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Track 02

신의 탑/Exceptional

























방송에 오래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연예인의 눈부신 미모가 쉽게 빛바래지는 않을 터. 식당의 종업원들은 루프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를 향하고 있는 중년의 커플을 흘깃흘깃 곁눈질하기에 바빴다. 비싼 자리를 예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너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빗겨간 듯 잔주름 하나 없는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군더더기 하나 없이 피팅된 수트의 모양새까지 완벽하게 연예인.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인의 다갈색 머리와 중년 신사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에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식당은 소란스러워졌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쪽은 예약석이라 이미 다른 손님이 계세요.”

“내가 밥 먹겠다고 했냐? 그 손님한테 볼 일이 있다잖아!”

“그럼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릴 테니 잠시 저쪽 테이블에...”

“야, V!!!”

코트의 앞섶을 다 풀어 헤친 걸로 보아 추위를 그렇게 타는 체질도 아닌 것 같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무언가로 감싼 괴한은 그 수상한 차림새에 입구부터 막아서는 종업원들을 억센 손으로 뿌리치며 기어코 식당 안쪽으로 발 하나를 들였다. 종업원의 수가 좀 되는 곳인지라 곧 2차 저지선에 다시 붙잡히긴 했지만 190은 족히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완력에 젊은 장정들이 외려 진땀을 뺐다.

“....에드안?”

식당에 소란이 이는 와중이었으니 그림같은 잉꼬부부의 저녁식사도 당연히 순탄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 신사 덕에 종업원들은 수고를 덜었다.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아봤다는 게 그리 즐거운지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V를 반기는 모양새가 퍽이나 기뻐 보였다. 물론 얼굴마저도 마스크에 선글라스, 넥 워머를 하나 더 낀 상태로 가발에 후드까지 뒤집어써 그의 부모가 온다해도 알아볼 성 싶지 않은 괴상한 몰골이라는 게 문제였다. 코트 안쪽에 모자가 달린 조끼를 껴 입고 바지인지 롱스커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옷으로 발끝까지 감춘 옷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코트. 그 와중에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맨가슴을 드러냈으니..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기 전에 정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가 염려되는 차림새의 에드안을 보니 오랜 친구라는 V조차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곤란한 것은 식당의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괴한으로 인하여 그들이 궁금해하던 왕년의 슈퍼스타, V의 정체를 속 시원히 알게된 것은 좋았지만 기괴한 차림의 거한이 쿤 에드안이라니. 글로벌 대스타의 방문에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것이 원래의 수순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차림새가 아니라 부탁한 쪽이 더 민망해 질 것 같았다. 본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 큰 덩치로 방방 뛰며 V를 반기는 걸까?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일단 좀...”

“나 좀 숨겨줘, V!”

“........ 뭐라고?”

오랜만의 데이트를 방해받은 아를렌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에드안이 싹싹 빌 때까지 패 놓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꾹꾹 눌러참으며 남편과 불청객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는 건 과거의 빚이 있어서다. 양가의 반대를 무릎쓰고 맨몸으로 집을 나와 혼인신고를 하고 한국을 떠났을 때, 두 사람이 묵을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 에드안이었다. 집은 물론이고 그가 생활비까지도 지원해 준 덕에 두 사람은 양가의 허락을 얻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고, 외아들인 밤도 무사히 낳을 수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고작 데이트 한번 망쳤다고 타박하기는 그렇고 정말 그가 사기라도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찾아온 것이라 해도 한국에서 머물 수 있게 보살펴 주는 것이 도리겠지마는 천하의 에드안이 사기 같은 걸 당할 리가. 숨겨달라고 하는 이유가 빚쟁이가 아니라면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걸맞는 치정극 중이거나 몰상식한 경제활동의 대가로 원한을 가진 이가 뒤를 쫓고 있어야할 텐데 V에 비해서 그를 잘 모르는 아를렌이 생각하기에도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다. 애초에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저 괴상한 옷차림부터가 아를렌의 상식을 아뜩히 뛰어넘어 있었다. 아를렌과 같은 이유로 차마 나무라진 못하고 있어도 그녀의 남편 또한 지금 머리 속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아게로가 내가 한국에 온 걸 알면 안 돼.”

