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탑의 각 층에는 선별인원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꽤나 존재했다. 음식점과 카페가 모여있는 거리에는 으레 쇼핑센터도 있기 마련이라 승탑시험을 치르는 동안 망가진 옷이라던가 숙소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들의 보급처가 되어 주었다. 자연히 이런 거리는 암묵적인 평화구역으로 자리잡았다. 대부분의 관리자가 선별인원들에겐 관대하다고 해도 물자를 틀어쥐고 폭리를 취하는 행동은 제제를 당하기 좋았으니 말이다. 물론 승탑 시험 전까지 응시생들과 장수생들이 이룬 사회에서는 갖가지 일들이 다 일어나고 있었지만, 단순히 특정 세력의 장기집권은 이루어지지 않는 구역이라는 의미였다. 선별인원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자신의 이 구역에 자신의 가게를 여는 랭커들도 있었으므로 고작 선별인원 무리들이 나대기에는 좋지 못한 환경이기도 했고 말이다. 여하튼 덕분에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탑에서도 선별인원 구역의 쇼핑센터들은 제법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의 상품을 제공하고 있었고 그 기반이 되는 시스템이 그러하다는 별로 중요치 않은 사실 정도? 덕분에 지명수배범이나 다름 없는 처지의 하이랭커 하진성과 함께 쿤이 쇼핑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었고.
“이거랑 이거로 갈아 입어, 아저씨. 어디서 그렇게 고대의 옷들을 꺼내는 거야?”
“고대의 인간이 고대의 옷을 입는 게 당연하다고는 생각 안 해 봤냐. 하여간 요즘 애들은 당최 예의라는 게 없어. 어른이라도 짜샤, 그렇게 막 말하면 상처 받는 다고.”
“고작 이 정도 말에 상처 받을 정신머리였으면 밤한테 구해지는 순간에 부끄러워서 죽었어야 정상 아니야?”
“윽..”
스스로의 나이를 세는 것도 포기한 진성에게 눈 앞의 파란 꼬맹이는 그야말로 방금 태어난 핏덩이일 뿐이건만 그 친구이자 아끼는 제자에게 목숨을 겨우 구명받은 처지이니 10가문 킬러이자 하이랭커 하진성의 면면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푸대접도 당장은 눈물을 머금고 참아낼 수 밖에 없다. 물론 진성의 실력에 눈 앞의 꼬마를 끝장내 버린다고 해서 누가 될 것은 별로 없겠으나 이번에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자신의 염원을 이루어 줄 소중한 제자가 부탁했으니 따라다녀 주는 거다. 두 번 다시 팔을 쓰지 못할 정도로 넝마가 된 진성의 팔을 담배라도 물 수 있게 치료해 준 게 저 파란 꼬맹이이기도 했고 말이다. 어떻게 연 가문의 불꽃을 훔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쿤 가문의 부스러기가 그런 거라도 있어야 제자의 앞 날에 도움이 되 줄 테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야겠지. 자기 나이의 곱절에 제곱을 해도 진성의 나이만큼도 안 될 꼬맹이는 더더욱 진성의 모양이 빠지게 방금 진성에게 건넨 옷가지의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진성이 범죄자 취급을 받는 중이라고 해도 옷 한 벌을 살 돈이 없는 건 아니건만 너무한 취급이라고할 밖에. 설마하니 정말로 진성이 부끄러워서 죽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어이 꼬맹아. 골라 주는 것까진 좋은데 다음부터 계산은 하지마라.”
“아직도 안 갈아 입었어?”
“그게 중요하냐....”
“아무래도 낡은 사람이 더 낡아 보이잖아. 어서 갈아입고 와. 잔소리도 그 때 들어줄테니까.”
“진짜 싫군, 요즘 애들..”
