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하루 글감 2020.7.6 - 15.

신의 탑/하루 글감






7.6 - 탓


탑의 천정이 보여주는 날씨란 다 모방이라지만 기가 막히게도 새까맣게 흐려졌음에도 하늘은 비를 뿌리지 않았다. 진짜 하늘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인걸까? 푸르른 성벽에 검은 천들이 내걸렸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건만 아득하게 느껴지는 풍경. 당장 보이는 풍경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게로는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다. 조용히, 처음 겪을 때부터 꿈 같았던 이 상황을 다시 한 번 눈 속에,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푸른 빛으로 가득하던 쿤의 부유성 한 켠에 오늘은 검은 꽃이 피었다.

"......"

지금보다 조금 낮은 시선. 투명한 유리관에 자리한 혈육의 시신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난 덕인지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산뜻한 표정이었다.

"계속 날 탓해도 좋아."

누구도 아게로를 탓하진 않았지만 누이의 죽음에 아게로의 배신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걸 다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저 고요한 얼굴이 해방의 상징이라면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책임들은 오롯이 아게로의 몫이 되었다. 그게 단 한 번의 원망도 없이 곁을 떠나간 누이가 그에게 부과한 대가.

"..지금 처럼 내가 잊지 않게 해 줘."

언젠가 꼭 우릴 괴롭히던 세상 자체를 깨부숴 줄 테니까.






7.7 - 햇살

“쿠-운!! 이거 봐! 짜잔!! 두디어 우리끼리 큰뿔무소를 잡았다 이거야!”

훈련용으로 붙여둔 신해어를 붙잡은 왕난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영광의 상처들로 가득한 걸 보면 또 미끼역을 자처하거나 그랬겠지.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건 공방전이 다가오는 지금, 분명 긍정적인 지표다. 하지만 부상은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자신의 회복력엔 자신이 있는 왕난은 몸을 너무 막 굴려서 문제다.

“겨우 그거 한 마리 잡는데 그 꼴이라니 몸 좀 아껴.”
“이건 그 코뿔소가 아니라 이화가 그런 거거든?”
“그게 더 문제라고.”
“일단은 칭찬부터 좀 해 주지 그래? 노력했다잖아.”
“맞아! 선 칭찬 후 잔소리!”
“뒷감당할 자신 있으시다?”
“히익!!”
“오늘은 이제 쉬어. 회복에도 신경써야 할 시점이니까.”

쿤이 엄한 아버지 역할이라면 왕난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을 보듬는 어머니같은 존재인 단에게까지도 휴식을 허락한 쿤은 왕난이 내뿜는 햇살을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어둠을 비추는 달 같은 존재라면 어둠과 적막을 모조리 내 쫓는 왕난은 태양같은 사람이었다. 내심 쿤은 인정하고 있었다. 밤보다 먼저 왕난을 만났다면 그는 밤의 동료가 아니라 왕난의 동료가 되었을 터였다.

'아니, 잘 된 건지도.’

밤에게도 왕난에게도 자신은 그들의 선한 마음을 가리는 구름같은 존재일텐데.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쿤은 빛을 피해 더 깊은 곳을 항했다. 쿤도 오늘은 이만 눈 좀 붙여야 겠다. 빛은 어둠을 더 깊게 만드는 법이니.







7.8 - 상상

아주 부질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네가 옛 동료들을 뒤로 하고 내게 같이 가자 손 내미는. 기문의 사람에게 끝끝내 선택받지 못해 혼자가 되었기에 피붙이를 더 믿지 못하는 널 알면서. 하지만 A.A. 나는 항상 널 기다리고 있어.







7.9 - 자격

"연인이라...."

후욱. 길게 뻗어나온 숨에는 담배연기가 얹혀 있었다. 자신에게 생존법을 가르쳐준 스승도 애연가였으므로, 비올레에게는 익숙한 냄새였지만 연무에 흐려지는 얼굴이 연인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는 점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사랑해 마지 않던 그의 친부이니 부자가 닮은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지만 연초향을 옮겨오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연인을 떠올리면 부조화를 일으키는 까닭이었다.

"네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전 진심이니까요."
"흠.. 그래서 싫다는 애를 감금해 두셨다?"
"아게로는 그저 제가 스물다섯번째 밤이라는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제가 보기엔 당신이야 말로 아버지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쿤 에드안 씨."