“아...”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저 멀리서 암레스트에 턱을 괸 채로 남편과 옛 친구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아를렌도 알겠다는 뜻의 탄성을 터뜨렸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부부의 외아들과 같은 그룹 소속으로 아이돌 활동 중인 에드안의 아들. 그 도련님이라면 에드안의 기행도 전부 이해될 수 있었다. 어째 이번엔 조용히 한국에 넘어왔다 싶더라니 또 에드안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 모양이다. 물론 아버지 못지않게 비상한 수완을 가진 아게로라면 작정하고 에드안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을 정상급 아이돌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데 기력을 낭비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비행기에서든 공항에서든 벌써 에드안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보냈겠지.

“에디. 일단 그것 좀 벗고 같이 식사라도 할까? 어차피 내가 이름을 말한 마당에 변장은 소용 없을 것 같은데.”

“헉! 그럼 어떻게 하지?”

“그 쪽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아게로군은 아이돌 가수니까 괜찮을 거야. 그 애 성격에 네가 움직이는 걸 알았으면 공항에서 이미 마주쳤겠지.”

“그런가... 설마 방송에 칼 들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칼? 아니, 일단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법에 저촉되는 일인 걸. 아게로군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 그런 게 허락되는 방송엔 못 나오잖아?”

운전면허야 곧 딸 수 있게 되겠지만 국내 법으로 성인이 되려면 아직 1년은 더 기다려야 할테니 에드안이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도 쿤이 흉기를 들고 방송에 나올 일은 없을 터다. V의 말에 납득한건지 에드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넥 워머와 마스크만 턱 밑으로 내렸을 뿐 변장을 아주 풀어 헤치지는 않았다. 한국은 인스타의 나라라는 걸 이미 조사하고 왔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이 부부의 데이트는 포기하고 에드안에게도 한 자리를 내어준 아를렌은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인 에드안의 몰골에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곤란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걸 가게 앞에 세워두는 건 더 문제니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에드안?”

시선 처리가 곤란할 뿐이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아를렌은 에드안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돌직구를 날렸다. 물 한모금 마시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V보다 담담한 반응의 에드안은 선글라스 속의 시선을 유리 와인잔의 수면으로 떨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

“자존심 같은 거 때문이겠지.”

“....그 꼴로?”

“아를렌.”

“흥. 모양새가 다 무슨 상관이야. 뭐라도 했다는 게 중요한거잖아.”

절제라는 걸 알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틀어질 부자사이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번엔 아를렌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에드안의 말처럼 지금은 행동할 때다. 자존심 따위의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도 두려운 거겠지. 이미 두 번이나 겪어봤으니 일이 벌어진 다음의 후폭풍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 터다. 아를렌은 잠시 눈을 감고, 먼 이국 땅에서 그녀와 V를 맞아주던 시절의 에드안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보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그는 야생마 같은 사내였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과 똑같이 바보 같고 똑같이 어리석었기에 더 행복했을 그를 생각하면 그녀 역시도 어쩔 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




익셉셔널의 정규 3집 활동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국내 팬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그들의 화려한 컴백을 반겨주었다. 정상급 아이돌의 증거라는 음원차트 줄세우기부터 이미 뜨거운 반응은 예고 되었다. 국내의 모든 음원 사이트의 1위부터 12위까지를 이번 앨범의 수록곡으로 채운 익셉셔널의 인기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어느 가게에서나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악으로 존재감을 다졌다. 최근의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컴백 쇼케이스와 특정 플랫폼의 사전 방송을 건너뛰었음에도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게스트를 초대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TV와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쇄도하는 출연 요청에 방송국의 전 스튜디오 순회라도 나서야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는 벌써부터 휴식기를 노리고 밤에게 드라마 촬영 제의마저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만하면 익셉셔널의 출연에 전 PD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비올레의 솔로 곡이 실물 앨범 특전 수록곡이라는 소식에 팬들의 성토가 쏟아졌지만 3집 음반이 날개돋힌 판매량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기획사든 유통사든 상술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 질 것 같다.