조금 소홀해 졌기로서니 토라져서 스승 취급도 안 해 주질 않나, 기어코 뱃가죽을 뚫어 보겠다고 난리를 치질 않나, 이젠 진성의 패션 센스를 두고 훈수까지 들어야 하다니. 말 잘 듣고 귀여운 진성의 애제자가 보고 싶어 지는 순간이다. 정말이지 진성의 기특하고 성실한 제자는 어쩌다 저런 싹수 없는 도련님과 엮였을까? 잇새로 불만 가득 실린 한숨을 내뿜고 있노라니 문득 말쑥한 차림의 자신이 거울 속에서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최신 유행을 보는 눈이 있긴 했던 건지 진성의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크 셔츠와 블랙 진인데도 태가 달라 보였다. 안목의 차이라는 게 너무 확실히 느껴져서 불만을 표하기 미안할 정도의 센스랄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괜히 큼큼거리며 멋쩍게 탈의실을 나서자 진성이 옷을 갈아입었다는 걸 확인한 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볼만 하네.”
“너무 꾸미는 거 좋아하면 나중에 큰 코 다친다, 너.”
“그건 효율적으로 꾸미는 방법을 모르는 멍청이들 얘기지. 시각 정보가 주어지는 첫번째 정보라면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게 뭐가 나빠.”
“가능성에 매달리는 건 에드안의 아들 답지 않군. 네 아버지가 그런 약자들의 방식을 가르치진 않았을텐데.”
“..... 누가 고인물 아니랄까봐.”
“얌마..”
“10가문이랑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뭐가 다르다는 거야 FUG는?”
벌써 두 번째. 진성은 저 파란 꼬맹이가 쏘아붙이는 말들에 되려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했다. 그에 신경쓰는 기색도 없이 제자의 절친이라는 10가문의 도련님은 이제 예약 시간이 얼추 되었다며 동료들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본인의 쇼핑 리스트가 한참은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꾸미는 이유도 있고 그럴 능력도 있고. 예상하건데 가주로부터 시작된 쿤 가문의 화려한 외모는 유명하니 잘 생겼다고 부유선 태우는 부류도 꽤 있을 터였다. 그만큼 자아도취도 심할 거라고 지레 짐작했었는데 진성의 옷만 사고 끝인 걸 보면 의외로 실리주의자라거나?
제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야마와의 내기에서 이기고 그의 협력을 얻어낸 후에야 겨우 칼라반을 뚫고 진성을 구할 수 있었다던데, 선별인원들이 한가닥 한다는 슬레이어들과 부대끼며 나름의 역할을 했던것도 놀랍거니와 중요한 부분들을 담당했다는 건 과정을 실제로 보지 못한 진성에게는 놀랍기만 한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 줬다며 밤이 스승의 옛 악명을 이제야 알고 신경써서 다시 한 번 소개하기까지한 쿤 가문의 꼬맹이는 무슨 이유에선지 진성을 구해낸 직후의 사나흘 간 고열에 시달렸다. 체질에 맞지 않는 힘을 담고 있으니 생긴 부작용으로 보였으나, 그의 동료들에게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다음 층으로 이동하기 위한 루트를 알아보는 건 자기들에게 맡기고 쉬라며 고급 식당까지 예약해주며 등을 떠민 제자와 그 동료들의 행동을 보면 말이다. 의외로 자기중심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무리에 잘 녹아들어 있었던 데다가 걔 중에선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으니 어떻게 될까봐 불안해 진 것일까? 일단 그를 진성에게 부탁하는 제자의 표정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진성의 일까지 겹쳐서 그렇겠지만 걱정이 과하다 못해 슬퍼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이 눈에 밟혀서 진성이 고대의 유물 취급 당하면서도 꾹꾹 눌러참고 있는 것이긴 하다만...
‘확실히 좀 다르군.’
