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쿤른'에 해당되는 글 12건

  1. [신의 탑 - 자하드 x 쿤 x 밤] 공멸 2
  2. [신의 탑 - 밤 x 쿤] 영원의 단면 2
  3. 다섯 송이 4
  4. [신의 탑 - 자하드 x 쿤] 태양 4
  5. 네 송이 2
  6. [신의 탑 - 자하드 X 쿤] 일몰 2
  7. 세 송이 2
  8. 두 송이 2
  9. 한 송이 2
  10. 꽃망울 2

[신의 탑 - 자하드 x 쿤 x 밤] 공멸

신의 탑/단편

자하드는 소년의 금빛 눈동자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직감했다. 저 작은 소년의 몸 속에는 자신과 같은 탐식의 괴물이 들어차 있음을. 그리고 그 괴물이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임을. 그의 예감은 곧 이 세상의 미래이기에 자하드는 가차없이 소년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촛불을 불어 끄듯 간단히 소년의 목을 꺾는 것이.

“밤!!”

분명 소년의 눈망울은 순수했다. 자하드에게 그의 내면에 웅크린 괴물을 들켰을 망정 적의는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눈동자였다. 자하드의 손이 마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라는 기대라도 하고 있는 양 올곧게 그를 올려다 보면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고 나서야 눈을 돌렸다. 참으로 순진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에도 자하드의 손은 소년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하드의 손이 움켜쥔 것은 온기가 도는 소년의 목이 아니라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방해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소년보다 먼저 희생된 얼음은 파편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빛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얼음 입자 사이로 소년을 찾는 자하드의 흉흉한 눈빛은 새파란 눈동자에 가려진 순간 잠시 흔들렸다. 익숙한 색채였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로브의 후드 밑으로 고운 은발이 흩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흑백의 사이에 자리한 요사스런 심청빛은 이번에도 자하드의 손이 닿기 전에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하드의 손이 허상만을 손에 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쿤의 아들이군.”

여전히 녹지 않고 바스라져 떨어지는 빛무리 속에 홀로 남은 자하드는 적색삼안의 안대를 벗으며 아주 오랜만에 맛본 허탈감을 흘려보냈다. 물론 당장 뜻대로 되지 않았을뿐 일은 곧 자하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곳의 시간은 자하드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

“쿤씨? 어떻게 아셨어요?”

“뭘.”

“제가 거기 있다는 거요.”

“당연히 물어물어 찾아갔지.”

“아....”

“아는 무슨 아야. 내가 항상 눈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랬지?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잘못 한 건가요?”

“말이라고 해? ‘왕’한테 들켜 버렸잖아. 또 이런 일 있기만 해봐. 그 땐 너도 나도 죽은 목숨인 거라고.”

“왜죠? 왕난씨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왕난씨는 친절하시잖아요.”

“친절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걔도 이제 아버지한테 혼쭐이 날거다, 아마.”

분명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쿤은 밤에게 왕난을 만나지 말라고 누누히 경고했었다. 왕난에게도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동료들이 치정극에서 주인공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그들의 부모님 같다며 놀래댄 통에 생각만큼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금빛 눈동자는 이세계에서 온 괴물의 상징이다. 그 눈을 하고도 멀쩡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이는 ‘왕’으로 불리는 탑의 군주, 자하드와 그 아들들 밖에 없었다. 때문에 금빛 눈동자를 타고난 아이들은 발견 즉시 자하드가 풀어놓은 감시자에 의해 척살당했다. 딱히 소속된 국가도 없는 자하드의 탑은 그가 가진 막강한 힘으로 인하여 중립지대이자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감시자에 의해 도륙당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오래된 전설을 믿기보다는 자하드가 그 찬란한 빛깔을 독차지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고 수군댔지만 그의 병적인 집착을 보면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걸까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저 때문에 왕난씨가 혼나야 하는 건가요?”

“그래. 걔는 혼나는 거고 나는 죽는 거지.”

“왜요!”

“말해줬잖아. ‘왕’은 금빛 눈동자를 가진 자는 다 죽이려고 한다고. 그걸 방해했으니 가만히 두겠어?”

“저는 차별 받는 건가요?”

“글쎄... 차별이 아니라 배척받게 아닐까.”

“너무해요.”

“억울해 하기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밤. 어서 가자. 감시자가 따라 붙기 전에 움직여야해.”

꽤 멀리까지 온 것 같은데도 쿤은 걸음을 재촉했다. 항상 그가 심각하지 않게 이야기해서 밤도 그렇게 진중히 ‘왕’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쿤의 뒷모습을 보니 밤이 뭔가 잘못하기는 한 것 같았다. 왕난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이 밤은 쿤의 뒤를 따랐다. 생활력이 없는 밤에게 의지할 사람은 쿤밖에 없었다. 모두가 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거부하던 이 땅에서 이야기를 나눠주고 먹고 입을 것을 가져다 준 게 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밤을 피하지 않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의 작은 집에서 밤이 함께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정말 그 사람이 쿤씨도 죽이려 할까요?”

“아마도. 탑의 왕은 엄청난 폭군이라 그의 앞을 막는 것들에게는 가차 없거든.”

“싫어요! 제가 쿤씨를 못 죽이게 할 거에요.”

“이제라도 내 걱정을 해 주니 고맙긴 하네.”

“정말이에요. 제가 쿤씨를 지킬 거라고요.”

“그래그래.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네가 잘도 그러겠다.”

“쿤씨!”

“농담 같은 게 아니야, 밤. 나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라고. 처음은 내 존재를 몰랐으니 당한 거지만 다음은 없어. 그런데 나보다도 훨씬 약한 네가 날 지킨다고? 현실성이 없는 얘기야.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쿤은 자하드의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였다. 직접 금빛 눈동자를 지닌 아이를 찾아서 그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완전한 치외법권에 속하기에 살인을 밥먹듯 해도 죄를 물을 수 없으며, 이 세상의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그 자하드에게 반기를 드는 건 다른 왕들에 대한 반역보다도 더 무의미한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운 좋게(혹은 운 나쁘게)도 이미 금빛 눈동자의 소년을 만나버린 쿤은 이제와서 손을 떼긴 늦어 있었다. 잠깐이지만 눈이 마주쳤으니 자하드는 이미 단서 하나를 손에 쥔 셈이다. 눈에 띄는 색채는 그의 출신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에 자하드는 곧 그의 아버지를 찾을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쿤의 아버지에게는 수 없이 많은 자식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버지조차 그들를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자하드의 수색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쿤들의 아버지인 쿤 에드안은 자하드 못지 않은 폭군이었기에 그의 성을 떠난 자식도 부지기수인지라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제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나요.”

“........”

아직 갈 길이 먼데 쿤의 옷자락을 움켜쥔 밤은 더는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금빛 눈동자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쿤조차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그렇기에 노을빛으로 차오른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그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실험 중인 쿤에게 밤의 그런 반응은 꽤나 고까운 것이었지만 당장 해야할 일이 있기에 그는 말을 고르는데 꽤나 신경을 썼다.

“강해지는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뭐든 한 순간에 해결되진 않아.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시간을 버는 중이지.”

“뭐든 할게요.”

“그래.”

“강해지게 해 주세요.”

“응.”

*

쿤 에드안의 성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덕에 꽤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드안은 탑의 왕이라는 자하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지만 자하드의 방문이 썩 내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늘 하던 대로 반라의 미녀를 양쪽에 끌어안은 채로,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자하드를 맞이하는 걸 보면 유흥의 단맛에 푹 빠지려는 찰나에 방해를 받은 것에 틀림없었다. 허나 눈치없게도 자하드는 마치 개선장군과 같이 푸른 우단 카펫을 밟아 나갔다. 세계의 손꼽히는 강자 사이에서 어느 쪽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생존율이 높은지 머리 굴리기에 바쁜 다른 사람들만이 분주했다.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둘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였지만 따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먼저 져 주기로 한 쪽은 놀랍게도 에드안이었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옷도 갖춰입지 못한 여인들을 먼저 내 보낸 에드안은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먼 옛날의 친우를 향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은 몇 남지도 않았건만 반갑기 보다는 하도 봐서 질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

“쿤의 아이를 찾고 있다.”

“하? 그래서?”

“네게 향방을 묻는 것이다.”

“내 자식이 얼마나 많은데 네 눈에 띤 녀석이라고 내가 기억해 줄 성 싶냐?”

“충분히 눈에 띄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얼음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네 자식들 중에서도 손에 꼽지 않던가?”

“뭐냐 갑자기. 더위라도 타는 체질이 된 거냐? .....물론 흔한 재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십 수명은 될텐데, 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있을 시간 없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작은 아이다. 그런 주제에 순간이지만 사상(寫像)을 뒤집어 내 시계(視界)의 시간을 ‘얼렸다’. 분명 네 눈에도 찰만한 재능 아닌가?”

“........”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 아직 네 것이니 해치진 않는다고 약속하지.”

“후우.”

자하드가 보고 있든 아니든 긴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댄 에드안은 담배 연기를 뱉어내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하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에드안에게도 눈도장을 받을만한 아이지만 기억나는 얼굴이 없다는게 이상하게 분했다. 세상을 주름잡는 귀족가의 자제라 해도 성년이 되지 못한 아이는 부모의 소유이니 자하드의 말처럼 그가 성년이 되지 못했다면 아직 에드안의 수중에 있어야할 재산인데, 언제 주머니를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다니.

“찾아서 어쩌려는 거냐. 그저 재주를 치하하려는 건 아닐텐데.”

“그 아이가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

“......해서 그 괴물을 죽이려면 찾아야한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가관이라 에드안의 실소는 점차 광소로 번져갔다. 참으로 깜찍하고 요망한 아이다.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게끔 재능을 숨기고 한다는 짓이 세계를 삼킬 괴물을 거두는 것이라니. 자하드가 자신을 찾아오게끔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에드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을텐데 찾아내야 할 이유를 더해 주니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찾아봐 주지.”

“모르는 건가?”

“뭐?”

“당장은 알 수 없는 거냐고 물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자하드를 마주한 에드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주변의 기류에 에드안의 전기가 타고 흘러 파열음과 같은 소리를 만드는 간격이 짧아졌다. 자하드를 막아섰던 그 푸른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지만 에드안의 눈동자에는 또 다른 이채가 흘렀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신비로운 색이었지만 자하드의 머릿속을 채운 눈동자는 에드안의 것이 아니었다. 좀 더 투명하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깊은 눈동자였다. 이 땅의 생명이라면 자하드에 대해 모르지 않을텐데 그가 멸절을 선언한 괴물을 기르고, 또 자신의 손에서 앗아 도망친 맹랑한 아이의 눈동자 답게 아무런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던 눈빛. 두려움만이 아니라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공허라 해야 하려나?

“그럼 내가 직접 찾겠다.”

“흥. 그러던가. 대체 날 왜 찾아온 거냐.”

“네 우리의 권속이 아니라면 내가 데려가도 불만은 없겠지.”

“뭐?”

자하드는 에드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함께 영생을 누려온 친구이자 세계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인 에드안이라면 자하드도 손쉽게 제압할 수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당장 승부를 보기에 위험부담이 큰 쪽은 분명 에드안이었다. 자하드의 예상대로 에드안은 자하드의 돌발 선언에 퍽이나 당황한 듯 싶었으나 섣불리 주먹을 내 뻗지는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자하드! 야, 자하드!!”

당장은 대답 없이 멀어져 가는 친구의 등에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 이 일로 에드안과 얼마나 틀어질 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명분은 자하드 쪽에 있으니 별 상관 없었다. 분하기는 하겠지만 아직 자하드가 에드안의 아들을 손에 넣은 것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손으로 내다 버린 자식도 많은 만큼 에드안의 아들 중 하나가 자하드의 손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가 직접 나서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자하드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에드안이 자신보다 그를 먼저 찾아낸다면 금안의 괴물을 자하드가 죽일 수는 있어도 에드안의 아들을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는 힘들 것이다. 에드안의 물건에 대해서 자하드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말하자면 도박이었지만 자하드는 무엇도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도박의 결과가 어찌되든 그는 금안의 괴물만 죽이면 되었고 영생의 권태에 갉아먹히던 삶에 잠깐의 빛이 찾아든 것만으로도 만족할만 했으니까.

“아센시오… 들었느냐?”

“네. 아버님.”

“자하드가 말한 네 형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보다 먼저 찾아서 데려오거라.”

귀한 인재가 자신의 아들 중에 있었다는 걸 아버지인 에드안이 여즉 몰랐다는 것만해도 억울한데, 구경도 하기 전에 자하드에게 빼앗기다니 자존심 센 에드안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그에게 인정받아 휘하의 장수로 부리고 있는 자식들을 풀어 동생의 행방을 수색케한 에드안은 제 분에 못이겨 곁에 둔 와인을 병째 비웠다.

*

쿤의 지시사항이기도 했지만 그의 뒤에 꼭 붙어 따라가는 밤은 검은 숲의 오싹한 공기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무언가가 자신을 찔러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런 밤과는 다르게 정면을 응시한 쿤은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을 깔며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전진 중이었다. 추적자들은 아직 쿤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하려면 쿤도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내던 곳을 태워 흔적을 감추고 마물들이 우글대는 그림자 숲으로 들어온 쿤은 숲의 중심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색이 어려운 지점까지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했다. 먼 옛날, 아를렌이라는 대마녀에 의해 형성된 이 숲은 온갖 저주를 머금어 그림자를 대상과 같은 모습과 힘을 가진 마물로 변화시킨다. 다행히 쿤이 가진 얼음의 힘은 그림자를 흐려지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숲 전체가 어둠에 휩싸이는 밤이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잠시라도 쉬어갈만한 목적지를 찾을 때까지는 쿤에게도 녹록치 않은 매일이겠지만 당장의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이 뿐이었다. 다행히 쿤은 자하드나 에드안과 같은 강자는 아니니까 자신의 그림자가 덤벼온다고 해도 그 두 사람보다야 상대하기 수월하겠지.

“쿤씨.. 여긴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아까는 강해지고 싶다더니 벌써 포기한 거야?”

“쿤씨가 저한테 빙결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네가 마법의 입문도 떼기 전에 발각당할 걸.”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건가요?”

“당장의 계획은 이대로 물이 있는 데까지 가는 거야.”

“물이요?”

“그림자가 흐려지는 곳이 필요하거든.”

항상 검은 로브를 꼭 두르고 다니던 쿤은 숲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을 벗어 태워버렸다. 덕분에 밤은 오랜만에 제대로 쿤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숲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봐 긴장하게 되는 건 여전했지만 한 번 시선을 주고 나니까 오히려 쿤이 신경쓰여서 숲을 주시하기가 힘들었다. 엷은 그늘이 한 겹 드리운 것 같은 이 공간에서 그는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밤과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신체 곳곳에 깃든 깨끗하고 맑은 색채가 밤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밤이 기껏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그가 미웠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고 오히려 밤보다도 선이 가는 체형이 그대로 눈에 박혔다. 알고 있다시피 쿤은 밤보다 강한 마법사였지만 위험한 기운을 짙게 풍기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여태 그의 보호를 받아온 밤조차도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물을 못 찾으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 하루이틀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생각하기 싫은걸.”

“그럼 절 버리고 쿤씨라도 마을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됐어. 이미 들켰는데 널 떼 두고 간다고 안전하겠어. 마물들의 밥이 되더라도 여기서 내 선택으로 그렇게 되는 게 나아.”

여태 쿤이 계속 주의하고 있는게 ‘그림자’라면 두 사람이 물을 찾는다고 해도 앞으로처럼 따뜻한 집을 거처삼아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먹고 마실 것도 전부 이 곳에서 구해야 할 터였고 입을 것도 마찬가지였다. 쿤이 마을까지 나가 종종 보급을 해 올 생각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나는 첫 순간부터 길거리를 전전했던 밤이라면 모를까 쿤이 그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밤은 이제야 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장 눈 앞에서 저 작고 하얀 뒷모습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

“좀 더 주무세요.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다행히 두 사람은 한계에 달하기 전엔 물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의 그림자가 겨우 닿지 않는 곳을 거점 삼아서 쿤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밤은 그림자 마물을 상대로 수련을 시작했다. 쿤은 몰랐겠지만 이유가 생기고 나니 밤은 싸움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마음을 달리 먹은 이후, 밤의 성장은 거침이 없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시간대와 관계없이 숲의 마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밤이었지만 녹록치 않은 생활은 쿤의 건강을 차츰 악화시켰다. 예민한 성격을 타고난 쿤이 노숙이나 다름 없는 이런 생활을 시작한 이상 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쿤 이외의 몇몇 인물들과 어울릴 적에도 그들은 쿤에게 왜 여항에 머무는 지를 묻곤 했으니 말이다. 실력만큼이나 몸도 성장한 밤이 보기에 병색이 완연한 지금의 쿤은 과거의 자신이 대체 뭘 믿고 그리 의지했었나를 돌이켜보게 할 정도로 연약했다. 밤이 잡은 들짐승의 가죽을 갈무리해 만든 모포로 감싼 몸은 며칠 사이에 더 마른 것 같았다. 가끔 시장에 나가서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 오기는 하지만 숲에서의 생활 자체가 험한데다가 밤이 약재를 보는 눈이 없어 이리 되지 않았나 싶다. 상태가 쭉 안 좋은 쿤을 시장에 보낼 수가 없어서 최근에는 밤이 혼자 다녀오곤 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밤은 혹 도시의 경비병과 시비가 붙는다고 해도 그들을 손쉽게 따돌릴 수 있을만큼 강해졌기에 마을까지 오가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물건을 보는 눈은 도통 생기지가 않았다. 그런 섬세함이 일찍이 있었다면 쿤이 밤을 위해 얼마나 힘든 선택을 했는지도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까?

“심심할텐데.”

“다른 할 일도 없는 걸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숲의 바람이 수면을 쓸고 지나간 흔적을 함께 바라봤다. 윤슬이 이는 양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 쿤은 먼저 눈을 감았다. 저를 지켜주겠다는 말에 한 조각의 믿음도 가지 않던 소년이 이렇게나 자랐다. 이것으로 그가 기르려던 ‘괴물’은 완성된 것일까? 그 괴물은 자신의 소망대로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켜 으깨 부술까? 쿤은 혼자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당장도 자신을 어미새처럼 보듬는 유약한 소년이 쿤이 원하던 괴물일 리가 없었다. 그럼 결국 완성이라는 것은 쿤이 눈을 감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일까?

“저..”

“죄송한데 말씀 좀 물읍시다.”

그림자의 숲 같은 험한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낮시간이라 위험을 무릅쓰고 이 숲을 건너려는 모험가들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호숫가에 이르렀다는 건 이상했다. 길을 잃은 이라면 이 땅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좀 더 놀라워 해야 했고, 이 숲으로 숨어든 자라면 좀 더 경계함이 옳았다. 부정합을 눈치챈 밤의 금안이 차게 식어 말 그대로 금속성의 광택을 띄었다.

“여기까지 찾아올만큼 한가한 몸이 아닐텐데.”

“역시 너 였냐, A.A. 하.. 이만 돌아가자. 아버님께서 널 찾고 계신다. 게다가 너 처럼 몸도 약한 녀석이 노숙이라니. 이러다 몸 상해.”

달려나갈뻔 했던 밤은 차분한 쿤의 목소리에 행동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잠들기 전이었으니 자신을 품에 안은 밤의 신체가 긴장으로 근육을 부풀리는 걸 느끼고 있었던 쿤은 얘기치 않게 그가 길러온 것이 괴물의 새끼가 맞긴 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지켜준다는 게 빈 말이 아니었던 건지 밤은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으면 그르릉 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뱉을 듯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곳에 제대로 정착한 이후 밤은 첫 날처럼 쿤에게 혼자서라도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모두 잃은 이후에 그의 소유욕이 전부 쿤에게 집중되어 버렸나보다. 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몸 상하는 건 거기도 똑같지. 난 안 돌아가.”

“고집 부릴 때가 아니야. 아버님만이 아니라 탑의 왕도 널 찾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이나 이어진 집착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아?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쿤의 궁으로 돌아가야해.”

밤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을 적에 쿤이 말했었다. 자하드는 자신도 밤도 죽일 것이라고. 쿤의 궁에서 온 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하드는 실로 무서운 인물임이 분명했다. 다 알면서도 쿤은 여태까지 밤과 함께해 준 것이다. 이렇게 약해질 때까지도.

“밤. 저들을 숲 밖으로 쫓아내. 절대 죽이진 말고.”

그건 절대 형제에게 베푸는 온정 같은 게 아니었다. 죽이는 것보다 살아있는 자를 막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밤에게 더 어려운 과제를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쿤의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릴 필요도 없이 밤은 당장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어섰다. 쿤에게 모포를 다시 여며줄 때를 제외하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자 눈빛이었다.

“A.A!!”

“쿤 씨를 방해하지 마세요.”

“닥쳐라, 괴물. 지금 누가 누굴 방해한다는 거지? A.A.를 위험에 빠뜨린 건 너다. 네 녀석만 아니었으면 평안한 삶이 보장된 아이를..!!”

“쿤 씨가 절 선택했어요. 방해꾼이 누구인지는 이걸로 판가름 난 것 아닌가요?”

밤의 금빛 홍채 속엔 마치 경멸과 같은 빛이 어려있었다. 아마도 괴물은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진심이었다. 조용히 일렁이는 분노는 이미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주변의 공기가 이글거렸다. 분노와 같은 박자로 범람한 그림자가 소년의 살갖을 검게 물들였다.

“금안의 괴물!”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처럼 그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니 동료들의 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나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소년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살갖을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검은 불꽃처럼 넘실댔다. 그것은 흡사 소년의 몸 속으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신이 새까맣게 덮이고 난 뒤에는 흉흉하게 빛나는 금빛 동공만이 적을 향했다.

'...설마 숲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이긴 했으나 추적자들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쿤에게도 밤의 상태는 위험해 보였다. 그가 '괴물'이라는 걸 쿤이 지금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놀라웠다.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순수하고 담백하게 이 기적같은 순간을 받아들일 뿐. 어차피 쿤이 원하는 건....

"A.A.!!"

밤의 몸 속에 잠들어있던 괴물이 개화하는 순간에 홀려있던 쿤을 찾아온 그의 형제가 잡아 끌었다. 아센시오는 동생이 정말로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야 말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이 숲도, 괴물의 새끼도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괴물이자 자신에게 동생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아버지, 에드안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에드안은 아센시오의 다른 형제들에게도 재앙이 될 테니까. 분명 밤이라는 소년의 힘은 아센시오가 여태 보지 못한 종류지만 아직은 운용에 대해 서툰 구석이 많아 보였다. 전투에는 절대적인 힘 못지않게 경험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동생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쉽게 공격할 수도 없을 터. 그 점을 노려 밤을 피해 재빠르게 쿤의 곁으로 도약한 아센시오는 그대로 일행을 버려둔 채 도망칠 생각이었다.

"윽!"

아센시오의 계획이 생각으로 그친 것은 소년의 몸 속에서 완전히 깨어난 괴물이 원하는 것은 그의 동생 단 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밤을 잠식한 어둠은 쿤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다가서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쿤의 주변을 검은 늪으로 감쌌다. 죽이지 말라는 말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모를 눈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피부 덕에 어둠 속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빛 눈동자 마저도 흉흉해 보이는지도. 그렇게 타인의 육체까지도 넘보던 어둠은 식물의 덩굴처럼 침입자들을 휘감았다. 뼈를 부수는 둔탁한 굉음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쿤이 형제에게로 달려왔다.

"아센시오!"

"크... 아게..로... 도망..쳐라, 어서."

"밤! 숲 밖으로 쫓아내기만 하면 되잖아!!"

"그럼 다시 올 거잖아요? 적어도 다리 정도는 못 쓰게 만들어야..."

"크아아아악!!"

"저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죠."

밤이 그를 막진 않았으나 쿤은 아센시오를 향해 뻗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어차피 쿤이 바란 건 멸망이다. 늦든 빠르든 형제들도 그 때 쯤엔 의미를 잃을텐데 계속 미련을 두면 무엇할까? 쿤의 행동에서 체념의 빛을 읽은 밤은 살벌했던 눈을 다시 원래의 그로 되돌렸다. 어서 방해꾼들을 치우고 쿤을 다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다시 자신의 품에 기대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쿤씨!"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빛은 지금까지 쿤이 본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신 것이었다. 그 찬란함에 잠시 넋을 놓았던 쿤을 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깨웠다. 이어 턱을 잡아 올리는 단단한 손에 빛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쿤은 현실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였다.

"....당신은..?"

"쿤씨!!"

"!"

밤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을 때가 되어서야 쿤은 밤을 돌아봤다. 자하드의 눈이 그 쪽을 향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밤의 성장을 확인하긴 했지만 수천년 간 세계를 지배해 온 자하드의 상대가 되긴 아직 이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쿤은 자하드의 시선을 가로막고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밤을 그대로 다른 공간으로 흘려내었다. 시선이 얽혀 있을 적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민함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표정을 유지한 자하드는 쿤을 당겨 품에 안았다.

