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송이
신의 탑/봄 꽃
“으아, 레포트에 깔려 죽겠다.”
머리를 쥐어 뜯으며 외치는 왕난의 절규에 쿤은 마음 속으로만 동의를 표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녹아내리듯 책상에 엎드린 쿤의 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보이는 이상증상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상상 이상이었다. 너무 졸려서 점심이고 레포트고 당장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니 생각이라는 게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려나? 쿤의 의식이 까무룩하게 가라앉아 가는 와중에도 저 혼자 왁왁대며 쌓여가는 레포트의 수에 울분을 토하던 왕난은 강의실에 둘만 남았음에도 쿤이 아무런 대구가 없자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야, 쿤. 아직도 졸려서 그래?”
“점심 먹으러 갈 때 깨워줘.”
“지금 먹… 그래. 오늘만 좀 늦게 먹지 뭐. 식당에 사람들도 바글바글할 테니까. 음.. 그럼 나는 경영전략 레포트를…”
왕난이 접어서 넣었던 노트북을 다시 꺼내는 데도 쿤은 미동 없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각성이라는 특수한 절차 때문에 무기력해진 요즈음의 쿤은 깐깐하고 도도한 본래의 성격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방비했다. 졸고있는 동안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라면 친구들이 만지는 것까지도 오케이였다. 역시나 오늘도 물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흰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묘한 분위기를 풍겨서 왕난은 혼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간판이 좋은 대학인만큼 캠퍼스에는 집안도 외모도 다 되는 선남선녀들로 넘쳐났지만 학생들이 결혼이 아닌 연애 상대로 첫 손에 꼽는 이는 누가 뭐래도 지금 왕난의 옆에 세상 모르고 잠들어 계신 쿤 아게로 아그니스였다. 높으신 분들의 특성상 결혼은 대부분 정략혼이기 때문에 상대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자유연애를 즐기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고 더해서 수인들은 성에 관한 구분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떤 동물의 피를 타고 났느냐에 따라 그들이 호감을 느끼는 대상은 사뭇 다른데, 다른 동물의 피를 타고난 사람에게 그 기준을 적용하고 보면 암수구분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주요했다. 요는 종족 번식의 가부라던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입장 차 등에 따라 최종적인 배우자는 부모님이 결정지어 주니까 연애만큼은 자기 취향대로 하고 싶다는 게 특권층 젊은이들의 마인드라는 거다. 그 와중에 쿤이 독보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건 대중을 휘어잡는 연예인 집안 출신인 만큼 많은 이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외모를 갖춘데다가 쿤 가문이 높은 이름 값에 비해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주요했다. 요컨대 지하세계의 큰 손이라던가 정치적 수완 혹은 군사력으로 유명한 집안의 자제들은 아무리 취향에 맞는 성격이나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질 경우 위험부담이 상당하다. 하지만 쿤 가문이라면 최악에 최악으로 헤어진다고 해고 가십거리 정도로 끝날 테니까 안전하고 오감도 즐거운 연애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와는 전연 다른, 쿤의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관리 덕분에 아직까지 그 소망을 이룬 이는 아직 학내에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같은 소망을 가진 이들 중 한 사람으로서 왕난도 이번 기회에 쿤의 머리카락에 한번 손을 대 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여전히 머릿 속에서는 새하얀 목선이 아른거리지만 맨살에 체온이 다른 손이 닿으면 쿤이 깰지도 모르니까. 딱히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닌데도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왕난은 천천히, 원래도 나지 않을 소리까지 죽여가며 손을 뻗었다. 닿는 순간부터 감탄이 터져나오는 물결 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올려 귀 뒤로 넘겨주니 흡사 눈의 요정처럼 잠든 얼굴이 드러나 다시 한번 왕난의 심장을 때려댔다. 마음 같아서는 레포트고 점심이고 다 필요 없이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그 얼굴만 보고 싶은 왕난이었으나 뭔가 이상한 예감에 왕난의 손은 한번 더 전진했다.
“쿤? 너 괜찮아? 열 있는 것 같은데?”
“으…”
“병원.. 아니면 약이라도 타 와야 하는 것 아냐?”
“….괜찮아. 아침부터 그랬어. 해열제는 가져왔고.”
팔꿈치 사이의 간격을 좁혀 완전히 얼굴을 감췄던 쿤은 곧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보통은 서늘하게 느껴질만큼 왕난보다 체온이 낮은 쿤이 왕난과 비슷한 정도의 체온을 가지고 있다는 건 한여름이 아니고서야 그의 몸 상태가 나쁘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쿤은 왕난의 걱정을 점심 먹으러가자는 말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왕난은 이제 막 켜진 노트북을 다시 덮고 쿤을 잡아 끌었다.
