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10.26 - 11.5

신의 탑/하루 글감







10.26 - 핑계

"제대로 된 핑계를 대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사실은 아게로가 어떤 대답을 하든 들어줄 생각이 없었을 것일텐데 천연덕스럽게 그런 충고를 건네며 에드안은 어린 아들을 안아올렸다. 아직은 아버지의 반도 되지 않는 키의 꼬마는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가 영 고깝지 않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를 뿌리친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아게로가 수업을 몇 번 빼먹었다고 해서 직접 훈계할 만큼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갑자기 아게로에게 특혜를 베풀기 시작한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린 아이에게 쉽지 않은 일인지라 꺼림찍한 기분 마저도 풀어놓지 못할 뿐이지.

"이 아버지가 싫으냐?"
"그럴 리가..."
"당연한 일이지. 그래, 그 감정을 잊지 말거라."









10.27 - 괜찮은 척

"쿤!"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수는 바쁜 걸음으로 쿤의 뒤를 쫓았다. 쿤은 괜찮은 척의 달인이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때 바로 손을 쓰지 않으면 그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었다. 밤의 동료들 중에서는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축인 쿤이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바로 그를 챙겨줘야 한다고 믿었다. 빠른 회복력이 다가설 기회를 묻어버리기 전에,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을 괜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10.28 - 비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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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 소중하다

"가장 소중하다는 건 그 다음에 비해 얼마나 더 소중한 것일까."

무게가 무거운 질문이었다. 짙게 퍼져가는 불안감. 설상가상으로 지금 밤의 곁에는 위기를 헤쳐나갈 묘안을 제시해 주었던 쿤도 없었다. 내키지 않아하는 그의 등을 떠민게 밤이었다. 그는 밤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 그의 고민거리가 먼저 해결되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생긴 부재가 마음에 걸렸다. 왜 자신은 같이 가 주겠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쿤이 그러했듯 자신도 그의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괜찮다는 말을 그리 쉽게 믿을 정도라면, 별 의미 없는 말이었나?"
"쿤씨를 어떻게 한 겁니까."
"......"
"돌려주세요, 탑의 왕!"









10.30 - 용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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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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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좋은 점

Q. 비선별 인원과 함께 여행해서 좋은 점은?

A1. 드물기에 가치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고집이 세서 피곤할 때도 있긴 하지만.

A2. 그 녀석은 좋은 부하이지 사냥감이다.

A3. 그냥 얼굴이 취향이야.



Q. 자하드의 공주와 함께 여행해서 좋은 점은?

A1. 글쎄. 별로 공주님처럼 굴질 않아서.

A2. 둘 중에 누굴 말하는 거야?

A3. 음................ 빠른 이동수단(=봉봉) 아닐까요?
(아름다운 공주님과 함께하는 일이면 뭐든 좋다고 해야지!!)



Q. 10가문의 일원과 함께 여행해서 좋은 점은? - 쿤의 경우

A1. 저는 정말 여러가지로 도움 받고 있어요. 다 말씀드리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A2. 바나나!

A3. 뭐니뭐니해도 풍족한 물자 아니겠어.




Q. 10가문의 일원과 함께 여행해서 좋은 점은? - 란의 경우

A1. 괜찮은 라이벌이 있다는 거?

A2. 든든한 친구라고 생각은 하는데......

A3. 월급!









11.2 -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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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 실수

너무나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인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한성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자신이 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표류하는 부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생명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실수 한번에 이리 허망한 끝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아니 따지고 보면 한성의 실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탑의 변화를 위해 아예 탑을 무너뜨릴 괴물을 끌어들였고, 그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단체에 몸을 담았으며, 또 다시 마음이 쓰일 인연을 만들고 말았으니.

"한성아!!"

제게 오시면 안 됩니다, 에반켈님. 그 목소리는 의미를 전달할만한 힘 없이 흩어졌고, 그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닫혀갔다. 한성을 일컬어 늘 부하라 했지만 그녀의 유일한 부하이니만큼 에반켈의 심중에서 한성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 지는 한성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이미저도 실수일까나?

'아니면... 이기적인 제 본심일까요.'

그녀가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자신이 그녀의 끝을 보진 않아 된다는 안도로 삶을 마치게 되었으니.









11.4 - 중간

혹자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들 말했지만 이수의 팀에는 중간을 선택할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넨 잠깐 빠져 있어."

엔도르시의 이야기를 듣고도 죄다 무기를 뽑아들었으니 말이다. 팀원들의 뜻이 그러할진데 팀 리더가 혼자 살겠다고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이수가 그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수가 그들에게 의지했던 연고로.

"에고에고. 또 신해어 싸움에 등 터지겠군."

자하드의 공주들이란 선별인원들을 내탑에서는 그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건만, 수시로 싸워대니 소시민인 이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만한 민폐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첫 걸음부터 그들은 탑에 몰아칠 폭풍에 올라탄 것을.








11.5 - 사실

사실 밤 스스로도 자신의 정의가 모순 투성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희생한다해서 모두를 지킬 수 없으며, 밤이 원하는 세상이 다른 누군가는 원하지 않는 미래라는 것도. 그렇기에 소중한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지키는 것으로 기조를 바꾼 것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여러 법칙들은 밤에게 의문을 남겼다. 밤이 곁에 둔 자들이라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싸워왔는데 어째서 그는 폭군이라 불리는가? 어째서 반대편에 선 자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가? 자하드의 정의라 함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모든 것의 탑의 위에 있다기에 밤은 여전히 승탑 중이지만 깊어진 의문은 어떤 침전물을 남겼다. 과연 자신은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탑의 다음 폭군인가.













지금까지 하루 글감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저는 완성된 글이 아닌 기분이라 단문 연성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스스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어서 도전한 하루 글감이었습니다만, 자기복제가 더 심각해진 기분이 들어서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숙제처럼 느끼다보니 연재물에 소홀해지는 경향도 있었고요.
처음에 장르를 파면서 잡아둔 연재물 구상이 세 개였는데 다행히 하나는 이미 마쳤고 두번째도 거의 끝나갑니다.
세번째도 공개할지는 아직 결정을 못했지만 앞으로는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게 기정 사실이라 가끔씩 단편이나 들고 오는 방향이 될 것 같습니다.
원작도 아직 휴재 중이고 한데 여기까지 부족한 글을 읽으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긴 글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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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10.16 - 25

신의 탑/하루 글감








10.16 - 눈물

밤은 부은 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부러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동료의 태반을 잃은 험난한 전투였다. 상처뿐인 승리와 오히려 더 커진 상실감에 살아남은 이들도 비통함에 빠져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밤의 상태를 살피러 와 줬을 법도 한데 아무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을 테니까. 거울 속에 비친 밤의 몰골도 썩 괜찮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남은 동료들을 위해 먼저 일어나 보이기로 마음 먹은 밤이 첫 발을 내딛었다. 같이 아침을 먹자는 밤의 말에 만나는 누구든 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밤 역시도 그들을 마주 안을 때마다 울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감정이 희석되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괴로운 의식의 마지막 순간. 밤은 닫혀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좀 괜찮으세요, 쿤씨?"
"응."

밤의 동료들 중 유일하게 쿤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간의 여정에서도 무슨 일이든 담담하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였던 쿤이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지긴 했다. 괜찮다 했어도 수척해진 듯한 옆 얼굴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지난 밤에 자리에 누운 적도 없는 것처럼 침대가 단정했다.

"...주무시긴 한건가요?"
"응."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세요. 아침 드시러 오세요."
"그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먼저 간 사람들의 유일한 흔적이 살아남은 자신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탈력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쿤을 밑으로 끌어 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슬픔이란 터져나오는 눈물이나 가슴을 찢어놓는 고통이 아니라 극한의 허무와 무력감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조금 편해진다고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자신의 선택인데 고작 울음 한번으로 털어낼 수 있을 리가.








10.17 - 농담

"아버지가 머리 묶어 줄까?"

아게로는 방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그 자리에서 수십번을 곱씹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온 김에라고 쳐도 누이나 사촌동생이 아닌 아들인 자신을 찾아온 것도 신기한 마당에 손수 머리를 묶어 주겠다니. 농담이라 쳐도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쿤 에드안이 자신의 자식들과 농담이라니, 아무렴. 차라리 머리를 묶어주는 척 하다가 아게로의 머리를 뽑아버릴 속셈이라 보는 편이 훨씬 신빙성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아게로가 넋이 나가버린 것을 긍정의 침묵으로 받아들인건지 에드안은 손끝을 갈퀴빗삼아 아게로의 머리카락을 모아 쥐었다. 이래뵈도 자신의 장발을 정리하는 건 스스로라는 가주의 여상한 대화는 아게로를 점점 더 혼돈으로 몰고갔건만.

"너는 정말 나를 닮았구나."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는 의미가 없었을지라도 그 한 문장만큼은 분명히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거울면으로 마주한 시선이 아게로가 익히 아는 가주의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끈을 리본형태로 마무리 지으며 예상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꾸나, 아게로."










10.18 - 엇갈리다

"......."

세상에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가끔 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마지막 문을 열기 전, 그 앞에서 오랜 친구를 맞는 미소로 그들을 맞는 왕난을 보며 쿤은 그리 느꼈다. 수많은 엇갈림이 우릴 이 곳으로 이끌었구나, 하고. 그 엇갈림의 이름이 운명이었구나, 라고.









10.19 - 에너지

에반이 유리 공주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하는 질문이 있다. 대체 그녀에게서 어떤 '길'을 보았기에 그녀를 떠나지 않는 것이냐고. 가히 파괴왕이라고 불러도 좋을법한 하 유리 자하드를 두둔할 마음 같은 건 에반도 일절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다. 여하튼 에반은 믿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다른 자하드의 공주라는 사실만큼은.










10.20 - 모든 순간

"그거 알아, 유제? 실패로부터 무언갈 배우지 않으면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렇군요."
"이번엔 반드시 가람의 마음을 돌려놓겠어!"
"2487632번만에 깨달으셨군요. 그래서 뭐가 달라진 거죠?"
"옷을 입었지! 가람은 나의 야성미가 부담스러웠던거야."

우렉이 기억하지 못할 뿐 뭔가 걸치고 갔던 적도 있었으니 그것이 주요한 원인이진 않겠으나 어차피 그는 유제의 조언이 먹히지 않을 사내다. 죽음의 층에서 또 다른 비선별 인원과 가람을 만난 이후로 어떤 희망이 생긴 것인지 우렉은 줄기차게 그녀를 찾아갔지만, 대체 그가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람은 여전히 매몰찼다. 오늘도 실패의 눈물을 삼키며, 아니 질질 울면서 돌아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이런 남자가 현재 탑 최강의 사나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자하드의 공주가 하는 말도 듣지 않는 분께서 제 조언을 귀담아 들으시진 않겠지만... 그 분이 원하는 일을 해 줄 게 아니라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조건이 붙어있는 연애를 넌 진짜라고 생각해? 목적을 위해서 감정을 죽이는 게 아니라?"
"......생각이 있긴 하시군요."
"그리고 난 그런 녀석이 있어서 탑이 엉망이라고도 생각 안 해."

우렉이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자하드는 탑의 왕이었다. 우렉은 그 순간에도 탑이 흥미롭고 신기했기에 시간을 들여 탑을 올랐던 것이고. 완벽한 세계란 없다. 탑 밖도 그러했고 여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선택이 세계의 모습을 만들 뿐. 그렇기에 세계를 바꾸려는 선택을 한 가람도 존중하지만 각자의 선택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우렉도 존중 받고 싶었다. 우렉이 모든 순간의 그녀를 사랑하듯이.










10.21 - 연휴 첫날

다른 사람들은 연휴라고 하면 어딘가로 놀러갈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아게로는 예외였다. 식구가 많다보니 챙겨야할 집안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휴 첫 날부터 아직 고3인 막내동생의 과외 명령이 떨어졌다. 이대로면 그 놈의 귀차니즘 때문이 대학 진학을 못할 위기라는데 듣다보면 기가 차는 이야기였다. 아니, 귀찮다고 누워만 있는 그 버릇을 진즉에 고쳐놓던가 그러질 못하겠으면 아예 다른 진로를 찾게 했어야지 왜 이제와서 공부를 시키려 난리를 치냔 말이다. 사회초년생한테 이 연휴가 얼마나 귀한데! 반면 형의 첫 연휴를 빼앗은 막내는 아게로를 보고도 손 한번 들었다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뭐, 란 치고는 굉장한 성의의 표현이긴 하지.

