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망울
신의 탑/봄 꽃
“쿤씨, 일어나세요. 이제 도착했어요.”
기차가 종착역에 멈춰서자 밤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던 쿤을 깨웠다. 이제 봄이라지만 아직 쌀쌀한 날씨 탓에 추위를 많이 타는 쿤은 제법 두께가 있는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에 은실 처럼 빛나는 청은발은 화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같은 색깔의 속눈썹이 열리면 밤이 기억하는 그대로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나타날 테고.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응.. 깨우지 그랬어. 내내 불편했을텐데.”
“잠깐인데 뭘요. 게다가 동면기가 있는 분들은 이 때 많이 주무시는 게 건강에 좋데요.”
“이제 봄이잖아. 보통 이맘때엔 괜찮아졌는데 이상하게 올 해는 계속 졸리네.”
종착역이니 역무원들의 성화도 없어서 여유있게 각자의 짐을 챙겨 나오며 쿤은 작은 푸념을 뱉어냈다. 동아리 친구들끼리 고즈넉이 다녀온 MT자리에서도 잘만 놀았는데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쏟아진 게 이상하다면서 말이다.
“그럼 정말로 어디 안 좋으신건…”
“전혀. 설마 춘곤증 같은 건가?”
“그런 거면 좋겠네요. 쿤씨는 굉장히 조용하고 귀엽게 주무시던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잠 많은 게 좋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쿤은 잠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돌아오는 길 내내 눈호강 제대로 한 밤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쿤이 졸고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원래 쿤의 옆자리에 앉기로 했던 라크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한 보람이 있었다. 라크는 옆자리에 누가 앉든 자신의 비위를 맞춰줄 때까지 귀찮게 구는 성격이라 혹시라도 쿤이 몸이 안 좋아서 잠을 청하려 한다해도 그는 가만 두질 않을 테니까, 밤이 쿤의 편안한 휴식을 위해서 눈치껏 라크와 자리를 바꾼 것이다. 덕분에 이수에게서 좋아하는 바나나 스낵을 잔뜩 얻어먹은 라크도 불만이 없고, 조용히 인형처럼 잠든 쿤을 지켜볼 수 있었던 밤도 만족스러웠다. 밤도 친절한 성격과 중성적인 외모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사람이라는 아우라를 풍기는 쿤에게는 비할 바가 아니라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수인이 모여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도 뱀 수인이라면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쿤을 보여준다면 생각을 고쳐 먹지 않을까? 만년설이 그 자신을 다져 만들어진 얼음처럼 온통 눈부시게 빛나는 청량한 색채로 가득 찬 사람이었으니.
“여어. 잘 잤어, 쿤? 내내 자던데?”
“몰라. 졸려. 집에 가서 더 잘거야.”
“뭐? 어디..”
“아픈 거 아니고, 열도 없어. 아까 밤도 내내 물어보더라.”
이수의 걱정을 뚝 잘라 놓으면서까지 심신의 건강을 어필한 쿤은 역에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는 친구들의 인사를 받아주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 싶었는지 이수와 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곧 돌아왔다.
“나도 이제 가 볼게. 이런 행사 기획하고 인솔 하느라 고생 많았다, 이수야.”
“임원이 원래 그런거지.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개강 때 보자.”
“그래. 밤도 수고해. 오늘은 고마웠어.”
“뭘 그런 걸로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빨리 안 오냐, 파란 거북이!”
“아오, 저 악어 자식. 난 거북이가 아니라 뱀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어?”
라크의 호칭은 전부 ‘거북이’라 꼭 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래 어떤 수인인지가 그리 중요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아 보이건만 그는 아직 라크의 개도를 포기하지 않았나보다. 사는 곳도 가깝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니, 여기있는 다른 누구보다 라크의 거북이 소리를 많이 들어본 쿤일텐데도 잔소리를 쏟아놓는 걸 보면 말이다.
‘어..?’
라크를 쫓아 몸을 돌리는 쿤의 머리카락 끝자락 쯤에서 그와 어울리지 않는, 아니 이렇게 보니까 의외로 그와 썩 잘 어울리는 봄 꽃의 빛깔을 본 이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봄 하늘보다 더 맑은 푸른색 머리카락에 일찍 핀 벚꽃잎이 내려앉기라도 했던 걸까? 워낙 찰나였으니 눈가에 햇빛이 어려 잘못 본 것이려나. 혹시나 싶었던 생각이 멋쩍어 괜히 뒷통수를 긁적인 이수는 여태 그의 곁을 지키던 밤을 내려보며 오늘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너도 이만 들어가야지. 수고했어, 밤.”