“그럼 졸지말고 약부터 챙겼어야지. 일단 점심 먹으러 가자. 약도 먹고. 내가 동방이나 잠시 쉴만한 곳으로 데려다 줄게. 어지럽지는 않고?”
“졸려.. 뇌가 녹을 것 같아.”
“그건 졸린 게 아니라 네가 열이 나서 그런 거잖아. 강의도 몇 개 없는 것 같던데 차라리 하루 쉬는 게 낫지 않았어?”
“그랬으면 유한성 그 악마 같은 교수가 내 학점을 반토막 냈을 걸.”
“아… 아무튼, 가자. 가방 내가 들어줄까?”
“아니야. 뭐 먹지. 늦어서 식당에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네.”
사실 왕난이 거의 쿤을 잠들자 마자 깨운 셈이라 점심시간은 오히려 지금이 절정이겠지만 열이 올라 시간 감각이 무뎌지기까지한 쿤에게 어서 약을 먹이고 집에도 데려다 줘야 겠다는 생각이 든 왕난은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 그러면서도 환자한테 추천할만한 메뉴를 정하느라 혼자 고심했다. 영혼 없이 왕난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인 쿤은 왕난의 고민을 헤아려주진 못하겠지만. 결국 왕난이 정한 오늘의 메뉴는 대학가 주변의 조그마한 가게에서 파는 죽이었다. 이 곳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음식이 아니라서 아직까지 이렇다하게 인기를 끌고 있진 않지만 이수의 고향에서는 죽을 환자식으로 주는 문화가 있다고 했다. 하츠의 고향에도 비슷한 게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그 쪽에서는 대중적인 음식인가보다.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건지 가게는 손님은 없지만 주문받은 음식을 퍼 담느라 분주했는데,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풍겨오는 게 맛 본 적 없는 음식이지만 예감은 좋았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에게 추천한다는 쇠고기죽과 참치죽울 주문해 놓고 보니 거기서도 앉은 채로 벽에 기대 졸고 있는 쿤을 발견한 왕난은 별 수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대단한 배경에 비해서 대단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왕난은 이 학교도 다른 수를 써서 둘어온 게 틀림 없다는 말을 학기 초부터 듣고 있었고 그 덕에 친구도 별로 없었다. 4년 내내 전공 수업을 혼자 들어야 하나를 고민하던 왕난의 옆자리를 OT를 불참으로 넘겼던 쿤이 차지하면서 걱정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났지만 말이다. 왕난을 위한 배려라기 보다는 왕난의 옆에 있으면 여학생들한테 좀 덜 시달릴 것 같다는 이기심 똘똘 뭉친 선택이었음을 감추지 않은 쿤이었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보다야 그 직설적인 화법이 차라리 마음에 들어서, 둘은 이후로도 전공 수업을 함께 들었다. 표현방식이 재수 없어서 그렇지 지내다보니 무른 구석이 많은 쿤은 왕난이 선택한 별 볼일 없는 교양 수업도, 기괴한 비주얼의 점심 식사도, 막무가네로 정한 사진 동아리에까지 전부 따라가 주었다. 동아리 덕분에 이제 쿤이 아니라도 점심 식사를 함께할 친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왕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첫 손에 꼽히는 건 아직까지는 쿤이었다. 쿤이 속으로 어떤 계산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껏 함께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왕난에게는 많은 점수를 따 갔으니까. 친구를 넘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할 만큼.
“몇 술이라도 먹어, 쿤. 그래야 약을 먹지.”
“......뭘 시킨 거야?”
“죽이라는 건데 이수가 환자한테 좋은 스프랬어. 네 거는 소고기, 내 꺼는 참치.”
“참치라니. 너 고양이가 맞긴 맞구나.”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거든?!”
“닥쳐 개냥이.”
“아오! 환자니까 참는다. 눈 뜰 기운은 없으면서 나 놀릴 기운은 나냐? 어?”
대답 없이 어깨만 한번 으쓱해보안 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을 숟가락으로 한번 깊게 저었다. 스프라고는 해도 그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비주얼이지만 못 먹을 게 들어있는 것 같지도 않고 냄새는 고소하다. 천천히 식혀 먹으라는 식당 주인의 말에 조심스럽게 반 숟가락 정도만 입에 넣어봤는데 다른 음식에 비해 담백하고 부드러워서 확실히 넘기기가 쉽다. 고양이 혀인 왕난과 쿤의 입장에서는 좀 많이 식혀야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위에 막이 생길 정도로 식었을 때 겉만 살살 긁어 먹어야 온도가 좀 적당한 것 같이 느껴지는 음식이지만 입맛이 뚝 떨어진 상황에서 이 정도면 확실히 맛있는 축에 든다.
