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탑 - 하츠 X 쿤] 기회와 기약
신의 탑/단편
“폐, 폐하! 제발 윤허를! 폐하!”
“귀찮게 무슨 윤허야. 당장 내다 버려.”
“육친의 정을 봐서라도, 제발…”
“시끄러. 황족이면 황족답게 체통을 지키라고 했잖아. 감히 두 번 말하게 할 테냐.”
“폐….”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번개가 본전을 가르고 지나갔다. 도열한 대신들은 푸른 번개가 지나는 길 밖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었지만 젊은 황제의 발치에서 애걸복걸하던 종친은 그대로 고압의 전기에 비산하여 사라졌다. 생명의 흔적은 사방으로 튄 혈흔뿐. 신분을 이용하여 여항의 여인을 함부로 취한 죄는 당연히 물어야 하였으나 생전의 위세를 생각하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혈육의 명줄을 제 손으로 끊고도 아무런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앳된 얼굴은 자신의 번개가 터 놓은 길을 따라 막 들어오던 차라 혈흔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뒤늦게 발견하고 작게 혀를 찼다.
“미안하다, A.A. 미처 못 봤군.”
“……죽어 마땅한 죄과가 있었다 한들 형장은 이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
“미안하다니까. 하츠, 단, 어서 친왕전으로 모시도록 해. 내 잘못이니까 의복은 내가 새로 마련해 주지.”
제위를 차지한 이상 아무리 허물 없이 지내던 형제라 할지라도 말을 가벼이 하지 말라 골백번은 일렀거늘. 바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동생에게 벌써부터 약한 두통을 느끼고 있는 아게로지만 문무 대신들이 모여있는 본전에서 황제를 훈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잔소리는 사석에서 하기로 하고 황제의 명령을 받드는 두 궁인을 따라 발길을 돌렸다. 선황인 에드안은 수많은 부인들 사이에서 그보다 많은 자식을 보았기에 유일한 적자인 란이 제 입맛대로 이렇게 썰어낸다 한들 남아있는 황족의 수는 아직도 많았다. 다만, 이대로는 란 역시 선황에 이어 폭군으로 기록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집정 초기의 란은 선황이 버려두다시피 한 민정을 살피고 황실과 관료들의 부패를 척결하며 성군이 등극했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지금도 백성들은 그를 우러러 칭송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부패의 척결에 있어서 죄과를 따지기도 전에 이렇게 힘으로 눌러버리는 모습에 질려가는 귀족들이 늘고 있었다. 작은 결점도 용납하지 않는 란의 방식 때문에 편전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피바람이 불었다. 출세가 오히려 저승길인지라 많은 이들이 등청을 거부해, 아게로를 비롯한 몇몇 친왕들이 대신 위험을 무릅쓰고 문무의 각 분야를 돌보아야 할 정도로 나라의 일손이 부족했다. 란을 제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였던 벽성(碧聖)공주 마스체니마저 출궁하자 군주를 말리는 일을 거의 혼자 도맡게 된 아게로는 단연코 란 치하 폭정의 최대 피해자였다. 이미 성인식도 치뤘겠다 황실 간의 정략혼에 있어서는 혼기가 찼다 여겨지는 입장임에도 혼사 이야기가 들어올 때마다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다른 황자를 천거하는 웃지 못할 광경을 지켜본 것이 이미 얼마던가? 아게로까지 출궁하면 쿤의 궁은 란의 치세가 이어지는 내내 매일이 살얼음판일 테니 살고자 하는 그들의 절박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과연 아게로는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죄다 선황의 텅 빈 머리를 물려받았나, 벌레만도 못한 놈들..”
“전하, 고정을…”
“그만큼 죽어나갔으면 몸사릴 줄도 알아야지. 나는 시간이 남아 도는 줄 알아?”
창경왕(蒼慶王)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처에 닿기도 전에 스스로 청은발을 묶어 올렸던 비단 끈을 먼저 풀어내고 외의의 매듭을 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란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적은 없다지만 궁 안의 모든 사람이 저 하나에게 기대는 이 상황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본디 뛰어난 언변과 신묘한 지략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란의 치세 초기에 친왕 중에서도 현황의 조력자로 크게 활약했으며 란이 선정을 베풀도록 이끈 장본인이었으나 일이 이리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칩거할 것을 잘못했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어차피 황제가 되지 못할 운명이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던 마당에 그가 바란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친왕의 신분이면 궁에 머무는 황족 중에서도 신분이 꽤 높은 축이라 란이 의복을 내려주기 전이라 한들 갈아 입을 옷이 없지는 않아서 아게로는 우선 친왕전에 닿자마자 형제의 피에 젖은 외의를 벗어 나인의 손에 맡기고 세안을 위한 온수를 준비하라 일렀다. 대전에서 란의 낌새를 살피던 단의 호출로 밤새 공문을 읽다 잠깐 눈을 붙이기도 전에 달려갔건만 결과가 이꼴이라니 시작부터 허무한 날이다. 아게로가 의복을 정제하는 순간에도 방심할 수 없는 노릇이라 준족인 단을 다시 란의 곁으로 보내면서도 분에 못이겨 이를 갈며 아게로는 환복을 위해 나인들을 물렸다.
