 갉아먹히던 삶에 잠깐의 빛이 찾아든 것만으로도 만족할만 했으니까.
“아센시오… 들었느냐?”
“네. 아버님.”
“자하드가 말한 네 형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보다 먼저 찾아서 데려오거라.”
귀한 인재가 자신의 아들 중에 있었다는 걸 아버지인 에드안이 여즉 몰랐다는 것만해도 억울한데, 구경도 하기 전에 자하드에게 빼앗기다니 자존심 센 에드안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그에게 인정받아 휘하의 장수로 부리고 있는 자식들을 풀어 동생의 행방을 수색케한 에드안은 제 분에 못이겨 곁에 둔 와인을 병째 비웠다.
*
쿤의 지시사항이기도 했지만 그의 뒤에 꼭 붙어 따라가는 밤은 검은 숲의 오싹한 공기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무언가가 자신을 찔러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런 밤과는 다르게 정면을 응시한 쿤은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을 깔며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전진 중이었다. 추적자들은 아직 쿤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하려면 쿤도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내던 곳을 태워 흔적을 감추고 마물들이 우글대는 그림자 숲으로 들어온 쿤은 숲의 중심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색이 어려운 지점까지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했다. 먼 옛날, 아를렌이라는 대마녀에 의해 형성된 이 숲은 온갖 저주를 머금어 그림자를 대상과 같은 모습과 힘을 가진 마물로 변화시킨다. 다행히 쿤이 가진 얼음의 힘은 그림자를 흐려지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숲 전체가 어둠에 휩싸이는 밤이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잠시라도 쉬어갈만한 목적지를 찾을 때까지는 쿤에게도 녹록치 않은 매일이겠지만 당장의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이 뿐이었다. 다행히 쿤은 자하드나 에드안과 같은 강자는 아니니까 자신의 그림자가 덤벼온다고 해도 그 두 사람보다야 상대하기 수월하겠지.
“쿤씨.. 여긴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아까는 강해지고 싶다더니 벌써 포기한 거야?”
“쿤씨가 저한테 빙결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네가 마법의 입문도 떼기 전에 발각당할 걸.”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건가요?”
“당장의 계획은 이대로 물이 있는 데까지 가는 거야.”
“물이요?”
“그림자가 흐려지는 곳이 필요하거든.”
항상 검은 로브를 꼭 두르고 다니던 쿤은 숲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을 벗어 태워버렸다. 덕분에 밤은 오랜만에 제대로 쿤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숲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봐 긴장하게 되는 건 여전했지만 한 번 시선을 주고 나니까 오히려 쿤이 신경쓰여서 숲을 주시하기가 힘들었다. 엷은 그늘이 한 겹 드리운 것 같은 이 공간에서 그는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밤과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신체 곳곳에 깃든 깨끗하고 맑은 색채가 밤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밤이 기껏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그가 미웠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고 오히려 밤보다도 선이 가는 체형이 그대로 눈에 박혔다. 알고 있다시피 쿤은 밤보다 강한 마법사였지만 위험한 기운을 짙게 풍기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여태 그의 보호를 받아온 밤조차도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물을 못 찾으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 하루이틀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생각하기 싫은걸.”
“그럼 절 버리고 쿤씨라도 마을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됐어. 이미 들켰는데 널 떼 두고 간다고 안전하겠어. 마물들의 밥이 되더라도 여기서 내 선택으로 그렇게 되는 게 나아.”
여태 쿤이 계속 주의하고 있는게 ‘그림자’라면 두 사람이 물을 찾는다고 해도 앞으로처럼 따뜻한 집을 거처삼아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먹고 마실 것도 전부 이 곳에서 구해야 할 터였고 입을 것도 마찬가지였다. 쿤이 마을까지 나가 종종 보급을 해 올 생각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나는 첫 순간부터 길거리를 전전했던 밤이라면 모를까 쿤이 그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밤은 이제야 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장 눈 앞에서 저 작고 하얀 뒷모습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
“좀 더 주무세요.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다행히 두 사람은 한계에 달하기 전엔 물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의 그림자가 겨우 닿지 않는 곳을 거점 삼아서 쿤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밤은 그림자 마물을 상대로 수련을 시작했다. 쿤은 몰랐겠지만 이유가 생기고 나니 밤은 싸움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마음을 달리 먹은 이후, 밤의 성장은 거침이 없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시간대와 관계없이 숲의 마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밤이었지만 녹록치 않은 생활은 쿤의 건강을 차츰 악화시켰다. 예민한 성격을 타고난 쿤이 노숙이나 다름 없는 이런 생활을 시작한 이상 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쿤 이외의 몇몇 인물들과 어울릴 적에도 그들은 쿤에게 왜 여항에 머무는 지를 묻곤 했으니 말이다. 실력만큼이나 몸도 성장한 밤이 보기에 병색이 완연한 지금의 쿤은 과거의 자신이 대체 뭘 믿고 그리 의지했었나를 돌이켜보게 할 정도로 연약했다. 밤이 잡은 들짐승의 가죽을 갈무리해 만든 모포로 감싼 몸은 며칠 사이에 더 마른 것 같았다. 가끔 시장에 나가서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 오기는 하지만 숲에서의 생활 자체가 험한데다가 밤이 약재를 보는 눈이 없어 이리 되지 않았나 싶다. 상태가 쭉 안 좋은 쿤을 시장에 보낼 수가 없어서 최근에는 밤이 혼자 다녀오곤 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밤은 혹 도시의 경비병과 시비가 붙는다고 해도 그들을 손쉽게 따돌릴 수 있을만큼 강해졌기에 마을까지 오가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물건을 보는 눈은 도통 생기지가 않았다. 그런 섬세함이 일찍이 있었다면 쿤이 밤을 위해 얼마나 힘든 선택을 했는지도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까?