"일어나. 너 공부시키라잖아."
"하기 싫잖아. 너도 누워."
"야."
"이번 시험은 읽어보면 되잖아."
"읽기만 하지 말고 문제도 풀고 답안지도 써."
"귀찮게..."
"란."
"하면 뭐 해줄건데."
"잔소리 안 들으면 됐지 내가 또 뭘 해줘."

푸른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새하얀 얼굴. 똑같은 색에 생긴것도 비슷한데 아게로는 거울 속의 란과는 전혀 다르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귀찮은 것도 잊게 될만큼.

"밥이라도 사 준다거나 그런 거 없어? 어차피 과외비 받을 거잖아."
"그쯤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 평균 70점은 분식, 80점은 백반, 90점은 비싼 거."
"100점은?"
"그럼 너 먹고 싶은 거."
"콜."
"어후. 다 큰 녀석이랑 내가 뭐 하는 거람."

아직 다 안 컸는데. 그 얘기를 입 밖에 냈다가 기어코 한 대 맞은 란이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시간이 그는 좋았다. 이제 또 이런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한번 더 힘 내 봐야지.










10.22 - 심심하다

유독 심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부유선을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라크와 어울려 줄 인물이 없었다. 밤과 하츠는 수련을 한다고 하고, 이수는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친구들의 보고를 모으고 필요한 부분을 다시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엔도르시와 아낙은 이미 부유선을 탈출해 쇼핑을 나갔고, 쿤 마저도 자리를 비웠다. 그 동안 모아두었던 바나나는 금방 동이 났고 사냥감이 없는 수련은 마음에 차지 않았던 라크는 결국 매드쇼커를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자신도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엔도르시나 아낙을 찾아가봤자 괴팍한 공주들의 등쌀에 아무것도 못할테니 파란 거북이를 찾아내야겠다. 스스로에게 주는 미션 설정이 끝나자 씩씩하게 꼬리를 흔들며 라크는 출발했다. 찾아내면 오늘 먹은 만큼의 바나나부터 받아내야지!












10.23 - 영향

10가문의 가주들처럼 아주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온 이들은 예지와도 같은 예견을 할 수 있다고들 한다. 에드안도 그러했다. 그는 한 눈에, 드디어 자신에게 닿을 도전자를 알아봤다. 적당한 계기와 힘을 기르는 동안에 죽지 않을 힘. 그는 아게로가 그것을 인식하든 아니든 꼭 주어야 했던 모든 것을 쥐어주고 풀어놓았다. 에드안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소중한 기회를 그러다 놓치는 것이 아니냐 물었지만 에드안은 그들의 걱정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손 내밀면 언제든 쥘 수 있는 아이템 같은 건 그리 아깝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닿지 못한다면 에드안이 잘못 본 것일 뿐이고, 기어코 그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두 팔 벌려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아게로는 이미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의 시선을 느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체득하고 있을테니.














10.24 - 고독

제왕이란 가장 고독한 자리라 했던가. 옛 친우의 선전포고를 전해듣고도 탑의 왕은 감정의 변화를 일절 보이지 않았다. 10가주라는 신분으로 곁에 머문 자들이라 한들 마음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걸 왕은 모르지 않았다. 탑의 새 역사를 쓰던 시절의 치기어린 우정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만큼 퇴색되었는데 그 옛날의 약속이라고 영원할 리가. 꿈을 꾸듯 첫사랑까지 버리며 쌓아올린 이상이 이제 슬슬 현실 앞에 무너져 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념으로 꿈을 지킨 탑의 마지막 왕. 침몰하는 쪽이 결정되었다해도 지금 포기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최후의 수호자는 탑의 왕, 자하드 밖에 남지 않을 테지.











10.25 - 빈 방

비어있다는 건 굳이 불을 밝혀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쿤은 자신이 열어젖힌 문틈이 만든 빛 자국을 지우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곧게 뻗은 문 틈의 흔적을 몸으로 지우면 빈 방은 완연한 어둠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되었다. 아무도 없다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쿤은 이대로가 좋았다. 이미 비어있기에 배신할 것도 배신 당할 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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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하루 글감








10.6 - 화요일

"왜 한 것도 없는데 화요일이야!!!"

보통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기한까지 일을 미루고 보는 한량이지만 과제하느라 밤을 샌 덕에 눈 밑이 시꺼먼 공대생이라는 점이 자취방에서 방금 박 십이수를 발굴한 참인 쿤의 동정을 샀다. 일단 급한대로 편의점제 커피와 비타민을 사서 쥐어주고 밥 먹었냐 물어보니 당연하게도 아직이란다. 그 와중에도 과제가 어쩌고를 중얼거리는 게 절로 혀를 차게 만들었다.

"공강 언제야. 점심 사줄게."

쿤이라고 과제의 쓰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수의 노력과 자신의 노력이 조금 다르다는 것쯤은 진즉에 파악하고도 남았다. 이수와 같은 사람들이 가진 올곧음은 쿤과 같은 배경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입에발린 말을 하는 주변인을 제치고 이수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항상 쿤의 이목을 끌었다. 어쩌면 쿤의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값어치 있는 사람이 바로 십이수일지도.







10.7 - 소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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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 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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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 별

눈을 감고 과거를 돌아보았다. 자신은 스물다섯번째 밤이라는 아이의 별이었으나 지금은 혼자 남았다. 어떠한 재능도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은, 그리하여 더러운 것을 묻혀가며 길을 여는 방법 조차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리도 죄가 될 일이던가? 세가지 부탁을 들어 주겠다는 하얀 악마의 말에 라헬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전 모든 사람들의 별이 되고 싶어요."











10.10 - 방치

눈을 감는 순간이 되어서야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타인의 마음을 위해서만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소중한 것들은 전부 떠나가게 두었다. 그들이 날개를 펼칠 때 자신이 그에 방해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그 옛날의 마리아도, 스물다섯번째 밤이라는 소년과 자신의 버팀목이었던 라크, 여정을 함께 했던 다른 동료들마저도. 나름의 배려 끝에 방치되었던 자신의 마음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변혁이라 믿었던 폭풍이 탑을 무너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









10.11 - 백 년

시간이 곧 힘의 척도라는 건 아니지만 살아온 세월만큼의 경험치가 힘이 될 때는 분명 있는 법이다. 그러니 에드안이 보기에 어린 아들의 행동이 어리석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한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방법이 아니지만 더 일이 잘못되기 전에 교정을 해 두기로 생각한 것 역시.

"예상보다 일찍 이 곳에 닿기는 했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지."

만이 넘는 계절을 지나온 에드안에게 있어서 백 년이란 그리 길지 읺은 세월이나 그조차 지내지보지 않은 아게로에게는 까마득한 이야기다. 그 때를 넘길 때까지만 자신에게 사사받을 것을 제안하며 아들 일행의 앞에 나타난 에드안 덕에 선별인원 무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 역시 앞으로 나가기 위해 무찔러야하는 적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아량을 베풀다니. 하지만 무리의 결정을 재촉하는 방법을 그는 이미 꿰고 있었다.

"이리 오렴, 아게로."









10.12 -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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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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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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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 판단

FUG의 슬레이어, 쥬 비올레 그레이스. 사람들은 밤의 일행은 그가 있기 때문에 비올레의 팀이라 일컬었다. 슬레이어란 FUG의 신이자 탑의 악마이므로 밤의 동료들은 악마의 하수인쯤 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자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구심점이 비올레라 한들 판단을 내리는 건 다른 누군가의 몫이었다. 그들이 진정 악마라면 허수아비 왕이 악한 것인가,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손이 더 악한 것인가? 슬레이어라는 이름과 힘이 어쩌다보니 진짜 악마의 손에 굴러떨어진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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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 진부한 일상

수위 비공개








9.27 - 바쁘다

"그러게 바쁠수록 몸관리를 더 잘해야 한다니까."

제자도 하나 둘 늘어가니 챙기기 어렵건만 졸지에 제자의 친구들까지 챙기게 생겼다. 마스체니 공주와의 결전 후의 싱처는 어느정도 회복되었다지만 팔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진 진성에게는 수족이 필요했고, 설상가상으로 자하드 군과 FUG의 전면전 마저 시작된 국면. 협조적인 장로들이 진성의 은신처를 찾아낼 때까지 한시적으로 일행의 보호자가 된 진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환자한테 그런 훈수를.."
"당장은 네가 환자지. 어떻게 고친거냐, 이 팔."
"방법이 뭐가 중요해. 당장 써먹어야 하니까 고쳐준거지."

조금은 적응이 된 것 같았는데 망가진 팔을 고치는데 예상보다 많은 힘이 쓰인건지 잊고있던 열기가 심장을 녹일듯 차올랐다고 생각되는 순간, 까무룩히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덕분에 치료하던 환자와 자리를 바꾼 쿤은 턱하니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는 손에 괜히 짜증을 냈다. 엄연히 자신의 실수였지만 당장은 자신보다 진성의 힘이 더 필요했으므로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았다해도 시도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치료비는 제대로 낼 테니까 걱정 말아라, 꼬맹이. 넌 그냥 쉬고 있어."

수적으로도 열세인데 안팎으로 적이 있는 비올레를 보좌한다는 건 선별인원들에게는 버거운 일이다. 길잡이인 화련이 있긴 하지만 그녀의 비협조적인 평소 태도를 생각해 보자면 동료들의 길안내를 맡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이쪽. 쿤의 실수는 연 가문의 불꽃을 잘못 다루어 발생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피로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탓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그 덕을 본 진성의 역할은 그가 마음놓고 한숨 잘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만드는 것이려나.

"푹 자고 일어나도록 해."












9.28 - 커다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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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 - 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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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 - 돌

"파란 거북이!"

쿤의 일상에는 항상 그렇듯 짧은 휴식을 깨우는 거친 목소리가 있었다. 목소리 자체의 느낌이 그럴 뿐 잔뜩 신이 나 있는 것이 분명한 악어가 짧은 다리로 부산스레 뛰어오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한참을 찾았는데 어디 있었던 거냐!"
"계속 여기 있었는데 무슨 소리야. 네가 못 찾은 거지."
"이 몸이 굉장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봤자 또 애들이나 좋아할법한 간식이거나 괴상하게 생긴 B급 아이템일 것을. 다 알지만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의는 그 뒤의 더 귀찮은 일을 막기 위함이다. 쿤이 순순히 따라나섰다는 데에 더 신이난 라크가 오늘의 발견에 대해 떠드는 걸 쿤은 별스럽지 않게 내려다보았다. 항상 한결같음이 그가 다루는 돌과 같은 존재. 네이티브 원이라는 그의 정체만큼이나 무궁한 일관성이 쿤은 싫으면서도 좋았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신과 밤은 어느 순간 눈을 감더라도 라크만큼은 언제까지나 탑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그가 풍화되지 않는 금강석과 같은 존재라면 필히 그리 되었으면 싶은.












10.1 - 우연

우연히. 아주 우연히 스쳐간 뒷 모습에 밤은 그의 흔적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분명 낯이 익은 자였는데 곰곰히 생각해봐도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겠지만 알싸한 감각이 코끝부터 번져왔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듯한 그리움. 밤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아득했다. 그룰 아껴주는 사람이 이주 많았던 그런 곳이 있었던 것 같은데.









10.2 - 가능하다

"그 비선별인원이 왕을 넘어서는 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가능하지. 내가 어버지를 넘어선 것과 뭐가 다르겠어?"

같은 논리가 통할 리 없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같은가 싶기도 해서 란은 하던대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걱정도 당사자가 듣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굳이 도박을 하고싶다고 하니 판돈을 거는 것도 마음대로 하라 해야지.

"가문의 모두가 널 인정한 게 아니야."
"쿤 가문 같은 건 상관 없어. 쿤 아게로 아그니스만 돕는다면 충분해."
"......."
"란. 세번째 쿤의 가주가 되어주겠어?"











10.3 - 시시콜콜

손톱을 예쁘게 다듬고 꾸며주는 가게가 있다는 말에 엔도르시는 냉큼 아낙을 끌고 네일숍으로 향했다. 이어지는 싸움에서의 승리만이 아니라 외모를 가꾸는 것에도 꾸준히 신경을 썼던 그녀이기에 이런 반응이 신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 것 안해도 자주 부러지는 손톱이 자하드의 공주의 것이라고 해서 다를 리가. 비싼 돈을 둘인 네일이 금방 망가졌다며 온갖 짜증을 낼 게 눈에 선하다만 말리는 건 소용 없었으리라. 먹을 것과 소모품에 가까운 니들과 투창의 보충, 그리고 정보를 모을 겸 거리를 잠시 떠돌더보면 시간은 금방이다. 일행이 많아지니 시간이 더더욱 빠르게 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 저녁 걱정을 하고 있자니 옆을 걷던 쿤이 정말 가장 같다며 자식이 몇인지를 물었다. 일행 모두가 이수의 자식들이라면 제일 말 안 듣는 아들은 분명 쿤일텐데. 그래도 오랜만에 맛보는 시시콜콜한 일상의 맛이 가장의 무게보다도 달디 달아서 이수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가장이라 치지 뭐.










