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탑

Track 03

신의 탑/Exceptional

 

 

 

 

 

 

 

 

 

 

 

 

모든 매체들이 연말 결산과 시상식 준비에 한창인 요즘, 이맘때에 늘 있는 특별 이벤트 격으로 진행되었던 한 방송사의 앙케이트 조사 결과가 온갖 매체에서 대서 특필되고 있었다. 몇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 앙케이트는 인기있는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 문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연예인들의 연예인, 소개받고 싶은 동료 연예인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특별 무대는?

"쿤씨의 인기는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인기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밤... 이건 거의 대기실 밖으로 좀 나와달라는 아우성 아닌가?"

연말 시상식에서 보고 싶은 무대는 본인들 제외 압도적인 지지율로 '본인들과 Exceptional의 콜라보 무대'가 사심을 가득 담아 1위에 올랐다. 화제성이 돈으로 계산되는 이 바닥의 특성상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아이돌과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건 조사 대상이 누구인지를 헤아려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익셉셔널의 인기를 확인하는 기회였는지 모르겠으나 연예계의 생태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흥미거리조차 되지 않을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에 연예인들의 연예인으로 당당히 첫 손에 꼽힌 쿤의 경우에는 인터뷰 대상의 코멘트 결과 정리가 다소 눈물겨워서 팀 메이트인 익셉셔널의 멤버들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가수든 배우든 희극인이든 분야를 막론하고 그와 친해질 계기를 갖기가 어렵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는데, 쿤 본인이 가진 비현실적이기까지한 이국적 외모 덕에 항상 관심은 기지고 있었지만 친해질 틈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개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으니 익셉셔널 활동을 할 때에만 방송가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 팀 메이트들에게 항상 둘러싸여 있어서 말을 걸기도 어렵고, 방송에서도 말수가 적다보니 한국말을 잘 모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먼저 접근하기도 마땅치 않다는 거다. 작년부터 팀 내의 유일한 미성년자였던 고로 알게모르게 팀에서 과보호를 하다보니 그런 이미지가 박혀 버린 것 같아서 이수로서는 양심의 가책마저 느껴졌다. 익셉셔널은 이제 데뷔 3년, 곧 4년차가 될 테지만 쿤의 연예인 인맥이라면 팀메이트들을 제외하면 같은 기획사인 라크가 유일했다. 암묵적으로 말하는 포지션은 리더인 이수나 인기의 주축인 비올레였으니 사람들이 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 게다가 최근엔 대기실에서조차 대부분 졸고 있으니...

"밥 먹어라, 귀치장. 너랑 잠탱이만 아직 안 먹었다."

"음.. 어, 어디?"

"내 꺼는 거기 레이어 샐러드와 연어장 덮밥이야, 무사."

"넌 가져다 먹어라. 이 건 이 녀석 거니까."

"쳇. 내 꺼도 좀 가져다 주지."

라우뢰의 볼멘소리가 들리지 않는 하츠는 가져온 도시락을 쿤에게 건넸다. 먼저 자고 있던 라우뢰에게 기대 진짜 잠들었던 차였는지 비몽사몽 간에 그 도시락을 받아든 쿤도 라우뢰에게까지 신경쓸 정신은 없어보였다. 음악 방송은 가수를 하루 종일 잡아두기 십상이라 대기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이돌 가수들은 도시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데뷔 후 3년이면 주문한 곳에 따라서 자신의 취향이 뭔지도 확실히 알 때가 되어서 어떤 메뉴가 누구의 것인지는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밤이나 이수, 하츠와는 다르게 라우뢰나 쿤은 취향이 분명한 편이었으니까 더더욱.

"자,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더 힘 내자. 시상식은 아직 컨셉이 안 나왔으니까 2~3일은 여유가 있어."

"쿤씨.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세요? 올겨울들어서 부쩍 추위도 많이 타시고 피곤해 하시는 것 같은데."

"내일 병원에라도 한번 가 볼래? 내가 태워줄까?"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 괜찮아."

괜찮다는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하게 된 건 어릴 때 부터의 가정환경 탓이다. 쿤 가문의 아이들은 내로라하는 연예인의 피를 타고난 만큼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했다. 형제자매가 많으니 집안에서도 자신이 더 많은 주목을 받길 원했기에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데뷔에 대한 문제든 재산싸움과 관련된 일이든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일상에서 쿤이 그들과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게 된 건 분명 쿤이 그들에 비해서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치 않아도 항상 주목받았고 그랬기에 오히려 아버지의 눈에 별로 띄고 싶지 않았다. 딱 아버지에게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분노, 어찌보면 경멸. 사리분별을 좀 할 수 있게 된 나이부터 그는 자신의 생모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서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이모에게 구혼한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부와 결혼해 자식까지 보고도 끝내 이혼을 택한 이모이자 새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남남인게 더 나은 가족관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에 목을 매던 누나. 세 사람 중 누구에게도 자신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우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려 해도. 그러니 차라리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아예 사라지고 싶었다.

"쿤..? 오늘 진짜로 안색이 나쁜데."

"방금 깨서 그래."

시간이 나는가 싶으면 어디서든 눈을 붙이는 게 이득인게 아이돌 생활인지라 잠에서 막 깬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니 그런 핑계는 어색하다. 음식을 입에 넣는 걸 보니 큰 일은 아닌가 싶은 정도지 무대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창백한 낯빛이 대기실 사람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오늘 뒤풀이 하려고 했는데. 힘들면 일찍 숙소에 데려다 줄까? 어차피 넌 술도 못 마시잖아."

"이따 봐서."

절대 당장 어떻다는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닌지라 익셉셔널 멤버들과 스텝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리허설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곧 쿤의 생일이다보니 이른 시간부터 공개방송 입장을 기다리는 팬들 중엔 쿤의 이름과 사진이 들어간 응원도구를 든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아이돌 가수라면 응당 기획사에서 생일파티 행사를 열어주곤 하지만 작년에는 그가 해외에 있었으니, 팬들은 올해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시상식 준비로 바빠질 때라며 팬들 사이에서도 추측이 무성했지만, 행사가 없다면 익셉셔널 멤버들이 늘 올려주는 멤버들끼리 하는 생일파티 영상이라도 올라올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다. 일상을 자주 공개하지 않는 편인 쿤이라 생일을 맞은 막내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많은 모양이었다. 리허설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가는 쿤을 부른 밤이 익셉셔널의 팬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켜보이며 손을 흔들자 한 번, 이어 쿤도 같이 손을 흔들자 또 한 번 자지러지는 팬들의 함성에서도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보통 굿바이 무대라면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시상식을 비롯해 그들을 더 볼 수 있어서인지 다들 표정이 밝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쿤씨도 생일파티 하나요? 뭐 선물 받고 싶은 거 없으세요?"

"너는 이미 줬잖아?"

"그건 작년 거죠. 몸에 좋은 거나 따뜻한 옷 같은 걸 드려야 할까요."

"그럼 나는 종합 비타민으로 정했다!"

"내가 무슨 노인네냐?"

"요즘은 20대가 제일 영양부족에 활동부족이라잖냐."

"이거보다 활동을 더 어떻게 하라고."

숨가쁜 매일을 살고 있는 아이돌에게 운동부족이라는 말은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량이 많다고 해서 쿤이 건강해 보이는 건 아니니까 밤도 그런 쪽의 선물을 생각하게 된다. 과로였다니까 피로회복제라던가? 혹은 추위를 많이 타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잠옷이나 목도리 같은 건? 이수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골을 내는 쿤은 아까에 비해서 나아 보였지만 시작부터 썩 좋지 않은 상태로 시작한 이번 활동의 말미라는 게 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 얘들아. 이만 옷 갈아 입고. 마지막까지 잘 하자."

시상식을 제외하면 이번 활동의 마지막 무대이자 공백을 예고하는 굿바이 무대. 일정은 밤의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본 방송은 타이틀 곡만 특설무대에서 진행되며, 방금 리허설을 진행한 곳에서 다른 노래들의 녹화를 마치고 특설무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리더인 이수가 모두를 불러모았다. 다 같이 화이팅을 한 번 외치고 나면 마법의 주문처럼 정신무장이 이루어진다. 항상 애용하는 보라색 인이어를 귀에 꽂으며 밤, 아니 비올레가 무대로 제일 먼저 발을 내딛었다.

*

아게로를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버지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한 밤은 당장 다가오는 휴일에 약속을 잡았다. 과거의 인연으로 밤에게는 무른 구석이 있는 아게로도 흔쾌히 그러마 했던 것 같다. 밤이 아게로를 데려오기로 한 게 바로 내일. V의 말처럼 에드안이 V 내외의 집에 숨어(?) 살기 시작한지 딱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뭐 보냐?"

"아, 에디. 오늘자 굿바이 무대. 밤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거든."

"익셉셔널?"

"그렇지. 내 아들이랑 네 아들은 같은 그룹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봐서 보는 거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건 아니라는 거다."

"아....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과, 그것도 쌍방이 아니라 혼자만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에드안이 철없이 보이기는 하지만 한 분야를 석권한 그의 자존심은 아들의 반항을 쉽게 눈감아 줄 수 없게 만드나보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 답게 컴백 방송의 순서도 그 날의 가장 마지막, 그것도 3곡이나 부를 수 있는 시간을 배정받은 익셉셔널은 준비된 무대를 화려하게 채워나가는 중이었고, 특별하게 야외 무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마지막 타이틀곡은 이르러서는 방송을 타고 넘어오는 관객들의 함성소리만으로도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간에 오열하듯 울며 응원봉을 흔드는 여러 국적의 관객을 비워주는 것이 방해로 느껴질 정도로 무대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아들의 무대는 V도 아를렌도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은 챙겨보고 있지만 회가 거듭될 수록 화려해지는 무대 연출과 의상에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다른 말은 없어도 미소를 띤 에드안의 옆얼굴을 보면 그도 공연이 만족스럽기는 한 것 같았다. 적어도 곡의 엔딩이 가까까워 올 무렵까지는 그랬다. 돌연 여기저기서 높은 비명이 터져나왔고 그에 안무를 소화하던 멤버들이 곁눈질로 무대를 살피다 멈춰섰다. MR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끊겼다. 명백히 방송사고라 할만한 장면이었지만 그들을 비난하는 관객은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무대의 뒷쪽에 익셉셔널의 멤버 중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으니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이수를 시작으로 나머지 멤버들이 라이브 무대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어차피 마지막 곡의 말미였기 때문에 무대는 급히 정리되었고 MC들의 사과와 마무리 멘트로 방송 자체는 무사히 정리 되었다. 다시금 엄청난 기사의 러시가 시작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관심이 없는 척 했어도 생방송에서 아들이 그렇게 되는 광경을 목도한 에드안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소리는 없어도 무척 놀랐겠지. 밤의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V 역시 심장이 철렁 했었는데 말이다.

"가자, 에디."

".....V.."

"가자.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라면서."

넋이 나가있는 에드안을 V가 이끌었다. 마침 남편에게로 달려온 아를렌도 에드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한 눈에 파악하고는 일부러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징소는 가면서 기획사를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은 출발하자고.

*

"쿤씨!"

"아무나 빨리 구급대부터! 쿤! 쿤! 정신 좀 차려봐. 쿤..?"

