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 - 기준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눈이 높은 남자였다. 자신의 기준이 높기에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탑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는 10가문의 일원으로 고고하면서도 단정한 그를 눈앞에 두면 태반은 자신의 초라함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을 만큼.
"....넌 왜 날 선택했어?"
"무슨 의미야?"
"난 네가 비올레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강하고 순수한 FUG의 슬레이어 후보. FUG란 탑 내에서는 반란군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존 권력의 전복에 매력을 느끼던가? 재기발랄한 탑의 젊은 인재로서 쿤도 그와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왕난은 짐작했었다. 결국 자하드의 손을 들어주게 될 자신 같은 약자가 아니라.
"내 선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쿤?"
"너는 왜 네 손으로 동료들을 다 떠나보내고 여기로 왔어?"
".....난 그냥 함께할 자격이 없었을 뿐이야."
"지킬 게 있었다는 뜻이네."
"......."
"나도 마찬가지야."
소중한 보석을 차마 내 손에는 낄 수 없는 우리니까 함께 끝까지 가보자.
7.27 - 상황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하는 눈조차 자신의 변명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아게로는 따져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동료들 중 자신과 유일하게 말이 통했던 이수는 대부분 아게로와 비슷한 결론을 내곤 했으므로 그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아게로 또한 비슷하게 결론지었을 터였다. 그러나 왜 지금의 이 상황이 네가 아닌 내게 벌어졌을까? 내가 네게 기댄 그 시간이 상황을 바꿀 틈을 하뇽하진 않았을까?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가정이 최악의 최악으로 향할 무렵, 지켜보던 하츠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게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지키지 못한 건 나다. 괜한 생각 하지마."
네가 밤을 선택했듯이 너를 선택한 건 우리니까. 하츠의 품에서도 꽉 막혀있는 것 같던 무언가의 응어리는 끝끝내 누그러지지 못했다. 아마 아게로가 눈을 감을 그 날까지 그럴 터였다.
7.28 - 살아가는 법
시대가 바뀌었어도 전쟁에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은 같다. 희생으로 포장될 많은 목숨 중에 하나였던 아게로는 포로의 신분이었고 가문에서 그를 구명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눈이 가려지고 포승에 묶인 채 소형 부유선에 올라탈 때만 해도 동료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자하드 군에게 고문당하다 죽는 것밖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착한 장소의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 가렸던 안대가 풀리고 다시 빛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병사들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상상과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자왕난?"
왕의 옷을 입은 옛 동료의 모습에 아게로는 현재의 상황은 상상 이상임을 인정해야했다. 해사한 웃음이 예전과 같은데 그의 복장이 주는 위화감은 본능적으로 아게로를 한 발 물러서게 했다. 친구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읽은 왕난은 뻗었던 손을 거둬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왕이 되었노라 고백하는 그의 태도는 약속 시간을 착각했다는 말 정도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예전과 달라진 게 없어서 아게로를 더욱 더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변했구나, 너."
"흠.... 그런가? 난 그냥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 했는데."
"왕이 되는 게?"
"너희의 적이 되는 거."
"자왕난."
"난 어차피 주인공이 아닌 거잖아?"
"........"
"쿤. 그냥 아주 잠시 동안만 내 곁에 있어줘. 아무 말 하지 말고."
여전히 스스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 같은 찬란한 미소에 오히려 아게로가 무너져 내릴 때에도 왕난은 한결같았다. 역시 10가문은 구속복을 입어도 태가 난다느니, 비올레와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느니. 망할 구속복 때문에 안아주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아게로도 혼자 목울대까지 차오른 감정을 삼켰다.
"주인공이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야."
주인공이 아니면 어때. 변화에 함께 휩쓸려 갈려나가더라도, 같은 편에 서 있을 수는 있는 거잖아?
"왜 넌... 넌 항상.."
"여기 있어야 너희를 살려줄 수 있잖아. 이야기의 마지막 장까지."
"......"
"난 괜찮아, 쿤. 말했잖아. 이게 내가 살아가는 법이라고."
7.29 - 사람들의 시선
탑의 주민들은 탑을 호령하던 10가문 중 처음의 다섯 손에 꼽히던 쿤 가문의 가주가 가장 처음 바뀐 것을 두고 의외라고들 이야기했다. 게다가 새로운 가주가 그들 키위 반 밖에 인되는 꼬마라는 사실에도. 물론 쿤의 새로운 가주, 쿤 란은 성장이 더딜 뿐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으니 겉모습만 보고 덤벼들었다가는 그가 왜 쿤의 가주가 될 수 있었는지를 몸으로 깨달을 뿐이다.
"자꾸 식사를 거르는 건 몸에 좋지 않아, A.A."
"손바닥만한 네 정원에 갇혀있는 것도 마찬거지야."
