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신의 탑/봄 꽃ㅅ
대세와는 달리 스물다섯번째 밤은 개강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다고해서 교수님의 수업이 그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진학하기는 했지만 정치외교과의 수업은 밤의 적성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성격상 아무리 흥미가 없어도 강의를 빼먹거나 과제를 미룰 수는 없었지만 동기들과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올만큼 전공과 밤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양이나 동아리 활동 쪽으로 캠퍼스 생활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헌데 올해부터는 달라졌다. 동아리 친구, 아니 밤의 첫사랑이 복수전공으로 밤과 같은 전공을 이수한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여. 개강인데도 쌩쌩하네, 밤. 공강이야?”
“아니요. 아직 시작 안 했어요. 쿤씨랑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일찍 온 거에요.”
“아… 그래서 너 오면 깨워달라고 했구나.”
“깨워달라고요?”
“저기. 쿤은 여전히 동면 중이야.”
꽃샘추위가 기승이다보니 여전히 졸음이 쏟아지는 건지 동아리 방의 유일한 간이 침대에 웅크린 쿤은 이수의 표현대로 동면 중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빼앗은 건지 잠시 기증받은 건지 모르겠으나 친구들의 외투에 뒤덮혀있어 추위를 느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키보다 작은 간이 침대에서 잠든 모습은 딱 또아리를 튼 뱀이었다. 가을 낙엽을 그러모아 만족스러운 잠자리를 확보한 상태의 백사(白巳) 말이다.
“고생하시네요. 날이 어서 풀려야 할텐데요.”
“글쎄. 그러면 확실히 낫긴 하겠지만 쿤이 좀 유별난 건지도? 쟤네 누나라던가 다른 형제들은 멀쩡하던데.”
“정말요?”
“아까 마리아씨가 잔소리를 퍼붓고 갔거든. 여동생 입학식도 안 가 보고 이 모양인가봐.”
“하하… 나중에 어쩌시려고..”
“내말이. 자기가 저지른 짓이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동아리 방에서 밤을 반겨준 건 기다리던 쿤이 아니라 성실한 회장, 이수였지만 놀다 지친 아이처럼 곤히 잠든 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실망마저도 간 데가 없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도 밤의 행복 그 자체였으니까. 늑대 수인인 밤에게 첫사랑이란 곧 운명이다.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그들이니 쿤이 밤을 선택하지 않는다 해도 밤이 그를 외면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쿤에게는 아직 연인이 없으니 밤이 슬픈 생각을 떠올릴 때는 지금이 아니다. 밤의 아버지가 그랬다는 것처럼 쉼 없는 도전의 시기라고 해야겠지.
“비오.. 아니, 밤!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왕난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왕난씨는 잘 지내셨어요? MT 때도 못 오셨잖아요.”
“진짜 가고 싶었는데 선약이 있어서… 어흑. 다들 나 빼고 재밌게 놀았겠지..”
“다음엔 꼭 같이 가요. 아니면 왕난씨네 집 근처로 출사 갈만한 곳을 알아볼까요?”
“그건 절대 안 돼! 아빠나 형이 경호를 붙일거야.”
“역시 높은 분들은 뭔가 다르구나. 동아리 MT에도 경호라니.”
“말이 경호지 완전 감시라고. 감시도 그냥 따라다니면서 쳐다보기만 하면 괜찮을 걸 아빠한테 자꾸 뭘 일러 바친단 말이야. 품위가 없다던가, 행동이 가볍다던가!”
“뭐… 솔직히 네 아버지 위치를 생각하면 넌 잔소리 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만.”
“왜!!”
지금도 왜라고 되물을 정도로 개선의 여지가 안 보이니까 당연하지. 일류 수행원이 밤낮으로 따라붙어 가르쳐도 늘지 않는 것을 이수가 어쩌겠는가. 친구의 기분이라도 덜 나쁘게 어서 화제를 바꿔 주는 게 최선. 유명한 정치인인 왕난의 아버지처럼 이수의 동료들 중에는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많았다. 동물의 특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이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데다가, 수인들은 보통의 인간과는 달리 별도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이들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출세가도에 오르기도 쉬웠다. 이 특별한 재원들을 위한 최상위 고등교육 기관으로 평가받는 이 대학은 단연 신분상승의 상징과도 같았기에 이수 또한 재수를 감수하면서까지 도전했던 것이고.
