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탑 - 밤 x 쿤] 신기루
신의 탑/단편
구룡채성(九龍寨城). 이 세상에 자리한 최후의 마경(魔景)이라 불리는 그 곳은 별명에 걸맞는 기이한 광경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았다. 무너진 성벽을 무허가 건물들로 켜켜히 다시 쌓아올렸고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간판들이 새로운 성벽을 둘러쳤다. 불야성인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태양빛 조차 닿기 힘든 어둠이 종일 깔려있다는 것 마저도 별명에 충실한 이 별천지는, 진실로 그들을 위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였기에 수많은 도망자와 피난민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땅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겐 식수나 전기와 같은 기초적인 공공재마저 약탈해야만 하는 열악한 상황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곤 몸 밖에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려 그런 곳이 필요했다. 여하튼 그 곳에서는 그들에게 세금을 독촉할 정부가 없었고, 경력이 필요치 않은 일거리가 넘쳐났다. 그것이 매춘, 밀거래, 폭력과 같은 범죄와 관계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의사선생! 의사선생!!"
다만 그것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자리 마저도 그렇지 못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의사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여 지내면서 민간요법에 정통하거나, 사정이 있어 의학을 공부했음에도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자들에게 급한대로 몸을 맡겼다. 의사의 실력만이 아니라 의약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으니 값이 저렴한 것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무허가 치과들보다 내부의 의료사정은 좋지 못했다. 봉사단체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야심한 시각에 죄송합니다."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의원이 잠결에 겉옷을 걸치고 부름에 응하자 그를 찾던 자보다 휠씬 앳된 목소리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그를 찾아온 사내들의 선두에 섰다. 건장한 사내들 사이에서 아직 소년 티를 말끔히 벗지 못한 남자는 자리가 그렇지 않다 해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어둡고 비좁은 이 곳에서 불필요하게 머리를 길게 기른 데다가 그에 어울리지 않는 말쑥함을 함께 지녔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외부의 손님이지 않을까 싶게 단정한 행색은 역설적으로 그가 이곳의 주민이라면, 한 자락 하는 인물이라는 뜻도 되었다. 공권력을 대신하는 이 곳만의 치안유지 조직이자 외부세계의 범죄 조직인 삼합회와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 분의 상처가 심각해서..."
"...이쪽으로."
이 곳의 의사들은 환자를 들이게 되어도 다친 경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쿤은 구룡채성의 이방인에 가까웠지만 눈치가 빨라 곧 이 바닥의 생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마쳤다.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데다가 눈에 띄는 외양을 가졌으니 이 구역의 주인이 시찰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겨우 든 쪽잠이긴 하지만 그걸 방해했다고 성격대로 박대하기엔 쿤의 입장이 좋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이 곳에서 마쳐야 할 일이 좀 더 남았으니, 그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는 무리와 어울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즉에 잠들어야 했을 시간임에도 좁은 문을 지나 간이침대로 환자를 들인 쿤은 볼 것도 없이 환부에 에탄올을 들이부어 간단히 소독부터 했다. 출혈은 심하지만 자상이 깊지 않으니 내버려 두어도 피는 곧 멎을 터였다. 삼합회의 행동대원이 이만한 상처를 두려워할 리도 업지만 굳이 쿤을 찾은 것은 예감하고 있듯이 감시의 목적과....
"무엇에 베인 건지 모르니 간단한 검사를 할 겁니다."
이 지역의 위생환경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감염의 위협. 이 곳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쿤 또한 도망자의 신분인지라 가지고 올 수 있는 물건은 충분치 않았지만 아직 가져온 것이 고갈될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파상풍 균의 감염을 확인하기 위한 반응성테스트 준비를 척척 해 나가는 쿤을 멀찍히서 지켜보던 예의 소년같은 산주(점조직의 우두머리)가 다시금 입을 뗐다.
"신기하네요. 쿤 에드안은 자식들에게 살인기 밖에 가르치지 않는다던데."