쿤을 제일 먼저 안아든건 마침 동선이 가장 가까웠던 이수였다. 보통의 경우라면야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스텝들도 어느정도는 대처가 가능한 과로나 급성 저혈당으로 여겼겠지만 체온이 떨어지는 속도하며 청색증으로 멍든 것 처럼 색이 변하는 입술을 보니 정말로 큰일났다 싶어진 이수의 외침에 스텝들이 헬기까지 불렀다. 이 시간에는 퇴근길 정체가 심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일이 커 질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매니저와 이수가 쿤과 같이 먼저 병원으로 향했고, 다른 매니저와 밤이 기획사에도 연락을 넣었다. 어쩔 수 없이 뒤풀이는 다른 날 다시 잡거나 연말 회식과 합쳐야 할 모양이지만 당장 그런 일을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방송 현장이었으니 팬들이 쿤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었지만 정리는 기획사에서 파견될 직원들이 대신 맡아주기로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병원에 빨리 도착했는지 이수가 금방 위치를 메신저로 알려왔다.

"밤!"

"어머니? 어머니는 무슨 일이세요?"

"네 무대를 보다가.. 아게로군은? 병실은 어딘지 알고 있니?"

"아직이요. 이수씨가 응급실에서 조치를 마치고 병실을 배정 받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일단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고..."

"다행이구나. 들었지, 에디? 위험한 고비는 넘긴 모양이야."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맞딱뜨린 어머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던 밤이었지만 다행히 부모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에드안의 모습에 부모님에게도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챈 밤은 우선 인사부터 건네고, 병실 번호를 알게되면 알려주겠다고 덧붙였다. 쿤의 말만 들어서는 에드안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질래야 그럴 수가 없었지만 그는 쿤의 아버지니까. 온갖 매체 속의 그와는 달리 얼이 빠져있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고 보니 무른 밤의 성격으로는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었다.

"주치의를 만날 수 있을까, V."

"정해지면. 네가 물어보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마. 여긴 병원이니까 바로 대처할 수 있어. 제 때 알아채기만 하면 발작은 진정시킬 수 있다면서."

"발작이요? 쿤씨가 본가에 있을 때도 이런 일이 있었나요?"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밤."

이견은 있을 수 없었다. 신분과 상황을 고려하여 1인실을 배정받은 쿤을 멤버들이 보러 간 사이, 에드안은 V내외의 도움을 받아 쿤의 주치의와 먼저 면담을 가졌다. 앓고 있는 병이 있다면 주치의에게 이를 알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하지만 잠들어 있는 쿤을 확인하고도 밤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에드안씨가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던 게 쿤씨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정확히 그들 부자 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밤의 욕심보다 쿤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건 자명했다. 쿤은 익셉셔널에 남겠다 했지만 에드안의 대답에 따라서는 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쓰는 트랙 3입니다.
이번 편은 좀 짧은데 끊을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이제 한두편만 지나면 계획대로 연작모드로 갈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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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 - 자하드 x 쿤 x 밤] 공멸

신의 탑/단편

자하드는 소년의 금빛 눈동자에 시선이 꽂히는 순간 직감했다. 저 작은 소년의 몸 속에는 자신과 같은 탐식의 괴물이 들어차 있음을. 그리고 그 괴물이 어느 순간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임을. 그의 예감은 곧 이 세상의 미래이기에 자하드는 가차없이 소년에게로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촛불을 불어 끄듯 간단히 소년의 목을 꺾는 것이.

“밤!!”

분명 소년의 눈망울은 순수했다. 자하드에게 그의 내면에 웅크린 괴물을 들켰을 망정 적의는 담겨 있지 않은 투명한 눈동자였다. 자하드의 손이 마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을 것이라는 기대라도 하고 있는 양 올곧게 그를 올려다 보면 소년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고 나서야 눈을 돌렸다. 참으로 순진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에도 자하드의 손은 소년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자하드의 손이 움켜쥔 것은 온기가 도는 소년의 목이 아니라 차갑고 단단한 얼음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방해는 아무렇지도 않아서 소년보다 먼저 희생된 얼음은 파편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빛의 부스러기처럼 흩어지는 얼음 입자 사이로 소년을 찾는 자하드의 흉흉한 눈빛은 새파란 눈동자에 가려진 순간 잠시 흔들렸다. 익숙한 색채였다. 어울리지 않는 검은 로브의 후드 밑으로 고운 은발이 흩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흑백의 사이에 자리한 요사스런 심청빛은 이번에도 자하드의 손이 닿기 전에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하드의 손이 허상만을 손에 쥐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쿤의 아들이군.”

여전히 녹지 않고 바스라져 떨어지는 빛무리 속에 홀로 남은 자하드는 적색삼안의 안대를 벗으며 아주 오랜만에 맛본 허탈감을 흘려보냈다. 물론 당장 뜻대로 되지 않았을뿐 일은 곧 자하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다. 이 곳의 시간은 자하드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

“쿤씨? 어떻게 아셨어요?”

“뭘.”

“제가 거기 있다는 거요.”

“당연히 물어물어 찾아갔지.”

“아....”

“아는 무슨 아야. 내가 항상 눈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랬지? 이 일을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잘못 한 건가요?”

“말이라고 해? ‘왕’한테 들켜 버렸잖아. 또 이런 일 있기만 해봐. 그 땐 너도 나도 죽은 목숨인 거라고.”

“왜죠? 왕난씨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왕난씨는 친절하시잖아요.”

“친절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지. 걔도 이제 아버지한테 혼쭐이 날거다, 아마.”

분명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쿤은 밤에게 왕난을 만나지 말라고 누누히 경고했었다. 왕난에게도 알아듣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동료들이 치정극에서 주인공들의 연애를 방해하는 그들의 부모님 같다며 놀래댄 통에 생각만큼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금빛 눈동자는 이세계에서 온 괴물의 상징이다. 그 눈을 하고도 멀쩡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이는 ‘왕’으로 불리는 탑의 군주, 자하드와 그 아들들 밖에 없었다. 때문에 금빛 눈동자를 타고난 아이들은 발견 즉시 자하드가 풀어놓은 감시자에 의해 척살당했다. 딱히 소속된 국가도 없는 자하드의 탑은 그가 가진 막강한 힘으로 인하여 중립지대이자 무법지대였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감시자에 의해 도륙당하더라도 저항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오래된 전설을 믿기보다는 자하드가 그 찬란한 빛깔을 독차지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고 수군댔지만 그의 병적인 집착을 보면 정말 아무 근거가 없는걸까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도 생기게 마련이었다.

“저 때문에 왕난씨가 혼나야 하는 건가요?”

“그래. 걔는 혼나는 거고 나는 죽는 거지.”

“왜요!”

“말해줬잖아. ‘왕’은 금빛 눈동자를 가진 자는 다 죽이려고 한다고. 그걸 방해했으니 가만히 두겠어?”

“저는 차별 받는 건가요?”

“글쎄... 차별이 아니라 배척받게 아닐까.”

“너무해요.”

“억울해 하기 전에 도망칠 궁리부터 해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밤. 어서 가자. 감시자가 따라 붙기 전에 움직여야해.”

꽤 멀리까지 온 것 같은데도 쿤은 걸음을 재촉했다. 항상 그가 심각하지 않게 이야기해서 밤도 그렇게 진중히 ‘왕’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는데 지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쿤의 뒷모습을 보니 밤이 뭔가 잘못하기는 한 것 같았다. 왕난에게 잘 지내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 없이 밤은 쿤의 뒤를 따랐다. 생활력이 없는 밤에게 의지할 사람은 쿤밖에 없었다. 모두가 밤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거부하던 이 땅에서 이야기를 나눠주고 먹고 입을 것을 가져다 준 게 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밤을 피하지 않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의 작은 집에서 밤이 함께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정말 그 사람이 쿤씨도 죽이려 할까요?”

“아마도. 탑의 왕은 엄청난 폭군이라 그의 앞을 막는 것들에게는 가차 없거든.”

“싫어요! 제가 쿤씨를 못 죽이게 할 거에요.”

“이제라도 내 걱정을 해 주니 고맙긴 하네.”

“정말이에요. 제가 쿤씨를 지킬 거라고요.”

“그래그래.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네가 잘도 그러겠다.”

“쿤씨!”

“농담 같은 게 아니야, 밤. 나도 도망치는 게 고작이라고. 처음은 내 존재를 몰랐으니 당한 거지만 다음은 없어. 그런데 나보다도 훨씬 약한 네가 날 지킨다고? 현실성이 없는 얘기야.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쿤은 자하드의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였다. 직접 금빛 눈동자를 지닌 아이를 찾아서 그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어느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쿤을 미쳤다고 할 것이다. 완전한 치외법권에 속하기에 살인을 밥먹듯 해도 죄를 물을 수 없으며, 이 세상의 모두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그 자하드에게 반기를 드는 건 다른 왕들에 대한 반역보다도 더 무의미한 꿈이었으니까. 하지만 운 좋게(혹은 운 나쁘게)도 이미 금빛 눈동자의 소년을 만나버린 쿤은 이제와서 손을 떼긴 늦어 있었다. 잠깐이지만 눈이 마주쳤으니 자하드는 이미 단서 하나를 손에 쥔 셈이다. 눈에 띄는 색채는 그의 출신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에 자하드는 곧 그의 아버지를 찾을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쿤의 아버지에게는 수 없이 많은 자식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버지조차 그들를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인지라 자하드의 수색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쿤들의 아버지인 쿤 에드안은 자하드 못지 않은 폭군이었기에 그의 성을 떠난 자식도 부지기수인지라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제가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나요.”

“........”

아직 갈 길이 먼데 쿤의 옷자락을 움켜쥔 밤은 더는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금빛 눈동자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화를 낼 수 있다는 걸 쿤조차도 오늘 처음 알았지만 그렇기에 노을빛으로 차오른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그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목숨을 건 실험 중인 쿤에게 밤의 그런 반응은 꽤나 고까운 것이었지만 당장 해야할 일이 있기에 그는 말을 고르는데 꽤나 신경을 썼다.

“강해지는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뭐든 한 순간에 해결되진 않아. 그래서 우리는 지금 시간을 버는 중이지.”

“뭐든 할게요.”

“그래.”

“강해지게 해 주세요.”

“응.”

*

쿤 에드안의 성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덕에 꽤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에드안은 탑의 왕이라는 자하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되는 인물들 중 하나였지만 자하드의 방문이 썩 내키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늘 하던 대로 반라의 미녀를 양쪽에 끌어안은 채로,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자세로 자하드를 맞이하는 걸 보면 유흥의 단맛에 푹 빠지려는 찰나에 방해를 받은 것에 틀림없었다. 허나 눈치없게도 자하드는 마치 개선장군과 같이 푸른 우단 카펫을 밟아 나갔다. 세계의 손꼽히는 강자 사이에서 어느 쪽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생존율이 높은지 머리 굴리기에 바쁜 다른 사람들만이 분주했다.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둘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였지만 따로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먼저 져 주기로 한 쪽은 놀랍게도 에드안이었다.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옷도 갖춰입지 못한 여인들을 먼저 내 보낸 에드안은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먼 옛날의 친우를 향했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은 몇 남지도 않았건만 반갑기 보다는 하도 봐서 질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

“쿤의 아이를 찾고 있다.”

“하? 그래서?”

“네게 향방을 묻는 것이다.”

“내 자식이 얼마나 많은데 네 눈에 띤 녀석이라고 내가 기억해 줄 성 싶냐?”

“충분히 눈에 띄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얼음의 힘을 쓸 수 있는 자는 네 자식들 중에서도 손에 꼽지 않던가?”

“뭐냐 갑자기. 더위라도 타는 체질이 된 거냐? .....물론 흔한 재능은 아니지만 그래도 십 수명은 될텐데, 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있을 시간 없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작은 아이다. 그런 주제에 순간이지만 사상(寫像)을 뒤집어 내 시계(視界)의 시간을 ‘얼렸다’. 분명 네 눈에도 찰만한 재능 아닌가?”

“........”

“그 아이를 만나고 싶다. 아직 네 것이니 해치진 않는다고 약속하지.”