"시공을 다루는 재주는 아주 드물고 또 어렵지. 그 힘을 버틸만한 신체를 타고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부모로부터 보통보다는 훨씬 강인한 육체를 물려받았기에 망정이지 한껏 약해진 상태에서 공간의 틈을 열었던 쿤은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자하드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밤이 가까운 곳에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찾으러 왔던 형제들은 그 후에 어찌 될 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리였다. 쉽게 느낄 수 없는 마력의 파동을 바로 감지한 덕에 수년 간 찾아 해맸던 소년을 손에 넣은 자하드도 지금만큼은 서두를 것 없이 쿤이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너흰 이제 어찌할 테냐. 살고 싶다면 내가 거두어 줄 수도 있는데."

".....A.A...에게는 대체... 무, 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탑의 왕."

"......"

자하드는 말 없이 자신의 품에 잠든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자신의 명령을 맹랑히 거스른 그를 찾아서, 자신은 어찌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기르던 괴물의 새끼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아직 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척살의 대상이 아닌 이 소년을 찾아헤맨 이유를 그는 무어라 설명해야 옳을까? 아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꼭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 또한 없으므로 자하드는 마음 가는 대로 소년을 안아 올렸다.

"지금 부터 생각해 볼 참이다."

*

탑. 세계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그 곳은 역사가 존재한 순간부터 현신(現神), 자하드의 거처였다. 선사가 그의 손에 지워진 건지 그가 정말 신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지는 이제와서 밝힐 수 없겠지만 여하튼 자하드는 뭍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였고, 때문에 탑의 위상도 공고했다. 자하드와 그의 친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쿤은 자신이 그런 곳에 있다는 걸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일텐데.

"좀 쉬었는지 모르겠군."

"......무슨 속셈이지?"

"글쎄. 아무튼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치료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마력을 봉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는 쿤에게는 마력이 그대로 남아있다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들었기로손 그걸 또 베풀어주기까지 한 걸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푹 자고 일어난 영향인지 쭉 저점이었던 몸상태가 오늘은 좀 나아진 듯도 싶었다.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여전히 자세를 바꿀 기력도 없었지만 시야만은 밝게 트여 있었다. 몇 년이나 쿤을 찾아 다녔다고 했던가? 이제야 얻은 성과를 만끽하는 중인지 쿤의 침대에 걸터앉은 자하드는 물색 모발을 손끝으로 흘려내었다.

"에드안의 아들이 어째서 괴물을 보살피는 거냐."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

할 말이 없었기에 자하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운 자리에서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깨끗한 눈이었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기에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투명함. 자하드가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런 류의 생기를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아 자하드는 소년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죽여."

"넌 내가 금한 금빛 눈동자의 괴물을 길렀다. 그러니 나 또한 네 말을 들어 줄 이유가 없지. 나는 널 살리겠다. 네가 죽고자 한다면 더더욱."

"악취미네."

"네가 한 짓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오랜 예언이 이야기한 멸망의 위기로 세계를 쏟아넣었으니, 그는 분명 중죄인이었다. 하지만 자하드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아니기에 소년을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자하드가 그를 멋대로 대할 수 있는 무력이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당장 중요한 것은 자하드가 소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른 괴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자하드가 자리를 비우면 그가 무슨 짓을 할 지가 염려되는 상황이었기에 왕은 부득이하게 어린 날에 그와 친구로 지냈던 막내아들을 불러 감시를 맡기기로 했다.

"다음에 볼 때는 협조적이었으면 좋겠군."

*

괴물. 갑자기 공간을 열고 나타난 밤을 가리켜 그 곳 사람들은 괴물이라 칭했다. 주변의 사물을 닥치는 씹어삼키는 어둠을 전신에 휘감고 나타났으니 그리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쿤의 도움으로 자하드에게서 도망친 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미웠다. 괴물이라는 단어가. 탑의 왕이 자신을 노리게 만든 이유, 친구들을 잃고 숨어 살아야 했던 이유,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 주었던 쿤마저 사라져버리게 만든 그 이유로.

"제가 어째서 괴물인가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서 금빛 눈동자를 물려 받았다는 사실이 밤을 괴물로 만든 것이라면 그들은 왜 밤의 부모부터 밝혀내지 않는가? 늘 마음을 기대오던 쿤까지 곁에 없으니 밤의 감정은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스스로를 점점 더 괴물이 되는 길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밤 자신은 그를 의식하지 못한채로, 그의 어둠은 이제 살아있는 생물들까지도 손을 뻗었다. 직전에 피 맛을 본 그림자들은 더더욱 거칠 것이 없는 상태였다.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밤이 하는 한 그가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받아들여준 건 쿤 밖에 없었다. 이대로 공간을 삼켜가다 보면 다시 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밤은 새로 찾은 희망으로 속도를 높였다. 혹여나 자하드가 이미 쿤을 죽인 뒤라면 그를 찾아 죽일 것이다. 쿤의 걱정대로 밤이 아직 그를 이길 수 없는 상태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그는 '죽음'이라는 같은 공간에 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구나, 작은 괴물."

어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 마치 구세주처럼 그림자의 침식을 탑의 왕이 막아섰다. 같은 색의 금빛 시선이 부딪혔다. 한 쪽은 빛 속에 자리한 태양이었고 다른 한 쪽은 어둠에 뜬 달이었다. 같은 세기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상반된 힘은 정 반대의 색으로 여전히 세계를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예언을 막을 수 없다면 좋다. 누가 탑의 주인이 될 지 겨뤄 보자꾸나."

예전에 이 글의 일부를 보신 분이 있으실텐데...
이상하게 보이실지도 모르겠으나 결말은 이게 맞습니다 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제 표현력과 문장력과 아이디어의 부족이 불러온 대 참사 정도로 여겨주세요...

'신의 탑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의 탑] 미련  (4) 2020.03.08
[신의 탑 - 밤 x 쿤] 영원의 단면  (2) 2020.01.31
[신의 탑 - 밤 x 쿤] 신기루  (6) 2020.01.16
Khun`s Day 교류회지 유료공개  (0) 2019.12.26
[신의 탑- 밤 x 쿤] 세상의 중심  (2) 2019.11.26

[신의 탑 - 밤 x 쿤] 영원의 단면

신의 탑/단편

 

 

 

 

 

 

 

 

 

애니메이션이라던가 라이트 노벨 같은 가벼운 장르에서 보건실이 왜 학생들 간의 밀회에 쓰이는 지 몰랐는데, 진학을 하고 보니 알겠다. 보건교사는 일주일에 딱 이틀만 이 학교에 근무하고, 다른 시간에는 근방의 중학교에 근무하기에 보건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긴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 곳의 침대였다. 쟁탈전이 치열한 부분인데다가 최근에는 전학온 미남이 자주 그곳을 사용하니 말이다. 정규 수업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하교하지 않고 보건실 근처를 맴도는 여학생들이 많은 것을 보니 아게로가 이만큼 기다린 것도 다 소용이 없어질 모양이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보건실을 운영하지 않기에 문단속을 하러 온 아게로는 별 수 없이 목소리를 내어 방해꾼들을 내쫓았다. 이어 그곳에 자리한 꾀병 환자들을 내쫓을 차례가 왔다. 진짜 환자는 귀가조치 되므로, 지금까지 보건실에 붙어있는 녀석들은 다 꾀병을 부리는 중이라고 봐야했다. 늘 아게로를 헷갈리게 만드는 전학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야, 스물다섯번째 밤. 일어나."

전학올 때부터 몸이 약하다고 했고, 실제로 낮에는 창백한 얼굴로 양호실을 찾곤 하는 그는 꾀병이라고 하긴 모호한 구석이 있었지만, 야간자율학습에는 또 대부분 참여했다. 옆자리의 아게로에게 못 들은 수업의 필기 노트를 빌리거나 숙제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쿤 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됬나요?"

"넌 날 알람시계로 쓰냐? 조퇴할 거면 교무실 가. 난 이제 여기 정리해야돼."

밤 때문에 몇 배로 사람을 쫓는 게 힘들어진 보건위원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밤은 빨리 일어나 주지 않고 구급상자와 이미 비어있는 침대부터 정리를 시작한 아게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기만 했다. 사람들은 급우에게도 존대를 하는 밤의 독특한 말버릇마저도 귀족같다며 칭찬했지만 아게로는 밤의 성격에 대해 하등의 칭찬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신경써서 밤이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려해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도움을 청할 때 매몰차게 거절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의 행동은 밤을 대할 때 날이 선 구석이 있었다. 물론 밤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을 대할 때도 그는 사근사근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지만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몇몇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를 볼때면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정작 밤은 그가 필요한 모든 것과 가까이 있는 그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너 아직도 안 갔어?"

"쿤 씨는 제가 싫으세요?"

"너랑 내가 싫고 좋고 할 사이야? 귀찮기는."

"싫고 좋고를 따질만큼 특별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뭐래. 아프면 나하테 치근대지 말고 교무실 가라고."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 곳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밤에 대해서 잘생겼다거나 예쁘다고 이야기했지만 아게로는 인간들이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긴 시간을 살아온 밤에게조차 경이롭게 여겨질 만큼의 미인이었다. 성격 때문에 뛰어난 외모가 묻힌다고들 평하지만 밤이 보기에 그건 복에 겨운 소리였다. 이 곳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적을 둔 만큼 예전부터 그를 보아왔기에 익숙해져 감각이 무딘 것이겠지. 몸에 지닌 색이 엶어 항상 희게 빛나는 가운데, 빛이 부족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체모의 푸른 빛이 드러나는 이 즈음의 아게로가 밤은 좋았다. 그 와중에도 더 깊게 푸른 것은 밤을 향한 눈동자. 밤이 살아온 붉고 검은 세계와 확연히 대비되는 푸르고 흰 빛깔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라 시간에 풍화된 밤의 마음 마저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따라 말이 많다, 너? 아쉽긴 뭐가 아쉽냐? 너 좋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은 쿤 씨가 아니잖아요?"

"...뭐야, 너."

밤은 말을 걸 때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서, 아게로가 그에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는 밤의 눈동자가 호박색을 띄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아게로가 지켜보는 동안에 그 투명한 금빛 동공이 붉게 변했다. 동시에 색채가 전하는 위협을 감지한 아게로는 뒤로 돌았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 쫓아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인물이 주변에는 없었으니까.

"못 도망칠 걸요? 인간의 움직임은 제 눈엔 너무 느리니까."

밤의 말대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뱀파이어에 대해 묘사하는 대로, 인간에 비해 월등한 운동신경과 악력을 지닌 밤은 아게로의 팔목을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그의 입을 막았다. 정체를 들키는 게 두렵지는 않지만 그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기에 쉬이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곳에 있어야만 밤이 아게로의 곁에 머물 수 있을테니까.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밤은 아게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공포감을 누르고 접근하려면 이런 과정이 한번은 필요하니 감수하는 것이지. 이성간에는 뱀파이어 특유의 위험한 매력이 잘 어필되는 편이라 수고가 적지만 아게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억지로 밤의 무릎에 걸터 앉은 꼴인 아게로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밤의 팔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딱하게도 인간인 이상 밤을 이길 수 없었다. 밤은 여유롭게 붙잡았던 팔을 감아 겹치며 아게로의 하복 셔츠에도 손을 댔다. 하복은 재질도 얇고 깃도 낮아서 단추 한 두개만 풀어내도 쉽게 목덜미를 드러내게 만들 수 있었다. 일을 할 때의 습관대로 뒤로 묶어 정리한 머리카락 때문에 윤곽이 깨끗하게 드러난 목선이 유혹적이었다. 입술을 축이는 대신으로 그 목선을 핥아올린 밤은 겁먹지 말라는 듯 두어번의 입맞춤을 남긴 후에야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프지도 않을 거고요."

흡혈을 당했던 일이 불편한 기억으로 남지 않게끔 뱀파이어는 피를 취할 때 혈액손실에 상응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아게로에게는 밤이 특별히 더 신경을 쓸 테니까 송곳니가 살을 꿰는 통증조차도 느낄 틈이 없을 터였다. 호감이 있는 상대는 밤에게도 꿀보다 단, 최상의 풍미를 가진 혈액을 제공해 줄 테니까 밤도 마땅한 배려를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다녀왔습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보이는구나, 비올레. 무슨 일 있는 거냐?"

"진성 씨... 쿤 씨가 오늘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좀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할 사이 같았으면 그렇게 다짜고짜 물어 뜯으면 안 되었던 거 아냐?"

"화련 씨도 계셨군요."

"물어 뜯어? 비올레가?"

"옆 자리 꼬마를 건드렸다고 했었잖아요. 의식을 잃어서 데려다 주고 왔다고."

"아.. 오랜만의 식사였으면 실수할 수도 있지. 너무 마음쓰지 마."

뱀파이어들은 인간처럼 무리지어 사는 습성은 없었다. 먹잇감들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아가려면 아무래도 다수 속의 소수인 게 이점이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한 약간의 교류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는 그나마 성격이 가장 유하다는 이유로 밤의 집은 꽤 자주 그들 사이의 교류회장으로 이용되곤 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쉽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정도라면 실수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약해."

"그렇군요.. 그럼 쿤 씨는 절 싫어하게 될까요?"

"그렇게 마음에 들면 데려와서 사육하지 그래? 불편하게 둘러 가지 말고."

"제가 원하는 건 사육이 아니에요."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취향의 풍미를 가진 인간을 사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르면 인간은 절대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걸 비올레,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떠 보는 화련이 비올레는 조금 불편했다. 뱀파이어들이 으레 그렇 듯 하나의 눈을 잃었어도 타는 듯한 붉을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충분히 매력적인 그녀는 집 주인인 양 탁자의 정 중앙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인 것 처럼 구는 진성과는 확연히 다른 스탠스.

"저는 인간들처럼 쿤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그럼 이빨부터 들이대면 안됐다는 얘길 하는 거잖아. 아무리 통증이 없어도 그런 경험을 하면 인간은 겁 먹는다고."

"하지만 확인해야 했는 걸요."

"네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 감정을 먼저 확인 하란 말이야. 어차피 우린 시간 많잖아?"

".....제가 잘못했군요. 사과하러 가야겠어요."

"이래서 연하는 싫다니까. 직진이 다 정답인 줄 알고."

화련의 행동이나 말투가 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옳다는 것만은 인지한 그는 나서려던 발을 멈추었다. 이어 끼쳐오는 담배연기. 밤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성이 잠시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냈다.

"천천히 가자고.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

"그리고 난 네 그런 점이 싫지 않아. 인간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제부터 잘 하면 되지. 후회할 시간도 없다고.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아."

확실히 인간은 뱀파이어에 비해서는 여리고 순간만을 사는 생물이지만 닮은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는 선배들로서 전해준 가르침은 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랬다.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도 알았고 아게로의 시간이 자신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밤의 일은 그저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기회는 올 테니까.

*

'미치겠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에 웅크린 아게로는 몇 번을 고민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난데없이 학교에서 쓰러졌다며 낯선 친구의 등에 엎혀 돌아온 이후, 별 이상이 없다는데도 가만히 두질 않는 식구들의 열성적인 간호도 골치아팠지만 주말이 지나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아버지고 형제자매고 할 것 없이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학교를 쉬어도 좋다고 했지만 철두철미한 성격의 아게로에게 이런 꾀병 같은 상황은 불쾌감만 상승시켰다. 원칙주의자까지는 아니어도 자기관리에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A.A! 너 오늘 학교 안 갔다며?"

"나가, 변태."

"내가 뭘 했다고 변태냐. 쉬는 김에 형 좀 도와줘라. 누워만 있으면 몸 더 상해. 여름인데 덥지도 않냐?"

"꺼지라고."

남자 형제들 간의 예의범절은 이미 실종된 지 수 세기라, 아파서 누워있다는 동생 방으로 쳐들어온 하츨링에게서는 눈꼽만큼의 죄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이 쉰다는 말에 게임 노가다를 시키러 온 참이니 아게로가 더 기대를 해 무얼할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도 방해만 될 게 뻔해서 쫓아내려 했건만 하츨링은 꿋꿋하게도 아게로의 침대로 기어올라왔다.

"나 이제 구독자 천 명 넘었거든? 이 참에 노 저어야 한다고. 잘 되면 형아한테 용돈도 받고 얼마나 좋아?"

"용돈 타 가지나 말아라, 백수변태."

"형님한테... 누구랑 싸웠어?"

"너랑 싸우는 중이잖아, 이..!!"

"팔 안 부러졌냐? 컨트롤 좀 해야 하는데."

"멀쩡하다고!!"

"설마 학폭 같은 건 아니지 너?"

기어코 이불 속에서 아게로를 발굴해 낸 하츨링은 동생에 대한 것인지 노동력에 대한 것인지 모를 걱정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멍이 빠지는 중이라 면적이 늘어난 것이겠지만, 누가봐도 손자국인 게 분명한 왼팔의 상처가 눈에 띈 탓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맞고 다닐 것 같아?"

"그럼 덮치려고 했냐? 누가 이랬어?"

"그냥 꺼지라고! 마리아! 이카르디! 누가 이 변태 좀 치워줘!!"

하츨링의 머리 속에 게임과 유튜브 말고 다른 게 들어있을 리가 만무함에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아게로는 하츨링의 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츨링이 아게로보다 네 살이나 많긴 해도 키 차이는 별로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밀어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급기야 지금 시간에 학교나 직장에 나가지 않았을만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다행히 몇몇이 달려와 주었다.

"하츨링! 동생이랑 싸우지 말랬지!"

"싸운 거 아니거든? 얘 누가 이랬어. 친구가 아니면 아버지야? 가정폭력?"

"다 아니라고 했잖아!! 남의 말을 어느 구멍으로 듣는 거야??"

"진짜로 팔은 왜 그래? 다쳤어?"

"별로 아프지도 않고 괜찮으니까 좀.. 머리 아프단 말이야."
"...일단 조금만 더 자. 밥이랑 약 먹어야 되니까 한 시간쯤 있다가 깨워줄게."

한 시간 가지고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당장의 최선을 받아들인 아게로는 눈을 감았다. 피를 빨렸으니 아게로에게는 빈혈이라는 진단이 놀랍지 않았지만 남학생에게 빈혈이라는 병이 흔하지 않은데다가 의식을 잃을만큼 급성으로 발현된 점, 아게로가 성장기의 청소년이라는 점을 의사가 강조한 바람에 집안에서는 형제들과의 먹이쟁탈전에서 패배한 가여운 생물 취급 당하게 되었다. 원래 입이 짧은 편이라 식구들이 과량의 식사를 강요하는 것도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같은 반 흡혈귀에게 물렸다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린 상처는 없던데.'

붙잡혔던 팔은 엉망이 됐어도 막상 밤의 송곳니가 박혔던 자리는 깨끗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겠지. 여하튼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아게로는 밤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나눠줘야하는 입장이 된 걸까?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게 무슨 친해지는 거야!'

맨살을 핥아 올리는 혀, 키스, 이어 휘몰아친,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감각. 회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

고민은 깊었지만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지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아게로는 다시 등교를 시작했다. 밤도 해치진 않겠다고 했으니 피만 주면 졸업까진 시켜주겠지 싶어진 것이다. 사교육에 신경쓸 만큼 자식 농사에 관심이 없는 이버지를 둔 탓에 쉰 만큼의 진도를 따라잡아야 하는 아게로를 이수가 흔쾌히 필기도 빌려주고 도와준다고도 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오늘부터 운동해라,귀치장. 운동을 안하니까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너처럼 스포츠맨인줄 아냐?"

"건강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아주 저주를 하는구나.."

"운동해라, 허옇게 뜬 파란 거북이!"

"넌 또 왜 왔어, 악어!!"

옆 반에서까지 찾아와 성대한 환영회(?)를 해 주시니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아게로가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도 실상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같은 반 여학생들까지도 밤에게 쥐어주던 사탕이나 작은 초콜릿을 아게로에게도 일부 나눠주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수업 시간마다 직언이든 돌려 말하든 교사들까지 안부인사를 새로 전하니, 아게로로서는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른 의미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진짜 아팠으면 이렇게까지 부끄럽다거나 자존심 상하는 느낌이 아니었을텐데 고작(?) 뱀파이어한테 물려서, 몰아치는 쾌감에 정신줄을 놓은 거였으니. 이제는 밤이 뱀파이어라는 걸 알았으니까 낮에 비실대도 절대 걱정하지 않을 거고, 보건실에 남아있으면 인류의 안전을 위해 그냥 격리해 버릴 테다. 무시무시한 결심을 곱씹는 아게로를 알아서인지 밤은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는게 보임에도 차마 다가서진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보건실에 안 가도 되겠어?"

"네. 요즘은 컨디션이 좋아서요."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식사를 챙기듯 피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본연의 영양 공급원인만큼 흡혈행위 뒤에는 확실히 몸에 활력이 돈다. 이전부터도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편의를 선택하는 기분으로 보건실을 찾았었고. 아게로의 피를 마신 후라서 그런지 최근의 밤은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게로의 건강과 맞바꾼 것 같아서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더해서 한쪽 팔에 붕대까지 감고 나타난 아게로를 보니 밤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저기, 쿤 씨."

밤이 드디어 둘이서 이야기 할 시간을 갖게된 건 일과를 마치고 보건실 정리라는 본연의 임무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 아게로를 따라 나선 후였다. 같은 장소에서 또 밤을 맞딱뜨린 아게로는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기에 밤은 차마 보건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서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멋대로...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욕할 뻔했네. 기척을 좀 내라고! 깜짝 놀랐잖아."

"피하려고 하실 것 같아서.."

"이게 더 문제거든!!"

"아... 죄송합니다. 너무 경계하진 않으셔도 되요. 애초에 전 피를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거든요."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할 말이 아주 없어진 밤은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이미 잔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아게로를 배려하려고는 노력하고 있지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야 다음이 있는 건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불만 가득한 아게로의 표정을 보면 사과를 더 한다고 밤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제 나름의 확인이었어요. 뱀파이어는 호감이 있는 상대의 혈액을 특별히 감미롭게 느끼거든요."

"그래서 날 먹이로 쓰겠다고?"

"아뇨. 확인했으니까 쿤 씨가 원하면 다시는 손 대지 않을게요 . 그냥 지금까지 처럼 친구로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난생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그 이야기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 속에 위협의 빛은 없었다. 사과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종일을 기다린 거라면 확실히 연극이리 보긴 어려울지도.

"안 될까요?"

"너 하는 거 봐서."

힘으로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한 상대다. 저쪽이 먼저 안전을 약속해 주는데 그걸 거부해서 어쩌겠는가. 아게로의 애매한 대답에도 뛸 듯이 좋아하는 밤을 보며 언젠가 어린 시절에 길렀던 강아지를 떠올리던 아게로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오늘은 야자시간에 밀린 필기를 다 옮겨야 한다. 할 일이 많으니 어서 정리를 마쳐야지.

*

"쿤 씨. 이거 드세요."

"...뭐야?"

"시금치 빵이요. 철분 보충에는 시금치가 제일이라고 해서 만들어 봤어요."

"만들어? 네가?"

"네. 이래뵈도 왠만한 음식은 다 잘 하거든요."

자신은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1차 어필이 먹혔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밤은 이전보다도 아게로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음식에 무슨 관심이 있겠냐 싶었지만 한 입 크기로 정갈히 썰어 담은 빵은 건강해보이는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맛있었다. 병 주고 약 주는 작태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손을 뻗을 정도로.

"신기하네. 넌 이런 거에 크게 관심 없을 거잖아."

"관심 많아요. 쿤 씨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맛있는 걸 주고 싶거든요."

교실에서는 주목받기가 쉬워서 밤의 정체에 대해 애둘러 말하려 애쓰는 아게로와는 다르게 당사자인 밤은 상당히 직설적인지라 아게로는 갑자기 맛있게 먹던 빵이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아게로에게 줄 간식이었으니까 마실 것까지 신경써서 가져온 밤에게는 그 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설마 너희 집으로 오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럼 좋지만 쿤 씨가 싫어하실 것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랑은 자주 교류 하시나요?"

"교류..... 다른 데 놀러가긴 해도 집까진 잘 안 가지. 야자 끝나면 시간도 없고... 어쩌다가 피씨방이나 플스방? 가끔 오락실이나 코노정도? 보통은 먹으러 다니지만. 분식집이라던가."

"모르는 게 굉장히 많네요... 그런 건 학교에서도 안 가르쳐 주던데."

"애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노는 걸 가르쳐 주겠냐."