“강의는 언제야, 밤? 쿤은 안 깨워도 돼?”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요. 동방에 들리려고 일부러 일찍 나왔거든요.”
혹시 깨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즉 이수와 왕난 그리고 밤이 떠들어도 뒤척이지조차 않던 쿤이니까 밤은 마음 가는 대로, 조심스럽게 쿤의 귓가로 손을 뻗었다. 깨우고 싶진 않았지만 만져보고 싶었다. 유독 눈에 띄는 색깔의 머리카락이라던가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같은 것들이. 현실성이 없어서 만든 것 처럼 생각되는 은청색 모발은 예상과는 달리 밤의 손끝을 물 흐르듯 피했다. 스쳐지나가는 촉감만으로도 곱디 고와서 온기를 머금은 피부에는 채 닿기도 전에 혼자 놀라 거리를 두었던 밤은 그 서슬에 흩어진 쿤의 머리카락에서 엿보이는 또 다른 색에 고개를 갸웃했다. 호기심으로 꽃물이 든 것 같은 바로 그 부분을 사르르 흘려보고있던 차에 저를 향해 열리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밤은 이번에는 다른 이야기 중이던 이수와 왕난이 이쪽을 바라볼만큼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일어나 계셨어요?”
“응..... 아니.., 그냥 깨워도 됐는데.”
“대답이 뭐 그러냐 너는.. 밤이 너 때문에 30분은 먼저 나온 것 같던데 이제 일어나라.”
“왜 안 깨웠어 너흰.”
“밤이 안 깨운게 왜 내 잘못이 되냐..”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일부러 안 깨웠어요. 많이 피곤하신 것 같아서요.”
“피곤한 게 아니라 부작용 같은 건데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무슨 부작용?!”
“겨울잠보다 부작용이 훨씬 큰 일인데 무슨 소리야?”
친구들의 과격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덮고 있던 옷 더미에서 자신의 트렌치 코트를 찾아 걸친 쿤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부연설명을 덧붙이며 머리를 묶었다.
“죽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그런 일이었으면 진즉에 병원에 끌려 갔겠지.”
“안 죽는다고 해도 그런 심각한 일이면 진단서 제출하고 좀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음.. 됐어. 이미 색이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금방 끝날거고 졸음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니까.”
“색?”
“혼인색. 우리 쪽에서는 그냥 통과의례 같은 거야.”
수인들은 그들의 반신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의 피에 기인하는 특성을 어느정도 함께 지닌다. 뱀 수인의 동면이나 혼인색은 그러니까, 뱀의 특성에서 온 지극히 당연한 현상으로 쿤의 말처럼 그게 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보통은.
“그 통과의례에 부작용이 있다는 얘긴 처음 듣는데?”
“드물게 각성이 같이 일어나면서 나처럼 탈력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데.”
“각성?”
“속성이 여러 개가 되는건데 우리 집안은 아버지부터가 그 모양이라 나 말고도 몇명 있었다고 하더라고.”
분명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묶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능력있어 보이는 쪽으로 바뀐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걱정이 가득한 친구들의 표정 때문인지 전에 없이 친절히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주는 쿤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던 밤은 걱정이 가시자마자 새로운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쿤씨. 혼인색이 뭐에요? 결혼이랑 관계가 있는 건가요?”
묻는 순서가 밤에게 밀렸을 뿐 같은 게 궁금했던 왕난도 눈을 빛냈다. 반짝이는 네 개의 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니 천진함을 이기기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게 되는 쿤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아버지를 두었다는 것 또한 둘의 공통점인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가 쿤에게는 세상 최대의 의문이었다. 왕난의 경우야 유능한 형이 있으니 재능이 그 쪽에 치우쳐졌다 칠 수라도 있겠는데 가업(?)을 이어가야할 게 분명한 밤쪽은 확실히 신기했다. 분명 부모님으로부터도 별도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인이 됬다는 증거 같은 거야. 생식능력이 완전해 지면서 나처럼 색이 바뀌거나 특별한 문양 같은 게 나타나기도 해. 우리 일족은 혼인색이 나타나야 진짜 어른으로 대우해주기 때문에 그 전엔 독립도 안 돼고 결혼도 금지야.”