“못 하겠으면 그만 둬라, 귀치장.”
“뭘.”
“성질 더러운 네 동생을 말리는 일 말이다.”
“말은 쉽지. 사람들이 왜 단이나 노빅한테 맡기지 않고 날 찾는 줄 알면서 하는 소리야?”
“…….”
“내 탓이니까 고쳐 달라는 거 아냐. 란의 저 결벽증을.”
“그렇다면 더더욱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써야할 때 아니냐.”
“어떤.”
“나와 도망치자.”
“.....미쳤어?”
하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뿐 아게로의 반응은 충분히 빨랐다. 옷을 여미는 매듭을 풀어가던 중이라 반쯤 자유로워진 옷감이 호를 그리다 너풀거리며 떨어졌다. 소싯적부터 함께한 숙위의 입을 틀어막고 벽으로 밀어붙인 아게로는 이미 자신이 친우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물린 이후임에도 긴장감을 느꼈다. 야반도주를 꾀했다고 해서 란은 아게로까지 내 칠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츠는 어떨까? 선황의 제위시절과 다름없이, 죽음에 무뎌질 정도로 많은 피를 보고 있는 지금이지만 아게로는 제 주변으로 혈무가 몰아치는 날을 상상하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란은 분명 아게로에게 관대했지만 그만큼 집착하고 있었다. 많은 친왕들이 출가 전에도 친왕부를 두어 사가에서 지내고 있음에도 란은 따로 궐 내에 친왕전을 지어 아게로를 붙잡았다. 대신들이 먼저 나서서 말리지 않았더라도 란은 아게로에게 출궁을 허락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반증이었다. 그건 정사를 논할 상대가 아게로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다. 란의 속내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진중히 헤아려본 일조차 없지만 사람에게는 예감이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란은 이런 식으로 아게로를 독차지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아게로가 그의 수중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랄까?
“농이 지나치면 화근이 되는 법이야.”
“........”
“말 좀 가려 해. 하여간 몸만 커 졌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러는 너야말로 남 걱정 좀 그만하지? 선...”
“전하!”
이 놈의 궁은 말싸움 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아게로는 벗으려던 옷을 매듭은 묶지 않은 채로 다시 걸치고 나인을 불러들였다. 등청을 위해 예복을 제대로 입었으니 두 세겹을 더 벗어내지 않는 이상 속살이 비칠 염려야 없겠지만 예전부터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던 그를 아는 하츠의 눈에는 그간의 변화가 다시 한 번 눈에 띄게 되는 대목이었다. 요즈음의 아게로는 황족이 아니라 국정을 돌보는 기계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처럼 여유를 찾아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마음 고생은 똑같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츠의 입장에서는 몸은 갇혀 있었다 해도 폭군으로 악명 높은 선황의 제위시절의 그가 더 황족답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왜 송구해. 옷을 주겠다고 했으니 갈아입기 전에 갖다줘야지.”
“.....하아..”
아게로가 단벌신사로 유명한 다른 친왕도 아니고 이미 가진 의복만 해도 족히 일백벌일 텐데, 그저 빠진 옷장을 채워 주겠다는 말인 줄 알았더니 당장에 저가 하사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뜻이었을 줄이야. 백번 양보해서 란의 심중을 아게로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고 쳐도 황제의 밑으로 늘어선 나인의 수가 얼마인가? 환관에 호위에 나인을 합쳐 못해도 수십명이 란의 일거수 일투족을 뒤따르고 있을진데 굳이 직접 오다니. 옷궤를 직접 지고 오지 않은 걸 보면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한 모양인데 말이다. 아무리 어이가 없어도 황제를 문 밖에 세워둘 수는 없어서, 별 수 없이 모양새는 갖추도록 풀었던 매듭을 다시 묶으며 아게로는 길을 터 상석으로 황제를 모실 수 있게 해 주었다. 란이 고깝지 않아도 황제는 황제이니 하츠도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세를 낮추었다. 무인이라해도 허락없이 황제의 앞에서 무기를 들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머리는 안 잘라도 되겠지?”
하츠와 같이 황제에 대한 예를 늦게나마 갖추려고 했던 아게로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얼굴로 손을 뻗는 이복동생 덕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몸을 굳혔다. 란의 손에 눈을 찔릴뻔 한 게 주요했지만 란의 관심사는 피가 튄 아게로의 머리카락뿐이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아게로가 핏물이 들었다고 어깨보다 짧게 머리카락을 잘랐더니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때는 거의 생피를 뒤집어 쓰다시피 했었고 지금은 살짝 튄 거니까 자른다고 해도 그렇게 싹둑 자르지는 않겠다만.
“네가 머리를 기르면 되잖아. 똑같은 색이니까.”
“귀찮아.”
“…됐다. ...금방 씻을 거니까 괜찮겠지. 정무는 어쩌고 여기로 온 거야?”
“파했어. 나머지는 접대 얘긴데 그런 건 귀찮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지 뭐.”
“접대?”
“네 친구 말이다. FUG의 황태자.”
“비올레가 사신으로 온다고? 즉위 축하인가..”
“.....몰라. 귀찮아.”