“어? 쿤씨는 같이 출연 안 하나요?”

“아직은 미성년자니까 심야방송 출연은 좀 그렇지. 쉬는 건 아니고... 너 그 때 라크랑 같이 다른 쇼 프로 사녹 있어.”

“악어랑?”

“악어.... 걔가 왜 악어냐?”

“보자마자 떠오르지 않아?”

“그런가....? 요즘 애들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여하튼 이제 이번 주 스케줄은 대충 알겠지? 이번 주도 화이팅 하고. 내가 있다가... 9시쯤 데리러 올테니까 옷 갈아 입고 헤어체크 받고 기다려.”

요즈음 아이돌 치고는 드물게 정규 앨범으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데뷔 2년 차에 3번째 정규 앨범이라는 것도 빠른 편이지만 데뷔부터 인기몰이를 했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숨가쁜 활동이 전혀 이상하진 않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시작부터 팀의 가장이었던 비올레가 여러 연예활동에 매진하며 성과를 올려 주었고 다른 멤버들도 뒤를 이었다. 그나마 개인사도 복잡하고 나이 때문에 방송 활동에 일부 제약이 있는 쿤만이 익셉셔널 이외의 활동이 없다시피 했는데, 조만간 모국 기준으로는 법적 성인이 되니까 휴식기에 접어든다고 해도 섭외 요청이 쇄도하지 않을까? 일단 미끼는 던져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 바닥의 특징이니. 활동이 있는 아침에는 거의 항상 숍에 들러서 정비를 받긴 하지만 오늘은 어제 저녁에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나오는 게 늦어서 일부 순서를 좀 뒤집었다. 그래서 더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벤에 올라타면 또 다들 깊은 잠에 빠진다. 물론 라우뢰처럼 그런 것과 아무 관계 없이 늘상 수면상태를 갈구하는 인물도 있긴 하지만.

“저기 쿤씨.. 주무세요?”

“아니? 왜?”

“엊그제 유 실장님이랑 무슨 얘기를 하셨나 해서요.”

“아..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네?”

“지금은 잘 해결 됐어.”

“진짜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의 밤이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밤의 귀여운 표정에 쿤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귀여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환경상 쿤은 귀엽다는 칭찬은 받아본 일이 거의 없이 자랐다. 작고 앙증맞을 시절부터 귀여움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성인이 가까워 온 지금에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귀여움이라는 건, 혹은 애교라는 건 사랑받고 자라온 사람들이라는 증거 같은 거라고 쿤은 생각했다. 그저 맛만 본 정도인 자신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무언가를 밤이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부럽다.

“응.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무슨 사고를 치셨던..? 건데요?”

“그 말은 좀 이상하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실장님 호출이라고 해서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물론 밤도 말을 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쿤이 짚어주니까 부끄럽고, 그 분위기 대로 쿤이 대답을 회피할까봐 억울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겉으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고 해도 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어울려 주고 있던 쿤이 이런 사건들을 빌미로 활동을 그만 두겠다고 할까봐 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쿤은 밤의 걱정을 몰랐으면 싶다가도 막상 진짜 모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면 이렇게 억울해져 버리는 자신을 밤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언제 말똥말똥 귀여운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이 쿤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을 들이미는 통에 정말로 놀란 쿤은 밤의 얼굴을 일단 밀어냈다.

“잘 해결 됬다니까. 그래서 이렇게 같이 활동 중인 거 아냐.”

“에드안씨가 정말로 위약금 물고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었어요?”

“뭐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였어?”

“아니요! 왜 그렇게 큰 일을 얘기 안 했어요?”

“안 한게 아니라 못 한거지. 스페인에 가 있을 때 알았고 그 길로 뛰어왔는 걸.”

