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03
신의 탑/Exceptional
모든 매체들이 연말 결산과 시상식 준비에 한창인 요즘, 이맘때에 늘 있는 특별 이벤트 격으로 진행되었던 한 방송사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가 온갖 매체에서 대서 특필되고 있었다. 몇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 앙케이트는 인기있는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연예인들의 연예인, 소개받고 싶은 동료 연예인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특별 무대는?
"쿤씨의 인기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인기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밤... 이건 거의 대기실 밖으로 좀 나와달라는 아우성 아닌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무대는 본인들 제외 압도적인 지지율로 '본인들과 Exceptional의 콜라보 무대'가 사심을 가득 담아 1위에 올랐다. 화제성이 돈으로 계산되는 이 바닥의 특성상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과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건 조사 대상이 누구인지를 헤아려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익셉셔널의 인기를 확인하는 기회였는지 모르겠으나 연예계의 생태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흥미거리조차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에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 당당히 첫 손에 꼽힌 쿤의 경우에는 인터뷰 대상의 코멘트 결과 정리가 다소 눈물겨워서 팀 메이트인 익셉셔널의 멤버들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가수든 배우든 희극인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그와 친해질 계기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는데, 쿤 본인이 가진 비현실적이기까지한 이국적 외모 덕에 항상 관심은 기지고 있었지만 친해질 틈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개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 익셉셔널 활동을 할 때에만 방송가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 팀 메이트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말을 걸기도 어렵고, 방송에서도 말수가 적다보니 한국말을 잘 모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먼저 접근하기도 마땅치 않다는 거다. 작년부터 팀 내의 유일한 미성년자였던 고로 알게모르게 팀에서 과보호를 하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박혀 버린 것 같아서 이수로서는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익셉셔널은 이제 데뷔 3년, 곧 4년차가 될 테지만 쿤의 연예인 인맥이라면 팀메이트들을 제외하면 같은 기획사인 라크가 유일했다. 암묵적으로 말하는 포지션은 리더인 이수나 인기의 주축인 비올레였으니 사람들이 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게다가 최근엔 대기실에서조차 대부분 졸고 있으니...
"밥 먹어라, 귀치장. 너랑 잠탱이만 아직 안 먹었다."
"음.. 어, 어디?"
"내 꺼는 거기 레이어 샐러드와 연어장 덮밥이야, 무사."
"넌 가져다 먹어라. 이 건 이 녀석 거니까."
"쳇. 내 꺼도 좀 가져다 주지."
라우뢰의 볼멘소리가 들리지 않는 하츠는 가져온 도시락을 쿤에게 건넸다. 먼저 자고 있던 라우뢰에게 기대 진짜 잠들었던 차였는지 비몽사몽 간에 그 도시락을 받아든 쿤도 라우뢰에게까지 신경쓸 정신은 없어보였다. 음악 방송은 가수를 하루 종일 잡아두기 십상이라 대기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돌 가수들은 도시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데뷔 후 3년이면 주문한 곳에 따라서 자신의 취향이 뭔지도 확실히 알 때가 되어서 어떤 메뉴가 누구의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밤이나 이수, 하츠와는 다르게 라우뢰나 쿤은 취향이 분명한 편이었으니까 더더욱.
"자,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힘 내자. 시상식은 아직 컨셉이 안 나왔으니까 2~3일은 여유가 있어."
"쿤씨.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세요? 올겨울들어서 부쩍 추위도 많이 타시고 피곤해 하시는 것 같은데."
"내일 병원에라도 한번 가 볼래? 내가 태워줄까?"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 괜찮아."
괜찮다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하게 된 건 어릴 때 부터의 가정환경 탓이다. 쿤 가문의 아이들은 내로라하는 연예인의 피를 타고난 만큼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했다. 형제자매가 많으니 집안에서도 자신이 더 많은 주목을 받길 원했기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데뷔에 대한 문제든 재산싸움과 관련된 일이든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쿤이 그들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게 된 건 분명 쿤이 그들에 비해서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치 않아도 항상 주목받았고 그랬기에 오히려 아버지의 눈에 별로 띄고 싶지 않았다. 딱 아버지에게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분노, 어찌보면 경멸. 사리분별을 좀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그는 자신의 생모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서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모에게 구혼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부와 결혼해 자식까지 보고도 끝내 이혼을 택한 이모이자 새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남남인게 더 나은 가족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목을 매던 누나. 세 사람 중 누구에게도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우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려 해도. 그러니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쿤..? 오늘 진짜로 안색이 나쁜데."