"겉 모습만 보고 판단할만큼 녹록한 세상이 아닐텐데, 여기도."
"네. 하지만 워낙에 낙후된 곳이라 이 곳에선 거짓된 것이 금방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거든요. 억지로 자신을 포장할 여유가 없죠."
"아, 그러셔? 당신 수하가 내 손에 있는 상황에서 취조라도 하겠다는 거야?"
"흑사회의 일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설령 약을 받지 못하게 되어 감염으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이 곳에서 꾸린 가족을 생각한다면 조직에서 버림 받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그것이다. 산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환자였던 사내는 쿤을 제압하려 들었지만 산주가 일렀듯 그는 밖에서도 이름 꽤나 날리는 용병기업의 총수, 쿤 에드안의 혈육이었다. 침대 옆에 서 있는게 고작이었을 작은 병실이었지만 고양이처럼 벽과 사내를 넘어 소리도 없이 간이침대를 디디며 메스의 첨단을 그어내는 솜씨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아무리 잠재적인 위협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당장은 치료를 받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을 내 쫓기 위해서 이 곳에 온 것도 아닙니다, 쿤씨."
"거창한 환영회군."
검사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쿤은 산주의 말을 아직 신뢰하지 않았기에 정맥주사에 항독소제와 수면제를 섞었다. 가히 살수라 여겨질법한 속도와 정확성은 적어도 그가 흑사회의 일원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무기가 작기에 리치가 짧아도 의사인 만큼 노리는 곳은 정확하고, 기술도 정교하다. 자식들을 용병으로 세워 돈벌이에만 써먹는다는 에드안이지만 실력도 좋고 의술도 따로 가르칠 정도면 꽤나 아끼는 인물이었을텐데 어째서 이런 곳으로 숨어들었는지 궁금증이 일 정도로. 동료가 거꾸러지니 산주의 뒤에 선 조직원들은 쿤이 입구로 걸음을 내딛자 전투 태세를 취했지만 선두에 선 비올레만은 고요히 다가서는 쿤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 이 아두운 곳에서 그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에 새하얀 피부. 현실감이 떨어지게 만드는 색채의 조합은 어둠에 내린 빛 그 자체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이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벽안. 무심해서 더 차가운 그 시선이 비올레는 싫지 않았다. 그의 목적이 불온한 것이라면,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곁에 둘까 싶을 정도의 욕망을 불태울 뿐.
"어떻게 해야 그쪽에서 믿어줄 지 모르겠지만 난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깐 쉬어가는 것뿐이야. 더 이상 방해만 않는다면 곧 조용히 사라져 주지."
"가능할까요? 당신은 누가 뭐래도 에드안의 보석. 특별한 취급을 받아 왔다면 그가 쉬이 버려줄 리도 없을 텐데요. 누가 당신을 이 곳으로 보내던가요? 본토? 아니면 공사관?"
"나. 난 스스로 온 거야. 아버지는 보내달라고 날 보내줄 위인도 아닐 뿐더러, 아직은 그 어느 쪽도 아버지에게 돈을 쥐어주지 않았거든."
"아직은?"
"그래. 아직은.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게 되어있으니 본토에서 구룡채성을 자기 손 안 더렵히고 밀어버릴 생각이라면 곧 아버지를 부를 수도 있겠지."
"......그럼 당신은 왜 이 곳으로 왔죠? 에드안이 그렇게나 당신을 총애한다면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을텐데요."
"그건 그런 보장을 내가 바랐을 때의 이야기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인지 문이 달려있지 않은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선 쿤은 비올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래도 의심된다면 감시라도 붙이던가. 그럴 능력 되잖아, 너."
"그래야겠네요. 하지만 착각은 마세요. 저희는 당신이 싫어서 경계하는 건 아니에요. 실력좋은 의사가 이 곳에서는 상당히 귀하거든요."
"감시도 하고 부려먹기도 하겠다?"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당분간 잘 부탁 드립니다. 저는 쥬 비올레 그레이스라고 해요. 당신은요?"