10.4 -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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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 예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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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 - 기념

축하해. 오늘만 해도 십 수번은 들은 인사다. 결혼 소식을 알린 이래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쑥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답하면 짖궂은 동료 몇몇은 총각파티 이야기를 꺼냈다. 조만간에 약속이 집힐듯한 분위기였다. 조만간 보자는 인사에 애매한 웃음으로 일괄하던 밤은 혼자가 되자 가면을 벗듯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포켓에서 라크의 이름을 찾아두긴 했지만 밤은 그에게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릴지 말지에 대해서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라헬이 밤을 떠난 바로 다음 날에 밤이 시험의 층 동료들과 리크, 그리고 쿤을 만났던 것처럼 라헬이 돌아온 바로 다음 날에 밤은 쿤의 실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둘이 딱 재회 1년만에 식을 올리게 되었으니, 밤의 결혼식이자 앞으로 결혼기념일이 될 날짜는 쿤을 찾다 지침 그의 지인들이 기일 삼고 있는 날이기도 할 것이다. 거의 1년을 채워가지만 여전히 쿤의 행방을 쫓고 있는 라크가 밤을 축하해 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설령 라크가 괜찮다 해도 셋 중에 자신만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밤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마 이 기분도 밤의 기념일마다 찾아오겠지.








9.17 - 느긋함

이번엔 꼭 다른 일 말고 쉬라고 동료들의 부탁을 들은채도 하지 않았더니 등대를 압수당하는 극단적인 처지에 놓였던 쿤은 간신히 동료들의 잎에서 기능의 대부분을 한시적으로 잠근 후에야 등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10가문의 육체는 튼튼해서 별 문제 없다고 몇번이나 해명했지만 같은 10가문, 그것도 랭커의 힘이 몸 속에서 충돌한 여파로 두어번 쓰러지고 나니 쿤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하튼 억지로 맞이하게 된 여유지만 정말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걱정 없이 푹 쉬는 게 차선이라 실로 오랜만에 쿤은 자신의 개인 벙커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것을 찾았다. 간접조명밖에 없어 실내는 아두운 편이었지만 농도 짙은 신수의 수조가 곳곳에 자리해 있어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자주 관리할 수가 없으니 고가의 신해어는 쿤의 궁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지만 무리지어 유영하는 신해어의 무리들이 오랜만에 찾아온 쿤을 반겨주었다. 물빛이 아롱지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쿤은 느긋하게 이 시간을 즐겼다. 몸의 피로를 풀고, 이어 향긋한 차로 마음을 달래야지.






9.18 - 옳은 일

"왕은 탑 전체를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공존을 택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입으로 자기 자랑을 한다는 게 흠결이다만 글자 그대로 왕인 그에게 반박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게로 또한 그의 배려 덕에 태어나고 자란 것이 되는 걸까. 하지만 곧 소년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배려라니. 그의 인생은 그리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축복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왕을 위해서 싸우는 자들을 옳지 못하다 할 수는 없을테지."
"........"
"항변해 보거라."







9.19 -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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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 - 감동

스물다섯번째 밤은 먼 곳을 보고 있는 푸른 동공을 그의 옆에서 비껴보았다. 언제 보아도 빨려들 것 같은 색채라고 생각하면서. 쿤은 라헬이라는 길잡이 별을 잃은 자신에게 기꺼이 새로운 안내자가 되어 탑을 올랐다. 자신에게 수없는 감동을 선사한 그에게 밤은 왜 같은 경험을 하게 해 줄 수 없는걸까. 그 눈이 온전히 자신만을 향해있지 않다는 걸 느낄 때마다 불온한 감정들이 요동쳤다. 부족한 자신이 그를 가지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9.21 - 줍다

"버리긴 쉬운데 다시 주우려니 간단치 않군."

맹렬한 투기로 자신을 쏘아보는 같은 색의 눈동자에쿤의 기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예사것이었다면 그간의 삶이 개차반이었을지라도 가주가 손을 내미는 순간을 놓칠 리가 없을 터였다. 가주를 탓하는 것조차 잊었을테지. 그 손을 잡자 마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지라도. 하지만 가주가 주지 않은 삶을 개척하는 것이야 말로 에드안이 찾는 옥석. 얼마만의 성공인지 세기도 어려울만한 세월 끝에 드디어 가려낸 하나에 그는 실제로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을 뿐이지."







9.22 - 주장

하지만. 그 단어를 듣자마자 쿤은 데자뷰를 느꼈다. 순해보여도 밤은 자기 주장을 굽히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모양이다. 시시각각으로 위협이 다가오는 마당에 자신의 동료 중 누구라도 그의 눈 밖에 있으면 불안한지 팀을 난 자는 말에 밤이 가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예상했던 일에 준비가 없다는 건 용납되지 않는 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체념한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 일은 분명 도박이 될 것이다. 쿤은 이미 밤에게 배팅한 상태이므로 자신에게는 무엇도 걸지 않았다. 그렇기에 쿤이 질 일은 없었다. 아마도.








9.23 -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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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 - 내버려두다

사실 하츠는 꿈에도 몰랐다. 검술을 배워보겠냐는 질문에 그 쿤 아게로 아그니스가 흔쾌히 하겠다고 할 줄은. 그는 단지 싸울 수단을 하나 늘리는 의미였겠지만 이를 빌미로 쿤이 비는 시간마다 딱 붙어있는 화이트가 더 문제였다. 게다가 꼭 쿤의 동료들이 지나갈 때마다 자세를 잡아준다느니 급습을 하고 일으켜 준다느니하면서 쿤의 몸에 손을 댔다. 동료들 중에서는 장신인 편인 쿤이지만 알벨다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조각을 되찾은 화이트는 단련된 전사이기까지 해서인지 슬레이어에게는 댈 게 아니었다. 남이 보면 분명 검술 교습을 가장한 성희롱이건만 동료들의 상태는 칼같이 재는 쿤이 왜 그걸 모르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의외로 끈기있게 배워나가는게, 검사의 길을 걷고 있는 하츠로서는 더더욱 내버려두기 어려운 그림을 만들었다. 하츠라고 수련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따라잡힐 것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적이었던 자에게 거리낌없이 검술을 사사받는 게 아니꼬와서였을까? 여하튼 하츠는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9.25 - 주목

모두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라는 걸 꿈꾸는 사람은 종종 있지만 자연스레 이목을 끄는 일을 달갑지않게 여기는 축도 있었다. 유라가 그런 케이스였다. 선별인원들 사이의 아이돌로 살아왔지만 그녀는 생존을 위해서 그 길을 걸었을 뿐 그녀 자신이 그 길을 원했던 적은 없었다. 라헬은 그런 그녀가 밤이라는 자와 닮았다고 했다.

"라헬 씨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요?"

유라의 질문에 라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싫어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로 느껴져서 유라로서는 안심되기도 하는 반응이었다. 유라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줄 별은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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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증오

가주를 노리는 자객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 중 대부분은 궁에 발을 들일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데다가, 궁에는 가주의 호위가 이미 여럿이었다. 구렇기에 가잭을 상대하는 일이 오히려 흔치 않다던 그였지만 10가주의 막강한 무력은 경험의 차이가 무삭하리만치 불시의 일격을 여유롭게 받아 넘겼다. 아니, 그가 살행을 허락한 이상 더는 불시의 일격이 아니었을까? 첫 일격이 무위로 돌아간 순간 살행의 성공률은 급격히 떨어지지만 암살자는 물러서지 않고 신수제어술로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였다. 허나 슬레이어 후보의 무서운 재능도 이미 신의 경지에 오른 에드안의 눈에는 별 것 아니었나보다.

"크헉!"
"틈이 많군, V의 아들."
"아아아악!!"
"이래서야 아게로를 되찾을 날이 오기는 하는 건가? 슬슬 그 애도 지쳐가는 것 같던데."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로지 신수 제어술로만 비올레의 몸을 잡아채 엄청난 힘으로 그의 발밑에 쳐박아버린 에드안은 이어 비올레의 가슴에 한쪽 발을 올려 가공할만한 압력으로 내리눌렀다. 살기 위해서는 통증을 건디면서도 흉곽에 신수를 집중해서 폐부가 찌그러지는 걸 막아야 했기에 온 몸이 바닥으로 더 깊게 박히는 와중에도 비올레는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려 애썼다. 10가주 중에서도 강자로 꼽히는 에드안이 그간 누누히 생존법에 대해서 일러 둔 결과다. 10가주와 자하드의 왕좌를 겨냥한 검이라지마누에두안은 옛 친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밤, 아니 쥬 비올레 그레이스와 그의 친구들에게 잠시 은신처를 제공하는 동시에 각각에 맞는 수련 담당을 붙여주었다. 우두머리 격인 비올레는 그가 직접 가르치는 아량까지 베풀었지만 에드안의 방식이라는 게 실로 괴팍하기 짝이없었다.

"쿤 씨는 어디에.."
"그걸 알려줘서야 재미가 없지만 네가 내게 패배할 때마다 대신 벌을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가르쳐 주지."
"쿤 씨를... 돌려 주세요!!"
"이건 재미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 번의 굉음과 함께 벽을 뚫고 다음의 벽에 짓이겨진 비올레는 선혈을 한 움큼 토해낼만한 중상을 입었을 뿐, 만화에서 그려지듯 중오로 인한 새로운 힘 같은 걸 발휘하진 못했다. 신수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그걸 뚫는 내상을 입을 것이다. 비올레의 몰골에 혀를 차며 실망감을 드러낸 에드안은 기분 전환을 할 겸 인질로 잡아둔 그의 아들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언젠가는 예언 대로 쥬 비올레 그레이스가 왕의 목을 찌르는 가시가 되어 탑의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겠지마는 아직은 에드안의 눈에 차려면 한참은 멀었다. 소중한 친구가 인질로 잡혀있는데도 이 모양이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부족한 그의 증오를 채우기 위해 오늘은 또 아들과 어떤 시간을 보낼까? 기대감으로 깊어진 미소가 그 날 밤이 본 마지막 에드안의 모습이었다.






9.7 -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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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답

이용할 것을 찾고 그를 이용해 판을 짜는 것이 체질에 맡긴 하지만, 한참 머리를 쓴 후에는 얼굴로 열리 쏠리는 기분이라 쿤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큰 일이 정리되면 전원을 끄듯 잠을 청하곤 했다. 자신과 동료의 목숨이 걸린 문제의 답을 찾는 일에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빨려들 듯 잠을 청하는 순간에도 옅은 불안감이 이불처럼 의식을 덮어왔다. 이 잠깐 사이에 잘못 되는 경우는 없을까? 이보다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에도 자신은 이겨낼 수 있는가? 밤이 아닌 자신은 스스로의 해답을 잘 찾아가고 있는가? 까무룩히 잠든 끝의 결론이 악몽인 건 이러한 까닭일텐데도 놓지 못하는 수많은 고민들 마저도 차차 어둠에 잠겨갔다. 어쩔 수 없이.






9.9 - 연결

밤의 실수로 말할 것 같으면 특별한 무엇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줄을 몰랐다고 해야할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기에 무언가를 꼭 희생시켜야 한다면 자신의 몸을 불사르리라 마음 먹었었다. 자신이 희생시키는 자는 없다는 이기적인 논리. 다른 결말을 생각하지 않은 안일함. 자신의 길 뒤에 남겨진 무수한 희생을 생각치 않은 무지.

"어리석은 생각이군요. 자신을 내 놓으면 적이 그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았습니까?"

연결이란 일방이 아니기에 모든 것이 뜯겨나가는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권좌의 주인에게 주어진 불사의 축복은 결국 밤을 제외한 다른 동료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스스로가 죽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조차 몰랐다니, 아무도 없는 세상에 홀로 깨어나는 결말이라니!

"보세요. 그렇기에 우리에게 철저한 승리가 필요한 겁니다."

한성의 유언이 머릿 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러 인해 힌 번은 구하졌지만 역시나 다음은 없었다. 폐허 속에서 눈을 뜬 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동료들의 잔해 속에서 끝없는 환상통에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슬레이어가 되세요. 더는 잃고싶지 않다면."







9.10 - 소용돌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한테 창고 털렸다며?