“그럼 이제 괜찮은 거에요?”

“응. 어차피 곧 성인이니까 생일 지나면 바로 계약서 다시 쓰기로 했어. 혹시 모르잖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쿤 씨의 본가는 아르헨티나에 있지 않던가요? 스페인쪽으로 자주 가시네요?”

“국적이 거긴데. 난 어머니쪽 성을 쓰잖아?”

“그런 거였어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고 눈으로 이야기하는 쿤을 보니 할 말도 없고 머쓱해진 밤은 머뭇머뭇 쿤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집안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쿤이 싫어하니까 못 한 거지만 지금 시시비비를 가려 무엇할까? 일이 잘 해결 되었다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지. 밤이 납득한 분위기가 돌자 쿤도 곧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예민한 그 답지 않게 최근에는 잠을 잘 자고 있는 편이지만 과로로 입원까지 했던 몸이라 아직 피로한가보다. 졸다보니 자연스럽게 밤의 어깨에 기대는 쿤의 머리를 받혀주며 밤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결과적으로 밤이 그를 위해 한 일은 아직도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만 쿤이 스스로 밤의 곁에 남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벅차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성격에 정말 한국에서의 아이돌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에드안을 핑계로 우선은 이 팀을 빠져 나갔을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랑 비슷한 건가?’

앉은 채로 키를 가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의 어깨얹힌 눈부신 색채의 머리통을 보며 밤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의 성장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쿤의 나이가 더 어린만큼 곧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테니까 말이다. 촬영을 할 때는 정해진 배치가 있고 또 그 배치를 따라 갔을 때 전체 그림이 좋게 나오도록 여러장치를 하기 때문에 당장의 실제 키를 가늠하긴 어렵다. 에드안이 장신이라더니 유전자의 힘인지 쿤은 처음 팀에 힙류할 시점부터도 나이에 비해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한번 앞지르고 나니 따라 잡힐까봐 신경이 쓰이게 된 밤이었다. 솔직히 너무 남자답게 자라서 밤이 좋아했던 모습이 전부 사라지면 어쩌나를 걱정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의 쿤은 너무 말라서 그런 걱정은 아예 잊어버렸다. 그래도 따라잡히는 건 싫으니까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키를 키워야지. 애초에 다른 사람의 성장을 밤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였고 그럴 방법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보니 밤의 걱정은 기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밤의 첫사랑일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의 사랑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 모르겠네..’

키는 지금 정도의 차이가 딱 좋다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쿤이 더 크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활동이 이어지는 동안은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고있는 만큼 밤은 쿤의 몸 상태가 제일 걱정이었다.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쿤의 어머니도 쌍둥이 누나도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기에 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걱정이 앞서곤 했다. 쿤은 아버지 쪽을 많이 닮았다고 하고 그 아버지 되는 에드안은 아직까지 물 건너의 연예계의 패왕이라지만 어머니쪽을 본 적이 없으니 다들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이야기 하는 건지도 모르잖는가?

“올레야, 이제 애들 좀 깨워라. 거의 도착 했거든?”

여하튼 밤이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은 오늘도 길지 않았다. 3집 활동은 이제 시작이다. 요즈음은 한 곡의 활동이 길지 않지만 그만큼 더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힘을 내서 어서 해치우고 다시 숨 돌릴 틈을 얻어야지. 아이돌의 주말은 그렇게 얻을 수 밖에 없으니까.




-




에드안은 결과적으로 V와 아를렌의 집 손님방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밤이 본가로 돌아올 일은 당분간 없을테니 에드안이 무리하게 외출을 강행하지만 않으면 한국에 있어도 쿤에게 들킬 염려는 거의 없는 셈이었다. 남은 문제는 에드안이 과연 자기 성질을 얼마나 죽일 수 있느냐.

“에디, 마스체니한테는 이야기를 잘 하고 온 거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어차피 요즘은 안 좋을 때야.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걸.”

“그럼 아게로군이 더 힘들어 지는 것 아냐?”