“후우.”

자하드가 보고 있든 아니든 긴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댄 에드안은 담배 연기를 뱉어내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하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에드안에게도 눈도장을 받을만한 아이지만 기억나는 얼굴이 없다는게 이상하게 분했다. 세상을 주름잡는 귀족가의 자제라 해도 성년이 되지 못한 아이는 부모의 소유이니 자하드의 말처럼 그가 성년이 되지 못했다면 아직 에드안의 수중에 있어야할 재산인데, 언제 주머니를 빠져나갔는지도 모르다니.

“찾아서 어쩌려는 거냐. 그저 재주를 치하하려는 건 아닐텐데.”

“그 아이가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

“......해서 그 괴물을 죽이려면 찾아야한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가관이라 에드안의 실소는 점차 광소로 번져갔다. 참으로 깜찍하고 요망한 아이다.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게끔 재능을 숨기고 한다는 짓이 세계를 삼킬 괴물을 거두는 것이라니. 자하드가 자신을 찾아오게끔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에드안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을텐데 찾아내야 할 이유를 더해 주니 상상만으로도 그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찾아봐 주지.”

“모르는 건가?”

“뭐?”

“당장은 알 수 없는 거냐고 물었다.”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자하드를 마주한 에드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주변의 기류에 에드안의 전기가 타고 흘러 파열음과 같은 소리를 만드는 간격이 짧아졌다. 자하드를 막아섰던 그 푸른 눈동자와 같은 색이었지만 에드안의 눈동자에는 또 다른 이채가 흘렀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신비로운 색이었지만 자하드의 머릿속을 채운 눈동자는 에드안의 것이 아니었다. 좀 더 투명하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깊은 눈동자였다. 이 땅의 생명이라면 자하드에 대해 모르지 않을텐데 그가 멸절을 선언한 괴물을 기르고, 또 자신의 손에서 앗아 도망친 맹랑한 아이의 눈동자 답게 아무런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던 눈빛. 두려움만이 아니라 어떤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공허라 해야 하려나?

“그럼 내가 직접 찾겠다.”

“흥. 그러던가. 대체 날 왜 찾아온 거냐.”

“네 우리의 권속이 아니라면 내가 데려가도 불만은 없겠지.”

“뭐?”

자하드는 에드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함께 영생을 누려온 친구이자 세계의 지배자 중 한 사람인 에드안이라면 자하드도 손쉽게 제압할 수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지만 당장 승부를 보기에 위험부담이 큰 쪽은 분명 에드안이었다. 자하드의 예상대로 에드안은 자하드의 돌발 선언에 퍽이나 당황한 듯 싶었으나 섣불리 주먹을 내 뻗지는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자하드! 야, 자하드!!”

당장은 대답 없이 멀어져 가는 친구의 등에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고작. 이 일로 에드안과 얼마나 틀어질 지는 아직 예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명분은 자하드 쪽에 있으니 별 상관 없었다. 분하기는 하겠지만 아직 자하드가 에드안의 아들을 손에 넣은 것도 아니거니와 자신의 손으로 내다 버린 자식도 많은 만큼 에드안의 아들 중 하나가 자하드의 손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가 직접 나서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자하드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에드안이 자신보다 그를 먼저 찾아낸다면 금안의 괴물을 자하드가 죽일 수는 있어도 에드안의 아들을 만날 기회를 다시 갖기는 힘들 것이다. 에드안의 물건에 대해서 자하드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말하자면 도박이었지만 자하드는 무엇도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도박의 결과가 어찌되든 그는 금안의 괴물만 죽이면 되었고 영생의 권태에 갉아먹히던 삶에 잠깐의 빛이 찾아든 것만으로도 만족할만 했으니까.

“아센시오… 들었느냐?”

“네. 아버님.”

“자하드가 말한 네 형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보다 먼저 찾아서 데려오거라.”

귀한 인재가 자신의 아들 중에 있었다는 걸 아버지인 에드안이 여즉 몰랐다는 것만해도 억울한데, 구경도 하기 전에 자하드에게 빼앗기다니 자존심 센 에드안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그에게 인정받아 휘하의 장수로 부리고 있는 자식들을 풀어 동생의 행방을 수색케한 에드안은 제 분에 못이겨 곁에 둔 와인을 병째 비웠다.

*

쿤의 지시사항이기도 했지만 그의 뒤에 꼭 붙어 따라가는 밤은 검은 숲의 오싹한 공기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무언가가 자신을 찔러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런 밤과는 다르게 정면을 응시한 쿤은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을 깔며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전진 중이었다. 추적자들은 아직 쿤이 상대하기엔 버거운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을 피하려면 쿤도 위험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내던 곳을 태워 흔적을 감추고 마물들이 우글대는 그림자 숲으로 들어온 쿤은 숲의 중심부 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색이 어려운 지점까지는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했다. 먼 옛날, 아를렌이라는 대마녀에 의해 형성된 이 숲은 온갖 저주를 머금어 그림자를 대상과 같은 모습과 힘을 가진 마물로 변화시킨다. 다행히 쿤이 가진 얼음의 힘은 그림자를 흐려지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숲 전체가 어둠에 휩싸이는 밤이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잠시라도 쉬어갈만한 목적지를 찾을 때까지는 쿤에게도 녹록치 않은 매일이겠지만 당장의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이 뿐이었다. 다행히 쿤은 자하드나 에드안과 같은 강자는 아니니까 자신의 그림자가 덤벼온다고 해도 그 두 사람보다야 상대하기 수월하겠지.

“쿤씨.. 여긴 너무 무서운 것 같아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아까는 강해지고 싶다더니 벌써 포기한 거야?”

“쿤씨가 저한테 빙결마법을 가르쳐 주시면 되잖아요.”

“그랬다간 네가 마법의 입문도 떼기 전에 발각당할 걸.”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건가요?”

“당장의 계획은 이대로 물이 있는 데까지 가는 거야.”

“물이요?”

“그림자가 흐려지는 곳이 필요하거든.”

항상 검은 로브를 꼭 두르고 다니던 쿤은 숲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을 벗어 태워버렸다. 덕분에 밤은 오랜만에 제대로 쿤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숲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봐 긴장하게 되는 건 여전했지만 한 번 시선을 주고 나니까 오히려 쿤이 신경쓰여서 숲을 주시하기가 힘들었다. 엷은 그늘이 한 겹 드리운 것 같은 이 공간에서 그는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밤과는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신체 곳곳에 깃든 깨끗하고 맑은 색채가 밤의 시신경을 자극했다. 밤이 기껏 사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그가 미웠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키 차이도 별로 나지 않고 오히려 밤보다도 선이 가는 체형이 그대로 눈에 박혔다. 알고 있다시피 쿤은 밤보다 강한 마법사였지만 위험한 기운을 짙게 풍기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여태 그의 보호를 받아온 밤조차도 고개를 젓게 되는 것이다.

“물을 못 찾으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 하루이틀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생각하기 싫은걸.”

“그럼 절 버리고 쿤씨라도 마을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됐어. 이미 들켰는데 널 떼 두고 간다고 안전하겠어. 마물들의 밥이 되더라도 여기서 내 선택으로 그렇게 되는 게 나아.”

여태 쿤이 계속 주의하고 있는게 ‘그림자’라면 두 사람이 물을 찾는다고 해도 앞으로처럼 따뜻한 집을 거처삼아 지낼 수는 없을 것이다. 먹고 마실 것도 전부 이 곳에서 구해야 할 터였고 입을 것도 마찬가지였다. 쿤이 마을까지 나가 종종 보급을 해 올 생각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나는 첫 순간부터 길거리를 전전했던 밤이라면 모를까 쿤이 그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밤은 이제야 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당장 눈 앞에서 저 작고 하얀 뒷모습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

“좀 더 주무세요. 제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다행히 두 사람은 한계에 달하기 전엔 물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의 그림자가 겨우 닿지 않는 곳을 거점 삼아서 쿤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밤은 그림자 마물을 상대로 수련을 시작했다. 쿤은 몰랐겠지만 이유가 생기고 나니 밤은 싸움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마음을 달리 먹은 이후, 밤의 성장은 거침이 없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시간대와 관계없이 숲의 마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밤이었지만 녹록치 않은 생활은 쿤의 건강을 차츰 악화시켰다. 예민한 성격을 타고난 쿤이 노숙이나 다름 없는 이런 생활을 시작한 이상 끝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는지도 모른다. 밤이 쿤 이외의 몇몇 인물들과 어울릴 적에도 그들은 쿤에게 왜 여항에 머무는 지를 묻곤 했으니 말이다. 실력만큼이나 몸도 성장한 밤이 보기에 병색이 완연한 지금의 쿤은 과거의 자신이 대체 뭘 믿고 그리 의지했었나를 돌이켜보게 할 정도로 연약했다. 밤이 잡은 들짐승의 가죽을 갈무리해 만든 모포로 감싼 몸은 며칠 사이에 더 마른 것 같았다. 가끔 시장에 나가서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 오기는 하지만 숲에서의 생활 자체가 험한데다가 밤이 약재를 보는 눈이 없어 이리 되지 않았나 싶다. 상태가 쭉 안 좋은 쿤을 시장에 보낼 수가 없어서 최근에는 밤이 혼자 다녀오곤 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밤은 혹 도시의 경비병과 시비가 붙는다고 해도 그들을 손쉽게 따돌릴 수 있을만큼 강해졌기에 마을까지 오가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물건을 보는 눈은 도통 생기지가 않았다. 그런 섬세함이 일찍이 있었다면 쿤이 밤을 위해 얼마나 힘든 선택을 했는지도 먼저 알아챌 수 있었을까?

“심심할텐데.”

“다른 할 일도 없는 걸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한 채 숲의 바람이 수면을 쓸고 지나간 흔적을 함께 바라봤다. 윤슬이 이는 양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 쿤은 먼저 눈을 감았다. 저를 지켜주겠다는 말에 한 조각의 믿음도 가지 않던 소년이 이렇게나 자랐다. 이것으로 그가 기르려던 ‘괴물’은 완성된 것일까? 그 괴물은 자신의 소망대로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켜 으깨 부술까? 쿤은 혼자 쓰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당장도 자신을 어미새처럼 보듬는 유약한 소년이 쿤이 원하던 괴물일 리가 없었다. 그럼 결국 완성이라는 것은 쿤이 눈을 감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일까?

“저..”

“죄송한데 말씀 좀 물읍시다.”

그림자의 숲 같은 험한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낮시간이라 위험을 무릅쓰고 이 숲을 건너려는 모험가들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가진 이들이 이 호숫가에 이르렀다는 건 이상했다. 길을 잃은 이라면 이 땅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좀 더 놀라워 해야 했고, 이 숲으로 숨어든 자라면 좀 더 경계함이 옳았다. 부정합을 눈치챈 밤의 금안이 차게 식어 말 그대로 금속성의 광택을 띄었다.

“여기까지 찾아올만큼 한가한 몸이 아닐텐데.”

“역시 너 였냐, A.A. 하.. 이만 돌아가자. 아버님께서 널 찾고 계신다. 게다가 너 처럼 몸도 약한 녀석이 노숙이라니. 이러다 몸 상해.”

달려나갈뻔 했던 밤은 차분한 쿤의 목소리에 행동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잠들기 전이었으니 자신을 품에 안은 밤의 신체가 긴장으로 근육을 부풀리는 걸 느끼고 있었던 쿤은 얘기치 않게 그가 길러온 것이 괴물의 새끼가 맞긴 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지켜준다는 게 빈 말이 아니었던 건지 밤은 사람의 형태가 아니었으면 그르릉 거리는 거친 숨소리를 뱉을 듯 날을 세우고 있었다. 이 곳에 제대로 정착한 이후 밤은 첫 날처럼 쿤에게 혼자서라도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모두 잃은 이후에 그의 소유욕이 전부 쿤에게 집중되어 버렸나보다. 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몸 상하는 건 거기도 똑같지. 난 안 돌아가.”