물건에 그다지 애착을 두는 편이 아니었기에 보고를 들은 시점부터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일이건만 옛 동료들의 비아냥은 쿤 에드안의 성격을 제대로 건드렸다. 사나운 뇌우를 몰고 쿤의 부유성으로 복귀한 쿤의 가주는 이미 10년도 더 지난 도난 사건의 범인을 물으며 포도주를 병째 들이켰다. 분명 그는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창고를 털어간 배은망덕한 아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일 심산이었다. 그의 벼락이 닿지 못하는 곳은 없을테니까.

"찾지 말라고 하셔서.. 물론 범인은 저.... 아게로 도련님을 기억하십니까?"

에드안의 자식이 얼마인데 이름 같은 걸 기억해 줄 리가 만무했다. 이름을 고하느니 당장 움직이는 게 답이건만 탑의 규칙상 내탑의 선별인원이 된 아게로를 랭커가 건드릴 수는 없는 터라 목숨을 걸고 에드안에게 사정 설명이라도 해 보려는 가솔을 가엾게 여긴 건지 기적이 일어났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성 내를 뒤흔들었다. 분명 기분이 나빴다. 지루한 영생에서 비롯되는 묘한 불쾌감과를 다른, 실로 간만에 느꺄보는 생상한 감정이었다. 술 한 모금을 들이키고 보니 그 감정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살아있다는 걸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듯한 감각. 에드안은 순간 이 분노가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만에 찾아온 감정인데 쉬이 꺼뜨리긴 아까웠다. 게다가 이어지는 설명도 가관이었다. 탑의 선택을 받아 당장은 데려올 수 없다지 않는가? 분노가 기쁨으로 화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에드안은 방금 들은 이름만을 곱씹었다. 아게로. 아게로. 나의 사랑스러운 아게로.








9.11 - 팬케이크

실로 오랜만에 맞이한 평화로운 시간을 맞아 동료들을 위해 팬케이크를 구울 예정이라는 밤의 이야기에 하이에나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었다. 밤의 요리실력이 이미 정평이 나 있는데다가 고운 외모와 상냥한 성격 덕에 그에게 마음을 둔 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급 아니면 안 먹는 거 알지? 상큼한 베리랑 허니버터로 토핑해줘."

그 중에서도 최고눈 역시 엔도르시로 취향을 어필하는 그녀의 태도에 밤은 제일 처음 구운 팬케이크 세 장 위에 산딸기와 블루베리, 그리고 슈가 파우더와 메이플 시럽을 뿌려 대접했다. 어차피 밤이 준비한 토핑이 그것이었으니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긴 애매했지만 제일 첫 접시를 손에 넣은 엔도르시는 그것 만으로도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어 간식 냄새를 맡고 달려온 동료들에게 차례로 팬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건네던 밤은 벌써 수십장의 팬케이크를 먹고도 리필을 요청하는 라크에게 허전한 마음의 이유를 물었다.

"너도 먹으면서 해라, 거북이!"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쿤 씨는 못 보셨어요?"
"파란 거북이?"
"쿤은 지금 자고 있을걸?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제 늦게 자는 것 같더라고."
"그럼 쿤 씨거는 따로 남겨놔야 겠네요?"
"뭘 남기냐. 먹을 때 없으면 못 먹는 거지."

차라리 깨워 오겠다는 라크를 겨우 만류한 밤은 결국 직접 팬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쿤이 혼자서 사용하는 방을 찾았다. 예민한 성격을 자랑하는 쿤이지만 잘 때는 그렇지만도 않아서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곤히 자곤 했다. 오늘도 그런지 접시를 차탁에 올려준 밤이 잠시나마 그의 얼굴을 보러 온 것도 모르고 고른 숨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동료들은 전방에 나서서 싸우는 밤의 수고는 쉬이 인정해도 놀리는 것을 겸해 전체를 지휘하는 쿤의 수고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야 신체적으로는 편안한 것이 맞다만 큰 일을 치르고 나면 항상 혼자만의 공간을 찾는 쿤이 밤은 늘 마음에 걸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부서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래도 눈 바로 밑까지 이불을 감고 잘 자고 있는 걸 확인하니까 이번에는 마음이 좀 놓였다.

"일어나시면 간식 드세요. 오늘은 푹 쉬시고요."







9.12 - 버티다

그렇게나 치를 떨더니만, 밤은 화이트와의 동맹을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하츠도 그에게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그는 분명 용납하기 아려운 악인이지만 지금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같은 배를 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같은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하루에도 수 번씩 쏟아졌으니까.

"나도.. 더 강해져야 해."

이수도 분명 최선을 다해서 버텨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의 최선과 오늘의 최선이 같아서야 더는 미래가 없었다. 그를 지탱하는 과거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는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달려야했다.

"아자아자!! 힘내자, 십이수!"







9.13 - 힘들다

"여기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딨습니까. 어리광부리지 마세요, 아게로."

나름은 참고 또 참다가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어머니의 서슬 퍼런 일갈은 어려운 결정 마저도 철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떠밀리듯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나온 아게로는 풀어놓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죽이느라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계획에 없던 산책이었다. 마음이 누구러지리라고는 상각치 않았지만 닫힌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보다야 숨이라도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를 뵙기 전보다 무거워진 마음에 숨 쉬는 것조차 뚯대로 되지 않았다. 물 속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한 발 한발 내딛다가 결국은 맘춰섰다. 차라리 이대로 질식해 버렸으면. 아마 그 순간에 만난 게 너 였으리라.







9.14 - 머무르다

어이, 쿤. 이제는 친구나 다름없어진 호칭에 쿤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도 겉옷을 제대로 걸치지 않아 맨가슴을 거의 드러낸 몰골의 슬레이어가 그를 행해 다가오고 있었다. 10가문의 재능있는 직계로 시작해서 일국의 왕이자 신도들의 신인 슬레이어라는 길을 걸어왔으니 시중 드는 사람이 늘 있는 일상을 살아왔다는 건 이해하지만 서로가 적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 마당에 화이트의 시중을 들어줄 이는 이 곳엔 없었다. 눈치껏 현실을 파악하고 저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일상에 구멍이 많은 그는 그나마 친한 쿤에게 의지하고자 했다. 거만한 눈초리 그대로 말이다.

"짐은 목욕을 하고 싶은데."
"어쩌라고. 자하드 군이 쳐들어 오기 전에 냉큼 씻어."
"쿤 가문은 목욕도 안 하는 건가?"
"아침에 씻었으니까 난 필요 없다고."
"흠...."
"왜, 또, 뭐."
"넌 왜 이곳에 머무르는 거지? 슬레이어 후보의 가능성을 믿는 거냐? 너 같은 자가?"
"무슨 의미야?"

귀찮음만이 분명한 쿤의 새파란 눈동자에 초점을 맞춘 화이트는 꽤 오래 시선이 얽혀 있었음에도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쿤이 눈을 돌리기 전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9.15 - 좋은 날씨

엔도르시는 쇼핑하는 내내 투덜댔다. 밤이 따라오길 내심 바랬는데 그녀의 호위로 목석같은 하츠가 붙어버린 탓이다. 하츠도 원해서라기보다는 등 떠밀려온 처지였지만 엔도르시의 불만토로를 들은 체도 않고 저 할일에만 집중하는 그 성실함이 엔도르시에게는 답답하기만 했다. 얼굴은 반반하다지만 사람이 일단 말이 통해야지. 그녀가 툴툴대거나 아니거나 싱경도 쓰지 않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쇼핑한 물건들은 짊어진 채로뒤를 따르는 하츠의 모습에 엔도르시는 이제 기가 찼다. 자존심도 없는 걸까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엔도리시가 여태 누굴 뜯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을텐데 나쁜 말을 귓등으로 흘려내면서도 펴정 하나 바뀌지 않는 뻔뻔함이라니. 물론 하츠가 아주 엔도르시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밤이 시험의 층에서부터 그녀의 눈에 들긴 했지만 그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이 긴 반면 하츠와는 그 공백도 함께 했기 때문에, 엔도르시에게도 하츠는 특별한 동료였다. 일단 얼굴 자체는 잘 생기기도 했고. 이렇게 인간미 없이 굴지 말고 조금만 더 그녀를 배려해 주었다면,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으으으으..!! 날씨는 끝내주게 좋네.. 짜증나게."
"좋은 게 좋은건데 왜 짜증을 내는 거냐."
"좋은 날씨에 좋은 사람이랑 같이 못 있으니까 그러지."
"그렇군... 다음에는 내가 밤에게 말을 전해 주겠다."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인정하는 거 아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니 동료로 삼은 거다. 그러니 나보다는 녀석들이 더 좋은 사람들이겠지."
"......정말이지 이 머저리 바보가..! 따라와!"

말은 따라와지만 이미 하츠의 멱살을 잡아끌고 걷는 엔도리시의 발걸음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양 손에 엔도르시의 물건이 있어 변변찮은 저항도 어려운 하츠가 끌려가며 뭐라고 말했지만 왜인지 제대로 열받운 공주님의 귀에는 이미 아무 말도 둘리지 않았다. 공주의 에스코트는 아무 하는 줄 아나? 오늘 하루 만큼은 하츠를 동료들 중에서 제일 멋진 남자로 만들어 주지! 결심에 불타는 엔도르시를 막을 자는 이 탑에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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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 2020.8.26 - 9.5

신의 탑/하루 글감





8.26 - 애정


쿤 가문 내에서 가주인 에드안이 직접 움직여야만 하는 일은 많지 읺았다. 안주인은 수 번의 이혼으로 남은 자가 없었지만 장성한 자식들이 이미 여럿 있어 그들 간의 질서가 잡혀있는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부득이하게 전화를 손에 들게 된 건 어린 아들의 결석을 학교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열이 높아서 하루쯤 쉬게 해야겠다고 말이다.

"애정이 넘치는 친구들이구나. 다들 날 아동 학대범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버지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 봤다는 걸 알면 사춘기인 아들이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볼게 뻔했지만, 거부해 봤자 아게로의 보호자는 에드안이었다. 다 자신이 벌어줄인 돈으로 마련해 준 물건들인데 거리낄 게 어디 있을까. 처음 있는 병결을 두고 친구들의 안부인사가 줄을 잇는 메신저 창에 에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핏줄이라면야 어딜가든 인기가 있을 게 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만 아게로의 경우는 그 중에서도 유별났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안부 인사가 끝이 아니라 다들 건강을 챙겨야 하니 먹을 걸 사 주겠다, 시간 될 때 연락하라, 이따 집에 한번 들리겠다 등등 접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보려 애쓰는 모양새가 에드안의 눈에는 썩 재미있었다. 플레이 보이로 소문이 자자한 에드안이 아들에게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한 글도 여럿 보였고.

"괘씸한 녀석들이 많은데 사나흘쯤 쉬게 할까?"

쿡쿡 웃으며 의견을 묻는 에드안의 등 뒤로 수 십 쌍의 푸른 눈동자들이 반짝였다. 이 중에서 합법적인 결석은 약기운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아게로 뿐일텐데 집안에서도 사랑받는 막내는 역시 뭔가 다르다. 저를 지지하는 세력이 이렇듯 엄청나니 에드안은 아게로의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일어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자렴, 아게로."







8.27 -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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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 -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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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 - 복잡함


"참 신기한 일이죠. 신수랑 분명 불의 성질과는 상반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을텐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 불만 되는 게 아닌 녀석인데."

에반켈의 세상에서 한성은 분명 세상을 가장 복잡하게 사는 인물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시물의 본질이라던가 상대의 심리라던가 세상의 옳고 그름 같은 걸 따지먄서 말이다. 그것은 분명 눈 앞에 있으면 있는 것이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면 적이라는 식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에반켈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다만 복잡한 그는 항상 무런가를 고민하고 있기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성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그의 수고로 알아낸 새로운 사실이 에반켈과도 얘기치 않게 공유되는 것도 장점이었고.

"그렇군요. 역시 신수란 그만큼이나 가능성의 물질인걸까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그 옛날에 엔류는 신수로 생명을 창좔 수 있었던 거겠죠."
"더 살고 싶은 거냐?"
"항상 말씀드렸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눈을 감는 그 순간에 어떤 미련이 남게될 수는 있으니까요."

변화의 행방이라던가 당신의 미래 같은. 한성과 같이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에반켈은 한성이 입을 다물면 그의 생각을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한성의 속내를 궁금해 하다가도 곧 그랬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이번에도 떨떠름한 그의 표정은 한성이 커피를 타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 걸 사운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성은 오히려 에반켈의 이런 단순한 부분이 좋았다. 그의 머리 속에서 복잡한 고민거리들을 밀어내 줄 수 있는 사람, 한성의 고민들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만큼 거대한 존재라는 게.




