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7.16 - 25

신의 탑/하루 글감






7.16 - 죄책감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게로."

대답이 없는 그에게 어머니의 사과는 끝없이 이어졌다. 사과라기보단 그녀의 뒤늦은 후회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아게로의 가슴 속에 납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그녀의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아게로를 꾀주머니 그 이상으로는 봐 주지 않던 어머니였다. 아게로의 불만이 일탈로 터져나오고, 자신 대신으로 모든 것을 걸었던 장녀는 자결로 덧없이 떠나고 나서야 되뇌이는 후회는 분명 한참은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정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은 아게로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게 왜 이제서야. 서로에게 후회밖에 남지 않을 짓을 하고 나서야. 묵직한 통증을 견디느라 내리닫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며 아게로는 흐느끼는 것만 같은 어머니를 바로 보았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용서하지도 마세요."

부러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세상을 등진 친누이보다 그녀를 제물로 가문을 떠난 이복누이가 더 간절한 괴리를 만든 것이 어머니였으나 이제 대가를 치뤘으니 얼마든지 아게로를 원망해도 좋았다.

"그래야 제가 제 방식대로의 속죄를 멈추지 읺을 테니."

당신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내가 당신을 구원할 수 있게.






7.17 - 종착역

탑의 꼭대기가 여정의 종착역이라는 건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그 옛날 '위대한 여정'이라 잔해지던 13명의 비선별 인원들이 따라갔던 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 갈라서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마지막 하나의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터였다. 탑의 진정한 꼭대기, 별이 펼쳐진 밤하늘이 존재하는 세상. 부모님의 염원이 이루어질 순간 앞에 밤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탑의 어디든 갈 수 있는 저도 135층에는 가지 못했답니다.

이죽이는 듯한 표정으로 헤돈이 읊조렸던 경고는 그의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은 갓 같았다.







7.18 - 그늘

"아, 미안. 혹시 내가 깨웠어?"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굳이 필요할까? 대답 대신 아게로는 잠기운이 그득한 눈으로 팔을 뻗어 이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너는 더 안 자고."
"하하. 교대로 일하기로 했자나. 그래야 쉴 때 확실히 쉬지."
"내일 일은 화련한테 맡기고 같이 쉬자며."
"그건 맞는데 양심상 조사를 하나도 안 해 두긴 그래서. 금방 끝낼거니까 좀 더 눈 붙여. 난 이래뵈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음모드인 옵저버가 깜박이는 빛으로 이수를 재촉하는 듯 했다. 못 이긴 듯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수의 허리를 안은 채로이수의 무릎을 베개삼은 쿤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잠둘긴 이미 틀렸지만 체력의 문제가 아니더라고 쿤에게는 잠을 털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체력엔 자신 있다더니 과연 끌어안은 몸은 나무둥치처럼 단단하게 근육이 잘 잡혔다. 쿤에게 적당한 그늘까지 베풀어주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환생이랄까?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시간을 쪼개는 그가 고까운 건 아니지만 근면하고 한결같은 면에 마음을 내 준 사람으로서 쿤은 이수의 성실함을 나무랄수는 없었다. 그에게 배운 정직함으로 가벼운 투정을 부리는 것 정도가 전부인, 이 고즈넉한 시간마저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7.19 - 침묵

"왜 아무 말도 없어? 불만 있으면 얘기하라고."

불만이 없으니까 얘기 안 하지. 다분히 억지스러운 요구에 하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군가가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랬다. 그랬는데 침묵이란 녀석은 하츠의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면이라 어색해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눈매가 무섭다고 하질 않나, 친구들의 장난에 딱히 대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인데 재미 없다고 하질 않나.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이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묻길래 고개만 끄덕끄덕했더니 이 꼴이다.

"내가 겨우 그런 갈로 네게 불만을 가질 리가."

가르침의 성과가 영 좋지 못하니 침묵을 깨기로 결정한 하츠의 결정은 드디어 그가 원하던 고요함을 가져왔다. 진심 가득한 그의 얼굴에 연인의 분노는 눈 녹둣 사라져 버렸으니까.






7.20 - 화

"당신이 왜 화가났는지 맞춰볼까요?"

스물다섯번째 밤과 쥬 비올레 그레이스. 그 이름이 지칭하는 바는 틀림없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어떤 틈이 의식의 틈새를 잡아 벌려, 결국엔 둘로 갈라놓고 말았음을. 다행히 동일 인물로부터 파생된 본성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들은 누가 되었든 함께해 왔던 동료들을 아꼈고, 대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다가섰다. 동료나 주변인은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쿤 씨를 어떻게 한 겁니까."
"우리의 침대에 잠들어 있죠. 아무리 쿤 씨가 10가문이라도 쉽게 눈을 뜨진 못하겠지만요."
"왜 그렇게까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입장을 바꾼다면."