밤, 그러니까 FUG의 슬레이어 후보 쥬 비올레 그레이스는 특별한 출신 성분을 가진, 그야말로 FUG의 존재 이유이자 진성의 희망이었다. 그런 제자가 완성되기 전에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 줄곧 뒤를 봐 주고 있었던 진성은 당연히 밤의 가장 소중한 동료라는 눈 앞의 꼬맹이도 일찌감치 ‘알고는’ 있었다. 진성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천성이 재수 없는 쿤 가문 출신 답게 늘 오만한 말투로 도발을 일삼고 다녀서 비올레의 신변을 걱정해 온 진성의 눈에는 그가 곱게 비치지 않았었지만. 봐주면 봐 주는 만큼까지 딱 채워 기어오르는 성격이라 목을 확 꺾어놓고 싶은 걸 참아낸 것만 이미 얼마던가? 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닫건데 그는 진성이 도륙해 온 10가문의 쓰레기들과는 뭔가 달랐다. 가문의 이름을 들먹여도 그 생각에 동조하진 않는다. 10가문을 적대시한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진성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더욱 근본적인 것부터 비틀고 있었다. 시작이 어딘지를 따져보자면 짐작가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10가문 출신인 진성이기에 알 수 있었다. 소년은 가문 내에서는 소위 ‘패배자’로 분류되는 부류일 터였다. 그렇기에 승자가 가진 것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 신기한 점은 저 어린 소년이 생각해낸 방식이 어지간한 운과 배짱이 없으면 걷기 힘든 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지금까지 살아남을 정도로 완성도가 있었다는 점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특히나 쿤 가문과 같은 진창에서.
“......요 며칠 간은 다 죽어가더니 오늘은 좀 살만한가보군.”
“누구만 아니면 완전 그렇지.”
“그 누구가 설마 나 말하는 거냐?”
“여기 당신 말고 누가 있는데?”
“하여간 입만 살아가지고... 네가 약하니 내가 불편한 거지.”
“난 뇌까지 근육으로 만들 생각 없거든? 댁이 뭘 가르쳤는지 이제 밤까지 생각없이 막 나가기 시작해서는.. 아 머리야. 생각하니까 열받네.”
“그만큼 녀석은 강해졌다. 비올레에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어.”
“난 그래서 당신들이 마음에 안 들어.”
머리가 아프다는 말이 단지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라서 쿤은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두피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금이라 줄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묶은 자국이 남았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기도 싫지만 다시 열이 오를 징조 같은 두통이 당장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자기들 일을 다 떠넘기고. 힘이 있으면 그게 신이라는 식의 논리도 최악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당장의 흐름은 이미 막을 수 없어. 변화의 싹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밟혀 죽는 것 보다는 이 편이 나으니까. 너도 변화를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힘은 길러야 할텐데. 자하드나 FUG나 똑같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네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은 약자의 논리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만큼 만만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비올레와 계속 함께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결국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 ‘힘’을 원하게 될 날이 올거다.”
“퍽이나.”
체온조절이 쉽지 않다고 했던가? 얇은 카디건을 걸친 등이 진성을 지나쳐 갔다. 열이 나서 앓을 때는 언제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하나같이 가벼워진 이 곳에서는 체온이 떨어진 모양이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라도 10가문의 일원인만큼 얕봐서는 안되겠지만 아무래도 근래에 진성이 보아온 제자와 그 동료들 중에서는 가장 선이 고운 외모라 병색이 조금이라도 덮히면 안쓰러워 보이기는 한다. 이미 담아낸 힘이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한 게 기정 사실이건만 미련하게….
“누가 꼰대 아니랄까봐 꼰대 같은 소리만 하고 있네.”
“뭐 임마?”
괜히 진성의 체온을 확 올려놓은 건방진 꼬맹이가 저만치 앞길러 가자, 쥐어 박기라도 할까 싶었는지 여러 말들이 진성의 추격을 방해했다. 저 아저씨 쿤 가문한테 차였나봐. 아저씬데 당연하지. 쿤 가문 성격에 따귀를 때리지 않은 게 다행 아닌가? 진성과 눈 앞의 파란 꼬맹이는 그런 불건전한 관계가 아니건만 세상의 평가는 야박하기 짝이 없다. 억울함까지 더해져 한달음에 따라붙는 순간 본능이 감지한 위협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손이 먼저 나갔을지도?