“심심할텐데.”
“다른 할 일도 없는 걸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숲의 바람이 수면을 쓸고 지나간 흔적을 함께 바라봤다. 윤슬이 이는 양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 쿤은 먼저 눈을 감았다. 저를 지켜주겠다는 말에 한 조각의 믿음도 가지 않던 소년이 이렇게나 자랐다. 이것으로 그가 기르려던 ‘괴물’은 완성된 것일까? 그 괴물은 자신의 소망대로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켜 으깨 부술까? 쿤은 혼자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당장도 자신을 어미새처럼 보듬는 유약한 소년이 쿤이 원하던 괴물일 리가 없었다. 그럼 결국 완성이라는 것은 쿤이 눈을 감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일까?
“저..”
“죄송한데 말씀 좀 물읍시다.”
그림자의 숲 같은 험한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낮시간이라 위험을 무릅쓰고 이 숲을 건너려는 모험가들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호숫가에 이르렀다는 건 이상했다. 길을 잃은 이라면 이 땅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좀 더 놀라워 해야 했고, 이 숲으로 숨어든 자라면 좀 더 경계함이 옳았다. 부정합을 눈치챈 밤의 금안이 차게 식어 말 그대로 금속성의 광택을 띄었다.
“여기까지 찾아올만큼 한가한 몸이 아닐텐데.”
“역시 너 였냐, A.A. 하.. 이만 돌아가자. 아버님께서 널 찾고 계신다. 게다가 너 처럼 몸도 약한 녀석이 노숙이라니. 이러다 몸 상해.”
달려나갈뻔 했던 밤은 차분한 쿤의 목소리에 행동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잠들기 전이었으니 자신을 품에 안은 밤의 신체가 긴장으로 근육을 부풀리는 걸 느끼고 있었던 쿤은 얘기치 않게 그가 길러온 것이 괴물의 새끼가 맞긴 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지켜준다는 게 빈 말이 아니었던 건지 밤은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으면 그르릉 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뱉을 듯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곳에 제대로 정착한 이후 밤은 첫 날처럼 쿤에게 혼자서라도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모두 잃은 이후에 그의 소유욕이 전부 쿤에게 집중되어 버렸나보다. 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몸 상하는 건 거기도 똑같지. 난 안 돌아가.”
“고집 부릴 때가 아니야. 아버님만이 아니라 탑의 왕도 널 찾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이나 이어진 집착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아?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쿤의 궁으로 돌아가야해.”
밤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을 적에 쿤이 말했었다. 자하드는 자신도 밤도 죽일 것이라고. 쿤의 궁에서 온 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하드는 실로 무서운 인물임이 분명했다. 다 알면서도 쿤은 여태까지 밤과 함께해 준 것이다. 이렇게 약해질 때까지도.
“밤. 저들을 숲 밖으로 쫓아내. 절대 죽이진 말고.”
그건 절대 형제에게 베푸는 온정 같은 게 아니었다. 죽이는 것보다 살아있는 자를 막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밤에게 더 어려운 과제를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쿤의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릴 필요도 없이 밤은 당장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어섰다. 쿤에게 모포를 다시 여며줄 때를 제외하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자 눈빛이었다.
“A.A!!”
“쿤 씨를 방해하지 마세요.”
“닥쳐라, 괴물. 지금 누가 누굴 방해한다는 거지? A.A.를 위험에 빠뜨린 건 너다. 네 녀석만 아니었으면 평안한 삶이 보장된 아이를..!!”
“쿤 씨가 절 선택했어요. 방해꾼이 누구인지는 이걸로 판가름 난 것 아닌가요?”
밤의 금빛 홍채 속엔 마치 경멸과 같은 빛이 어려있었다. 아마도 괴물은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진심이었다. 조용히 일렁이는 분노는 이미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주변의 공기가 이글거렸다. 분노와 같은 박자로 범람한 그림자가 소년의 살갖을 검게 물들였다.
