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 - 하지만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람이 사락이는 소리가 흘러들어와 더는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밤은 밝아진 창 밖의 풍경을 맞아들였다. 말간 햇살 속에는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쿤 씨!"
햇빛을 받아 투명해 보일 정도로 눈부신 은청색 머리카락은 그를 깨운 바람 결을 덧그렸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 돌아본 얼굴에는 여러가지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신'이 됬구나."
"모두가 그걸 원했으니까요."
"그래?"
무거운 화재에 밤은 시선을 피했다. 창공같은 푸른 눈동자를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쿤은 밤이 FUG의 슬레이어가 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었으니 옷자락에 새겨진 FUG의 문양은 감추며 몸을 움추릴 수 밖에 없었다. 밤의 마뜩찮은 선택을 알게 된 쿤은 더 이상 밤과 마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신은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 잖아요!"
아쉬운 마음에 항변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급박한 마음이었다. 이대로 두면 그가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쿤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히 굴었다. 밤을 다시 봐 줄 생각은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존재가 신이라면 그는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진 않겠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은 폭군에 지나지 않으니 어느 쪽도 나와는 맞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제가 쿤 씨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쿤 씨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전 뭐든지 할 거에요."
"내 소원은 네가 신이 되지 않는 거였어."
"하지만, 그건 쿤 씨가 진짜 신을 보지 못해서 일수도 있잖아요..."
"변했구나, 밤."
물 같은 목소리였다. 한 없이 차가워서 정수리부터 사람을 꿰뚫는 듯한. 얼어붙은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혀왔다. 분명 밤은 신수의 축복을 받았다 추앙받을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진 파도잡이인데 지금만큼운 호흡에 필요한 정도의 신수도 운용하지 못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내 소원도 모르면서 모두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니. 널 이용하려는 자들의 바람에 휩쓸려 결국 소중한 건 전부 놓쳐 버리고."
"그..렇지 않아요."
"그 어리석음을 희생이라고 생각해 버리다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쿤 씨. 분명 어디엔가 아직 찾지 못한, 모두를 위한 방법이 있을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네가 그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 줄까?"
"........"
"그렇게 날 보내고 넌 답을 찾은 거야? FUG의 슬레이어, 쥬 비올레 그레이스?"
쿤의 뒷모습 마저도 눈보라로 흩어지려하자 비올레는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이미 비올레의 곁을 떠났으니, 이제야 떠올리건데 이것은 분명 꿈이었다. 지독한 악몽 속에서 비올레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직 해답을 구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자신은 믿고 있으니까, 그를 되찾을 방법도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자신은 그 때를 위해서 살아 있노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은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악몽은 항상 그렇게 끝이 났다.
6.27 - 모퉁이
“야, 십이수! 너 왜 전화 안 받아!!”
문을 열자마자 코 앞까지 다가온 새파란 눈동자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물론 약속시간까지 잠을 퍼 잔 이수가 잘못한 게 맞지만 가르쳐 준 적도 없는 남의 집까지는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자신이 어떤 표정인지도 모르는 채로 미안하다 얘기하기 무섭게 그 말이 허락의 의미였던 것처럼 쿤은 이수의 공간으로 쑥 들어왔다.
“와.. 너희 집 좀 신기하게 생겼다?”
“뭘. 모퉁이 집이라 길 모양대로 지은 거지. 잠깐만 기다려. 금방 준비할 테니까.”
“밤 새서 과제라도 했어?”
“당연한 걸 뭘 묻고 그러냐, 부끄럽게. 오늘은 밥이랑 커피 내가 다 살게. 거기 편한 데 아무데나 앉아있어.”
