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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7.16 - 25

신의 탑/하루 글감






7.16 - 죄책감

"미안해요. 미안해요, 아게로."

대답이 없는 그에게 어머니의 사과는 끝없이 이어졌다. 사과라기보단 그녀의 뒤늦은 후회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알기에 아게로의 가슴 속에 납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그녀의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아게로를 꾀주머니 그 이상으로는 봐 주지 않던 어머니였다. 아게로의 불만이 일탈로 터져나오고, 자신 대신으로 모든 것을 걸었던 장녀는 자결로 덧없이 떠나고 나서야 되뇌이는 후회는 분명 한참은 늦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모정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은 아게로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게 왜 이제서야. 서로에게 후회밖에 남지 않을 짓을 하고 나서야. 묵직한 통증을 견디느라 내리닫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며 아게로는 흐느끼는 것만 같은 어머니를 바로 보았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용서하지도 마세요."

부러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세상을 등진 친누이보다 그녀를 제물로 가문을 떠난 이복누이가 더 간절한 괴리를 만든 것이 어머니였으나 이제 대가를 치뤘으니 얼마든지 아게로를 원망해도 좋았다.

"그래야 제가 제 방식대로의 속죄를 멈추지 읺을 테니."

당신이 아닌 나의 방식으로 내가 당신을 구원할 수 있게.






7.17 - 종착역

탑의 꼭대기가 여정의 종착역이라는 건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그 옛날 '위대한 여정'이라 잔해지던 13명의 비선별 인원들이 따라갔던 길은 지금 이 자리에서 서로 갈라서는 것으로 끝을 맺었지만 마지막 하나의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터였다. 탑의 진정한 꼭대기, 별이 펼쳐진 밤하늘이 존재하는 세상. 부모님의 염원이 이루어질 순간 앞에 밤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탑의 어디든 갈 수 있는 저도 135층에는 가지 못했답니다.

이죽이는 듯한 표정으로 헤돈이 읊조렸던 경고는 그의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은 갓 같았다.







7.18 - 그늘

"아, 미안. 혹시 내가 깨웠어?"

둘 밖에 없는 공간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굳이 필요할까? 대답 대신 아게로는 잠기운이 그득한 눈으로 팔을 뻗어 이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 너는 더 안 자고."
"하하. 교대로 일하기로 했자나. 그래야 쉴 때 확실히 쉬지."
"내일 일은 화련한테 맡기고 같이 쉬자며."
"그건 맞는데 양심상 조사를 하나도 안 해 두긴 그래서. 금방 끝낼거니까 좀 더 눈 붙여. 난 이래뵈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음모드인 옵저버가 깜박이는 빛으로 이수를 재촉하는 듯 했다. 못 이긴 듯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수의 허리를 안은 채로이수의 무릎을 베개삼은 쿤은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잠둘긴 이미 틀렸지만 체력의 문제가 아니더라고 쿤에게는 잠을 털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체력엔 자신 있다더니 과연 끌어안은 몸은 나무둥치처럼 단단하게 근육이 잘 잡혔다. 쿤에게 적당한 그늘까지 베풀어주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환생이랄까?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시간을 쪼개는 그가 고까운 건 아니지만 근면하고 한결같은 면에 마음을 내 준 사람으로서 쿤은 이수의 성실함을 나무랄수는 없었다. 그에게 배운 정직함으로 가벼운 투정을 부리는 것 정도가 전부인, 이 고즈넉한 시간마저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7.19 - 침묵

"왜 아무 말도 없어? 불만 있으면 얘기하라고."

불만이 없으니까 얘기 안 하지. 다분히 억지스러운 요구에 하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누군가가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랬다. 그랬는데 침묵이란 녀석은 하츠의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초면이라 어색해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눈매가 무섭다고 하질 않나, 친구들의 장난에 딱히 대구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인데 재미 없다고 하질 않나.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연인이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 묻길래 고개만 끄덕끄덕했더니 이 꼴이다.

"내가 겨우 그런 갈로 네게 불만을 가질 리가."

가르침의 성과가 영 좋지 못하니 침묵을 깨기로 결정한 하츠의 결정은 드디어 그가 원하던 고요함을 가져왔다. 진심 가득한 그의 얼굴에 연인의 분노는 눈 녹둣 사라져 버렸으니까.






7.20 - 화

"당신이 왜 화가났는지 맞춰볼까요?"

스물다섯번째 밤과 쥬 비올레 그레이스. 그 이름이 지칭하는 바는 틀림없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어떤 틈이 의식의 틈새를 잡아 벌려, 결국엔 둘로 갈라놓고 말았음을. 다행히 동일 인물로부터 파생된 본성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들은 누가 되었든 함께해 왔던 동료들을 아꼈고, 대체로 주변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다가섰다. 동료나 주변인은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쿤 씨를 어떻게 한 겁니까."
"우리의 침대에 잠들어 있죠. 아무리 쿤 씨가 10가문이라도 쉽게 눈을 뜨진 못하겠지만요."
"왜 그렇게까지.."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입장을 바꾼다면."

같은 의자에 거울을 바라보듯 같은 자세로 마주 앉은 두 청년 사이에는 첨예한 기류가 감돌았다. 사람의 의식 속에 신수라는 게 존재할 리가 없지만 신수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난 비선별 인원들인만큼 무의식 속에도 그것이 스며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기술로 맞서는 마당이라 승부는 갈리지 않았다. 하나의 몸 속에 두 개의 분노가 침전될뿐.







7.21 -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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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2 - 나무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는 마을의 이정표이자 사랑방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자나무에서의 만남을 약조했고 하루의 마지막 즈음에 꼭 그 곳을 지나며 서로의 인부를 물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밖을 자주 오가는 백민들의 사정. 왠일로 청자색 박사를 삿갓의 끝마다 드리워 얼굴을 가린 이가 그 곳에 나타나자 귀족과 엮여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민초들은 길을 잃었다.

"푸른 색이면 쿤의 사람인가?"
"얘까진 무슨 볼일이시지? 가마꾼도 없이.."

저를 두고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선명히 들렸지만 아게로는 밖으로 드러날만한 항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양민의 쉼터를 빼앗게 된 것은 송구한 일이나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는 법. 원망은 저를 기다리게 한 하츠가 들어야 옳았다.

'정자나무라.... 수령이 얼마나 될까?'

기다림의 무려함을 달랠 겸 아게로는 고개를 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나무의 수령을 헤아려 보았다. 아게로의 아름보다 크게 자란 나무이니 족히 수 백년의 세월은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 긴 세월을 한 자리에 있었으니 과연 토지신으로 추앙받을 법한 존재였다.

"미안. 장터에 좀도둑이 있어 지체되었다."
"너도 참 알만하다."

끊어진 신발끈을 대신 사 오는 일이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닐텐데 이상하다 싶더니 또 장터의 소란을 정리하는 데 신경을 쓴 모양이다. 저택에 갇혀 지내다시피한 아게로는 저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과 같은 고을임에도 장터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건만 일찍이 무공으로도 덕망으로도 이름이 높던 하츠에게는 소싯적부터 부대껴온 고향 사람들의 작은 부탁 하나하나를 거절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이리 출세하고 쿤의 사람으로 입적한 이후에도 선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게로의 푸념은 못 들은 척 하며 작은 발에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매 주는 하츠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쿤은 이내 다시 녹음을 드리운 나뭇가지들로 시선을 옮겼다.

"뭔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아니."

