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6.19 - 25

신의 탑/하루 글감




6.19 - 스스로

한 쪽으로 기우는 것만 같은 걸음을 바로 잡으며 소년은 신중하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아직 의식이 흐려질 정도로 출혈이 심한 것은 아니니 가는 길이 곧지 않은 것은 단지 통증의 영향일 터.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해.'

소년에게는 영생을 사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가족이 있었지만 그는 그 중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상처를 씻어내는 것도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던 옷으로 붕대를 대신해 지혈과 드레싱을 마치는 것도 오로지 혼자의 몫. 수많은 가족이 전부 적이나 다름 없는 이 집안에서 홀로 자신의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이 곳의 아이들에게 어리광은 허락되지 않았다.




6.20 - 만약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그 애보다 먼저 너를 만났더라면. 물론 그랬다면 너는 나에게 한 톨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남의 횟수가 채워지는 것이 먼저 였다면 전연 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고 부질없는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을 너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만약을 꿈꾸지 않으므로. 너는 만약이라는 말로 잡을 수 없었던 소망을 꿈꾸는 게 아니라, 더 깊은 수렁에 스스로를 던져넣을 것이므로.





6.21 - 호기심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

금속성을 띄어 싸늘한 금빛 동공이 아래를 비껴보았다. 지지않는 태양으로 군림한 제국의 황제. 세상 모든 것을 발 아래에 둔 그의 눈빛에 한낱 궁인은 압도당한지 오래였다. 분명 그의 등 뒤에 자리한 것은 침실이건만 실크 가운에도 검을 찬 황제는 살기가 등등했다. 모든 숙위가 침실을 등지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황제가 언제 부터인가 직접 데려온 침노 하나를 침전에 가두어 두고 있다는 건 궁 내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황제의 눈에 들었는지, 평소에 어찌 지내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었다.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인물을 황제가 죄다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가 본 것은 침노의 푸른 체모 뿐이었지만 황제의 검은 여지 없이 그녀의 생명을 앗았다.

"......아니 품종 나름이라고 해야할까."

듣는 이가 없으니 의미 없는 말이건만 침실도 돌아온 황제는 그리 속삭였다. 금실로 수 놓은 붉은 시트는 새하얀 나신의 드러난 부분을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화려한 문양보다 더 눈에 띄는 흰 살결과 은청빛 머리카락. 실물을 본 적 없으니 궁인들은 침노라 이를 뿐이었지만 그를 보았다면 귀족가의 영윤이라는 걸 눈치챘을 테니 품종이 다르다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검을 든 적 없는 몸으로 전장의 영웅인 황제의 정욕을 받아내야 했으니 궁의 법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황제보다 먼저 눈을 뜨는 일은 손에 꼽았다. 정말 고양이를 다루듯 잠든 소년의 턱 밑에 손을 넣어 간지럽히며 황제는 이마를 맞대었다.

"아게로."






6.22 - 처음

아내가 너무 많아 아게로가 태어났을 즈음 부터는 어머니에게 발길을 끊었다던 가주이자 최초의 쿤, 쿤 에드안을 처음 만나던 날 아게로는 아버지의 앞에 나서지 않고 어머니의 치마폭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도 그의 피를 이었건만 완벽하게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는 아우라. 어린 아게로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것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자하드 궁 못지 않은 위세를 자랑하는 쿤의 궁은 곧 가주인 에드안의 것. 그 안에서는 어머니가 방패가 되어줄 수 없건만, 더해서 그녀는 그런 아량을 배풀어줄만큼 자애로운 어머니도 아니건만, 통각과도 닮은 그 날카로운 예감에 움직인 아게로를 가주는 손쉽게 다시 찾아내었다. 당장 아게로의 머리통을 부술 수도 있어보일만큼 커다란 손에 붙들린 아게로는 눈 돌렸던 공포와 다시 마주하자 떨리는 몸 때문에 결국은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를 갖추고 어서 이름을 고하세요, 아게로. 가주님 앞에서 예법을 잊다니 무슨 추태입니까?"
"흐음."

기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쉽게도 목숨이 날아가는 곳. 어린 아들을 재촉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다급했지만 얼어붙은 듯 자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들에게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에드안은 흥미롭다는 듯 남은 손으로 턱밑을 쓸었다.