“고집 부릴 때가 아니야. 아버님만이 아니라 탑의 왕도 널 찾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이나 이어진 집착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아?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쿤의 궁으로 돌아가야해.”

밤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년이었을 적에 쿤이 말했었다. 자하드는 자신도 밤도 죽일 것이라고. 쿤의 궁에서 온 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자하드는 실로 무서운 인물임이 분명했다. 다 알면서도 쿤은 여태까지 밤과 함께해 준 것이다. 이렇게 약해질 때까지도.

“밤. 저들을 숲 밖으로 쫓아내. 절대 죽이진 말고.”

그건 절대 형제에게 베푸는 온정 같은 게 아니었다. 죽이는 것보다 살아있는 자를 막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니까 밤에게 더 어려운 과제를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쿤의 의중이 무엇인지 헤아릴 필요도 없이 밤은 당장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일어섰다. 쿤에게 모포를 다시 여며줄 때를 제외하면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자 눈빛이었다.

“A.A!!”

“쿤 씨를 방해하지 마세요.”

“닥쳐라, 괴물. 지금 누가 누굴 방해한다는 거지? A.A.를 위험에 빠뜨린 건 너다. 네 녀석만 아니었으면 평안한 삶이 보장된 아이를..!!”

“쿤 씨가 절 선택했어요. 방해꾼이 누구인지는 이걸로 판가름 난 것 아닌가요?”

밤의 금빛 홍채 속엔 마치 경멸과 같은 빛이 어려있었다. 아마도 괴물은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진심이었다. 조용히 일렁이는 분노는 이미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입을 다문 그를 대신해 주변의 공기가 이글거렸다. 분노와 같은 박자로 범람한 그림자가 소년의 살갖을 검게 물들였다.

“금안의 괴물!”

일행 중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처럼 그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임에도 '재앙'이라 불리는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니 동료들의 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나보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소년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살갖을 타고 올라온 그림자가 검은 불꽃처럼 넘실댔다. 그것은 흡사 소년의 몸 속으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전신이 새까맣게 덮이고 난 뒤에는 흉흉하게 빛나는 금빛 동공만이 적을 향했다.

'...설마 숲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건가?'

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이긴 했으나 추적자들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쿤에게도 밤의 상태는 위험해 보였다. 그가 '괴물'이라는 걸 쿤이 지금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에 놀라웠다. 부정적인 감정은 없었다. 순수하고 담백하게 이 기적같은 순간을 받아들일 뿐. 어차피 쿤이 원하는 건....

"A.A.!!"

밤의 몸 속에 잠들어있던 괴물이 개화하는 순간에 홀려있던 쿤을 찾아온 그의 형제가 잡아 끌었다. 아센시오는 동생이 정말로 금안의 괴물을 기르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야 말았지만 당장의 문제는 이 숲도, 괴물의 새끼도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괴물이자 자신에게 동생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아버지, 에드안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에드안은 아센시오의 다른 형제들에게도 재앙이 될 테니까. 분명 밤이라는 소년의 힘은 아센시오가 여태 보지 못한 종류지만 아직은 운용에 대해 서툰 구석이 많아 보였다. 전투에는 절대적인 힘 못지않게 경험치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게다가 동생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 쉽게 공격할 수도 없을 터. 그 점을 노려 밤을 피해 재빠르게 쿤의 곁으로 도약한 아센시오는 그대로 일행을 버려둔 채 도망칠 생각이었다.

"윽!"

아센시오의 계획이 생각으로 그친 것은 소년의 몸 속에서 완전히 깨어난 괴물이 원하는 것은 그의 동생 단 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지 않을까. 밤을 잠식한 어둠은 쿤의 곁에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다가서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쿤의 주변을 검은 늪으로 감쌌다. 죽이지 말라는 말도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모를 눈이었다. 새까맣게 물든 피부 덕에 어둠 속에 떠 있는 달과 같은 금빛 눈동자 마저도 흉흉해 보이는지도. 그렇게 타인의 육체까지도 넘보던 어둠은 식물의 덩굴처럼 침입자들을 휘감았다. 뼈를 부수는 둔탁한 굉음에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쿤이 형제에게로 달려왔다.

"아센시오!"

"크... 아게..로... 도망..쳐라, 어서."

"밤! 숲 밖으로 쫓아내기만 하면 되잖아!!"

"그럼 다시 올 거잖아요? 적어도 다리 정도는 못 쓰게 만들어야..."

"크아아아악!!"

"저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죠."

밤이 그를 막진 않았으나 쿤은 아센시오를 향해 뻗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어차피 쿤이 바란 건 멸망이다. 늦든 빠르든 형제들도 그 때 쯤엔 의미를 잃을텐데 계속 미련을 두면 무엇할까? 쿤의 행동에서 체념의 빛을 읽은 밤은 살벌했던 눈을 다시 원래의 그로 되돌렸다. 어서 방해꾼들을 치우고 쿤을 다시 쉬게 해 주고 싶었다. 다시 자신의 품에 기대어....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쿤씨!"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빛은 지금까지 쿤이 본 그 어떤 것보다 눈부신 것이었다. 그 찬란함에 잠시 넋을 놓았던 쿤을 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깨웠다. 이어 턱을 잡아 올리는 단단한 손에 빛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쿤은 현실성 없는 사건들의 연속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채였다.

"....당신은..?"

"쿤씨!!"

"!"

밤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을 때가 되어서야 쿤은 밤을 돌아봤다. 자하드의 눈이 그 쪽을 향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밤의 성장을 확인하긴 했지만 수천년 간 세계를 지배해 온 자하드의 상대가 되긴 아직 이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쿤은 자하드의 시선을 가로막고 자신에게로 뛰어드는 밤을 그대로 다른 공간으로 흘려내었다. 시선이 얽혀 있을 적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민함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표정을 유지한 자하드는 쿤을 당겨 품에 안았다.

"시공을 다루는 재주는 아주 드물고 또 어렵지. 그 힘을 버틸만한 신체를 타고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부모로부터 보통보다는 훨씬 강인한 육체를 물려받았기에 망정이지 한껏 약해진 상태에서 공간의 틈을 열었던 쿤은 천천히 의식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자하드가 금방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밤이 가까운 곳에 있는 건 아닌지, 자신을 찾으러 왔던 형제들은 그 후에 어찌 될 지를 생각하는 것조차 무리였다. 쉽게 느낄 수 없는 마력의 파동을 바로 감지한 덕에 수년 간 찾아 해맸던 소년을 손에 넣은 자하드도 지금만큼은 서두를 것 없이 쿤이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너흰 이제 어찌할 테냐. 살고 싶다면 내가 거두어 줄 수도 있는데."

".....A.A...에게는 대체... 무, 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탑의 왕."

"......"

자하드는 말 없이 자신의 품에 잠든 소년을 내려다 보았다. 온 세상이 알고 있는 자신의 명령을 맹랑히 거스른 그를 찾아서, 자신은 어찌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기르던 괴물의 새끼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아직 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척살의 대상이 아닌 이 소년을 찾아헤맨 이유를 그는 무어라 설명해야 옳을까? 아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니까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꼭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 또한 없으므로 자하드는 마음 가는 대로 소년을 안아 올렸다.

"지금 부터 생각해 볼 참이다."

*

탑. 세계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그 곳은 역사가 존재한 순간부터 현신(現神), 자하드의 거처였다. 선사가 그의 손에 지워진 건지 그가 정말 신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는 지는 이제와서 밝힐 수 없겠지만 여하튼 자하드는 뭍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존재였고, 때문에 탑의 위상도 공고했다. 자하드와 그의 친족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쿤은 자신이 그런 곳에 있다는 걸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일텐데.

"좀 쉬었는지 모르겠군."

"......무슨 속셈이지?"

"글쎄. 아무튼 너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치료가 우선 되어야 한다고 들었다. 마력을 봉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기력도 없는 쿤에게는 마력이 그대로 남아있다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들었기로손 그걸 또 베풀어주기까지 한 걸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푹 자고 일어난 영향인지 쭉 저점이었던 몸상태가 오늘은 좀 나아진 듯도 싶었다.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여전히 자세를 바꿀 기력도 없었지만 시야만은 밝게 트여 있었다. 몇 년이나 쿤을 찾아 다녔다고 했던가? 이제야 얻은 성과를 만끽하는 중인지 쿤의 침대에 걸터앉은 자하드는 물색 모발을 손끝으로 흘려내었다.

"에드안의 아들이 어째서 괴물을 보살피는 거냐."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

할 말이 없었기에 자하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누운 자리에서 똑바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깨끗한 눈이었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기에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투명함. 자하드가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해서 두려워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런 류의 생기를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아 자하드는 소년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냥 죽여."

"넌 내가 금한 금빛 눈동자의 괴물을 길렀다. 그러니 나 또한 네 말을 들어 줄 이유가 없지. 나는 널 살리겠다. 네가 죽고자 한다면 더더욱."

"악취미네."

"네가 한 짓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

자신의 명을 어기고 오랜 예언이 이야기한 멸망의 위기로 세계를 쏟아넣었으니, 그는 분명 중죄인이었다. 하지만 자하드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신이 아니기에 소년을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자하드가 그를 멋대로 대할 수 있는 무력이 있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게다가 당장 중요한 것은 자하드가 소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른 괴물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자하드가 자리를 비우면 그가 무슨 짓을 할 지가 염려되는 상황이었기에 왕은 부득이하게 어린 날에 그와 친구로 지냈던 막내아들을 불러 감시를 맡기기로 했다.

"다음에 볼 때는 협조적이었으면 좋겠군."

*

괴물. 갑자기 공간을 열고 나타난 밤을 가리켜 그 곳 사람들은 괴물이라 칭했다. 주변의 사물을 닥치는 씹어삼키는 어둠을 전신에 휘감고 나타났으니 그리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쿤의 도움으로 자하드에게서 도망친 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미웠다. 괴물이라는 단어가. 탑의 왕이 자신을 노리게 만든 이유, 친구들을 잃고 숨어 살아야 했던 이유, 마지막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 주었던 쿤마저 사라져버리게 만든 그 이유로.

"제가 어째서 괴물인가요."

얼굴도 모르는 부모에게서 금빛 눈동자를 물려 받았다는 사실이 밤을 괴물로 만든 것이라면 그들은 왜 밤의 부모부터 밝혀내지 않는가? 늘 마음을 기대오던 쿤까지 곁에 없으니 밤의 감정은 원망과 분노로 점철되어 스스로를 점점 더 괴물이 되는 길로 몰아세웠다. 하지만 밤 자신은 그를 의식하지 못한채로, 그의 어둠은 이제 살아있는 생물들까지도 손을 뻗었다. 직전에 피 맛을 본 그림자들은 더더욱 거칠 것이 없는 상태였다.

네가 정말 전설 속의 괴물이라서 왕이 들이닥친 순간에 각성이라도 하면 모를까.

밤이 하는 한 그가 무엇이든 개의치 않고 받아들여준 건 쿤 밖에 없었다. 이대로 공간을 삼켜가다 보면 다시 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밤은 새로 찾은 희망으로 속도를 높였다. 혹여나 자하드가 이미 쿤을 죽인 뒤라면 그를 찾아 죽일 것이다. 쿤의 걱정대로 밤이 아직 그를 이길 수 없는 상태라 해도 상관없었다. 여하튼 그는 '죽음'이라는 같은 공간에 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드디어 본성을 드러냈구나, 작은 괴물."