“그래서인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 내가 직접 찾아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겠다는 거야? 대단하네... 우리 아들도 그런 건 좀 배웠으면 좋으련만.”

“넌 왜 아들을 못 쫓아내서 안달이냐. 자식이라봐야 하나 밖에 없잖아.”

“내 쫓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단력이 있다던가 심지가 굳다던가 하는 말들이랑은 거리가 멀거든 애가.”

자식을 상대로나 아내를 상대로나 팔불출 소리 듣기 딱 좋은 성격의 V가 왠일로 아들에 대한 푸념을 한다 했더니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는 흐름이다. 에드안이 아는 밤도 확실히 누가 등을 떠다 밀기 전까진 혼자 결정을 못하고 우유부단한 편이지만 어머니를 닮아서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밤이 아게로 같이 판단을 내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독불장군이 따로 없을텐데 차라리 지금이 낫지 않으려나? 여하튼 밤의 단점이 ‘우리 아들은 심성이 너무 고와서 말이야..’로 시작되는 아들 자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별 생각 없이 들어주며 에드안은 차 대신으로 V가 내어온 레드와인을 홀짝였다. 일단 친구의 취향을 잊지 않아준 것 까진 고마운데 아를렌이 없었다면 안목은 싸구려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친구답게 그렇게까지 고급스러운 풍미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도 물어봤지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만날 거야. 먼저 어떻게든 설득을 좀 시키긴 해야겠지만.”

어떻게든이라고 하는 걸 보니 계획 없이 일단 한국에 와서 생각하자는 식으로 무작정 입국한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만, 변장이랍시고 걸쳤던 괴상한 옷 더미를 풀어놓은 에드안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표정을 지운 그 얼굴을 언제 봤었는지 떠올린 V는 허점을 찌르려다가 그만 두었다. 평소의 가벼운 분위기가 사라졌을 때의 에드안은 실로 위험한 남자였다. 물론 V가 두려워 하는 건 그의 힘이나 권력을 이길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될까? 사정을 알아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달쯤 전에 아게로가 갑자기 쓰러졌었어. 아주 늦은 시간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발견했지. 뭐, 진탕 마시고 들어오다 문을 잘못 연 것 뿐이었지만 여하튼 운이 좋았어.”

“설마..”

“맞아. 그 설마지. 난 당장 입원시키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위험하니까. 그런데 아게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보다 본가에 붙어있는 게 더 싫었던 모양이야.”

“곤란하네.. 그러고 바로 한국으로 와 버린 거지?”

정확히 잘잘못을 가리지면 아게로가 본가에 있을 때 마저도 허랑방탕한 모습을 보인 에드안도 문제였겠지만 그것부터 나무라면 큰 맥을 짚을 수가 없다. V 내외의 외아들인 밤의 친구이기도 해서 그도 꾸준히 안부를 묻곤 했던 에드안의 아들이니 모르는 척 하기도 어렵다. 아니 그 전부터도 어쩌면....

“밤한테 연락이 닿으면 아게로군을 초대하라고 얘기를 해 볼게. 답답하겠지만 그 때까진 여기에서만 지내는 게 좋겠어. 들키면 안된다고 네 입으로도 얘기했었잖아?”

“으... 언제쯤 네 아들한테 연락할 수 있는데?”

“문자야 당장 해 보겠지만 애가 워낙 바빠서 말이지.. 이번 활동이 끝나야 하니까 한 한달쯤 걸리지 않겠어?”

“한달이나 걸린다고?!!!”

“네가 아게로군이랑 대화에 실패하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윽..”

“잘 생각해봐, 에디. 한달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야. 네가 좀 믿음직한 이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는게 아게로군을 설득하기엔 더 나을 거 아냐. 네가 변하지 않는데 아게로군이 본가에 돌아가려 하겠어? 그 집에 진짜 가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너 밖에 없는데 네가 잘 해야지.”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어 에드안의 머리는 V의 말이 길어질 수록 점점 더 깊이 숙여졌다. 에드안에게 아게로가 필요한 것이지 아게로는 아버지라면 학을 떼니까 노력해야 하는 쪽이 에드안이라는 건 정해진 사실이다. 다만 불리한 관계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 에드안의 본능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겠지. 긴 한숨을 푹푹 뱉어내긴 해도 에드안은 끝끝내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게로마저 없어지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곁에 있으면 그나마 눈으로 확인 하면서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참는다고 해도 기약이 없으니 그게 문제지.