두 사람이 시귀기 시작한 지는 이제 갓 한 달. 평범한 공대생인 이수가 만나기에는 과분하지 않을까 싶은 연인의 단점은 같은 남자라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관계를 고백하기 어렵다는 점 말고는 없었다. 대체 이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로 그는 집안도 좋고 외모도 뛰어났다. 입을 떼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쿤의 실물을 보여주며 얘기하면 ‘저 얼굴이면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꽤 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집 값이 싼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전전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유복한 도련님이기까지 하니, 이수와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그 귀하고 예쁜 연인을 바람맞힐 뻔 했으니 사실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도 눈 감아 주는 게 맞다. 쿤이 같은 집에 있다는 것도 잊고 우당탕탕 씻고 잘 닦지도 않은 채로 옷에 몸을 구겨넣었다. 세모꼴의 집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연인을 두고도 초라함의 대명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스스로가 잘 안 들어가는 팔을 꿰며 떠올랐다. 그러게 저 도련님은 대채 자신의 뭐가 좋아서 여기까지 왔으려나?
"근데 쿤 갑자기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우리 집은 어떻게 안 거야?"
말쑥한 외모와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에 쿤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고양이 같다고 하곤 한다. 누가 인간 고양이 아니랄까봐 세모꼴의 가장 좁은 모서리 자리에서 삐딱하게 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벽과 창 사이에 끼어있던 그는 이수의 부름에 유연하고 빠르게 다가와 매달렸다.
"하츠한테 물어봤지. 너희 집 엄청 좋다. 상상 이상이야."
"어? 정말? 처음 봐서 그렇지.. 계속 살다 보면 불편하기만 해. 가구 고르기도 힘들고. 너무 각져서 아까 거긴 청소도 잘 못하는 걸."
"나름 매력있잖아, 까다로운게. 사는 사람은 둥그런데 집은 아닌게 언밸런스하면서도 어울린달까?"
"꿈보다 해몽이네.. 오늘은 어디 갈까? 영화 보기 전에 점심도 먹고 해야지."
"여기서 시켜먹자! 그런 거 꼭 연인이랑 같이 해 보고 싶었어."
"하하.. 진도 너무 빠른 거 아냐, 우리? 뭐 시킬까... 떡볶이?"
아아, 이제 알겠다. 그는 반대가 주는 매력에 매료된 거였구나. 갑자기 자신이 해 온 모든 걱정이 쓸모없어진 기분에 이수는 다시 편안한 미소를 띄웠다. 역시 너는 나한테 축복이구나.
6.28 - 세상
세밀한 신분제가 엄격히 지켜지고 있는 이 곳에서는 아무리 귀족 출신이라고 해도 성년이 되기 전의 아이는 부모의 물건. 쿤의 아이들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외출을 허락 받을 수 없었다. 노예가 노력한다해서 귀족이 될 수 없듯이 타고난 신분을 버리는 일 또한 쉽게 허락받지 못하는 법. 평소에는 실존하는 지조차 믿기 어려웠던 아버지이자 쿤의 주인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아게로가 쿤의 궁을 빠져나가리라 마음 먹은 바로 그 날이었다. 연회장에서나 가끔 보던 등받이가 높은 의자의 바로 그 높은 등받이의 끝쯤에서 떨어진 사슬에 양 손이 높이 결박되어서. 긴 테이블은 마찬가지로 연회 때나 볼 수 있는 온갖 진미로 채워져 있었지만 손이 묶인 상태에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려고 했던 게냐."
"....."
맞은 편에서 느리게 식사를 이어가던 아버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포도주 잔을 기울일 때가 되어서야 그의 눈길이 제대로 아들의 얼굴에 머물렀다. 에드안의 자식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는 아들과 딸의 첫째와 막내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막내 아들인 아게로는 그가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자식들 중 하나였다. 아이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기로서니 밖에서는 신이라 불리는 그의 명령에 불복하다니. 아무래도 에드안의 본보기가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뭐 좋다. 대답을 하든 안 하든 네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그는 자식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들에게 주지시켰다. 그는 성의 보모들을 시켜 아이들에게 가끔씩 밀지를 보내 이런저렁 명령을 수행하게 했고, 자신의 명령에 불복한 아이는 죽이거나 성 밖으로 끌어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도 그는 아이들의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신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나쁜 아이는 속아냄이 옳았다. 그가 만든 세상의 법칙이 그러했으니.
"너는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을 탐한 대가를 치뤄야 한단다."