"아게로구나."
"가주.. 님...?"
"잠시 아비와 산책이라도 할까?"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어린 아들을 번쩍 안아든 에드안은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시하고 겁에 질린 아이를 안고 정원으로 향했다. 가주의 변덕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였지만 그의 권력은 그보다 당연했기에 아그니스는 아이를 돌려받는다는 약속도 없이 아들을 빼앗겨 버렸다.

"첫 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영특하구나."





6.23 - 반성


"파란 거북이! 어디 가는 거냐?"
"요 앞 상점. 거기 바나나 안 팔아. 초코바도 안 팔고."
"날 뭘로 보는 거냐!! 거짓말 하지 마라!"
"진짜라니까?"

필요한 물건이 생긴건디 가벼운 복장으로 벙커를 나서는 쿤에게 라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건 워낙에 자주 있는 일이라 동료들 중 그 누구도 유치한 말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싸운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화해할테니 괜히 신경쓰면서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랄까? 평소에는 신체를 압축한 상태로 지내는 라크라 무게가 조금 가벼워 졌다고는 해도 성인 한 사람의 무게는 너끈히 나갈 터인데, 그런 라크를 매달고도 쿤은 방해를 받지 않는 것처럼 원래의 속도로 나아가는 걸 보면 역시 10가문.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목소리와 항상 어떤 감정의 최고치를 찍고 있는 라크의 목소리가 나란히 멀어져갔다.

"정말 먹을 거 파는 데는 안 간다니까?"

바나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크가 팀의 돈줄이나 다름없는 쿤에게 간식을 사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일은 흔했지만 라크가 극구 따라나선 속 사정은 따로 있었다. 등대의 수리와 전투에 필요한 무기 등을 파는 상점에서 먹을 것을 팔 리는 만무했지만 여하튼 라크의 고집 때문에 쿤은 오늘도 그와 함께 외출한 셈이 되었다. 라크가 원한 것도 그를 혼자 두지 않는 것이었다. 라크의 일행 중에서 절대적인 전투력을 따지자면 쿤보다 약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라크가 돌이켜 생각해 볼 정도로 쿤은 혼자 두었을 때 엄청난 위험에 빠지곤 했다. 달러쇼에서도 그랬고 견족의 케이지에서도 그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무리를 진두지휘하며 모두를 지켜내는 지략가였지만 혼자일 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알아서 강한 동료들 곁에 머물러 주면 좋으련만 쿤은 그런 자각 없이 평소에는 또 개인행동을 선호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리더님이 신경을 더 써 줄 밖에.

"악어. 듣고 있어?"
"......"
"악어!"
"시끄럽다! 가는 길에 바나나를 사라!"
"뭐? 왜 꼭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용돈 준다니까?"
"가자!"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정말..."

죽은 줄 알았던 밤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들의 품에 돌아왔다. 자신도 한동안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던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번번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쿤에 비하면야. 이제와 생각하건데 두 번 다시 혼자 두지 않겠다는 다짐은 밤이 아닌 쿤에게 해야 옳았다.

"가자, 파란 거북이!"

쿤의 목덜미에 붙어 방향까지 지시하는 라크에게 질렸는지 쿤은 대구도 않고 걸음을 옳겼다. 그가 자신을 귀찮게 여긴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소중한 부하 2를 지키는 것도 리더의 책무니까. 또한 이것은 그를 몇번이나 잃을 뻔 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으므로.





6.24 - 조심히


일행 중에서 가장 일찍 눈을 뜨는 것은 보통 하츠였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수련 시간이라는 게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기 단련을 게을리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하츠에게는 새벽 훈련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그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더 일찍 눈이 떠 진 날엔 간밤의 소란이 반영된 진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이수의 맥주 한 캔이 술판으로 번졌는지 실내에는 집기와 사람이 난장판으로 널려있었다. 한심한 작태에 할 말을 잃었지만 문득 보이지 않는 이가 있다는 걸 깨달은 하츠는 보통의 경우를 따라 쿤이 혼자 사용하는 방문을 조용히 열어보았다.

"녀석. 또 여기서.."

하츠와 겨뤄도 호각일 정도로 쿤은 강했지만, 일행 중 한 사람이 비선별인원이라는 게 알려진 이후로 줄곧 선별인원의 신분에는 맞지 않는 강적들을 상대해야했기에 일행의 두뇌로서 그가 떠져야 할 경우의 수는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본디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일에 잘 끼는 편이 아니긴 했지만 이제는 가끔을 즐길 여유조차도 잊어버린 듯 싶었다. 잠 자는 시간조차 아끼다 겨우 눈을 붙였을 텐데 깨우기는 미안해서 하츠는 그를 침대로 옮겨주는 것 보다는 모포를 가져와 덮어주기로 했다.