“꼬맹이!”
지금까지 많은 승탑시험을 거쳐온만큼 단번에 당하지는 않을 정도의 경험치가 있어서 진성의 도움 없이도 쿤은 불시의 일격을 피해내긴 했다. 랭커는 선별인원에게 손 댈 수 없다는 것이 선별인원 구역의 가장 강력한 규칙인지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상대가 혼자가 아닌지 자세가 무너진 쿤은 다음 일격에는 무방비했다. 그게 진성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린 이유였다.
“허. 요놈 진짜...”
등대지기는 텔레포트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걸 잠깐 잊고 한 행동이긴 하지만. 몸이 기울기는 했어도 협공을 텔레포트로 피했다가 다시 진성의 곁으로 위치를 옮긴 쿤은 진성의 상상에서처럼 그의 아둔함에 대해 빈정대는 말은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싸움에 임하는 눈은 진지하다. 그건 쉽게 당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당신은 어서 밤한테 돌아가.”
“뭐?”
“자하드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선별인원들이 있다고 들었어. 분명 여기에만 오진 않았을 거야.”
“...일리 있는 얘기다만 내가 제자를 그렇게 허술하게 키우진 않았거든. 비올레는 강해.”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쪽엔 지킬 사람이 너무 많고 밤은 적이라고 해도 목숨을 빼앗는 일은 쉽게 하지 못해. 분명 위험해질 거야.”
진성이 알고 있는 제자의 성격은 분명 그러했으니 쿤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으나 담배를 버리고 막대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문 진성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제일 지키고 싶어하는 게 누군데... 자기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하는군. 몸도 성치 않은 놈이.’
믿는 구석이 없지는 않을 터다. 그는 기본적으로 10가문의 혈통이 주는 우수한 체력과 근접전 능력, 거기에 에드안의 직계이니 원거리 대응도 어느 정도 될 것이고, 등대지기이기까지 하니까 근접전과 원거리 전투의 전환도 자연스럽고 빠르다. 새로 생긴 치유능력이 지구력을 한 층 올려줄 것까지 감안하면 상당히 밸런스가 좋은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할 터였다. 하지만 자하드가 보낸 선별인원들이 하나같이 기이한 주술을 쓴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들을 같은 선별인원이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까다롭다. 그래서 제자도 진성에게 쿤의 신변을 부탁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진성이 부상에서 막 회복한 정도라고는 해도 일단 ‘회복’한 데다가 하이랭커니까.
“그래도 그렇지 쬐끄만 게 벌써부터 몸을 막 굴리면 쓰냐.”
“왓! 뭐 하는 거야?!”
“얌전히 있어. 이게 텔레포트보다 빠를테니.”
생각치도 못한 방향에서 무릎 관절을 노려지는 바람에 하릴없이 진성의 팔에 걸터앉게된 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게 다리를 안아올리는 진성의 움직임에 본능대로 그의 목을 감싸안고 말았다.
“꽉 잡아라.”
진성의 생각을 눈치챈 쿤은 더는 가타부타하는 말 없이 진성을 세게 끌어안았다. 랭커는 선별인원들에게 손 댈 수 없으니 진성도 자하드의 하수인의 자처하는 선별인원들울 꺾을 수는 없지만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치는 것쯤은 간단했다.
“모처럼 얻은 의사 선생님을 두고 가라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거냐?”
아끼는 제자를 위해서도, 좀 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 진성을 위해서도 득이 될 게 없는 선택이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쿤을 지켜낼 수 있는 힘도 있다.
“어떻게든 지켜 줄 테니까 다음부터는 내 뒤에 있어.”
트위터 투표로 결정됬던 진성쿤입니다.
폰으로 써서 오탈자를 한번 봐야 하는데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