물론 이 성에서는 뿌리뽑긴 하겠지만 아게로는 에드안이 가장 정성들여 키운 회초. 언젠가는 자신이 품으리라 마음 먹은 아이였으니 기다린 것이었지만 본인이 스스로 몸을 내던지니 에드안도 장단을 맞춰줄 밖에. 에드안의 손짓에 사병들 중 하나가 아게로의 입에 재갈을 먹였다. 귀한 몸이니 재갈까지도 값비싼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어 짧은 바지 덕에 드러난 허벅지에매질이 가해지자 무거운 의자에 묶인 몸이 고통에 바르르 떠는 것이 보였다.
"읏! 윽! 으읍!"
틀어 막힌 입이지만 맨 살에 떨어지는 승마편의 날카로운 통증은 묵묵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벗어날 수 없는데도 힘이 들어가 구속구에 여린 살갖이 쓸리는 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체벌의 고통은 매서웠다. 음식에는 입도 대지 못한 채 혹독한 벌을 받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안주 삼아 에드안은 새로 채운 포도주 잔을 다시 천천히 비워갔다. 덜 익었음에도 벌써 눈에 띄는 미색이 처연하게 느껴지는 광경이 에드안의 입에는 달았다. 지금의 고통이 평생에 걸쳐 이어질 형벌의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아게로는 알고 있으려나?
6.29 - 불평등
한계를 넘어선 고통은 의식을 잠식했다. 많은 이들의 숙원으로 말미암아 오랜 시간 공 들여 준비된 탑 최초의 쿠데타는 역사가 되지 못하는 채로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 비올레는 쓰러진 동료들과 그들의 피로 점철된 전장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분하고 억울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그 밀도가 사뭇 달랐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는데 자신은 어째서 자하드를 이길 수 없는가? 동료라는 건 그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하늘의 별 같은 것일까? 라헬. 그에게 있어 첫번째 별이었던 소녀처럼 빔의 동료들은 전부 무수한 별이 되어버리는 결말인 걸까?
"역시 너도 '불사'인 거겠지, 작은 괴물."
"왜... 어째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손 대지마!!"
포화가 멎고 적막이 내려앉은 전장이라 비올레의 절규만이 대기를 찢었다. 자하드 군도 괴멸상태였지만 비올레의 동료들 중에서도 목숨이 붙어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그러했는데 라크가 마지막까지 지키려 노력한 덕인지 얉은 숨이 남아있던 쿤을 비올레보다 먼저 찾아낸 탑의 왕은 시체의 틈바구니에서 그를 끄집어냈다. 이미 움직일 수 없는 몸상태임에도 아직 그가 지켜야 할 동료가 남아있다는 걸 인지한 비올레는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깃든 불사의 힘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게 다행이라 할만한 지금의 상황을 저주하고 또 저주할 정도로.
"모든 것의 시작점은 같지 않다."
"쿤 씨..! 쿤 씨!!"
"네가 바라는 세상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면 타고난 이들의 억압은 어떻게 보상할 생각이지?"
"커헉!"
"쿤이라... 필히 네게 있어 소중한 존재겠군."
자신과 연적에게 있어 에드안이 그랬듯이, 자하드의 그릇이었던 왕난과 연적의 아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주어졌을 터. 저항 불능인 FUG의 슬레이어를 세게 걷어차 핏물을 토하게 만들고 나서도 금속성을 띨 만큼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 보던 자하드는 쿤의 목줄기를 쥐고 있던 손을 푸는 대신 반군의 수장 만큼이나 무력한 그를 품에 안았다.
"새로운 신이 된 네게 불멸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가르쳐 주마."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찾아낼 때마다 짓밟아서. 자하드가 당장 비올레의 몸을 조각낸다해도 불사신인 그는 시간이 지나면 되살아날 터였다. 신체를 부수고 또 부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배신한 친우들에 대한 분이 풀리지는 않을 터. 마음까지 짓이겨야 복수가 완성되지 않을까? 차마 포기할 수도 없도록 이렇게.
"그래야 공평한 세상이 될 테니."