란이 새 황제로 등극했으니 주변국의 축하가 이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제국이라 칭해질만큼 세력이 강대한 13국은 그들간의 마찰은 피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란의 치세 이후 각자에 걸맞는 방식으로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FUG가 황태자를 사신으로 보내 직접 인사를 전하기로 한 것이야 그간의 친분이나 국격으로 보아 있음직한 일이었지만, 무려 황태자의 내방 소식에 란은 오히려 심기가 불편했다. FUG의 황제가 어찌 생각하는 지를 헤아릴 식견은 없지만 황태자가 걸음하는 이유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란의 즉위를 축하하는 전령으로서 파견된 것임에는 틀림 없지만 황태자 본인의 목적은 분명 오랜 친구인 아게로와의 재회일 터였다. 황녀가 없어 창경왕과의 혼사를 도모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보니 황태자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겠지. 아게로에게도 그의 방문은 분명 즐거운 일이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중요한 행사이니 당장은 준비에 대한 생각으로 또 머리 속이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란에게는 차라리 이 편이 나았지만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부터 생긴 불안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그런가.. 당장 가서 여정을 확인해 봐야겠네. 국경의 비어(飛魚)도 수도로 불러야겠고.”
“공무가 중요하기는 해도 당장은 조금 쉬지 그래. 네가 자는 걸 못 봤다고 신료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별 일이네. 네가 그런 말도 다 전해주고. 대충 중요한 것만 안배하고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셔, 폐하. 아! 또 다시 형조에 넘기기도 전에 대전에서 사람 끌어내고 그러기만 해봐. 무슨 수를 써서든 벽성공주를 다시 불러올 테니까.”
친왕전에서만큼은 아명도 부르고 허물없이 대해달라고 명한건 란 자신이었지만 이렇게 잔소리만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보람없이 되었다. 해도 명색이 황제인데 제 명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친왕이 있다는 걸 밖으로 알릴 이유는 없으니 란은 아게로를 붙잡아 강하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뒷 목의 맨살에 대고 약한 전격을 흘려 넣었다.
챙!
금속성의 소리에도 아랑곳 없이 순간의 방심으로 의식을 잃은 아게로를 단단히 안은 채로 란은 눈동자만 흘려 검과 검이 맞부딪힌 자리를 바라보았다. 예상하던 바라는 듯한 그 눈동자에는 그야말로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츠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충직한 자신의 호위에 대한 치하도.
“A.A.가 훌륭한 개를 골랐군.”
“무슨 짓을 한 거냐.”
“말버릇까지 똑같은 건 별로지만. 물러나라. 잠시 눈을 붙일 수 있게 한 것뿐이니까.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이 녀석은 황족의 말을 곧이 듣는 성격이 아니라서.”
따지고 보면 그건 선황, 에드안의 업보인데 어째서 형제들도 이리 애를 먹어야 하냔 말이다. 백성들이 하늘의 힘이라 찬양하는 벼락의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투파에 가까운 쿤의 다른 황족들과는 다르게 지략과 처세술에 관심을 두어 온 아게로가 란에 비해서 선이 고운 외모를 갖게 된 것이야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만, 조정을 떠난 관료들을 대신해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예를 갖춰 차려입은 화려한 의복이 무겁지 않을까 싶게 마른 게 안아든 몸의 무게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이대로 두면 비올레의 내방 전에 아게로가 과로로 쓰러지는 게 먼저였을 거다. 하츠와 같이 아게로를 오래 모셔온 자들은 그 이유가 란의 무신경한 지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할테니 무심결에 란에 대한 적의가 드러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침전으로 안내해라. 내궁에 들이면 또 무슨 소문이 돌 지 알 수 없으니까.”
이미 어전에서 칼을 들었던 하츠가 명령을 곧이 들어줄 리가 없다 여겨, 귀찮음을 무릅쓰고 란이 뒷 말을 붙인 보람이 있었는지 검을 거둔 하츠는 다시 무기를 내려놓고 친왕전의 침실로 향했다. 당연한 이야기다. 란은 내궁의 어디라 짚어 말하지 않았지만, 아게로는 뒤늦게 봉호를 받고, 그 직후의 상당한 시간을 선황에 의해 내궁에 갇혀 지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했지만 좋은 기억이었다면 문후까지 거부하며 내궁으로 들어가길 저어할 이유는 없을 터다. 때문에 란도 친왕전을 동궁과 함께 외궁에 두도록 했으니 말 다 했다. 따라서 그 시절부터 아게로의 곁을 지켜온 하츠라면 진짜로 란이 아게로를 내궁으로 데려가려 했었다면 목숨을 내 놓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저지하려 했을 터다. 란이 그를 쉽게 죽여줄 이유도 없긴 하다만.
“내일까지는 수면향을 써서라도 친왕전에 잡아 두도록 해라. 비올레야 이 녀석만 만나게 해 주면 충분할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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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렇게 된 거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네가 공문에 손만 댔다고 해도 이곳 나인 중 몇은 죽어 나갈 판이니.”
“너나 란이나 아주 기어코 사고를 치는구나. 아, 머리야. 그럼 하루가 그냥 지나 간거네? 청여(靑汝)라도 잠시 불러야 하나... 그 변태 자식을 또 뭘로 꼬드기지.”