“잠깐만. 그럼 조금 전까진 완전 애기였다는 거네?”
“뭐래. 넌 뭐 어제 태어나서 바로 대학생이냐.”
“우리 집에서는 스무살만 넘으면 어른이거든? 그러니까 난 작년부터 어른이었던 거지.”
“쟤 지금 선배 대우 해 달라는 얘기냐?”
“왕난이가 1년 선배면 난 2년 선배인 거니까 큰 형님이라고 불러, 쿤”
“하아...”
2살 정도면 사회에 나가서는 결코 많은 나이차도 아니건만, 기어코 형 대접을 받을 심산인지 당당하게 턱을 들고 버티고 선 두 사람의 뒤로 여전히 부담스러울만큼 천진한 눈빛의 밤이 이수와 왕난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밤 마저도 선배 대우를 바란다면 곤란하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쿤의 눈앞에 당도한 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당장 독립 하시고 결혼도 하셔도 상관 없는 건가요?”
“기본 요건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큰 일에는 준비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밤?”
“제가 도와드릴게요.”
“뭘?”
방금 쿤을 의문의 수렁으로 밀어넣었다는 걸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밤의 얼굴에서는 태양처럼 찬란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너무도 순수한 기쁨이 엿보여서 차마 태클을 걸 생각도 못 하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손까지 마주 잡은 밤이 노래처럼 다음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 혼인색으로 다 바뀌는 건가요?”
“글쎄.... 확실히는 모르지만 보통 몇 주 이내로는 다 끝난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시간이 없네요?”
“무슨 시간? 아, 아니다. 그건 내가 나중에 따로 설명해 줄 테니까 슬슬 출발하자. 정외과는 인문 1동이던가?”
“네. 226 강의실이에요. 첫 수업이니까 교재 소개만 하고 끝나지 않을까요?”
“그럼 좋을텐데. 난 첫강부터 풀강이었어서. 시간 대비 생산성이 어떻다던가 하면서 말이야.”
“경경과는 역시 효율 위주인걸까요.”
“쓸만한 강의여야 효율도 투자가치도 있는거지. 우리 다녀올게. 이따 보자.”
“나도 곧 수업이라. 여튼 공간 맞으면 또 보자.”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강의 끝나면 밤이랑 같이 와. 점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너 몸 보신도 할 겸.”
아직 서로의 시간표를 파악하기 전인지라 한 2주 정도 지나기 전까지는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 구하는 것도 헷갈리겠지만 쿤은 같은 과인 왕난이 있으니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을 찾아다니는 수고는 많이 덜어낸 셈이다. 복수전공을 하게 되면서 동아리 방에 들릴 시간이 줄어든 게 아쉬울 수는 있어도 그 동아리 자체도 왕난의 손에 끌려오다시피 했으니까. 그래도 그가 복수전공을 하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건 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 동아리 활동만이 아니라 강의시간이라던가 조별 과제의 회의시간 등에도 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작년에 밤이 스스로와 싸우는 기분으로 전공 강의를 들은 것은 다 이 때를 위해서였나보다. 들을만한 강의나 교수를 추천해 달라는 쿤의 부탁을 받던 순간, 밤의 지난 한 해는 전부 보상을 받았다. 점심 때 왕난과 쿤의 조합에 끼어들 근거도 생겼고. 인문관끼리는 붙어있어서 경영경제과인 쿤이 강의실의 위치를 모르는 것 같진 않았지만 밤을 따르는 듯한 기색에 왠지 밤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어떤 강의를 들으면 좋을지를 물어봤던 것도, 밤에게 강의를 같이 듣자고 한 것도 쿤이 정치와교과의 수업을 들을 때만큼은 밤을 의지하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져서 그런 것 같았다. 비록 왕난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쿤은 의외로 카메라나 필름에 대해 꽤 박식했다. 사진을 찍는 취미는 없다면서도 렌즈나 카메라의 브랜드 별 특징을 꿰고 있어서 오히려 원래부터 사진에 흥미를 가졌던 다른 친구들이 그의 도움을 받아야할 정도였다. 당연히 동아리 활동으로 사진을 처음 시작한 밤이 쿤을 도울 일 같은 건 아예 없었다. 기껏해야 무거운 걸 들 때 도와주거나 졸고 있을 때 어깨를 빌려주는 정도? 반 걸음쯤 뒤에서 밤의 뒤를 따르던 쿤은 인문 1동에는 처음 발을 디딘 건지 중앙 정원의 조경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이제 움이 터 가지 곳곳에 연두색 점들이 찍혀있는 광경은 사실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자신이 워낙에 특출난 지라 곁에 선 밤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늘 물 같은 색이었던 그 푸른 눈 속에 잠시 꽃잎 같은 것이 비췄나 싶은 순간 집요한 시선 때문인지 눈이 마주쳐버리자 밤은 멋쩍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2동이랑 거의 비슷하지 않나요?”