가주의 정원이 얼마나 넓은지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찰 소리였지만 탑 전체에 비한다면야 가주의 정원이라한들 겨우 손바닥 한 장 정도의 비율인 건 틀리지 않은 비유였다. 게다가 가주인 란의 주박으로 인해 아게로가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방과 그에 딸린 테라스가 전부였으니. 볼라이트가 비추는 테라스의 난간에 걸터앉아 먼 곳에 시선을 둔 란의 형제는 그야말로 요정 같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에 새하얀 가운 사이로 내려뜨린 마찬가지로 새하얀 다리만을 쿤의 궁에 둔 채로 무언가 닿을 때마다 가문의 문양을 그리는 투명한 벽을 짚어 확인하는 그의 모습에 란은 미간을 좁혔다.
"풀어주면 넌 또 네 옛 동료들을 찾아갈 테니까."
"그러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형제끼리 붙어 먹는다는 소문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난 사람들의 시선 따위가 두려운 게 아냐. 네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을 뿐이지."
"내 계략만 써먹고 이런 취급이라면 내 어머니나 마리아와 네가 다른 점이 뭘까?"
"난 그들 보다는 훨씬 더 널 아끼고 있어, A.A."
"......"
"부디 힘으로 널 꺽을 일은 없게 해 주면 좋겠군. 귀찮으니까."
창 밖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테니 란이 뻗어온 손은 아게로에게는 협박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 저 손이 자신을 움켜쥐는 날이 오고야 말겠지. 란의 인내심이라고 해 봐야 아버지인 에드안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이니.
7.30 - 케이크
"세상에!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쿤 가문은 생일 때 뭐하나요 그럼?"
"그럼 너 미역국은 알아? 무지개떡은?"
케이크라는 디저트를 먹어보지 않은 게 이렇게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누나와 사촌동생이 혀가 녹을 듯 달다기에 피해왔을 뿐인데 말이다. 단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타이밍에 경악스럽다는 반응이 여럿 겹쳐 이제는 이야기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게된 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들은 케이크를 사 온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니까 케이크 가게도 차릴 수 있을만큼 포켓에 포인트는 쌓여 있다니까?
"안 먹을 거라니까. 먹고 싶으면 먹고 싶은 사람이 사 먹겠지."
"자기 돈으로 케이크를 사 먹다니. 너 정말로 먹어본 적 없구나?"
"네가 네 팬클럽을 너무 갈취하는 거 아닐까, 엔도르시."
"쿤 가문엔 제빵사가 없는 것이냐? 짐은 이미 수만가지 종류의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안 먹는 선택을 한 거라고."
"하지만 쿤 씨, 조금만이라도 드셔보시면 좋을텐데요. 물론 달긴 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해지는 맛이라고요."
"그래! 어서 사러가자 거북이들!"
아무리봐도 이럴게까지 케이크에 집착할 이유가 없건만 훈련이 고되어 단 게 먹고싶은 가보다로 정리한 쿤은 서너개의 케이크 값을 쥐어주고 동료들을 벙커 밖으로 내보냈다. 그제서야 찾아온 침묵이 쿤에게는 퍽이나 고까운 것이라서 밀린 자료정리를 이제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해지는 맛이라.."
단 맛이 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적은 없지만 행복과 가까운 맛이라면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자신이 잡지 못한 행복은 지금 이 탑 어디쯤에 있을까? 딱 한 입만 먹어볼까 싶은 유혹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7.31 - 내 탓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사방에 적 밖에 없는 환경은 익숙했고, 때문에 오롯이 혼자 진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짊어질 밖에 도리가 없으니. 핑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도 쓸데없는 생각을 줄이는 일에 있어서도 이 편이 효과적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니, 이 정도로는 궁지라고도 할 수 없는 축일지도. 살아 남는 것만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란 육체의 긴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명료한 목표. 명료한 과정.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새파랗게 날이 선 단검을 꺼내들었다. 눈 앞의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면 이제 스스로에게 진 부채를 청산할 때다.
8.1 - 이야기
별을 쫓는 소녀와 그 소녀를 쫒는 소년, 소년을 시험하는 탑의 이야기. 비록 실제로 살아남은 것이 소녀와 소년이라해도 소년,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단지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로 기록되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널 그렇게 미워했던 것도 우리가 그렇게 싸웠던 것도 전부 기분니쁜 꿈이었지 싶어.”
소녀, 라헬의 공허한 고백에 밤도 고개를 끄덕였다. 꿈 같은 이야기였다. 밤에게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들과 수많은 시험을 거쳐 탑의 정상에 올랐던 것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탑의 마지막 문이 열리는 순간 남은 것은 비선별인원이라 불리던 자들이 전부. 생생한 추억만을 남긴 채 탑의 모든 것은 증발해 버렸다.
“저한테는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지만요.”
8.2 - 다짐
아리에. 탑에서 검을 다루는 자들의 정점에는 그 이름이 있었지만 검사이기 전에 도공을 꿈꿨던 하츠에게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들이 쓴다는 신묘한 검술을 보고 난 다음에야 하츠는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정도.
“너희를 도우면 짐은 무엇을 얻을 수 있지?”
그 대화를 엿듣게 된 건 하츠가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었지만, 두 사람이 하츠가 구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는 걸 알든 모르든 검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네 힘을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텐데?”