능력은 있어도 권력욕 없이 풍류에만 매달리는 성격 때문에 아게로와 영 맞지 않던 하츨링까지 궁으로 불러들일 생각을 해야할 정도로 당장의 인력난은 심각했다. 달리 말하면 란이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면 아게로가 위험했던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란의 비뚤어진 정의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낀 이상 아게로는 그걸 바로 잡을 때까지 자신을 갈아 넣는 노력도 마다 않을 사람이었으니.
“게다가 넌 어쩌자고 란한테 칼을 들이대?”
“밸 수 있을 줄 알았다.”
“황제의 호위가 몇인데! 그랬으면 더 큰 일 났지!!”
반역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참수에 멸족이다. 아게로가 지켜본 바로 하츠는 가족을 끔찍히 아끼는 자인데 왜 이렇게 위험 천만한 일을 벌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멍청해서라고 하면 설명은 되지만...?
“좋아. 나도 쉴 테니까 너도 그 간 머리 좀 식히는 게 좋겠다. 사가에 가서 동생들 얼굴이라도 보고 오도록 해.”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가족들 생각도 좀 하라는 거다 멍청아. 어차피 나도 오늘은 외출 금지니까 별 일 있겠어.”
“대담한 네 형제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건데. 여태까지의 암살 시도는 전부 황족들의 사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황궁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어.”
“뭐..... 시도 하는 쪽이 멍청한 거 아닌가? 너한테 걸릴 정도면 그래도 수완이 좋은 녀석들인 셈이지.”
진짜로 오늘은 친왕전 밖으로 나가지 않을 생각인건지 하츠에게도 하루간 특별 휴가를 허락한 아게로는 나인들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일렀다. 옷도 평소의 복장 대신 중단이 없는 간소한 실내복이나 간편한 철릭으로 준비하라는 걸 보니 대신 움직여 줄 다른 친왕들에게 연통을 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모양이었다.
“무슨 뜻이지?”
“모르는 척 하기는. 되먹지 못한 내 형제가 몇인데 겨우 그 정도만 자객을 보내겠어? 멍청하게도 대부분이 시도도 하기 전에 걸리는 거 아냐. 란한테.”
“.......”
“걱정말고 다녀와. 여긴 내궁도 아니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할테니까.”
아게로는 왠만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연락할 인간이 아니다만 누구 고집이 센지를 겨루면 둘 다 쉬지 못할테니까 하츠가 물러나기로 했다. 물론 그건 아게로의 말에 전부 수긍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침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한 때였으니까 선택을 한 것이지.
“알았다.”
시원한 대답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아게로는 미간이 좁아졌다. 요사이 하츠의 말을 알아 듣기가 어려워졌다. 아게로의 언성이 높아질 때까지 혹은 그가 분에 못 이겨 하츠를 친왕전 밖으로 내쫓을 때까지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질 줄 알았건만 이리 빠르게 수긍하다니. 늦게 일어나 부상의 위치를 확인치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될 날이다.
“어제처럼 방심하다 네 형제들에게 뒤통수 맞는 일만 없도록 해라.”
“뭐?”
“내일 보자. 아침에 늦잠 자지 말고 기다려라.”
“내가 왜 널 기다려, 야! 할복무사! .....녀석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게로도 에드안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본인이 무예와 담을 쌓았다해도 기본적인 운동신경이나 순발력이 뒤쳐지진 않겠지만,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꺼운 침구를 헤치고 하츠에게 닿는 것은 무리다. 그의 호위이자 숙위로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을만큼 실력이 출중한 무장인 하츠를 상대로는 더더욱. 유유히 친왕전을 빠져나온 하츠는 란의 집권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궐 밖으로 나섰다.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이 시간은 귀하다. 기회는 허투루 사용하지 말라고 아게로에게 배웠으니 란처럼 오늘은 하츠가 수년간의 가르침을 따라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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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쿤을 빼내고 싶다고?”
“곧 비올레가 축하사절로 방문한다고 들었다. 기회는 그 때뿐이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 쿤을 설득할 수 있겠어? 무사히 거길 빠져 나간다고 해도 추적이 계속될지도 모르고 밤, 아니아니 비올레가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런 건 밤이 알아서 하겠지.”
“야...”
아게로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자중하라는 뜻으로 하츠에게 휴가를 주었겠지마는 가족들과 감격의 재회를 나눈 하츠는 맏형과 놀고싶어하는 어린 동생들을 뒤로하고 중립국, 월하익송의 요인이 된 옛 친구와 연락을 취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동생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지만 이미 황제가 하츠의 심중에 대해 눈치챈 마당에는 시간이 없었다. 하츠나 하츠의 가족들이 인질로 잡히면 아게로는 더더욱 란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용해 먹을 것은 다 이용할 거라고 선황의 제위시절부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녀석이건만 자기 사람에 대한 신의는 골수를 다 바칠 정도로 굳건하고, 그런 주제에 정을 너무 쉽게 주는 게 아게로의 단점이다. 아버지에게는 이 곳을 떠날 준비를 해 달라 분명히 전했고, 이수가 조만간 하츠의 가족들을 월하익송으로 데려가 준다고 하니 걱정은 덜었지만 그 다음은 여전히 문제다.