전학 올 때부터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설정이 붙어있었던 밤은 이 곳에서의 생활, 아니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뱀파이어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심신에 큰 상처를 입으면 오래 잠들어 있기도 하는데 지금의 밤은 막 동면에서 깨어난 참이라 모르는 것이 많다고 했다. 인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배우기로 했다던가. 부모라할 만한 존재는 멀리 있어서 주변의 뱀파이어들과의 교류로 필요한 정보를 모은 후 내린 결론이 그렇다고 했다. 무언가 어색하게 보이리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므로 들켜도 상관없다는데, 아게로가 보기엔 그 조차도 본인의 착각이지 싶었다. 무기를 구할 길이 없는 아게로야 뱀파이어라는 그에게 겁을 먹었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요즈음은 종족을 밝혔다가는 실험용으로 포획될 것 같으니.

"공부할 필요 없으면 야자 빼고 놀러다녀. 그게 너한테 더 도움이 될 걸?"

"쿤 씨는 진학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그래야 집구석에서 나올 수 있잖아."

"그런 이유라면야 제 집으로 오셔도 되는데요."

이게로는 아직 밤을 두려워하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증거로 아게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을 짚고 산 밤을 흘겨볼 뿐 대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밤의 공간으로 그가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주지 않는 곳이라면 가능성이 있기에 밤은 오늘부터 아게로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

뱀파이어는 신체만이 아니라 뇌도 인간에 비해서 뛰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오랜 시간동안 살아왔다는 게 헛말이 아니라서 그간의 경험치로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거나. 수학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밤은 한 달 여만에 그에게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금방 진도를 따라잡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업을 빠지는 바람에 성적이 나빴구나하고 아게로조차도 혼자 착각할 정도?

"쿤! 오늘 일찍 끝나니까 이따 분식집 가자! 하츠가 닭꼬치 쏜데."

"쏜다고 안 했다! 너 한테만 사는 거야."

"에이, 하는 김에 좀 더 힘 내 보십쇼, 하츠님. 남자 둘이 가긴 그렇지 않냐?"

"남자 셋은 괜찮고?"

"피자집도 아닌데 뭘 그래. 아님 밤까지 넷?"

"입 더 늘리지 마라!!"

"하하하, 제 꺼는 제가 살게요, 하츠씨."

"그래! 너도 밤을 보고 배워라, 귀치장."

"하? 내가 뭐랬다고 쟤를 보고 배우래? 여태 한 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단지 야간자율학습이 일찍 끝나는 것이라지만 주말에는 들뜬 분위기가 아침부터 느껴진다. 이런 날에 소소한 약속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아게로가 말했던 여러가지 놀이가 이 때 이루어진다는 걸 눈치챈 밤도 은근슬쩍 그의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놀이문화인만큼 밤에게도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보지 못하는 아게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고, 또 잘 하지만 코인 노래방에서는 좀처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친구들에 비하면 입도 짧은 편이라서 보기보단 음식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 밤과는 궁합이 좋다. 물론 그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밤은 눈치를 보는 편이다. 아게로는 솔직한 성격이 아니라서 밤으로서는 그의 기분을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친구로는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윽.."

그리고 밤이 그간 쿤에 대해서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바로 이매것이었다. 그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살과 있고 그 중 둘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것. 둘 다 아게로와 무척 닮은 여성으로, 누나 쪽은 수험생이고, 한 학년 아래의 동생이 오늘도 찾아온 키세아였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아게로의 상처는 이제 씻은 듯 사라졌지만, 그 때의 일로 아게로가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그녀들이 한 번 아게로를 불시에 찾아왔던 일로 밤도 그들을 알게 되었다. 수험생이라고 하지만 아게로의 누나는 연예인으로 데뷔해 출석률이 썩 좋진 않은 모양이라 오빠의 못미더운 설명에 의심이 더 커진 키세아만이 마치 의무처럼 이렇게 종종 아게로를 찾아왔다. 아게로만 해도 밤이 첫 눈에 반할 정도의 미인이였던 지라 예상은 했었지만 그녀들이 등장할 때마다 급우들이 연예인 유전자는 다르다며 수군대는 걸로 보아 아게로의 형제들 중에는 연예인으로 데뷔한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왜 피하세요, 또!"

"너 내가 그런 말투 쓰지 말랬지?"

"옆에서 멀쩡하게 높임말 쓰는 친구분도 계신데 저한테만 너무하시네요."

"밤이랑 너랑 같냐.."

"아무튼 오늘도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건 그냥 내가 실수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러니까 '실수로' 오라버니의 가녀린 몸에 손자국을 낸 ㅇㅇ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나라고 나! 주어를 들어 좀!!"

아게로가 고생하고 있는 것이 너무 눈에 보여서 진범인 밤에게도 그녀의 방문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게로의 여동생이니까 밤으로서는 지켜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이므로 타인인 밤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게로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실직고 하는 것도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밤을 말린 것도 아게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예인이긴 해도 키세아(뿐만 아니라 사실 집안 식구들 전부)는 세간의 평판에는 관심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들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성격을 지닌 키세아는 만약 아게로가 의자에 부딪혀서 멍이 들었다고 하면 학교의 모든 의자를 부숴놓을 위인이라는 것이다. 오빠인 아게로도 쉽게 제압했던 밤이므로 여성인 키세아라면 더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밤은 생각했지만 아게로가 자신을 염려해준 것이 기분 좋아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었다. 이제와서라도 설득을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는 목 끝까지 차 올랐지만 아게로와 먼저 이야기하는 게 아무래도 우선이겠지.

"그리고 주말이라고 또 친구분들과 놀다 오려는 것 같으신데 오늘은 너무 늦지않게 돌아오세요. 언니께서 오랜만에 집에 오시거든요."

"알았어. 너나 많이 늦지 말고."

"언니께서 오시는데 제가 늦을 리가 있나요. 저는 저녁도 같이 먹을 거라고요."

"그래."

집을 나오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기에 처음에 밤은 아게로를 괴롭히는 형제라도 있나 했었는데 보면 볼 수록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밤이 그들을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형제들 이야기가 나올 때 아게로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다. 귀찮음을 호소하긴 해도 아게로도 그들을 꽤 아끼는 것 같았다. 그냥 혼자만의 공간을 한 번 가져보고 싶은 걸까?

"어, 이러면 닭꼬치 못 먹는 거야, 쿤?"

"아니. 하츠녀석이 산다는데 먹고 가야지. 어차피 집엔 10시 전에만 들어가면 돼."

"아까도 말했지만 십이수 것만 사 줄 거다. 너는 네 돈 내고 사 먹어라, 귀치장."

"그러고보니 누나가 용돈 안 줘? 아니, 넌 왜 데뷔 안 하냐? 키세아도 곧 데뷔라더니."

"누나 돈을 내가 왜 뺏어 쓰냐. 뺏으려면 아버지 돈을 뺏어야지. 아, 맞다. 나 정리. 아무튼 이따 봐."

보건실 정리를 방금 생각해 낸 아게로가 열쇠를 집어들고 사라지자 모여있던 무리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밤의 친절한 성격을 칭찬하며 농담처럼 아게로에게 성격 좀 고치라고들 했지만 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아게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사교성이 좋기에 밤의 인맥 또한 아게로가 구심점이라는 걸. 아게로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기에 밤이 키세아처럼 아게로와 닮은 이성을 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본인 마저도 모르는 걸까?

*

시금치 빵, 캐러멜, 그리니시, 다쿠아즈에 이어 오늘은 레몬 마들렌이다. 집안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요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사 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제과품을 만들어 오는 밤이 놀랍기만 한 아게로는 여전히 얻어먹는 재주 빼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이제 괜찮다고 해도 자꾸 아게로를 위한 간식을 준비해오는 밤에게 미안해서 아게로도 요리에 도전을 해 볼까 했으나 부엌에 발을 들이자마자 포기했다. 식기를 빼면 다른 주방용품은 어찌 쓰는지를 모르겠고, 일단 재료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형제들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겁을 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냥 피 값이라 치고 얻어먹기로 마음을 굳혔달까. 맛있다고 생각을 해도 기본적으로 군것질이 입에 맞지 않는 아게로는 많이 먹진 못하지만 사람들이 요리 잘 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이유에 대해서는조금 알 것 같아졌다.

"단 건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 덜 달게 만드려고 했는데.. 좀 입에 맞으세요?"

"너 야자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요리 유튜브 찍는 게 어때? 대학 안 가도 떼돈 벌 것 같은데."

"그럼 쿤 씨를 자주 못 보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돈도 아쉽지 않을만큼은 있는걸요."

저는 뱀파이어니까요.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밤의 모습에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순간이 떠올라 아게로는 시선을 피했다. 밤의 약속을 믿는 건 아니지만 친구로 지내면서 공포감은 많이 옅어졌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때는 쟤도 급했겠지 싶을 만큼? 문제는 같이 떠오르는 황홀한 감각이었다. 목선을 핥는 혀 끝과 이어 퍼지던 아뜩한 쾌감이 순간 다시 전신을 훑는 듯 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손으로 입술을 덮었다. 그러니까, 그건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아예 사귀는,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어야 가능한 관계라니까?

"쿤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 더 먹어도 돼?"

"당연하죠."

얼굴도 잘 생겼고, 인기도 많고, 요리도 잘 하는 데다가 오늘 재산까지 많다는 사실을 밝힌 여성들의 완벽한 이상형, 스물다섯째 밤은 왜 자기 좋다는 여학생이 아니라 아게로에게 그런 고백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아게로는 몰랐다. 임기응변으로 택한 과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조차 말이다.

*

입이 짧은 이유 중에 하나가 체증에 걸리면 심하게 앓게되기 때문이었는데 그걸 잊었다. 덕분에 보건위원을 하고 지낸 이래 최초로 자신이 보건실 신세를 지게 된 아게로는 저녁을 먹기 전에 정규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러 밤이 내려왔을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좀 괜찮으세요? 담임 선생님께서 야간자율학습은 빠져도 된다고 하셨어요. 원래 몸이 약하신 건가요?"

"..아니.... 전혀. 한 번 아프면 끝을 봐서 그렇지 자주 아프진 않아."

"그것도 건강한 건 아니지 않나요. 걱정이네요. 가뜩이나 인간은 너무 약한데. 정리는 제가 거의 다 했어요. 쿤 씨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혼자 집에 가실 수는 있겠어요?"

차마 밤의 요리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점심까지 먹은 이후에 그 날의 아침까지 전부 토해낸 아게로는 오후 수업을 죄다 건너뛰고 진통제와 잠을 택했다. 내일이면 키세아가 애꿎은 급식 업체를 바꾸겠다며 길길이 날뛸 게 눈에 선하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진통제라는 게 당장을 통증을 덜어주는 약이지 올바른 치료법은 아니다보니 아직까지도 속이 쓰리다. 속을 비웠으니 기분이 영 아니긴 해도 더 게워낼 건 없겠지만. 자신이 불편한 건 잘 못 참는 성격이었는데 밤한테 빵 쪼가리를 못 얻어먹게 되는 것이 두려워 이 지경까지 왔나 싶다가도 점심 탓을 할 수 없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게 나은 걸 보니 아게로도 슬슬 인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건 보통 그런 의미였지 하고.

"응. 이제 괜찮아. 너한테 헌혈 못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그 때도 쓰러지셨던 분이 할 말인가요."

이제 낮이 최고로 길어질 즈음이라 그런지 일과가 끝났음에도 남아있는 햇살이 풍경을 붉게 물들였다. 어째서인지 속상한 표정인 밤도 아게로의 눈에 붉게 비쳤고, 모로 누워 밤을 올려다보는 아게로도 밤의 눈에 붉게 비쳤다. 그건 아게로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풍경일지 몰라도 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항상 밤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듯 했던 색체가 붉은 색으로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본래의 목적이 무색하게 아게로의 곁에 걸터앉은 밤은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저는 두 번 다시 쿤 씨의 피를 마시지 않을 거에요."

"사실 그거 엄청 기분 좋긴 했어."

"네?"

"계속 먹어도 된다는 얘긴 아니고 가끔은 할 만 하겠다 정도?"

"어...."

"그러니까 너 하는 거 봐서 한다고 했잖아. 해 볼래? 친해지는 건지 뭔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라 했던가? 그럼 허락이 떨어진 지금은 밤이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일 터. 얼떨떨했던 표정이 활짝 웃는 얼굴로 덮여갔다. 벌어졌던 거리를 다시 이마를 맞대며 좁혀온 밤은 눈동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웃음꽃을 피워냈다. 붉게. 그리고 찬란하게.

"당연히 저는 대환영이에요."

창 밖의 석양이 제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밤이 지닌 영원에서 지금은 푸르르게 남을 것이다. 그래, 영원의 단면은 분명 푸른 빛이다.

 

 

 

 

 

 

 

 

 

 

 

 

 

이번 들을 트친이신 해물탕님(@mulT_ang)의 리퀘스트였습니다.
이 뒤는 물탕님의 연성대로...
여러분 물탕님의 갓연성 꼭 보세요 ㅠㅠ

뭔가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다 담지도 못했고,
분량조절 실패는 점점 고질병이 되어가는 군요 ㅠ
이대로 계정 두 개 운영 잘할 수 있을지...
좀 더 화이팅 해봐야겠습니다.

 

 

 

 

'신의 탑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의 탑] 미련  (4) 2020.03.08
[신의 탑 - 자하드 x 쿤 x 밤] 공멸  (2) 2020.02.05
[신의 탑 - 밤 x 쿤] 신기루  (6) 2020.01.16
Khun`s Day 교류회지 유료공개  (0) 2019.12.26
[신의 탑- 밤 x 쿤] 세상의 중심  (2) 2019.11.26

다섯 송이

신의 탑/봄 꽃

 

 

 

 

 

 

 

 

여긴 어쩐 일이냐, 귀치장?”

 

교양 수업이 아닌 이상에야 인문관 쪽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쿤이 캠퍼스를 횡단하다시피 하는 거리에 있는 체육관을 찾은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는지 견원지간이나 다름 없는 사이임에도 하츠는 꽤나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싫어하는 별명으로 부르는 무슨 친절이냐고 쿤은 반박할수도 있겠으나, 육두문자 섞이지 않은 문장이 완성되었다는 어디냐고 둘을 지켜봤던 모두는 대답할 것이다. 감춰 두었어도 탐스러운 여우귀가 쫑긋거리는 휜히 들여다 보이는 표정인 하츠에 , 가문의 등장에 소란이 일고 있는 체육관에 한숨을 쿤은 바로 목적인 서류봉투를 던지듯 하츠의 품에 안겨 주었다.

 

네가 전단을 놓고 가서잖아. 오늘 실기동에 뿌린다고 해놓고는. 하여간 임원이라는 녀석이 책임감 없이.”

 

“...그.... 오후에 거라 두고 갔던 거다. 멋대로 방해하는 거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지. 기껏 갖다 줬더니 말이야.”

 

다시 갖다 둬도 내가 점심 가져올 거다.”

 

뭐래. . 내가 돌리고 말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건 일이.”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저런 일로 싸우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으나 맡겨진 일에 대한 의무감이 투철한 하츠에게는 다른 어떤 말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그것이었기에 쿤은 하츠의 일을 자신이 처리 하겠노라 선언한 것이었고 효과는 굉장했다. 서류봉투의 사수를 위해 완전히 품에 안은 하츠는 연습용의 목도를 세워 방어태세를 취했다. 하츠의 목도는 날이 있는 진짜 검은 아니지만 그가 경호과이기에 소지할 있는 특혜품목인 만큼 둔기로서의 효용은 충분했다. 물론 수인들의 진짜 결투에서는 속성의 사용도 빈번하지만 당연히 캠퍼스에서 그런 류의 폭력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항상 손이 먼저 나오시지.”

 

쿤은 하츠처럼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나갈 수는 없는 터라 싸울 자세를 잡는 대신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모방에 불과하지만 경쾌함은 살아있는 셔터음이 찰칵하고 사람 사이에 울려퍼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는 하츠를 뒤로하고 아쉬운 기색 없이 쿤은 돌아섰다.

 

해봐라, 머슴. 경호과 학생이 허가 무기로 위협했다고 게시판에 신고하기 전에.”

 

.....? ! 귀치장!”

 

무기 소유를 허가받는 대신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은 법규의 특성상 당연한 논리다. 열혈 청년인 경호과 내에서는 시비가 걸렸기로서니 이런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어서 몰랐는데 제대로 자세를 잡은 상태에서 사진을 찍혔으니 증언들이 하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며칠동안은 귀찮게 되어버렸다. 물론 쿤이라고 해서 당장에 경호과 학생에게 협박당했다는 신고를 접수하지는 않겠지만 골려먹혀진 하츠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던 하츠는 코너를 돌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에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녀석은...”

 

 

 

 

*

 

 

 

 

협탁을 손톱 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톡톡 일정한 박자를 때렸다. 에드안이 머리를 써야할 일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은 아들인 아게로에게까지 이어졌다. 에드안의 소싯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게로를 보게 되면 에드안과 판박이라는 평가를 붙이곤 했으니 당연한 것일까? 아게로가 아무리 아버지를 자신의 인생에서 밀어내려 애써도 유전자에 새겨진 그의 근원이 결국 에드안에게 닿아있다는 아버지된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다. 생모인 아그니스가 그렇게나 탐내던 능력 사람이 잉태하고 있던 것일까?

 

“.....마리아의 보고가 석연치 않으십니까?”

 

애에게 기대를 적이 없으니 석연치 않을 것도 없지.”

 

에드안은 실로 자녀들에게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그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보좌에 가까운 역할을 맡고 있는 마스체니와 아센시오를 비롯하여 전원은 에드안에게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렇게에 장기말처럼 부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를 거쳐간 수많은 여인들도 그러했다. 그나마 잠자리 말고 다른 흥미를 끌어내기라도 했던 먼저 이혼을 제안했던 아그니스였다. 결과적으로 합은 에드안의 승리로 기록되긴 했으나 에드안은 그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 할만한 호적수라는 점은 인정했다. 여하튼 그녀는 에드안보다 앞서 아게로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에드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보석을 존재조차 모르는 채로 도둑맞을 했으니 다른 여인들과 같은 취급은 할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천리안이라고 불리기는 해도 실로 그런 이능은 가진 아니니 여태 안에 있었던 건데... 미세한 균열을 너희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작당한 아니라면 아게로가 뭔갈 찾아다는 뜻이겠지.”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됐다. 아비의 흥을 깨지 말거라.”

 

판을 읽고 흐름을 바꾸는 능력이 출중한 아게로가 여태 에드안의 수중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에드안이 가진 권력과 힘에서 기인한다. 에드안의 인맥이 아게로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는 이만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제로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은 전부 에드안과 연결되어있다. 가족관계나 집안 간의 친분 같은 것들로 말이다. 헌데 간간히 끝없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비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틈이라는 것은 없는 것과 조금이라도 있는 간의 상황 차이가 현저하다. 그건 아게로가 여전히 에드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이기는 해도 자신을 굴러싼 굴레를 아주 조금씩 벗겨내는 일을 멈춘 적은 없었다는 의미다. 가슴이 뛰었다. 에드안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당장 엊그제만 해도 무기력한 몸을 떨며 독을 받아 마시더니, 뒤로는 맹랑히 에드안을 덮칠 파도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과연 에드안을 물어죽일 독사 답지 않느냐.”

 

 

 

 

*

 

 

 

 

인문관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서자 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괴한이 쿤의 옆을 덮쳤다. 담벼락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기라도 새까만 사내였지만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는 순간 일그러지는 주변의 풍경에 쿤은 오히려 표정을 밝혔다. 그가 익히 아는 자였다. 마음놓고 기댈 있는 쿤의 안식이자 .

 

비올레!”

 

갑자기 찾아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감시가 심해졌다고 하셨으면서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그럴 오히려 방심하는 법인데 모르는 소릴 하시네.”

 

쿤씨를 믿긴 하지만 역시 걱정되는 걸요. 게다가 요즘엔 에드안님께서도 매일...”

 

예상했던 일인데 . 너야말로 조심해. 능력에 대해서 들키면 FUG 가만 두지 않을 .”

 

상처를 싸맸던 붕대를 풀듯이 검게 점철되었던 공간이 풀려나자 사람은 조그마한 한칸에 서로를 끌어안은 내려앉았다. 반지하의 단칸방이지만 실내만큼은 제법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비올레의 자취방은 이제 쿤에게도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으므로 가릴 없이 쿤은 비올레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 짧게 입을 맞췄다. 간단하지만 달콤한 연인 간의 안부 인사였다. 인사에 응해 쿤의 허리를 끌어안은 비올레는 지척에서 보니 황홀한 쿤의 혼인색을 이제야 마음껏 누릴 있었다. 오랜만의 밀회라고 쿤도 나름은 신경을 썼는지 화사한 색감의 셔츠에 파스텔톤의 니트 베스트가 그림같이 어울렸다. 타고난 피부도 눈부시게 희어서 산뜻한 색상들이 살아나는 기분이랄까. 비올레에게 쿤은 색채만큼이나 찬란한 빛이었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사정상 공개연애를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독차지할 있다는 사실에 매번 감사하게 만큼. 경계가 풀린 미소를 비올레의 품에 묻는 쿤을 내려다보는 비올레의 담황빛 눈동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럼 너는? 세상에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따지고 있어?

 

FUG 후계자, 스물다섯번째 밤이자 비올레 그레이스라는 소년의 경호를 위해 조직이 가려뽑은, 생김새가 동년배의 소년. 그렇기에 비올레는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FUG 사람들은 그들이 정한 순번에 따라 22번이라고만 불렀고, 별도의 이름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별개의 인생을 살도록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밤을 대신해 죽어줄 소모품일뿐. 살아갈 이유도 목표도 없었던 그에게 쿤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발로 있게 주었다. 이를 테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게 주었다고 할까?

 

공강이라 찾아오셨겠지만.. 하츠씨가 많이 찾으실텐데요. 괜찮겠어요?”

 

둘러대는 거야 전공이지. 너무 걱정하지 .”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아무리 정리가 되어있다고 해도 비좁은 단칸방에 의지를 개나 두는 것은 힘들다보니 쿤은 제알아서 비올레의 침대를 차지했다. 사람의 연애가 온전히 이루어질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그간 번의 방문에 이은 학습 결과다. 마음이란 그리 쉽게 타인의 말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건만 쉽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남의 침대를 파고드는 연인을 비올레는 어쩔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쿤씨 일인 걸요. 내내 피곤해 하시는 같던데 주무시겠어요?”

 

아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래버리면 너무 아깝지.”

 

자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머리칼을 쓸어주는 비올레의 손에 몸을 맡긴 쿤의 목소리는 제법 나른했다. 조금 흐트러졌을 망정 화사함은 그대로라 비올레의 손길을 허락하는 무방비함이 약간의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했다. 사실 쿤과 비올레의 관계는 매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쿤보다는 비올레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쿤의 친부모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쓰고 있다는 맞지만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보호받고 있는 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비올레는 다르다. FUG 그를 거둔 그가 FUG 후계자와 비슷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다. 심지어 이유를 만들어낸 필요가 밤을 대신한 죽음인만큼 FUG 쓸모 하나로 그를 거두어 가능성은 전무했다. 물론 쿤이 그에게 일러 주었듯이 그가 다루는공간원소 워낙에 희소한 속성이라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치라는 비올레가 FUG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되는 이야기. 못할 것은 없다. 쿤을 만나기 전까지 비올레는 FUG 그늘에서 살아왔고 쿤과 함께가 아닐 때면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쿤을 만나기까지 FUG 은이 아예 없다고는 없으니 상황이 허락한다면 비올레는 기꺼이 FUG 정보원으로서의 삶도 받아들일 있었다. 하지만 다음 후계자라는 밤이, 그가 마음을 사람을 자신의 그림자 따위에게 빼앗기도고 오로지 가치만으로 비올레를 판단해 것인가?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밤과 비올레는 늑대 수인이다. 늑대 수인의각인 그들이 평생 바라볼 사람을 운명처럼 결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밤이 쿤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과정에 밤이나 비올레가 쿤을 다치게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비올레는 아직 자신의 욕망을 눌러담기 위해 노력했다. 쿤은 자신이 둘러대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노라고 자부했지만 비올레의 욕심을 터뜨리면 그만큼 쿤이 신경을 써야할 테니까. 그건 위험부담을 쿤에게만 부과하는 일이다. 비올레는 연인에게 그런 비겁한 짓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쿤이 일러준 대로 밑에서 힘을 길러 FUG로부터 온전히 독립할 것이다. 그렇게 쿤의 보금자리가 되고 그를 품에 안을 터였다.

 

비올레.”

 

말씀하세요.”

 

심각한 표정인데 말은 듣고 있었나보네.”

 

당연하죠. 늑대 수인에게 반려란 그런 존재인걸요.”

 

.. 그럼 수인한테 반려는 어떤 존재일까?”

 

“..문제..인가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 분명하건만 그게 즐거운지 비올레의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그대로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며 마음을 간지럽히는 미소를 흩뿌렸다. 바람결에 떨어진 꽃잎이 수면 위를 물들이듯 미소가 눈동자를 꽃잎색으로 물둘였다. 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색채의 조합에 비올레의 머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무리한 요구를 하며 쿤은 비올레의 손에 뺨을 기댔다. 자신과 다른 체온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쿤이 꿈결에 웅얼거리듯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농담을 던졌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눈에 보여서, 도도한 성격의 그가 부리는 앙탈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혹자가 봤으면 분명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들 하겠지.