'차라리 너와 악어만 보내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하츠는 이내 생각만으로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끼리 보냈다가 쿤은 심장이 멈춘 채로 돌아온 전적이 있었다. 그 때는 기적적으로 소생했지만 그런 요행이 계속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하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한다 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심히, 아주 조심스럽게. 솜털 하나 닿지 않도록 책상에 엎드려 잠든 쿤의 등을 모포로 덮어준 뒤에야 하츠는 다시 본래의 목적을 찾아 숙소를 나섰다.






6.25 - 동시에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는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아리에 호아퀸이라는 이름보다 '화이트'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색의 칭호를 받은 제국 제일의 12검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 귀족이자 개국 공신으로서 왕족도 아니면서 공작의 작위를 받은 아리에 가문이지만 가문의 고고한 명성과는 상반된 길을 걷는 그는 검술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리에의 골칫거리였다. 정략혼이 판을 치는 사교계에서 매파 한 번 받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증거. 하지만 마치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그는 본인이 직접 구혼에 나섰다.

"항상 먼저 가다니. 오늘은 네가 기다리거라."
"그럼 살펴가셔요."
"서운하게 하는구나. 이 몸은 네 정혼자인데."

정혼자라는 말에 소년은 약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부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투로. 화이트는 아리에와 대등한 위세를 가지고 있는 쿤 가문의 영윤에게 청혼했다. 제국에서 동성혼을 막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유흥을 위해서 남첩을 들이는 정도였지 정실을 동성으로 맞이하는 건 귀족가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아리에의 가주인 혼이 소식을 듣자마자 머리를 싸맸다는 것은 소문이 전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구혼 상대도 문제였다. 쿤 가문 역시 내로라하는 귀족가라지만 서출이 소가주로까지 거론되던 화이트의 정실이 되는 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서자임에도 화이트가 그 이름을 알 정도로 그가 재능있는 청년이라는 건 재쳐두고 말이다.

"아버님의 약조는 믿지 않는 게 좋습니다. 변덕스러운 분이시니."
"변덕이라 해도 당장은 내가 네 정혼자지."

재미있는 일 아니냐? 그는 네가 이용하기 좋은 말 아니더냐.

분명 쿤의 가주는 아들의 자존심을 꺾어 놓을 겸, 아리에의 가주, 혼에게도 크게 한 방을 먹일 기회라 생각해서 화이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테다. 혼례 준비를 핑계로 도성을 벗어나 있던 그를 본가로 불러들인 것까지 완벽하게.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돌아가세요."
"그리 보챈다면야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촉. 전장에서의 화이트를 아는 자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작은 정혼자의 뺨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 화이트는 아게로가 뭐라도 집어던지기 전에 재빠르게 쿤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게로가 머무는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정혼자의 호위와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저 인간이 정말!!"
"쿤. 무슨 일 있었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들어와. 녀석은 갔으니까."

손님이 돌아가자 아게로는 자신의 오랜 지기이자 호위인 하츠를 다시 곁으로 불러들였다. 아게로는 분명 재기발랄하고 유능한 제국의 책사였으나, 당장은 화이트와의 혼담을 거절하기가 녹록치 않은 모양이었다. 적자가 아닌 만큼 후사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변방을 돌며 황명을 수행하다 하츠와 제국을 떠날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어차피 정략혼이라는 건 계략의 일종이니 난 신경쓰지 않아."
"너 때문이 아니거든?!"

하츠가 저만한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아게로는 부러 역정을 내며 심중을 감추었다. 화이트의 청혼은 여러모로 문제였다. 하츠는 아니라고 하지만 둘은 같은 사람에게 정을 주고 있으며 동시에 같은 검사이기까지 했다. 당장은 아게로를 위해서 입에 발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와 자신을 비교하며 마음이 좀먹어 들어갈 게 눈에 보였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시키지 않은 위로까지 건네는 하츠를 방으로 확 끌어당긴 아게로는 직접 문을 걸어 잠궜다.

"하자. 우리."
".....뭐? 뭘 갑자기..?"
"같이 자자고. 저 녀석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걸 너한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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