8.30 - 초대

자신의 방 거울 앞에서부터 왕난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어른들로부터 마당발이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만큼 왕난은 근방의 모든 일에 고개를 불쑥 내밀 정도로 넉살이 좋았지만 오늘은 마음 쓰이는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흐으....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쿤이 건넨 것은 단순한 생일파티 초대장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생일파티가 왠말이냐 싶겠지만, 상류 사회에서는 아직도 생일을 사교의 장으로 사용하곤 했다. 때문에 왕난도 지금까지 자신의 생일 때 쿤을 매번 초대했고, 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대부터 가까이 지내왔으니 일상에서의 사소한 다툼들과는 별개로 괜찮은 사업 파트너로 성장하고 있다는 중거라고 해야할까? 헌데 연례행사나 다름 없는 이 일이 왜 오늘따라 왕난의 가슴을 뛰게 하는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아아아악! 형! 나 머리 이상해? 넘기지 말까? 지금 머리 감으면 늦겠지?"
"이렇게 보니까 너무 아버지 판박이군."

그래도 구원의 손길은 멀지 읺은 곳에 있어서 애원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동생의 헤어세팅을 손수 바로 잡아준 왕난의 형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느라 왕난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선물상자까지도 제대로 선에 들려 주었다.

"지금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출발하도록 하지."





8.31 - 달

겨울밤의 공기는 그 자체로도 칼날 같았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폐부에 날카로운 추위가 저며들었지만 하츠는 흔들림 없이 검을 바로 잡았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열이 오를 것이다. 자고로 검술이란 정중동, 동중정이라 힘의 완급 조절이 중요했다. 원하는 어느 때에도 멈출 수 있어야 하며 또 원하는 때에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그를 위한 수련은 마치 춤과 같다고, 그의 훈련을 몇번인가 지켜봤던 지기는 평했다. 눈송이도 가로로 베어버릴 수 있을만큼 날카롭게 벼린 날이 전진하다 멈출 무렵, 새하얀 모피로 장식된 소맷단이 하츠의 어깨를 덮어왔다.

"고지식하다니까, 이런 날까지."
"방해하지 마라."
"들어와. 술친구가 없으니."
"......"

억지였다. 무사인 하츠에게 수련은 일과였고, 그것은 날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하츠가 대외적으로는 그를 모시는 몸인 연유로 정돈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로 검만 갈무리한 그는 눈길에 발자욱조차 남기지 않는 영물이자 오랜 지기인 친우의 뒤를 따랐다. 신궁은 영물의 거처인만큼 정비도 잘 되어 있어야했고 물자도 풍부한 편이었지만 신을 모실 국가가 쇠락한 만큼 이제는 인력도 재물도 충분치 않았다. 모시는 이도 하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마당인데 술상이 어찌 마련되었나 했더니 신궁의 신물이 직접 움직인 모양이었다. 잘 데운 술에 뀡고기와 토끼고기를 이용한 전과 탕은 제법 모양새가 잘 잡혀있어 최근의 사정을 알고 있는 하츠에게는 놀라울 뿐이었다. 기실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쿤은 남은 전폐를 하츠에게 전부 주며 밥 때가 되면 알아서 끼니를 해결하라 했었는데.

"네가 술이라니 무슨 일이냐."
"먹고 싶으면 먹는 거지 이유가 꼭 필요해?"
"수도가 전쟁통이니 곧 이곳에도 적군이 들이닥칠 거다."
"말했다시피 축성은 내 능력 밖이야. 애초에 난 이 곳의 신이 아니니까. 불안하면 너나 빨리 살 길 찾던가."
"주박을 풀 방법은 아직이냐?"
"신궁 자체가 무너지면 끝나겠지."

바람이 차니 창을 닫았지만 하츠의 눈앞에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그가 바로 달과 같았다. 해사한 웃음에 술을 입에 다기도 전에 취한듯 했다.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시피 그는 다른 땅의 신물로 이 나라의 명운이 다 할 것을 예감한 본래의 신물이 신궁을 떠나자 왕가에서 고용한 주술사가 그 대신으로 붙잡아 이 곳에 가두어 둔 것이라 했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냐 했을 때, 쿤은 그런 때가 있다며 얼버무렸다. 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주술의 근간을 알면서도 하츠를 시켜 부수거나 하지 않고 머물렀던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 되면 네가 있어야할 곳으로 떠날테냐?"
"그 곳에는 내 월무도 술친구도 없을텐데."
"쿤?"

하츠의 수련이 춤과 같다며 쿤은 그를 가리켜 월무라 했다. 검날이 그리는 호선이 초승달을 닮아 그리 부르는 듯 했다.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왔어도 하츠에 대한 생각은 좀체 밝히지 않던 그가 하츠의 잔을 채워주며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 둘은 다른 시간을 걷는 존재인만큼 친구 이상의 연을 가질 수는 없노라 이야기했던 그가.

"우리 월궁으로 함께 갈까?"

아마도 아주 기이한 여정의 시작이 될 이야기를.








9.1 - 늦기 전에

혼자 식사를 마친 쿤은 별스럽지 않게 계산을 하고 자동차의 운전석에 올랐다. 바람 맞는다는 상황을 난생 처음 겪어본 것이지만 별다른 감정도 들지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까? 굳이 스마트폰을 들어 상대의 변명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떤 애달픈 사연이 들어 있으리라는 기대 같은 거라도 남겨두고 싶었나?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도 참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다지 평소와 다르지 않았었는데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오는 순간 비참해 지다니. 늦기 전에 잡아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면의 외침을 통째로 밑바닥으로 밀어내며 쿤은 느리고 힘겹게 하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브리프 케이스를 현관에 두고, 가벼운 사워를 마친 뒤에 실크 가운을 걸쳤다. TV를 보고 싶지도, 메일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그저 지독하게 피곤한 날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켜야 했으니까. 바로 시트 밑으로 들어간 쿤은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술이라도 한잔 할 걸 잘못했다고 혼자 되뇌이면서.






9.2 - 어떤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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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 산

신수와 신수가 맞부딪히는 굉음이 귓가에 쟁쟁했다. 전쟁이란 무릇 이런 것이며, 등대는 이 전장을 지휘하는 자의 것. 독자적인 잔투력이 나쁘지 않다지만 서포트에도 상당한 수고가 드는 연고로 시작과 다른 흐름이 되면 의외로 쉽게 빈틈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선별인원이 대다수인 밤의 일행이 상대해야하는 건 자하드 군의 랭커. 무리 중 유일한 등대지기인 쿤이 위험에 노출되기가 더 쉽다고도 볼 수 있었다.

"파란 거북이!!"

주인공 답게 선두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밤은 동료들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써 줄 틈이 없었다. 그가 아는 얼굴을 챙기는 건 숨을 고르는 시간에야 가능한 일. 대신 동료들의 창이 되고 방패가 되는 건 지원을 맞은 쿤과 라크의 일이었다.

쿠구구궁!!!

둔탁한 울림이 소음까지 뒤덮었다.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었지만 덩치에도 그의 속성에도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을 발휘한 라크 덕에 위협은 쿤에게 닿지 못했다. 성격상 라크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그를 계산에 넣을 정도로 쿤은 어느샌가 라크를 신뢰하고 있었다. 거대한 산과 같이 라크는 기꺼이 그의 그늘을 쿤 같은 사내에게도 내어주는 자였으므로.

"어디에 한 눈 팔고 있는 거냐!"
"왔으면 저 탐색정부터 부숴줄래?"
"건방진 거북이... 같으니라고!!"
"좋았어."
"명령하지 마라!!!"

다 해 줄거면서 뭘. 아닌 척해도 사람 좋은 악어는 항상 쿤의 곁에서 그를 지켜 주었기에 심리적으로 의지할 수 없는 밤보다 라크에게 더 유대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 것도 라크에게는 이야기해 주지 않을 테지만.







9.4 - 하기 싫은 일

"싫은데요."

그래. 그러시겠지. 예상했던 일이지만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서 되려 막막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의 쿤이 딱 그랬다. 그와 평이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고, 친절한 응대도 바라지 읺았다. 잘잘못의 근본을 따져보자면 숙적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부터 적으로 선을 그어 버린 쿤일텐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쿤은 비올레가 차지한 자신의 방 밖으로 그가 나가려고 했다. 정 안되면 밤이나 라크에게 세 들어서 하루를 보내야...

"어디 가세요?"
"안 나간다며. 여기서 편안하게 자라고."
"싫어요."
"불편하게 있으라 그거야?"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기 싫은 일이면 하기 싫다고 누구든 티를 내게 되어있건만. 그저차 옹납하지 읺겠다는 건지 억지로 나가려는 쿤을 돌려 세운 비올레는 문이 아닌 벽 쪽으로 쿤을 밀어붙였다. 단순 악력이라면 10가문인 쿤 쪽이 훨씬 위일텐데 그 당시에 이미 신수강화를 할 수 있었던 건지 비올레에게는 물러남이 없었다. 정말이지 넘치는 재능이라고 해야할까?

"당신한테서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9.5 -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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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 평화

평화란 이 세계에서 가장 헛된 단어이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생각 없이 시선을 둔 창 밖은 오랜간만의 정적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어울리는 침묵. 이 고요함 조차도 얼마만이던가?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건 예고 없이 시작될 적의 공격에 조금이라도 더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이제 햇수로 쌓이기 시작했는데, 평화라는 건 과연 탑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일까? 별보다도 더 전설같은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8.17 - 우정

누군가가 묻는다면 '친구'라고 대답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하츠와 쿤의 우정은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어째서 그 녀석을 신뢰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신뢰가 아니라고 대답했잖아.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전력은 뭐가 됐든 써먹어야 하는 상황인데 찬 밥 더운 밥 가리게 생겼냐고."
"녀석은 우리의 적이다."
"어쩌다보니 당장은 같은 부유선을 타게됐고 말이야."

사소한 일에도 의견일치를 보는 경우가 잘 없긴 했다만 최근의 논쟁은 쿤의 말처럼 어쩌다보니 일행에 합류하게 된 FUG의 슬레이어 화이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만한 전력이 드물기 때문에 쿤은 FUG의 슬레이어들이라 할지라도 이용가치가 있으니 이용한다는 주의였는데, 하츠는 한 때 적이었던 그들의 손을 빌린다는 게 영 못마땅한 듯 했다. 게다가 화이트는 하츠와 같은 검사였으니 다 눈에 밟히는 것인지도.

"그런 녀석의 손을 빌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너 말고 다른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우리가 원하는 건 좀 더 위에 있잖아?"
"........"
"이 참에 잘 봐 뒀다가 네가 아리에를 뛰어넘는 검사가 되면 더 좋고."

큰 소리에 시선을 끌었다가 정리될 쯤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까지, 참으로 곤란한 두 사람의 우정이랄까. 도발이라고 해야할까 유혹이라고 해야할까. 묘한 미소를 띈 채로 쿤은 하츠의 귓가에 무언가를 더 속삭이는 듯 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수는 다시 오늘의 뉴스를 읊는 쿤의 등대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재밌겠지만 저 녀석 너무 티나서 보는 사람이 신경쓰인다니까, 쿤."







8.18 - 고정관념

"왜들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인 거 이제 알았어?"

갑자기 열린 부유선의 해치가 동료들을 쏟아내는 걸 똑바로 보며 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배신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수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니까 완벽한 연기로 쳐 줘야 하는 걸까나? 쿤은 스스로를 가리켜 무리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다. 주저하는 동료의 무기를 빼앗아 적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 놓을 때도, 배신자를 자기 손으로 끝내겠다며 혼자 떠날 때에도.

"...함정이었던 걸까요, 그 때의 거래는."
"글쎄. 단정 짓긴 그렇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저는 사실.. 우릴 배신하더라도 쿤 씨가 살아 있길 바랬어요. 라헬과도 다시 손을 잡아야 할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이건 누구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문제야, 밤."
"누구 탓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두번째 배신은 처음의 상처까지 관통해 들어왔기에 훨씬 더 아프고 괴로웠는데, 그 괴로움이 거짓말이었다니. 그리고 그 다음에 무너지는 마음은 그보다도 괴로운 것이었다니.

"왜 연기라는 걸 알면서 계속 속아준 걸까요? 쿤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시작부터 손을 내밀어 주었고, 동료들을 위해 그들이 꼬리는 일을 마다 않았고,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써서 동료들을 여기까지 이끈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얄팍한 감정에 속아 추모할 시간마저 놓처 버렸다는 게 밤은 억울하다 못해 분했다.