“란 녀석은 쿤을 궁에 계속 가둬 둘 생각이다. 새장이 더 넓어졌다고 해서 선황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그건 그런데... 위험부담이 너무 커. 일단은 너랑 네 가족이 문제고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쿤도 입장이 난처해질텐데 굳이 지금 그래야겠어? 생각이 있으면 쿤이 먼저 움직일 거니까 좀 더 기다려보는 게 어때?”
“내 가족이야 너를 믿으니까 맡긴 거다. 망가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녀석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어. 내가 결정한 일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마.”
“걱정이 하지 말랜다고 안 되는 건 줄 아냐....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지만 그 전까지만이라도 넌 몸 좀 사려. 일단은 밤이랑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으니까.... 으으, 어쩌다가 내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거지?”
“...미안하다.”
“엉? 네가 갑자기 왜?”
“.......그럴 일이 있다고만 해 두지.”
란이 아직 하츠에게까지 감시를 붙여둘 정도로 아게로의 옛 친구들을 경계하고 있지는 않는 눈치지만 모름지기 거사라는 건 벌어진 이상 속도가 생명이다. 바로 움직이겠다는 이수와 연락을 끝낸 하츠는 드디어 동생들이 기다리는 대청으로 향했다. 궁에서 입던 푸른 군복 대신 붉은 소매를 가진 검은 옷으로 갈아 입고 옛 친구와도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어째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드안이 아게로를 찾아 내기 전의 과거라면 곧 동생들에게 시달리는 하츠를 놀릴 친구들이 저 능선 너머로 고개를 내밀겠지. 부질없는 감상을 떨어내듯 하츠는 닫혀있던 방문을 열어젖혔다. 오늘은 그의 생에 다시 없을 멋진 휴일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한 일정은 촉박하기만 하므로 하츠는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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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접대에는 필요한 것이 많다. 원칙적으로 축하를 받는 자리이니 답례가 과할 필요는 없지만 귀한 손이 오시는 만큼 경호를 비롯하여 그의 짧은 타국 생활에 부족함이 느껴져서는 아니되었다. 비어창술의 창시자이기에 비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청륜왕(淸倫王) 아센시오와 뛰어난 얼음술사인 선빈왕(仙滨王) 엘리엇에게 연통을 넣어 두었으니 제일 중요한 국빈의 신변 안전은 그럭저럭 해결이 될 것이었으나 다른 것은 이 자리에서 계산이 되지 않았다. 하츠가 답지않게 당부를 해 둔 터라 친왕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내키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채로 아게로는 탕에 몸을 담그고, 여유를 만끽하는 척을 했다. 어쨌든 친왕전은 황제가 윤허한 무법지대니 하츠든 란이든 이 곳에 다시 발을 들이는 순간 철저한 응징을 해주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폐하께서 하사한 의복이라...”
“송구하옵니다, 전하.”
“쉬라 하셨다더니 찾아 계시는가. 뭐, 좋다. 소매끈이나 함께 가져오거라.”
만나면 그 작은 머리통을 쥐어박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말이다. 하츠의 언동이 영 신경쓰이지만 눈 앞에 있는 게 란이라면 란부터 뜯어 고치는 게 순서였다. 란이 이번에는 당장에 얼굴부터 들이밀지 않고 궁인을 먼저 보낸 것만해도 장족의 발전이지만 칭찬은 나중이다. 윗선의 일은 하루가 밀리면 절차상 시급한 안건이었어도 다시 말단으로 전달되는 데까지 한달은 금방 소요된다. 사신 접대와 같은 국가 과제를 앞에두고 이런 사고를 치다니. 정말로 란의 머리를 한대 때릴 생각을 하고 있는 주인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왕전의 나인들은 몸이 바빴다. 몇번인가 잘라서 당장은 어깨를 살짝 넘어서는 길이지만 아직 젖어있는 청은발도 여러 장의 베로 올을 세듯 닦아 말려주어야 했고 속옷부터 자수가 가득한 대자의까지 십수벌이나 되는 비단 옷의 순서도 틀려서는 안되었다. 은사와 감청색 수술로 맺음을 하는 머리장식도 손이 많이 가는 물건이어서 막 세신을 마치고 나온 주인의 몸에 대기에는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으나 황제가 방문을 예고한 마당에는 푸념조차도 시간낭비였다. 대신 언제 봐도 새삼 감탄이 나오는 창경왕의 수려한 용모가 그녀들을 마음을 달래주었다. 꾸며주는 손끝마다 꽃망울이 터지는듯한 청초하고도 요요한 미색에 보람이 샘솟듯 했으니 말이다. 완성품을 감상할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으나 그네들은 황제의 권력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다과를 들일 때 슬쩍 들어난 화의 끝이나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정도겠지.
“쉬라더니 무슨 일로 찾아왔어?”
“나도 같이 쉬려고.”
역시 소매끈을 받아두길 잘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아게로는 곧장 거침없이 란의 머리통을 갈겼다. 허나 분하게도 란은 그리 아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복슬복슬한 머리카락 속에 무언갈 감춰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표정하게 돌아갔던 머리를 바로하고 차 대신 달달한 수정과를 들이라 명하는 게 열 내봤자 아게로의 손해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상도 없고 축일도 아니고 심지어 비올레가 오려면 이레가 넘게 남았는데 황제가 왜 쉬어!”