어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빛. 마치 구세주처럼 그림자의 침식을 탑의 왕이 막아섰다. 같은 색의 금빛 시선이 부딪혔다. 한 쪽은 빛 속에 자리한 태양이었고 다른 한 쪽은 어둠에 뜬 달이었다. 같은 세기로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상반된 힘은 정 반대의 색으로 여전히 세계를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예언을 막을 수 없다면 좋다. 누가 탑의 주인이 될 지 겨뤄 보자꾸나."

예전에 이 글의 일부를 보신 분이 있으실텐데...
이상하게 보이실지도 모르겠으나 결말은 이게 맞습니다 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제 표현력과 문장력과 아이디어의 부족이 불러온 대 참사 정도로 여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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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 - 밤 x 쿤] 영원의 단면

신의 탑/단편

 

 

 

 

 

 

 

 

 

애니메이션이라던가 라이트 노벨 같은 가벼운 장르에서 보건실이 왜 학생들 간의 밀회에 쓰이는 지 몰랐는데, 진학을 하고 보니 알겠다. 보건교사는 일주일에 딱 이틀만 이 학교에 근무하고, 다른 시간에는 근방의 중학교에 근무하기에 보건실은 대부분 비어있었다. 상비약이 준비되어 있긴 했으나 중요한 것은 그 곳의 침대였다. 쟁탈전이 치열한 부분인데다가 최근에는 전학온 미남이 자주 그곳을 사용하니 말이다. 정규 수업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하교하지 않고 보건실 근처를 맴도는 여학생들이 많은 것을 보니 아게로가 이만큼 기다린 것도 다 소용이 없어질 모양이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보건실을 운영하지 않기에 문단속을 하러 온 아게로는 별 수 없이 목소리를 내어 방해꾼들을 내쫓았다. 이어 그곳에 자리한 꾀병 환자들을 내쫓을 차례가 왔다. 진짜 환자는 귀가조치 되므로, 지금까지 보건실에 붙어있는 녀석들은 다 꾀병을 부리는 중이라고 봐야했다. 늘 아게로를 헷갈리게 만드는 전학생을 포함해서 말이다.

"야, 스물다섯번째 밤. 일어나."

전학올 때부터 몸이 약하다고 했고, 실제로 낮에는 창백한 얼굴로 양호실을 찾곤 하는 그는 꾀병이라고 하긴 모호한 구석이 있었지만, 야간자율학습에는 또 대부분 참여했다. 옆자리의 아게로에게 못 들은 수업의 필기 노트를 빌리거나 숙제를 물어보기도 하면서.

"쿤 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됬나요?"

"넌 날 알람시계로 쓰냐? 조퇴할 거면 교무실 가. 난 이제 여기 정리해야돼."

밤 때문에 몇 배로 사람을 쫓는 게 힘들어진 보건위원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밤은 빨리 일어나 주지 않고 구급상자와 이미 비어있는 침대부터 정리를 시작한 아게로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기만 했다. 사람들은 급우에게도 존대를 하는 밤의 독특한 말버릇마저도 귀족같다며 칭찬했지만 아게로는 밤의 성격에 대해 하등의 칭찬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신경써서 밤이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려해도 마찬가지였다. 밤이 도움을 청할 때 매몰차게 거절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의 행동은 밤을 대할 때 날이 선 구석이 있었다. 물론 밤을 제외한 다른 친구들을 대할 때도 그는 사근사근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지만 친분이 있어 보이는 몇몇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를 볼때면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정작 밤은 그가 필요한 모든 것과 가까이 있는 그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너 아직도 안 갔어?"

"쿤 씨는 제가 싫으세요?"

"너랑 내가 싫고 좋고 할 사이야? 귀찮기는."

"싫고 좋고를 따질만큼 특별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뭐래. 아프면 나하테 치근대지 말고 교무실 가라고."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 곳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밤에 대해서 잘생겼다거나 예쁘다고 이야기했지만 아게로는 인간들이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긴 시간을 살아온 밤에게조차 경이롭게 여겨질 만큼의 미인이었다. 성격 때문에 뛰어난 외모가 묻힌다고들 평하지만 밤이 보기에 그건 복에 겨운 소리였다. 이 곳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적을 둔 만큼 예전부터 그를 보아왔기에 익숙해져 감각이 무딘 것이겠지. 몸에 지닌 색이 엶어 항상 희게 빛나는 가운데, 빛이 부족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체모의 푸른 빛이 드러나는 이 즈음의 아게로가 밤은 좋았다. 그 와중에도 더 깊게 푸른 것은 밤을 향한 눈동자. 밤이 살아온 붉고 검은 세계와 확연히 대비되는 푸르고 흰 빛깔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라 시간에 풍화된 밤의 마음 마저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따라 말이 많다, 너? 아쉽긴 뭐가 아쉽냐? 너 좋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은 쿤 씨가 아니잖아요?"

"...뭐야, 너."

밤은 말을 걸 때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는 버릇이 있어서, 아게로가 그에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지만, 아게로는 밤의 눈동자가 호박색을 띄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아게로가 지켜보는 동안에 그 투명한 금빛 동공이 붉게 변했다. 동시에 색채가 전하는 위협을 감지한 아게로는 뒤로 돌았다.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 쫓아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인물이 주변에는 없었으니까.

"못 도망칠 걸요? 인간의 움직임은 제 눈엔 너무 느리니까."

밤의 말대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뱀파이어에 대해 묘사하는 대로, 인간에 비해 월등한 운동신경과 악력을 지닌 밤은 아게로의 팔목을 붙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그의 입을 막았다. 정체를 들키는 게 두렵지는 않지만 그는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기에 쉬이 일상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 곳에 있어야만 밤이 아게로의 곁에 머물 수 있을테니까.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밤은 아게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본능적인 공포감을 누르고 접근하려면 이런 과정이 한번은 필요하니 감수하는 것이지. 이성간에는 뱀파이어 특유의 위험한 매력이 잘 어필되는 편이라 수고가 적지만 아게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억지로 밤의 무릎에 걸터 앉은 꼴인 아게로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밤의 팔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딱하게도 인간인 이상 밤을 이길 수 없었다. 밤은 여유롭게 붙잡았던 팔을 감아 겹치며 아게로의 하복 셔츠에도 손을 댔다. 하복은 재질도 얇고 깃도 낮아서 단추 한 두개만 풀어내도 쉽게 목덜미를 드러내게 만들 수 있었다. 일을 할 때의 습관대로 뒤로 묶어 정리한 머리카락 때문에 윤곽이 깨끗하게 드러난 목선이 유혹적이었다. 입술을 축이는 대신으로 그 목선을 핥아올린 밤은 겁먹지 말라는 듯 두어번의 입맞춤을 남긴 후에야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프지도 않을 거고요."

흡혈을 당했던 일이 불편한 기억으로 남지 않게끔 뱀파이어는 피를 취할 때 혈액손실에 상응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아게로에게는 밤이 특별히 더 신경을 쓸 테니까 송곳니가 살을 꿰는 통증조차도 느낄 틈이 없을 터였다. 호감이 있는 상대는 밤에게도 꿀보다 단, 최상의 풍미를 가진 혈액을 제공해 줄 테니까 밤도 마땅한 배려를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다녀왔습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보이는구나, 비올레. 무슨 일 있는 거냐?"

"진성 씨... 쿤 씨가 오늘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좀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할 사이 같았으면 그렇게 다짜고짜 물어 뜯으면 안 되었던 거 아냐?"

"화련 씨도 계셨군요."

"물어 뜯어? 비올레가?"

"옆 자리 꼬마를 건드렸다고 했었잖아요. 의식을 잃어서 데려다 주고 왔다고."

"아.. 오랜만의 식사였으면 실수할 수도 있지. 너무 마음쓰지 마."

뱀파이어들은 인간처럼 무리지어 사는 습성은 없었다. 먹잇감들 사이에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살아가려면 아무래도 다수 속의 소수인 게 이점이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한 약간의 교류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그들 중에서는 그나마 성격이 가장 유하다는 이유로 밤의 집은 꽤 자주 그들 사이의 교류회장으로 이용되곤 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쉽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정도라면 실수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약해."

"그렇군요.. 그럼 쿤 씨는 절 싫어하게 될까요?"

"그렇게 마음에 들면 데려와서 사육하지 그래? 불편하게 둘러 가지 말고."

"제가 원하는 건 사육이 아니에요."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그들이 가진 힘을 이용해 취향의 풍미를 가진 인간을 사육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르면 인간은 절대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걸 비올레, 그러니까 스물다섯번째 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 알고 있으면서 자신을 떠 보는 화련이 비올레는 조금 불편했다. 뱀파이어들이 으레 그렇 듯 하나의 눈을 잃었어도 타는 듯한 붉을 머리칼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충분히 매력적인 그녀는 집 주인인 양 탁자의 정 중앙에 앉아 있었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인 것 처럼 구는 진성과는 확연히 다른 스탠스.

"저는 인간들처럼 쿤 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그럼 이빨부터 들이대면 안됐다는 얘길 하는 거잖아. 아무리 통증이 없어도 그런 경험을 하면 인간은 겁 먹는다고."

"하지만 확인해야 했는 걸요."

"네 감정이 아니라 상대방 감정을 먼저 확인 하란 말이야. 어차피 우린 시간 많잖아?"

".....제가 잘못했군요. 사과하러 가야겠어요."

"이래서 연하는 싫다니까. 직진이 다 정답인 줄 알고."

화련의 행동이나 말투가 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옳다는 것만은 인지한 그는 나서려던 발을 멈추었다. 이어 끼쳐오는 담배연기. 밤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성이 잠시 담배를 입술에서 떼어냈다.

"천천히 가자고.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

"그리고 난 네 그런 점이 싫지 않아. 인간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제부터 잘 하면 되지. 후회할 시간도 없다고.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아."

확실히 인간은 뱀파이어에 비해서는 여리고 순간만을 사는 생물이지만 닮은 존재이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는 선배들로서 전해준 가르침은 밤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랬다.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도 알았고 아게로의 시간이 자신과는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밤의 일은 그저 노력하는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기회는 올 테니까.

*

'미치겠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침대에 웅크린 아게로는 몇 번을 고민해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스스로에게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난데없이 학교에서 쓰러졌다며 낯선 친구의 등에 엎혀 돌아온 이후, 별 이상이 없다는데도 가만히 두질 않는 식구들의 열성적인 간호도 골치아팠지만 주말이 지나면 다시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아버지고 형제자매고 할 것 없이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학교를 쉬어도 좋다고 했지만 철두철미한 성격의 아게로에게 이런 꾀병 같은 상황은 불쾌감만 상승시켰다. 원칙주의자까지는 아니어도 자기관리에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A.A! 너 오늘 학교 안 갔다며?"

"나가, 변태."

"내가 뭘 했다고 변태냐. 쉬는 김에 형 좀 도와줘라. 누워만 있으면 몸 더 상해. 여름인데 덥지도 않냐?"

"꺼지라고."

남자 형제들 간의 예의범절은 이미 실종된 지 수 세기라, 아파서 누워있다는 동생 방으로 쳐들어온 하츨링에게서는 눈꼽만큼의 죄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생이 쉰다는 말에 게임 노가다를 시키러 온 참이니 아게로가 더 기대를 해 무얼할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도 방해만 될 게 뻔해서 쫓아내려 했건만 하츨링은 꿋꿋하게도 아게로의 침대로 기어올라왔다.

"나 이제 구독자 천 명 넘었거든? 이 참에 노 저어야 한다고. 잘 되면 형아한테 용돈도 받고 얼마나 좋아?"