 

주무신다면서요. 졸지 말고 답을 알려 주세요.”

 

싫어.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말해.”

 

노력은 항상 하고 있는데요.”

 

. 감은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비올레는 소중한 연인을신의 품에 가뒀다. 그건 분명 치의 거짓도 없는, 완연한 진실이었다. 그를 위해서 비올레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가끔은 쿤이 사실을 아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올레는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애교라고 하긴 한참 모자라지만 나름의 노력만큼은 엿보였던 만큼 마음이 풀어진 쿤은 여전히 매혹적인 혼인색을 뽐내는 눈을 들며 가까워진 비올레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에게 너는 봄이야.”

 

뱀은 죽음과도 같았던 겨울잠의 끝에서, 낡은 허물을 벗고 혼인색으로 단장한 다음, 자신의 짝을 맞는다. 그들은 늑대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언제나 가장 새로운 것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계절의 시작을 반려와 함께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의 모든 최초는 오로지 자신의 연인을 위한 . 그렇기에 자신의 몸에 꽃잎의 색채가 만개하는 순간 쿤은 비올레의 입맞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계절의 주인이 제대로 찾아와 주었으니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완결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 글을 오래 잡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영 마음대로 안 써져서 ㅠㅠ

마무리가 허술한게 느껴지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올레쿤은 봄 꽃의 소재를 제공하신 홍련님의 리퀘였는데,

늦기도 너무 늦었을 뿐더러 내용도 부족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퇴고 못했고 해서 시간이 나면 손을 좀 볼 수는 있겠지만 봄 꽃은일단 여기서 끝입니다.

그간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글로 뵐게요!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송이  (2) 2019.06.17
세 송이  (2) 2019.05.07
두 송이  (2) 2019.05.01
한 송이  (2) 2019.04.24
꽃망울  (2) 2019.04.08

[신의 탑 - 자하드 x 쿤] 태양

신의 탑/단편

 

 

 

 

 

 

 

 

 

당신은 같은 아니야.

 

자하드는 눈을 감고 기억의 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울였다. 온통 금빛을 휘감아 찬란한, 그리고 비할 바를 찾지 못할만큼 강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태양이라 이르며 받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태양은 막상 속은 비어 있음에 틀림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강대함과 영원을 자하드는 얼마나 저주했던가. 한계가 없다는 것은 자하드에게는 그런 의미였다. 끝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 경외감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는 사람들은 결단코 알지 하겠지만 말이다. 자하드가 기억하는 ,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이는 기억 목소리의 주인,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고 싶은데?

 

그러게. 어리석었던 지난 날의 자신에게 자하드의 목소리는 결코 닿지 테지만 기억 속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뒤를 돌아보고 이어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게 때면 그는 대답하지 않을 없었다.

 

내가 미쳤었던 게지.”

 

 

 

*

 

 

 

요호(妖狐) 해도 금빛 털을 가진 모든 짐승은 상서로운 존재. 개체 중에서도 특히 찬연하고 날랜 자태는 그들의 천적이라 하더라도 쉬이 범접할 없는 영역인지라 자하드는 어렵지 않게 무리의 우두머리로, 나아가서는 요호의 왕으로 성장할 있었다. 쌓이는 세월만큼 축적된 요력은 머지않아 두각을 나타내었다. 눈부신 호선(狐仙) 받드는 이들은 그를태양이라 일렀다. 그는 진실로 지상에 내려앉은 태양인 찬란했으며 요력만큼이나 깊이를 없는 식견으로 모두를 이끌었으니. 자하드의 위신은 동족들의 땅을 넘어 별세계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최고인 아는 인간들마저 자하드를 여우신이라 이르며 경배한다 했다. 동시에 그들은 호기심의 동물인지라 자하드의 강대함을 알면서도 그를 직접 눈으로 보길 원했다. 그가 선인지 악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도전자에게 가차없다는 금모호(金毛狐) 악명이 퍼져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힘이란 모름지기 두렵기 때문에 숭배 받는 . 자하드를 찾아 떠났던 자들이 함흥차사 꼴을 면치 못하자 이번에는 공포심이 고개를 차례가 되었다. 여우는 인간의 간을 탐한다더라. 금빛 여우가 살생을 통해 힘을 축적해 남방을 지배하는 대요괴가 되었다더라. 그가 살육을 즐기는 날엔 그의 영지와 맞닿은 마을 하나가 사라진다더라. 그렇게 그가 세상의 모든 땅을 자신의 영지로 만들 속셈이라더라불어난 소문 또한 자하드의 힘인지라 소문이 땅의 모든 영토를 집어 삼킬 . 자하드는 스스로를 음양사라 일컫는 소년을 만났다.

 

? 인간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지난 자하드가 목숨을 취한 인간의 머릿수만 세어도 족히 백이니 인간을 처음 본다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대상을 음양사라는 좁은 속의 부류로 한정한다 하더라도 처음은 아니었다. 자하드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그를퇴치하겠다는 명분이 섰기에 음양사들과의 조우는 오히려 잦아졌다. 충혈된 눈을 그들은 자하드를 어찌 하기 위해 비장한 말들을 쏟아냈다. 이글거리는 적의가 멀리서도 느껴져 굳이 자하드가 그들을 찾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같은 음양사라 이르면서도 앞의 소년은 달랐다. 만월의 호숫가에 밤산보라도 나온 듯한 걸음걸이로, 자하드에게 눈길 한번 던지지 않고 조용히 구경을 하고 있었다. 호수 같은 심청색 눈동자에 담긴 달무리가 일렁였다. 풍경을 청초히 만드는 소년의 색채가 아니라면야 을씨년스럽다 이를만한 풍광을 그는 정갈하고도 고요히 가라앉혔다.

 

너도 봉인하러 게냐.”

 

그럼 좋겠지만 그럴 능력은 없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으니까 방금 대답한 거잖아. 질문의 순번이 괴이한데, 당신.”

 

“…….. 찾아온 거냐.”

 

죽으러.”

 

스스로가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읊는 죽음. 생경한 기분에 자하드는 금빛 눈동자를 굴렸다. 자하드로 하여금 요괴라 칭하는 인간이 제게 죽음을 청한다고 해서 거리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뒤늦게 생을 달라 애걸하는 목숨고 이미 수십은 짓밟아 왔을진데. 하지만 자하드는 자신이 손을 뻗자 모든 것을 맡기듯 눈을 감는 소년의 가슴에서 심장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거칠 없이 폐허를 내달렸다. 날카로운 발톱 대신 보드라운 털가죽으로 소년을 감싼 자하드는 그를 취하자마자 자신의 영지를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죽음의 냄새를 쫓아 자신에게 왔다면 다른 것에 미련을 남기지도 않았을 . 자하드의 마음 속에 자라난 의문이 풀릴 때까지 일을 미룬다고 해도 불만은 없겠지. 그런 억지스런 추측과 함께.

 

 

 

*

 

 

 

인간을 거처에 들이셨다고요?!”

 

그러하다.”

 

년을 목석같이 지내온 그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더니 사내 아이라 하질 않나, 겨우 한다는 변명이 잠재워 데려왔으니 거처의 입구는 모를 거라는 정도다. 여우들도 수양의 편의를 위해 종종 인간의 모습을 빌리기는 하지만 여하튼 그들은 본질적으로 여우고 마찬가지로 인간은 타고나길 그리 태어난 생물이다. 자하드의 뜻에 감히 반기를 있는 인물은 없었지만 그가 지난 밤에 데려왔다는 은빛 소년을 발견한 호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알기가 어려웠다.

 

.... 어서 내치시는 좋지 않겠습니까? 최근 인간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화근의 싹을 자른다며 눈에 띄는 동족이란 동족을 모조리 죽여 호선이 일일이 동족의 생활을 돌보아야 정도입니다. 마당에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 한들 주군의 눈에 띄게 두었다는 부터가 의심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교활하여 소년에게 어떤 주술을 걸어 두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루빨리 처리하시는 편이 이롭습니다.”

 

그를 양육하고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마땅히 때가 되면 그럴 것이니 너무 염려 말거라.”

 

최근에 인간들이 여우가 보였다하면 사냥하려 듯이 여우들도 자신들의 영지에 있는 인간을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 그저 자신의 흥미가 떨어질 때까진 가만히 두라는 뜻으로 이야기 하였을 뿐인데 이미 인간에 대한 악감정으로 가득한 여우들은 공분했다. 무리의 지도자이긴 했으나 누가 의견을 물을 때가 아니면 무심히 살아왔던 자하드에게 이런 동족들의 반응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따로 이르지 않았으면 그가 데려온 소년은 하루밤을 넘기기도 어려운 처지였으리라. 아무튼 무리의 지도자가 어떤 생각으로 데려온 인간인지는 제대로 없으나 고작 소년 하나가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냐 싶어서인지 여우들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자하드의 앞에서 오래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호선들에게 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감히 의심할 없는 절대적인 하나. 무리의 중심이자 정신. 인간들의 왕처럼 힘의 논리에 따라 바뀌는 그런 존재가 아닐 뿐더러 무리에 여럿일 수도 없는 자였으니까. 걱정이 가득했던 동족들이 각자의 자리로 다시 떠나자 자하드는 자신의 속에 홀로 남겨져 있을 소년에게로 드디어 돌아갈 있었다. 인간들처럼 으리으리한 궁을 짓는 습성은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어떤 모습으로도 지내기 편하도록 꾸며둔 자하드의 여우굴을 잠에서 일어난 소년은 신기한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죽음을 청하러 왔던 상대이니만큼 자하드의 기척에도 놀라는 기미조차 없는 동족들 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백이랄까?

 

흥미로운 거처인데? 여우의 왕이면서도 이런 토굴에서 지내는 거야?”

 

여우의 거처는 당연히 여우굴이다. 그게 본질이고 본질은 모습을 달리 한다 해서 바뀌는 종류의 성질이 아니지.”

 

그래..? 그럼 서로 잡아먹어 안달인 인간의 본질인건가.”

 

무슨 뜻이지?”

 

아무 없어. 보다 여기로 데려왔는지부터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죽으러 거지 호족의 마을을 구경하고 싶다고는 하지 않았어.”

 

마음이다. 죽으러 왔다는 자에게는 시기가 중요치 않을텐데.”

 

매우 중하지. 죽고 싶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승을 떠나고 싶다는 뜻이라고.”

 

그럼 찾지 말고 절벽에서 투신하지 그랬나.”

 

“..........그건 맞는 말이네.”

 

이어 소년이 혼잣말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했으나 자하드의 청각으로도 붙잡지 못한 것을 보면 입술만 달싹인 수준의 아주 작은 소리 였던 같다. 자하드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종종 이용하는, 들짐승의 털가죽을 쌓아 만든 침상에 여즉 남아있던 몸을 이제야 일으키며 소년, 그러니까 아게로 아그니스는 자하드와 시선을 얽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자하드를 보며 황금으로 만든듯 하다 하던데, 같은 논리로 따지자면 앞의 소년은 마치 은으로 만든 했다. 새파랗게 빛나는 청금석 빛깔의 눈동자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우인 자하드의 눈에도 이렇게 곱게 비칠 정도라면 아름다움을 귀히 여기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대접받을 인물일텐데 어린 나이에 죽음을 쫓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열리는 자하드의 입을 소년의 낭랑한 음성이 가로 막았다.

 

그래도 빨리 죽여버리지 않으면 후회하는 당신일 ?”

 

기이한 일이었다. 간소해도 남루하지 않은 행색으로 보아 인세(人世) 밑바닥에서 같지도 않았고 삶의 풍파를 맛봤다기에는 이다지도 작기만 한데. 허나 자하드의 의문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소년은 다시금 환하게 밝은 미소로 그의 혼을 놓았다.

 

여하튼 데려온 당신이니까 구경 하고 와도 돼지? 호족의 마을을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했는데!”

 

말보다 행동이 빠를 나이인지라 금새 저를 지나쳐 가는, 그의 절반만큼의 신체를 뒤늦게 인지한 자하드의 걸음이 빨라졌다. 자하드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릴 이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호족의 영지를 홀로 돌아다니는 위험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 입으로 스스로를 음양사라 이르지 않았던가. 근래의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해 호족들의 음양사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그들은 보잘것 없는 실력을 감추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도술을 쓰지도 못하는 여우를 잡아 죽이고 있는 주체였다. 때문에 호선으로 성장한 동족이 따라붙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쉽게 쫓아낼 있었지만 장삿속으로 벌인 일에 여우와 인간 사이의 골은 깊어갔다. 이런 상황이기에 자하드가 데려온 것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호족들이 알게 되는 이전과는 다른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인간! 아니, ....아게로.”

 

시작은 늦었지만 자하드는 세계의 지배자로까지 거론되는 존재. 어렵지않게 소년을 품에 가두는 성공한 그는 아게로를 번쩍 들어 다시 털가죽 침상에 내려놓았다.

 

뭐야, 갑자기. 당신도 사육할 셈이야?”

 

사육이라니.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것은 너다.”

 

“.....”

 

음양사의 징표는 모두 내게 넘겨라. 옷도 갈아입는 좋겠군.”

 

? 내가 다른 여우의 손에 죽을 까봐? 말했다시피 빨리 죽는 좋은데.”

 

네가 그리 명을 재촉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죽음에도 여러 형태가 있지 않나? 굳이 아래의 것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자하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시선이 투명하다 생각했다. 악의가 없다면 날을 세우지 않는다. 충고를 충고로 받아들일만큼 총명한 아이다. 감정이나 욕구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게 인간의 장점이라 했던가? 헌데 누군가는 이런 아이를 우리에 가두고 가축처럼 길렀다는 건가?

 

그러려면 체모의 색까지 바꿔야 할텐데.”

 

덮어 없애면 되지. 잠시 기다리거라. 필요한 것은 내가 마련해 주지.”

 

사실 여우의 부락에 구경거리랄 딱히 없었다. 여우의 토굴은 아게로가 함부로 드나들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주인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아서 허락을 구할 처지도 되었다. 다만 마을에서 숲으로 이어지는 풍광이 뛰어나고 다른 색으로 바꾸었던 머리채를 바로 씻을만한 공간이 있어 시름은 오래지 않았다. 탐탁치 않은 기색에 아버지를 따라 시전에 놀러나온 어린 아이처럼 자하드에게 붙어 다녔던 소년은 물가에 닿자 바로 검게 물들였던 머리를 감았다.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어 먹으로 물들이자 하였더니 내색은 아니 하였어도 퍽이나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으으, 같다. 근질거려서 났네.”

 

미안하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

 

그렇다고 미안할 까지야. 음양사들이 너나 없이 여우사냥에 나서고 있다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돌이라도 던질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네.”

 

내가 곁에 있는데 호족이 너를 해할 리가.”

 

자하드의 정체를 모르는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잘난 하지 말라 소리 했겠지마는 가감없는 진실이라는 바로 있어서 아게로는 눈만 깜빡였다. 인간의 모습을 빌릴 알고 특유의 영특함으로 인간을 속이기까지 하는 여우지만 그들은 본래 인간보다 훨씬 순수한 존재. 무리의 지배자에 대한 신의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견고할 터였다. 어쩌면 자하드가 동족들에게 그만큼 사랑받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있을 지도 모르지.

 

대단한 믿음이네. 하지만 당신은 답답하겠는걸? 그런 절대적인 신뢰 같은 부담스럽지 않아?”

 

전혀. 그것은 힘의 증표다. 내가 가장 강하니 섬김을 받고, 섬김을 받으니 백성을 살피는 것이다. 당연한 이치 아닌가?”

 

당신은 오랜 지기와 같은 이야기를 하네.”

 

힘이 있으니까 약자를 굽어 살펴야 한다고. 오후의 볕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들어갈 참인지 소년은 뭍가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물빛 눈동자에 호수가 비치고 바람빛 머리칼에 미풍이 스몄다. 수면에 비치는 소년의 그림자 옆엔 금빛 태양이 지키고 섰다. 새파란 눈동자에도 광경이 담기는 싶을 자하드는 마음 속에 응어리 있던 질문을 꺼냈다.

 

헌데 친우는 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두었던가?”

 

여우는 영물이라 그런가? 예리한 구석이 있네?

 

“……”

 

단순히 힘이 있다고 해서 모두를 거둘 있는 아니야. 친구도 그랬고 아마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같은 아니야. 그걸 잊으면 곤란해 날이 번은 ?”

 

쓸데 없는 걱정이다. 우리는 인간과 달라서 정과 은을 잊지 않는다.”

 

“…그래?”

 

소년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체모부터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모든 곳에 황금빛을 둘렀기에 그의 일족과 금모호를 경외시 하는 인간들은 자하드를 태양으로 칭한다고 했다. 햇살이 타고 흘러 더더욱 눈이 부신 그를 보고 있노라니 모시는 자들의 심경을 알고도 남음이었으나 아게로는 이로써 그에게 이해를 구할 없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절말로 태양이 되고 싶은 가보네.”

 

것이 무엇 있나. 만물에게 은혜를 베풀면 그게 태양이지.”

 

그렇게 되고 싶은데?”

 

이상한 질문이군. 인간들도 그리 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지 않던가.”

 

그래서 나도 죽이지 않고 데려온 거야?”

 

“……그는 아니다.”

 

하하, 역시 솔직한 마음에 들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자하드가 소년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온 것은 그리 자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무리를 위해 전지전능한 태양이 되기를 염원했으나 그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비정한 사냥꾼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소년에게 은혜를 베풀 아량 같은 시작부터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하드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으므로 처우를 결정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래. 아마도 그래서 그는 결정을 유보하기로 마음 먹었었나보다.

 

하지만 당신은 태양이 없겠네? 내가 섬기는 죽음뿐이니까.”

 

인간의 무리 속에서 살기 싫으면 나의 백성이 되어라.”

 

?”

 

그럼 되지 않느냐.”

 

몸을 일으켜 그대로 자하드를 지나쳐 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참지 않고 안에 맴돌던 말을 바로 끄집어 냈다. 절박함이라 이를 만한 애달픈 마음을 토해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응어리가 가슴 켠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자하드는, 요호의 왕은 절박했다.

 

“……., 며칠은 그렇게 지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죽음에도 여러 형태가 있으니. 물론 소년은 거기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

 

 

 

아게로가 자하드의 손을 붙잡고 호족의 마을을 순회한 벌써 닷새 전의 이야기. 아직도 아침 잠을 파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아게로의 귓가로 작은 발소리들이 앞을 다투었다. 가볍고 날랜 것이 필히 짐승의 . 벌써 새로운 거처에서의 생활도 적응이 되어가는 차인지 아게로는 놀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시간의 손님들이라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여우들은 부락 내의 토굴을 아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건 요호의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어른들이 모두 정무를 보러 아침 나절의 마을은 전부 꼬마 여우들의 차지라고 봐야 했다.

 

아게로. 이거 열어줘.”

 

뭐야. 부탁할 때는아게로님이라고 해야지.”

 

아게로, 이거 열어줘.”

 

“.....그래그래. 내가 여우한테 바라냐. .”

 

어느 세계에서든 동일한 논리로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아게로에게 제일 먼저 마음을 것은 아직 인간으로 둔갑하는 법도 모르는 어린 여우들이었다. 어른들이 인간과의 결전을 앞두고 분주한 시기임에도 그들은 양치기처럼 아이들이 노는 곳을 돌보는 아게로에게 손발이 필요한 여러 일을 부탁하며 친분을 쌓아갔다. 사실 아이들이 노는 곳을 인간인 아게로가 돌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고, 그저 마을에 남겨진 것이 그들밖에 없다고 봐야했다. 더군다나 아게로는 자하드와 마을 구경을 마친 이후로는 자하드의 여우굴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꾸미는 것이 번거로울 뿐더러 자하드가 구해온 옷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였다. 물론 자하드가 아게로에게 마을을 보여주는 동시에 호족들도 아게로의 얼굴을 눈에 익혔기에 자하드의 물건인 그를 어찌 보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음양사로 유명한 일족이라는 알려진 이후에도 말이다. 여우들은 자하드가 그간 숱하게 음양사들을 도륙했기 때문에 이름높은 음양사라 한들 그가 자하드의 감시 아래서는 활약하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고, 무엇보다 어린아이가 그만한 주력을 갖추었을 것이라고 생각치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아게로와 함께 두다니. 놀라울만큼의 신뢰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믿음이었다. 여하튼 덕에 그나마 머리카락을 먹으로 들이는 수고는 덜어서 아게로는 눈부신 은발인 채로도 마을 어귀를 걷는 정도는 있게 되었다.

 

녀석들은 대체 가져 온거야? 뭐가 이렇게... !”

 

아게로 다쳤어?”

 

아니.. 긁혔어. 괜찮아.”

 

괜찮아? 나는데.”

 

금방 나아.”

 

호기심 많은 꼬마 여우들이 가져온 아마도 담배잎을 모아두는 통인 같았는데, 귀족의 물건인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다물린 통을 여느라 애를 쓰는 과정에서 날카로운 모서리가 아게로의 손가락을 스쳤던 모양이었다. 피냄새가 번지니 예민한 후각을 가진 꼬마 여우들의 머리가 일제히 아게로를 향했다. 자기들이 부탁한 일이라 그런지 머리를 부비며 안부를 확인하는 모습에는 화를 낼래야 그럴 수도 없었다. 긁힌 정도는 그리 일도 아닌데 한마음으로 걱정해 주는 오히려 황송할 지경이다.

 

정말로....”

 

화륵-!

 

상처를 감싼 작은 불꽃이 상처 자체를 태워 버리자 새하얀 손끝에는 상흔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아기 여우들은 광경이 신기한지 음양사의 힘에 대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란을 피웠지만 쓰게 웃은 아게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 일에 대해서는 어른들께 이르면 아니 ?”

 

왜애?”

 

그야 분들이 알면 마을에서 쫓아낼 테니까.”

 

아게로가 음양사인 우리 버지 알고 계시는데?”

 

주술을 쓰는 지는 모르시잖아.”

 

그래? 그럼 비밀로 할게.”

 

나도 비밀로 줄게!

 

나도!”

 

뭔가 대단한 일을 주는 것처럼 으스대는 꼬마 여우들의 눈빛을 보니 혹여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더라도 여우 무리가 아게로의 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한참 나중이 되겠지마는 아게로는 감했다. 이곳에서도 자신의 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게 자하드가 빨리 자신을 처리해 주었어야 했는데 무슨 바람이 건지 자하드는 아게로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거처의 반을 나누어 주고 호족의 마을에 머물 있게 주었다. 소일거리에 식음료까지 해결을 덕에 인간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지내면서도 불편함을 몰랐다. 마치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이는 것처럼 뚫어져라 자신응 응시하고만 있는 자하드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말이다. 아이들이 다시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 모험을 떠나자 아게로는 그들이 떠나간, 아니 그보다 곳에서 쏟아지는 빛을 바라보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태양. 태양이라는 이름을 감히 별호로 삼고 있는 여우, 자하드. 요호의 왕이라 이를만한 강자에 무시무시한 소문이 없어 기대를 걸어 보았건만 역시 축생은 인간보다 영혼이 맑아서 살의가 없으면 죽일 마음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깨 넘어 배운 지식이 전부라고 해도 아게로 역시 음양사로 유명한 가문에서 나고 자라 수학한 . 만물의 축복을 고루 받은 신성한 존재를 어찌 경외하지 않을 있었을까?

 

어찌 투신하지 않았느냐니...... 당연히 그걸로는 죽지 않으니까지.”

 

아프기만 더럽게 아프고 말이야. 무시무시한 소릴 덧붙이면서도 아게로는 여상히 가죽끈을 찾아 머리채를 올려 묶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이기를 넘어 진정한 죽음을 있는 존재는 많지 않을텐데 누굴 찾아가야 하는 걸까? 인간은 누구나 그를 죽이는 것보다는 이능을 이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아니되고. 물론 아게로를 끝내줄만한 저주술의 대가도 알고 있긴 하다만 그도 마음이 여려서 어떤 대의가 있지 않음에야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아게로가 인류가 적대하는 호족에게 있다는 밝혀지면 속히 처단하라는 청이 하늘 높은 모르고 빗발치겠지만 이를 알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전쟁이 일어나는 능사인가..”

 

소문만 무섭지 요호의 왕이든 저주술사든 알맹이는 물러 터져서 아게로만 고생이었다. 죽음의 형태에 순번을 매길 있다 했던가? 아게로가 얼마나 오래 살아 있느냐에 따른 결말에도 순번을 매길 있거늘.

 

“……그래도 은은 입은 사실이니 보답 정도는 하고 떠나야겠지?”