“그건 그런데 돌아다니는 얼굴 들이 심상치 않아서. 조별과제 같은 거 하면 불꽃 튀겠는데?”
“설마요. 다들 친절하시던걸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세계의 이면을 움직이는 시크릿 패밀리의 일원인 주제에 성선설의 독실한 신자인 밤의 사람 보는 눈에 대해서는 이미 해탈한 쿤이니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밤의 정체를 알아보고 알아서 설설 기어준 사람들이나 곱상한 외모에 호감을 가지고 잘 대해준 여학우들의 사심 가득한 호의를 선의로 보정하여 기억하는 것이리라. 대학 간판이 일류이니만큼 한 가닥 하는 집안의 자제들이 모인 이 곳에서 훗날을 염두에 둔 기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어 보이건만.
“같은 과에 네 정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지?”
“계시긴 하지만 크게 신경쓰는 분위기는 아니에요. 애초에 이 학교 자체가 너무 쟁쟁한 집안의 자제분들 밖에 안 계셔서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FUG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지도 모르죠. 여하튼 저는 그래서 마음이 편해요. 수업은 여전히 어렵지만요.”
“FUG의 이미지와 네가 너무 달라서 정보를 못 믿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설마요. 전 저보다 쿤씨가 걱정인데요.”
“나? 왜?”
“.....쿤씨를 잘 모르는 분들이 함부로 이야기하니까요.”
밤이 지상의 정보 조직이자 지하의 실권자인 FUG의 유일한 후계라는 건 캠퍼스 내에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 조직의 특성상 지상의 법과는 별개로 사람 한둘을 지우는 것쯤은 일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설마하면서도 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당장의 인간관계를 더 넓히고 싶은 생각이 없는 밤에게는 지금 정도가 딱 지내기 좋았고 말이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도 별 제약을 두지 않고 지내온 밤이지만, 가끔 욱하게 되는 일들은 보통 쿤과 관련된 소문을 듣게될 때였다. 어쩌면 작년의 입학생 중에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밤이나 왕난이 아니라 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뛰어난 원소술사인 동시에 연예계를 주름잡고 있는 쿤 일가는 당연하게도 대부분 예체능 계열로 진학했고, 캠퍼스에서 목격되는 일도 연례 행사급. 때문에 경영경제 전공의 쿤 가문 입학생이 있다는 말에 신입생들은 그가 기형에 가까운 정도로 못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추측했었다. 헌데 예상과 달리 쿤 가문 연예인 중 누구 옆에 두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미소년이 나타난 것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다. 그와 친구가 되면 좋아하는 연예인과의 연결고리가 생길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곧 잘 붙어다니는 왕난과 밤이 그에게로의 접근을 어렵게 만들자 질투에 눈이 먼 누군가의 소행인지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건 쿤이 ‘꽃뱀’이라는 게 골자였다. 뱀 수인이기까지 하니 딱이라고 킬킬대는 목소리에 친구인 밤이 먼저 울컥했지만 당시 튕겨져 나가는 밤의 어깨를 붙잡은 게 당사자인 쿤이었다.
들으라고 한 소리를 들은 것뿐이야.