다시 발에 맞게 조여진 신발을 확인한 아게로는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읺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츠를 보는 순간 귀족을 경계하던 눈초리가 누구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기에 씁쓸한 맛은 사라지지 읺았지만. 저들에게 자신은 쉼터를 빼앗고 수호신을 독차지한 욕심쟁이로밖에 비치지 않을 터다. 이리 죄 많은 인생을 어찌하여 제 아비는 늘리고만 있는가? 차마 이 곳을 떠나자는 말도 나오지 않아서 아게로는 묵묵히 조용한 걸음으로 처소를 향했다.







7.23 - 적절함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둔탁하고도 거칠었다. 온통 몸 속을 울리는 불쾌한 소리들과 통증을 뱉어내지 못해 눈물로 맺혀 떨어졌다. 부순다기 보다는 으스러뜨린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이었다. 눈에 띄는 회복력을 가진 10가문의 몸이니 용케 다시 붙을 지도 모르겠으나 당장은 가망이 없는 이야기.

"스스로 창고를 나가는 보물이라니 성가시기 짝이 없구나. 허나 너는 여전히 내 보물이니 벌은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다시는 이 에드안의 창고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란다, 아게로. 말을 잘 들으면 지내기 편하게 원하는 건 뭐든 쥐어주겠다는 구슬림 같은 건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눈물이 절로 떨어지는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에 다시한 번 절망하며 아게로의 의식은 점점 가라앉아갔다.







7.24 -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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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 해결

"좀 더 고민해보면 좋은 방법이 떠 오를 거에요."

긍정하고 싶었지만 피로감에 사로잡힌 입술은 떨어지질 않았다. 어딘가엔 정말 이상적인 방법이 전재할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마저 부정하고싶진 않았지만 당장의 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였다. 밤은 어찌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의 해결은 항상 무언가의 희생을 필요로한다. 여태까지도 최선을 찾는다고 찾았지만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쿤은 본능적으로 슬슬 자신의 차례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자신처럼 밤의 뜻을 존중했던 자들이 결국 희생을 뒤집어 써 왔다면 언젠가는 쿤의 차례가 올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내가 너무 피곤해, 밤."
"..그러신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시겠어요?"
"그래야겠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
"네. 푹 주무세요, 쿤 씨."

고민거리가 산재해 있는 마당에 편안한 잠자리 같은 게 어디 있을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며 밤을 자신의 밤에서 밀어낸 쿤은 그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자신이 마모되기 전에 찾아낼 수 있을까?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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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7.6 - 15.

신의 탑/하루 글감






7.6 - 탓


탑의 천정이 보여주는 날씨란 다 모방이라지만 기가 막히게도 새까맣게 흐려졌음에도 하늘은 비를 뿌리지 않았다. 진짜 하늘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인걸까? 푸르른 성벽에 검은 천들이 내걸렸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건만 아득하게 느껴지는 풍경. 당장 보이는 풍경이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게로는 벗어나려 애쓰지 않았다. 조용히, 처음 겪을 때부터 꿈 같았던 이 상황을 다시 한 번 눈 속에, 머리 속에 새겨 넣었다. 푸른 빛으로 가득하던 쿤의 부유성 한 켠에 오늘은 검은 꽃이 피었다.

"......"

지금보다 조금 낮은 시선. 투명한 유리관에 자리한 혈육의 시신은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난 덕인지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고 산뜻한 표정이었다.

"계속 날 탓해도 좋아."

누구도 아게로를 탓하진 않았지만 누이의 죽음에 아게로의 배신이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걸 다들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저 고요한 얼굴이 해방의 상징이라면 그녀가 짊어지고 있던 책임들은 오롯이 아게로의 몫이 되었다. 그게 단 한 번의 원망도 없이 곁을 떠나간 누이가 그에게 부과한 대가.

"..지금 처럼 내가 잊지 않게 해 줘."

언젠가 꼭 우릴 괴롭히던 세상 자체를 깨부숴 줄 테니까.






7.7 - 햇살

“쿠-운!! 이거 봐! 짜잔!! 두디어 우리끼리 큰뿔무소를 잡았다 이거야!”

훈련용으로 붙여둔 신해어를 붙잡은 왕난의 표정은 득의양양했다. 영광의 상처들로 가득한 걸 보면 또 미끼역을 자처하거나 그랬겠지. 훈련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건 공방전이 다가오는 지금, 분명 긍정적인 지표다. 하지만 부상은 원하지 않는데 말이다. 자신의 회복력엔 자신이 있는 왕난은 몸을 너무 막 굴려서 문제다.

“겨우 그거 한 마리 잡는데 그 꼴이라니 몸 좀 아껴.”
“이건 그 코뿔소가 아니라 이화가 그런 거거든?”
“그게 더 문제라고.”
“일단은 칭찬부터 좀 해 주지 그래? 노력했다잖아.”
“맞아! 선 칭찬 후 잔소리!”
“뒷감당할 자신 있으시다?”
“히익!!”
“오늘은 이제 쉬어. 회복에도 신경써야 할 시점이니까.”

쿤이 엄한 아버지 역할이라면 왕난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을 보듬는 어머니같은 존재인 단에게까지도 휴식을 허락한 쿤은 왕난이 내뿜는 햇살을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어둠을 비추는 달 같은 존재라면 어둠과 적막을 모조리 내 쫓는 왕난은 태양같은 사람이었다. 내심 쿤은 인정하고 있었다. 밤보다 먼저 왕난을 만났다면 그는 밤의 동료가 아니라 왕난의 동료가 되었을 터였다.

'아니, 잘 된 건지도.’

밤에게도 왕난에게도 자신은 그들의 선한 마음을 가리는 구름같은 존재일텐데.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쿤은 빛을 피해 더 깊은 곳을 항했다. 쿤도 오늘은 이만 눈 좀 붙여야 겠다. 빛은 어둠을 더 깊게 만드는 법이니.







7.8 - 상상

아주 부질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네가 옛 동료들을 뒤로 하고 내게 같이 가자 손 내미는. 기문의 사람에게 끝끝내 선택받지 못해 혼자가 되었기에 피붙이를 더 믿지 못하는 널 알면서. 하지만 A.A. 나는 항상 널 기다리고 있어.







7.9 - 자격

"연인이라...."

후욱. 길게 뻗어나온 숨에는 담배연기가 얹혀 있었다. 자신에게 생존법을 가르쳐준 스승도 애연가였으므로, 비올레에게는 익숙한 냄새였지만 연무에 흐려지는 얼굴이 연인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는 점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사랑해 마지 않던 그의 친부이니 부자가 닮은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겠지만 연초향을 옮겨오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연인을 떠올리면 부조화를 일으키는 까닭이었다.

"네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전 진심이니까요."
"흠.. 그래서 싫다는 애를 감금해 두셨다?"
"아게로는 그저 제가 스물다섯번째 밤이라는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 뿐이에요. 제가 보기엔 당신이야 말로 아버지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쿤 에드안 씨."

다시금 시야를 덮어오는 연무에도 불구하고 비올레는 똑바로 눈을 치켜뜨고 에드안을 올려다 보았다. 쿤의 가주, 쿤 에드안. 연인의 아버지이자 비올레에게 있어서는 숙적 중 하나.

"제가 한 짓과 당신의 행동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아게로는 당신의 성에 갇혀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어요."