“넌 짐의 힘이 금방 소모되는 걸 알고 있다. 손쉽게 써먹고 버리겠다는 데 동조해줄 수는 없지.”
“어차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인데 조건이 많네. 어차피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고.”
“줄 수 있는 거라면 주긴 주겠다는 건가?”
마치 검날처럼 번뜩이는 새하얀 동공이 순간 하츠를 훑고 지나간 둣도 싶었다. 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눈 앞의 상대, 쿤이었다. 그가 관심을 둔 슬레이어 후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힘을 일순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으니.
“짐이 널 갖겠다면, 어찌할테냐?”
하츠와는 전연 다른 재질의 희고 고운 피부를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화이트는 유혹하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 그 유혹은 전연 통하질 않아서 그의 손을 쳐낸 쿤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지만.
“3일간 널 안겠다. 대신 이번 일에는 확실히 손을 빌려주지.”
“....대신 다른 사람은 모르게야.”
“그야 네게 달렸지. 짐은 곤란할 게 없느니라.”
하츠의 예상과 달리 순순히도 쿤이 관계를 허락한 건 그가 재고있는 절대적인 전력의 차이가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다. 변수를 줄이고 이쪽의 생존율을 높이겠다는 쿤의 전략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아직은 보탤 힘이 없는 하츠는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는 꼭 저 아리에를 넘어, 상황을 빌미로 쿤을 안은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 다짐하게 되었다.
8.3 - 혜택
쿤 아게로 아그니스의 인간관계 중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 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은 항상 미카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FUG가 기르는 또 다른 말이라는 것부터가 미카엘의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쿤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모를텐데, 이미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가치있다는 건 무슨 괴팍한 논리란 말인가? 라헬의 결정에 따라 잠시 행동을 함께할 뿐인 관계였지만 쓰다 버리기 아깝다 여길 정도의 인재가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는게 미카엘은 불편했다. 버리기로 결정했으면서 왜? 글쎄. 쿤 가문의 도련님이 미카엘의 구미에도 맞았기 때문에?
“아무튼 기분 더럽다는 뜻입니다, A.A.”
그러니 더욱 더 인상적인 배신으로 그 잘난 뇌리 한켠을 차지해주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냥 버려도 좋을 계탕을 죽인 것은 그의 욕망이 불러 일으킨 우발적 살인이었다는 뜻이다. 배신을 눈치채고 분노로 물든 그 고운 얼굴을 아직 감상할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목적을 달성한 미카엘은 희열에 찬 눈동자를 금새 눈꺼풀 밑으로 감추었다.
8.4 - 이상한 행복
수위... 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비공계
8.5 - 중요한 질문
오늘은 왕난의 인생 일대의 기념일임이 틀림 없었다. 왕난의 집에서 같이 시험공부를 하자는 수줍은 부탁을 죽마고우인 쿤이 흔쾌히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쿤의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어떤 놈을 만나러 가냐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지만 옆집 자하드 아저씨네라는 대답 직후에 끊어버리고는 전원까지 끄며 왕난에게 어서 가자고 했으니 분명 허락이겠지.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인연이지 지리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양가 덕분에 왕난과 쿤의 인연은 기억이 시작될 무렵과 거의 동시였지만, 왕난이 쿤을 친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왕난이 아니더라도 그간 쿤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았다. 묘하게도 이상 친구들보다 동성 친구들에게 좀 더 인기가 있는 건 여자아이들이 그의 성격을 알면 많이들 돌아서기 때문이려나?
"야, 카페 가서 공부하자. 너희 집 앞에 우리 아버지가 서 있을지도 몰라."
"그래야 하는 거야?"
"공부는 어디서 해도 상관 없잖아."
"아, 뭐, 그렇긴 하지?"
공부도 공부였지만 왕난의 머릿 속을 어지럽히는 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집에 있는 왕난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아까의 통화를 미루어 보면 이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쿤의 아버지는 아들의 귀가가 늦는 걸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으니. 게다가 바로 옆집이니 쿤의 말처럼 왕난의 집 앞을 지키고 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 다 집에 들어가야하니까 늦든 빠르든 걸리는 건 같지 않을까? 이미 범인도 알고 있는 마당에 또 왕난만 잔소리를 듣게 되는 건가? 그보다 기껏 집이 비는 날에 쿤이 좋아할만한 선물까지 사 둔 건 어쩌냔 말이다. 오늘에야말로 고백을 해 볼 참이었는데!
"대답이 왜 그래. 나희 집에 맛있는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카페는 내가 쏠게. 물어볼 거 있음 물어봐. 다 가르쳐 줄테니까."
쿤은 성적이 좋은 편이니 공부 이야기겠지만 뭐든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왕난의 머리 속을 채운 질문은 딱 하나였다. 왕난을 끌고 카페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다 대고 눈을 질끈 감은 왕난이 사두를 뗐다.
"저기 쿤, 이거 아주 중요한 질문인데.."
"도착해서 가르쳐 줄게."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왕난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걸음을 멈춘 쿤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더운 날씨에 왕난의 얼굴도 쿤의 귀끝도 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