".....하던 대로 쿤이라고 불러.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이름 같은 거 알아서 뭐하게.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 난 다시 눈 좀 붙여야겠어. 저기 저 아저씨는 알아서 데려가고. 그냥 항생제랑 수면제니까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눈을 뜰거야."
"진료 감사합니다, 쿤씨."
"약이 남아있어서 준 것 뿐이야."
어차피 쿤에게는 곧 필요치 않게 될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에드안의 행보였다. 쿤 가문의 일원이 구룡채성에 있다는 정보가 과연 그의 귀에 들어갈까 싶지도 하지만 뒷 세계는 법의 그림자로 전부 이어져 있으니 쿤 또한 방심해선 안 되었다. 산주가 확인을 마쳤으니 삼합회도 곧 그런 인물이 자신들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알게될 터였다. 양지에서는 제대로 된 용병 법인의 오너라고 해도 그가 이면의 무기상이자 정보상이라는 것 또한 공공연한 사실.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
"쿤씨!"
자신의 부하 중에는 쿤을 상대할 실력자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감시역을 자처한 비올레는 그야말로 껌딱지처럼 쿤의 주위를 맴돌았다. 감시 자체는 예상했지만 이렇듯 연인이 만날 약속을 하고 다시 집에 바래다 주기까지 하는 분위기로 진행될지는 몰랐던 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전개라 할 밖에.
"전에 주신 거 한번 써 봤는데 생각보다 밝고 예뻐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충전은 어떻게 하는 거라고 하셨죠?"
"같이 준 전선을 쓰거나 건식 배터리를 쓰거나."
"전선을 어떻게요?"
"하긴.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콘센트가 있을 리는 없나."
사전에 조사를 해 본 바에 의하면 쿤이 이 곳에서 며칠간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은 몇가지 의약품과 전기, 그리고 빛이었다. 때문에 쿤은 쓰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의약품 몇 종 이외에 충전식의 램프 두어개, 호신용의 무기,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베터리팩을 챙겨왔다. 이들은 병원 영업과 쿤의 생활에 요긴하게 쓰였는데, 램프 중 하나가 충전된 전기를 다 써가기에 비올레에게 주었더니 그걸 또 근방의 아이들에게 자랑을 했던 모양이었다. 출중한 무술실력을 지닌데다가 이 근방을 관리하는 신분임에도 외양만큼이나 천진한 구석이 있는 비올레는 범죄조직의 일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평소에는 평범했다. 감시를 한다면서 늘 먹을 것을 챙겨와 쿤의 끼니를 이어주질 않나, 수하의 병원비 대신이라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가져오질 않나. 직접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들을 그가 해결해 준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와중에 이해할 수 없는 비올레의 호의는 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콘센트요?"
"전기를 공급해 주는 장치야. 도시에서는 흔하거든."
"그렇군요. 갑자기 이런 곳에 오게 되서 불편하시진 않으세요? 쿤씨는 도시에서도 좋은 곳에 사셨을 것 같은데."
"각오한 일이니까 관계없어."
"돌아가고 싶진 않으세요?"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쿤은 어줍잖은 각오로 이 곳을 찾은 게 아니니까. 불평이라 함도 분명 어느정도의 여유가 필요한 일인지라 지금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왜요? 좋은 집은 누구나 바라는 것일텐데."
"나라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돌아간다고 받아줄 사람도 아니고."
"뭔가 잘못 하셨나요?"
"내가?"
"어... 틀렸나요?"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란 게 없는 이 곳에서 의사는 그렇게까지 바쁜 직업이 아니었다. 이 곳 사람들은 죽을 병이 아니라며 인내하는 생활을 주로 선택했다. 아이나 소중한 사람이 앓아누워야 어쩔 수 없이 찾는 게 의사이니 바쁘면 오히려 지켜보기 안타까울지도. 여하튼 도시에서 지낼 때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 쿤은 감시자 보다는 아이들의 보모 같은 비올레의 감시 하에서도 어둠을 더듬어 근방을 돌아보거나 비올레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시간을 떼웠다. 쿤이 오히려 비올레의 감시자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으로 말이다. 느낀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을 보면 쿤은 도대체 비올레가 어떻게 산주가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생각 이외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기 때문에 틀렸다는 인식도 없이 수많은 생각들을 무너뜨리는 그를 견디다 못해 쿤이 떠나온 참이었다. 입으로는 수백수천번 소중하다 했어도 그는 쿤의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쿤이 그의 저택을 벗어난 뒤로도.