같은 의자에 거울을 바라보듯 같은 자세로 마주 앉은 두 청년 사이에는 첨예한 기류가 감돌았다. 사람의 의식 속에 신수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지만 신수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난 비선별 인원들인만큼 무의식 속에도 그것이 스며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기술로 맞서는 마당이라 승부는 갈리지 않았다. 하나의 몸 속에 두 개의 분노가 침전될뿐.







7.21 -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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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 나무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는 마을의 이정표이자 사랑방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자나무에서의 만남을 약조했고 하루의 마지막 즈음에 꼭 그 곳을 지나며 서로의 인부를 물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밖을 자주 오가는 백민들의 사정. 왠일로 청자색 박사를 삿갓의 끝마다 드리워 얼굴을 가린 이가 그 곳에 나타나자 귀족과 엮여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민초들은 길을 잃었다.

"푸른 색이면 쿤의 사람인가?"
"얘까진 무슨 볼일이시지? 가마꾼도 없이.."

저를 두고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선명히 들렸지만 아게로는 밖으로 드러날만한 항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양민의 쉼터를 빼앗게 된 것은 송구한 일이나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는 법. 원망은 저를 기다리게 한 하츠가 들어야 옳았다.

'정자나무라.... 수령이 얼마나 될까?'

기다림의 무려함을 달랠 겸 아게로는 고개를 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나무의 수령을 헤아려 보았다. 아게로의 아름보다 크게 자란 나무이니 족히 수 백년의 세월은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 긴 세월을 한 자리에 있었으니 과연 토지신으로 추앙받을 법한 존재였다.

"미안. 장터에 좀도둑이 있어 지체되었다."
"너도 참 알만하다."

끊어진 신발끈을 대신 사 오는 일이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닐텐데 이상하다 싶더니 또 장터의 소란을 정리하는 데 신경을 쓴 모양이다.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한 아게로는 저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 같은 고을임에도 장터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건만 일찍이 무공으로도 덕망으로도 이름이 높던 하츠에게는 소싯적부터 부대껴온 고향 사람들의 작은 부탁 하나하나를 거절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이리 출세하고 쿤의 사람으로 입적한 이후에도 선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게로의 푸념은 못 들은 척 하며 작은 발에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매 주는 하츠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쿤은 이내 다시 녹음을 드리운 나뭇가지들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아니."

다시 발에 맞게 조여진 신발을 확인한 아게로는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읺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츠를 보는 순간 귀족을 경계하던 눈초리가 누구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기에 씁쓸한 맛은 사라지지 읺았지만. 저들에게 자신은 쉼터를 빼앗고 수호신을 독차지한 욕심쟁이로밖에 비치지 않을 터다. 이리 죄 많은 인생을 어찌하여 제 아비는 늘리고만 있는가? 차마 이 곳을 떠나자는 말도 나오지 않아서 아게로는 묵묵히 조용한 걸음으로 처소를 향했다.







7.23 - 적절함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둔탁하고도 거칠었다. 온통 몸 속을 울리는 불쾌한 소리들과 통증을 뱉어내지 못해 눈물로 맺혀 떨어졌다. 부순다기 보다는 으스러뜨린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눈에 띄는 회복력을 가진 10가문의 몸이니 용케 다시 붙을 지도 모르겠으나 당장은 가망이 없는 이야기.

"스스로 창고를 나가는 보물이라니 성가시기 짝이 없구나. 허나 너는 여전히 내 보물이니 벌은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다시는 이 에드안의 창고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란다, 아게로. 말을 잘 들으면 지내기 편하게 원하는 건 뭐든 쥐어주겠다는 구슬림 같은 건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눈물이 절로 떨어지는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에 다시한 번 절망하며 아게로의 의식은 점점 가라앉아갔다.







7.24 -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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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 해결

"좀 더 고민해보면 좋은 방법이 떠 오를 거에요."

긍정하고 싶었지만 피로감에 사로잡힌 입술은 떨어지질 않았다. 어딘가엔 정말 이상적인 방법이 전재할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마저 부정하고싶진 않았지만 당장의 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였다. 밤은 어찌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은 항상 무언가의 희생을 필요로한다. 여태까지도 최선을 찾는다고 찾았지만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쿤은 본능적으로 슬슬 자신의 차례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처럼 밤의 뜻을 존중했던 자들이 결국 희생을 뒤집어 써 왔다면 언젠가는 쿤의 차례가 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내가 너무 피곤해, 밤."
"..그러신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겠어요?"
"그래야겠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
"네. 푹 주무세요, 쿤 씨."

고민거리가 산재해 있는 마당에 편안한 잠자리 같은 게 어디 있을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며 밤을 자신의 밤에서 밀어낸 쿤은 그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자신이 마모되기 전에 찾아낼 수 있을까?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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