7.10 - 빈도

열이 한 번 훅 오르고 나면 반작용인지 체온이 식는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쿤은 시트를 휘감고 잔뜩 웅크렸다. 추위의 원인이 심장에 박혀있는 터라 몸을 덮는다고 나아지는 일 따윈 없었지만 쿤에게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컨디션 난조를 동료들에게 말한다는 건, 이런 일을 밝혀 약점으로 이용 당한 적 밖에 없는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겼는데 한 잔 안 한데?"
"이 타이밍에 피곤하다니. 그냥 준비가 귀찮은 것 아닙니까?"

밖에서는 승전보에 대한 축배 건으로 시끄러웠지만 점점 의식이 가라앉아가는 중이라 자신을 비꼬는 한성의 목소리 마저도 저 편으로 멀어져갔다. 막연한 불안감이라면야 쿤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성장이 따라가지 못하면 이미 탑의 정상에 오른 적 있는 랭커의 힘은 쿤의 몸에 점점 더 큰 부담을 안겨 줄 터였다. 이렇게 혼자 잠드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게 가시적인 문제였다. 열이 나게 두는 게 나은지,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 추위를 견디는 게 나은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지 않으려면 다른 동료들 만큼은 아니라도 쿤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할텐데.

'...마리아..'

널 다시 만날 수도 있을 테고.







7.11 - 무더위

더위가 기승이라 방 안 쪽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선풍기 하나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흐르는 한여름의 오후, 바닥에 길게 뻗어있는 그림자 둘은 무더위 때문에 낮잠을 자는 것도 무리였다.

"아저씨, 뭐 시원한 거 없어?"
"여기기 너희 집인 줄 아냐?"
"그럼 차가운 물이라도."
"하여간... 쿤 가문 녀석들은 노인공경이라곤 모르지."

공경할 노인이 있어봤어야 알지. 무더위에 눌린 목소리가 답지 않게 연약해서 하릴없이 진성은 장판에 들러붙은 듯 했던 몸을 일으켰다. 없는 살림이라 냉장고 안에 들어 있었던 건 정말로 생수 한 병이 끝이었다. 있어준 게 어디냐 생각하는 진성의 마음과는 다르게 불청객은 진짜 물만 가져왔냐며 툴툴대겠지.

"자."

투명한 유리잔에 하얀 손이 겹쳐졌다. 색채만큼의 냉기가 진성을 의아하게 만들 정도였건만 녹아흐르듯 물잔을 받아든 쿤은 적잖이 괴로운 표정이었다. 생리적으로 고온을 거부하는 걸 보면 겨울의 정령 같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색채도 행동도 상상 속의 그것과 일치해서 평소의 까탈스러운 행동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그러게 왜 이런 탑의 구석까지 온 거냐."
"......"
"꼬맹아."
"....내가 어떻게 알아."
"하?"
"데려다 줘."

그러게 더위에 약한 스스로를 알면서, 왜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움직였을까? 듣는 이에게는 떼쓰는 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익숙치 않은 쿤은 진실을 가슴 깊이로 파묻어 버렸다.

"이래서 쿤 가문 녀석들은..."

갈수록 가관이었지만 한참이나 어린 꼬마한테 역정을 내면 또 진성이 모자란 어른이 될테니까. 더위에 기댄 무력감으로 화를 누른 진성은 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람 좀 쐴 겸 나가보지, 뭐."








7.12 - 영화

대기는 하루 종일 물을 쏟아냈다. 흐린 하늘에서 빛 한 점 찾기 어려운 이런 날, 좋지 않은 예감에 일부러 화사한 카페와 달콤한 디저트를 찾은 날.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대답은 예감과 같아서, 쿤은 주문한 음식을 눈 앞에 두고도 한동안 빛이 꺼진 액정화면만 멍하게 보고 있었다. 거울면이 된 스마트폰 속엔 단정한 얼굴이 비쳤다. 하늘빛 머리카락이 오늘 날씨를 닮아 흐려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라 별다른 감흥은 없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 메시지였기에 한참의 침묵 끝에 쿤은 음료와 디저트가 든 트레이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시작부터 끝까지 끌려다니기만한 쿤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일방적인 희생이 끝났다는 것에 안도할 법도 하건만. 음식의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공허함이 그만큼 큰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이지만 당장은 모든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자신의 눈 앞의 풍경부터 창 밖의 모든 것까지 현실성을 잃어버렸다. 맛이나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느껴질만큼.







7.13 - 얄미움

자존심이 센 쿤은 본디 부탁이라는 것 자체을 꺼리지만 선별인원들 사이에서 최고의 크랙으로 여겨지는 비선별인원 둘과 엮이는 바람에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때문에 부탁보다는 거래라는 식으로 상황과 배경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으로 자리한 바. 쿤의 틀을 건드리는 하츨링이 그에게 있어서는 제일 피곤한 상대였다.

"필요한 건 딱히 없으니까 '부탁이에요, 블루베리님'하면 조사해 줄게."
"싫어."
"왜. 말 한마디면 되니까 이득이잖아."
"너한테 '님'이라니 손해지."
"거저 준다는데도 안 받는다니. 답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눈을 휘며 구슬리는 모양새가 얄밉기 짝이 없었다. 꼴에 같은 피를 타고 났다고 말쑥한 얼굴이 짜증을 배가시켰다.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다시 말하면 언제나 쿤의 생각을 꿰고 있어서 그가 싫은 거지만 왜 싫어하는지까지 알면서도 자신에게 맞추라는 건 말 그대로 변태 아닌가?

"갈게. 게임이나 마저 해."
"갑자기 시간이 부족해 진 거, 요즘 네 몸상태가 엉망이기 때문이잖아? 난 환자를 부려먹는 악취미 같은 건 없다고, 동생님."
"다른 악취미가 있잖아."
"악취미라니. 형님의 애정이지."

끝에 끝까지 얄미운 자식. 언제나 쿤의 모든 행동은 자기 손바닥 안이라는 걸 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게임기를 내려놓고 싱긋 웃어 보이는 하츨링의 면상을 보고 있노라면 쿤 가문은 재수없다며 게거품을 무는 동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아니면 여기 뽀뽀 쪽으로 바꿀까?"
"딱 대. 영하의 입맞춤을 날려 줄 테니까."
"입술이 말보다 비싸야 하는 거 아냐?"
"대라고."
"...내가 졌다, 그래. 꼭 이겨먹으려고 들다니.. 저런 건방진 놈이 뭐가 좋다고. 에효, 잘나고 심성 고운 게 죄지."
"......"
"신수 좀 막 쓰지 마. 또 쓰러질라. 승탑시험 족보를 아주 쏙쏙 빼다 바칠테니까 낮잠이라도 자던가."

방심한 틈에 쓰다듬는 척 쿤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어놓은 하츨링은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게임기를 집어들었다. 멋대로 개조한 벙커는 주인의 조종대로 하츨링과 쿤의 공간을 가르고 재구성을 반복한 끝에 쿤을 남겨두고 부유선처럼 날아가버렸다. 등대의 텔레포트를 쓰지 않은 것이 용하지만 하츨링의 행동이 마음에 들 리가 없는 쿤은 받기로 약속한 자료의 양에도 불구하고 속에서부터 열이 끓어 오르는 걸 느껴야했다. 언젠가의 언젠가에는 꼭 저 파랑 변태가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방법으로 그를 골탕먹이리라 곱씹으면서.








7.14 - 결점

쿤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유일한 결점으로 대대손손 없었던 싹수를 들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 보자면 외려 장점을 꼽기가 어려워지곤 했다. 그러니 불의의 사고로 그가 목숨을 잃는다고나 해도 슬퍼할 이는 찾기 힘들지도.

