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8.6 - 15

신의 탑/하루 글감





8.6 - 도시락

봄 꽃이 피면 소풍을 가자고 했다. 도시락을 싸서 꽃그늘아래에 자리를 잡고 꽃과 음식을 함께 즐기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이다.

"그러고 나서 진짜로 봄 소풍을 갔던가요, 오라버니?"
"봄이 온 것 조차 잊고 살았지."
"그랬군요. 어쩐지 언니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했어요."
"누나는 가겠다고도 안 했거든?"
"그럼 제 허망한 꿈을 지켜주신 게 오라버니셨단 말씀인가요?"
"그 뜻이 아니라..!"

날카롭게 벼린 칼을 손에 들고 갑자기 꿈을 꾸듯 과거로 빨려들어갔던 키세아를 같은 몰골로 마주하고 있던 아게로는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 눈빛마저 바뀌자 때가 되었을음 직감했다.

"그랬겠죠. 오라버니께서는 이상하게 무른 면이 있었으니."
"......"
"마리아라는 그 계집에게 놀아난 것도 같은 이유이실 테고요."
"멋대로 해석하지 마. 그 녀석과 난 거래를 했던 것 뿐이야."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 지금은 순순히 제게 잡혀 주셔야 겠어요. 당신의 그 얄팍한 죄책감을 이용해서라도."





8.7 - 우리 사이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니."

참으로 뻔뻔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기에 아게로는 다가오는 아버지의 안면 중앙을 발바닥으로 꾹 찍어 밀어냈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그렇지 서로 간의 프라이버시가 있을 나이건만 오밤중에 남의 침대에 기어오르다니.

"남보다 못한 사이 아니던가요, 아버지."
"저런저런 그리 말하면 서운하지. 남보다 먼 사이니 이제부터 연인이라도 되어볼까?"
"미친 소리 그만하시고 용건이나 말하세요. 확 말도 놓기 전에."
"쿡쿡쿡. 그건 내가 허락하지 않지. 용건이라.. 그래. 네가 봐 줬으면 싶은 아이가 있다."

안면을 밟힌 것은 타박하지 않지만 높임말은 꼭 써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지적하려는 차에 에드안은 직접 아게로의 발목을 잡아 내리고 금새 거리를 좁혀왔다. 아게로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신장 차이가 제법 나기에 에드안의 커다란 손에 아게로의 얼굴은 쉽게 잡혔다. 똑같은 색채의 파란 눈동자에 빙긋 웃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걸 에드안은 입과 달리 차게 식은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이번 일을 잘 끝내 준다면 잠시간은 이 '보물창고'에서 나가는 걸 허락해주지. 어찌할테냐, 아게로."





8.8 - 바닷가

자신이 선택한 동료들이기에 쿤은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편이었지만 혼자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그보다 귀했다. 시험 동기들 중에 유명 인사가 워낙 많은 터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다보니 조용한 시간 자체가 많지 않은 까닭이었다. 이 때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은 의외로 그 답지 않을 법한 공상들인데, 최근의 것들은 모두 바다와 연관이 있었다. 탑은 광활한 세계를 품은 건축물이었고, 신수로 가득 차 있어 갖은 종류의 신해어가 득실거린다. 지게나와 같이 거대한 신해어가 사는 곳을 탑의 사람들은 바다라 일컬었지만 탑 밖에서 왔다는 밤이나 라헬의 이야기들로 미루어 추론해 보자면, 어떤 구조물 안에 들어차 있는 물에 바다라는 이름이 붙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싶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탑 밖의 바다란 또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 밖의 신수는 탑 꼭대기의 신수보다도 농도가 짙기에 비선별인원들은 그 어떤 신수 속에서도 자유로운 것일까? 생각의 말미에서 쿤은 홀로 바닷가를 거니는 자신을 떠올렸다. 비선별인원들처럼 신수의 축복을 받은 체질은 아니기에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은 파도가 치는 큰 물의 귀퉁이 정도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곳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백사장을 걷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모든 등대지기가 그러하듯이.