"죽었다는 것도 아니잖아. 아직 가능성은 있어."

그런 식으로 밖에 벌 수 없었던 시간은 다행히 귀중히 쓰였다. 밤의 어깨를 도닥이는 이수의 눈빛이 전에 없이 결연했다. 슬퍼할 때가 아니라면 밤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신의 고정관념에 속는 일은 없을 터였다.







8.19 - 진짜 이유

"괜찮겠어? 신수를 봉인당한 친구들을 그렇게 내동댕이 쳐 버려도? 이미 고도가 꽤 높다고?"
"닥치고 본론만 말해. 누가 보냈지?"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한가? 어차피 넌 그들에게 돌아가지 못할텐데."
"10가문이라고 모두 자하드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잖아?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나한테 틈을 준 거 아냐. 목적이 뭐야? 비선별 인원?"
".....쿤 가문에 머리 쓰는 녀석이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함정이라는 게 늘 그렇 듯, 상대의 이야기에서는 혹할만한 구석이 있었다. 10가문 중 일부는 자하드에도 FUG에도 협조하지 않는 중립을 원하고 있으니 그들과 휴전 협정을 맺자는 게 밤을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 양 측은 신수를 봉한 상태로 이송 또한 상대의 선에 맡길 것. 서로가 그러니 공평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10가문이 자하드와 FUG를 둘 다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행동에 나선 진짜 이유를."







8.20 - 해 질 무렵

해 질 무렵이 되자 노을은 금방 세상을 뒤덮었다. 찬란하게 익어가는 만물의 모습은 낭만의 대명사로 이런저런 로맨스 작품들에서 연출되곤 했지만 쿤에게 이 무렵은 딱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쿤! 많이 기다렸어?"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오늘은 약속 없다며."
"그랬는데 오다가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걔가 이사를 가서 같은 학교 다니는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그런데 아까 계단에서 딱 마주친 거 있지!"
"그래서 날 까먹으셨다?"
"아하하.... 미안해, 쿤. 대신 내가 가는 길에 닭꼬치 사줄게! 형이 월급 탔다고 용돈 줬거든!"

본래부터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을 내는 금발에 노을이 물들자 득의양양한 표정의 왕난을 한층 더 찬란하게 만들었다. 같은 색의 눈동자 안쪽으로 하늘 빛을 따라 심홍색이 고이는 게 이리도 아름답건만 왕난의 하찮은 변명과 유치한 보상은 쿤의 감상을 잘도 깨어 놓는다. 하긴. 학교를 넘어 동네 제일의 인싸와 친구라고는 왕난밖에 없는 쿤의 시간이 어떻게 똑같이 흐를까? 오늘도 져 주는 것밖에는 묘안이 없는 쿤은 괜히 아르바이트 하는 착실한 형 등골 빼 먹지 말라고 으르렁대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8.21 - 시작과 끝

탑의 왕에게는 수많은 모조품이 있었다. 그가 운명을 연주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이자 소모품들. 최후의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왕난의 미래야 불보듯 뻔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을 살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 왕난을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네 시작은 될 수 없어도 끝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들리지 않을 고백을 낮게 읊조리며 왕난은 눈을 감고 가슴을 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로에서 왕난을 거쳐갔던 이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먼저 떠나간 이들도, 함께 탑을 오르던 자들도. 왕난의 인생에 족적을 남긴 이는 많지만 묘하게도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인물은 니아도, 아크렙터도, 비올레도 아니라 쿤이었다.

"내가 널 떠나는 마지막 동료야, 쿤."

더 이상 너는 누구도 잃지 않게 해 줄게.








8.22 - 버림

쿤 에드안의 버림받은 자식들. 10가문의 수많은 폐단 중에서도 유명한 축에 드는 것이다. 고작 10살에 서로를 향한 상쟁의 장에 내몰린 쿤 가문의 아이들은 그 때의 승패로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이는 진정한 쿤 가문이 되기 위한 첫번째 관문에 지나지 않으나, 부러 가까이 지내던 아이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그의 방식은 문 밖의 사람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가문 밖으로 버려진 아이들은 10가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에게 팔려가 학대 끝에 죽거나 고운 외모를 보고 포주의 손에 걸려 평생 몸을 팔거나 했다. 가문의 지원이 없으니 헤돈의 선별이 아니고서야 탑을 오를 수도 없었고, 의외로 강자가 즐비한 탑의 최상부에서는 핏줄의 힘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 널 내 손으로 버린 적 있더냐, 아게로."

누이의 공주 선발을 망친 것도, 아버지의 보물에 손을 댄 것도 모두 스스로의 선택. 무신경했을 뿐 버리지는 않았다는 에드안의 말은 나름 논리를 가지고 있긴 했다. 아게로는 여하튼 에드안의 첫 시험을 통과한, 일종의 '선별된' 그의 아들. 버렸다는 표현은 가당치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아직 네 주인인게지."








8.23 - 다시 시작

많은 사람들이 진성에게 다시 시작하라 조언했다. 고작 첫 사랑을 잃은 것 정도로 유망한 인재인 그가 주저앉아 버려서야 되겠냐고. 하지만 시작이란 쉬운 법이 없어서 진성은 그리 쉽게 그녀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같은 10가문을 무수히 죽이고도 분은 풀리지 않았고,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자하드 왕가와 10가문을 보면 무력감만 몰려올 뿐이었다. 사랑 같은 감정이 싹틀 수 없을 만큼 진성은 황폐해졌다. 10가주를 상대하기 위해 슬레이어를 길러내면서도 공허감이 깊어갔다. 아마 다시는 새로운 시작을 맞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인조차 포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깨어난 감정에 스스로 동요하는 것을 보니.








8.24 - 냉정

넌 밤과 관련된 일에는 너무 감정적이 되는 경향이 있어.

맞는 이야기였다. 현재 설정한 인생은 목표인데 그 쪽에 냉정해 지라는 건 그게 쿤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요구하는 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그를 따라가면 쿤이 기대하는 것이 있나? 그의 길을 방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이 모든 기대가 허황된 공상은 아닌가? 아니면 단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거였을까?






8.25 - 철이 들다

"넌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한숨처럼 말하곤 했지만 사실 쿤은 철이 든 사람에겐 흥미가 없었다. 그의 동료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면 누구든 쉽게 그의 이런 취향을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어떤 일이든 막무가네로 진행하는 비션별 인원, 철은 커녕 생각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네이티브 원 악어 한마리, 걸핏하면 검부터 뽑아드는 검사에 공상같은 꿈을 꾸는 자칭 왕자, 철이 든 것 같다가도 동료들의 의견에 휩쓸리면 답이 없는 재수생 큰형님에 남의 말을 언어로 해석하지 않는 공주님 둘까지.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건 아직 꿈꾸고 있다는 말. 아직 날것인 그들의 모든 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지.
















이번에 유독 짧게 친 부분이 많은 것은 저의 체력 문제 때문입니다.
숙제를 미루지 맙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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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8.6 - 15

신의 탑/하루 글감





8.6 - 도시락

봄 꽃이 피면 소풍을 가자고 했다. 도시락을 싸서 꽃그늘아래에 자리를 잡고 꽃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이다.

"그러고 나서 진짜로 봄 소풍을 갔던가요, 오라버니?"
"봄이 온 것 조차 잊고 살았지."
"그랬군요. 어쩐지 언니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했어요."
"누나는 가겠다고도 안 했거든?"
"그럼 제 허망한 꿈을 지켜주신 게 오라버니셨단 말씀인가요?"
"그 뜻이 아니라..!"

날카롭게 벼린 칼을 손에 들고 갑자기 꿈을 꾸듯 과거로 빨려들어갔던 키세아를 같은 몰골로 마주하고 있던 아게로는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 눈빛마저 바뀌자 때가 되었을음 직감했다.

"그랬겠죠. 오라버니께서는 이상하게 무른 면이 있었으니."
"......"
"마리아라는 그 계집에게 놀아난 것도 같은 이유이실 테고요."
"멋대로 해석하지 마. 그 녀석과 난 거래를 했던 것 뿐이야."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 지금은 순순히 제게 잡혀 주셔야 겠어요. 당신의 그 얄팍한 죄책감을 이용해서라도."





8.7 - 우리 사이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니."

참으로 뻔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기에 아게로는 다가오는 아버지의 안면 중앙을 발바닥으로 꾹 찍어 밀어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그렇지 서로 간의 프라이버시가 있을 나이건만 오밤중에 남의 침대에 기어오르다니.

"남보다 못한 사이 아니던가요, 아버지."
"저런저런 그리 말하면 서운하지. 남보다 먼 사이니 이제부터 연인이라도 되어볼까?"
"미친 소리 그만하시고 용건이나 말하세요. 확 말도 놓기 전에."
"쿡쿡쿡.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지. 용건이라.. 그래. 네가 봐 줬으면 싶은 아이가 있다."

안면을 밟힌 것은 타박하지 않지만 높임말은 꼭 써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지적하려는 차에 에드안은 직접 아게로의 발목을 잡아 내리고 금새 거리를 좁혀왔다. 아게로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신장 차이가 제법 나기에 에드안의 커다란 손에 아게로의 얼굴은 쉽게 잡혔다. 똑같은 색채의 파란 눈동자에 빙긋 웃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걸 에드안은 입과 달리 차게 식은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잘 끝내 준다면 잠시간은 이 '보물창고'에서 나가는 걸 허락해주지. 어찌할테냐, 아게로."





8.8 - 바닷가

자신이 선택한 동료들이기에 쿤은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편이었지만 혼자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귀했다. 시험 동기들 중에 유명 인사가 워낙 많은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다보니 조용한 시간 자체가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 때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의외로 그 답지 않을 법한 공상들인데, 최근의 것들은 모두 바다와 연관이 있었다. 탑은 광활한 세계를 품은 건축물이었고, 신수로 가득 차 있어 갖은 종류의 신해어가 득실거린다. 지게나와 같이 거대한 신해어가 사는 곳을 탑의 사람들은 바다라 일컬었지만 탑 밖에서 왔다는 밤이나 라헬의 이야기들로 미루어 추론해 보자면, 어떤 구조물 안에 들어차 있는 물에 바다라는 이름이 붙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탑 밖의 바다란 또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밖의 신수는 탑 꼭대기의 신수보다도 농도가 짙기에 비선별인원들은 그 어떤 신수 속에서도 자유로운 것일까? 생각의 말미에서 쿤은 홀로 바닷가를 거니는 자신을 떠올렸다. 비선별인원들처럼 신수의 축복을 받은 체질은 아니기에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은 파도가 치는 큰 물의 귀퉁이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곳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백사장을 걷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모든 등대지기가 그러하듯이.





8.9 - 두려움

그는 태양이되 태양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금속광이 차가운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혀끝마저 굳어버려 동료들에게 도망치라는 말도 뱉지 못하는 채로 아게로는 휘광 속을 헤쳐나온 금빛 그림자에 시선이 못박혔다. 밤의 곁에 있는 내내 적이라 세뇌될 정도로 들어왔던 자하드라는 이름. 그 이름의 주인임이 분명하다는 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모두를 무섭게 내리눌렀다. 기류 조차도 그의 허락 없이는 흔들릴 수 없는 듯한 위압감. 시선의 교차로 자신의 모든 것을 관통당하는듯한 느낌. 그리고 경외감.

"내게 두려움을 느끼는가, 탑의 피조물들이여."

신의 목소리라 생각될만큼 신성한 목소리가 알 수 없는 언어처럼 들리는 문구를 읊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을 것도 같은 문장이었다.








8.10 - 자잘한 즐거움

두 사람이 친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만 남아있는 벙커는 조용했다. 팀의 머리라는 건 세상의 판도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그 둘 뿐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다음 작전이든 시시콜콜한 인생사든 물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고즈넉함을 두 사람은 모두 좋아했다. 지시할 것도 없었다. 이수와 쿤은 상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싫어하는 부분은 상대가 피했고 좋아하는 부분은 기꺼이 나누었다. 드문만큼 자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침묵이 열이 오를만큼 꾀를 짜내던 머리를 식혀주는 기분이 들었다.








8.11 - 매일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작은 호기심이었다. 얼굴만 봐도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알만한 도련님이 모두가 죽었다 이르는 사람의 흔적을 쫓던 때부터 키워온 호기심. 그가 밤이라는 소년을 놓을 수 없다면 밤이 그를 놓게 만들면 어떨까? 물론 미카엘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는 손을 빌렸다. 우정으로 묶인 그들을 떼어내고 죽음을 가장하기에 마침 가장 좋은 시절이었으므로.