"쿤! 여기서 뭐해?"
"그냥. 머리 좀 식히려고."
"쉬어가면서 해. 이제 다시 셋이 되었겠다 걱정할게 어디 있다고."
"그래."

그 소수 중 한 사람이 이수일 터다. 항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챙기는 사람. 개성 강한 동료들에게 휘둘리고 무시당해도 결국 그의 말이 귀 기울이게 만드는 사람. 쾌활한 표정으로 쿤의 등을 팡팡 쳐 대도 참아줄만한 건 그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점 투성이인 쿤과 달리 약하다는 것 빼고는 결점이 없는 그는 사실 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밤보다 더 친절한 사람일 터였다. 탑의 온갖 부조리를 겪으면서도 그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니까.







7.15 - 절망

기다림은 무료한 일이었기에 에드안은 기도했다. 귀애하는 그 아이가 절망에 빠지기를. 그리하여 결국은 자신이 그를 구원하기를. 아버지의 구원이란 절망보다 더 깊은 나락이겠지만 그리해야 아게로는 세상을 바로 알게 될 터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의 세계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냉혹한 진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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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6.26 - 7.5

신의 탑/하루 글감


6.26 - 하지만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람이 사락이는 소리가 흘러들어와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밤은 밝아진 창 밖의 풍경을 맞아들였다. 말간 햇살 속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쿤 씨!"

햇빛을 받아 투명해 보일 정도로 눈부신 은청색 머리카락은 그를 깨운 바람 결을 덧그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 돌아본 얼굴에는 여러가지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신'이 됬구나."
"모두가 그걸 원했으니까요."
"그래?"

무거운 화재에 밤은 시선을 피했다. 창공같은 푸른 눈동자를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쿤은 밤이 FUG의 슬레이어가 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었으니 옷자락에 새겨진 FUG의 문양은 감추며 몸을 움추릴 수 밖에 없었다. 밤의 마뜩찮은 선택을 알게 된 쿤은 더 이상 밤과 마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신은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잖아요!"

아쉬운 마음에 항변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급박한 마음이었다. 이대로 두면 그가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쿤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굴었다. 밤을 다시 봐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존재가 신이라면 그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겠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은 폭군에 지나지 않으니 어느 쪽도 나와는 맞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제가 쿤 씨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쿤 씨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전 뭐든지 할 거에요."
"내 소원은 네가 신이 되지 않는 거였어."
"하지만, 그건 쿤 씨가 진짜 신을 보지 못해서 일수도 있잖아요..."
"변했구나, 밤."

물 같은 목소리였다. 한 없이 차가워서 정수리부터 사람을 꿰뚫는 듯한. 얼어붙은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분명 밤은 신수의 축복을 받았다 추앙받을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진 파도잡이인데 지금만큼운 호흡에 필요한 정도의 신수도 운용하지 못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내 소원도 모르면서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니. 널 이용하려는 자들의 바람에 휩쓸려 결국 소중한 건 전부 놓쳐 버리고."
"그..렇지 않아요."
"그 어리석음을 희생이라고 생각해 버리다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쿤 씨. 분명 어디엔가 아직 찾지 못한, 모두를 위한 방법이 있을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네가 그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 줄까?"
"........"
"그렇게 날 보내고 넌 답을 찾은 거야? FUG의 슬레이어, 쥬 비올레 그레이스?"

쿤의 뒷모습 마저도 눈보라로 흩어지려하자 비올레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이미 비올레의 곁을 떠났으니, 이제야 떠올리건데 이것은 분명 꿈이었다. 지독한 악몽 속에서 비올레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직 해답을 구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자신은 믿고 있으니까, 그를 되찾을 방법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자신은 그 때를 위해서 살아 있노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악몽은 항상 그렇게 끝이 났다.





6.27 - 모퉁이

“야, 십이수! 너 왜 전화 안 받아!!”

문을 열자마자 코 앞까지 다가온 새파란 눈동자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물론 약속시간까지 잠을 퍼 잔 이수가 잘못한 게 맞지만 가르쳐 준 적도 없는 남의 집까지는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는 채로 미안하다 얘기하기 무섭게 그 말이 허락의 의미였던 것처럼 쿤은 이수의 공간으로 쑥 들어왔다.

“와.. 너희 집 좀 신기하게 생겼다?”
“뭘. 모퉁이 집이라 길 모양대로 지은 거지. 잠깐만 기다려. 금방 준비할 테니까.”
“밤 새서 과제라도 했어?”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러냐, 부끄럽게. 오늘은 밥이랑 커피 내가 다 살게. 거기 편한 데 아무데나 앉아있어.”

두 사람이 시귀기 시작한 지는 이제 갓 한 달. 평범한 공대생인 이수가 만나기에는 과분하지 않을까 싶은 연인의 단점은 같은 남자라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관계를 고백하기 어렵다는 점 말고는 없었다. 대체 이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그는 집안도 좋고 외모도 뛰어났다. 입을 떼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쿤의 실물을 보여주며 얘기하면 ‘저 얼굴이면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꽤 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집 값이 싼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유복한 도련님이기까지 하니, 이수와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그 귀하고 예쁜 연인을 바람맞힐 뻔 했으니 사실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도 눈 감아 주는 게 맞다. 쿤이 같은 집에 있다는 것도 잊고 우당탕탕 씻고 잘 닦지도 않은 채로 옷에 몸을 구겨넣었다. 세모꼴의 집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연인을 두고도 초라함의 대명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가 잘 안 들어가는 팔을 꿰며 떠올랐다. 그러게 저 도련님은 대채 자신의 뭐가 좋아서 여기까지 왔으려나?

"근데 쿤 갑자기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말쑥한 외모와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쿤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고양이 같다고 하곤 한다. 누가 인간 고양이 아니랄까봐 세모꼴의 가장 좁은 모서리 자리에서 삐딱하게 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벽과 창 사이에 끼어있던 그는 이수의 부름에 유연하고 빠르게 다가와 매달렸다.

"하츠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엄청 좋다. 상상 이상이야."
"어? 정말? 처음 봐서 그렇지.. 계속 살다 보면 불편하기만 해. 가구 고르기도 힘들고. 너무 각져서 아까 거긴 청소도 잘 못하는 걸."
"나름 매력있잖아, 까다로운게. 사는 사람은 둥그런데 집은 아닌게 언밸런스하면서도 어울린달까?"
"꿈보다 해몽이네.. 오늘은 어디 갈까? 영화 보기 전에 점심도 먹고 해야지."
"여기서 시켜먹자! 그런 거 꼭 연인이랑 같이 해 보고 싶었어."
"하하.. 진도 너무 빠른 거 아냐, 우리? 뭐 시킬까... 떡볶이?"

아아, 이제 알겠다. 그는 반대가 주는 매력에 매료된 거였구나. 갑자기 자신이 해 온 모든 걱정이 쓸모없어진 기분에 이수는 다시 편안한 미소를 띄웠다. 역시 너는 나한테 축복이구나.






6.28 - 세상

세밀한 신분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는 이 곳에서는 아무리 귀족 출신이라고 해도 성년이 되기 전의 아이는 부모의 물건. 쿤의 아이들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외출을 허락 받을 수 없었다. 노예가 노력한다해서 귀족이 될 수 없듯이 타고난 신분을 버리는 일 또한 쉽게 허락받지 못하는 법. 평소에는 실존하는 지조차 믿기 어려웠던 아버지이자 쿤의 주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아게로가 쿤의 궁을 빠져나가리라 마음 먹은 바로 그 날이었다. 연회장에서나 가끔 보던 등받이가 높은 의자의 바로 그 높은 등받이의 끝쯤에서 떨어진 사슬에 양 손이 높이 결박되어서. 긴 테이블은 마찬가지로 연회 때나 볼 수 있는 온갖 진미로 채워져 있었지만 손이 묶인 상태에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려고 했던 게냐."
"....."