8.9 - 두려움

그는 태양이되 태양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금속광이 차가운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혀끝마저 굳어버려 동료들에게 도망치라는 말도 뱉지 못하는 채로 아게로는 휘광 속을 헤쳐나온 금빛 그림자에 시선이 못박혔다. 밤의 곁에 있는 내내 적이라 세뇌될 정도로 들어왔던 자하드라는 이름. 그 이름의 주인임이 분명하다는 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금,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정적이 모두를 무섭게 내리눌렀다. 기류 조차도 그의 허락 없이는 흔들릴 수 없는 듯한 위압감. 시선의 교차로 자신의 모든 것을 관통당하는듯한 느낌. 그리고 경외감.

"내게 두려움을 느끼는가, 탑의 피조물들이여."

신의 목소리라 생각될만큼 신성한 목소리가 알 수 없는 언어처럼 들리는 문구를 읊었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을 것도 같은 문장이었다.








8.10 - 자잘한 즐거움

두 사람이 친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만 남아있는 벙커는 조용했다. 팀의 머리라는 건 세상의 판도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그 둘 뿐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기에 다음 작전이든 시시콜콜한 인생사든 물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고즈넉함을 두 사람은 모두 좋아했다. 지시할 것도 없었다. 이수와 쿤은 상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싫어하는 부분은 상대가 피했고 좋아하는 부분은 기꺼이 나누었다. 드문만큼 자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침묵이 열이 오를만큼 꾀를 짜내던 머리를 식혀주는 기분이 들었다.








8.11 - 매일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작은 호기심이었다. 얼굴만 봐도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알만한 도련님이 모두가 죽었다 이르는 사람의 흔적을 쫓던 때부터 키워온 호기심. 그가 밤이라는 소년을 놓을 수 없다면 밤이 그를 놓게 만들면 어떨까? 물론 미카엘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는 손을 빌렸다. 우정으로 묶인 그들을 떼어내고 죽음을 가장하기에 마침 가장 좋은 시절이었으므로.

"당신 같은 사람이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매일을 그리워하고 곁을 지키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건만 그리도 쉽게 당신의 죽음을 믿다니."
"......"
"천금같던 당신의 애정이 아깝지는 않냐고 묻는 겁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만큼?"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죽었다. 그리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강석보다 굳게 닫힌 얼음 속에 고요히 잠든 그를 본다면 살아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터. 그러나 과거에도 그 차가운 죽음에서 깨어난 바가 있는 그가 저 상태라 해서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해답은 먼 미래에 있겠지만 미카엘은 그 때가 올 때까지 문제의 유일한 힌트를 숨겨놓기로 했다. 밤이 그를 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손길은 끝끝내 거부한 그에 대한 치졸한 복수랄까?

"그럼 우리의 매일은 항상 헛되이 쓰여왔던 거군요."






