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8.16 - 25

신의 탑/하루 글감







8.16 - 평화

평화란 이 세계에서 가장 헛된 단어이지 않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생각 없이 시선을 둔 창 밖은 오랜간만의 정적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어울리는 침묵. 이 고요함 조차도 얼마만이던가?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건 예고 없이 시작될 적의 공격에 조금이라도 더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이제 햇수로 쌓이기 시작했는데, 평화라는 건 과연 탑에 존재할 수 있는 개념일까? 별보다도 더 전설같은 그런 이야기가 아닌가.





8.17 - 우정

누군가가 묻는다면 '친구'라고 대답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하츠와 쿤의 우정은 많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어째서 그 녀석을 신뢰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신뢰가 아니라고 대답했잖아.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전력은 뭐가 됐든 써먹어야 하는 상황인데 찬 밥 더운 밥 가리게 생겼냐고."
"녀석은 우리의 적이다."
"어쩌다보니 당장은 같은 부유선을 타게됐고 말이야."

사소한 일에도 의견일치를 보는 경우가 잘 없긴 했다만 최근의 논쟁은 쿤의 말처럼 어쩌다보니 일행에 합류하게 된 FUG의 슬레이어 화이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만한 전력이 드물기 때문에 쿤은 FUG의 슬레이어들이라 할지라도 이용가치가 있으니 이용한다는 주의였는데, 하츠는 한 때 적이었던 그들의 손을 빌린다는 게 영 못마땅한 듯 했다. 게다가 화이트는 하츠와 같은 검사였으니 다 눈에 밟히는 것인지도.

"그런 녀석의 손을 빌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너 말고 다른 애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우리가 원하는 건 좀 더 위에 있잖아?"
"........"
"이 참에 잘 봐 뒀다가 네가 아리에를 뛰어넘는 검사가 되면 더 좋고."

큰 소리에 시선을 끌었다가 정리될 쯤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까지, 참으로 곤란한 두 사람의 우정이랄까. 도발이라고 해야할까 유혹이라고 해야할까. 묘한 미소를 띈 채로 쿤은 하츠의 귓가에 무언가를 더 속삭이는 듯 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수는 다시 오늘의 뉴스를 읊는 쿤의 등대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재밌겠지만 저 녀석 너무 티나서 보는 사람이 신경쓰인다니까, 쿤."







8.18 - 고정관념

"왜들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인 거 이제 알았어?"

갑자기 열린 부유선의 해치가 동료들을 쏟아내는 걸 똑바로 보며 쿤은 그렇게 말했다. 이건 배신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수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니까 완벽한 연기로 쳐 줘야 하는 걸까나? 쿤은 스스로를 가리켜 무리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자주 말했다. 주저하는 동료의 무기를 빼앗아 적의 숨통을 기어코 끊어 놓을 때도, 배신자를 자기 손으로 끝내겠다며 혼자 떠날 때에도.

"...함정이었던 걸까요, 그 때의 거래는."
"글쎄. 단정 짓긴 그렇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
"......저는 사실.. 우릴 배신하더라도 쿤 씨가 살아 있길 바랬어요. 라헬과도 다시 손을 잡아야 할만큼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이건 누구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는 문제야, 밤."
"누구 탓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두번째 배신은 처음의 상처까지 관통해 들어왔기에 훨씬 더 아프고 괴로웠는데, 그 괴로움이 거짓말이었다니. 그리고 그 다음에 무너지는 마음은 그보다도 괴로운 것이었다니.

"왜 연기라는 걸 알면서 계속 속아준 걸까요? 쿤 씨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시작부터 손을 내밀어 주었고, 동료들을 위해 그들이 꼬리는 일을 마다 않았고,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써서 동료들을 여기까지 이끈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얄팍한 감정에 속아 추모할 시간마저 놓처 버렸다는 게 밤은 억울하다 못해 분했다.

"죽었다는 것도 아니잖아. 아직 가능성은 있어."

그런 식으로 밖에 벌 수 없었던 시간은 다행히 귀중히 쓰였다. 밤의 어깨를 도닥이는 이수의 눈빛이 전에 없이 결연했다. 슬퍼할 때가 아니라면 밤도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신의 고정관념에 속는 일은 없을 터였다.







8.19 - 진짜 이유

"괜찮겠어? 신수를 봉인당한 친구들을 그렇게 내동댕이 쳐 버려도? 이미 고도가 꽤 높다고?"
"닥치고 본론만 말해. 누가 보냈지?"
"누가 보냈는지가 중요한가? 어차피 넌 그들에게 돌아가지 못할텐데."
"10가문이라고 모두 자하드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잖아? 당신도 그 중 하나니까 나한테 틈을 준 거 아냐. 목적이 뭐야? 비선별 인원?"
".....쿤 가문에 머리 쓰는 녀석이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함정이라는 게 늘 그렇 듯, 상대의 이야기에서는 혹할만한 구석이 있었다. 10가문 중 일부는 자하드에도 FUG에도 협조하지 않는 중립을 원하고 있으니 그들과 휴전 협정을 맺자는 게 밤을 끌어낸 계기가 되었다. 양 측은 신수를 봉한 상태로 이송 또한 상대의 선에 맡길 것. 서로가 그러니 공평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도착하면 알게 되겠지. 10가문이 자하드와 FUG를 둘 다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행동에 나선 진짜 이유를."