맞은 편에서 느리게 식사를 이어가던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포도주 잔을 기울일 때가 되어서야 그의 눈길이 제대로 아들의 얼굴에 머물렀다. 에드안의 자식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는 아들과 딸의 첫째와 막내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막내 아들인 아게로는 그가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자식들 중 하나였다. 아이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기로서니 밖에서는 신이라 불리는 그의 명령에 불복하다니. 아무래도 에드안의 본보기가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뭐 좋다. 대답을 하든 안 하든 네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그는 자식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들에게 주지시켰다. 그는 성의 보모들을 시켜 아이들에게 가끔씩 밀지를 보내 이런저렁 명령을 수행하게 했고,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아이는 죽이거나 성 밖으로 끌어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는 아이들의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신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나쁜 아이는 속아냄이 옳았다. 그가 만든 세상의 법칙이 그러했으니.

"너는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탐한 대가를 치뤄야 한단다."

물론 이 성에서는 뿌리뽑긴 하겠지만 아게로는 에드안이 가장 정성들여 키운 회초. 언젠가는 자신이 품으리라 마음 먹은 아이였으니 기다린 것이었지만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내던지니 에드안도 장단을 맞춰줄 밖에. 에드안의 손짓에 사병들 중 하나가 아게로의 입에 재갈을 먹였다. 귀한 몸이니 재갈까지도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어 짧은 바지 덕에 드러난 허벅지에매질이 가해지자 무거운 의자에 묶인 몸이 고통에 바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읏! 윽! 으읍!"

틀어 막힌 입이지만 맨 살에 떨어지는 승마편의 날카로운 통증은 묵묵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벗어날 수 없는데도 힘이 들어가 구속구에 여린 살갖이 쓸리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체벌의 고통은 매서웠다. 음식에는 입도 대지 못한 채 혹독한 벌을 받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안주 삼아 에드안은 새로 채운 포도주 잔을 다시 천천히 비워갔다. 덜 익었음에도 벌써 눈에 띄는 미색이 처연하게 느껴지는 광경이 에드안의 입에는 달았다. 지금의 고통이 평생에 걸쳐 이어질 형벌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아게로는 알고 있으려나?






6.29 - 불평등

한계를 넘어선 고통은 의식을 잠식했다. 많은 이들의 숙원으로 말미암아 오랜 시간 공 들여 준비된 탑 최초의 쿠데타는 역사가 되지 못하는 채로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 비올레는 쓰러진 동료들과 그들의 피로 점철된 전장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분하고 억울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 밀도가 사뭇 달랐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자신은 어째서 자하드를 이길 수 없는가? 동료라는 건 그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하늘의 별 같은 것일까? 라헬. 그에게 있어 첫번째 별이었던 소녀처럼 빔의 동료들은 전부 무수한 별이 되어버리는 결말인 걸까?

"역시 너도 '불사'인 거겠지, 작은 괴물."
"왜... 어째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손 대지마!!"

포화가 멎고 적막이 내려앉은 전장이라 비올레의 절규만이 대기를 찢었다. 자하드 군도 괴멸상태였지만 비올레의 동료들 중에서도 목숨이 붙어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그러했는데 라크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노력한 덕인지 얉은 숨이 남아있던 쿤을 비올레보다 먼저 찾아낸 탑의 왕은 시체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상태임에도 아직 그가 지켜야 할 동료가 남아있다는 걸 인지한 비올레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깃든 불사의 힘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게 다행이라 할만한 지금의 상황을 저주하고 또 저주할 정도로.

"모든 것의 시작점은 같지 않다."
"쿤 씨..! 쿤 씨!!"
"네가 바라는 세상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면 타고난 이들의 억압은 어떻게 보상할 생각이지?"
"커헉!"
"쿤이라... 필히 네게 있어 소중한 존재겠군."

자신과 연적에게 있어 에드안이 그랬듯이, 자하드의 그릇이었던 왕난과 연적의 아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주어졌을 터. 저항 불능인 FUG의 슬레이어를 세게 걷어차 핏물을 토하게 만들고 나서도 금속성을 띨 만큼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 보던 자하드는 쿤의 목줄기를 쥐고 있던 손을 푸는 대신 반군의 수장 만큼이나 무력한 그를 품에 안았다.

"새로운 신이 된 네게 불멸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가르쳐 주마."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찾아낼 때마다 짓밟아서. 자하드가 당장 비올레의 몸을 조각낸다해도 불사신인 그는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날 터였다. 신체를 부수고 또 부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배신한 친우들에 대한 분이 풀리지는 않을 터. 마음까지 짓이겨야 복수가 완성되지 않을까? 차마 포기할 수도 없도록 이렇게.

"그래야 공평한 세상이 될 테니."






6.30 - 관대함


이 곳은 전장이었다. 그리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피 냄새가 코속을 채우고 있었다. 이유는 새빨간 시계가 증명했다. 그리고 붉게 덧칠된 세계에 홀로 빛을 발하는 새하얀 인영이 바로 전장의 주인된 자.

"옛 정을 봐서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으마."
"....아.. 게로..."
"네가 비록 아비의 보물을 훔쳤다 하나 내 자식이니."
"그 애를.."
"이만하면 관대한 아버지 아니겠니."






7.1 - 여름

올 여름은 무더울 거라더니 과연 초입부터 열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집에서 나온지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입고 나온 셔츠가 땀에 젖는 것을 느끼면서도 왕난은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시원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에서 였다. 요즘 같은 때에는 나설 일이 없게 만드는 게 상도덕이건만 왜 그룹 과제 같은 걸 시키는 건지 왕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까지는 15분 남짓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땀 범벅이 되어있을 게 분명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벗어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목적지에 도착했을 주음이었다.

“어이, 쿤! 용케도 일찍 나왔네?”
“말도 마. 해 질 때까지 여기서 안 나갈 거야.”
“뭐?”
“새벽에 나왔어. 세 끼 다 브런치로 떼울 거야.”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쿤이라는 이름은 조원을 찾아야 하는 왕난을 그 자리에 붙들어 놓았다. 첫 사랑의 이름이었다. 고교 시절 먼 발치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마치 영화 속에서 처럼 처음 말을 붙여본 순간에 전학 소식을 들려주었던. 부모님의 이혼이 이유라는 걸 소문으로 건너 듣기만 했을 뿐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어 왕난은 한참을 방황했었다. 그랬던 그가 불현듯 왕난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여전히 더위에 약한 그는 친구의 인사도 받아주는 둥 마는 둥이었고, 하루 종일 카페에 있을 거라는 다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점심 대신이었을 팬 케이크가 테이블에 남겨져 있었지만, 여전히, 여전히도 눈부시게 청량해서 에어컨 보다도 먼저 왕난의 가슴으로 불어닥쳤다.






7.2 - 예의

"너 이제 아주 막 쓴다? 남의 벙커를?"
"너도 내 등대 썼잖아."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인데. 수년이 지난 빚을 이제와서 이자를 쳐 받겠다는 심보의 못난 동생은 하츨링의 벙커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을 하기에 딱이라서 애용하는 물건인데 같은 고양이과라 그런지 이복동생에게도 그 의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너라니 형님한테 예의 없게."
"형은 무슨. 넌 가문을 버렸잖아."
"그래도 내가 너보다 어른이거든? 백 살은 어린 게.."
"꼰대."
"어쭈. 요놈 오늘 예절교육 한 번 시켜줘?"