“한 달만 참으면 될까? 네가 잘 말해주면 아게로도 마음이 풀릴까?”

“솔직히 네가 지금까지 해댄 게 있으니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이야기할 마음 정도는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는 안 돼! 난 더 힘들더라도 성과가 좋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그게 다 네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잖아, 에디. 그 애와 무슨 이야기를 할 지 고민하는 데 한달 정도는 써야하지 않겠어? 그런데 대체 아게로군이 뭐라고 했길래 당장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 찾아오면 눈 앞에서 죽어버릴 거라고 했어.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못 할 것 같냐고.”

“...하.. 하하.... 무시무시한 협박이네..”

“걘 진짜 한다고! 쥐방울만할 때도 봐. 내 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한마디 했다가 정말 너희 집으로 가출 했잖아.”

생각해보니 V도 아게로의 결단력을 부러워해선 안될 것 같다. 밤은 지금의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을 고쳐쓰며 V는 드디어 한달간 모범적으로 살아갈 결심이 선 것 같은 에드안의 넓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행 온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긴 정말 멋진 곳이거든요.

도피생활이었지만 에드안과 V 내외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남편의 오랜 친구라는 말에 몸소 찾아왔던 아그니스는 그들의 기억 속에선 온기 그 자체였다. 그 날의 햇살이 지금의 에드안을 붙잡아주고 있다는 걸 V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에드안 내외가 V와 아를렌을 돌봐준 건 밤을 얻을 때까지 3년 여. 그 시간에 힘입어 여태까지 행복을 유지한 V가 그녀의 피붙이와 관계된 일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들인 밤도 아게로를 무척 좋아하는 눈치이기까지 하니까.




-




“쿤? 그렇게 졸려?”

“이제 시작인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군.”

“뭐래. 카메라 앞에서만 안 그러면 되는 거지.”

인기인이면 아무래도 아무것도 없는 시절보다는 나은 구석이 많지만 아이돌 가수의 뿌리깊은 위계질서상 불합리하게도 선배 가수의 일정에 많은 것을 맞추어야 했다. 존경할 구석이 있다거나 융통성을 발휘할 때도 있는 선배라면야 원래 이 바닥의 규칙이 그렇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후배의 인기를 질투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패를 부릴 때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나마 팀 메이트들의 성격이 좋아서 시간 떼우는 건 문제 없는데 피로감이 가시지 않아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 당장은 대기 중이니까 상관 없지만 쿤이 실수를 연발한다던가 리허설 시간을 길게 잡아먹으면 재수없는 유한성 실장이 이때다 하면서 호출할테니까 바짝 신경 써야겠다. 한성은 소문처럼 에드안 안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까지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는 타입은 아니라서 본업만 완벽하게 처리한다면 의외로 따로 귀찮게 하진 않는 스타일이다. 한번씩 있는 상담을 늘 더럽게 마무리하는 건 어쩔 수 없고.

솔직히 전 이렇게까지 해서 쿤씨와의 계약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생각하면 골치만 더 아파질테니 억지로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흩어버린 쿤은 이수의 이어폰 한 쪽을 빌려 귀에 꽂았다. 팀의 프로듀서 답게 선곡센스가 좋은 이수는 이번에도 처음 듣지만 느낌은 좋은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워 놓았기에 흡족하다.

난 너 까지도 그렇게 잃을 수는 없다.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 놀음에 겹쳐들리는, 두껍고 거칠지만 익숙한 그 목소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드디어 쓰네요...
이제 완결까지 한 우물을 팔 수 있을지에 대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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