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글감 2020.10.16 - 25
신의 탑/하루 글감
10.16 - 눈물
밤은 부은 눈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부러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동료의 태반을 잃은 험난한 전투였다. 상처뿐인 승리와 오히려 더 커진 상실감에 살아남은 이들도 비통함에 빠져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밤의 상태를 살피러 와 줬을 법도 한데 아무도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괜찮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을 테니까. 거울 속에 비친 밤의 몰골도 썩 괜찮아 보이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남은 동료들을 위해 먼저 일어나 보이기로 마음 먹은 밤이 첫 발을 내딛었다. 같이 아침을 먹자는 밤의 말에 만나는 누구든 밤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밤 역시도 그들을 마주 안을 때마다 울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감정이 희석되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그리고 괴로운 의식의 마지막 순간. 밤은 닫혀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좀 괜찮으세요, 쿤씨?"
"응."
밤의 동료들 중 유일하게 쿤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간의 여정에서도 무슨 일이든 담담하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였던 쿤이므로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지긴 했다. 괜찮다 했어도 수척해진 듯한 옆 얼굴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지난 밤에 자리에 누운 적도 없는 것처럼 침대가 단정했다.
"...주무시긴 한건가요?"
"응."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세요. 아침 드시러 오세요."
"그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 먼저 간 사람들의 유일한 흔적이 살아남은 자신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탈력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쿤을 밑으로 끌어 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슬픔이란 터져나오는 눈물이나 가슴을 찢어놓는 고통이 아니라 극한의 허무와 무력감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조금 편해진다고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자신의 선택인데 고작 울음 한번으로 털어낼 수 있을 리가.
10.17 - 농담
"아버지가 머리 묶어 줄까?"
아게로는 방금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그 자리에서 수십번을 곱씹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온 김에라고 쳐도 누이나 사촌동생이 아닌 아들인 자신을 찾아온 것도 신기한 마당에 손수 머리를 묶어 주겠다니. 농담이라 쳐도 있을 수 없는 일 같았다. 쿤 에드안이 자신의 자식들과 농담이라니, 아무렴. 차라리 머리를 묶어주는 척 하다가 아게로의 머리를 뽑아버릴 속셈이라 보는 편이 훨씬 신빙성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아게로가 넋이 나가버린 것을 긍정의 침묵으로 받아들인건지 에드안은 손끝을 갈퀴빗삼아 아게로의 머리카락을 모아 쥐었다. 이래뵈도 자신의 장발을 정리하는 건 스스로라는 가주의 여상한 대화는 아게로를 점점 더 혼돈으로 몰고갔건만.
"너는 정말 나를 닮았구나."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에는 의미가 없었을지라도 그 한 문장만큼은 분명히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거울면으로 마주한 시선이 아게로가 익히 아는 가주의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끈을 리본형태로 마무리 지으며 예상보다 훨씬 능숙하게 그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꾸나, 아게로."
10.18 - 엇갈리다
"......."
세상에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가끔 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마지막 문을 열기 전, 그 앞에서 오랜 친구를 맞는 미소로 그들을 맞는 왕난을 보며 쿤은 그리 느꼈다. 수많은 엇갈림이 우릴 이 곳으로 이끌었구나, 하고. 그 엇갈림의 이름이 운명이었구나, 라고.
10.19 - 에너지
에반이 유리 공주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씩 하는 질문이 있다. 대체 그녀에게서 어떤 '길'을 보았기에 그녀를 떠나지 않는 것이냐고. 가히 파괴왕이라고 불러도 좋을법한 하 유리 자하드를 두둔할 마음 같은 건 에반도 일절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다. 여하튼 에반은 믿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다른 자하드의 공주라는 사실만큼은.
10.20 - 모든 순간
"그거 알아, 유제? 실패로부터 무언갈 배우지 않으면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렇군요."
"이번엔 반드시 가람의 마음을 돌려놓겠어!"
"2487632번만에 깨달으셨군요. 그래서 뭐가 달라진 거죠?"
"옷을 입었지! 가람은 나의 야성미가 부담스러웠던거야."
우렉이 기억하지 못할 뿐 뭔가 걸치고 갔던 적도 있었으니 그것이 주요한 원인이진 않겠으나 어차피 그는 유제의 조언이 먹히지 않을 사내다. 죽음의 층에서 또 다른 비선별 인원과 가람을 만난 이후로 어떤 희망이 생긴 것인지 우렉은 줄기차게 그녀를 찾아갔지만, 대체 그가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가람은 여전히 매몰찼다. 오늘도 실패의 눈물을 삼키며, 아니 질질 울면서 돌아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이런 남자가 현재 탑 최강의 사나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자하드의 공주가 하는 말도 듣지 않는 분께서 제 조언을 귀담아 들으시진 않겠지만... 그 분이 원하는 일을 해 줄 게 아니라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조건이 붙어있는 연애를 넌 진짜라고 생각해? 목적을 위해서 감정을 죽이는 게 아니라?"
"......생각이 있긴 하시군요."
"그리고 난 그런 녀석이 있어서 탑이 엉망이라고도 생각 안 해."
우렉이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자하드는 탑의 왕이었다. 우렉은 그 순간에도 탑이 흥미롭고 신기했기에 시간을 들여 탑을 올랐던 것이고. 완벽한 세계란 없다. 탑 밖도 그러했고 여기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선택이 세계의 모습을 만들 뿐. 그렇기에 세계를 바꾸려는 선택을 한 가람도 존중하지만 각자의 선택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우렉도 존중 받고 싶었다. 우렉이 모든 순간의 그녀를 사랑하듯이.