“이수씨야말로 수고하셨어요. 어서 들어가셔서 푹 쉬세요.”
“그래. 개강 하고 보자.”
-
친구들과 개강 때 보자고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결코 개강을 기다린 적은 없는데 약속의 그 날은 오고야 말았다. 5살 터울의 동생보다 못하다는 잔소리를 들으며 일어난 쿤은 여전히 잠에 취해 멍한 상태로 바로 손 위의 누나에 의해 욕실로 밀어넣어졌다. 이럴 때는 씻는 게 최고라는 그녀의 지론에는 동의하는 바였지만 지금 씻는 건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지각을 면하기 위해서라고 곱씹으면서.
“요, 동생님. 개강이라며? 이제 꿈나라 여행을 못 가서 어쩌냐?”
“닥쳐. 백수 주제에.”
“백수라니. 난 엄연히 월 평균 2만 구독의 유튜버거든? 요즘 초딩들 장래희망 1순위의 초 유망 직종이라고.”
“그럼 초딩들한테 가서 자랑해. 진짜 요샌 왜 이렇게 잠이 안 깨지.”
“A.A. 너 아직도 옷도… 어? 나 좀 봐봐 아게로.”
“당장 갈아 입을 거야. 뭐라고 하지 마.”
“아니, 너 머리카락. 염색…이 아니네?”
“머리카락이 뭐?”
그간 퍼 자느라 미용실은 커녕 외출도 한 번 안했던 쿤이 염색을 했을 리가. 마리아의 말에 쿤의 머리카락을 유심히 뜯어보던 하츨링도 뭔가 이상한 눈초리라 결국은 쿤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눈앞까지 당겨 보았다. 그냥 볼 때는 평소랑 같은 것 같은데 천천히 문지르자 각도에 따라 하늘색이 분홍빛으로 바뀌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디 아픈 거 아냐? 영양실조라던가? 요새 졸리다고 밥도 잘 안 먹고 그랬잖아.”
“뭐래. 그 때마다 깨워서 억지로 밥숟가락 쑤셔 넣은 게 누군데.”
“원인을 모르면 더 큰일이잖아! 형이 태워줄게. 어서 병원 가자!”
“무면허가 누굴 태워.. 됐어. 그거 아냐. 혼인색. 뭐 별 일이라고.”
“뭐라고?!! 네가 몇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 혼인색이야!”
“저 이제 대학생이거든요, 망할 아버님. 성인 맞아요.”
밤은 가족이 많아서 좋겠다면서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 정신없는 집안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이고 보면 생각이 바뀔거다. 나이가 차면 나타나는 게 당연한 걸 가지고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쿤은 당장의 지각을 면하기 위해 고데기도 포기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나중에 앞머리만 대충 어떻게 하고 오늘은 묶고 가는 게 상책일 것 같다. 이젠 신입생도 아니니까 깐깐하게 성적을 매기는 걸로 유명한 전공 교수의 수업에 지각했다가는 오로지 쿤의 손해다.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혼인색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닐텐데 그게 뭐 대수라고. 쿤의 형제가 몇인지를 생각하면 처음 있는 일도 아닐텐데 아들이 성인이 되었다는 게 충격이라는 표정의 에드안을 지나쳐서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간 쿤은 늦은 만큼 준비로 분주했다. 아센시오 처럼 완전히 색이 바뀌거나 다른 형제들처럼 문신 같은 점이 생길 줄 알았는데, 이만하면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괜찮은 것 같다가 자신의 혼인색에 대한 쿤 아게로 아그니스의 감상의 전부였다.
짜잔!
새겁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런거죠...
트위터에서 트친분들로부터 소재를 얻은 수인+대학생 AU입니다.
Exceptional과 마찬가지로 내킬 때 그만큼씩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티스토리 에디터가 너무 바뀌어서 적응도 할 겸 일단 프롤로그 부분만 쓱쓱해서 올려봅니다.
나중에 조금 손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쓸 게 많아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분위기 캐치용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