 

 

 

*

 

 

 

종족 간의 전쟁에는 본디 명분이 그리 중요치 않다. 서로 다른 존재에게는 다르다 것만으로 온갖 감정으 도화선에 불을 붙일 있는 법이라 그저 방치하는 것만으로도 깊어진 골은 서로의 피로 밖에 메울 없는 수준이 되었다. 무리의 지도자로서 전투의 선봉에 서야하는 자하드에게 소년은 부의 부적을 건넸다.

 

축낸 식량 정도라고 생각해.”

 

호신부인가?”

 

대단한 재주는 없어서 정도 밖에 도움은 안되겠지만 없는 보다는 나을 ?”

 

주사(朱砂) 아닌 피로 쓰여진 부적은 처음 받아 보지만 투명한 눈이 거짓을 고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 자하드는 일단 그를 받아 속에 보관하였다. 동족들은 인간을 믿어서는 아니된다 번을 사뢰었으나 그는 처음 순간 부터 소년이 정결한 존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쌓인 수양의 힘인지 단순한 동물의 직감인지는 가름할 없었지만 그의 손에, 혹은 동족의 손에 소년의 피를 붇혀서는 된다는 확실히 있었다. 태양이라 칭송받는 자신보다 배는 상서로운 기운이 언제나 소년을 휘감고 있었으니.

 

, 이제 그만 죽여주지 않을래, 태양님? 전장에 서면 어찌 모르잖아. 전에 약속을 지켜 줘야지.”

 

쓸데 없는 걱정이다. 나는 승리할 테니까.”

 

. 어디서 패기야? 시커먼 전장에서 찬연한 금모는 노리기 좋은 표적밖에 될텐데.”

 

인간들의 무기 따위 두렵지 않아.”

 

평범한 무기라면야.”

 

비웃는듯한 소년의 목소리에 살짝 심기가 불편했지만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의 낭랑한 웃음 소리에 탁한 감정은 금새 곳이 없어졌다. 어디서 구해 건지 처음 만나던 날처럼 차려입은 단정한 백의에 본연의 눈부신 색채가 초설 속의 매화처럼 눈부셨다.

 

분명 후회할텐데.”

 

그럴 리가. 다른 이들은 몰라봐도 눈에는 보인다. 일월(日月) 축성(祝聖) 지닌 자를 함부로 해하는 좋은 생각이 아니지. 너는 세상의 축복을 받은 아이다.”

 

“……..천지 축복한다면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대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청금석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없었다. 다만 투명한 시선이 자하드의 음성을 옭아매어, 그는 답하고 싶어도 답할 없는 상태였다. 아릿한 물빛 미소가 자하드의 시선 끝으로 사라진 이후에야 그는 숨이 트였다. 멀리는 보는 채로 소년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데려가. 호족의 마을을 인간에게 맡길 생각은 아니겠지, 요호의 .”

 

사실로 말할 같으면 자하드는 그를 안전한 자신의 뒤에 남겨두길 바랬다. 하지만 동족의 뜻은 소년의 말과 같았으므로 어쩔 없이 자하드는 소년과 함께 떠날 밖에 없었다. 소풍을 떠나는 , 혹은 만남의 날처럼 산보를 즐기는 . 병장기로 무장한 시커먼 무리의 즈음에서 소년은 힘든 기색 없이 사뿐히 뒤를 따랐다. 자하드와 가장 곳에 있어서일까? 분명 자하드가 원하는 대로 그는 자하드의 ,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대도 불길하다 여겨졌다. 예감은 조바심으로 이어졌다. 하루빨리 인간의 병사를 쓸어버리고, 그를 다시 여우의 영지에 데려가야겠다. 잃어버리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 전에.

 

 

 

*

 

 

 

비올레님!!”

 

그리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밤은 그들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요호의 무리에 그가 있었다. 아게로 아그니스. 서로를 아명으로 부를만큼 친한 친구였고, 한때는 함께 수학한 음양료의 동무였던. 사라지기 전날 친우에게 죽음을 청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쇠창살 너머에서 담담히 그런 부탁을 하던 그는 밤이 끝끝내 제안을 거절하자 한숨처럼 말했었다. 후회하게 것이라고. 지금에 와서 밤은 의미를 분명히 헤아릴 있게 되었지만 망루에 굳은 표정의 밤을 발견했을 그는 눈이 마주치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약간은 오만해 보이는 표정으로. 아마 말이 맞지?’ 정도의 말을 건네는 눈이 아닐까.

 

아게로님 부터 처단해야 합니다.”

 

“……”

 

힘을 호족들의 편에서 사용한다면…”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의심이 어떻게 그를 죽일 . 손에 있을 때는 가축만도 못하다 싶을만큼 부려먹고 손을 떠나니 당장에 위협이라며 제거하라니. 동족의 양면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이런 계획을 세웠을 그는 정답을 맞춘 스스로를 자축하며 득의 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이런 결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밤은 지금 울고 싶은 심정이건만.

 

당신이 옳았습니다, 아게로. 저는 분명 후회하겠죠.’

 

. 친우가 죽음을 청하던 때에 밤이 부탁들 들어 주었더라면 그는 적어도 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을 터인데 지금에 와서는 한번 잡아보기도 전에 가여운 영혼이 지상을 떠나버리 겠지.

 

이것이 괴로웠을 당신을 외면한 죄과라는 겁니까..?’

 

여우의 영지로 먼저 병력을 보낸 것이 인간이니 요호의 왕에게서 대화를 시간 같을 틈이 없었다. 또한 미리 읽어내었을 아게로니까 밤은 옴짝달짝할 없이 그의 역할을 달게 받아들여야 했다. 혈액으로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할 있는 이능 덕분에 길지 않은 생의 절반이 넘게 우리에 갇혀 생피를 뽑히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마치 천리안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꿰고 있었던 그다. 이번에도 밤이 저주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기어코 축복을 요호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밤을 몰아갈 터였다. 여우들이 인간과 달라 축복을 온전히 하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인간은 그러지 못할 테니까. 만약 여우들마저도 힘을 탐내 인간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용할라치면, 밤은 그도 내버려 없으니까.

 

쿤씨는 제게 맡기세요. 제가어떻게든 보겠습니다.”

 

 

 

*

 

 

 

무시무시한 저주의 힘을 타고나 힘을 두려워 하는 자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친우는 사실 심성이 곱고 여려서 소년의 부탁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아게로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일 수는 없다고 했다. 대신 새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결정을 미룬 것이다. 지금 앞에 타오르는 태양과 같이.

 

여전히 사람 좋다니까. 좋은 일이나 시키고.”

 

주변에서 난리를 테니 저주의 화살이 심장에 내리 꽂힐 테다. 드디어 염원하던 순간을 손에 넣었으니, 마지막으로 따뜻하고 찬란했던 태양에게 소년도 무언가 보답을 볼까? 축생도 안다는 은을 사람이 베풀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

 

오늘 아무도 죽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라는 법은 없겠지만.”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함포를 찢고 상처를 태우는 불꽃이 만물에 범람했다. 마치 지상에 태양이 나린 듯한 광경이었다. 무기를 녹이고 주술을 삼킨 불꽃은 신기하게도 생명은 해하지 않았다. 다만 더없이 찬란했던 불꽃의 바다가 이윽고 자취를 감추었을 , 인간의 태양과 요호의 태양은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CP 표기가 민망하게도 사실은 거의 논컾...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끌리다 보니 산으로 가 버린 느낌이네요 죄송하게도;;

그래도 트친분이랑 약속한 글이라 보여드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컴퓨터가 켜 진 김에 후다닥 올립니다.

이런 글이라 죄송합니다 사이님 ㅠㅠ

 

 

 

 

 

네 송이

신의 탑/봄 꽃

 

 

 

 

 

 

 

 

 

 

 

 

주말까지 나오고 너무 무리하는 아니야? 몸도 좋다면서.”

 

녀석들의 어딜 믿고 쉬겠냐. 네가 고생이 많겠다. 공대는 과제도 많다던데.”

 

.. 과제가 많다기 보단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 아닐까. 하도 밤을 샜더니 이제 새벽이 아니면 생각도 . 그러니까 새벽까지는 도와줘도 문제 없을 ?”

 

낮에 일하고 새벽에 과제하면 잠은? 가끔 이수의 밑이 숯을 칠한 것처럼 시커멓게 변하는 이유를 같아진 쿤은 속으로만 경의를 표했다. 수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학이기에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스펙도 높아진 경향이 있으므로, 재수를 했다고 한들 입학에 성공한 자들은 집안이 어떤지를 떠나서 사회의 클래스에 있는 재목임을 인정받은 셈이 된다. 거기까지 노력하고 헤이해지거나 벽을 느끼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무너지지 않는걸 보면 이수는 역시 대단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 없었다. 그가 동아리의 장을 맡게 것도 이수의 성실함을 인정하는 이가 말고도 여럿 있다는 반증이었다. 공부하는 것만 해도 녹록치 않은 공대생이면서 주말을 동아리에 투자하다니. 타고난 노력가에 책임감도 훌륭하니 그가 졸업할 즈음에 자리 챙겨 주려는 선배들이 분명 즐비할 거다. 사람 보는 있어 매정한 구석이 있는 쿤조차도 인정하는 십이수가 아닌가?

 

원숭이 수인이 강철 체력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늑대라면 모를까.”

 

하하, 내가 특출난 거지. 원숭이도 한다고? …..저기, 그런데 .”

 

.”

 

이런 해도 되는 거야? 네가 뭔가 곤란한 입장이 아닌가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졸린데 자는 같아서 말이야.”

 

놀란 표정이 드러났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보면 표정을 바꿀 여유조차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수는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한 시선에 아니라면 괜한 걱정을 거라고 얼버무렸지만 막상 당사자인 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이수에게 지적받고 동요하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다는 틈을 보인다는 것이고, 그러고 나면 찔린다. 여태 쿤이 살아온 생태계는 그러했으니.

 

각성이 끝난 거야?”

 

몰라. 말대로 불안한 건지도 모르겠고.”

 

?"

 

너까지 신경쓸 일은 아니야. 집안 일이고 문제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전시회에는 피해가 없도록 말이야. 그렇게 마무리하며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정돈해 다시 묶은 쿤은 다시 전시회장으로 선정된 학생회관 메인 로비의 도면으로 눈을 돌렸다. 가벽을 설치해 동선을 짜고 사진을 전시할 있는 공간을 확보해야 했는데, 쿤은 대체로 이런 일에 적격이라고 여겨지곤 했다. 분명 공대생, 중에서도 건축과에 재학 중인 호량이 있었지만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계산은 쿤이 같다는 의견이 항상 존재했다. 보통은 보란 듯이 해내니까 그들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강박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를 따져보자면, 적어도 이수의 결론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았다.

 

아무리봐도 사람이 너무 좋아서 더러는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왕난과 함께 것이 소문의 아게로 아그니스라는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소문과 너무 다른 인맥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만큼 화려한 외모는 소문과 같아서 머지 않아 이수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왕난을 따라 왔을 그다지 동아리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을 같았던 쿤은 역시나 다른 동아원들처럼 작품 활동에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의외로 동아리의 각종 활동에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오히려 성실한 활동을 기대했던 왕난이 결석이 잦으니 언밸런스도 이런 언밸런스가 있을 없었다. 높으신 분들의 자녀교육 철학도 각양각색이라 왕난이나 밤처럼 엄격한 교육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화나 라크의 경우처럼 자유분방한 방침을 가진 쪽도 있다는 이제 서민 출신인 이수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쿤의 경우는 독특해서 눈이 많이 가다보니 고정관념이 부서지는 순간을 기억하게 건지도. 아무튼 이수의 생각에 가문은 특이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 특성상 기행도 눈에 띄는 존재감으로 순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난봉꾼으로 유명한 에드안이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자식이 쿤이라던데, 그런 치고는 자유롭게 놓아둔다 싶다가도 아버지의 이름만 들어도 질색하는 쿤을 보면 뭔가 있겠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에드안이 쿤을 편애하고 있다면 다른 형제자매의 입장에서는 질투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형제들이 쿤을 방패막이 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수의 합리적인 의심인 것이다. 그리고 의심은 자연스럽게 에드안이 쿤을 편애하는 이유로 이어졌다. 여전히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어두운 구석이 하나도 없을 같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쿤은 설명을 얼버무리는 없이 아버지의 편애로 인한 불만을 라크나 왕난에게 털어놓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는 모습을 쉽게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가족사에 있어서 도움은 되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뭔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줘.”

 

뭐야 갑자기. 낯간지럽게.”

 

하필 지금 거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

 

알다시피 다른 애들처럼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지만 그래서 도움 되는 구석도 있지 않겠어?”

 

일류 대학이라는 별세계에서 만난 귀한 집안 출신의 아가씨, 도련님들은 밖에서 때에는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부대끼며 살아가다보니 각자의 조각으로 표류하는 존재들 같다는 2학년에 접어든 이수의 총평이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저마다 고민 하나씩은 안고 있게 마련이고 더러는 엄청난 배경 때문에 고민의 크기도 엄청나다는 알게 되었다고 해야하려나?

 

너도 정말 당하겠다.”

 

얼굴이 이수를 향해 있진 않았지만 눈을 감은 채로의 어쩔 없다 느낌의 가벼운 미소는 이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라서 그랬나보다. 표정만큼이나 얕게 일기 시작한 파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감으로 가득 있어서 재수 없는 도련님이 무장해제를 하면 저런 표정도 나오는 구나 싶었다. 혼인색이 무르익어 가는 시점이라 빛이나 각도, 하나만 변해도 요사스럽게 아롱지는 색채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방금 , 후회하지 .”

 

물리기 없으니까. 이윽고 눈동자가 다시 열리는 순간, 이수는 셔터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눌러 참은 건방진 도련님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알아서. 그리고 지금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오래 눈에 담고 싶어서.

 

 

 

 

*

 

 

 

 

우와, 쟤가 A.A.? 동아리에도 나오고 그래?”

 

거의 개근상 감이지. 요새는 자는 밖에 안하지만.”

 

가문에서 일반인이랑 접촉 못하게 하고 그럴 알았는데. 저런 애는 진짜 같은 사람 맞냐완전 인형 같네?”

 

입만 다물고 있으면 말야. 말은 속으로 삼킨 이수였지만 최근엔 동방에 기껏 들러서 한다는 일이 전시전 준비랑 수면보충밖에 없으니까 크게 틀린 아닐지도? 작년부터 이수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쿤에 대한 통념은 동기들이 방금 입에서 뱉은 말들인 당연했다. 이수 또한 당장 오늘 지금까지의 쿤의 외모 랭킹을 뒤집을만한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말이다. 대외적으로 가문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범접하기 힘든 곳이기는 하지만 학교에 쟁쟁한 집안이 많은게 아니다보니 왕난과 같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캠퍼스 내에서까지 유난을 떠는 경우는 거의 없다. 쿤도 마찬가지라서 눈에 띄는 외모만 아니라면 친구들과의 생활은 거기서 거기다. 방금도 결국은 하츠와 이화와 마지막으로 하츠와 이화의 연합군과 싸우고 완전히 퓨즈가 나가버린 이수가 겨우 중재하고 달래서 저녁을 먹고 헤어진 길이니. 그래도 이제 전시회장의 배치에 대해서는 가닥이 잡혀서 모두가 힘을 모으면 남은 일정은 금방이다. 다들 방향이 결정된 이후의 단합심은 대단해서 거기까지 가는 동안 임원 따위 때려칠까 싶던 이수도 이후의 모습을 보면 역시 좋은 녀석들이라며 마음을 고쳐먹길 수십 번이니 말이다. 말인즉슨 도도하기 짝이 없는 가문의 도련님도좋은 녀석들 포함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방금 , 후회하지 .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같단 말이야?’

 

쿤의 곁에는 이수 말고도 좋은 집안의 친구들이 많다. 당장 TOG 구성원들만 봐도 집안 좋고 실력 좋고 외모도 되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니 만약 그가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다면 이수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가능성이 높았다. 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가족이라면 아무래도 집안이 든든한 쪽이 안전할 테니까. 쿤에게나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쪽에게나 말이다. 이전에 개인적인 문제라고 아무 말도 주지 않을 거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이수로서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요인이기도 했고.

 

녀석은 항상 도와주는데 나는 도움을 수가 없네. 못났다, 십이수.’

 

동아리 일만 해도 중간에 한번씩 이수가 중재할만한 싸움판을 벌여서 그렇지 쿤이 없다면 정리 자체가 되지 못해 한참을 돌아가야 했을 거다. 어찌보면 이수가 리더로 중심만 잡아도 되게끔 쿤이 악역을 자처하는 면이 크다. 가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다는 것만 해도 그는 충분히 좋은 사람인데 본인만 그걸 모른다. 개인사에 대해 말하는 워낙 꺼려하니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격이지만 도와달라는 마디면 쿤에게 손을 내밀어 사람은 수두룩해서 그들로 캠퍼스를 포장하고도 남을 건데.

 

으아악, 힘내자, 십이수! 자수성가해서 올라가야지!!”

 

동기들과 과제도서관을 향해 나아가는 걸음에 힘이 실렸다. 후회하지 말라고?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보다 사람이 되어서 언젠가를 기약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것이었다. 첫걸음이 바로 이번 조별 과제 부터다. 비장한 이수의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밤도 침대의 포근함과는 안녕이다.

 

 

 

 

*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A.A.”

 

네가 일찍 아니고? 저녁은 먹었어?”

 

당연하지. 어서 들어가 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아오, 또야? 저녁 먹을 사람 쯤은 널리고 널렸는데.”

 

잠자코 들어가. 엊그제 처럼 내시면 곤란하잖아.”

 

자식들 중에서 에드안이 겸상을 허락하는 아게로가 거의 유일하다. 다른 자식들은 공무가 아니고서야 얻기 어려운 자리였지만 그게 부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에드안은 분명 아게로에게만 많은 것을 허락했다. 연예인이 되지 않겠다고 것도 용납했고, 대신 매니지먼트 사의 회계를 보라며 회계학과로 진학을 권했을 때도 돈을 만지겠다며 경제학과로 진학한 아게로를 말리지 않았다. 얼핏 자유분방하게 지내는 같아 보이지만 에드안이 준비한 틀은 그것만이 아니기에 아게로는 여즉 에드안의 수집품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온갖 특별대우를 받는 에드안의 아들이라는 점은 감시의 눈을 늘렸고, 아게로의 하소연을 대외적으로는 분에 넘치는 소리로 만들었다. 형제자매들의 관심이나 친구들의 호의도 에드안의 다른 눈이라는 눈치빠른 아게로는 진즉에 알아차렸겠지만 조차도 당장엔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것일 터다. 아그니스와 에드안이 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읽었든지 간에 아직은 그저가능성 . 것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오늘도 괴롭히진 않으시겠지?”

 

어제까지 앓아 누웠던 앤데 설마 그러시겠어. 그나저나 자하드든 FUG 빨리 데리고 날아 버리지 여태 뭐하는 건지 모르겠네.”

 

얼씨구. 언제는 자기가 10 유튜버 돼서 지켜 준다더니.”

 

“10만이 생각보다 어려운 어떻게 하라고.”

 

이대로면 아게로 오라버니가 가문을 물려받지 않으실까요? 세월에는 장사 없으니.”

 

전에 A.A. 미치거나 사고 치지 싶은데.”

 

그래도 저택 안인데 하는 말이 없구나.”

 

마스체니 누님!!”

 

저택의 1인자가 에드안이라면 2인자는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도맡고 있는 마스체니인 것이 당연했다. 자하드 가의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몸이라 독립이 머지 않았으나 아직까지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형제자매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가문의 이면을 이끌어온 그녀를 알고 있다면 그녀와 피를 나눈 형제라는 것에 평생 감사하며 사는 것이 더욱 합당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옥체에는 별고 없으십니까? 타겟은…”

 

아버지께서는 A.A.?”

 

.”

 

잘됐군. 나중에 찾으시면 먼저 자러 갔다고 전해드려라.”

 

완벽주의자인 그녀지만 살림과 바깥 살림을 동시에 돌보는 피곤한 일이 아닐 없기에 보고라도 미뤄지는 이런 날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게로가 끝내 에드안의 손을 벗어나게 되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독립할 때까지는 이복동생이 버텨주길 바랄뿐이다. 그녀의 소소한 일탈은 에드안이 그를 손에 쥐고 있을 때에만 허락되는 것이었으니. 대외적인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기에 대중은 물론이고 상류층의 대부분조차 가문이 요인 암살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모른다. 수인들이 수인을 그리 두려워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면 당연한 일이건만 에드안은 천사 같은 외모로 세계의 눈을 속이는 성공했다. 에드안에게 맡겨진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아우라와 그의 이면이 내뿜는 공포감에 질려 그의 자식이자 부하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 마련이었다. 마스체니 조차도 그러했는데, 선택의 기로에 처음 섰던 그녀보다 반절 밖에 되지 않는 꼬마 아이가 이미 진실을 꿰뚫어보고 데뷔에 필요한 프로필 사진을 찍겠다고 했을 때를 떠올리면 수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어찌보면 에드안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대가를 아게로는 이만한 시간을 들여루고 있는 중이지만 마스체니 조차도 아게로는 특별한 아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그런 부분에서 기인했다. 그녀야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긴 하지만 아버지의 면전에서 다른 길을 걷겠다고 이야기할 자신은 솔직히 없으니까.

 

쉬십시오, 누님!”

 

적당히 해라, 아센시오. 누가 보면 마피아나 갱단인 알겠어.”

 

알겠습니다! 누님!!”

 

“…….”

 

답답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내가 그녀의 뒤를 잇는 가문의 3인자라면 누가 믿을까? 자신의 격이 떨어지는 기분에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실력을 생각하면 참아줄만한 정도라 소리 없이 그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뭔가 써야 겠으나 졸려서...

이제 한 편 남았네요!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송이  (4) 2019.08.16
세 송이  (2) 2019.05.07
두 송이  (2) 2019.05.01
한 송이  (2) 2019.04.24
꽃망울  (2) 2019.04.08

[신의 탑 - 자하드 X 쿤] 일몰

신의 탑/단편

 

 

 

 

 

 

 

 

 

“…….여긴..”

 

쿤은 이마를 짚어 약한 두통을 물리적으로 누그러뜨렸다. 실크 천정까지 딸린 침대는 넓고 포근해서 굳이 억지로 몸을 일으킬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얇은 커튼 뒤로 비치는 실내는 온통 붉은 벽지에 기하학적인 금빛 문양이 천정과 바닥의 경계를 휘감고 있었다. 문양 자체는 그리 대단치 않지만 강렬한 색채대비 덕분에 화려한 분위기. 이런 공간을 보는 것은 분명 처음이지만 10가주 중에서도 위세가 대단한 가문의 부유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기품이라는 그는 눈에 알아봤다. 침대와 침구는 물론이고 흐릿하게 보이는 집기까지 단편만으로도 꽤나 나가는 물건이라는 고고히 뽐내고 있는 풍경을 모로 누워 바라보며 쿤은 자신이 곳에 도착한 경위에 대해서 따져보았다. 분명 시작은 있을 S 공방전에 대한 사전 조사일 터였다. 함정이라는 빤히 보이는 이벤트였지만 그만큼 방해세력을 확실하게 알아낼 있는 방법도 없었기에 쿤은 직접 미끼를 물어 보기로 결정했다. 결과가 이리 되었으니 돌아가면 동료들의 잔소리를 듣는 정해진 사실이나 다름 없어졌다만 정도의 재력과 잠깐이라도 쿤의 의식을 빼앗은무엇 함께 가진 자라면 역시 위험하다. 게다가 쿤을 죽이거나 상처 입히지 않고 가만히 보면 간단히 제압할 자신도 있다고 봐야 한다. 탑의 꼭대기가 가깝기는 해도 아직 랭커가 되지 못한 선별인원이니 얼마든지 얕보일 수야 있겠지만 쿤과 함께 탑을 오르고 있는 동료, 비선별인원 스물다섯번째 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텐데

 

생각보다 담이 세군. 그게 아니면 에드안과의 결전 직후라 약해진 건가?”

 

“!!”

 

자하드 궁에 환영한다. 쿤의 새로운 가주, 아게로 아그니스.”

 

인기척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목소리가 갑자기 떨어졌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거기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중압감이 되어 쿤을 짓눌렀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지만 지금 감지한 위험은 위험이라는 단어가 보잘 없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부피를 자랑하고 있었다. 공포심의 근원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만큼 분명했다. 자하드. 탑의 왕의 이름이 문제였다. 비선별인원이 탑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면 자하드가 그들을 탐탁치 않게 여길 이유는 많았지만 밤은 아직 탑의 정상에 적이 없는 애송이였다. 때문에 격이 맞지 않다고 여겼는지 자하드는 밤을 향한 살의를 감추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직접 나서지도 않았었다. 그랬는데 난데없이 이제와서 왕의 위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함정까지 가며 전면에 나타났다는 걸까? 고작 쿤을 붙잡기 위해? 차라리 곳이 자하드 궁이라는 말이 거짓이라는 쪽이 그럴싸한 상황이건만 예감은 비현실의 방향으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당장 쿤이 에드안의 시험을 치뤘다는 알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기이했다. 에드안의 시험을 치르고도 살아 남았으니 쿤이 에드안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돌릴 있게 것은 사실이었으나 에드안이 당시의 쿤에게 일렀듯 또한 탑의 지배자로서 섬김을 받던 . 에드안의 명예회복을 위해 쿤을 해치려는 자들을 뚫고 랭커가 되는 또한 다른 하나의 과제였다. 그렇기에 쿤이 직접 사실을 떠벌리고 다닌 적은 번도 없건만.