“금안의 괴물!”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처럼 그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니 동료들의 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나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소년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살갖을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검은 불꽃처럼 넘실댔다. 그것은 흡사 소년의 몸 속으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신이 새까맣게 덮이고 난 뒤에는 흉흉하게 빛나는 금빛 동공만이 적을 향했다.
'...설마 숲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이긴 했으나 추적자들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쿤에게도 밤의 상태는 위험해 보였다. 그가 '괴물'이라는 걸 쿤이 지금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놀라웠다.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순수하고 담백하게 이 기적같은 순간을 받아들일 뿐. 어차피 쿤이 원하는 건....
"A.A.!!"
밤의 몸 속에 잠들어있던 괴물이 개화하는 순간에 홀려있던 쿤을 찾아온 그의 형제가 잡아 끌었다. 아센시오는 동생이 정말로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야 말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이 숲도, 괴물의 새끼도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괴물이자 자신에게 동생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아버지, 에드안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에드안은 아센시오의 다른 형제들에게도 재앙이 될 테니까. 분명 밤이라는 소년의 힘은 아센시오가 여태 보지 못한 종류지만 아직은 운용에 대해 서툰 구석이 많아 보였다. 전투에는 절대적인 힘 못지않게 경험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동생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쉽게 공격할 수도 없을 터. 그 점을 노려 밤을 피해 재빠르게 쿤의 곁으로 도약한 아센시오는 그대로 일행을 버려둔 채 도망칠 생각이었다.
"윽!"
아센시오의 계획이 생각으로 그친 것은 소년의 몸 속에서 완전히 깨어난 괴물이 원하는 것은 그의 동생 단 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밤을 잠식한 어둠은 쿤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다가서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쿤의 주변을 검은 늪으로 감쌌다. 죽이지 말라는 말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모를 눈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피부 덕에 어둠 속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빛 눈동자 마저도 흉흉해 보이는지도. 그렇게 타인의 육체까지도 넘보던 어둠은 식물의 덩굴처럼 침입자들을 휘감았다. 뼈를 부수는 둔탁한 굉음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쿤이 형제에게로 달려왔다.
"아센시오!"
"크... 아게..로... 도망..쳐라, 어서."
"밤! 숲 밖으로 쫓아내기만 하면 되잖아!!"
"그럼 다시 올 거잖아요? 적어도 다리 정도는 못 쓰게 만들어야..."
"크아아아악!!"
"저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죠."
밤이 그를 막진 않았으나 쿤은 아센시오를 향해 뻗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어차피 쿤이 바란 건 멸망이다. 늦든 빠르든 형제들도 그 때 쯤엔 의미를 잃을텐데 계속 미련을 두면 무엇할까? 쿤의 행동에서 체념의 빛을 읽은 밤은 살벌했던 눈을 다시 원래의 그로 되돌렸다. 어서 방해꾼들을 치우고 쿤을 다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다시 자신의 품에 기대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쿤씨!"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빛은 지금까지 쿤이 본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신 것이었다. 그 찬란함에 잠시 넋을 놓았던 쿤을 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깨웠다. 이어 턱을 잡아 올리는 단단한 손에 빛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쿤은 현실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였다.
"....당신은..?"
"쿤씨!!"
"!"
밤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을 때가 되어서야 쿤은 밤을 돌아봤다. 자하드의 눈이 그 쪽을 향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밤의 성장을 확인하긴 했지만 수천년 간 세계를 지배해 온 자하드의 상대가 되긴 아직 이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쿤은 자하드의 시선을 가로막고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밤을 그대로 다른 공간으로 흘려내었다. 시선이 얽혀 있을 적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민함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표정을 유지한 자하드는 쿤을 당겨 품에 안았다.
"시공을 다루는 재주는 아주 드물고 또 어렵지. 그 힘을 버틸만한 신체를 타고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부모로부터 보통보다는 훨씬 강인한 육체를 물려받았기에 망정이지 한껏 약해진 상태에서 공간의 틈을 열었던 쿤은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자하드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밤이 가까운 곳에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찾으러 왔던 형제들은 그 후에 어찌 될 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리였다. 쉽게 느낄 수 없는 마력의 파동을 바로 감지한 덕에 수년 간 찾아 해맸던 소년을 손에 넣은 자하드도 지금만큼은 서두를 것 없이 쿤이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너흰 이제 어찌할 테냐. 살고 싶다면 내가 거두어 줄 수도 있는데."
".....A.A...에게는 대체... 무, 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탑의 왕."
"......"