다시금 시야를 덮어오는 연무에도 불구하고 비올레는 똑바로 눈을 치켜뜨고 에드안을 올려다 보았다. 쿤의 가주, 쿤 에드안. 연인의 아버지이자 비올레에게 있어서는 숙적 중 하나.

"제가 한 짓과 당신의 행동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아게로는 당신의 성에 갇혀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어요."








7.10 - 빈도

열이 한 번 훅 오르고 나면 반작용인지 체온이 식는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쿤은 시트를 휘감고 잔뜩 웅크렸다. 추위의 원인이 심장에 박혀있는 터라 몸을 덮는다고 나아지는 일 따윈 없었지만 쿤에게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컨디션 난조를 동료들에게 말한다는 건, 이런 일을 밝혀 약점으로 이용 당한 적 밖에 없는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겼는데 한 잔 안 한데?"
"이 타이밍에 피곤하다니. 그냥 준비가 귀찮은 것 아닙니까?"

밖에서는 승전보에 대한 축배 건으로 시끄러웠지만 점점 의식이 가라앉아가는 중이라 자신을 비꼬는 한성의 목소리 마저도 저 편으로 멀어져갔다. 막연한 불안감이라면야 쿤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면 이미 탑의 정상에 오른 적 있는 랭커의 힘은 쿤의 몸에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겨 줄 터였다. 이렇게 혼자 잠드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게 가시적인 문제였다. 열이 나게 두는 게 나은지,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추위를 견디는 게 나은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지 않으려면 다른 동료들 만큼은 아니라도 쿤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할텐데.

'...마리아..'

널 다시 만날 수도 있을 테고.







7.11 - 무더위

더위가 기승이라 방 안 쪽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선풍기 하나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흐르는 한여름의 오후, 바닥에 길게 뻗어있는 그림자 둘은 무더위 때문에 낮잠을 자는 것도 무리였다.

"아저씨, 뭐 시원한 거 없어?"
"여기기 너희 집인 줄 아냐?"
"그럼 차가운 물이라도."
"하여간... 쿤 가문 녀석들은 노인공경이라곤 모르지."

공경할 노인이 있어봤어야 알지. 무더위에 눌린 목소리가 답지 않게 연약해서 하릴없이 진성은 장판에 들러붙은 듯 했던 몸을 일으켰다. 없는 살림이라 냉장고 안에 들어 있었던 건 정말로 생수 한 병이 끝이었다. 있어준 게 어디냐 생각하는 진성의 마음과는 다르게 불청객은 진짜 물만 가져왔냐며 툴툴대겠지.

"자."

투명한 유리잔에 하얀 손이 겹쳐졌다. 색채만큼의 냉기가 진성을 의아하게 만들 정도였건만 녹아흐르듯 물잔을 받아든 쿤은 적잖이 괴로운 표정이었다. 생리적으로 고온을 거부하는 걸 보면 겨울의 정령 같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채도 행동도 상상 속의 그것과 일치해서 평소의 까탈스러운 행동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그러게 왜 이런 탑의 구석까지 온 거냐."
"......"
"꼬맹아."
"....내가 어떻게 알아."
"하?"
"데려다 줘."

그러게 더위에 약한 스스로를 알면서, 왜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움직였을까? 듣는 이에게는 떼쓰는 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익숙치 않은 쿤은 진실을 가슴 깊이로 파묻어 버렸다.

"이래서 쿤 가문 녀석들은..."

갈수록 가관이었지만 한참이나 어린 꼬마한테 역정을 내면 또 진성이 모자란 어른이 될테니까. 더위에 기댄 무력감으로 화를 누른 진성은 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 좀 쐴 겸 나가보지, 뭐."








7.12 - 영화

대기는 하루 종일 물을 쏟아냈다. 흐린 하늘에서 빛 한 점 찾기 어려운 이런 날, 좋지 않은 예감에 일부러 화사한 카페와 달콤한 디저트를 찾은 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대답은 예감과 같아서, 쿤은 주문한 음식을 눈 앞에 두고도 한동안 빛이 꺼진 액정화면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 거울면이 된 스마트폰 속엔 단정한 얼굴이 비쳤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오늘 날씨를 닮아 흐려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메시지였기에 한참의 침묵 끝에 쿤은 음료와 디저트가 든 트레이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시작부터 끝까지 끌려다니기만한 쿤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일방적인 희생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할 법도 하건만. 음식의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공허함이 그만큼 큰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이지만 당장은 모든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자신의 눈 앞의 풍경부터 창 밖의 모든 것까지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맛이나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느껴질만큼.