"쿤씨도 도망칠 곳이 필요하셨던 거군요."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니지."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뭔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이방인에게 그렇게까지 친절한 동네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저는 쿤씨가 이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거든요."
"하?"
영업중이라는 간판도 없는 쿤의 병원은 달랑 간이침대 하나만 있었는데, 환자 없이 의사만 있는 시간에는 그 침대가 쿤의 의자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런 쿤의 곁에 대놓고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비올레는 그와 함께 이 근처까지 왔던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골목을 누비게 두었다. 낮인지 밤인지 시간의 구분이 없는 곳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세상을 온전히 누릴 권리가 있었다. 삼합회는 밖에서는 악명높은 범죄조직일지라도 이 곳 주민들을 박대하지는 않았고, 때문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길 잃을 걱정도 없는지 제 세상을 누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비올레는 또 그런 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앉았다.
"쿤씨는 반짝반짝해요."
타고난 색채가 워낙에 밝은 탓에 쿤은 어두운 곳에서 더 눈에 띄었다. 밝은 곳이었다 해도 아시아계가 대부분인 이 곳에서 그의 이국적인 외모는 돋보였을 것이었으나 비올레에겐 당장이 더 황홀했다. 이방인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 그를 처음 본 순간에 반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치 빛과 같은 사람이라서, 이 곳에서 나고자란 비올레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삼합회에서나 자신의 부하들이나 쿤 가문은 대부분 쿤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비올레게 첫번째 쿤은 눈 앞의 그였으니까.
"곁에 있으면 밝아지는 기분이 나거든요."
게다가 그는 사람을 살릴 줄 안다. 죽이는 법만 아는 비올레와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뭍 사람들이 가리키는 대로라면 그는 비올레의 천사임에 틀림없었다.
"난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점조직의 산주가 됬는지가 신기하다."
"그게 왜요? 당연히 가장 강한 사람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는 거잖아요."
"네가 제일 강하다고?"
"그런데요."
"......."
"어.... 보여드릴까요?"
"뭘. 아니, 됐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이 비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아이들만이 뛰놀고 있는 곳에서 힘자랑이라니.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쿤은 확인에 대한 마음은 접어두었다. 사실 확인 같은 걸 해서 무얼 하겠는가? 비올레가 싸움의 달인이라해도 어차피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래도 한 무리를 이끄는 녀석이라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짓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아무리 할 일이 없다지만 비올레와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건 쿤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아이처럼 순수해서, 밖에서 별별 광경을 보며 쿤이 잊어버린 동심을 자꾸만 건들였다. 어차피 잠깐인데 모든걸 내려 놓는 게 어떠냐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루어진 방심이 결국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 것임을 알기에 쿤은 비올레의 한정없는 호의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두려 애썼다.
"우두머리라면 책임도 있는 것 아냐."
"지금 절..."
"산주!!"