"방금 깨서 그래."
시간이 나는가 싶으면 어디서든 눈을 붙이는 게 이득인게 아이돌 생활인지라 잠에서 막 깬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니 그런 핑계는 어색하다. 음식을 입에 넣는 걸 보니 큰 일은 아닌가 싶은 정도지 무대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창백한 낯빛이 대기실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늘 뒤풀이 하려고 했는데. 힘들면 일찍 숙소에 데려다 줄까? 어차피 넌 술도 못 마시잖아."
"이따 봐서."
절대 당장 어떻다는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익셉셔널 멤버들과 스텝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곧 쿤의 생일이다보니 이른 시간부터 공개방송 입장을 기다리는 팬들 중엔 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간 응원도구를 든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아이돌 가수라면 응당 기획사에서 생일파티 행사를 열어주곤 하지만 작년에는 그가 해외에 있었으니, 팬들은 올해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시상식 준비로 바빠질 때라며 팬들 사이에서도 추측이 무성했지만, 행사가 없다면 익셉셔널 멤버들이 늘 올려주는 멤버들끼리 하는 생일파티 영상이라도 올라올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다. 일상을 자주 공개하지 않는 편인 쿤이라 생일을 맞은 막내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많은 모양이었다.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쿤을 부른 밤이 익셉셔널의 팬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켜보이며 손을 흔들자 한 번, 이어 쿤도 같이 손을 흔들자 또 한 번 자지러지는 팬들의 함성에서도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보통 굿바이 무대라면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시상식을 비롯해 그들을 더 볼 수 있어서인지 다들 표정이 밝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쿤씨도 생일파티 하나요? 뭐 선물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너는 이미 줬잖아?"
"그건 작년 거죠. 몸에 좋은 거나 따뜻한 옷 같은 걸 드려야 할까요."
"그럼 나는 종합 비타민으로 정했다!"
"내가 무슨 노인네냐?"
"요즘은 20대가 제일 영양부족에 활동부족이라잖냐."
"이거보다 활동을 더 어떻게 하라고."
숨가쁜 매일을 살고 있는 아이돌에게 운동부족이라는 말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량이 많다고 해서 쿤이 건강해 보이는 건 아니니까 밤도 그런 쪽의 선물을 생각하게 된다. 과로였다니까 피로회복제라던가? 혹은 추위를 많이 타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잠옷이나 목도리 같은 건? 이수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골을 내는 쿤은 아까에 비해서 나아 보였지만 시작부터 썩 좋지 않은 상태로 시작한 이번 활동의 말미라는 게 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 얘들아. 이만 옷 갈아 입고. 마지막까지 잘 하자."
시상식을 제외하면 이번 활동의 마지막 무대이자 공백을 예고하는 굿바이 무대. 일정은 밤의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본 방송은 타이틀 곡만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며, 방금 리허설을 진행한 곳에서 다른 노래들의 녹화를 마치고 특설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리더인 이수가 모두를 불러모았다. 다 같이 화이팅을 한 번 외치고 나면 마법의 주문처럼 정신무장이 이루어진다. 항상 애용하는 보라색 인이어를 귀에 꽂으며 밤, 아니 비올레가 무대로 제일 먼저 발을 내딛었다.
*
아게로를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한 밤은 당장 다가오는 휴일에 약속을 잡았다. 과거의 인연으로 밤에게는 무른 구석이 있는 아게로도 흔쾌히 그러마 했던 것 같다. 밤이 아게로를 데려오기로 한 게 바로 내일. V의 말처럼 에드안이 V 내외의 집에 숨어(?) 살기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뭐 보냐?"
"아, 에디. 오늘자 굿바이 무대. 밤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거든."
"익셉셔널?"