6.30 - 관대함
이 곳은 전장이었다. 그리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피 냄새가 코속을 채우고 있었다. 이유는 새빨간 시계가 증명했다. 그리고 붉게 덧칠된 세계에 홀로 빛을 발하는 새하얀 인영이 바로 전장의 주인된 자.
"옛 정을 봐서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으마."
"....아.. 게로..."
"네가 비록 아비의 보물을 훔쳤다 하나 내 자식이니."
"그 애를.."
"이만하면 관대한 아버지 아니겠니."
7.1 - 여름
올 여름은 무더울 거라더니 과연 초입부터 열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집에서 나온지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입고 나온 셔츠가 땀에 젖는 것을 느끼면서도 왕난은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시원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에서 였다. 요즘 같은 때에는 나설 일이 없게 만드는 게 상도덕이건만 왜 그룹 과제 같은 걸 시키는 건지 왕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 장소인 카페까지는 15분 남짓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땀 범벅이 되어있을 게 분명했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벗어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목적지에 도착했을 주음이었다.
“어이, 쿤! 용케도 일찍 나왔네?”
“말도 마. 해 질 때까지 여기서 안 나갈 거야.”
“뭐?”
“새벽에 나왔어. 세 끼 다 브런치로 떼울 거야.”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쿤이라는 이름은 조원을 찾아야 하는 왕난을 그 자리에 붙들어 놓았다. 첫 사랑의 이름이었다. 고교 시절 먼 발치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마치 영화 속에서 처럼 처음 말을 붙여본 순간에 전학 소식을 들려주었던. 부모님의 이혼이 이유라는 걸 소문으로 건너 듣기만 했을 뿐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어 왕난은 한참을 방황했었다. 그랬던 그가 불현듯 왕난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여전히 더위에 약한 그는 친구의 인사도 받아주는 둥 마는 둥이었고, 하루 종일 카페에 있을 거라는 다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점심 대신이었을 팬 케이크가 테이블에 남겨져 있었지만, 여전히, 여전히도 눈부시게 청량해서 에어컨 보다도 먼저 왕난의 가슴으로 불어닥쳤다.
7.2 - 예의
"너 이제 아주 막 쓴다? 남의 벙커를?"
"너도 내 등대 썼잖아."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인데. 수년이 지난 빚을 이제와서 이자를 쳐 받겠다는 심보의 못난 동생은 하츨링의 벙커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안락의자를 차지하고 있었다. 휴대용 게임기로 게임을 하기에 딱이라서 애용하는 물건인데 같은 고양이과라 그런지 이복동생에게도 그 의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너라니 형님한테 예의 없게."
"형은 무슨. 넌 가문을 버렸잖아."
"그래도 내가 너보다 어른이거든? 백 살은 어린 게.."
"꼰대."
"어쭈. 요놈 오늘 예절교육 한 번 시켜줘?"
하츨링의 협박이 만만하게 보인 건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아게로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었다. 대체 왜 하츨링의 벙커에 불시에 들이닥치는 습관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생을 살다 보면 재미를 추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섭리인지라, 하츨링에게는 탑에 이는 돌풍과 같은 이복동생의 방문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타고난 유전자의 힘으로 뛰어난 외모를 기본으로 탑재한 형제들 사이에서도 아게로는 눈에 띄는 미인이기도 했고, 힘 쓰는 걸 좋아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머리 쓰는 일을 좋아해서 게임 상대로도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농담 아니거든?"
"왜 배운 척 하려고 해? 아버지 욕 먹이는 게 우리 일인데."
"와. 너 좀 천재인 듯."
하지만 그래도 나 한테 그러면 안 되지. 안락의자를 침대 삼은 아게로의 위로 양팔을 짚어 품에 가두자 가벼운 입맞춤이 하츨링의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더 가 볼까?"
"선 넘어 보자는 거야? 후회하기 없기야."
7.3 - 용기
“저.. 부디!! 쿤을.. 쿤을 다시 깨어나게 해주세요..!!”