비올레를 부르는 남자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쿤은 발을 걷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아 보이는 마경도 사람이 사는 이상엔 밖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 카이탁 공항의 비행기 소리가 구룡채성을 뒤흔들 듯이 밖의 세파는 성채의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영국이 이 땅을 중국에 반환하면 어차피 중국의 것이었던 성채를 포함하여 홍콩 전부가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될 것이다. 이후엔 이 곳도 역시 관리할 정부가 생기게 될 것이고 제대로된 치안조직의 관리를 받게 될 터였다.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는 구룡채성은 당연히 그 역사상 최고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그들의 영토를 지켜준 성채의 주민들을 중국 정부가 시민으로 받아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홍콩에 정착하길 원하는 불법체류자들은 성채로의 진입을 강행했다. 어차피 부평초 같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외지인의 출입을 막을 이유는 없겠으나 끔찍한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구룡채성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성채의 철거에 대한 이야기가 윤곽을 제대로 드러낸 지금, 밖에서 살기 위해 빠르게 돈을 긁어 모아야하는 성채민들에게는 이방인이 가장 노리기 좋은 표적이었다. 법의 개념이라는 게 없는 이들은 자기 발 밑의 사람도 가축으로밖에 보지 않았으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이방인 무리와 성채민들의 다툼은 일상화 되어 있었다. 오늘도 혼돈은 이어주는 중이었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조직원들의 고함에 밀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
구룡채성은 몸싸움을 벌이기엔 협소한 공간들로 짜여진 곳이었으나 비올레는 달랐다. 그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제대로 된 벽보다 그거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한 얄팍한 가벽이 더 많은 이 곳에서는 지형물과 적을 함께 부숴버리는 비올레 식 격술의 효용이 더 좋은 건지도 몰랐다. 어둠에도 방해에도 개의치 않고 흑표처럼 금안의 궤적만을 남기는 비올레를 보았다면 쿤도 그가 어찌 산주가 되었는지 단번에 납득하고도 남았으련만. 하지만 그런 일에 미련을 두는 일 없이 비올레는 자신의 영역에서 약탈을 시도했다는 난민 무리를 차례차례 격파해갔다. 그들의 사정도 건너 듣기는 했지만 비올레에게는 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한, 성채민들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라면 자신의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지켜내고 싶었다. 자신은 결국 '밖'에서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머물 곳을 허락했는데 왜 약탈을 감행한 겁니까."
"하!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 걸 허락한 거겠지 이 악독한 놈들!!"
"......."
약탈이란 얼마든지 무력 충돌을 예상할 수 있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사나흘 전에 악천후를 탓하며 외곽의 치과 두어개를 점거한 무리들 중에서도 약탈단은 건장한 사내들로만 꾸려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노려서는 안된다는 법이 없으니 삼합회의 일원들은 더러는 밖에서도 고가에 거래되는 좋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패기밖에 남지 않은 약탈단은 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심지어 맨손에 나이도 어린 비올레에게까지 제압당해 버렸으니 무력감이 악에 받힐만큼 차오른 건지도.
"이판사판인데 우리가 무슨 짓이든 못할 것 같아?"
"산주!"
"하게는 둘 것 같습니까?"
억지로 쌓아올린 건물들. 조금이라도 더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통로조차 없이 자리한 생활집기들. 그런 환경으로 인해 구룡채성은 확실히 화재에 취약했다. 같이 죽자는 말이 틀리지 않아서 폭도가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미제 라이터에 흑사회의 조직원들도 일부 당황을 감추지 못했으나 비올레는 차분했다. 어둠 속에서 더 눈에 띄는 빛. 그것만을 쫓았다. 붙을 붙이기 위해 기름칠을 해 두었을 그들의 공간에서 저 불꽃을 밀어내야 했다. 한 번에 해내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 없었다. 걷어낼 곳이 없으니 삼켜내는 것이다. 자신의 수하들이 그렇듯 수장인 자신 역시도 죽음은 두렵지 않으므로, 비올레는 화상을 입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라이터를 붙잡아 불씨를 꺼뜨렸다. 그 어디에도 쓸데없는 움직임 하나 없는 신속함이 냉정한 속내를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적나라했다.
"저도 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걸요."
달칵!
라이터가 닫히는 소리는 경쾌했지만 살갖이 눌어붙을 정도로 전체가 이미 달궈진 뒤였다. 산주의 화상에 격분하는 조직원들과 다르게 아까보다도 차가워진 금안에는 푸른 안광이 비쳤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선득해질 것처럼.
"악독하다고요?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
"산주. 잔당들의 말로는 이게 녀석들의 연락책이라고 합니다."
"주세요."