 

탑의 왕은 아버지와 별로 친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그렇지. 하지만 인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손으로 친구의 아들을 죽이기는 껄끄러워서 말이야.”

 

당신이 자하드라고?”

 

광신도에 군대까지 거느린 탑의 왕이 선별인원의 싸움에 직접 끼어들었다는 황망하게까지 느껴져서 쿤은 전신을 짓누르던 위압감의 무게마저 잊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의 거리가 예상보다 너무 가까워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런 표정을 여과없이 드러낼 정도로 이제 쿤은 경솔하지 않았다. 침대의 한쪽 끝에 걸터앉은 사내는 분명 자하드의 상징, 적색삼안으로 눈을 비롯한 얼굴의 반을 가린 자였다. 아버지인 에드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다부지고 커다란 신체에 사람들이 자하드에 대해 묘사할 빼놓지 않던, 빛으로 만든 찬란한 금발. 보이지 않아도 적색삼안의 안대 밑에 같은 색의 눈동자가 있으리라는 쉽게 예상할 있을 정도로 그는 자하드의 외양 정보와 많은 것이 일치하는 남자였다.

 

그래. 탑의 왕이자 너희를 지배하는 신이지.”

 

신께서 같은 선별인원한테는 무슨 볼 일이실까? 가주가 되면 임명식 같은 거라도 하는 거였어?”

 

원한다면 예식을 열어주는 어렵지 않지만 네가 바라는 일이 아닐텐데.”

 

당신이 보디가드를 준다면 다시 생각해 볼만 하지.”

 

재미있군. 그건 친구를 배신하겠다는 말인가?”

 

경호원을 고용하는 거랑 배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신이라면서 말귀가 어둡네.”

 

인정하지. 말보다는 행동하는 좋아해.”

 

객관적으로 말해서 쿤이 아무리 쿤의 가주 자리를 차지했다한들 그는 아직 선별인원의 신분이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버지의 아성을 뛰어넘을 있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했다. 하물며 아버지도 아니고 탑의 왕인 자하드를 이긴다는 더더욱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물리력으로 에드안을 이길 가능성이 1% 된다면 자하드를 이길 가능성은 0.00001%? 그건 그대로 기적의 확률과 같았다. 아마 그보다야 높겠지만 앞의 남자가 정말 자하드라면 쿤이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 동료들에게 돌아갈 있을 가능성도 없이 0 가까운 수라는 자명했다. 그런 자가 쿤의 농담을 받아주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기적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왕이자 신인 나에게 경호를 맡길 생각을 하다니 과연 에드안의 아들답군. 하지만 고용하는 대가는 만만치 않을텐데.”

 

“......어차피 그럴 생각 없잖아 당신은. 하고 싶은 거야? 인연이 생각나서 아버지에게 가주 자리를 돌려주려고?”

 

쿤의 가주가 누구인지는 내게 중요치. 말했다시피 데려온 단지 손으로 죽이기는 곤란해서다.”

 

재미있는 소릴 하네.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 죽는 거에 그렇게 연연하는 분이 아니야. 당신도 알고 있을텐데?”

 

물론 그는 핏줄에 연연하는 자는 아니지. 하지만 쿤의 가주라면 그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가질테니까.”

 

말을 받아주는 것만이 이니라 자하드는 쿤에 대한 태도도 단순히 포로 다루듯 하지는 않았다. 마치 입술의 아래가 것이 느껴질만큼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와인잔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쿤의 뒤부터 뺨을 쓸어 내려온 손끝이 부드럽게 끝을 당겼다. 쿤의 시야에서는 안대에 가려진 자하드의 눈동자를 없었지만 자하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새파란 시선을 눈에 담을 있었다.

 

공교롭게도 좋은 미끼이기도 하고.”

 

미끼라니. 누가 물어 준단 말이야? 아버지가? 밤이? 그건 당신 착각이지.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같은데.”

 

자하드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몸이 밑으로 기우는 느낌에 쿤은 자기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침대 위니까 부딪힌 등이 아프진 않았지만 붙잡힌 손목을 조이는 힘이 너무 강했다. 남자의 그림자가 덮혀 오는 유예됐던 끝이 다가오는 것인양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하드! 쿤한테는 대지 않겠다고 했잖아!”

 

자왕난?!”

 

그건 네가 냈을 때의 약속이지.”

 

, ... ..!”

 

!!”

 

방해하지 마라. 네가 아끼는 친구가 고통스러워하는 원하지 않는다면.”

 

전에 헤어진 왕난이 자하드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숨통을 죄는 자하드의 때문에 어떤 말도 수가 없는 처지의 쿤은 숨이 부족한 이유로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걸음 물러나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 자하드도 목을 조르던 손울 풀어주어 기침과 함께 숨이 트였지만 왕난의 모습을 눈에 담기에는 일렀다.

 

잠깐의 동료였던 녀석마저도 끔찍히 아끼는데 시험의 층에서부터 수십년을 함께한 동료라면 각별하겠지.”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자왕난!! 녀석이 너한테 시켰어? ?”

 

..”

 

설마 이수한테광고를 보낸 너야?”

 

, 그건….”

 

신기한 일이군. 에드안은 항상 핵심에 닿는 느렸는데.”

 

?!”

 

너는 어서 일을 하러 가거라.”

 

다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왕난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쿤은 그제서야 왕난이 앞의 사내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미쳤다. 뒤는 추측하고 싶지 않지만 새로운 단서가 주어지자 쿤의 뇌는 자동적으로 그가 알고 있는 퍼즐 조각들을 끼워맞추기 시작했다. 조잡하고 어리숙해 보였던 함정이 왕난과 그의 동료들이 벌인 짓이라면, 밤은 분명 공방전을 진행하는 중에 얘기치 못하게 동료를 적으로 마주하게 것이었다. 인정에 무른 성격을 생각해 봤을 밤이 왕난을 무력으로 꺾고 지나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은 아무리 자하드의 농간이 있다고 해도 끝의 끝까지 승부를 미룰 테니까 당장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해 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이번 공방전에 걸린 아이템을 왕난 쪽에서 쓸어가거나 버리면 이어서 닥칠 자하드와의 대결에서 밤이 불리해질 공산이 컸다. 이런 위기 상황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지만 닮은 구석도 없진 않군. 말해봐라. 너는 괴물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거냐. 너희 부자는 한결같이 나보다는 그쪽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재수없는 소리 하고 있네. 누가 누굴 닮았다는 거야? 기대하고 있냐고? 기대 같은 . 밤은 그냥 친구야. 소원을 들어주는 같은 아니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그랬던 건가…”

 

아까부터 대체 뭐가…”

 

역시 돌려보내 주면 내가 곤란하겠어.”

 

다른 대답을 들었더라도 이미 결론은 정해져 있는 일이었지만 쿤이 아무리 억울해 한다고 해도 곳은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아직까지는 절대자인 자하드를 막아설 있는 자가 있을 없었다. 지금의 쿤이 아버지인 에드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의 편린일 테니 둘이 닮았다는 자하드의 표현에 학을 떼는 것이겠지만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둘은 닮았다. 부자지간을 잇는 유전자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아니다. 자하드와 함께 탑을 오르던 시절의 에드안은 잘난 척이 심하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특히 눈에 띄었지만 의외로 세심한 데다가 가끔씩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맹점을 후벼파는 통찰력이 있었다. 자하드의 무리에 사실 명의 리더가 있었다는 눈치챈 것도 에드안밖에 없었고 데이터 세계의 자하드에게 너는 왕이 아닌 모험가라고 본질을 일깨워 것도 에드안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모험가가 아닌 왕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동조해 것이 아닐까 싶다.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것도 이제 그와 동료들이 탑의 꼭대기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는 직감한 것이 아닐까? 방탕한 삶을 살며 많은 것을 누려 왔지만 에드안은 처음부터 삶에 무게를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자유롭게 바람처럼 사는 이라 항상 현실에서는 유리되어 있는 존재. 소싯적의 그와 아들을 보니 자하드의 심중에서도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금 느낌은 그가 신이 아니라는 증거 같은 것이었다. 알고 있지만 차마 말할 수는 없었던, 그러면서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랬던, 치부이자 약점이고 동시에 그를 완성시켜 주는 무엇.

 

지금부터 것이다.”

 

뭐라고..?”

 

녀석의 아들에게는 절대로 넘겨줄 없지.”

 

쿤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전부였던 사랑을 앗아 V, 이어 남은 찌꺼기마저 삼키러 작은 괴물에게 넘겨주기 싫은 찬란함이다. V 각별했던 에드안이 결국은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었듯이 지금 손에 들어온 보석도 자하드는 작은 괴물에게 넘겨줄 마음이 없었다. 푸른 눈동자의 앞이니 솔직해질 있다. 신이 아니기에 아무리 운명을 뒤틀어도 마지막이 오고야 것이라면 자신은 인간 답게 지배자로 군림하는 동안이라도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할 것이다. 그것이 최후의 순간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할 지라도.

 

 

 

 

 

 

 

 

 

 

 

 이 글을 익명님께 바칩니다!

....라고해봤자 미완성같고 그렇죠... 네....

죄송합니다, 익명님 ㅠㅠ

하지만 너무 늦으면 기다리다가 지치실 것 같아서 얼른 들고 와 봤습니다.

자하아게 저도 쓸 수 있습니다! 하고 야심차게 시작했는데 자하드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정말 어렵네요.

패기로웠던 과거의 저를 매우 혼내주시기 바랍니다.

대신 언젠가 다시 한번 시도해 보는 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세 송이

신의 탑/봄 꽃

 

 

 

 

 

 

 

 

 

 

 

 

가문의 저택을 누구든 쉽게 찾을 있는 단연코 압도적인 위용 덕이었다. 에드안에게 딸린 식구가 몇인가를 생각한다면 그만한 호화 저택이 아니고서야 그의 아이들을 전부 거둘 없다는 것은 누구든 예상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에드안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는 그의 핏줄을 거두기는 했지만 아이들을 길러내는 전부 고용인들의 몫이었다. 왠만해서는 자식들에게 눈길을 주는 일조차 없지만 아이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대중만이 아니라 고용인들에게도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그는 아버지라기 보다는 일종의 지배자였다. 그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의 인정을 받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에드안과 각자의 어머니로부터 뛰어난 외모를 물러받은 아이들이었지만 특히 연예계에서 에드안을 넘어서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그만큼이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여전히 모든 토크 쇼에서는 그를 게스트로 맞이하고 싶어했고, 가십을 넘어 정시 뉴스에서도 그의 행보를 대서특필하는 일이 잦았다. 애정을 주지 않는 아버지라도 그가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또한 그가 구축한 절대적 아성에 있을런지도 몰랐다.

 

보고 드렸던 대로 아게로님께 문제가 있는 아닙니다. 지금은 열도 많이 떨어졌고요. 예민 성격이시니 급격한 스트레스에 일시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지신 걸겁니다. 각성에 흔히 동반되는 증상이죠.”

 

급격한 스트레스라….”

 

주치의의 보고를 들으며 에드안은 암레스트의 끝을 손톱으로 가벼이 톡톡 때렸다. 오랫동안 드안을 모셔온 주치의에게는 반응을 끌어내기 힘들 소리였으나 주변에 도열한 그의 비서를 비롯해 에드안에게 인정 받았다 여겨지는 몇몇 자식들과 경호인력에게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소리였다. 그가 네임을 외우고 있는 안되는 자식들 하나임이 분명한 아게로는 가문의 예외 중에서도 예외였다. 에드안의 친자로 확인된 17명의 사내아이 15번째 아들로 가문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기를 거부한 아이. 물론 아게로는 밖에도 에드안의 명령 어기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반항적이었지만 에드안은 그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모든 아이들을 제치고 그에게만 눈길을 주었다. 아게로가 연예인이 아니다보니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이긴 했으나 가문에 속하는 이들이 그를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형제들이 그에 대해 질투를 표하지 않는 그들과 아게로가 다를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누구보다 알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알겠네. 당분간은 각별히 신경 주게.”

 

가문의 주치의를 돌려보낸 에드안은 그대로 턱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싶었다. 같은 성격에 난봉꾼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세간 사람들은 그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다혈질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런 행동은 에드안이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목적의식이 분명할 때의 그는 누구보다 영민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생각을 모두 읽히는 느낌이 정도라서 두렵고 두려웠다. 수행원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긴장감에 억눌려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윽고 결론에 도달한 에드안은 ,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래그래. 갑자기 어울리게 동아리 따위를 시작했나 했었지. 아무래도 마리아만으로 감시하기는 역부족인 같구나.”

 

면목 없습니다, 아버님.”

 

키세아까지 붙이도록 해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네가 따로 충고를 주도록 하고.”

 

. 알겠습니다.”

 

아게로는?”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부러 조금 독한 약을 썼기에…”

 

잘했다. 그럼 오랜만에 제대로 대화를 나눠볼 있겠구나. 너희들은 이만 보거라. 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

 

 

무슨 일을 하든 1류가 되려면 인정하기 싫어도 그래야할 해야 한다. 한성은 이만 인정해야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교수자로서 한성의 역량이 얼마나 대단하든지 간에 먹여주는 학생이 받아먹어 줘야 교육이라는 성사된다는 것임을.

 

학교에서와 여기에서 수업 태도 차이가 확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학교에서도 딱히 좋아서 아니었는데요. 쿤씨보다 모르면 같아서 열심히 하긴 지만요.”

 

쿤씨? 아게로 아그니스?”

 

? 아그니스의 아들이 같은 학교던가?”

 

돌아오셨군요, 에반켈님! 그런데 아그니스가 아그니스…..”

 

아이들이 에드안의 성만 따라가는 기분 나쁘다더군. 그녀라면 생각해 봄직한 일이지.”

 

FUG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정보조직. 그리고 명성은 우수한 정보원들에 해서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UG 정보원들은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나 존재했다. 세상의 꼭대기와 밑바닥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종교만큼이나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정보원들을 FUG 다수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정보원 개개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단신으로 FUG 입성해 간부의 위치까지 올라간 에반켈은 많은 정보원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들의 교과서 같은 자였다. 한번 마주친 것만으로도 어떤 정보든 불게 만들 같은 위압감, 그에 걸맞는 휜칠하고 다부진 신체, 혼자서도 1 군단과 맞먹는 힘을 가졌다는 속성의 최강자이자 분쟁지역과 관계된 정보를 총괄하고 있는전쟁의 여신’. 공로를 인정받아 FUG 후계자인 스물다섯번째 , 아니 비올레 그레이스의 무술 스승까지 맡게된 그녀였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내지 못한 유일한 임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후계자의 신임을 얻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여전히 작구나, 한성아.”

 

제가 작은 아니라 에반켈님의 키가 거죠.”

 

나와 침대까지 가려면 분발해야겠는걸?”

 

방금 말씀은 성희롱입니다?”

 

현장에서의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아직 적이 없는 밤이지만 부하 직원에게 추근대는 그녀는 없이 목격한 밤이 어떻게 그녀의 능력을 신임할 있을까? 그래도 오늘에서야 처음 밤의 흥미를 끌만한 이야기가 입에서 나왔으니 조금쯤 진전을 기대할 있을지도?

 

쿤씨의 어머니를 아세요?”

 

, 엄청 친한 아니고. 고객 명이라서.”

 

어떤 분이신지 궁금해요.”

 

고객 정보지만 상사니까 괜찮은 건가…… 세계에서 다섯 손에 꼽히는 자산가로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 야심가라고도 있지.”

 

에드안이 분의 아들한테 꽤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같던데요. 희대의 난봉꾼한테도 마음 가는 구석이 있었나봐요?”

 

얘기는 길게 하자면 굉장히 스펙터클한데. 듣는 대가가 필요할 정도로. 네가 이만큼 벗어준다던가 내일 시간을 준다던가…”

 

듣는 비올레님인데 대가는 제가 치러야 하는 거죠?!”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니. 아직도 조직의 생태를 모르다니 답지 않구나, 한성아.”

 

달려들 기세인 한성의 이마를 짚어 가벼이 저지하며 에반켈은 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애초에 한성에게 좋은 감정이 별로 없는 밤이 그의 정절(?) 따위를 아까워 이유는 없으니 거래는 성사 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에 동물의 털이 오소소 곤두서는 한성을 쿤이 봤다면 학점이 반토막 나도 좋을 구경을 했다고 여겼을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아게로.”

 

어째서 수인들은 다른 되면서 허물 벗어놓듯 자신의 껍데기는 벗어놓고 유유히 사라질 수는 없을까. 모든 전자기기를 압수당한 쿤은 왕난과 레포트는 물론이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당장 앞에 있는 에드안 밖에 없지만 아버지의 사람들이 주변에 깔려있다는 이미 짐작하고도 남았다. 컨디션이 워낙에 좋지 않았던 탓이지만 틈을 이상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억지로 에드안과 마주 앉게 쿤은 식사 대신 신경질적으로 접시에 담긴 모든 것을 잘게 썰어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늘따라 일을 일찍 마쳤다는 것도, 눈을 뜨고 보니 방 문이 밖에서 잠겨 있었던 것도.

 

몸도 좋지 않다면서 먹어야지. 오늘도 자하드 가의 고양이가 아니었으면 어쩔뻔 했니.”

 

“………”

 

아니면 3 처럼 아버지가 쉬게 줄까?”

 

“…… 정도로 나쁘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부드럽게 위를 향하는 입꼬리와 함께 에드안의 세로로 동공이 가늘어졌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아게로는 에드안의 표정을 그려낼 있었다. 그는 위협을 가할 짐짓 친절한 척을 하곤 한다. 바늘로 빼곡이 채워진 듯한 공기가 이렇게 전신을 위협해 오는데, 말투만은 전에 없이 나긋했다. 그가 언급한 3 전에도 그랬다. 에드안이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에 쿤은 꼬박 한달을 갇혀 있었다. 에드안의 처리는 완벽했다. 학교에는 진단서를 보냈고, 병원에 있는 동안 아게로의 상태가 나빴던 것도 사실이었다. 의료진은 성심성의껏 아게로를 돌보았고 에드안도 바쁜 스케쥴을 쪼개어 정기적으로 문병을 주었다. 그리고 일로 쿤은 아버지의 힘에 대해서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으면 무엇하나 마음대로 없다는 알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몸은 솔직하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하더구나. 누이가 유학을 갔다기에 마음을 놓고 있었더니 그니스가 다른 사람을 보낸 모양이지?”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들 어머니 쪽으로 마음은 없어요.”

 

그럴테지. 아버지도 알고 있단다.”

 

그런데 ..”

 

아게로.”

 

분명 사람은 테이블의 양단에 앉아 있었는데 피부에 닿지 않게 쏟아져 있던 앞머리를 려내는 새하얀 끝에 아게로는 몸을 굳혔다. 엷은 푸른색에서 꽃물 같은 분홍빛으로, 이윽고는 다시 물빛으로. 에드안을 손끝을 타고 흐르는 빛깔은 참으로 황홀한 것이었으나 아게로에게는 그에 감탄할 여유 같은 주어지지 않았다. 식기를 잡은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자신에게만은 각별한 아버지를 밀어낼 밖에 없게 만드는

 

“!!”

 

확실히 무르익겠구나. 하지만 혼인색이 드러났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당장 성인으로 인정받을 있는 아니지.”

 

두꺼운 융단이 깔려있는 바닥은 은식기가 떨어지는 소리를 모조리 잡아냈다. 대신 높은 등받이에 리를 부딪히는 소리가 정도로 에드안에 의해 세게 고개를 꺽인 아게로가 낮은 신음을 뱉어냈지만 소란이 일었다 한들 집안에 그런 소음을 들은 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빼닮은 심청색 눈동자 속에도 아스라이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확인한 에드안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다만 입을 웃고 있어도 눈은 웃지 않는 표정은 가히 괴기스럽다 표현할 했다. 가늘게 찢어진 에드안의 동공이 아게로의 눈을 찔러 들어올 같았다. 턱뼈를 부서질 조이는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끝의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아게로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에드안의 눈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아버지께 달려왔어야지. 네가 아무리 감추고 괜찮은 한다해도 버지는 있단다.”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언뜻언뜻 보이는 에드안의 송곳니가 날카로웠다. 불길한 예감은 빗겨가지 않는다는 아게로는 새삼 알아가고 있었다. 물론 왕난의 억지를 받아준 에드안의 추측대로 늦은 귀가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위한 이유가 컸다. 아그니스의 사람을 만나게 되든, 에드안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든지 간에. 어차피 아게로에게 반박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뻔했다.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입을 있을 가능성은 0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에드안의 눈과 마주한 순간에도 당당할 있는 사람은 아게로가 아는 한은 그의 어머니, 아그니스가 전부였다. 먹잇감을 압도하는 눈을 당해내기엔 아게로는 아직 어렸다. 분하지만 에드안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그러고 나면 걱정되는게 부모 마음 아니겠니.”

 

!”

 

아직 입맛이 없다면마시렴. 아버지가 억지로 먹이기 전에.”

 

경호원을 줄세워 데리고 다니는지 없을만큼 에드안은 강했다. 놓아주나 싶더니 이번에 아들의 머리채를 에드안은 아게로의 앞으로 유리잔을 내밀었다. 투명한 물에 방울의 붉은색이 나선을 그리며 퍼져갔다. 에드안의 . 오로지 그만이 해독할 있는 독을 이용해 에드안은 3년전에 아게로가 꼬박 달을 앓아 눕게 만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스스로 때까지 번이나 해독과 중독을 반복시켜서. 아마 쯤에서 아게로가 굴복하지 않았다면 달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독방에 갇혀 있었을 지도 몰랐다. 때문에 물을 마시면 어찌 되는지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아게로는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유리잔을 감싸쥐었다. 당장의 최선이 그것이라는 것도 이미 체득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일은 방에서 발자국도 나갈 생각 말거라. 상태가 나쁘다고 하니 자상한 아버지가 금은 주지.”

 

 

*

 

 

그래서. 내일은 나올 있겠냐?”

 

간다고. 시키지 . 죽을 같아.”

 

. 그럴 거면 부르냐, 멍청한 거북이 같으니라고.”

 

들리라길래 병문안이랍시고 기껏 선물까지 왔더니 시키지 말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지만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라크의 입장에서는 쿤을 마냥 바보라고 폄하하기에는쩍은 구석이 있었다. 애초에 내버려 수가 없어서 여태 친구로 지내고 있는 아니던가? 오로지 재능으로만 가치를 평가받고, 여전히 부모에게 도구취급 당하는 아빠친구 아들과.

 

걱정할 사람까지 없애서 하려는 거냐. 아무 짝에 쓸모 없는 형제들 보다야 녀석들이 훨씬 진심일 텐데.”

 

닥치고 그렇게 전하기나 .”

 

아오, 놈의 성격장애 거북이를 그냥….”

 

캠퍼스의 다른 친구들에게 내일은 나갈 있다고 전해달라는 라크를 부른 목적이었으니 일은 끝난 것이 맞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당장 꺼지라니 상황에서 열받지 않는다면 그쪽이 성인군자다. 덕분에 라크의 붉은 눈이 불을 뿜어낼 기세로 타올랐지만 그는 웅크린 등을 갈기는 대신 콧방귀만 남기고 쿤의 저택을 나섰다. 어차피 바보 머저리 거북이에게 그런 훈계를 봤자 알아먹지도 못할 뿐더러 쿤이라고 몰라서 그런 선택을 것이 아닐 터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할 따름이지만 현재의 최선이 쿤의 선택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에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항상 라크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아버지들 간의 인연에 힘입어 라크에게 부여된 역할이 있다는 데에 감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여하튼 에드안이 살아 있는 그가 라크의 앞에서 사라질 일은 없다는 뜻이니까. 딱하게도 라크의 역할이 거기까지라는 그를 화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라는 본인만이 모르는 채로, 악어는 캠퍼스로의 길에 올랐다.

 

 

 

 

 

 

 

 

 

 

 

세 번째 이야기 입니다.

앞으로 두 편쯤 남았네요.

이번엔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 상황상 자세히 풀어쓰질 못해서 이해가 되실까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에드안과 쿤 사이에 뭔가 사정이 있구나 정도만 알아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나온 켈한성은 글(낑깡)님의 리퀘스트였습니다.

짧게 나온 만큼 뒤에 좀 더 다루거나? 해야할 것 같은데 계획대로 돼줄런지 모르겠습니다.