“이제 수업 없는 거 맞지?”
“응.”
“그럼 기사 아저씨를 여기로 부를 테니까 바로 집에 들어가. 이수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전시회 때문에 골치 아플텐데.. 이화랑 하츠가 잘 도와주려나...”
“왜 걔네 둘이야? 밤은?”
“학기 중에는 바쁘잖아. 센스도 없고.”
밤은 출사가 아니면 임원진에서 쓰임새가 없다고 푸념하는 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찬가지로 디자인 센스가 없는 왕난도 같이 공격을 받는 느낌인지라 남 말할 처지가 아닌 왕난은 한 마디도 보탤 수 없었다. 다른 센스면 몰라도 보이는 거에 대해서는 이화도 믿을만 하지만 하츠는 딱히 밤이나 왕난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어쩌다가 준비위원이 된 건지 입이 근질근질해도 말이다. 사진동아리의 특성상 계절별로 있는 출사가 중요한 행사이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하는 사진 전시회 또한 중요도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매 축제때마다 동아리 회원들이 출품한 사진들로 여는 전시회는 수익금으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동아리 창립 이후 한 해도 거른적 없는 사진 동아리 TOG의 메인 행사였다. 때문에 임원진만이 아니라 센스와 행동력이 남다른 인재를 가려 뽑아서 별도로 준비 위원회까지 일시적으로 운영하곤 했는데, 예선부터 전시회장 디자인까지 모두 동아리의 인력만 동원하기 때문에 5월의 대학 축제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학기 초부터 발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째서 과대나 동아리 임원으로 나서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탁월한 리더쉽을 자랑하는 쿤도 준비위원으로 차출당한 상태. 쿤의 말 대로라면 각성은 오래지않아 끝난다고 하지만 열이 있는 걸 보니 감기몸살이라던가 다른 병에 걸린 게 아닌지 왕난으로서는 걱정이다. 왕난의 권유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건데 무리하다가 잘못되기라고 하면… 머리수로는 왠만해서는 당해내기 쉽지 않은 쿤 가문이 뒤집히는 건 아닐까? 각자의 팬클럽까지 동원하면 그야말로 범 세계적인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지도?
“하루 정도야 내가 대신 도와주면 되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난 너도 걱정인데. 게다가 너나 밤이나 다를 게 없잖아. 일과가 끝나면 바로 공식 일정 시작 아냐?”
“뭐…. 비올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도 있고. 어차피 아버지는 나한테 아무 기대 안 하실 걸? 나는 정치인으로서의 카리스마 같은 게 전혀 없잖아.”
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왕난의 아버지 ‘자하드’는 이른바 ‘세계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수완을 자랑하는 정치인이었다. 40세가 되기도 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치에 입문해서 벌써 4선 의원이자 장관 직을 역임하고 있으며 차기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다. 사실상 적수가 없어서 자하드의 당선을 의심하는 이가 없는 정도인데, 왕난은 그런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자부심이라던가 자신감이 없어보였다. 형인 카라카가 아버지의 장점을 온전히 타고난 완벽한 2세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려나?
“정치판이 연예계도 아니고 카리스마만 있으면 다 되냐?”
이 나라의 다음 대통령 자리가 자하드의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에는 쿤도 동의하는 바였다. 자하드의 성공적인 정치 활동도 한동안은 계속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식견이 넓고 신념이 분명한 사람이었으며 대중을 휘어잡는 힘 또한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가 끝난 다음에도 사람들이 자하드와 같은 사람을 원할까? 모든게 완벽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미래의 사람들은 그들이 외면하고 있던 두 번째 왕자의 존재를 나중에야 깨닫고 뒤따르게 될지도 모른다. 실패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이 컴플렉스 덩어리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계를 알지만 도전하고, 자신이 작기에 위를 보는 범재지만 동시에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비범함을 함께 지녔으니까. 자신이 특별하다는 걸 스스로만 모르는 왕난은 분명 가족들에게 올 해 학과대표가 된 것도 ‘어쩌다 보니’라고 설명했을 테고, 수재가 아니라도 과제에 대한 질문을 하는 동기들이 있는 것은 자신이 만만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의 우수한 부관이 되기 위해 경제를 열심히 공부한 사실이라던가 뒷배를 믿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밤 새워 노력했던 일 따위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도 않겠지.
“다는 아니라도 꼭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이 말이지.”
“그래. 머리 아픈 얘기는 이 쯤 하자. 한 숨 자고 일어나서 좀 나아지면 톡할게. 레포트는 같이 하자.”