“내 마음이다. 황제는 나잖아.”
“이게 진짜 선황과 똑같은 소릴...”
“A.A.”
“왜.”
“선황과 모후께서 너와 귀비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난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이제 여기 없어.”
“......”
“그런데도 궁이 싫은 거냐.”
선황은 황자들을 고까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훗날 제위를 탐할 자들이라 여겼기 때문에 황후와 총비 몇몇이 간신히 자신의 아들을 지켰을 뿐, 대부분은 다른 이도 아니고 아버지인 황제 본인에 의해서 화풀이 대상처럼 쓰여 죽어나갔다. 때문에 아게로의 어머니는 그녀가 쌍아를 가졌다는 것을 이용해 공주만 고해 올리고 황자는 숨겼다. 다른 친왕부의 아이라 속이고 궐 밖에서 자라도록 한 것이다. 허나 에드안은 그가 가장 아끼는 후궁이었던 그녀의 아들만큼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황후는 그녀를 실각시키기 위해 아게로의 존재를 밀고했으나 선황은 그녀와 그녀의 일가를 몰살시키기는 커녕 사람을 풀어 아이만 잡아들였다. 물론 선황이 귀비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귀비가 끝내는 병을 얻어, 눈을 감을 때까지 아게로를 내어주지 않았고, 공주도 출가시킨 이후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끔 감시를 붙였다. 이를테면 그녀가 목숨보다 아꼈던 자식들을 전부 빼앗은 것이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아게로의 누이, 은람(銀灆)공주도 요절하자 홀로 내궁에 갇혀있는 아게로에 대해서는 소문만 무성했다. 절세미인이었던 어미를 대신해 에드안이 노리개 삼고 있다는 게 주요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내궁에서 그를 만났던 란이 보기에는 헛소문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 났었다면 진즉에 에드안이 죽거나 아게로가 죽거나 했을 터였다. 그 시기부터 아게로의 총기는 눈에 띄었고, 그 뛰어난 처세술로 란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싫지. 내가 어떻게 여길 좋아할 수 있겠어.”
누이도 어머니도 얼굴을 본 적은 손에 꼽는다. 12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도 제대로 모른 채 궁 밖에서 살았고, 난데없이 아버지라는 작자에게 붙들려 온 뒤로는 또 십 수년을 에드안이 허락한 공간에서만 지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가족이라 애틋함이 가슴에 남아서 에드안이 죽고 없는 지금까지도 그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평생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버지로서 아게로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준 것도 아니니까 실로 그렇겠지. 란이 붙잡는 바람에 궁에 머물게 되었지만 아게로는 궁에 있는 시간이 답답하고 힘들었다. 정무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 였던 것 같다. 여하튼 관청은 전부 궐 밖에 있었기에 공무를 핑계로 바깥출입이 가능했다. 과거, 멋 모르고 어울렸던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각 국의 요인이 되어버려 예전처럼 웃고 떠들며 세계를 유람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을 꿈꾸게 되는 것도 다 그런 반작용일 터였다.
“단지 나 때문에 남아 있다는 소리냐?”
“틀린 얘기는 아니네. 넌 그래서 언제 철 좀 들어줄래.”
“흥. 네가 모르는 소릴 하는 거지. 난 귀찮다고 다 죽이진 않는다.”
“당연한 걸 뭘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않다. 내가 나고 자란 궁은 그런 곳이었으니.”
“........”
“나만도 아니다. 쿤의 괴물들은 널 기준 삼지 않으면 안되는 거다. 넌 기준 삼을 것들이 널려있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우릴 납득시키지 못했지. 그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마 그것도 너라서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그거 골치 아프네.”
“A.A. 우릴 설득하는 건 이제 그만 둬라. 하지만 우리에겐 선황으로부터 물려받은 무한한 시간이 있으니 쉬어갈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건 허락하겠다. 단, 네게만이다.”
그래. 아게로는 에드안을 용서할래야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떻게 수많은 여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미치게 만들었고, 자신의 뛰어난 용모와 재능을 물려받은 아이들을 하나같이 괴물로 키워냈을까. 설마 이 모든 것이 그의 사후에도 아게로를 쿤의 궁에 묶어두기 위한 비책이었던 건 아니겠지. 물론 란은 에드안과는 다르다. 에드안은 그가 허락한 것 이외에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심지어는 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기면 혹독한 벌로 다스렸지만 그런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제에 아게로가 마치 자신의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꾸며놓는 건 또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권좌를 넘보는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옥좌가 아닌 아게로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의 상징이라고. 그를 차지하는 자가 승자라고 말이다. 란의 치세도 결국은 그렇게 이루어 진 것이었기에 쿤의 괴물들은 아직도 그리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비올레를 따라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거지?”
“..........”
“알았어. 대신 숙제를 하나 줄게.”
“귀찮게 또 뭐냐.”
“내가 이대로 사라지면 넌 어떻게 할래?”
그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었던 터라 찻물은 거의 식었지만 귀찮은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황제를 배려한 찻상이라 나인들이 이미 우려낸 차를 다관에 담아 두어 풍미를 해할 염려는 없었다. 새하얗고 투명한 찻잔 바닥을 맴도는 호록빛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로 아게로는 란의 뇌리를 온통 뒤흔드는 소릴 여상히 뱉어놓았다.