"그렇지. 내 아들이랑 네 아들은 같은 그룹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봐서 보는 거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아....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과, 그것도 쌍방이 아니라 혼자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에드안이 철없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분야를 석권한 그의 자존심은 아들의 반항을 쉽게 눈감아 줄 수 없게 만드나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 답게 컴백 방송의 순서도 그 날의 가장 마지막, 그것도 3곡이나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배정받은 익셉셔널은 준비된 무대를 화려하게 채워나가는 중이었고, 특별하게 야외 무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지막 타이틀곡은 이르러서는 방송을 타고 넘어오는 관객들의 함성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간에 오열하듯 울며 응원봉을 흔드는 여러 국적의 관객을 비워주는 것이 방해로 느껴질 정도로 무대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아들의 무대는 V도 아를렌도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은 챙겨보고 있지만 회가 거듭될 수록 화려해지는 무대 연출과 의상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말은 없어도 미소를 띤 에드안의 옆얼굴을 보면 그도 공연이 만족스럽기는 한 것 같았다. 적어도 곡의 엔딩이 가까까워 올 무렵까지는 그랬다. 돌연 여기저기서 높은 비명이 터져나왔고 그에 안무를 소화하던 멤버들이 곁눈질로 무대를 살피다 멈춰섰다. MR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끊겼다. 명백히 방송사고라 할만한 장면이었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관객은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무대의 뒷쪽에 익셉셔널의 멤버 중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으니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이수를 시작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라이브 무대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어차피 마지막 곡의 말미였기 때문에 무대는 급히 정리되었고 MC들의 사과와 마무리 멘트로 방송 자체는 무사히 정리 되었다. 다시금 엄청난 기사의 러시가 시작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관심이 없는 척 했어도 생방송에서 아들이 그렇게 되는 광경을 목도한 에드안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소리는 없어도 무척 놀랐겠지. 밤의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V 역시 심장이 철렁 했었는데 말이다.
"가자, 에디."
".....V.."
"가자.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라면서."
넋이 나가있는 에드안을 V가 이끌었다. 마침 남편에게로 달려온 아를렌도 에드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한 눈에 파악하고는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징소는 가면서 기획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은 출발하자고.
*
"쿤씨!"
"아무나 빨리 구급대부터! 쿤! 쿤! 정신 좀 차려봐. 쿤..?"
쿤을 제일 먼저 안아든건 마침 동선이 가장 가까웠던 이수였다. 보통의 경우라면야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스텝들도 어느정도는 대처가 가능한 과로나 급성 저혈당으로 여겼겠지만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하며 청색증으로 멍든 것 처럼 색이 변하는 입술을 보니 정말로 큰일났다 싶어진 이수의 외침에 스텝들이 헬기까지 불렀다. 이 시간에는 퇴근길 정체가 심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일이 커 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매니저와 이수가 쿤과 같이 먼저 병원으로 향했고, 다른 매니저와 밤이 기획사에도 연락을 넣었다. 어쩔 수 없이 뒤풀이는 다른 날 다시 잡거나 연말 회식과 합쳐야 할 모양이지만 당장 그런 일을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방송 현장이었으니 팬들이 쿤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었지만 정리는 기획사에서 파견될 직원들이 대신 맡아주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병원에 빨리 도착했는지 이수가 금방 위치를 메신저로 알려왔다.
"밤!"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일이세요?"
"네 무대를 보다가.. 아게로군은? 병실은 어딘지 알고 있니?"
"아직이요. 이수씨가 응급실에서 조치를 마치고 병실을 배정 받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고..."
"다행이구나. 들었지, 에디?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야."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맞딱뜨린 어머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던 밤이었지만 다행히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에드안의 모습에 부모님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챈 밤은 우선 인사부터 건네고, 병실 번호를 알게되면 알려주겠다고 덧붙였다. 쿤의 말만 들어서는 에드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질래야 그럴 수가 없었지만 그는 쿤의 아버지니까. 온갖 매체 속의 그와는 달리 얼이 빠져있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보니 무른 밤의 성격으로는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주치의를 만날 수 있을까, V."
"정해지면. 네가 물어보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여긴 병원이니까 바로 대처할 수 있어. 제 때 알아채기만 하면 발작은 진정시킬 수 있다면서."
"발작이요? 쿤씨가 본가에 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밤."
이견은 있을 수 없었다. 신분과 상황을 고려하여 1인실을 배정받은 쿤을 멤버들이 보러 간 사이, 에드안은 V내외의 도움을 받아 쿤의 주치의와 먼저 면담을 가졌다. 앓고 있는 병이 있다면 주치의에게 이를 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하지만 잠들어 있는 쿤을 확인하고도 밤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에드안씨가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던 게 쿤씨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정확히 그들 부자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밤의 욕심보다 쿤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건 자명했다. 쿤은 익셉셔널에 남겠다 했지만 에드안의 대답에 따라서는 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쓰는 트랙 3입니다.
이번 편은 좀 짧은데 끊을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이제 한두편만 지나면 계획대로 연작모드로 갈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