간절한 소망의 결과였다. 이수의 곁으로 쿤이 돌아온 건. 당시 자하드에 대항할 힘을 기르기 위해 에반켈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던 밤은 쿤을 위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유리 공주의 부탁으로 길잡이인 에반이 함께 했지만 쿤을 깨우기 위한 여정은 쉽지 않았기에 2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이수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쿤이 눈을 뜨는 순간에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은 밤이라는 걸. 그리고 이수도 항상 밤과 쿤, 그리고 라크가 함께하길 바랬다. 그들을 잇는 특별한 유대감엔 이수가 끼어들 틈 따위 없다 여겼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공주의 곁엔 왕자가 있는 것이 어울린다고.
“또 따로 가자고? 조심했다고는 하지만 너희의 얼굴을 아는 자하드군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흠.. 그 말은 맞지만 추격을 따돌리려면 여러 무리로 나뉘는 게 좋지 않을까? 적의 시선도 분산되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쪽의 전력이라봐야 말썽쟁이 공주 둘인데 미덥지가 못하단 말이지.”
“그래도 우릴 버리기야 하겠어? 자주 연락할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쿤.”
이렇게 생각해 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기쁘고, 눈치채지 못하는 차에 이름이라도 한 번 더 불러보고 싶은 이 감정이 우정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상황에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고. .....꼭 더 높은 곳에서 보자.”
“우하하, 당연하지. 저번처럼 추월당하지 않게 조심하라고.”
마음을 꺼내 놓을 용기가 없는 이수에게는 감정을 외면당할 용기 또한 없는 게 당연하므로.
“.....할 말은 그게 다야?”
“엉?”
“아무것도 아냐.”
용기도 없는 것이 눈치도 없어서야. 작별인사를 끝으로 돌아서는 이수의 등에 대고 쿤은 혼자 혀를 찼다. 하긴. 용기가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뭘 더 어쩌겠는가? 다음에도, 이 다음에도 안부는 물어볼 필요가 없게끔 그가 눈 앞에 있어주길 바랄 밖에.
7.4 - 버스
“지옥열차가 있었으니까 지옥버스도 있는게 당연.. 하려나?”
승탑 시험을 치르려면 반드시 저 지옥버스를 타고 시티투어를 마쳐야 한다는 이 층의 룰에 따라 일행은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지옥버스라는 이름이 왜 붙게 된 건지 모를 만큼 내부가 평범해서 앉을 자리를 정하고 출발할 즈음엔 소풍이라도 떠나는 기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연히 밤이나 라크의 옆자리를 택할 줄 알았던 쿤은 엔도르시에게 밤의 옆자리를 빼앗긴데 이어 아낙이 가져온 군것질 거리에 온 정신을 가로채인 라크 덕에 빈 자리에 않아 조용히 지나가는 풍경을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결국 그의 옆자리가 하츠의 차지가 된 걸 알면 시비부터 걸겠거니 했는데 조용하기만 하니 외려 하츠는 불안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눈썹의 그늘이 얇게 깔린 눈동자는 저 먼 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뭔가 신기한 광경이라도 있나 싶었으나 하츠의 눈에 들어온 것 중에는 특이한 것이 별로 없는데.
“왜 자꾸 멍때리냐.”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생각?”
“별 거 아니야.”
오랜만에 두 사람이 나누는 차분한 대화에 시끄러웠던 버스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이 쪽을 보는게 당사자인 하츠에게는 당황스러울 뿐이건만 또 다른 당사자는 여전히 다른 세상 여행 중이다. 무슨 일이냐며 손짓 발짓으로 묻는 동료들에게 떠밀려 안 돌아가는 머리를 있는데로 굴려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게 딱 하나 있었다.
“자하드의 공주라는 네 누나 일이냐?”
네임헌트 정거장을 나오기 직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떠올린 것 자체가 스스로도 놀라웠기에 예기치 않게 의표를 찔린 쿤도 조금 놀란 듯 했다. 물론 그 표정을 마주한 하츠는 더더욱 놀라게 되었고.
“그러니까, 저.. 그, 혹시.... 따라갈 거냐?”