"당신 같은 사람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매일을 그리워하고 곁을 지키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건만 그리도 쉽게 당신의 죽음을 믿다니."
"......"
"천금같던 당신의 애정이 아깝지는 않냐고 묻는 겁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만큼?"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죽었다. 그리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강석보다 굳게 닫힌 얼음 속에 고요히 잠든 그를 본다면 살아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터. 그러나 과거에도 그 차가운 죽음에서 깨어난 바가 있는 그가 저 상태라 해서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해답은 먼 미래에 있겠지만 미카엘은 그 때가 올 때까지 문제의 유일한 힌트를 숨겨놓기로 했다. 밤이 그를 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손길은 끝끝내 거부한 그에 대한 치졸한 복수랄까?

"그럼 우리의 매일은 항상 헛되이 쓰여왔던 거군요."






8.12 - 표현

란은 굳이 아게로의 방을 찾아 누워있는 이유에 대해서 방해꾼이 없기 때문이라 답했다. 팀원들은 물주이자 리더이며 참모인 아게로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했고, 덕분에 그의 개인실은 항상 조용했다. 무엇보다도 란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노빅이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차니스트, 란은 아게로의 일을 크게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게로는 란을 내쫓는데 그렇게 열을 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란은 그가 필요해서 영입한 것이었으니 사소한 것은 맞춰주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받게된 란은 뜻하지 않게 이복형제를 주의깊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란의 어려보이는 외모는 란을 동생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 성장 속도도 제각각인 탑에서 외견과 외모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란 쪽이 형이라고 하면 보통 설명할 일이 더 많아져 귀찮기만 하고 중요한 사실도 아니라 누가 묻지 않는 한은 둘 중 누구도 먼저 사실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게로도 딱히 손 윗사람 대접을 하기보다는 아는 대로 두는 편이 명령하기 편하다 여기는 것 같았고. 여하튼 중요한 것은 아게로가 에드안 일가의 형제들 중엔 막내 쪽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쿤의 가주인 에드안은 하루에도 몇 명씩 란의 형제들을 만든다고들 했지만, 아게로 남매를 얻은 이후로는 그가 예전만큼은 색을 즐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게로가 에드안의 창고에 갇히기 몇 달 전부터 아버지는 그를 피해 다니는 아게로를 한사코 찾아내어 얼굴도장을 찍고 갔고, 아게로가 끝내는 그의 창고를 털어 내탑으로 도망칠 것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결국 그 곳에 가두었다. 에드안의 관심 덕에 형제들에게 견제 대상으로 낙인찍혀 고생하는 걸 알고 보호하려 했다기엔 탐탁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그도 그럴게 에드안의 눈인사는 아게로의 생존 확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또래의 형제들에게는 아게로를 죽이는 자를 아껴주겠노라 이야기하기까지 했다니, 매일이 목숨을 건 술래잡기 같았을 아게로가 그 원인이 되는 자를 애정했을 리가. 다만, 아둔한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곧이 믿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형제들 중엔 아게로가 특별한 무엇이라는 걸 눈치챈 자들도 많았다. 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A.A.”
“왜.”
“넌 왜 가문을 버리지는 않는 거냐?”
“내가 버린다고 뭐가 달라져? 누구든 날 보면 쿤 가문이라고 할텐데.”
“.......”
“의미 자체를 바꾸려면 다른 누군가가 가주가 되는 수밖에 없어.”

그들은 아게로가 정말로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란만큼은 아니라도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쿤의 가주가 아게로를 당장에 죽여버리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에드안은 가주라는 자리에 크게 미련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 보다는 군림하고 싶으니까, 마음대로 미인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때문에 그는 가주 자리에 대한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게로의 존재가 그의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그는 자신을 꺾을 운명이라는 어린 아들을 괴롭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에 차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싸우라 부추겨도 외려 이미 랭커급으로 장성한 형제들에게는 관여 말라 이야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에드안의 부성애는 제법 기묘해서 아게로는 덕분에 상당히 강하게 자라기는 했다. 판을 짜고 뒤집는 혜안을 포함해서. 물론 그렇다고 에드안 식의 특별 과외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부추김대로 가주 자리에 도전하겠다 이를 갈게 되었을 뿐이지.

"그러는 너는 잘 되가?"
"뭐가."
"네 누나를 죽일 준비."
"......그래."

쿤의 가주도 꺾을 아게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 해결된 기분인지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얽히고 섥힌 쿤 가문의 존보 중에서도 유일한 친누나인 마스체니 자하드 공주를 란이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한 건 그것이 그녀의 염원이기 때문이었다. 강자와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꿈꾸는 그녀는 불세출의 천재가 자신을 죽이러 오길 진심으로 바랬고 그러기 위해 란과 그녀의 생모를 죽였다. 더 이상의 형제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녀는 아게로에게도 눈독을 들였다. 아게로는 그녀의 숙원처럼 에드안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곧 흥미를 잃었지만, 동생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줄곧 해 왔다. 왜냐하면 란은 형제라거나 생명의 은인이라는 관계 이상으로...

"오랜만에 생각했더니 피곤하다."
"넌 정말 천재라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걸? 막상 란쪽은 보지도 않고 등대를 조작하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럼히 바라보다 란은 눈을 감았다. 란은 자신의 입으로 연심을 표현하진 않을 테다. 불편한 관계라는 건 지금보다 란을 더 피곤하게 만들 테니까. 아게로는 란의 연정만이 아니라 관계를 뒤틀기 싫은 마음까지도 알아서 가끔 란이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주는 것일테지. 그래. 그 이상은 서로에게 귀찮을 뿐이야.








8.13 - 적절한 순간

딱 적절한 순간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화이트는 방 문에 노크했다. 곧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그는 방의 주인이 아닌, 뭔가 심통이 난 것 같은 표정의 슬레이어 후보와 먼저 눈인사를 나누었다.

"넌 또 무슨 일이야?"
"10가문에 대해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길래 말이지. 짐과 다시 한 번 거래할테냐, 쿤?"
"뭐..? 이렇게 난데 없이?"
"가주의 목을 노리는 자들끼리 어울려보자는 거지."

화이트가 슬레이어 후보에게 직접 압력을 넣지 않아도 이런 화제가 나오면 쿤은 알아서 그에게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작별을 고하건 했다. 전쟁까지 일으킨 사내라면 이미 그로 인해 죽은 사람도 수천수만에 이를텐데 여태 그가 토끼 한마리 죽이지 못하는 소년으로 보이는 건지 쿤은 쥬 비올레 그레이스가 듣는 모든 이야기의 검열을 참으로 철저하게도 했다.

"밤, 이따가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리고 넌 나 좀 봐."
"그러려고 짐이 직접 온 것 아니냐."
"아니!!"
"짐도 저 자의 가치를 인정하긴 한다만.."

구스트앙과 대면한 이후부터 영혼의 힘이 부족했던 화이트를 봐왔기 때문인지 선별인원 따위가 화이트에게 한 소리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통탄할 노릇이지만 그는 화이트에게도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이기에 당장의 무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끼눈을 뚜고 달려드는 쿤의 손목을 잡아 품으로 끌어들인 화이트는 쿤의 등 뒤에서 그보다 훨씬 살기 등등한 눈을 하고 있는 슬레이어 후보를 넘겨보며 피식 웃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당장 널 지킬 검 아닌가? 날이 없는 검으로는 무엇도 지킬 수 없을텐데."







8.14 - 하고 싶은 말

탑의 정상이라는 게 꼭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층을 눈 앞에 둔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험의 시작점, 시험의 층에서 처음 만나 마지막까지 인연을 지켜낸 건 결국 두 사람뿐. 긴 여정에 새로운 동료도 많이 만나고 또 잃었지만 그 중 함께 쌓은 시간이 가장 길다는 건 특별함으로 치환될 수 있는 개념 아니겠는가?

"어이, 곱등이."
"곱등이 아니거든?"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무슨."
"그런 거 있잖아. 버스 태워줘서 고맙다거나?"
"시험 시간에 안 늦게 내가 깨워준 거에 대해서 감사해하기나 해라."
"악!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마지막이란 참으로 홀가분한 것인데, 막상 끝내자니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소녀는 문이 아니라 애꿎은 동료에게 달려들어 괜히 머리를 콩콩 내리쳤다. 너무 세게 치면 로의 머리가 눌린 귤처럼 박살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름은 살살.

"누가 먼저 꺼낸 얘긴데!"
"마지막까지 무드 없잖아 황금 곱등이!"
"곱등이는 무드 있냐, 이 들소 같은 공주야!"
"오! 들소는 좀 멋있다."
"...누가 널 공주로 추천했는지 알굴 좀 보고싶다, 정말."

시시콜콜한 잡담들로 덮어버린 마지막. 어느 누구도 하고 싶은 말을 허심 탄회하게 내어놓진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음이 있는 거니까. 시원한 성격의 두 사람은 후회 없이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서로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8.15 - 운명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지."

탑의 왕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아게로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직 그의 동료들 중에 왕에게 도전할만한 인재는 없었기에 왕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도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면 죽는다. 그러니 다른 동료들 중 누구든 끌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자. 최대한 많은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는 아게로 혼자 조용히 죽는 것이 최선이니까.

"왕이 된 자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낼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를 꺾을 자가 나타나는 것 또한 운명이라면, 어째서 내가 저항하리라고는 생각치 않는가."

목소리가, 눈빛이 그라는 존재를 아게로의 뇌리에 새겨넣는 듯 했다. 그만한 무게감이 아게로를 짓눌렀다. 그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잃을만큼 압도되는 기분. 굳은 듯 멈춰선 소년에게로 드디어 닿은 금빛 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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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 - 기준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눈이 높은 남자였다. 자신의 기준이 높기에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탑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는 10가문의 일원으로 고고하면서도 단정한 그를 눈앞에 두면 태반은 자신의 초라함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을 만큼.

"....넌 왜 날 선택했어?"
"무슨 의미야?"
"난 네가 비올레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강하고 순수한 FUG의 슬레이어 후보. FUG란 탑 내에서는 반란군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였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존 권력의 전복에 매력을 느끼던가? 재기발랄한 탑의 젊은 인재로서 쿤도 그와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왕난은 짐작했었다. 결국 자하드의 손을 들어주게 될 자신 같은 약자가 아니라.

"내 선택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쿤?"
"너는 왜 네 손으로 동료들을 다 떠나보내고 여기로 왔어?"
".....난 그냥 함께할 자격이 없었을 뿐이야."
"지킬 게 있었다는 뜻이네."
"......."
"나도 마찬가지야."

소중한 보석을 차마 내 손에는 낄 수 없는 우리니까 함께 끝까지 가보자.







7.27 - 상황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하는 눈조차 자신의 변명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아게로는 따져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동료들 중 자신과 유일하게 말이 통했던 이수는 대부분 아게로와 비슷한 결론을 내곤 했으므로 그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아게로 또한 비슷하게 결론지었을 터였다. 그러나 왜 지금의 이 상황이 네가 아닌 내게 벌어졌을까? 내가 네게 기댄 그 시간이 상황을 바꿀 틈을 하뇽하진 않았을까?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가정이 최악의 최악으로 향할 무렵, 지켜보던 하츠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게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지키지 못한 건 나다. 괜한 생각 하지마."

네가 밤을 선택했듯이 너를 선택한 건 우리니까. 하츠의 품에서도 꽉 막혀있는 것 같던 무언가의 응어리는 끝끝내 누그러지지 못했다. 아마 아게로가 눈을 감을 그 날까지 그럴 터였다.







7.28 - 살아가는 법

시대가 바뀌었어도 전쟁에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은 같다. 희생으로 포장될 많은 목숨 중에 하나였던 아게로는 포로의 신분이었고 가문에서 그를 구명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눈이 가려지고 포승에 묶인 채 소형 부유선에 올라탈 때만 해도 동료들의 행방을 알아내려는 자하드 군에게 고문당하다 죽는 것밖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착한 장소의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 가렸던 안대가 풀리고 다시 빛을 마주했을 때, 그리고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병사들의 발소리를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상상과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자왕난?"

왕의 옷을 입은 옛 동료의 모습에 아게로는 현재의 상황은 상상 이상임을 인정해야했다. 해사한 웃음이 예전과 같은데 그의 복장이 주는 위화감은 본능적으로 아게로를 한 발 물러서게 했다. 친구의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읽은 왕난은 뻗었던 손을 거둬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왕이 되었노라 고백하는 그의 태도는 약속 시간을 착각했다는 말 정도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만큼 예전과 달라진 게 없어서 아게로를 더욱 더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변했구나, 너."
"흠.... 그런가? 난 그냥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 했는데."
"왕이 되는 게?"
"너희의 적이 되는 거."
"자왕난."
"난 어차피 주인공이 아닌 거잖아?"
"........"
"쿤. 그냥 아주 잠시 동안만 내 곁에 있어줘. 아무 말 하지 말고."