하츨링의 협박이 만만하게 보인 건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아게로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었다. 대체 왜 하츨링의 벙커에 불시에 들이닥치는 습관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생을 살다 보면 재미를 추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섭리인지라, 하츨링에게는 탑에 이는 돌풍과 같은 이복동생의 방문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타고난 유전자의 힘으로 뛰어난 외모를 기본으로 탑재한 형제들 사이에서도 아게로는 눈에 띄는 미인이기도 했고, 힘 쓰는 걸 좋아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머리 쓰는 일을 좋아해서 게임 상대로도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농담 아니거든?"
"왜 배운 척 하려고 해? 아버지 욕 먹이는 게 우리 일인데."
"와. 너 좀 천재인 듯."

하지만 그래도 나 한테 그러면 안 되지. 안락의자를 침대 삼은 아게로의 위로 양팔을 짚어 품에 가두자 가벼운 입맞춤이 하츨링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더 가 볼까?"
"선 넘어 보자는 거야? 후회하기 없기야."







7.3 - 용기

“저.. 부디!! 쿤을.. 쿤을 다시 깨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한 소망의 결과였다. 이수의 곁으로 쿤이 돌아온 건. 당시 자하드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에반켈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던 밤은 쿤을 위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유리 공주의 부탁으로 길잡이인 에반이 함께 했지만 쿤을 깨우기 위한 여정은 쉽지 않았기에 2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이수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쿤이 눈을 뜨는 순간에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밤이라는 걸. 그리고 이수도 항상 밤과 쿤, 그리고 라크가 함께하길 바랬다. 그들을 잇는 특별한 유대감엔 이수가 끼어들 틈 따위 없다 여겼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공주의 곁엔 왕자가 있는 것이 어울린다고.

“또 따로 가자고? 조심했다고는 하지만 너희의 얼굴을 아는 자하드군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흠.. 그 말은 맞지만 추격을 따돌리려면 여러 무리로 나뉘는 게 좋지 않을까? 적의 시선도 분산되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쪽의 전력이라봐야 말썽쟁이 공주 둘인데 미덥지가 못하단 말이지.”
“그래도 우릴 버리기야 하겠어? 자주 연락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쿤.”

이렇게 생각해 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쁘고, 눈치채지 못하는 차에 이름이라도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은 이 감정이 우정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상황에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고. .....꼭 더 높은 곳에서 보자.”
“우하하, 당연하지. 저번처럼 추월당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마음을 꺼내 놓을 용기가 없는 이수에게는 감정을 외면당할 용기 또한 없는 게 당연하므로.

“.....할 말은 그게 다야?”
“엉?”
“아무것도 아냐.”

용기도 없는 것이 눈치도 없어서야. 작별인사를 끝으로 돌아서는 이수의 등에 대고 쿤은 혼자 혀를 찼다. 하긴. 용기가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뭘 더 어쩌겠는가? 다음에도, 이 다음에도 안부는 물어볼 필요가 없게끔 그가 눈 앞에 있어주길 바랄 밖에.









7.4 - 버스

“지옥열차가 있었으니까 지옥버스도 있는게 당연.. 하려나?”

승탑 시험을 치르려면 반드시 저 지옥버스를 타고 시티투어를 마쳐야 한다는 이 층의 룰에 따라 일행은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지옥버스라는 이름이 왜 붙게 된 건지 모를 만큼 내부가 평범해서 앉을 자리를 정하고 출발할 즈음엔 소풍이라도 떠나는 기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연히 밤이나 라크의 옆자리를 택할 줄 알았던 쿤은 엔도르시에게 밤의 옆자리를 빼앗긴데 이어 아낙이 가져온 군것질 거리에 온 정신을 가로채인 라크 덕에 빈 자리에 않아 조용히 지나가는 풍경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결국 그의 옆자리가 하츠의 차지가 된 걸 알면 시비부터 걸겠거니 했는데 조용하기만 하니 외려 하츠는 불안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눈썹의 그늘이 얇게 깔린 눈동자는 저 먼 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뭔가 신기한 광경이라도 있나 싶었으나 하츠의 눈에 들어온 것 중에는 특이한 것이 별로 없는데.

“왜 자꾸 멍때리냐.”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생각?”
“별 거 아니야.”

오랜만에 두 사람이 나누는 차분한 대화에 시끄러웠던 버스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이 쪽을 보는게 당사자인 하츠에게는 당황스러울 뿐이건만 또 다른 당사자는 여전히 다른 세상 여행 중이다. 무슨 일이냐며 손짓 발짓으로 묻는 동료들에게 떠밀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있는데로 굴려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자하드의 공주라는 네 누나 일이냐?”

네임헌트 정거장을 나오기 직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떠올린 것 자체가 스스로도 놀라웠기에 예기치 않게 의표를 찔린 쿤도 조금 놀란 듯 했다. 물론 그 표정을 마주한 하츠는 더더욱 놀라게 되었고.

“그러니까, 저.. 그, 혹시.... 따라갈 거냐?”

버스 안의 그 어떤 대화보다도 흥미로운 소재에 승객들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하츠의 귀에도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쿤은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왜 모르...”
“하지만 반드시 물어봐야 할 건 하나 있지.”

왜 너는 내게 같이 가자고 얘기하지 않았냐고.






7.5 - 시련

잠깐만. 그 잠깐이 세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쿤의 침대에 팔짱을 끼고 앉은 화이트는 볼 수록 가관인 눈 앞의 풍경에 이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FUG든 다른 어떤 무리에서든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찾아보기 힘든 자질이었다. 화이트와 같은 슬레이어들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지만 원로처럼 힘이 강하지 않더라도 판을 짜고 읽을 줄 아는 자들에게 이미 몇 번을 놀아났던가? 때문에 화이트는 먹잇감이나 다름 없는 선별인원 조무래기들이었지만 어울려주는 동안 쿤에게 관심이 갔더랬다. 고귀한 피를 타고나 그 피의 주인을 꺾는다는 야망을 꿈꾸는 점도 그와 같았고 여러모로 화이트에게는 없는 면을 가진 자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진두지휘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고민하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문제는 그 밖의 조무래기들이랄까?

“식량이 떨어졌다, 파란 거북이!”
“삭량이 아니라 네 바나나겠지. 우린 지금 전쟁 중이라고. 틈이 생길 때까지 참아.”

“쿤, 혹시 하츠 못 봤어?”
“못 봤는데.”
“그럼 어디갔지? 또 혼자 수련하려 갔나. 아! 엔도르시가 연락 했는데 다음에 니들 좀 새로 사서 보내달래.”
“걔 무기를 왜 내가 사?”
“아무튼 난 전했다.”
“야, 십이수!”

“10가문끼리 비밀 회의라도 하는 거야?”
“둘이서 무슨 회의. 넌 또 왜 왔어?”
“다음 수를 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번엔 네가 알아서 해도 좋은데, 길잡이씨.”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밤이 나한테 휘둘리는 건 싫다면서.”
“어차피 FUG와 자하드군의 전쟁이야. FUG가 전력을 다 해서 밤을 지켜주면 좋지.”

이렇게 여러 사람이 수시로 그의 방문을 두드려 쿤의 일을 방해하는데 제대로 된 작전이 나오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걔 중에서 제일 기가막힌 것은 조무래기 무리의 유일한 대어였다.