사람들은 늘 연예인에 대해서 쉽게 말하고 평가하니까. 그게 싫어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역시나 아직까진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나보다 하고. 스스로 형제들의 명성을 이겨낼 때까진 감내해야할 몫이라고 말이다. 밤은 그 때 쿤에게 또 한번 반했지만 감내한다는 건 상처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더 신경쓰였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가갈 틈을 주지 않아서, 소문 속의 모습처럼 차라리 대 놓고 유혹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울 것 같았다. 실제로 밤은 지금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되길 원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밤의 마음이 더 어지럽도록 혼인색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쿤은 여전히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밤을 아직 피지않은 벚꽃색으로 흔들어 놓기까지 했다. 투명하게 푸른 색깔이 햇빛 사이를 지날 때마다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가 푸르게 다시 개이는 모습은 충분히 요사스럽건만 쿤의 시선은 밤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런 건 옛날에 적응 다 했지. 너무 신경쓰지 마, 그런 관종들한테.”
“여전히 강경하시네요, 쿤씨는.”
“요즘 세상에 이 정도는 욕도 아니야.”
“하하…”
밤은 험한 말이라고는 입에 담지 않는 주의였지만 그렇다고 세태가 어떻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쿤이 그런 험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뿐. 쿤이 강한 언동을 보일 때마다 놀라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가 진실로 꽃이라 하더라도 온실 속에서 갖은 보호를 받으며 가녀리게 자라난 화초보다는 악천후와 싸우며 온 몸에 가시를 돋워낸 야생화에 더 가깝다는 것은 밤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밤의 소망은 그가 스스로 날을 세울 일 없게 지켜내는 일이었으니.
“이쪽에 앉으세요. 유 교수님께서는 강의는 명쾌하게 잘 하시는데 좀 괴짜라서요.”
“괴짜?”
다른 전공의 첫 수업이니 순순히 안내자인 밤의 말에 따라서 그가 의자를 빼 주는 자리에 앉는 쿤이 사랑스럽기만 한 밤이지만 밤이 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오자 실내가 술렁이는 게 둔감한 편인 밤에게도 똑똑히 느껴졌다. 그런 반응이 익숙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밤이 해 주는 이야기가 정말 신기하기 때문인지 쿤은 밤의 말 이외에 다른 것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명 드리긴 좀 힘든데… 아무튼 보시면 알아요.”
전공필수 과목이라 밤과 쿤도 어쩔수 없이 선택한 ‘정치외교와 화술’ 과목의 담당 교수는 성자인 밤이 저렇게 말하게 할 정도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강의실의 중간 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잠시, 의외로 조그만 유한성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밤에게 사심 가득한 안부를 묻던 목소리들마저 뚝 끊길만큼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밤의 옆자리에 앉은 쿤도 부러 무시할만큼 콧대 높은 정치외교과 학생들의 반응이 신기해서 커피잔을 들고 신경질적인 걸음걸이로 교단에 오르는 단신의 교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곧 커피잔을 교탁에 탁 소리나게 내려 놓은 유 교수가 창가에 앉은 학생들에게 경고를 먹였다.
“수업 안 듣고 바깥 구경이나 하려는 거죠? 창가에 앉은 분들은 시험 성적에서 한 단계가 내려가게 될테니 그렇게 알고 더 열심히 공부하세요.”
단지 첫 날 첫 수업인데 선택한 자리만 가지고 학점 운운하는 교수의 만행에 아연해짐과 동시에 밤이 굳이 쿤을 창가가 아닌 안쪽 자리로 인도한 이유에 대해서 뒤늦게 깨달은 쿤을 뒤로 하고 천재로 이름 높은 어린 교수는 첫 시간이니 출석부터 부르겠다고 했다. 성적을 한 단계 낮출 대상들의 이름을 분명히 알아두기 위한 포석 같아서 출결조차 찜찜하던 차였으나 이미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네?”
“복수 전공이라니 재수 없으니까 마이너스.”
“교수님!”
“그리고 적을 포섭해 왔으니 스물다섯번째 밤은 플러스.”
“적….”
“교재따윈 강의계획서에 써 놨으니 알아서들 사서 보고.”