"저.. 손은..."
"곧 의사에게 보일 겁니다. 걱정 말고 그거나 넘겨 주세요."
휴대전화라는 것이 쓰이기 시작한지는 좀 되었지만 기지국이 없는 성채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먹통이다. 그러니 전파가 닿는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할텐데,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짧은 시간에 조직화하고 삼합회에 대항하는 데 그런 비효율적인 연락수단을 택했다는 게 비올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산주들은 그들의 구역에 이와같이 문제를 일으킬만큼 무리를 이룬 이방인을 불허하고 있었다. 외곽에 닿아있어 어쩔 수 없이 공간이라도 내어주는 것도 극소수. 심야 경비까지 하며 외곽에 터전을 둔 치과의사들과 매춘부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운 좋게 나뉘어 성채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다시 연락이 닿을만한 곳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비올레에게는 아직 묵직하게 느껴지는 휴대전화는 그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 비올레의 손에서 벨을 울렸다. 폭동이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는 뜻일까?
"산주?"
비올레는 자신을 부르는 조직원을 빈 손을 들어 멈추게한 뒤 전화를 받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사실 비올레조차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정보라도 건지면 성채는 더 안전해질테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이었다.
"거기 흑사회의 산주 계신가?"
전화 속의 목소리는 유쾌하게 비올레를 찾았다. 유창한 중국어였으나 억양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연락책이 아니라 비올레는 찾는 것 부터가 이상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다. 성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이 아니라 아마도...
"당신이 이들을 매수했습니까?"
"그런 잔챙이들에게 쓸 돈은 없지. 혀만 좀 굴리면 알아서 불에 뛰어드는데 말이야."
"단화씨, 아까 그 사람들.."
"듣던대로 무르군. 그 녀석들 사정 봐 줄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닐텐데, 쥬 비올레 그레이스. 성채 개방 전에 한 몫 챙기려면 네 수하들에겐 그런 희생양이 필요하잖아? 장기든 몸이든 팔아치울 수 있는."
"...왜 절 찾으셨죠?"
"거래를 위해서지. 자넨 그래도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까."
"절 한 번도 보지 못 하셨을텐데 뭘 믿고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난 자네를 본 적 없네. 하지만 아게로가 골랐다면 얘기가 다르거든."
아게로.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비올레와 같은 방식의 이름을 쓰는 이가 구룡채성엔 흔치 않았기에 그는 어렵지않게 이름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쿤. 전화 속의 사내가 원하는 것은 쿤이 틀림 없었다.
"당신이 쿤 에드안?"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 애를 데려온다면 자네도 자네의 조직원들도 '밖'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손을 써 주지. 이건 자네 인생에 다신 없을 기회야."
*
비올레가 찾을 의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상처를 입는 순간에도 쿤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에 내심 기뻤던 것 같다. 표정을 얼굴에 드러낼 시간이 없었거니와 에드안과의 통화 이후로 머릿속이 엉켜버려 아직까지도 여유는 생기지 않았지만. 무뚝뚝한 얼굴이라 그가 며칠간 봐 온 비올레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비올레를 병실에서 맞딱뜨린 쿤은 그가 말 없이 상처입은 손을 내밀자 역시 별 말 없이 침상에 끌어다 앉혔다. 화상을 입은 면적이 작기에 망정이지 화상 자체는 심각한 것이었다. 제대로 소독을 하고 깨끗한 거즈로 꼼꼼하게 드레싱을 해 나가는 쿤에게 비올레가 드디어 입을 뗐다.
"처음 뵜을 때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셨었죠."
"그래."
"여길 나가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세요?"
"알아서 뭐 하려고."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인가 싶어서요."
"그런 셈이지."
"언제 떠나세요?"
"곧."
"......저도 데려가 줄 수는 없으신가요?"
"내가 왜."