연휴 때 오랜만에 시간이 좀 나서 이것저것 해 봤는데

사실 그만큼 당분간 좀 바빠질 예정이라 ㅠㅠ

조~금 길게 이따 뵈어요...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송이  (4) 2019.08.16
네 송이  (2) 2019.06.17
두 송이  (2) 2019.05.01
한 송이  (2) 2019.04.24
꽃망울  (2) 2019.04.08

두 송이

신의 탑/봄 꽃

 

 

 

 

 

 

 

 

 

 

으아, 레포트에 깔려 죽겠다.”

 

머리를 쥐어 뜯으며 외치는 왕난의 절규에 쿤은 마음 속으로만 동의를 표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녹아내리듯 책상에 엎드린 쿤의 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보이는 이상증상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상상 이상이었다. 너무 졸려서 점심이고 레포트고 당장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생각이라는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려나? 쿤의 의식이 까무룩하게 가라앉아 가는 와중에도 혼자 왁왁대며 쌓여가는 레포트의 수에 울분을 토하던 왕난은 강의실에 둘만 남았음에도 쿤이 아무런 대구가 없자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 . 아직도 졸려서 그래?”

 

점심 먹으러 깨워줘.”

 

지금 그래. 오늘만 늦게 먹지 . 식당에 사람들도 바글바글할 테니까. .. 그럼 나는 경영전략 레포트를…”

 

왕난이 접어서 넣었던 노트북을 다시 꺼내는 데도 쿤은 미동 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각성이라는 특수한 절차 때문에 무기력해진 요즈음의 쿤은 깐깐하고 도도한 본래의 성격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방비했다. 졸고있는 동안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라면 친구들이 만지는 것까지도 오케이였다. 역시나 오늘도 물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왕난은 혼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간판이 좋은 대학인만큼 캠퍼스에는 집안도 외모도 되는 선남선녀들로 넘쳐났지만 학생들이 결혼이 아닌 연애 상대로 손에 꼽는 이는 누가 뭐래도 지금 왕난의 옆에 세상 모르고 잠들어 계신 아게로 아그니스였다. 높으신 분들의 특성상 결혼은 대부분 정략혼이기 때문에 상대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자유연애를 즐기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고 더해서 수인들은 성에 관한 구분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떤 동물의 피를 타고 났느냐에 따라 그들이 호감을 느끼는 대상은 사뭇 다른데, 다른 동물의 피를 타고난 사람에게 기준을 적용하고 보면 암수구분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주요했다. 요는 종족 번식의 가부라던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입장 등에 따라 최종적인 배우자는 부모님이 결정지어 주니까 연애만큼은 자기 취향대로 하고 싶다는 특권층 젊은이들의 마인드라는 거다. 와중에 쿤이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대중을 휘어잡는 연예인 집안 출신인 만큼 많은 이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를 갖춘데다가 가문이 높은 이름 값에 비해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주요했다. 요컨대 지하세계의 손이라던가 정치적 수완 혹은 군사력으로 유명한 집안의 자제들은 아무리 취향에 맞는 성격이나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위험부담이 상당하다. 하지만 가문이라면 최악에 최악으로 헤어진다고 해고 가십거리 정도로 끝날 테니까 안전하고 오감도 즐거운 연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와는 전연 다른, 쿤의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관리 덕분에 아직까지 소망을 이룬 이는 아직 학내에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같은 소망을 가진 이들 사람으로서 왕난도 이번 기회에 쿤의 머리카락에 한번 손을 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여전히 머릿 속에서는 새하얀 목선이 아른거리지만 맨살에 체온이 다른 손이 닿으면 쿤이 깰지도 모르니까. 딱히 나쁜 짓을 하려는 아닌데도 터질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왕난은 천천히, 원래도 나지 않을 소리까지 죽여가며 손을 뻗었다. 닿는 순간부터 감탄이 터져나오는 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올려 뒤로 넘겨주니 흡사 눈의 요정처럼 잠든 얼굴이 드러나 다시 한번 왕난의 심장을 때려댔다. 마음 같아서는 레포트고 점심이고 필요 없이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얼굴만 보고 싶은 왕난이었으나 뭔가 이상한 예감에 왕난의 손은 한번 전진했다.

 

? 괜찮아? 있는 같은데?”

 

…”

 

병원.. 아니면 약이라도 와야 하는 아냐?”

 

“….괜찮아. 아침부터 그랬어. 해열제는 가져왔고.”

 

팔꿈치 사이의 간격을 좁혀 완전히 얼굴을 감췄던 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통은 서늘하게 느껴질만큼 왕난보다 체온이 낮은 쿤이 왕난과 비슷한 정도의 체온을 가지고 있다는 한여름이 아니고서야 그의 상태가 나쁘다는 밖에 되지 않는다. 쿤은 왕난의 걱정을 점심 먹으러가자는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왕난은 이제 켜진 노트북을 다시 덮고 쿤을 잡아 끌었다.

 

그럼 졸지말고 약부터 챙겼어야지. 일단 점심 먹으러 가자. 약도 먹고. 내가 동방이나 잠시 쉴만한 곳으로 데려다 줄게. 어지럽지는 않고?”

 

졸려.. 뇌가 녹을 같아.”

 

그건 졸린 아니라 네가 열이 나서 그런 거잖아. 강의도 없는 같던데 차라리 하루 쉬는 낫지 않았어?”

 

그랬으면 유한성 악마 같은 교수가 학점을 반토막 냈을 .”

 

아무튼, 가자. 가방 내가 들어줄까?”

 

아니야. 먹지. 늦어서 식당에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네.”

 

사실 왕난이 거의 쿤을 잠들자 마자 깨운 셈이라 점심시간은 오히려 지금이 절정이겠지만 열이 올라 시간 감각이 무뎌지기까지한 쿤에게 어서 약을 먹이고 집에도 데려다 줘야 겠다는 생각이 왕난은 사람이 많지 않을 같은, 그러면서도 환자한테 추천할만한 메뉴를 정하느라 혼자 고심했다. 영혼 없이 왕난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인 쿤은 왕난의 고민을 헤아려주진 못하겠지만. 결국 왕난이 정한 오늘의 메뉴는 대학가 주변의 조그마한 가게에서 파는 죽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음식이 아니라서 아직까지 이렇다하게 인기를 끌고 있진 않지만 이수의 고향에서는 죽을 환자식으로 주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하츠의 고향에도 비슷한 있다고 하는 보면 쪽에서는 대중적인 음식인가보다.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건지 가게는 손님은 없지만 주문받은 음식을 담느라 분주했는데,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오는 없는 음식이지만 예감은 좋았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에게 추천한다는 쇠고기죽과 참치죽울 주문해 놓고 보니 거기서도 앉은 채로 벽에 기대 졸고 있는 쿤을 발견한 왕난은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대단한 배경에 비해서 대단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왕난은 학교도 다른 수를 써서 둘어온 틀림 없다는 말을 학기 초부터 듣고 있었고 덕에 친구도 별로 없었다. 4 내내 전공 수업을 혼자 들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왕난의 옆자리를 OT 불참으로 넘겼던 쿤이 차지하면서 걱정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났지만 말이다. 왕난을 위한 배려라기 보다는 왕난의 옆에 있으면 여학생들한테 시달릴 같다는 이기심 똘똘 뭉친 선택이었음을 감추지 않은 쿤이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보다야 직설적인 화법이 차라리 마음에 들어서, 둘은 이후로도 전공 수업을 함께 들었다. 표현방식이 재수 없어서 그렇지 지내다보니 무른 구석이 많은 쿤은 왕난이 선택한 볼일 없는 교양 수업도, 기괴한 비주얼의 점심 식사도, 막무가네로 정한 사진 동아리에까지 전부 따라가 주었다. 동아리 덕분에 이제 쿤이 아니라도 점심 식사를 함께할 친구는 얼마든지 구할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왕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손에 꼽히는 아직까지는 쿤이었다. 쿤이 속으로 어떤 계산을 건지는 없지만 이제껏 함께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왕난에게는 많은 점수를 갔으니까. 친구를 넘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할 만큼.

 

술이라도 먹어, . 그래야 약을 먹지.”

 

“...... 시킨 거야?”

 

죽이라는 건데 이수가 환자한테 좋은 스프랬어. 거는 소고기, 꺼는 참치.”

 

참치라니. 고양이가 맞긴 맞구나.”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거든?!”

 

닥쳐 개냥이.”

 

아오! 환자니까 참는다. 기운은 없으면서 놀릴 기운은 나냐? ?”

 

대답 없이 어깨만 한번 으쓱해보안 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을 숟가락으로 한번 깊게 저었다. 스프라고는 해도 그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비주얼이지만 먹을 들어있는 같지도 않고 냄새는 고소하다. 천천히 식혀 먹으라는 식당 주인의 말에 조심스럽게 숟가락 정도만 입에 넣어봤는데 다른 음식에 비해 담백하고 부드러워서 확실히 넘기기가 쉽다. 고양이 혀인 왕난과 쿤의 입장에서는 많이 식혀야 먹을 있을 같지만. 위에 막이 생길 정도로 식었을 겉만 살살 긁어 먹어야 온도가 적당한 같이 느껴지는 음식이지만 입맛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도면 확실히 맛있는 축에 든다.

 

이제 수업 없는 맞지?”

 

.”

 

그럼 기사 아저씨를 여기로 부를 테니까 바로 집에 들어가. 이수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전시회 때문에 골치 아플텐데.. 이화랑 하츠가 도와주려나...”

 

걔네 둘이야? 밤은?”

 

학기 중에는 바쁘잖아. 센스도 없고.”

 

밤은 출사가 아니면 임원진에서 쓰임새가 없다고 푸념하는 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찬가지로 디자인 센스가 없는 왕난도 같이 공격을 받는 느낌인지라 말할 처지가 아닌 왕난은 마디도 보탤 없었다. 다른 센스면 몰라도 보이는 거에 대해서는 이화도 믿을만 하지만 하츠는 딱히 밤이나 왕난과 다를 없어 보이는데 어쩌다가 준비위원이 건지 입이 근질근질해도 말이다. 사진동아리의 특성상 계절별로 있는 출사가 중요한 행사이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하는 사진 전시회 또한 중요도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축제때마다 동아리 회원들이 출품한 사진들로 여는 전시회는 수익금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동아리 창립 이후 해도 거른적 없는 사진 동아리 TOG 메인 행사였다. 때문에 임원진만이 아니라 센스와 행동력이 남다른 인재를 가려 뽑아서 별도로 준비 위원회까지 일시적으로 운영하곤 했는데, 예선부터 전시회장 디자인까지 모두 동아리의 인력만 동원하기 때문에 5월의 대학 축제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학기 초부터 발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째서 과대나 동아리 임원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탁월한 리더쉽을 자랑하는 쿤도 준비위원으로 차출당한 상태. 쿤의 대로라면 각성은 오래지않아 끝난다고 하지만 열이 있는 보니 감기몸살이라던가 다른 병에 걸린 아닌지 왕난으로서는 걱정이다. 왕난의 권유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건데 무리하다가 잘못되기라고 하면머리수로는 왠만해서는 당해내기 쉽지 않은 가문이 뒤집히는 아닐까? 각자의 팬클럽까지 동원하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지도?

 

하루 정도야 내가 대신 도와주면 되지. 너무 걱정하지 .”

 

너도 걱정인데. 게다가 너나 밤이나 다를 없잖아. 일과가 끝나면 바로 공식 일정 시작 아냐?”

 

…. 비올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도 있고. 어차피 아버지는 나한테 아무 기대 하실 ?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카리스마 같은 전혀 없잖아.”

 

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난의 아버지자하드 이른바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수완을 자랑하는 정치인이었다. 40세가 되기도 ,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치에 입문해서 벌써 4 의원이자 장관 직을 역임하고 있으며 차기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다. 사실상 적수가 없어서 자하드의 당선을 의심하는 이가 없는 정도인데, 왕난은 그런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자부심이라던가 자신감이 없어보였다. 형인 카라카가 아버지의 장점을 온전히 타고난 완벽한 2세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려나?

 

정치판이 연예계도 아니고 카리스마만 있으면 되냐?”

 

나라의 다음 대통령 자리가 자하드의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에는 쿤도 동의하는 바였다. 자하드의 성공적인 정치 활동도 한동안은 계속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식견이 넓고 신념이 분명한 사람이었으며 대중을 휘어잡는 또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가 끝난 다음에도 사람들이 자하드와 같은 사람을 원할까? 모든게 완벽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정치를 있는 것일까? 어쩌면 미래의 사람들은 그들이 외면하고 있던 번째 왕자의 존재를 나중에야 깨닫고 뒤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실패를 적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없는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져 있는 컴플렉스 덩어리를 사랑하게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계를 알지만 도전하고, 자신이 작기에 위를 보는 범재지만 동시에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비범함을 함께 지녔으니까. 자신이 특별하다는 스스로만 모르는 왕난은 분명 가족들에게 학과대표가 것도어쩌다 보니라고 설명했을 테고, 수재가 아니라도 과제에 대한 질문을 하는 동기들이 있는 것은 자신이 만만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의 우수한 부관이 되기 위해 경제를 열심히 공부한 사실이라던가 뒷배를 믿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새워 노력했던 따위는 아예 밖으로 내지도 않겠지.

 

다는 아니라도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말이지.”

 

그래. 머리 아픈 얘기는 하자. 자고 일어나서 나아지면 톡할게. 레포트는 같이 하자.”

 

그럼 나야 고마운데 기한이 넉넉하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왕난에게 대학생으로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있는 시간은 저녁 식사까지지만 너무 잘난 아버지를 탓에 심심치 않게 있는 신변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인력과 운전기사가 전속으로 배정되어 있는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왕난이 이들을 개인적인 용도로 부리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쿤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뼈와 살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라 이기는 왕난의 차에 올랐다. 리무진의 자리가 좋고 어떻고에 감탄할 새도 없이 기운에 취해 곯아 떨어진 쿤은 사실 그가 주인을 베개 삼았다는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할만큼 혼란 속이었다. 물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왕난의 차가 아니었으면 얻어 타지도 않았고 설령 타게 된다 하더라도 마음 놓고 잠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쿤도 이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왕난에게 성격은 못되니까 절대 이야기해 주진 않을 테지만.

 

, 레포트고 뭐고 병원 가던가 자던가 하나만 . 주소도 알려주고 그렇게 잠만 자면 어떻게 하냐?”

 

알려줘도 맞게 왔는데 .”

 

니네 집이 워낙 유명하니까 기사 아저씨도 알고 있어서 거지!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부탁 드려요, 형님. 아까 저랑 점심 먹고 해열제는 먹였거든요? 그래도 열이 떨어져서요. 수인은 정도면 고열이라던데 신경 주세요. 여기, 이건 가방인데.. 들어 드릴까요?”

 

아냐아냐. 우리 집에도 사람 많으니까. A.A. 많이 끼쳤네. 나중에 내가 밥이라도 사라고 잔소리 놓을게. 신경써줘서 고마워, 왕난군. 바쁠텐데 어서 . 키세아. 가방만 들어줘.”

 

제가 오라버니를 업을 수도 있거든요?”

 

오라버니가 알면 기겁할거다. 신기한 일이네. 녀석이 아무한테나 몸을 맡길 사람이 아닌데.”

 

상류층의 구성원 중에 막장드라마 써본 집안이 어디 있을까마는 부모로부터 세상은 불신지옥이라는 처음 배운 탓에 의심이 중증질환급인 쿤이 지경으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하츨링이었다. 그나마 대답은 못했어도 도착할 때까지는 의식이 아주 없진 않았던 모양인데, 왕난에게 소리 하는 것을 끝으로 기력이 모양인지 하츨링의 품안에서 잠들어버린 쿤을 침대에 데려다 놓기 위해 하츨링은 따라 나온 키세아에게 쿤의 가방을 맡겼다. 입학식에 왔다고 줄곧 쿤에게 마디도 않고 냉전 상태 유지 중이였던 키세아지만 인사불성이나 다름 없는 바로 위의 형제의 상태에 상당히 놀랐던 같다. 그리고 그녀도 하츨링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미 멀리에 있는 리무진의 모습에 잠시 눈길을 던졌다.

 

설마 저런 순둥한 고양이가 오라버니의 취향인 아니시겠죠?”

 

진짜 설마다. 녀석이 자기 연인이라고 약한 모습을 보일 리가. 차라리 친구라면 모를까.”

 

왜요? 친구보다 연인이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다른 녀석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A. 아닐걸.”

 

나오지는 않았어도 쿤을 데리고 들어온 하츨링과 키세아의 행색에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 거실의 형제들에게 주치의에게 연락해 것을 부탁한 하츨링은 쿤의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층계를 디뎠다.

 

그나저나아버지께서 알면 난리날 텐데 어쩌나?”

 

 

 

 

 

 

 

 

 

 

 

 

 

 벌써 두 번째 봄 꽃입니다.

사실 Track 02보다 이게 먼저 나올 줄은 저도 몰랐어요..

내친 김에 빨리 몰아쳐 끝내 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봄 꽃은 처음 계획할 때 쿤른 커플링을 5개 정도 잡아서 편당 하나씩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나갈 예정이었습니다.

내용이 소프트해서 커플링이라고 해도 나중에 누구랑 잘될까? 하는 정도겠지만요.

저번은 그래서 (아무도 안 믿겠지만) 밤쿤이었고,

이번은 (역시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왕난쿤입니다.

왜냐하면 트위터상에서 저랑 가장 오래 많은 교류를 해 주신 어싱님께서 뽑아주셨기에...

왕난이는 사실 밤보다 더 마음이 많이 가는 주인공인데 쿤이랑 활동을 안해서...

밤쿤이랑은 완전 다른 분위기인데 이 커플은 진짜 진도 빼려면 쿤이 적극적이 되어줘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오래 교류해 주신 티스토리의 한 분은 이 글이 아니라 따로 리퀘를 받아드릴 예정이니

보시면 원하는 커플링 하나 뽑아 주시고,

제가 먼저 여쭈었던 다른 두 분께서는 좀 더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송이  (4) 2019.08.16
네 송이  (2) 2019.06.17
세 송이  (2) 2019.05.07
한 송이  (2) 2019.04.24
꽃망울  (2) 2019.04.08

한 송이

신의 탑/봄 꽃

 

 

 

 

 

 

 

 

 

 

 

 

대세와는 달리 스물다섯번째 밤은 개강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다고해서 교수님의 수업이 그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진학하기는 했지만 정치외교과의 수업은 밤의 적성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성격상 아무리 흥미가 없어도 강의를 빼먹거나 과제를 미룰 수는 없었지만 동기들과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올만큼 전공과 밤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양이나 동아리 활동 쪽으로 캠퍼스 생활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헌데 올해부터는 달라졌다. 동아리 친구, 아니 밤의 첫사랑이 복수전공으로 밤과 같은 전공을 이수한다는 소식을 전해 것이다.

 

안녕하세요!”

 

. 개강인데도 쌩쌩하네, . 공강이야?”

 

아니요. 아직 시작 했어요. 쿤씨랑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일찍 거에요.”

 

그래서 오면 깨워달라고 했구나.”

 

깨워달라고요?”

 

저기. 쿤은 여전히 동면 중이야.”

 

꽃샘추위가 기승이다보니 여전히 졸음이 쏟아지는 건지 동아리 방의 유일한 간이 침대에 웅크린 쿤은 이수의 표현대로 동면 중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같았다. 빼앗은 건지 잠시 기증받은 건지 모르겠으나 친구들의 외투에 뒤덮혀있어 위를 느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키보다 작은 간이 침대에서 잠든 모습은 또아리를 뱀이었다. 가을 낙엽을 그러모아 만족스러운 잠자리를 확보한 상태의 백사(白巳) 말이다.

 

고생하시네요. 날이 어서 풀려야 할텐데요.”

 

글쎄. 그러면 확실히 낫긴 하겠지만 쿤이 유별난 건지도? 쟤네 누나라던가 다른 형제들은 멀쩡하던데.”

 

정말요?”

 

아까 마리아씨가 잔소리를 퍼붓고 갔거든. 여동생 입학식도 보고 모양인가봐.”

 

하하나중에 어쩌시려고..”

 

내말이. 자기가 저지른 짓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동아리 방에서 밤을 반겨준 기다리던 쿤이 아니라 성실한 회장, 이수였지만 놀다 지친 아이처럼 곤히 잠든 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망마저도 데가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도 밤의 행복 자체였으니까. 늑대 수인인 밤에게 첫사랑이란 운명이다. 평생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그들이니 쿤이 밤을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밤이 그를 외면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쿤에게는 아직 연인이 없으니 밤이 슬픈 생각을 떠올릴 때는 지금이 아니다. 밤의 아버지가 그랬다는 것처럼 없는 도전의 시기라고 해야겠지.

 

비오.. 아니, ! 오랜만이다! 그동안 지냈어?”

 

왕난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왕난씨는 지내셨어요? MT 때도 오셨잖아요.”

 

진짜 가고 싶었는데 선약이 있어서어흑. 다들 빼고 재밌게 놀았겠지..”

 

다음엔 같이 가요. 아니면 왕난씨네 근처로 출사 갈만한 곳을 알아볼까요?”

 

그건 절대 ! 아빠나 형이 경호를 붙일거야.”

 

역시 높은 분들은 뭔가 다르구나. 동아리 MT에도 경호라니.”

 

말이 경호지 완전 감시라고. 감시도 그냥 따라다니면서 쳐다보기만 하면 괜찮을 아빠한테 자꾸 일러 바친단 말이야. 품위가 없다던가, 행동이 가볍다던가!”

 

솔직히 아버지 위치를 생각하면 잔소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

 

지금도 왜라고 되물을 정도로 개선의 여지가 보이니까 당연하지. 일류 수행원이 밤낮으로 따라붙어 가르쳐도 늘지 않는 것을 이수가 겠는가. 친구의 기분이라도 나쁘게 어서 화제를 바꿔 주는 최선. 유명한 정치인인 왕난의 아버지처럼 이수의 동료들 중에는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많았다. 동물의 특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데다가, 수인들은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별도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이들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출세가도에 오르기도 쉬웠다. 특별한 재원들을 위한 최상위 고등교육 기관으로 평가받는 대학은 단연 신분상승의 상징과도 같았기에 이수 또한 재수를 감수하면서까지 도전했던 것이고.

 

강의는 언제야, ? 쿤은 깨워도 ?”

 

아직 시간이 남아서요. 동방에 들리려고 일부러 일찍 나왔거든요.”

 

혹시 깨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즉 이수와 왕난 그리고 밤이 떠들어도 뒤척이지조차 않던 쿤이니까 밤은 마음 가는 대로, 조심스럽게 쿤의 귓가로 손을 뻗었다. 깨우고 싶진 않았지만 만져보고 싶었다. 유독 눈에 띄는 색깔의 머리카락이라던가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같은 것들이. 현실성이 없어서 만든 처럼 생각되는 은청색 모발은 예상과는 달리 밤의 손끝을 흐르듯 피했다. 스쳐지나가는 촉감만으로도 곱디 고와서 온기를 머금은 피부에는 닿기도 전에 혼자 놀라 거리를 두었던 밤은 서슬에 흩어진 쿤의 머리카락에서 엿보이는 다른 색에 고개를 갸웃했다. 호기심으로 꽃물이 같은 바로 부분을 사르르 흘려보고있던 차에 저를 향해 열리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밤은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 중이던 이수와 왕난이 이쪽을 바라볼만큼 크게 놀라고 말았다.

 

, 일어나 계셨어요?”

 

..... 아니.., 그냥 깨워도 됐는데.”

 

대답이 그러냐 너는.. 밤이 때문에 30분은 먼저 나온 같던데 이제 일어나라.”

 

깨웠어 너흰.”

 

밤이 깨운게 잘못이 되냐..”

 

아직 시간이 남아서 일부러 깨웠어요. 많이 피곤하신 같아서요.”

 

피곤한 아니라 부작용 같은 건데 크게 신경 일은 아니야.”

 

무슨 부작용?!”

 

겨울잠보다 부작용이 훨씬 일인데 무슨 소리야?”

 

친구들의 과격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덮고 있던 더미에서 자신의 트렌치 코트를 찾아 걸친 쿤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머리를 묶었다.

 

죽는 아니니까. 애초에 그런 일이었으면 진즉에 병원에 끌려 갔겠지.”

 

죽는다고 해도 그런 심각한 일이면 진단서 제출하고 쉬시는 낫지 않을까요?”

 

.. 됐어. 이미 색이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금방 끝날거고 졸음도 참을 정도는 아니니까.”

 

?”

 

혼인색. 우리 쪽에서는 그냥 통과의례 같은 거야.”

 

수인들은 그들의 반신이라고 있는 동물의 피에 기인하는 특성을 어느정도 함께 지닌다. 수인의 동면이나 혼인색은 그러니까, 뱀의 특성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쿤의 말처럼 그게 병이라고는 없다. 보통은.

 

통과의례에 부작용이 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드물게 각성이 같이 일어나면서 나처럼 탈력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데.”

 

각성?”