버스 안의 그 어떤 대화보다도 흥미로운 소재에 승객들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하츠의 귀에도 들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되돌리며 쿤은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왜 모르...”
“하지만 반드시 물어봐야 할 건 하나 있지.”
왜 너는 내게 같이 가자고 얘기하지 않았냐고.
7.5 - 시련
잠깐만. 그 잠깐이 세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쿤의 침대에 팔짱을 끼고 앉은 화이트는 볼 수록 가관인 눈 앞의 풍경에 이제는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FUG든 다른 어떤 무리에서든 무리를 이끄는 리더는 찾아보기 힘든 자질이었다. 화이트와 같은 슬레이어들도 손에 꼽히는 강자였지만 원로처럼 힘이 강하지 않더라도 판을 짜고 읽을 줄 아는 자들에게 이미 몇 번을 놀아났던가? 때문에 화이트는 먹잇감이나 다름 없는 선별인원 조무래기들이었지만 어울려주는 동안 쿤에게 관심이 갔더랬다. 고귀한 피를 타고나 그 피의 주인을 꺾는다는 야망을 꿈꾸는 점도 그와 같았고 여러모로 화이트에게는 없는 면을 가진 자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진두지휘를 위해 정보를 모으고 고민하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문제는 그 밖의 조무래기들이랄까?
“식량이 떨어졌다, 파란 거북이!”
“삭량이 아니라 네 바나나겠지. 우린 지금 전쟁 중이라고. 틈이 생길 때까지 참아.”
“쿤, 혹시 하츠 못 봤어?”
“못 봤는데.”
“그럼 어디갔지? 또 혼자 수련하려 갔나. 아! 엔도르시가 연락 했는데 다음에 니들 좀 새로 사서 보내달래.”
“걔 무기를 왜 내가 사?”
“아무튼 난 전했다.”
“야, 십이수!”
“10가문끼리 비밀 회의라도 하는 거야?”
“둘이서 무슨 회의. 넌 또 왜 왔어?”
“다음 수를 들어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번엔 네가 알아서 해도 좋은데, 길잡이씨.”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밤이 나한테 휘둘리는 건 싫다면서.”
“어차피 FUG와 자하드군의 전쟁이야. FUG가 전력을 다 해서 밤을 지켜주면 좋지.”
이렇게 여러 사람이 수시로 그의 방문을 두드려 쿤의 일을 방해하는데 제대로 된 작전이 나오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걔 중에서 제일 기가막힌 것은 조무래기 무리의 유일한 대어였다.
“쿤 씨, 잠깐 쉬시면서... 화이트 씨는 왜 여기 계신 건가요?”
“하아... 첩첩산중이군.”
비선별인원이자 FUG의 슬레이어 후보라는 녀석은 쿤의 방에 있는 화이트를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한시적인 협력관계라지만 두 사람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밤은 거리낌 없이 타인을 희생시키는 그를 악인으로 정의했고, 화이트는 동료를 지킬 힘 조차도 윤리에 매여 쓰기 어려워하는 그를 아둔하다 일컬었다. 작금의 잔투에서도 결과적으로는 화이트의 협력이 없었다면 동료들을 죄다 잃을 판국이었으면서 제일 친한 친구 랍시고 쿤과의 대화조차 막을 심산이던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야, 밤?”
“아, 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간식을 좀...”
“네놈들의 간식같은 단과자는 쿤의 입에는 맞지 않을텐데.”
“보지도 않고 무슨 소리야.”
“불량식품을 좋아라하는 입맛이라면 볼 것도 없지. 짐이 그깟 간식보다 훨씬 감미로운 영혼의 맛을 보여주마.”
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슬슬 다가오는 기척이 있던 화이트가 입을 맞춘 것이다. 이성적인 편인 쿤 마저도 화이트의 돌발행동에 머리가 굳었는데, 그보다 훨씬 감정적인 생물인 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 대담하게 쿤의 입안을 헤집어 놓으며 화이트는 그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착실히 받아챙겼다. 하찮은 떨거지들이 그를 방해한다면 자신은 더 확실한 시련이 되어주지. 그리 마음 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