"용돈 타 가지나 말아라, 백수변태."

"형님한테... 누구랑 싸웠어?"

"너랑 싸우는 중이잖아, 이..!!"

"팔 안 부러졌냐? 컨트롤 좀 해야 하는데."

"멀쩡하다고!!"

"설마 학폭 같은 건 아니지 너?"

기어코 이불 속에서 아게로를 발굴해 낸 하츨링은 동생에 대한 것인지 노동력에 대한 것인지 모를 걱정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멍이 빠지는 중이라 면적이 늘어난 것이겠지만, 누가봐도 손자국인 게 분명한 왼팔의 상처가 눈에 띈 탓이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맞고 다닐 것 같아?"

"그럼 덮치려고 했냐? 누가 이랬어?"

"그냥 꺼지라고! 마리아! 이카르디! 누가 이 변태 좀 치워줘!!"

하츨링의 머리 속에 게임과 유튜브 말고 다른 게 들어있을 리가 만무함에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아게로는 하츨링의 손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츨링이 아게로보다 네 살이나 많긴 해도 키 차이는 별로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밀어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급기야 지금 시간에 학교나 직장에 나가지 않았을만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다행히 몇몇이 달려와 주었다.

"하츨링! 동생이랑 싸우지 말랬지!"

"싸운 거 아니거든? 얘 누가 이랬어. 친구가 아니면 아버지야? 가정폭력?"

"다 아니라고 했잖아!! 남의 말을 어느 구멍으로 듣는 거야??"

"진짜로 팔은 왜 그래? 다쳤어?"

"별로 아프지도 않고 괜찮으니까 좀.. 머리 아프단 말이야."
"...일단 조금만 더 자. 밥이랑 약 먹어야 되니까 한 시간쯤 있다가 깨워줄게."

한 시간 가지고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당장의 최선을 받아들인 아게로는 눈을 감았다. 피를 빨렸으니 아게로에게는 빈혈이라는 진단이 놀랍지 않았지만 남학생에게 빈혈이라는 병이 흔하지 않은데다가 의식을 잃을만큼 급성으로 발현된 점, 아게로가 성장기의 청소년이라는 점을 의사가 강조한 바람에 집안에서는 형제들과의 먹이쟁탈전에서 패배한 가여운 생물 취급 당하게 되었다. 원래 입이 짧은 편이라 식구들이 과량의 식사를 강요하는 것도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같은 반 흡혈귀에게 물렸다는 말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린 상처는 없던데.'

붙잡혔던 팔은 엉망이 됐어도 막상 밤의 송곳니가 박혔던 자리는 깨끗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겠지. 여하튼 결정적인 증거를 잡을 수 없는 아게로는 밤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나눠줘야하는 입장이 된 걸까?

아쉽네요. 저는 쿤 씨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이게 무슨 친해지는 거야!'

맨살을 핥아 올리는 혀, 키스, 이어 휘몰아친, 처음 겪어보는 강렬한 감각. 회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

고민은 깊었지만 시간을 끈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지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자 아게로는 다시 등교를 시작했다. 밤도 해치진 않겠다고 했으니 피만 주면 졸업까진 시켜주겠지 싶어진 것이다. 사교육에 신경쓸 만큼 자식 농사에 관심이 없는 이버지를 둔 탓에 쉰 만큼의 진도를 따라잡아야 하는 아게로를 이수가 흔쾌히 필기도 빌려주고 도와준다고도 하니 마음이 한결 더 편해졌다.

"오늘부터 운동해라,귀치장. 운동을 안하니까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너처럼 스포츠맨인줄 아냐?"

"건강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아주 저주를 하는구나.."

"운동해라, 허옇게 뜬 파란 거북이!"

"넌 또 왜 왔어, 악어!!"

옆 반에서까지 찾아와 성대한 환영회(?)를 해 주시니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아게로가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도 실상 많지 않았다. 심지어는 전학생의 안위를 걱정하던 같은 반 여학생들까지도 밤에게 쥐어주던 사탕이나 작은 초콜릿을 아게로에게도 일부 나눠주기까지 했다. 거기에다 수업 시간마다 직언이든 돌려 말하든 교사들까지 안부인사를 새로 전하니, 아게로로서는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른 의미로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진짜 아팠으면 이렇게까지 부끄럽다거나 자존심 상하는 느낌이 아니었을텐데 고작(?) 뱀파이어한테 물려서, 몰아치는 쾌감에 정신줄을 놓은 거였으니. 이제는 밤이 뱀파이어라는 걸 알았으니까 낮에 비실대도 절대 걱정하지 않을 거고, 보건실에 남아있으면 인류의 안전을 위해 그냥 격리해 버릴 테다. 무시무시한 결심을 곱씹는 아게로를 알아서인지 밤은 말을 걸 타이밍을 찾고 있는게 보임에도 차마 다가서진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보건실에 안 가도 되겠어?"

"네. 요즘은 컨디션이 좋아서요."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식사를 챙기듯 피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본연의 영양 공급원인만큼 흡혈행위 뒤에는 확실히 몸에 활력이 돈다. 이전부터도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편의를 선택하는 기분으로 보건실을 찾았었고. 아게로의 피를 마신 후라서 그런지 최근의 밤은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게로의 건강과 맞바꾼 것 같아서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더해서 한쪽 팔에 붕대까지 감고 나타난 아게로를 보니 밤의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저기, 쿤 씨."

밤이 드디어 둘이서 이야기 할 시간을 갖게된 건 일과를 마치고 보건실 정리라는 본연의 임무를 위해 1층으로 내려가는 아게로를 따라 나선 후였다. 같은 장소에서 또 밤을 맞딱뜨린 아게로는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기에 밤은 차마 보건실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간에서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멋대로... 몸은 좀 괜찮으세요?"

"욕할 뻔했네. 기척을 좀 내라고! 깜짝 놀랐잖아."

"피하려고 하실 것 같아서.."

"이게 더 문제거든!!"

"아... 죄송합니다. 너무 경계하진 않으셔도 되요. 애초에 전 피를 그렇게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거든요."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할 말이 아주 없어진 밤은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고 이미 잔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아게로를 배려하려고는 노력하고 있지만,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야 다음이 있는 건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불만 가득한 아게로의 표정을 보면 사과를 더 한다고 밤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제 나름의 확인이었어요. 뱀파이어는 호감이 있는 상대의 혈액을 특별히 감미롭게 느끼거든요."

"그래서 날 먹이로 쓰겠다고?"

"아뇨. 확인했으니까 쿤 씨가 원하면 다시는 손 대지 않을게요 . 그냥 지금까지 처럼 친구로 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난생 처음 들어본 이야기였지만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그 이야기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 속에 위협의 빛은 없었다. 사과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종일을 기다린 거라면 확실히 연극이리 보긴 어려울지도.

"안 될까요?"

"너 하는 거 봐서."

힘으로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한 상대다. 저쪽이 먼저 안전을 약속해 주는데 그걸 거부해서 어쩌겠는가. 아게로의 애매한 대답에도 뛸 듯이 좋아하는 밤을 보며 언젠가 어린 시절에 길렀던 강아지를 떠올리던 아게로는 이내 고개를 붕붕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오늘은 야자시간에 밀린 필기를 다 옮겨야 한다. 할 일이 많으니 어서 정리를 마쳐야지.

*

"쿤 씨. 이거 드세요."

"...뭐야?"

"시금치 빵이요. 철분 보충에는 시금치가 제일이라고 해서 만들어 봤어요."

"만들어? 네가?"

"네. 이래뵈도 왠만한 음식은 다 잘 하거든요."

자신은 위험 인물이 아니라는 1차 어필이 먹혔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밤은 이전보다도 아게로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음식에 무슨 관심이 있겠냐 싶었지만 한 입 크기로 정갈히 썰어 담은 빵은 건강해보이는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맛있었다. 병 주고 약 주는 작태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손을 뻗을 정도로.

"신기하네. 넌 이런 거에 크게 관심 없을 거잖아."

"관심 많아요. 쿤 씨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맛있는 걸 주고 싶거든요."

교실에서는 주목받기가 쉬워서 밤의 정체에 대해 애둘러 말하려 애쓰는 아게로와는 다르게 당사자인 밤은 상당히 직설적인지라 아게로는 갑자기 맛있게 먹던 빵이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다만 아게로에게 줄 간식이었으니까 마실 것까지 신경써서 가져온 밤에게는 그 조차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설마 너희 집으로 오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그럼 좋지만 쿤 씨가 싫어하실 것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랑은 자주 교류 하시나요?"

"교류..... 다른 데 놀러가긴 해도 집까진 잘 안 가지. 야자 끝나면 시간도 없고... 어쩌다가 피씨방이나 플스방? 가끔 오락실이나 코노정도? 보통은 먹으러 다니지만. 분식집이라던가."

"모르는 게 굉장히 많네요... 그런 건 학교에서도 안 가르쳐 주던데."

"애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노는 걸 가르쳐 주겠냐."

전학 올 때부터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는 설정이 붙어있었던 밤은 이 곳에서의 생활, 아니 현재의 생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뱀파이어는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심신에 큰 상처를 입으면 오래 잠들어 있기도 하는데 지금의 밤은 막 동면에서 깨어난 참이라 모르는 것이 많다고 했다. 인간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생활을 배우기로 했다던가. 부모라할 만한 존재는 멀리 있어서 주변의 뱀파이어들과의 교류로 필요한 정보를 모은 후 내린 결론이 그렇다고 했다. 무언가 어색하게 보이리라는 건 본인도 알고 있으므로 들켜도 상관없다는데, 아게로가 보기엔 그 조차도 본인의 착각이지 싶었다. 무기를 구할 길이 없는 아게로야 뱀파이어라는 그에게 겁을 먹었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요즈음은 종족을 밝혔다가는 실험용으로 포획될 것 같으니.

"공부할 필요 없으면 야자 빼고 놀러다녀. 그게 너한테 더 도움이 될 걸?"

"쿤 씨는 진학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그래야 집구석에서 나올 수 있잖아."

"그런 이유라면야 제 집으로 오셔도 되는데요."

이게로는 아직 밤을 두려워하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 증거로 아게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을 짚고 산 밤을 흘겨볼 뿐 대답을 주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있다면, 그리고 밤의 공간으로 그가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주지 않는 곳이라면 가능성이 있기에 밤은 오늘부터 아게로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

뱀파이어는 신체만이 아니라 뇌도 인간에 비해서 뛰어난 모양이었다. 아니면 오랜 시간동안 살아왔다는 게 헛말이 아니라서 그간의 경험치로 전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거나. 수학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밤은 한 달 여만에 그에게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금방 진도를 따라잡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수업을 빠지는 바람에 성적이 나빴구나하고 아게로조차도 혼자 착각할 정도?

"쿤! 오늘 일찍 끝나니까 이따 분식집 가자! 하츠가 닭꼬치 쏜데."

"쏜다고 안 했다! 너 한테만 사는 거야."

"에이, 하는 김에 좀 더 힘 내 보십쇼, 하츠님. 남자 둘이 가긴 그렇지 않냐?"

"남자 셋은 괜찮고?"

"피자집도 아닌데 뭘 그래. 아님 밤까지 넷?"

"입 더 늘리지 마라!!"

"하하하, 제 꺼는 제가 살게요, 하츠씨."

"그래! 너도 밤을 보고 배워라, 귀치장."

"하? 내가 뭐랬다고 쟤를 보고 배우래? 여태 한 마디도 안하고 조용히 있었는데."