여전히 스스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 같은 찬란한 미소에 오히려 아게로가 무너져 내릴 때에도 왕난은 한결같았다. 역시 10가문은 구속복을 입어도 태가 난다느니, 비올레와 다른 동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느니. 망할 구속복 때문에 안아주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아게로도 혼자 목울대까지 차오른 감정을 삼켰다.

"주인공이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야."

주인공이 아니면 어때. 변화에 함께 휩쓸려 갈려나가더라도, 같은 편에 서 있을 수는 있는 거잖아?

"왜 넌... 넌 항상.."
"여기 있어야 너희를 살려줄 수 있잖아. 이야기의 마지막 장까지."
"......"
"난 괜찮아, 쿤. 말했잖아. 이게 내가 살아가는 법이라고."






7.29 - 사람들의 시선

탑의 주민들은 탑을 호령하던 10가문 중 처음의 다섯 손에 꼽히던 쿤 가문의 가주가 가장 처음 바뀐 것을 두고 의외라고들 이야기했다. 게다가 새로운 가주가 그들 키위 반 밖에 인되는 꼬마라는 사실에도. 물론 쿤의 새로운 가주, 쿤 란은 성장이 더딜 뿐 보기보다는 나이가 많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으니 겉모습만 보고 덤벼들었다가는 그가 왜 쿤의 가주가 될 수 있었는지를 몸으로 깨달을 뿐이다.

"자꾸 식사를 거르는 건 몸에 좋지 않아, A.A."
"손바닥만한 네 정원에 갇혀있는 것도 마찬거지야."

가주의 정원이 얼마나 넓은지를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혀를 찰 소리였지만 탑 전체에 비한다면야 가주의 정원이라한들 겨우 손바닥 한 장 정도의 비율인 건 틀리지 않은 비유였다. 게다가 가주인 란의 주박으로 인해 아게로가 자유로이 활보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방과 그에 딸린 테라스가 전부였으니. 볼라이트가 비추는 테라스의 난간에 걸터앉아 먼 곳에 시선을 둔 란의 형제는 그야말로 요정 같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에 새하얀 가운 사이로 내려뜨린 마찬가지로 새하얀 다리만을 쿤의 궁에 둔 채로 무언가 닿을 때마다 가문의 문양을 그리는 투명한 벽을 짚어 확인하는 그의 모습에 란은 미간을 좁혔다.

"풀어주면 넌 또 네 옛 동료들을 찾아갈 테니까."
"그러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형제끼리 붙어 먹는다는 소문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난 사람들의 시선 따위가 두려운 게 아냐. 네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게 싫을 뿐이지."
"내 계략만 써먹고 이런 취급이라면 내 어머니나 마리아와 네가 다른 점이 뭘까?"
"난 그들 보다는 훨씬 더 널 아끼고 있어, A.A."
"......"
"부디 힘으로 널 꺽을 일은 없게 해 주면 좋겠군. 귀찮으니까."

창 밖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테니 란이 뻗어온 손은 아게로에게는 협박에 지나지 않았다. 언젠가 저 손이 자신을 움켜쥐는 날이 오고야 말겠지. 란의 인내심이라고 해 봐야 아버지인 에드안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이니.






7.30 - 케이크

"세상에! 케이크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쿤 가문은 생일 때 뭐하나요 그럼?"
"그럼 너 미역국은 알아? 무지개떡은?"

케이크라는 디저트를 먹어보지 않은 게 이렇게나 놀라운 일이었을까? 누나와 사촌동생이 혀가 녹을 듯 달다기에 피해왔을 뿐인데 말이다. 단 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타이밍에 경악스럽다는 반응이 여럿 겹쳐 이제는 이야기할 타이밍을 찾지 못하게된 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료들은 케이크를 사 온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니까 케이크 가게도 차릴 수 있을만큼 포켓에 포인트는 쌓여 있다니까?

"안 먹을 거라니까. 먹고 싶으면 먹고 싶은 사람이 사 먹겠지."
"자기 돈으로 케이크를 사 먹다니. 너 정말로 먹어본 적 없구나?"
"네가 네 팬클럽을 너무 갈취하는 거 아닐까, 엔도르시."
"쿤 가문엔 제빵사가 없는 것이냐? 짐은 이미 수만가지 종류의 케이크를 먹어보았다."
"안 먹는 선택을 한 거라고."
"하지만 쿤 씨, 조금만이라도 드셔보시면 좋을텐데요. 물론 달긴 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해지는 맛이라고요."
"그래! 어서 사러가자 거북이들!"

아무리봐도 이럴게까지 케이크에 집착할 이유가 없건만 훈련이 고되어 단 게 먹고싶은 가보다로 정리한 쿤은 서너개의 케이크 값을 쥐어주고 동료들을 벙커 밖으로 내보냈다. 그제서야 찾아온 침묵이 쿤에게는 퍽이나 고까운 것이라서 밀린 자료정리를 이제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해지는 맛이라.."

단 맛이 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적은 없지만 행복과 가까운 맛이라면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자신이 잡지 못한 행복은 지금 이 탑 어디쯤에 있을까? 딱 한 입만 먹어볼까 싶은 유혹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7.31 - 내 탓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사방에 적 밖에 없는 환경은 익숙했고, 때문에 오롯이 혼자 진행한 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짊어질 밖에 도리가 없으니. 핑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도 쓸데없는 생각을 줄이는 일에 있어서도 이 편이 효과적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니, 이 정도로는 궁지라고도 할 수 없는 축일지도. 살아 남는 것만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란 육체의 긴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명료한 목표. 명료한 과정.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새파랗게 날이 선 단검을 꺼내들었다. 눈 앞의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면 이제 스스로에게 진 부채를 청산할 때다.







8.1 - 이야기

별을 쫓는 소녀와 그 소녀를 쫒는 소년, 소년을 시험하는 탑의 이야기. 비록 실제로 살아남은 것이 소녀와 소년이라해도 소년,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단지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로 기록되는 것이 탐탁치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까 널 그렇게 미워했던 것도 우리가 그렇게 싸웠던 것도 전부 기분니쁜 꿈이었지 싶어.”

소녀, 라헬의 공허한 고백에 밤도 고개를 끄덕였다. 꿈 같은 이야기였다. 밤에게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들과 수많은 시험을 거쳐 탑의 정상에 올랐던 것도.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탑의 마지막 문이 열리는 순간 남은 것은 비선별인원이라 불리던 자들이 전부. 생생한 추억만을 남긴 채 탑의 모든 것은 증발해 버렸다.

“저한테는 기분 나쁜 꿈은 아니었지만요.”





8.2 - 다짐

아리에. 탑에서 검을 다루는 자들의 정점에는 그 이름이 있었지만 검사이기 전에 도공을 꿈꿨던 하츠에게는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들이 쓴다는 신묘한 검술을 보고 난 다음에야 하츠는 그를 의식하기 시작했던 정도.

“너희를 도우면 짐은 무엇을 얻을 수 있지?”

그 대화를 엿듣게 된 건 하츠가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었지만, 두 사람이 하츠가 구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는 걸 알든 모르든 검을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네 힘을 되찾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텐데?”
“넌 짐의 힘이 금방 소모되는 걸 알고 있다. 손쉽게 써먹고 버리겠다는 데 동조해줄 수는 없지.”
“어차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인데 조건이 많네. 어차피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고.”
“줄 수 있는 거라면 주긴 주겠다는 건가?”

마치 검날처럼 번뜩이는 새하얀 동공이 순간 하츠를 훑고 지나간 둣도 싶었다. 하지만 그가 노리는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눈 앞의 상대, 쿤이었다. 그가 관심을 둔 슬레이어 후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힘을 일순간이나마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으니.

“짐이 널 갖겠다면, 어찌할테냐?”

하츠와는 전연 다른 재질의 희고 고운 피부를 따라 손끝을 미끄러뜨리며 화이트는 유혹하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 그 유혹은 전연 통하질 않아서 그의 손을 쳐낸 쿤은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지만.

“3일간 널 안겠다. 대신 이번 일에는 확실히 손을 빌려주지.”
“....대신 다른 사람은 모르게야.”
“그야 네게 달렸지. 짐은 곤란할 게 없느니라.”

하츠의 예상과 달리 순순히도 쿤이 관계를 허락한 건 그가 재고있는 절대적인 전력의 차이가 그만큼 엄청나기 때문이다. 변수를 줄이고 이쪽의 생존율을 높이겠다는 쿤의 전략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아직은 보탤 힘이 없는 하츠는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는 꼭 저 아리에를 넘어, 상황을 빌미로 쿤을 안은 대가를 치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 다짐하게 되었다.






8.3 - 혜택

쿤 아게로 아그니스의 인간관계 중에서 특혜를 받고 있는 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은 항상 미카엘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년이었지만 FUG가 기르는 또 다른 말이라는 것부터가 미카엘의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쿤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모를텐데, 이미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가치있다는 건 무슨 괴팍한 논리란 말인가? 라헬의 결정에 따라 잠시 행동을 함께할 뿐인 관계였지만 쓰다 버리기 아깝다 여길 정도의 인재가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는게 미카엘은 불편했다. 버리기로 결정했으면서 왜? 글쎄. 쿤 가문의 도련님이 미카엘의 구미에도 맞았기 때문에?

“아무튼 기분 더럽다는 뜻입니다, A.A.”

그러니 더욱 더 인상적인 배신으로 그 잘난 뇌리 한켠을 차지해주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냥 버려도 좋을 계탕을 죽인 것은 그의 욕망이 불러 일으킨 우발적 살인이었다는 뜻이다. 배신을 눈치채고 분노로 물든 그 고운 얼굴을 아직 감상할 수 없다는 건 슬프지만 목적을 달성한 미카엘은 희열에 찬 눈동자를 금새 눈꺼풀 밑으로 감추었다.





8.4 - 이상한 행복

수위... 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비공계





8.5 - 중요한 질문

오늘은 왕난의 인생 일대의 기념일임이 틀림 없었다. 왕난의 집에서 같이 시험공부를 하자는 수줍은 부탁을 죽마고우인 쿤이 흔쾌히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쿤의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어떤 놈을 만나러 가냐며 예민한 반응을 보였지만 옆집 자하드 아저씨네라는 대답 직후에 끊어버리고는 전원까지 끄며 왕난에게 어서 가자고 했으니 분명 허락이겠지. 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인연이지 지리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양가 덕분에 왕난과 쿤의 인연은 기억이 시작될 무렵과 거의 동시였지만, 왕난이 쿤을 친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왕난이 아니더라도 그간 쿤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은 많았다. 묘하게도 이상 친구들보다 동성 친구들에게 좀 더 인기가 있는 건 여자아이들이 그의 성격을 알면 많이들 돌아서기 때문이려나?

"야, 카페 가서 공부하자. 너희 집 앞에 우리 아버지가 서 있을지도 몰라."
"그래야 하는 거야?"
"공부는 어디서 해도 상관 없잖아."
"아, 뭐, 그렇긴 하지?"

공부도 공부였지만 왕난의 머릿 속을 어지럽히는 쿤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집에 있는 왕난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지만 아까의 통화를 미루어 보면 이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쿤의 아버지는 아들의 귀가가 늦는 걸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으니. 게다가 바로 옆집이니 쿤의 말처럼 왕난의 집 앞을 지키고 섰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언젠가는 둘 다 집에 들어가야하니까 늦든 빠르든 걸리는 건 같지 않을까? 이미 범인도 알고 있는 마당에 또 왕난만 잔소리를 듣게 되는 건가? 그보다 기껏 집이 비는 날에 쿤이 좋아할만한 선물까지 사 둔 건 어쩌냔 말이다. 오늘에야말로 고백을 해 볼 참이었는데!

"대답이 왜 그래. 나희 집에 맛있는 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카페는 내가 쏠게. 물어볼 거 있음 물어봐. 다 가르쳐 줄테니까."

쿤은 성적이 좋은 편이니 공부 이야기겠지만 뭐든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왕난의 머리 속을 채운 질문은 딱 하나였다. 왕난을 끌고 카페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다 대고 눈을 질끈 감은 왕난이 사두를 뗐다.

"저기 쿤, 이거 아주 중요한 질문인데.."
"도착해서 가르쳐 줄게."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왕난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걸음을 멈춘 쿤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더운 날씨에 왕난의 얼굴도 쿤의 귀끝도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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