“그럼 나야 고마운데 기한이 넉넉하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왕난에게 대학생으로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은 딱 저녁 식사까지지만 너무 잘난 아버지를 둔 탓에 심심치 않게 있는 신변 위협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인력과 운전기사가 전속으로 배정되어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왕난이 이들을 개인적인 용도로 부리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쿤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뼈와 살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라 못 이기는 척 왕난의 차에 올랐다. 리무진의 뒷 자리가 좋고 어떻고에 감탄할 새도 없이 약 기운에 취해 곯아 떨어진 쿤은 사실 그가 차 주인을 베개 삼았다는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할만큼 혼란 속이었다. 물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왕난의 차가 아니었으면 얻어 타지도 않았고 설령 타게 된다 하더라도 마음 놓고 잠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쿤도 이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왕난에게 해 줄 성격은 못되니까 절대 이야기해 주진 않을 테지만.
“야, 너 레포트고 뭐고 병원 가던가 푹 자던가 둘 중 하나만 해. 집 주소도 안 알려주고 그렇게 잠만 자면 어떻게 하냐?”
“안 알려줘도 맞게 왔는데 뭘.”
“니네 집이 워낙 유명하니까 기사 아저씨도 알고 있어서 온 거지!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얘 좀 잘 부탁 드려요, 형님. 아까 저랑 점심 먹고 해열제는 먹였거든요? 그래도 열이 안 떨어져서요. 뱀 수인은 이 정도면 고열이라던데 신경 좀 써 주세요. 여기, 이건 얘 가방인데.. 들어 드릴까요?”
“아냐아냐. 우리 집에도 사람 많으니까. A.A.가 폐 많이 끼쳤네. 나중에 내가 밥이라도 사라고 잔소리 해 놓을게. 신경써줘서 고마워, 왕난군. 바쁠텐데 어서 가 봐. 키세아. 가방만 들어줘.”
“제가 오라버니를 업을 수도 있거든요?”
“그 오라버니가 알면 기겁할거다. 신기한 일이네. 이 녀석이 아무한테나 제 몸을 맡길 사람이 아닌데.”
상류층의 구성원 중에 막장드라마 한 번 안 써본 집안이 어디 있을까마는 부모로부터 세상은 불신지옥이라는 걸 처음 배운 탓에 의심이 중증질환급인 쿤이 이 지경으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하츨링이었다. 그나마 대답은 못했어도 도착할 때까지는 의식이 아주 없진 않았던 모양인데, 왕난에게 한 소리 하는 것을 끝으로 기력이 다 한 모양인지 하츨링의 품안에서 잠들어버린 쿤을 침대에 데려다 놓기 위해 하츨링은 따라 나온 키세아에게 쿤의 가방을 맡겼다. 입학식에 안 왔다고 줄곧 쿤에게 한 마디도 않고 냉전 상태 유지 중이였던 키세아지만 인사불성이나 다름 없는 바로 손 위의 형제의 상태에 상당히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도 하츨링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미 저 멀리에 있는 리무진의 뒷 모습에 잠시 눈길을 던졌다.
“설마 저런 순둥한 고양이가 오라버니의 취향인 건 아니시겠죠?”
“진짜 설마다. 이 녀석이 자기 연인이라고 약한 모습을 보일 리가. 차라리 친구라면 모를까.”
“왜요? 친구보다 연인이 더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다른 녀석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A.는 아닐걸.”
나오지는 않았어도 쿤을 데리고 들어온 하츨링과 키세아의 행색에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 거실의 형제들에게 주치의에게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한 하츨링은 쿤의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 층계를 디뎠다.
“그나저나… 아버지께서 알면 난리날 텐데 어쩌나?”
벌써 두 번째 봄 꽃입니다.
사실 Track 02보다 이게 먼저 나올 줄은 저도 몰랐어요..
내친 김에 빨리 몰아쳐 끝내 버리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봄 꽃은 처음 계획할 때 쿤른 커플링을 5개 정도 잡아서 편당 하나씩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나갈 예정이었습니다.
내용이 소프트해서 커플링이라고 해도 나중에 누구랑 잘될까? 하는 정도겠지만요.
저번은 그래서 (아무도 안 믿겠지만) 밤쿤이었고,
이번은 (역시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왕난쿤입니다.
왜냐하면 트위터상에서 저랑 가장 오래 많은 교류를 해 주신 어싱님께서 뽑아주셨기에...
왕난이는 사실 밤보다 더 마음이 많이 가는 주인공인데 쿤이랑 활동을 안해서...
밤쿤이랑은 완전 다른 분위기인데 이 커플은 진짜 진도 빼려면 쿤이 적극적이 되어줘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오래 교류해 주신 티스토리의 한 분은 이 글이 아니라 따로 리퀘를 받아드릴 예정이니
보시면 원하는 커플링 하나 뽑아 주시고,
제가 먼저 여쭈었던 다른 두 분께서는 좀 더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