“쿤 씨, 잠깐 쉬시면서... 화이트 씨는 왜 여기 계신 건가요?”
“하아... 첩첩산중이군.”

비선별인원이자 FUG의 슬레이어 후보라는 녀석은 쿤의 방에 있는 화이트를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시적인 협력관계라지만 두 사람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밤은 거리낌 없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그를 악인으로 정의했고, 화이트는 동료를 지킬 힘 조차도 윤리에 매여 쓰기 어려워하는 그를 아둔하다 일컬었다. 작금의 잔투에서도 결과적으로는 화이트의 협력이 없었다면 동료들을 죄다 잃을 판국이었으면서 제일 친한 친구 랍시고 쿤과의 대화조차 막을 심산이던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야, 밤?”
“아, 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간식을 좀...”
“네놈들의 간식같은 단과자는 쿤의 입에는 맞지 않을텐데.”
“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야.”
“불량식품을 좋아라하는 입맛이라면 볼 것도 없지. 짐이 그깟 간식보다 훨씬 감미로운 영혼의 맛을 보여주마.”

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슬슬 다가오는 기척이 있던 화이트가 입을 맞춘 것이다. 이성적인 편인 쿤 마저도 화이트의 돌발행동에 머리가 굳었는데, 그보다 훨씬 감정적인 생물인 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대담하게 쿤의 입안을 헤집어 놓으며 화이트는 그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착실히 받아챙겼다. 하찮은 떨거지들이 그를 방해한다면 자신은 더 확실한 시련이 되어주지. 그리 마음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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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글감 2020.6.19 - 25

신의 탑/하루 글감




6.19 - 스스로

한 쪽으로 기우는 것만 같은 걸음을 바로 잡으며 소년은 신중하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아직 의식이 흐려질 정도로 출혈이 심한 것은 아니니 가는 길이 곧지 않은 것은 단지 통증의 영향일 터.

'이 정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해.'

소년에게는 영생을 사는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가족이 있었지만 그는 그 중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상처를 씻어내는 것도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던 옷으로 붕대를 대신해 지혈과 드레싱을 마치는 것도 오로지 혼자의 몫. 수많은 가족이 전부 적이나 다름 없는 이 집안에서 홀로 자신의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이 곳의 아이들에게 어리광은 허락되지 않았다.




6.20 - 만약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그 애보다 먼저 너를 만났더라면. 물론 그랬다면 너는 나에게 한 톨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남의 횟수가 채워지는 것이 먼저 였다면 전연 다른 미래가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고 부질없는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을 너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만약을 꿈꾸지 않으므로. 너는 만약이라는 말로 잡을 수 없었던 소망을 꿈꾸는 게 아니라, 더 깊은 수렁에 스스로를 던져넣을 것이므로.





6.21 - 호기심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

금속성을 띄어 싸늘한 금빛 동공이 아래를 비껴보았다. 지지않는 태양으로 군림한 제국의 황제. 세상 모든 것을 발 아래에 둔 그의 눈빛에 한낱 궁인은 압도당한지 오래였다. 분명 그의 등 뒤에 자리한 것은 침실이건만 실크 가운에도 검을 찬 황제는 살기가 등등했다. 모든 숙위가 침실을 등지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황제가 언제 부터인가 직접 데려온 침노 하나를 침전에 가두어 두고 있다는 건 궁 내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황제의 눈에 들었는지, 평소에 어찌 지내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자가 없었다.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인물을 황제가 죄다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녀가 본 것은 침노의 푸른 체모 뿐이었지만 황제의 검은 여지 없이 그녀의 생명을 앗았다.

"......아니 품종 나름이라고 해야할까."

듣는 이가 없으니 의미 없는 말이건만 침실도 돌아온 황제는 그리 속삭였다. 금실로 수 놓은 붉은 시트는 새하얀 나신의 드러난 부분을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화려한 문양보다 더 눈에 띄는 흰 살결과 은청빛 머리카락. 실물을 본 적 없으니 궁인들은 침노라 이를 뿐이었지만 그를 보았다면 귀족가의 영윤이라는 걸 눈치챘을 테니 품종이 다르다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검을 든 적 없는 몸으로 전장의 영웅인 황제의 정욕을 받아내야 했으니 궁의 법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황제보다 먼저 눈을 뜨는 일은 손에 꼽았다. 정말 고양이를 다루듯 잠든 소년의 턱 밑에 손을 넣어 간지럽히며 황제는 이마를 맞대었다.

"아게로."






6.22 - 처음

아내가 너무 많아 아게로가 태어났을 즈음 부터는 어머니에게 발길을 끊었다던 가주이자 최초의 쿤, 쿤 에드안을 처음 만나던 날 아게로는 아버지의 앞에 나서지 않고 어머니의 치마폭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도 그의 피를 이었건만 완벽하게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는 아우라. 어린 아게로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것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자하드 궁 못지 않은 위세를 자랑하는 쿤의 궁은 곧 가주인 에드안의 것. 그 안에서는 어머니가 방패가 되어줄 수 없건만, 더해서 그녀는 그런 아량을 배풀어줄만큼 자애로운 어머니도 아니건만, 통각과도 닮은 그 날카로운 예감에 움직인 아게로를 가주는 손쉽게 다시 찾아내었다. 당장 아게로의 머리통을 부술 수도 있어보일만큼 커다란 손에 붙들린 아게로는 눈 돌렸던 공포와 다시 마주하자 떨리는 몸 때문에 결국은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를 갖추고 어서 이름을 고하세요, 아게로. 가주님 앞에서 예법을 잊다니 무슨 추태입니까?"
"흐음."

기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쉽게도 목숨이 날아가는 곳. 어린 아들을 재촉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다급했지만 얼어붙은 듯 자신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들에게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에드안은 흥미롭다는 듯 남은 손으로 턱밑을 쓸었다.

"아게로구나."
"가주.. 님...?"
"잠시 아비와 산책이라도 할까?"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어린 아들을 번쩍 안아든 에드안은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시하고 겁에 질린 아이를 안고 정원으로 향했다. 가주의 변덕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였지만 그의 권력은 그보다 당연했기에 아그니스는 아이를 돌려받는다는 약속도 없이 아들을 빼앗겨 버렸다.

"첫 눈에 나를 알아보다니 영특하구나."





6.23 - 반성


"파란 거북이! 어디 가는 거냐?"
"요 앞 상점. 거기 바나나 안 팔아. 초코바도 안 팔고."
"날 뭘로 보는 거냐!! 거짓말 하지 마라!"
"진짜라니까?"

필요한 물건이 생긴건디 가벼운 복장으로 벙커를 나서는 쿤에게 라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건 워낙에 자주 있는 일이라 동료들 중 그 누구도 유치한 말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싸운다고 해도 오래지 않아 화해할테니 괜히 신경쓰면서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랄까? 평소에는 신체를 압축한 상태로 지내는 라크라 무게가 조금 가벼워 졌다고는 해도 성인 한 사람의 무게는 너끈히 나갈 터인데, 그런 라크를 매달고도 쿤은 방해를 받지 않는 것처럼 원래의 속도로 나아가는 걸 보면 역시 10가문.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목소리와 항상 어떤 감정의 최고치를 찍고 있는 라크의 목소리가 나란히 멀어져갔다.

"정말 먹을 거 파는 데는 안 간다니까?"