 

속성이 여러 개가 되는건데 우리 집안은 아버지부터가 모양이라 말고도 몇명 있었다고 하더라고.”

 

분명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묶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능력있어 보이는 쪽으로 바뀐다는 신기한 일이다. 걱정이 가득한 친구들의 표정 때문인지 전에 없이 친절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밤은 걱정이 가시자마자 새로운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쿤씨. 혼인색이 뭐에요? 결혼이랑 관계가 있는 건가요?”

 

묻는 순서가 밤에게 밀렸을 같은 궁금했던 왕난도 눈을 빛냈다. 반짝이는 개의 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천진함을 이기기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게 되는 쿤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또한 둘의 통점인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가 쿤에게는 세상 최대의 의문이었다. 왕난의 경우야 유능한 형이 있으니 재능이 쪽에 치우쳐졌다 수라도 있겠는데 가업(?) 이어가야할 분명한 밤쪽은 확실히 신기했다. 분명 부모님으로부터도 별도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인이 됬다는 증거 같은 거야. 생식능력이 완전해 지면서 나처럼 색이 바뀌거나 특별한 문양 같은 나타나기도 . 우리 일족은 혼인색이 나타나야 진짜 어른으로 대우해주기 때문에 전엔 독립도 돼고 결혼도 금지야.”

 

잠깐만. 그럼 조금 전까진 완전 애기였다는 거네?”

 

뭐래. 어제 태어나서 바로 대학생이냐.”

 

우리 집에서는 스무살만 넘으면 어른이거든? 그러니까 작년부터 어른이었던 거지.”

 

지금 선배 대우 달라는 얘기냐?”

 

왕난이가 1 선배면 2 선배인 거니까 형님이라고 불러,

 

하아...”

 

2 정도면 사회에 나가서는 결코 많은 나이차도 아니건만, 기어코 대접을 받을 심산인지 당당하게 턱을 들고 버티고 사람의 뒤로 여전히 부담스러울만큼 천진한 눈빛의 밤이 이수와 왕난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마저도 선배 대우를 바란다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쿤의 눈앞에 당도한 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당장 독립 하시고 결혼도 하셔도 상관 없는 건가요?”

 

기본 요건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일에는 준비라는 필요하지 않을까, ?”

 

제가 도와드릴게요.”

 

?”

 

방금 쿤을 의문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는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밤의 얼굴에서는 태양처럼 찬란한 미소 떠날 줄을 몰랐다. 너무도 순수한 기쁨이 엿보여서 차마 태클을 생각도 하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손까지 마주 밤이 노래처럼 다음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 혼인색으로 바뀌는 건가요?”

 

글쎄.... 확실히는 모르지만 보통 이내로는 끝난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시간이 없네요?”

 

무슨 시간? , 아니다. 그건 내가 나중에 따로 설명해 테니까 슬슬 출발하자. 정외과는 인문 1동이던가?”

 

. 226 강의실이에요. 수업이니까 교재 소개만 하고 끝나지 않을까요?”

 

그럼 좋을텐데. 첫강부터 풀강이었어서. 시간 대비 생산성이 어떻다던가 하면서 말이야.”

 

경경과는 역시 효율 위주인걸까요.”

 

쓸만한 강의여야 효율도 투자가치도 있는거지. 우리 다녀올게. 이따 보자.”

 

나도 수업이라. 여튼 공간 맞으면 보자.”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강의 끝나면 밤이랑 같이 . 점심 맛있는 먹으러 가자. 보신도 .”

 

아직 서로의 시간표를 파악하기 전인지라 2 정도 지나기 전까지는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 구하는 것도 헷갈리겠지만 쿤은 같은 과인 왕난이 있으니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을 찾아다니는 수고는 많이 덜어낸 셈이다. 복수전공을 하게 되면서 동아리 방에 들릴 시간이 줄어든 아쉬울 수는 있어도 동아리 자체도 왕난의 손에 려오다시피 했으니까. 그래도 그가 복수전공을 하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 동아리 활동만이 아니라 강의시간이라던가 조별 과제의 회의시간 등에도 쿤을 만날 있게 것이다. 작년에 밤이 스스로와 싸우는 기분으로 전공 강의를 들은 것은 때를 위해서였나보다. 들을만한 의나 교수를 추천해 달라는 쿤의 부탁을 받던 순간, 밤의 지난 해는 전부 보상을 받았다. 점심 왕난과 쿤의 조합에 끼어들 근거도 생겼고. 인문관끼리는 붙어있어서 경영경제과인 쿤이 강의실의 위치를 모르는 같진 않았지만 밤을 따르는 듯한 기색에 왠지 밤은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강의를 들으면 좋을지를 물어봤던 것도, 밤에게 강의를 같이 듣자고 것도 쿤이 정치와교과의 수업을 들을 때만큼은 밤을 의지하고 있다는 확실히 느껴져서 그런 같았다. 비록 왕난의 성화에 이겨 사진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쿤은 의외로 카메라나 필름에 대해 박식했다. 사진을 찍는 취미는 없다면서도 렌즈나 카메라의 브랜드 특징 꿰고 있어서 오히려 원래부터 사진에 흥미를 가졌던 다른 친구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야할 정도였다. 당연히 동아리 활동으로 사진을 처음 시작한 밤이 쿤을 도울 같은 아예 없었다. 기껏해야 무거운 도와주거나 졸고 있을 어깨를 빌려주는 정도? 걸음쯤 뒤에서 밤의 뒤를 따르던 쿤은 인문 1동에는 처음 발을 디딘 건지 중앙 정원의 조경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제 움이 가지 곳곳에 연두색 점들이 찍혀있는 광경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 자신이 워낙에 특출난 지라 곁에 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같은 색이었던 푸른 속에 잠시 꽃잎 같은 것이 비췄나 싶은 순간 집요한 시선 때문인지 눈이 마주쳐버리자 밤은 멋쩍게 웃을 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2동이랑 거의 비슷하지 않나요?”

 

그건 그런데 돌아다니는 얼굴 들이 심상치 않아서. 조별과제 같은 하면 불꽃 튀겠는데?”

 

설마요. 다들 친절하시던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세계의 이면을 움직이는 시크릿 패밀리의 일원인 주제에 성선설의 독실한 신자인 밤의 사람 보는 눈에 대해서는 이미 해탈한 쿤이니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밤의 정체를 알아보고 알아서 설설 기어준 람들이나 곱상한 외모에 호감을 가지고 대해준 여학우들의 사심 가득한 호의를 선의로 보정하여 기억하는 것이리라. 대학 간판이 일류이니만큼 가닥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모인 곳에서 훗날을 염두에 기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어 보이건만.

 

같은 과에 정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지?”

 

계시긴 하지만 크게 신경쓰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애초에 학교 자체가 너무 쟁쟁한 집안의 자제분들 밖에 계셔서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FUG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모르죠. 여하튼 저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수업은 여전히 어렵지만요.”

 

“FUG 이미지와 네가 너무 달라서 정보를 믿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아닐까 싶은데.”

 

설마요. 저보다 쿤씨가 걱정인데요.”

 

? ?”

 

“.....쿤씨를 모르는 분들이 함부로 이야기하니까요.”

 

밤이 지상의 정보 조직이자 지하의 실권자인 FUG 유일한 후계라는 캠퍼스 내에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조직의 특성상 지상의 법과는 별개로 사람 한둘을 지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설마하면서도 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당장의 인간관계를 넓히고 싶은 생각이 없는 밤에게는 지금 정도가 지내기 좋았 말이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제약을 두지 않고 지내온 밤이지만, 가끔 욱하게 되는 일들은 보통 쿤과 관련된 소문을 듣게될 때였다. 어쩌면 작년의 입학생 중에 가장 화제가 인물은 밤이나 왕난이 아니라 쿤이었다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원소술사인 동시에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일가는 당연하게도 대부분 예체능 계열로 진학했고, 캠퍼스에서 목격되는 일도 연례 행사급. 때문에 경영경제 전공의 가문 입학생이 있다는 말에 신입생들은 그가 기형에 가까운 정도로 못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추측했었다. 헌데 예상과 달리 가문 연예인 누구 옆에 두어도 부족하지 않을 같은 미소년이 나타난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다. 그와 친구가 되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연결고리가 생길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붙어다니는 왕난과 밤이 그에게로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자 질투에 눈이 누군가의 소행인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건 쿤이꽃뱀이라는 골자였다. 수인이기까지 하니 딱이라고 킬킬대는 목소리에 친구인 밤이 먼저 울컥했지만 당시 튕겨져 나가는 밤의 어깨를 붙잡은 당사자인 쿤이었다.

 

들으라고 소리를 들은 것뿐이야.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평가하니까. 그게 싫어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역시나 아직까진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어쩔 없나보다 하고. 스스로 형제들의 명성을 이겨낼 때까진 감내해야할 몫이라고 말이다. 밤은 쿤에게 한번 반했지만 감내한다는 상처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신경쓰였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가갈 틈을 주지 않아서, 소문 속의 모습처럼 차라리 놓고 유혹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같았다. 실제로 밤은 지금보다 가까운 관계가 되길 원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밤의 마음이 어지럽도록 혼인색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쿤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읽을 없는 밤을 아직 피지않은 벚꽃색으로 흔들어 놓기까지 했다. 투명하게 푸른 햇빛 사이를 지날 때마다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가 푸르게 다시 개이는 모습은 충분히 요사스럽건만 쿤의 시선은 밤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런 옛날에 적응 했지. 너무 신경쓰지 , 그런 관종들한테.”

 

여전히 강경하시네요, 쿤씨는.”

 

요즘 세상에 정도는 욕도 아니야.”

 

하하…”

 

밤은 험한 말이라고는 입에 담지 않는 주의였지만 그렇다고 세태가 어떻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쿤이 그런 험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뿐. 쿤이 강한 언동을 보일 때마다 놀라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진실로 꽃이라 하더라도 온실 속에서 갖은 보호를 받으며 가녀리게 자라난 화초보다는 악천후와 싸우며 몸에 가시를 돋워낸 야생화에 가깝다는 것은 밤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밤의 소망은 그가 스스로 날을 세울 없게 지켜내는 일이었으니.

 

이쪽에 앉으세요. 교수님께서는 강의는 명쾌하게 하시는데 괴짜라서요.”

 

괴짜?”

 

다른 전공의 수업이니 순순히 안내자인 밤의 말에 따라서 그가 의자를 주는 자리에 앉는 쿤이 사랑스럽기만 밤이지만 밤이 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오자 실내가 술렁이는 둔감한 편인 밤에게도 똑똑히 느껴졌다. 그런 반응이 익숙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밤이 주는 이야기가 정말 신기하기 때문인지 쿤은 밤의 이외에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명 드리긴 힘든데아무튼 보시면 알아요.”

 

전공필수 과목이라 밤과 쿤도 어쩔수 없이 선택한정치외교와 화술 과목의 담당 교수는 성자인 밤이 저렇게 말하게 정도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강의실의 중간 ,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잠시, 의외로 조그만 유한성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밤에게 사심 가득한 안부를 묻던 목소리들마저 끊길만큼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밤의 옆자리에 앉은 쿤도 부러 무시할만큼 콧대 높은 정치교과 학생들의 반응이 신기해서 커피잔을 들고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교단에 오르는 단신의 교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커피잔을 탁에 소리나게 내려 놓은 창가에 앉은 학생들에게 경고 먹였다.

 

수업 듣고 바깥 구경이나 하려는 거죠? 창가에 앉은 분들은 시험 성적에서 단계가 내려가게 될테니 렇게 알고 심히 하세요.”

 

단지 수업인데 선택한 자리만 가지고 학점 운운하는 교수의 만행에 아연해짐과 동시에 밤이 굳이 쿤을 창가가 아닌 안쪽 자리로 인도한 이유에 대해서 뒤늦게 깨달은 쿤을 뒤로 하고 천재로 이름 높은 어린 교수는 시간이니 출석부터 부르겠다고 했다. 성적을 단계 낮출 대상들의 이름을 분명히 알아두기 위한 같아서 출결조차 찜찜하던 차였으나 이미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게로 아그니스?”

 

?”

 

복수 전공이라니 재수 없으니까 마이너스.”

 

교수님!”

 

그리고 적을 포섭해 왔으니 스물다섯번째 밤은 플러스.”

 

….”

 

교재따윈 강의계획서에 놨으니 알아서들 사서 보고.”

 

그러는 자기는 월반까지 천재 주제(?)! 보다도 사색이 덕분에 교수에게 따지고 타이밍은 놓쳤지만 보아하니 마이페이스인 교수가 항의를 한다고 해서 곧이 들어줄 같지도 않다. 성적이 높을 수록 좋은 당연하지만 복수전공이니 어차피 수석은 운명이다. 깨끗하게 수업은 죽여서 선방 하는 선에서 그치고 다른 과목을 공략하는 편이 좋을 같다. 생각을 정리하고 수업 내용에 집중해 보자면, 밤의 표현대로 강의 자체는 정연했다. 요점이 뭔지 쉽게 있었고 예시도 적절했다. 심하게 직설적인 표현과 시대상을 너무 반영한 탓에 교수의 사상이 그대로 주입되는 같은 느낌만 제외한다면. 90 강의에서마이너스경고를 받은 학생만 스무명에 달할만큼 예민한 성격도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다. 중에 모르고 창가에 앉았다가 봉변을 당한 수가 아홉이니까 학기가 끝날 쯤에 A+ 받은 학생이 남아있지 않을 같다. 아니, 유일하게플러스 받은 밤이 있었지. 수업 내내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보니 쪽도 쉽진 않겠다 싶긴 하지만 말이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사과부터 하는 밤이 맞은 강아지 같아서 쿤이 오히려 왕난이 말했던 맛있는 점심으로 밤을 달래야 했다. 사실 쿤은 교수의 태도에 그리 마음을 쓰고 있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게로!”

 

하지만 이건 달랐다. 쿤이 굳이 형제들과 다른 선택을 하게 이유. 캠퍼스 내에서는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명확하지도 않건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세단은 쿤과 밤의 앞에서 드래프트를 하며 멈춰섰고, 짙게 썬팅된 창이 내려가자 목소리가 이미 정답을 알려준 대로 선글라스를 옆으로 집어던진 에드안이 있었다. 타이어가 노면을 긁는 소리가 워낙에 시끄러웠으니 전필 강의를 마치고 터져나온 정치외교과 학생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리는 당연한 현상.

 

몸이 좋으면 쉬어야지 굳이 나온 거냐?”

 

좋은 아니라 졸린 거였거든요. …”

 

강의 끝나면 당장 들어와라. 성인이 되고 했으면 일찍일찍 들어와야지! 동아리 같은 거에 신경쓰지 말고!”

 

반대 거든요, 에드안 교수님. 그리고 댁은 인문관이 아니라 예술관에 가야하잖아? 게다가 학생들 했잖아요, 지금. 대체 교수는 어떻게 거에요? 뇌물 먹이고?”

 

지금 그런 중요하냐! 저녁은 무조건 나랑 먹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제가 왜요!”

 

연예인이 쉽게 무시를 당하는 귀족들의 교정이라 해도 소위클라스 존재하는 . 몰상식한 운전에 , 에드안의 등장에 초토화가 되었던 인문 1동은 그가 떠나고 뒤에도 술렁임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여성편력이 거의 기록감이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장년이 이른 현재까지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그는 당연하게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추파를 던질 기세인 그의 카사노바 기질이 지금까지 발휘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공개적으로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아들을 챙기다니 있을 없는 일이었다. 화가 제대로 같은 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왔던 것처럼 빠르게 차를 몰아 사라지는 아버지의 애마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쿤은 정신차린 밤의 위로가 아닌, 호탕하고 맑은 웃음 소리에 이성을 되찾았다. 돌아본 자리엔 수업 때까지만해도 굉장한 저기압이었던 교수가 박수까지 치면서 웃고 있었다. 진귀한 구경거리 였는지는 몰라도 그리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같은데 눈가에 눈물이 때까지 웃던 유한성은 한참만에야 진정이 같았다.

 

팔불출 에드안이라니.. 좋은 구경 했으니 마이너스는 없는 걸로 치죠. 언제든 거슬리면 깎을 거지만요. , 점심 맛있게 드세요, 학생. 저는 선약이 있어서. 언제라도 교수님과 점심을 함께 하고 싶다면 얘기하시고요.”

 

밤의 표정을 보면 그럴 리가 없어보이지만 교수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고 쿤의 학점도 당장은 원상복구 되었으니 해피엔딩인걸까? 시작부터 피곤한 이번 학기의 예감에 기쁜 소식에도 쿤은 잠시 마른 세수를 했다. 혼인색에 각성이 아니더라도 다음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어디서 쉬어야 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거 이름은 봄 꽃인데 여름에 연재하게 생겼네요.

이번 글은 소재부터 진행에 이르기까지 트친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나올 때 짚어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송이  (4) 2019.08.16
네 송이  (2) 2019.06.17
세 송이  (2) 2019.05.07
두 송이  (2) 2019.05.01
꽃망울  (2) 2019.04.08

꽃망울

신의 탑/봄 꽃

 

 

 

 

 

 

쿤씨, 일어나세요. 이제 도착했어요.”

 

기차가 종착역에 멈춰서자 밤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쿤을 깨웠다. 이제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 탓에 추위를 많이 타는 쿤은 제법 두께가 있는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에 은실 처럼 빛나는 청은발은 화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같은 색깔의 속눈썹이 열리면 밤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나타날 테고.

 

어디 아프신 아니죠?”

 

.. 깨우지 그랬어. 내내 불편했을텐데.”

 

잠깐인데 뭘요. 게다가 동면기가 있는 분들은 많이 주무시는 건강에 좋데요.”

 

이제 봄이잖아. 보통 이맘때엔 괜찮아졌는데 이상하게 해는 계속 졸리네.”

 

종착역이니 역무원들의 성화도 없어서 여유있게 각자의 짐을 챙겨 나오며 쿤은 작은 푸념을 어냈다. 동아리 친구들끼리 고즈넉이 다녀온 MT자리에서도 잘만 놀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진 이상하다면서 말이다.

 

그럼 정말로 어디 좋으신건…”

 

전혀. 설마 춘곤증 같은 건가?”

 

그런 거면 좋겠네요. 쿤씨는 굉장히 조용하고 귀엽게 주무시던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좋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쿤은 잠든 자신의 모습을 없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돌아오는 내내 눈호 제대로 밤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있을 터였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쿤이 졸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원래 쿤의 옆자리에 앉기로 했던 라크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보람이 있었다. 라크는 옆자리에 누가 앉든 자신의 비위를 맞춰줄 때까지 귀찮게 구는 성격이라 혹시라도 쿤이 몸이 좋아서 잠을 청하려 한다해도 가만 두질 않을 테니까, 밤이 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서 눈치껏 라크와 자리를 바꾼 것이다. 덕분에 이수에게서 좋아하는 바나나 스낵을 잔뜩 얻어먹은 라크도 불만이 없고, 조용히 인형처럼 잠든 쿤을 지켜볼 있었던 밤도 만족스러웠다. 밤도 친절한 성격과 중성적인 외모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라는 아우라를 풍기는 쿤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수인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에서도 수인이라면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쿤을 보여준다면 생각을 고쳐 먹지 않을까? 만년설이 자신을 다져 만들어진 얼음처럼 온통 눈부시게 빛나는 청량한 색채 가득 사람이었으니.

 

여어. 잤어, ? 내내 자던데?”

 

몰라. 졸려. 집에 가서 잘거야.”

 

? 어디..”

 

아픈 아니고, 열도 없어. 아까 밤도 내내 물어보더라.”

 

이수의 걱정을 잘라 놓으면서까지 심신의 건강을 어필한 쿤은 역에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는 친구들의 인사를 받아주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 싶었는지 이수와 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나도 이제 볼게. 이런 행사 기획하고 인솔 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수야.”

 

임원이 원래 그런거지.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개강 보자.”

 

그래. 밤도 수고해. 오늘 고마웠어.”

 

그런 걸로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빨리 오냐, 파란 거북이!”

 

아오, 악어 자식. 거북이가 아니라 뱀이라고 번을 말하냐, ?”

 

라크의 호칭은 전부거북이 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래 어떤 수인인지가 그리 중요한 같아 보이진 않아 보이건만 그는 아직 라크의 개도를 포기하지 않았나보다. 사는 곳도 가깝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니, 여기있는 다른 누구보다 라크의 거북이 소리를 많이 들어본 쿤일텐데도 잔소리를 쏟아놓는 보면 말이다.

 

..?’

 

라크 쫓아 몸을 돌리는 쿤의 머리카락 끝자락 쯤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는, 아니 이렇게 보니까 의외로 그와 어울리는 꽃의 빛깔을 이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하늘보다 맑은 푸른색 머리카락에 일찍 벚꽃잎이 내려앉기라도 했던 걸까? 워낙 찰나였으니 눈가에 햇빛이 어려 잘못 것이려나. 혹시나 싶었던 생각이 멋쩍어 괜히 뒷통수를 긁적인 이수는 여태 그의 곁을 지키던 밤을 내려보며 오늘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너도 이만 들어가야지. 수고했어, .”

 

이수씨야말로 수고하셨어요. 어서 들어가셔서 쉬세요.”

 

그래. 개강 하고 보자.”

 

 

-

 

 

친구들과 개강 보자고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결코 개강을 기다린 적은 없는데 약속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5 터울의 동생보다 못하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일어난 쿤은 여전히 잠에 취해 멍한 상태로 바로 위의 누나에 의해 욕실로 밀어넣어졌다. 이럴 때는 씻는 최고라는 그녀의 지론에는 동의하는 바였지만 지금 씻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아니라 지각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곱씹으면서.

 

, 동생님. 개강이라며? 이제 꿈나라 여행을 가서 어쩌냐?”

 

닥쳐. 백수 주제에.”

 

백수라니. 엄연히 평균 2 구독의 유튜버거든? 요즘 초딩들 장래희망 1순위의 유망 직종이라고.”

 

그럼 초딩들한테 가서 자랑해. 진짜 이렇게 잠이 깨지.”

 

“A.A. 아직도 옷도? 봐봐 아게로.”

 

당장 갈아 입을 거야. 뭐라고 하지 마.

 

아니, 머리카락. 염색 아니네?”

 

머리카락이 ?”

 

그간 자느라 미용실은 커녕 외출도 안했던 쿤이 염색을 했을 리가. 마리아의 말에 머리카락을 유심히 뜯어보던 하츨링도 뭔가 이상한 눈초리라 결국 쿤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눈앞까지 당겨 보았다. 그냥 때는 평소랑 같은 같은데 천천히 문지르자 각도에 따라 하늘색이 분홍빛으로 바뀌는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하고.

 

어디 아픈 아냐? 영양실조라던가? 요새 졸리다고 밥도 먹고 그랬잖아.”

 

뭐래. 때마다 깨워서 억지로 밥숟가락 쑤셔 넣은 누군데.”

 

원인을 모르면 큰일이잖아! 형이 태워줄게. 어서 병원 가자!”

 

무면허가 누굴 태워.. 됐어. 그거 아냐. 혼인색. 일이라고.”

 

뭐라고?!! 네가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 혼인색이야!”

 

이제 대학생이거든요, 망할 아버님. 성인 맞아요.”

 

밤은 가족이 많아서 좋겠다면서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정신없는 집안에 발자국이라도 들이고 보면 생각이 바뀔거다. 나이가 차면 나타나는 당연한 가지고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쿤은 당장의 지각을 면하기 위해 고데기도 포기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나중에 앞머리만 대충 어떻게 하고 오늘은 묶고 가는 상책일 같다. 이젠 신입생도 아니니까 깐깐하게 성적을 매기는 걸로 유명한 전공 교수의 수업에 지각했다가는 오로지 쿤의 손해다.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혼인색이 먹여 주는 것도 아닐텐데 그게 대수라고. 쿤의 형제가 몇인지를 생각하면 처음 있는 일도 아닐텐데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는 충격이라는 표정의 에드안을 지나쳐서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간 쿤은 늦은 만큼 준비로 분주했다. 아센시오 처럼 완전히 색이 바뀌거나 다른 형제들처럼 문신 같은 점이 생길 알았는데, 이만하면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괜찮은 같다가 자신의 혼인색에 대한 아게로 아그니스의 감상의 전부였다.

 

 

 

 

 

 

 

 

 

짜잔!

새겁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거죠...

트위터에서 트친분들로부터 소재를 얻은 수인+대학생 AU입니다.

Exceptional과 마찬가지로 내킬 때 그만큼씩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티스토리 에디터가 너무 바뀌어서 적응도 할 겸 일단 프롤로그 부분만 쓱쓱해서 올려봅니다.

나중에 조금 손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쓸 게 많아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분위기 캐치용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신의 탑 > 봄 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섯 송이  (4) 2019.08.16
네 송이  (2) 2019.06.17
세 송이  (2) 2019.05.07
두 송이  (2) 2019.05.01
한 송이  (2) 2019.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