8.20 - 해 질 무렵

해 질 무렵이 되자 노을은 금방 세상을 뒤덮었다. 찬란하게 익어가는 만물의 모습은 낭만의 대명사로 이런저런 로맨스 작품들에서 연출되곤 했지만 쿤에게 이 무렵은 딱 한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쿤! 많이 기다렸어?"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오늘은 약속 없다며."
"그랬는데 오다가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서.. 걔가 이사를 가서 같은 학교 다니는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그런데 아까 계단에서 딱 마주친 거 있지!"
"그래서 날 까먹으셨다?"
"아하하.... 미안해, 쿤. 대신 내가 가는 길에 닭꼬치 사줄게! 형이 월급 탔다고 용돈 줬거든!"

본래부터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을 내는 금발에 노을이 물들자 득의양양한 표정의 왕난을 한층 더 찬란하게 만들었다. 같은 색의 눈동자 안쪽으로 하늘 빛을 따라 심홍색이 고이는 게 이리도 아름답건만 왕난의 하찮은 변명과 유치한 보상은 쿤의 감상을 잘도 깨어 놓는다. 하긴. 학교를 넘어 동네 제일의 인싸와 친구라고는 왕난밖에 없는 쿤의 시간이 어떻게 똑같이 흐를까? 오늘도 져 주는 것밖에는 묘안이 없는 쿤은 괜히 아르바이트 하는 착실한 형 등골 빼 먹지 말라고 으르렁대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8.21 - 시작과 끝

탑의 왕에게는 수많은 모조품이 있었다. 그가 운명을 연주하기 위해 고안한 도구이자 소모품들. 최후의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왕난의 미래야 불보듯 뻔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을 살릴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 왕난을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네 시작은 될 수 없어도 끝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들리지 않을 고백을 낮게 읊조리며 왕난은 눈을 감고 가슴을 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여로에서 왕난을 거쳐갔던 이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먼저 떠나간 이들도, 함께 탑을 오르던 자들도. 왕난의 인생에 족적을 남긴 이는 많지만 묘하게도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인물은 니아도, 아크렙터도, 비올레도 아니라 쿤이었다.

"내가 널 떠나는 마지막 동료야, 쿤."

더 이상 너는 누구도 잃지 않게 해 줄게.








8.22 - 버림

쿤 에드안의 버림받은 자식들. 10가문의 수많은 폐단 중에서도 유명한 축에 드는 것이다. 고작 10살에 서로를 향한 상쟁의 장에 내몰린 쿤 가문의 아이들은 그 때의 승패로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이는 진정한 쿤 가문이 되기 위한 첫번째 관문에 지나지 않으나, 부러 가까이 지내던 아이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그의 방식은 문 밖의 사람들의 혀를 차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가문 밖으로 버려진 아이들은 10가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에게 팔려가 학대 끝에 죽거나 고운 외모를 보고 포주의 손에 걸려 평생 몸을 팔거나 했다. 가문의 지원이 없으니 헤돈의 선별이 아니고서야 탑을 오를 수도 없었고, 의외로 강자가 즐비한 탑의 최상부에서는 핏줄의 힘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내가 언제 널 내 손으로 버린 적 있더냐, 아게로."

누이의 공주 선발을 망친 것도, 아버지의 보물에 손을 댄 것도 모두 스스로의 선택. 무신경했을 뿐 버리지는 않았다는 에드안의 말은 나름 논리를 가지고 있긴 했다. 아게로는 여하튼 에드안의 첫 시험을 통과한, 일종의 '선별된' 그의 아들. 버렸다는 표현은 가당치 않았다.

"그러니 내가 아직 네 주인인게지."








8.23 - 다시 시작

많은 사람들이 진성에게 다시 시작하라 조언했다. 고작 첫 사랑을 잃은 것 정도로 유망한 인재인 그가 주저앉아 버려서야 되겠냐고. 하지만 시작이란 쉬운 법이 없어서 진성은 그리 쉽게 그녀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같은 10가문을 무수히 죽이고도 분은 풀리지 않았고,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자하드 왕가와 10가문을 보면 무력감만 몰려올 뿐이었다. 사랑 같은 감정이 싹틀 수 없을 만큼 진성은 황폐해졌다. 10가주를 상대하기 위해 슬레이어를 길러내면서도 공허감이 깊어갔다. 아마 다시는 새로운 시작을 맞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본인조차 포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깨어난 감정에 스스로 동요하는 것을 보니.








8.24 - 냉정

넌 밤과 관련된 일에는 너무 감정적이 되는 경향이 있어.

맞는 이야기였다. 현재 설정한 인생은 목표인데 그 쪽에 냉정해 지라는 건 그게 쿤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요구하는 대로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그를 따라가면 쿤이 기대하는 것이 있나? 그의 길을 방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이 모든 기대가 허황된 공상은 아닌가? 아니면 단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아버린 거였을까?






8.25 - 철이 들다

"넌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

한숨처럼 말하곤 했지만 사실 쿤은 철이 든 사람에겐 흥미가 없었다. 그의 동료들을 하나하나 뜯어본다면 누구든 쉽게 그의 이런 취향을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어떤 일이든 막무가네로 진행하는 비션별 인원, 철은 커녕 생각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네이티브 원 악어 한마리, 걸핏하면 검부터 뽑아드는 검사에 공상같은 꿈을 꾸는 자칭 왕자, 철이 든 것 같다가도 동료들의 의견에 휩쓸리면 답이 없는 재수생 큰형님에 남의 말을 언어로 해석하지 않는 공주님 둘까지.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건 아직 꿈꾸고 있다는 말. 아직 날것인 그들의 모든 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운지.
















이번에 유독 짧게 친 부분이 많은 것은 저의 체력 문제 때문입니다.
숙제를 미루지 맙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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