자하드는 말 없이 자신의 품에 잠든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자신의 명령을 맹랑히 거스른 그를 찾아서, 자신은 어찌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기르던 괴물의 새끼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아직 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척살의 대상이 아닌 이 소년을 찾아헤맨 이유를 그는 무어라 설명해야 옳을까? 아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꼭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 또한 없으므로 자하드는 마음 가는 대로 소년을 안아 올렸다.
"지금 부터 생각해 볼 참이다."
*
탑. 세계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그 곳은 역사가 존재한 순간부터 현신(現神), 자하드의 거처였다. 선사가 그의 손에 지워진 건지 그가 정말 신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지는 이제와서 밝힐 수 없겠지만 여하튼 자하드는 뭍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였고, 때문에 탑의 위상도 공고했다. 자하드와 그의 친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쿤은 자신이 그런 곳에 있다는 걸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일텐데.
"좀 쉬었는지 모르겠군."
"......무슨 속셈이지?"
"글쎄. 아무튼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치료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마력을 봉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는 쿤에게는 마력이 그대로 남아있다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들었기로손 그걸 또 베풀어주기까지 한 걸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푹 자고 일어난 영향인지 쭉 저점이었던 몸상태가 오늘은 좀 나아진 듯도 싶었다.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여전히 자세를 바꿀 기력도 없었지만 시야만은 밝게 트여 있었다. 몇 년이나 쿤을 찾아 다녔다고 했던가? 이제야 얻은 성과를 만끽하는 중인지 쿤의 침대에 걸터앉은 자하드는 물색 모발을 손끝으로 흘려내었다.
"에드안의 아들이 어째서 괴물을 보살피는 거냐."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
할 말이 없었기에 자하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운 자리에서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깨끗한 눈이었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기에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투명함. 자하드가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런 류의 생기를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아 자하드는 소년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죽여."
"넌 내가 금한 금빛 눈동자의 괴물을 길렀다. 그러니 나 또한 네 말을 들어 줄 이유가 없지. 나는 널 살리겠다. 네가 죽고자 한다면 더더욱."
"악취미네."
"네가 한 짓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오랜 예언이 이야기한 멸망의 위기로 세계를 쏟아넣었으니, 그는 분명 중죄인이었다. 하지만 자하드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아니기에 소년을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자하드가 그를 멋대로 대할 수 있는 무력이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당장 중요한 것은 자하드가 소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른 괴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자하드가 자리를 비우면 그가 무슨 짓을 할 지가 염려되는 상황이었기에 왕은 부득이하게 어린 날에 그와 친구로 지냈던 막내아들을 불러 감시를 맡기기로 했다.
"다음에 볼 때는 협조적이었으면 좋겠군."
*
괴물. 갑자기 공간을 열고 나타난 밤을 가리켜 그 곳 사람들은 괴물이라 칭했다. 주변의 사물을 닥치는 씹어삼키는 어둠을 전신에 휘감고 나타났으니 그리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쿤의 도움으로 자하드에게서 도망친 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미웠다. 괴물이라는 단어가. 탑의 왕이 자신을 노리게 만든 이유, 친구들을 잃고 숨어 살아야 했던 이유,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 주었던 쿤마저 사라져버리게 만든 그 이유로.
"제가 어째서 괴물인가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서 금빛 눈동자를 물려 받았다는 사실이 밤을 괴물로 만든 것이라면 그들은 왜 밤의 부모부터 밝혀내지 않는가? 늘 마음을 기대오던 쿤까지 곁에 없으니 밤의 감정은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스스로를 점점 더 괴물이 되는 길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밤 자신은 그를 의식하지 못한채로, 그의 어둠은 이제 살아있는 생물들까지도 손을 뻗었다. 직전에 피 맛을 본 그림자들은 더더욱 거칠 것이 없는 상태였다.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밤이 하는 한 그가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받아들여준 건 쿤 밖에 없었다. 이대로 공간을 삼켜가다 보면 다시 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밤은 새로 찾은 희망으로 속도를 높였다. 혹여나 자하드가 이미 쿤을 죽인 뒤라면 그를 찾아 죽일 것이다. 쿤의 걱정대로 밤이 아직 그를 이길 수 없는 상태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그는 '죽음'이라는 같은 공간에 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구나, 작은 괴물."
어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 마치 구세주처럼 그림자의 침식을 탑의 왕이 막아섰다. 같은 색의 금빛 시선이 부딪혔다. 한 쪽은 빛 속에 자리한 태양이었고 다른 한 쪽은 어둠에 뜬 달이었다. 같은 세기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상반된 힘은 정 반대의 색으로 여전히 세계를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예언을 막을 수 없다면 좋다. 누가 탑의 주인이 될 지 겨뤄 보자꾸나."
예전에 이 글의 일부를 보신 분이 있으실텐데...
이상하게 보이실지도 모르겠으나 결말은 이게 맞습니다 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제 표현력과 문장력과 아이디어의 부족이 불러온 대 참사 정도로 여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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