단지 야간자율학습이 일찍 끝나는 것이라지만 주말에는 들뜬 분위기가 아침부터 느껴진다. 이런 날에 소소한 약속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아게로가 말했던 여러가지 놀이가 이 때 이루어진다는 걸 눈치챈 밤도 은근슬쩍 그의 친구들 무리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놀이문화인만큼 밤에게도 재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학교에서는 보지 못하는 아게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게임을 좋아하고, 또 잘 하지만 코인 노래방에서는 좀처럼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친구들에 비하면 입도 짧은 편이라서 보기보단 음식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 밤과는 궁합이 좋다. 물론 그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해도 밤은 눈치를 보는 편이다. 아게로는 솔직한 성격이 아니라서 밤으로서는 그의 기분을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여전히 자신을 어려워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친구로는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지 궁금할 뿐이었다.

"오라버니!!"

"윽.."

그리고 밤이 그간 쿤에 대해서 알게된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바로 이매것이었다. 그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살과 있고 그 중 둘은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것. 둘 다 아게로와 무척 닮은 여성으로, 누나 쪽은 수험생이고, 한 학년 아래의 동생이 오늘도 찾아온 키세아였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아게로의 상처는 이제 씻은 듯 사라졌지만, 그 때의 일로 아게로가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그녀들이 한 번 아게로를 불시에 찾아왔던 일로 밤도 그들을 알게 되었다. 수험생이라고 하지만 아게로의 누나는 연예인으로 데뷔해 출석률이 썩 좋진 않은 모양이라 오빠의 못미더운 설명에 의심이 더 커진 키세아만이 마치 의무처럼 이렇게 종종 아게로를 찾아왔다. 아게로만 해도 밤이 첫 눈에 반할 정도의 미인이였던 지라 예상은 했었지만 그녀들이 등장할 때마다 급우들이 연예인 유전자는 다르다며 수군대는 걸로 보아 아게로의 형제들 중에는 연예인으로 데뷔한 사람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왜 피하세요, 또!"

"너 내가 그런 말투 쓰지 말랬지?"

"옆에서 멀쩡하게 높임말 쓰는 친구분도 계신데 저한테만 너무하시네요."

"밤이랑 너랑 같냐.."

"아무튼 오늘도 멀쩡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건 그냥 내가 실수한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러니까 '실수로' 오라버니의 가녀린 몸에 손자국을 낸 ㅇㅇ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나라고 나! 주어를 들어 좀!!"

아게로가 고생하고 있는 것이 너무 눈에 보여서 진범인 밤에게도 그녀의 방문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게로의 여동생이니까 밤으로서는 지켜볼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가족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이므로 타인인 밤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게로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실직고 하는 것도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밤을 말린 것도 아게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예인이긴 해도 키세아(뿐만 아니라 사실 집안 식구들 전부)는 세간의 평판에는 관심이 없는 트러블 메이커들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성격을 지닌 키세아는 만약 아게로가 의자에 부딪혀서 멍이 들었다고 하면 학교의 모든 의자를 부숴놓을 위인이라는 것이다. 오빠인 아게로도 쉽게 제압했던 밤이므로 여성인 키세아라면 더 쉽게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밤은 생각했지만 아게로가 자신을 염려해준 것이 기분 좋아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었다. 이제와서라도 설득을 해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이 지금 상황에서는 목 끝까지 차 올랐지만 아게로와 먼저 이야기하는 게 아무래도 우선이겠지.

"그리고 주말이라고 또 친구분들과 놀다 오려는 것 같으신데 오늘은 너무 늦지않게 돌아오세요. 언니께서 오랜만에 집에 오시거든요."

"알았어. 너나 많이 늦지 말고."

"언니께서 오시는데 제가 늦을 리가 있나요. 저는 저녁도 같이 먹을 거라고요."

"그래."

집을 나오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기에 처음에 밤은 아게로를 괴롭히는 형제라도 있나 했었는데 보면 볼 수록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밤이 그들을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 형제들 이야기가 나올 때 아게로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의 반응을 보면 전혀 의심스러운 점이 없었다. 귀찮음을 호소하긴 해도 아게로도 그들을 꽤 아끼는 것 같았다. 그냥 혼자만의 공간을 한 번 가져보고 싶은 걸까?

"어, 이러면 닭꼬치 못 먹는 거야, 쿤?"

"아니. 하츠녀석이 산다는데 먹고 가야지. 어차피 집엔 10시 전에만 들어가면 돼."

"아까도 말했지만 십이수 것만 사 줄 거다. 너는 네 돈 내고 사 먹어라, 귀치장."

"그러고보니 누나가 용돈 안 줘? 아니, 넌 왜 데뷔 안 하냐? 키세아도 곧 데뷔라더니."

"누나 돈을 내가 왜 뺏어 쓰냐. 뺏으려면 아버지 돈을 뺏어야지. 아, 맞다. 나 정리. 아무튼 이따 봐."

보건실 정리를 방금 생각해 낸 아게로가 열쇠를 집어들고 사라지자 모여있던 무리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밤의 친절한 성격을 칭찬하며 농담처럼 아게로에게 성격 좀 고치라고들 했지만 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아게로를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사교성이 좋기에 밤의 인맥 또한 아게로가 구심점이라는 걸. 아게로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기에 밤이 키세아처럼 아게로와 닮은 이성을 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어째서 이 중요한 사실을 본인 마저도 모르는 걸까?

*

시금치 빵, 캐러멜, 그리니시, 다쿠아즈에 이어 오늘은 레몬 마들렌이다. 집안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요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사 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제과품을 만들어 오는 밤이 놀랍기만 한 아게로는 여전히 얻어먹는 재주 빼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이제 괜찮다고 해도 자꾸 아게로를 위한 간식을 준비해오는 밤에게 미안해서 아게로도 요리에 도전을 해 볼까 했으나 부엌에 발을 들이자마자 포기했다. 식기를 빼면 다른 주방용품은 어찌 쓰는지를 모르겠고, 일단 재료를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 부터가 난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형제들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기겁을 해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냥 피 값이라 치고 얻어먹기로 마음을 굳혔달까. 맛있다고 생각을 해도 기본적으로 군것질이 입에 맞지 않는 아게로는 많이 먹진 못하지만 사람들이 요리 잘 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이유에 대해서는조금 알 것 같아졌다.

"단 건 잘 못 드시는 것 같아서 덜 달게 만드려고 했는데.. 좀 입에 맞으세요?"

"너 야자 하지 말고 그 시간에 요리 유튜브 찍는 게 어때? 대학 안 가도 떼돈 벌 것 같은데."

"그럼 쿤 씨를 자주 못 보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돈도 아쉽지 않을만큼은 있는걸요."

저는 뱀파이어니까요.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밤의 모습에 잠시 잊고 지냈던 그 순간이 떠올라 아게로는 시선을 피했다. 밤의 약속을 믿는 건 아니지만 친구로 지내면서 공포감은 많이 옅어졌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때는 쟤도 급했겠지 싶을 만큼? 문제는 같이 떠오르는 황홀한 감각이었다. 목선을 핥는 혀 끝과 이어 퍼지던 아뜩한 쾌감이 순간 다시 전신을 훑는 듯 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에 아게로는 손으로 입술을 덮었다. 그러니까, 그건 친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아예 사귀는,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사이가 되어야 가능한 관계라니까?

"쿤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 더 먹어도 돼?"

"당연하죠."

얼굴도 잘 생겼고, 인기도 많고, 요리도 잘 하는 데다가 오늘 재산까지 많다는 사실을 밝힌 여성들의 완벽한 이상형, 스물다섯째 밤은 왜 자기 좋다는 여학생이 아니라 아게로에게 그런 고백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아게로는 몰랐다. 임기응변으로 택한 과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조차 말이다.

*

입이 짧은 이유 중에 하나가 체증에 걸리면 심하게 앓게되기 때문이었는데 그걸 잊었다. 덕분에 보건위원을 하고 지낸 이래 최초로 자신이 보건실 신세를 지게 된 아게로는 저녁을 먹기 전에 정규 수업이 끝났다는 걸 알려주러 밤이 내려왔을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좀 괜찮으세요? 담임 선생님께서 야간자율학습은 빠져도 된다고 하셨어요. 원래 몸이 약하신 건가요?"

"..아니.... 전혀. 한 번 아프면 끝을 봐서 그렇지 자주 아프진 않아."

"그것도 건강한 건 아니지 않나요. 걱정이네요. 가뜩이나 인간은 너무 약한데. 정리는 제가 거의 다 했어요. 쿤 씨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혼자 집에 가실 수는 있겠어요?"

차마 밤의 요리가 문제라고는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점심까지 먹은 이후에 그 날의 아침까지 전부 토해낸 아게로는 오후 수업을 죄다 건너뛰고 진통제와 잠을 택했다. 내일이면 키세아가 애꿎은 급식 업체를 바꾸겠다며 길길이 날뛸 게 눈에 선하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진통제라는 게 당장을 통증을 덜어주는 약이지 올바른 치료법은 아니다보니 아직까지도 속이 쓰리다. 속을 비웠으니 기분이 영 아니긴 해도 더 게워낼 건 없겠지만. 자신이 불편한 건 잘 못 참는 성격이었는데 밤한테 빵 쪼가리를 못 얻어먹게 되는 것이 두려워 이 지경까지 왔나 싶다가도 점심 탓을 할 수 없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이게 나은 걸 보니 아게로도 슬슬 인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건 보통 그런 의미였지 하고.

"응. 이제 괜찮아. 너한테 헌혈 못할 정도는 아니라니까?"

"그 때도 쓰러지셨던 분이 할 말인가요."

이제 낮이 최고로 길어질 즈음이라 그런지 일과가 끝났음에도 남아있는 햇살이 풍경을 붉게 물들였다. 어째서인지 속상한 표정인 밤도 아게로의 눈에 붉게 비쳤고, 모로 누워 밤을 올려다보는 아게로도 밤의 눈에 붉게 비쳤다. 그건 아게로에게는 새로울 게 없는 풍경일지 몰라도 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항상 밤과 다른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듯 했던 색체가 붉은 색으로 녹아들어 있다는 점에서. 본래의 목적이 무색하게 아게로의 곁에 걸터앉은 밤은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약속했잖아요. 저는 두 번 다시 쿤 씨의 피를 마시지 않을 거에요."

"사실 그거 엄청 기분 좋긴 했어."

"네?"

"계속 먹어도 된다는 얘긴 아니고 가끔은 할 만 하겠다 정도?"

"어...."

"그러니까 너 하는 거 봐서 한다고 했잖아. 해 볼래? 친해지는 건지 뭔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라 했던가? 그럼 허락이 떨어진 지금은 밤이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일 터. 얼떨떨했던 표정이 활짝 웃는 얼굴로 덮여갔다. 벌어졌던 거리를 다시 이마를 맞대며 좁혀온 밤은 눈동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웃음꽃을 피워냈다. 붉게. 그리고 찬란하게.

"당연히 저는 대환영이에요."

창 밖의 석양이 제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밤이 지닌 영원에서 지금은 푸르르게 남을 것이다. 그래, 영원의 단면은 분명 푸른 빛이다.