7.13 - 얄미움

자존심이 센 쿤은 본디 부탁이라는 것 자체을 꺼리지만 선별인원들 사이에서 최고의 크랙으로 여겨지는 비선별인원 둘과 엮이는 바람에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때문에 부탁보다는 거래라는 식으로 상황과 배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으로 자리한 바. 쿤의 틀을 건드리는 하츨링이 그에게 있어서는 제일 피곤한 상대였다.

"필요한 건 딱히 없으니까 '부탁이에요, 블루베리님'하면 조사해 줄게."
"싫어."
"왜. 말 한마디면 되니까 이득이잖아."
"너한테 '님'이라니 손해지."
"거저 준다는데도 안 받는다니. 답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눈을 휘며 구슬리는 모양새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꼴에 같은 피를 타고 났다고 말쑥한 얼굴이 짜증을 배가시켰다.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다시 말하면 언제나 쿤의 생각을 꿰고 있어서 그가 싫은 거지만 왜 싫어하는지까지 알면서도 자신에게 맞추라는 건 말 그대로 변태 아닌가?

"갈게. 게임이나 마저 해."
"갑자기 시간이 부족해 진 거, 요즘 네 몸상태가 엉망이기 때문이잖아? 난 환자를 부려먹는 악취미 같은 건 없다고, 동생님."
"다른 악취미가 있잖아."
"악취미라니. 형님의 애정이지."

끝에 끝까지 얄미운 자식. 언제나 쿤의 모든 행동은 자기 손바닥 안이라는 걸 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게임기를 내려놓고 싱긋 웃어 보이는 하츨링의 면상을 보고 있노라면 쿤 가문은 재수없다며 게거품을 무는 동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아니면 여기 뽀뽀 쪽으로 바꿀까?"
"딱 대. 영하의 입맞춤을 날려 줄 테니까."
"입술이 말보다 비싸야 하는 거 아냐?"
"대라고."
"...내가 졌다, 그래. 꼭 이겨먹으려고 들다니.. 저런 건방진 놈이 뭐가 좋다고. 에효, 잘나고 심성 고운 게 죄지."
"......"
"신수 좀 막 쓰지 마. 또 쓰러질라. 승탑시험 족보를 아주 쏙쏙 빼다 바칠테니까 낮잠이라도 자던가."

방심한 틈에 쓰다듬는 척 쿤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어놓은 하츨링은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게임기를 집어들었다. 멋대로 개조한 벙커는 주인의 조종대로 하츨링과 쿤의 공간을 가르고 재구성을 반복한 끝에 쿤을 남겨두고 부유선처럼 날아가버렸다. 등대의 텔레포트를 쓰지 않은 것이 용하지만 하츨링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가 없는 쿤은 받기로 약속한 자료의 양에도 불구하고 속에서부터 열이 끓어 오르는 걸 느껴야했다. 언젠가의 언젠가에는 꼭 저 파랑 변태가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방법으로 그를 골탕먹이리라 곱씹으면서.








7.14 - 결점

쿤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유일한 결점으로 대대손손 없었던 싹수를 들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자면 외려 장점을 꼽기가 어려워지곤 했다. 그러니 불의의 사고로 그가 목숨을 잃는다고나 해도 슬퍼할 이는 찾기 힘들지도.

"쿤! 여기서 뭐해?"
"그냥. 머리 좀 식히려고."
"쉬어가면서 해. 이제 다시 셋이 되었겠다 걱정할게 어디 있다고."
"그래."

그 소수 중 한 사람이 이수일 터다. 항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챙기는 사람. 개성 강한 동료들에게 휘둘리고 무시당해도 결국 그의 말이 귀 기울이게 만드는 사람. 쾌활한 표정으로 쿤의 등을 팡팡 쳐 대도 참아줄만한 건 그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점 투성이인 쿤과 달리 약하다는 것 빼고는 결점이 없는 그는 사실 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밤보다 더 친절한 사람일 터였다. 탑의 온갖 부조리를 겪으면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니까.







7.15 - 절망

기다림은 무료한 일이었기에 에드안은 기도했다. 귀애하는 그 아이가 절망에 빠지기를.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이 그를 구원하기를. 아버지의 구원이란 절망보다 더 깊은 나락이겠지만 그리해야 아게로는 세상을 바로 알게 될 터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세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냉혹한 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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