10.21 - 연휴 첫날
다른 사람들은 연휴라고 하면 어딘가로 놀러갈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아게로는 예외였다. 식구가 많다보니 챙겨야할 집안일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연휴 첫 날부터 아직 고3인 막내동생의 과외 명령이 떨어졌다. 이대로면 그 놈의 귀차니즘 때문이 대학 진학을 못할 위기라는데 듣다보면 기가 차는 이야기였다. 아니, 귀찮다고 누워만 있는 그 버릇을 진즉에 고쳐놓던가 그러질 못하겠으면 아예 다른 진로를 찾게 했어야지 왜 이제와서 공부를 시키려 난리를 치냔 말이다. 사회초년생한테 이 연휴가 얼마나 귀한데! 반면 형의 첫 연휴를 빼앗은 막내는 아게로를 보고도 손 한번 들었다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뭐, 란 치고는 굉장한 성의의 표현이긴 하지.
"일어나. 너 공부시키라잖아."
"하기 싫잖아. 너도 누워."
"야."
"이번 시험은 읽어보면 되잖아."
"읽기만 하지 말고 문제도 풀고 답안지도 써."
"귀찮게..."
"란."
"하면 뭐 해줄건데."
"잔소리 안 들으면 됐지 내가 또 뭘 해줘."
푸른 머리카락, 푸른 눈동자, 새하얀 얼굴. 똑같은 색에 생긴것도 비슷한데 아게로는 거울 속의 란과는 전혀 다르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귀찮은 것도 잊게 될만큼.
"밥이라도 사 준다거나 그런 거 없어? 어차피 과외비 받을 거잖아."
"그쯤이야. 그럼 이렇게 하자. 평균 70점은 분식, 80점은 백반, 90점은 비싼 거."
"100점은?"
"그럼 너 먹고 싶은 거."
"콜."
"어후. 다 큰 녀석이랑 내가 뭐 하는 거람."
아직 다 안 컸는데. 그 얘기를 입 밖에 냈다가 기어코 한 대 맞은 란이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시간이 그는 좋았다. 이제 또 이런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한번 더 힘 내 봐야지.
10.22 - 심심하다
유독 심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부유선을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라크와 어울려 줄 인물이 없었다. 밤과 하츠는 수련을 한다고 하고, 이수는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는 친구들의 보고를 모으고 필요한 부분을 다시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엔도르시와 아낙은 이미 부유선을 탈출해 쇼핑을 나갔고, 쿤 마저도 자리를 비웠다. 그 동안 모아두었던 바나나는 금방 동이 났고 사냥감이 없는 수련은 마음에 차지 않았던 라크는 결국 매드쇼커를 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자신도 모험을 해 보기로 했다. 엔도르시나 아낙을 찾아가봤자 괴팍한 공주들의 등쌀에 아무것도 못할테니 파란 거북이를 찾아내야겠다. 스스로에게 주는 미션 설정이 끝나자 씩씩하게 꼬리를 흔들며 라크는 출발했다. 찾아내면 오늘 먹은 만큼의 바나나부터 받아내야지!
10.23 - 영향
10가문의 가주들처럼 아주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 온 이들은 예지와도 같은 예견을 할 수 있다고들 한다. 에드안도 그러했다. 그는 한 눈에, 드디어 자신에게 닿을 도전자를 알아봤다. 적당한 계기와 힘을 기르는 동안에 죽지 않을 힘. 그는 아게로가 그것을 인식하든 아니든 꼭 주어야 했던 모든 것을 쥐어주고 풀어놓았다. 에드안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소중한 기회를 그러다 놓치는 것이 아니냐 물었지만 에드안은 그들의 걱정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손 내밀면 언제든 쥘 수 있는 아이템 같은 건 그리 아깝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닿지 못한다면 에드안이 잘못 본 것일 뿐이고, 기어코 그의 눈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두 팔 벌려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아게로는 이미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의 시선을 느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체득하고 있을테니.
10.24 - 고독
제왕이란 가장 고독한 자리라 했던가. 옛 친우의 선전포고를 전해듣고도 탑의 왕은 감정의 변화를 일절 보이지 않았다. 10가주라는 신분으로 곁에 머문 자들이라 한들 마음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걸 왕은 모르지 않았다. 탑의 새 역사를 쓰던 시절의 치기어린 우정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만큼 퇴색되었는데 그 옛날의 약속이라고 영원할 리가. 꿈을 꾸듯 첫사랑까지 버리며 쌓아올린 이상이 이제 슬슬 현실 앞에 무너져 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념으로 꿈을 지킨 탑의 마지막 왕. 침몰하는 쪽이 결정되었다해도 지금 포기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최후의 수호자는 탑의 왕, 자하드 밖에 남지 않을 테지.
10.25 - 빈 방
비어있다는 건 굳이 불을 밝혀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쿤은 자신이 열어젖힌 문틈이 만든 빛 자국을 지우고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곧게 뻗은 문 틈의 흔적을 몸으로 지우면 빈 방은 완연한 어둠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되었다. 아무도 없다해서 특별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쿤은 이대로가 좋았다. 이미 비어있기에 배신할 것도 배신 당할 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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