“네가 왜!”
“그러니까 상상을 해 보라잖아.”
붙잡아 두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인생의 목표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봄눈처럼 증발해버리면, 창(蒼)의 황제 쿤 란은 어찌 하겠느냐고. 선황으로부터 소싯적의 그와 가장 닮았다 인정을 받은 얼굴인데 사르르 웃어줄 때의 홍안은 계집보다도 고와서 분노가 끓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던 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생각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그리 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
“네가 하라니까 노력은 해 보겠지만.”
“응.”
아게로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갈 뿐, 란을 나무라지도 다시 한 번 타이르지도 않았다. 차가 충분히 식었기에 고양이 혀인 아게로도 쉬이 마실 수 있었는지 금방 비운 잔을 한번 더 채웠을 뿐이다.
“.....아직 모르겠으면 생각날 때 알려줘. 나는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잘 생각인데, 너는 어떻게 할래?”
“그래. 쉬어라.”
마음 같아서는 자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아게로는 예민해서, 그런 상황에서는 잠이 안 온다고 숙위인 하츠마저도 침전에 들이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비올레의 방문으로 마음이 복잡해서 끝내 아게로를 보러 오긴 했지만 원래 목적은 그가 푹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으니 란이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에드안은 그에게 튼튼한 신체와 영생에 가까운 수명을 물려주었을지 몰라도 그의 어머니인 귀비는 미인박명의 예시와도 같은 인물이었으니 아게로의 말처럼 란과 다른 친왕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를 붙잡아 둘 수 없는 때가 올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마저 줄여주면 되는 일. 황제가 친왕전을 나서자 아게로는 찻상을 물리고 바로 침전에 들었다. 환복도 목향도 저가 알아서 하겠다면서 말이다.
“미리 우린 차에 시기도 적절하니 예상은 했지만… 벼르고 있던 놈이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음독이면 그래도 독이 어느 정도 희석이 되는데다가, 상대도 황제의 앞에서 바로 아게로가 쓰러지면 곤란할테니 복용량을 조정했을 터다. 더해서 너무 금방 발견 되면 오히려 해독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천천히 퍼지게끔 손을 써 두었을 텐데 벌써 각혈이라니. 두 잔을 마신 건 조금 패기로웠는지도?
“아, 이걸 써 먹어야 겠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각혈이 있다고 해도 바로 죽음에 이르는 건 아니라지만 아게로의 표정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아니, 오히려 즐기고 있다고 해야할까? 재미있는 놀이가 생각난 어린 아이처럼 개구진 표정으로 아게로는 자신의 포켓으로 손을 뻗었다. 하츠가 늦잠을 자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가 언제 하츠의 말을 들어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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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어? 넌 진짜 어쩌자고 알면서도 독을 먹냐? 아후,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내가 너랑 자하드의 공주들만 아니면 천수를 누릴텐데.”
“그럼 전부 내 탓인 것도 아니잖아.”
“지금 농담이 나와? 내가 쟤랑 쟤 말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아무렴. 고생 좀 하라고 그 때 부른 거니까. 여하튼 해독제를 구해서 득달같이 달려온 하츨링 덕분에 목숨은 건진 것 같다. 친왕전의 나인들이 하나도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했더니 란과 하츠를 동시에 말리느라 하츨링이 꽤 수고를 했겠지만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다 달성했다. 란도 진지하게 아게로가 내 준 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테고, 형제들 중 유일하게 ‘기준’을 제시해 줄만한 인물인 청여도 수도로 불러들이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츠를 달래주는 것 정도인가?
“...해독이 그렇게 단번에 되는 게 아니니까 무리하지 마.”
“그래야겠네. 진짜 당해본 건 처음이라 몰랐어.”
“아오, 그런 짓을 왜 하냐고 그러니까. 누가 그런 거야? 짐작 가는 데가 있으니까 심문도 하지 말라고 한 거 아냐?”
“됐어. 거기 아무것도 안 들어 있었으면 내가 만들어 먹을 판이었으니.”
“무슨 뜻이냐, A.A.”
“죽을 생각은 아니었고. 하츠. 나 물 좀.”
아직 잔 기침에도 피가 섞여서인지 입맛이 괴이한터라 대화를 이어가기에 앞서, 아게로에게는 입 안을 씻어낼만한 무언가 절실했다. 신경독은 아니라 목숨에 큰 지장은 없겠으나 폐혈이 생길 정도로 조직이 망가졌으니 당분간은 움직이는 것을 조심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가려 하라고 했다. 특히 완전히 눕지 않고 상체를 항상 어디에 기대있게끔 해야 기침도 덜하고 내상이 빨리 아물 수 있다고 했다. 높은 분들의 틈바구니라 사시나무 떨듯 떨며 간신히 말을 이어나가는 의원에게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아게로는 당장에라도 누굴 죽일 것 같은 눈빛의 란과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굳은 표정의 하츠를 곁눈질로 살폈다.
“이봐, 청여왕. 난 괜찮으니까 부탁한 거나 잘 좀 해줘.”
“야, 근데 너 설마 나한테 일 시키려고 독을 먹은 건 아니지?”