8.12 - 표현

란은 굳이 아게로의 방을 찾아 누워있는 이유에 대해서 방해꾼이 없기 때문이라 답했다. 팀원들은 물주이자 리더이며 참모인 아게로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했고, 덕분에 그의 개인실은 항상 조용했다. 무엇보다도 란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노빅이 없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차니스트, 란은 아게로의 일을 크게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게로는 란을 내쫓는데 그렇게 열을 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란은 그가 필요해서 영입한 것이었으니 사소한 것은 맞춰주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받게된 란은 뜻하지 않게 이복형제를 주의깊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란의 어려보이는 외모는 란을 동생으로 보이게 만들었지만 성장 속도도 제각각인 탑에서 외견과 외모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란 쪽이 형이라고 하면 보통 설명할 일이 더 많아져 귀찮기만 하고 중요한 사실도 아니라 누가 묻지 않는 한은 둘 중 누구도 먼저 사실을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게로도 딱히 손 윗사람 대접을 하기보다는 아는 대로 두는 편이 명령하기 편하다 여기는 것 같았고. 여하튼 중요한 것은 아게로가 에드안 일가의 형제들 중엔 막내 쪽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쿤의 가주인 에드안은 하루에도 몇 명씩 란의 형제들을 만든다고들 했지만, 아게로 남매를 얻은 이후로는 그가 예전만큼은 색을 즐기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게로가 에드안의 창고에 갇히기 몇 달 전부터 아버지는 그를 피해 다니는 아게로를 한사코 찾아내어 얼굴도장을 찍고 갔고, 아게로가 끝내는 그의 창고를 털어 내탑으로 도망칠 것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결국 그 곳에 가두었다. 에드안의 관심 덕에 형제들에게 견제 대상으로 낙인찍혀 고생하는 걸 알고 보호하려 했다기엔 탐탁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그도 그럴게 에드안의 눈인사는 아게로의 생존 확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또래의 형제들에게는 아게로를 죽이는 자를 아껴주겠노라 이야기하기까지 했다니, 매일이 목숨을 건 술래잡기 같았을 아게로가 그 원인이 되는 자를 애정했을 리가. 다만, 아둔한 어린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곧이 믿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형제들 중엔 아게로가 특별한 무엇이라는 걸 눈치챈 자들도 많았다. 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A.A.”
“왜.”
“넌 왜 가문을 버리지는 않는 거냐?”
“내가 버린다고 뭐가 달라져? 누구든 날 보면 쿤 가문이라고 할텐데.”
“.......”
“의미 자체를 바꾸려면 다른 누군가가 가주가 되는 수밖에 없어.”

그들은 아게로가 정말로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란만큼은 아니라도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쿤의 가주가 아게로를 당장에 죽여버리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에드안은 가주라는 자리에 크게 미련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의 밑에 있는 것 보다는 군림하고 싶으니까, 마음대로 미인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때문에 그는 가주 자리에 대한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게로의 존재가 그의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니 그는 자신을 꺾을 운명이라는 어린 아들을 괴롭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에 차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싸우라 부추겨도 외려 이미 랭커급으로 장성한 형제들에게는 관여 말라 이야기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에드안의 부성애는 제법 기묘해서 아게로는 덕분에 상당히 강하게 자라기는 했다. 판을 짜고 뒤집는 혜안을 포함해서. 물론 그렇다고 에드안 식의 특별 과외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부추김대로 가주 자리에 도전하겠다 이를 갈게 되었을 뿐이지.

"그러는 너는 잘 되가?"
"뭐가."
"네 누나를 죽일 준비."
"......그래."

쿤의 가주도 꺾을 아게로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이 해결된 기분인지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 얽히고 섥힌 쿤 가문의 존보 중에서도 유일한 친누나인 마스체니 자하드 공주를 란이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고 한 건 그것이 그녀의 염원이기 때문이었다. 강자와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을 꿈꾸는 그녀는 불세출의 천재가 자신을 죽이러 오길 진심으로 바랬고 그러기 위해 란과 그녀의 생모를 죽였다. 더 이상의 형제는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녀는 아게로에게도 눈독을 들였다. 아게로는 그녀의 숙원처럼 에드안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곧 흥미를 잃었지만, 동생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줄곧 해 왔다. 왜냐하면 란은 형제라거나 생명의 은인이라는 관계 이상으로...

"오랜만에 생각했더니 피곤하다."
"넌 정말 천재라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걸? 막상 란쪽은 보지도 않고 등대를 조작하는 그의 옆모습을 물끄럼히 바라보다 란은 눈을 감았다. 란은 자신의 입으로 연심을 표현하진 않을 테다. 불편한 관계라는 건 지금보다 란을 더 피곤하게 만들 테니까. 아게로는 란의 연정만이 아니라 관계를 뒤틀기 싫은 마음까지도 알아서 가끔 란이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려도 받아주는 것일테지. 그래. 그 이상은 서로에게 귀찮을 뿐이야.








8.13 - 적절한 순간

딱 적절한 순간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화이트는 방 문에 노크했다. 곧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왔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그는 방의 주인이 아닌, 뭔가 심통이 난 것 같은 표정의 슬레이어 후보와 먼저 눈인사를 나누었다.