단호한 대답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런 비올레의 반응에도 무심하게 아직까지는 힘을 풀고 있어야 한다며 의사로서 저지한 쿤은 비올레가 원한 대답 대신 상처의 치료에 대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특히 물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거즈는 새 것으로 하루에 한번 정도는 다시 감는 것이 좋다는 것. 흉터는 남겠지만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못해도 3주 정도는 회복에 힘써야 한다는 것까지.
"그럼 3주 동안만 절 돌봐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그 전에 중공군이 몰려올 걸. 환수는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 "어차피 이 곳이 무너지면 숨을 곳도 없잖아요."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난 밖에서 왔으니 밖에서 살아가는 것도 문제 없지만 넌 아니잖아? 부하나 너 자신이나 모르는 사람 손에 아무렇지도 않게 맡겨버리고 말야. 그런 순진한 면을 보여주면 밖에서는 무사하기 힘들다고. 이 지경이라도 여긴 많은 이들의 피난처라고 했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밖은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라는 소리야. 좋은 집이 있고 빛이 있다 하더라도 훨씬 끔찍한 곳이라고. 넌 아무나 믿는 그런 점을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말을 마친 쿤은 치료비의 청구도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치료가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였을 터다. 그와 만난지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 비올레의 생각을 쿤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분명 무리겠지만 서운했다.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앞으로도 에드안의 눈을 피해 살아가려면 비올레는 방해라는 뜻일까? 그러는 쿤은 에드안이 구룡채성 밖에서 그가 제 발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내일 다시 올게요."
"......"
"그 때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에드안의 손길이 미치기 전에 그가 비올레의 손을 잡아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지금의 마음이 비올레를 뒤틀어 버리지 않을테니까.
"하아.."
비올레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쿤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형형한 눈빛을 뿜을 때의 그는 삼합회의 일원 다웠지만 그 밖의 행동에서는 생각이 죄다 읽혔다.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매달리는 것을 보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 없었다. 심한 화상을 입고도 아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정도로 싸움에 익숙한 그가 동요하는 것을 보면 성채의 개방과 관련하여 엄청난 사실을 들었거나....
'아버지..겠지.'
삼합회를 통해 에드안에게 자신의 정보가 알려지기를 재고 있던 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비올레에게 에드안의 접촉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캐물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그는 쿤이 이 곳을 떠난 이후에도 그를 찾아내려 한동안은 애쓸 것이다. 그리고 에드안 또한 자신의 흔적을 놓칠 리가 없으니.
'내 일정이 궁금해 진 걸 보면 아무래도 아버지겠지. 성채에서 나고 자란 비올레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개방 자체를 와 닿게 느끼긴 쉽지 않을테니.'
고대하던 시간이 왔으니 쿤은 기다릴 것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올레에게 줄 새로운 대답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늘 이 곳을 나갈 거니까.
*
불. 불이 났다. 구룡채성은 물리적 구조상으로도 사회적 구조상으로도 화재에 취약했다. 때문에 비올레가 몸을 던져 그를 막았건만, 늦은 저녁에 다시금 들이닥친 화마는 흑사회가 아닌 임화문의 구역에서 시작되었고 삽시간에 중앙까지 번졌다. 유치원과 양로원이 있는 중앙에는 그래도 구호인력의 거처가 있어서인지 대응이 빨랐다. 성채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화재현장을 찾아 손에서 손으로 물을 길러 날랐다. 굳 철거될 건물이라지만 그들의 터전은 이 곳이었기에 갑작스레 찾아온 빛이 반갑지 않았다. 제대로 된 소방수도 화재에 대한 조사를 할 감식반도 없었지만 구전되는 이야기로는 합선이 화재의 원인이라고들 했다. 훔쳐 쓰는 전기였지만 수요가 많았기에 아무렇게나 전선을 이어붙여 전기를 사용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제대로된 관리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언전가는 일어날 사고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채가 자신의 수명이 다 하고 있음을 성채민들에게 알리는 중일지도 몰랐다. 씁쓸하게도 성채의 개방은 성채민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인 것이었다. 개운치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 삼합회의 인솔에 따라 비올레 역시 부상자임에도 화마의 제압에 앞장섰다. 움직이지 말라는 것도, 물이 닿으면 안된다는 것도 전부 들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짓물이 터져 엉망이 된 거즈를 갈기 위해 계획보다 일찍 쿤의 병원을 다시 찾은 비올레는 묘하게 평소보다 넓어보이는 공간에 고개를 갸웃 했다.