“그걸 왜 지금 물어봐? 내가 그렇다고 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악! 알겠어, 알겠어. 간다고! 일 하러 가면 될 거 아냐, 이 악마야.”
“사실이냐, A.A.”
“농담이야. 괜찮은거 확인했으니 너도 가 봐도 되는데.”
“싫어. 네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다.”
“.......”
기회가 좋아서 감행한 거지만 연달아 사흘이나 갖은 이유로 침대 신세를 지고 보니 이 것도 오래 할 일은 못된다. 애석하게도 독차까지 마시게 한 장본인은 여전히 변할 기미가 보이지도 않고. 아쉽기는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는 일이 어디 흔하던가?
“네가 얼굴도 안 내밀면 청륜왕이 사무치게 서러워할텐데 그래도 되려나?”
“윽..”
“란. 날 지킬 수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어린 황제는 그 단호한 선언에 입술만 꾹 깨물었다. 분하지만 통감하는 바가 있다는 의미였다. 헌데 그 이야기가 어째 이복동생에게만 하는 것 같지 않아서, 곁에 선 하츠도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궁에 드나드는 수 천, 수 만에 달하는 인물들의 속내를 훤히 꿰고 있는 그가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아끼니 곁에 두었고, 그렇기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다치지 않게, 인내의 폭을 재고 또 재다 오늘에서야 한번 다듬어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일 테다.
“그리고 황제의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너지. 넌 기준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제껏 지켜봐 왔으니 할 수 있어. 이미 몸에 베었을 테니까.”
“A.A.”
“잠시 쉬어가도 좋다고 했었지. 그럼 나는 이제부터 널 쫓지 않고 내 속도로 한번 따라가 볼게. 운이 좋으면 창의 궁을 달리 볼 수 있게 되겠지.”
-
아게로는 이번 국빈 접대를 끝으로 잠시 정양을 겸한 휴식을 갖기로 했다. 이 곳은 대체로 날씨가 춥고 건조하기 때문에 폐부에 내상을 입은 그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만한 남국으로 가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태내관의 진언이기도 했다. 나인들이 여정을 위한 짐을 준비하는 것을 아게로는 잠시 하츠의 어께에 기대 지켜보았다. 보름이나 일찍 준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몸도 불편하고 황태자가 머물 시에는 시간을 따로 뺄 수 있을지 장담이 어려우니 조금씩 진전시키는 것이 낫겠다는 선빈왕의 말을 듣길 잘한 것 같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궁을 떠날 계획을 세운 거냐.”
“그냥. 기회가 좋아서.”
“독차가 마시고 싶었는데 눈 앞에 나타나 줬다는 소리냐?”
“뭐래. 멍청한 누가 자꾸 불나방처럼 몸을 사를 기미가 보이니까 그런 거지.”
“……”
“선황은 날 묶어두려 널 궁에 들이고 내 호위로 붙여 주었지만 널 보지 못하게 했다. 날 탐탁치 않게 여겼던 황후의 나인들이 선황의 눈이 되었지.”
기댈 곳도 하츠 하나뿐이었는데 볼 수는 없다니. 자연히 향하던 시선을 멈춰 세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어야 했는지 하츠는 모를 거다. 에드안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바닥만 보며 지냈던 것 같다. 황후의 궁녀들이 거짓을 고해서 곤욕을 치르는 날도 있긴 했지만 아버지에게 하츠를 보여달라 빌지는 않았다. 그 말이 하츠를 죽음으로 몰고 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보낸 게 15년이던가…? 아무튼 그 고생을 하면서 지켜냈는데 겨우 이런 일로 죽는다고? 허락 못 하는 게 당연하잖아.”
“…미안하다. 그건 또 생각 못했군.”
“생각을 하긴 하는구나 너도.”
“…….”
“살아남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도 날 좀 아껴줘.”
“쓸데없는 걱정이다. 이미 난 널 내 목숨보다, 가족들보다 아끼고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황제한테 날붙이를 들이 밀겠냐? 생각을 해봐라. 그렇게 쏘아붙이니 아게로도 할 말이 없긴 하다. 물론 하츠의 행동은 이성보다는 본능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항상 솔직하기도 했으니까.
“따뜻한 곳에 데려가 줄 테니까 어서 낫기나 해라. 그럼 내가, 옛날엔 닿을 수 없었던 그 탑의 꼭대기 까지라도 데려가 줄 테니까.”
우선 연휴동안 뭔가 하나 하긴 한 저 자신을 칭찬 합니다만...
왜 이게 먼저인지,
묘사도 엄청 쳐냈는데 길이가 왜 이 모양인지,
하츠쿤이 맞긴 한 건지 등등 여러가지 의문이 남은 연성이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다 그렇죠 뭐.
이럴거면 Correction은 왜 두 편으로 나눈 거냐며...
일단 내일을 위해 자긴 자야해서 잡소리는 잠시 묻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완성이 되면 조각글은 지우는데, 소중한 피드백이 달려 있어서 ㅠㅠ
이런 경우는 예상을 못했는데 고민을 해봐겠네요.
모쪼록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좋은 하루 되시기바랍니다~!!!
+
2019.2.12 오탈자 및 일부 수정
세상에 후기에도 오타를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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