"넌 또 무슨 일이야?"
"10가문에 대해 재미있는 소문이 돌고 있길래 말이지. 짐과 다시 한 번 거래할테냐, 쿤?"
"뭐..? 이렇게 난데 없이?"
"가주의 목을 노리는 자들끼리 어울려보자는 거지."

화이트가 슬레이어 후보에게 직접 압력을 넣지 않아도 이런 화제가 나오면 쿤은 알아서 그에게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작별을 고하건 했다. 전쟁까지 일으킨 사내라면 이미 그로 인해 죽은 사람도 수천수만에 이를텐데 여태 그가 토끼 한마리 죽이지 못하는 소년으로 보이는 건지 쿤은 쥬 비올레 그레이스가 듣는 모든 이야기의 검열을 참으로 철저하게도 했다.

"밤, 이따가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리고 넌 나 좀 봐."
"그러려고 짐이 직접 온 것 아니냐."
"아니!!"
"짐도 저 자의 가치를 인정하긴 한다만.."

구스트앙과 대면한 이후부터 영혼의 힘이 부족했던 화이트를 봐왔기 때문인지 선별인원 따위가 화이트에게 한 소리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통탄할 노릇이지만 그는 화이트에게도 이용가치가 있는 인물이기에 당장의 무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도끼눈을 뚜고 달려드는 쿤의 손목을 잡아 품으로 끌어들인 화이트는 쿤의 등 뒤에서 그보다 훨씬 살기 등등한 눈을 하고 있는 슬레이어 후보를 넘겨보며 피식 웃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당장 널 지킬 검 아닌가? 날이 없는 검으로는 무엇도 지킬 수 없을텐데."







8.14 - 하고 싶은 말

탑의 정상이라는 게 꼭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층을 눈 앞에 둔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시험의 시작점, 시험의 층에서 처음 만나 마지막까지 인연을 지켜낸 건 결국 두 사람뿐. 긴 여정에 새로운 동료도 많이 만나고 또 잃었지만 그 중 함께 쌓은 시간이 가장 길다는 건 특별함으로 치환될 수 있는 개념 아니겠는가?

"어이, 곱등이."
"곱등이 아니거든?"
"나한테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무슨."
"그런 거 있잖아. 버스 태워줘서 고맙다거나?"
"시험 시간에 안 늦게 내가 깨워준 거에 대해서 감사해하기나 해라."
"악!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마지막이란 참으로 홀가분한 것인데, 막상 끝내자니 아쉬운 기분이 들어서 소녀는 문이 아니라 애꿎은 동료에게 달려들어 괜히 머리를 콩콩 내리쳤다. 너무 세게 치면 로의 머리가 눌린 귤처럼 박살나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름은 살살.

"누가 먼저 꺼낸 얘긴데!"
"마지막까지 무드 없잖아 황금 곱등이!"
"곱등이는 무드 있냐, 이 들소 같은 공주야!"
"오! 들소는 좀 멋있다."
"...누가 널 공주로 추천했는지 알굴 좀 보고싶다, 정말."

시시콜콜한 잡담들로 덮어버린 마지막. 어느 누구도 하고 싶은 말을 허심 탄회하게 내어놓진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음이 있는 거니까. 시원한 성격의 두 사람은 후회 없이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서로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8.15 - 운명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지."

탑의 왕은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아게로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직 그의 동료들 중에 왕에게 도전할만한 인재는 없었기에 왕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도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내야 했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면 죽는다. 그러니 다른 동료들 중 누구든 끌어들여서는 안 되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자. 최대한 많은 사람의 장래를 위해서는 아게로 혼자 조용히 죽는 것이 최선이니까.

"왕이 된 자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낼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그를 꺾을 자가 나타나는 것 또한 운명이라면, 어째서 내가 저항하리라고는 생각치 않는가."

목소리가, 눈빛이 그라는 존재를 아게로의 뇌리에 새겨넣는 듯 했다. 그만한 무게감이 아게로를 짓눌렀다. 그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잃을만큼 압도되는 기분. 굳은 듯 멈춰선 소년에게로 드디어 닿은 금빛 왕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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