그러는 자기는 월반까지 한 천재 주제(?)에! 쿤 보다도 더 사색이 된 밤 덕분에 교수에게 따지고 들 타이밍은 놓쳤지만 보아하니 저 마이페이스인 교수가 항의를 한다고 해서 곧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다. 성적이 높을 수록 좋은 건 당연하지만 복수전공이니 어차피 수석은 못 될 운명이다. 깨끗하게 이 수업은 숨 죽여서 선방 하는 선에서 그치고 다른 과목을 공략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고 수업 내용에 집중해 보자면, 밤의 표현대로 강의 자체는 정연했다. 요점이 뭔지 쉽게 알 수 있었고 예시도 적절했다. 심하게 직설적인 표현과 시대상을 너무 잘 반영한 탓에 교수의 사상이 그대로 주입되는 것 같은 느낌만 제외한다면. 90분 강의에서 ‘마이너스’ 경고를 받은 학생만 스무명에 달할만큼 예민한 성격도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다. 그 중에 멋 모르고 창가에 앉았다가 봉변을 당한 수가 아홉이니까 학기가 끝날 때 쯤에 A+를 받은 학생이 남아있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유일하게 ‘플러스’를 받은 밤이 있었지. 수업 내내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보니 이 쪽도 쉽진 않겠다 싶긴 하지만 말이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사과부터 하는 밤이 비 맞은 강아지 같아서 쿤이 오히려 왕난이 말했던 맛있는 점심으로 밤을 달래야 했다. 사실 쿤은 유 교수의 태도에 그리 마음을 쓰고 있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게로!”
하지만 이건 달랐다. 쿤이 굳이 형제들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 캠퍼스 내에서는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명확하지도 않건만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세단은 쿤과 밤의 앞에서 드래프트를 하며 멈춰섰고, 짙게 썬팅된 창이 내려가자 목소리가 이미 정답을 알려준 대로 선글라스를 옆으로 집어던진 에드안이 있었다. 타이어가 노면을 긁는 소리가 워낙에 시끄러웠으니 전필 강의를 마치고 터져나온 정치외교과 학생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리는 건 당연한 현상.
“몸이 안 좋으면 쉬어야지 왜 굳이 나온 거냐?”
“안 좋은 게 아니라 졸린 거였거든요. 무…”
“강의 끝나면 당장 들어와라. 성인이 되고 했으면 일찍일찍 들어와야지! 동아리 같은 거에 신경쓰지 말고!”
“반대 거든요, 쿤 에드안 교수님. 그리고 댁은 인문관이 아니라 예술관에 가야하잖아? 게다가 학생들 칠 뻔 했잖아요, 지금. 대체 교수는 어떻게 된 거에요? 뇌물 먹이고?”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저녁은 무조건 나랑 먹어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제가 왜요!”
연예인이 쉽게 무시를 당하는 귀족들의 교정이라 해도 소위 ‘클라스’는 존재하는 법. 몰상식한 운전에 한 번, 쿤 에드안의 등장에 두 번 초토화가 되었던 인문 1동은 그가 떠나고 난 뒤에도 술렁임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여성편력이 거의 기록감이지만 사람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장년이 이른 현재까지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그는 당연하게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눈곱만큼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가족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추파를 던질 기세인 그의 카사노바 기질이 지금까지 발휘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공개적으로 쓴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아들을 챙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제대로 난 것 같은 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왔던 것처럼 빠르게 차를 몰아 사라지는 아버지의 애마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쿤은 정신차린 밤의 위로가 아닌, 호탕하고 맑은 웃음 소리에 이성을 되찾았다. 돌아본 자리엔 수업 때까지만해도 굉장한 저기압이었던 유 교수가 박수까지 치면서 웃고 있었다. 진귀한 구경거리 였는지는 몰라도 그리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가에 눈물이 날 때까지 웃던 유한성은 한참만에야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팔불출 쿤 에드안이라니.. 좋은 구경 했으니 마이너스는 없는 걸로 치죠. 뭐 언제든 거슬리면 깎을 거지만요. 아, 점심 맛있게 드세요, 밤 학생. 저는 선약이 있어서. 언제라도 교수님과 점심을 함께 하고 싶다면 얘기하시고요.”
밤의 표정을 보면 그럴 리가 없어보이지만 유 교수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이고 쿤의 학점도 당장은 원상복구 되었으니 해피엔딩인걸까? 시작부터 피곤한 이번 학기의 예감에 기쁜 소식에도 쿤은 잠시 마른 세수를 했다. 혼인색에 각성이 아니더라도 다음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어디서 좀 쉬어야 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거 이름은 봄 꽃인데 여름에 연재하게 생겼네요.
이번 글은 소재부터 진행에 이르기까지 트친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은 나올 때 짚어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