"쿤씨?"
그가 가져온 집기의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옷과 약은 그대로인데 뭔가가 비었다. 밖에 대해 잘 모르는 비올레에게 쿤은 그것을 베터리라고 설명해 주었었다. 전기를 저장하고 공급하는 장치라고. 마음을 주었음에도 비올레는 쿤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지만, 밖에서 그 에드안에게 여러가지를 배워온 쿤은 비올레에 비해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영리한 그가 여기까지 베터리를 챙겨온 것이 단순히 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비올레는 생각했어야 했다.
"쿤씨!!"
비올레의 행동이 쿤에게 그리 큰 위협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뭔가 알아챘다면, 움직였을 수도 있다. 비올레는 쿤의 목적을 모르니 그가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지 예상할 수 없지만 미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합리적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방금 성채에 불을 지른 게 쿤이 아닐까 하는. 비올레는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자리를 비웠고, 다른 감시자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번 큰 일을 겪어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산주로서 쉽게 무너질 수 없는 비올레는 숨을 불어내어 흑사회에 소집령을 내렸다.
"쿤 가문 의사를 붙잡아 오세요. 지금 당장."
*
우려와는 달리 수많은 철거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구룡채성의 철거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성채 철거 전에 일어난 몇몇 사고들이 성채민들에게 그 곳이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덕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성채의 철거는 홍콩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에 대단한 뉴스거리로 연일 대서특필 되었다. 심지어는 마경의 철거를 보러 홍콩을 찾는 관광객까지 있을 정도로 여파는 엄청났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장신의 남자 또한 성채의 철거 모습을 눈에 담고 근처의 가판대에서 1면에 성채 철거 소식이 담긴 신문을 샀다.
"지금은 '스물다섯번째 밤' 군이라고 했나?"
"......."
"아무래도 아게로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자네인 모양이야."
"이미 조사는 끝냈을 것 아닙니까."
"그랬지. 하지만 워낙 영리한 아이라서 말이야. 생사조차 알 수 없더군."
"그래서요?"
"자넨 그 애가 살아있을거라 생각하나 죽었을 거라 생각하나."
성채의 잔해를 향해 셔터를 누르기 바쁜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공원의 난간에 등을 기댄 에드안은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짧은 머리 소년에게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말을 걸었다. 어찌보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통화까지 한 사이니까 말이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야박하군."
"......."
물론 밤이 원하는 건 쿤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단서를 붙잡기 위해 밤은 아직까지도 성채의 망령처럼 여태 이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에드안 또한 그럴 것이다. 그가 직접 걸음한 이유에 대해서 밤만큼 정확하게 이유를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까.
"저는 쿤씨를 잠깐 밖에 보지 못해서 가끔 제가 꿈을 꾼 건지 신기루를 본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는데, 당신을 보니 그렇진 않은 모양이네요. 다행스럽게도."
"이게 다행인가?"
"네.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럼 좀 더 확인해 볼텐가? 나는 아직 그 애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거든."
"쿤씨는 당신에게서 도망쳤으니 살아있다고 해도 당신 곁으로 돌아오진 않겠죠."
"....."
"그래도 같이 갈게요. 저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고, 당신처럼... 확인받고 싶으니까."
이 글은 트친이신 오복님(@obok_5)의 리퀘스트였습다.
구룡성채 밤쿤이라 중화풍 느와르를 썼어야 했는데 이런 되디만 글이라 죄송합니다 ㅠㅠ
오랜만에 썼더니 더 엉망이네요..
오복님께서 예쁜 눈으로 자체필터 해주세요 부디 ㅠㅠㅠ
편집은 시간 나는 대로 다시 하겠습니다..(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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