바나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크가 팀의 돈줄이나 다름없는 쿤에게 간식을 사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일은 흔했지만 라크가 극구 따라나선 속 사정은 따로 있었다. 등대의 수리와 전투에 필요한 무기 등을 파는 상점에서 먹을 것을 팔 리는 만무했지만 여하튼 라크의 고집 때문에 쿤은 오늘도 그와 함께 외출한 셈이 되었다. 라크가 원한 것도 그를 혼자 두지 않는 것이었다. 라크의 일행 중에서 절대적인 전투력을 따지자면 쿤보다 약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라크가 돌이켜 생각해 볼 정도로 쿤은 혼자 두었을 때 엄청난 위험에 빠지곤 했다. 달러쇼에서도 그랬고 견족의 케이지에서도 그랬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무리를 진두지휘하며 모두를 지켜내는 지략가였지만 혼자일 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알아서 강한 동료들 곁에 머물러 주면 좋으련만 쿤은 그런 자각 없이 평소에는 또 개인행동을 선호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리더님이 신경을 더 써 줄 밖에.

"악어. 듣고 있어?"
"......"
"악어!"
"시끄럽다! 가는 길에 바나나를 사라!"
"뭐? 왜 꼭 같이 가야 하는 건데? 용돈 준다니까?"
"가자!"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정말..."

죽은 줄 알았던 밤은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그들의 품에 돌아왔다. 자신도 한동안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던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번번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쿤에 비하면야. 이제와 생각하건데 두 번 다시 혼자 두지 않겠다는 다짐은 밤이 아닌 쿤에게 해야 옳았다.

"가자, 파란 거북이!"

쿤의 목덜미에 붙어 방향까지 지시하는 라크에게 질렸는지 쿤은 대구도 않고 걸음을 옳겼다. 그가 자신을 귀찮게 여긴다고 해도 물러설 생각은 한 톨도 없었다. 소중한 부하 2를 지키는 것도 리더의 책무니까. 또한 이것은 그를 몇번이나 잃을 뻔 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으므로.





6.24 - 조심히


일행 중에서 가장 일찍 눈을 뜨는 것은 보통 하츠였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수련 시간이라는 게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기 단련을 게을리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하츠에게는 새벽 훈련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그런 연유로 본의 아니게 더 일찍 눈이 떠 진 날엔 간밤의 소란이 반영된 진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이수의 맥주 한 캔이 술판으로 번졌는지 실내에는 집기와 사람이 난장판으로 널려있었다. 한심한 작태에 할 말을 잃었지만 문득 보이지 않는 이가 있다는 걸 깨달은 하츠는 보통의 경우를 따라 쿤이 혼자 사용하는 방문을 조용히 열어보았다.

"녀석. 또 여기서.."

하츠와 겨뤄도 호각일 정도로 쿤은 강했지만, 일행 중 한 사람이 비선별인원이라는 게 알려진 이후로 줄곧 선별인원의 신분에는 맞지 않는 강적들을 상대해야했기에 일행의 두뇌로서 그가 떠져야 할 경우의 수는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본디 동료들과 웃고 떠드는 일에 잘 끼는 편이 아니긴 했지만 이제는 가끔을 즐길 여유조차도 잊어버린 듯 싶었다. 잠 자는 시간조차 아끼다 겨우 눈을 붙였을 텐데 깨우기는 미안해서 하츠는 그를 침대로 옮겨주는 것 보다는 모포를 가져와 덮어주기로 했다.

'차라리 너와 악어만 보내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하츠는 이내 생각만으로도 고개를 저었다. 그들끼리 보냈다가 쿤은 심장이 멈춘 채로 돌아온 전적이 있었다. 그 때는 기적적으로 소생했지만 그런 요행이 계속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하츠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한다 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조심히, 아주 조심스럽게. 솜털 하나 닿지 않도록 책상에 엎드려 잠든 쿤의 등을 모포로 덮어준 뒤에야 하츠는 다시 본래의 목적을 찾아 숙소를 나섰다.






6.25 - 동시에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는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아리에 호아퀸이라는 이름보다 '화이트'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색의 칭호를 받은 제국 제일의 12검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대 귀족이자 개국 공신으로서 왕족도 아니면서 공작의 작위를 받은 아리에 가문이지만 가문의 고고한 명성과는 상반된 길을 걷는 그는 검술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리에의 골칫거리였다. 정략혼이 판을 치는 사교계에서 매파 한 번 받지 못한 것이 바로 그 증거. 하지만 마치 그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그는 본인이 직접 구혼에 나섰다.

"항상 먼저 가다니. 오늘은 네가 기다리거라."
"그럼 살펴가셔요."
"서운하게 하는구나. 이 몸은 네 정혼자인데."

정혼자라는 말에 소년은 약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부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투로. 화이트는 아리에와 대등한 위세를 가지고 있는 쿤 가문의 영윤에게 청혼했다. 제국에서 동성혼을 막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유흥을 위해서 남첩을 들이는 정도였지 정실을 동성으로 맞이하는 건 귀족가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아리에의 가주인 혼이 소식을 듣자마자 머리를 싸맸다는 것은 소문이 전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구혼 상대도 문제였다. 쿤 가문 역시 내로라하는 귀족가라지만 서출이 소가주로까지 거론되던 화이트의 정실이 되는 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았다. 서자임에도 화이트가 그 이름을 알 정도로 그가 재능있는 청년이라는 건 재쳐두고 말이다.

"아버님의 약조는 믿지 않는 게 좋습니다. 변덕스러운 분이시니."
"변덕이라 해도 당장은 내가 네 정혼자지."

재미있는 일 아니냐? 그는 네가 이용하기 좋은 말 아니더냐.

분명 쿤의 가주는 아들의 자존심을 꺾어 놓을 겸, 아리에의 가주, 혼에게도 크게 한 방을 먹일 기회라 생각해서 화이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테다. 혼례 준비를 핑계로 도성을 벗어나 있던 그를 본가로 불러들인 것까지 완벽하게.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돌아가세요."
"그리 보챈다면야 내일 다시 오도록 하지."

촉. 전장에서의 화이트를 아는 자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작은 정혼자의 뺨에 짧은 입맞춤을 남긴 화이트는 아게로가 뭐라도 집어던지기 전에 재빠르게 쿤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게로가 머무는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정혼자의 호위와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이다.

"저 인간이 정말!!"
"쿤. 무슨 일 있었나?"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들어와. 녀석은 갔으니까."

손님이 돌아가자 아게로는 자신의 오랜 지기이자 호위인 하츠를 다시 곁으로 불러들였다. 아게로는 분명 재기발랄하고 유능한 제국의 책사였으나, 당장은 화이트와의 혼담을 거절하기가 녹록치 않은 모양이었다. 적자가 아닌 만큼 후사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변방을 돌며 황명을 수행하다 하츠와 제국을 떠날 계획이었는데 말이다.

"....어차피 정략혼이라는 건 계략의 일종이니 난 신경쓰지 않아."
"너 때문이 아니거든?!"

하츠가 저만한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아게로는 부러 역정을 내며 심중을 감추었다. 화이트의 청혼은 여러모로 문제였다. 하츠는 아니라고 하지만 둘은 같은 사람에게 정을 주고 있으며 동시에 같은 검사이기까지 했다. 당장은 아게로를 위해서 입에 발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와 자신을 비교하며 마음이 좀먹어 들어갈 게 눈에 보였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시키지 않은 위로까지 건네는 하츠를 방으로 확 끌어당긴 아게로는 직접 문을 걸어 잠궜다.

"하자. 우리."
".....뭐? 뭘 갑자기..?"
"같이 자자고. 저 녀석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걸 너한테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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