 

 

 

 

 

 

 

 

 

 

 

 

 

이번 들을 트친이신 해물탕님(@mulT_ang)의 리퀘스트였습니다.
이 뒤는 물탕님의 연성대로...
여러분 물탕님의 갓연성 꼭 보세요 ㅠㅠ

뭔가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다 담지도 못했고,
분량조절 실패는 점점 고질병이 되어가는 군요 ㅠ
이대로 계정 두 개 운영 잘할 수 있을지...
좀 더 화이팅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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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 - 밤 x 쿤] 신기루

신의 탑/단편

 

 

 

 

 

 

 

 

 


구룡채성(九龍寨城). 이 세상에 자리한 최후의 마경(魔景)이라 불리는 그 곳은 별명에 걸맞는 기이한 광경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았다. 무너진 성벽을 무허가 건물들로 켜켜히 다시 쌓아올렸고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간판들이 새로운 성벽을 둘러쳤다. 불야성인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태양빛 조차 닿기 힘든 어둠이 종일 깔려있다는 것 마저도 별명에 충실한 이 별천지는, 진실로 그들을 위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였기에 수많은 도망자와 피난민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땅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겐 식수나 전기와 같은 기초적인 공공재마저 약탈해야만 하는 열악한 상황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가진 것이라곤 몸 밖에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려 그런 곳이 필요했다. 여하튼 그 곳에서는 그들에게 세금을 독촉할 정부가 없었고, 경력이 필요치 않은 일거리가 넘쳐났다. 그것이 매춘, 밀거래, 폭력과 같은 범죄와 관계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의사선생! 의사선생!!"

다만 그것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자리 마저도 그렇지 못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기에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의사는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모여 지내면서 민간요법에 정통하거나, 사정이 있어 의학을 공부했음에도 면허를 취득하지 못한 자들에게 급한대로 몸을 맡겼다. 의사의 실력만이 아니라 의약품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으니 값이 저렴한 것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무허가 치과들보다 내부의 의료사정은 좋지 못했다. 봉사단체의 지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야심한 시각에 죄송합니다."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의원이 잠결에 겉옷을 걸치고 부름에 응하자 그를 찾던 자보다 휠씬 앳된 목소리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그를 찾아온 사내들의 선두에 섰다. 건장한 사내들 사이에서 아직 소년 티를 말끔히 벗지 못한 남자는 자리가 그렇지 않다 해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어둡고 비좁은 이 곳에서 불필요하게 머리를 길게 기른 데다가 그에 어울리지 않는 말쑥함을 함께 지녔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외부의 손님이지 않을까 싶게 단정한 행색은 역설적으로 그가 이곳의 주민이라면, 한 자락 하는 인물이라는 뜻도 되었다. 공권력을 대신하는 이 곳만의 치안유지 조직이자 외부세계의 범죄 조직인 삼합회와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 분의 상처가 심각해서..."

"...이쪽으로."

이 곳의 의사들은 환자를 들이게 되어도 다친 경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쿤은 구룡채성의 이방인에 가까웠지만 눈치가 빨라 곧 이 바닥의 생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을 마쳤다.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데다가 눈에 띄는 외양을 가졌으니 이 구역의 주인이 시찰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겨우 든 쪽잠이긴 하지만 그걸 방해했다고 성격대로 박대하기엔 쿤의 입장이 좋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이 곳에서 마쳐야 할 일이 좀 더 남았으니, 그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는 무리와 어울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진즉에 잠들어야 했을 시간임에도 좁은 문을 지나 간이침대로 환자를 들인 쿤은 볼 것도 없이 환부에 에탄올을 들이부어 간단히 소독부터 했다. 출혈은 심하지만 자상이 깊지 않으니 내버려 두어도 피는 곧 멎을 터였다. 삼합회의 행동대원이 이만한 상처를 두려워할 리도 업지만 굳이 쿤을 찾은 것은 예감하고 있듯이 감시의 목적과....

"무엇에 베인 건지 모르니 간단한 검사를 할 겁니다."

이 지역의 위생환경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감염의 위협. 이 곳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쿤 또한 도망자의 신분인지라 가지고 올 수 있는 물건은 충분치 않았지만 아직 가져온 것이 고갈될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파상풍 균의 감염을 확인하기 위한 반응성테스트 준비를 척척 해 나가는 쿤을 멀찍히서 지켜보던 예의 소년같은 산주(점조직의 우두머리)가 다시금 입을 뗐다.

"신기하네요. 쿤 에드안은 자식들에게 살인기 밖에 가르치지 않는다던데."

"겉 모습만 보고 판단할만큼 녹록한 세상이 아닐텐데, 여기도."

"네. 하지만 워낙에 낙후된 곳이라 이 곳에선 거짓된 것이 금방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거든요. 억지로 자신을 포장할 여유가 없죠."

"아, 그러셔? 당신 수하가 내 손에 있는 상황에서 취조라도 하겠다는 거야?"

"흑사회의 일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설령 약을 받지 못하게 되어 감염으로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이 곳에서 꾸린 가족을 생각한다면 조직에서 버림 받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 그것이다. 산주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환자였던 사내는 쿤을 제압하려 들었지만 산주가 일렀듯 그는 밖에서도 이름 꽤나 날리는 용병기업의 총수, 쿤 에드안의 혈육이었다. 침대 옆에 서 있는게 고작이었을 작은 병실이었지만 고양이처럼 벽과 사내를 넘어 소리도 없이 간이침대를 디디며 메스의 첨단을 그어내는 솜씨에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가 아무리 잠재적인 위협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당장은 치료를 받으세요. 그리고 저는 당신을 내 쫓기 위해서 이 곳에 온 것도 아닙니다, 쿤씨."

"거창한 환영회군."

검사 결과를 눈으로 확인한 쿤은 산주의 말을 아직 신뢰하지 않았기에 정맥주사에 항독소제와 수면제를 섞었다. 가히 살수라 여겨질법한 속도와 정확성은 적어도 그가 흑사회의 일원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무기가 작기에 리치가 짧아도 의사인 만큼 노리는 곳은 정확하고, 기술도 정교하다. 자식들을 용병으로 세워 돈벌이에만 써먹는다는 에드안이지만 실력도 좋고 의술도 따로 가르칠 정도면 꽤나 아끼는 인물이었을텐데 어째서 이런 곳으로 숨어들었는지 궁금증이 일 정도로. 동료가 거꾸러지니 산주의 뒤에 선 조직원들은 쿤이 입구로 걸음을 내딛자 전투 태세를 취했지만 선두에 선 비올레만은 고요히 다가서는 쿤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 이 아두운 곳에서 그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푸른빛이 도는 은발에 새하얀 피부. 현실감이 떨어지게 만드는 색채의 조합은 어둠에 내린 빛 그 자체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이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벽안. 무심해서 더 차가운 그 시선이 비올레는 싫지 않았다. 그의 목적이 불온한 것이라면,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곁에 둘까 싶을 정도의 욕망을 불태울 뿐.

"어떻게 해야 그쪽에서 믿어줄 지 모르겠지만 난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깐 쉬어가는 것뿐이야. 더 이상 방해만 않는다면 곧 조용히 사라져 주지."

"가능할까요? 당신은 누가 뭐래도 에드안의 보석. 특별한 취급을 받아 왔다면 그가 쉬이 버려줄 리도 없을 텐데요. 누가 당신을 이 곳으로 보내던가요? 본토? 아니면 공사관?"

"나. 난 스스로 온 거야. 아버지는 보내달라고 날 보내줄 위인도 아닐 뿐더러, 아직은 그 어느 쪽도 아버지에게 돈을 쥐어주지 않았거든."

"아직은?"

"그래. 아직은. 영국은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게 되어있으니 본토에서 구룡채성을 자기 손 안 더렵히고 밀어버릴 생각이라면 곧 아버지를 부를 수도 있겠지."

"......그럼 당신은 왜 이 곳으로 왔죠? 에드안이 그렇게나 당신을 총애한다면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을텐데요."

"그건 그런 보장을 내가 바랐을 때의 이야기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뜻인지 문이 달려있지 않은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선 쿤은 비올레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래도 의심된다면 감시라도 붙이던가. 그럴 능력 되잖아, 너."

"그래야겠네요. 하지만 착각은 마세요. 저희는 당신이 싫어서 경계하는 건 아니에요. 실력좋은 의사가 이 곳에서는 상당히 귀하거든요."

"감시도 하고 부려먹기도 하겠다?"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당분간 잘 부탁 드립니다. 저는 쥬 비올레 그레이스라고 해요. 당신은요?"

".....하던 대로 쿤이라고 불러.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이름 같은 거 알아서 뭐하게.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 난 다시 눈 좀 붙여야겠어. 저기 저 아저씨는 알아서 데려가고. 그냥 항생제랑 수면제니까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눈을 뜰거야."

"진료 감사합니다, 쿤씨."

"약이 남아있어서 준 것 뿐이야."

어차피 쿤에게는 곧 필요치 않게 될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에드안의 행보였다. 쿤 가문의 일원이 구룡채성에 있다는 정보가 과연 그의 귀에 들어갈까 싶지도 하지만 뒷 세계는 법의 그림자로 전부 이어져 있으니 쿤 또한 방심해선 안 되었다. 산주가 확인을 마쳤으니 삼합회도 곧 그런 인물이 자신들의 영역에 있다는 것은 알게될 터였다. 양지에서는 제대로 된 용병 법인의 오너라고 해도 그가 이면의 무기상이자 정보상이라는 것 또한 공공연한 사실. 본 게임은 이제부터다.

*

"쿤씨!"

자신의 부하 중에는 쿤을 상대할 실력자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감시역을 자처한 비올레는 그야말로 껌딱지처럼 쿤의 주위를 맴돌았다. 감시 자체는 예상했지만 이렇듯 연인이 만날 약속을 하고 다시 집에 바래다 주기까지 하는 분위기로 진행될지는 몰랐던 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전개라 할 밖에.

"전에 주신 거 한번 써 봤는데 생각보다 밝고 예뻐서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충전은 어떻게 하는 거라고 하셨죠?"

"같이 준 전선을 쓰거나 건식 배터리를 쓰거나."

"전선을 어떻게요?"

"하긴. 이런 곳에 제대로 된 콘센트가 있을 리는 없나."

사전에 조사를 해 본 바에 의하면 쿤이 이 곳에서 며칠간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은 몇가지 의약품과 전기, 그리고 빛이었다. 때문에 쿤은 쓰게 될 가능성이 높은 의약품 몇 종 이외에 충전식의 램프 두어개, 호신용의 무기,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의 베터리팩을 챙겨왔다. 이들은 병원 영업과 쿤의 생활에 요긴하게 쓰였는데, 램프 중 하나가 충전된 전기를 다 써가기에 비올레에게 주었더니 그걸 또 근방의 아이들에게 자랑을 했던 모양이었다. 출중한 무술실력을 지닌데다가 이 근방을 관리하는 신분임에도 외양만큼이나 천진한 구석이 있는 비올레는 범죄조직의 일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평소에는 평범했다. 감시를 한다면서 늘 먹을 것을 챙겨와 쿤의 끼니를 이어주질 않나, 수하의 병원비 대신이라며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가져오질 않나. 직접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들을 그가 해결해 준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와중에 이해할 수 없는 비올레의 호의는 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콘센트요?"

"전기를 공급해 주는 장치야. 도시에서는 흔하거든."

"그렇군요. 갑자기 이런 곳에 오게 되서 불편하시진 않으세요? 쿤씨는 도시에서도 좋은 곳에 사셨을 것 같은데."

"각오한 일이니까 관계없어."

"돌아가고 싶진 않으세요?"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다만, 쿤은 어줍잖은 각오로 이 곳을 찾은 게 아니니까. 불평이라 함도 분명 어느정도의 여유가 필요한 일인지라 지금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왜요? 좋은 집은 누구나 바라는 것일텐데."

"나라고 싫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 돌아간다고 받아줄 사람도 아니고."

"뭔가 잘못 하셨나요?"

"내가?"

"어... 틀렸나요?"

형편이 넉넉한 사람이란 게 없는 이 곳에서 의사는 그렇게까지 바쁜 직업이 아니었다. 이 곳 사람들은 죽을 병이 아니라며 인내하는 생활을 주로 선택했다. 아이나 소중한 사람이 앓아누워야 어쩔 수 없이 찾는 게 의사이니 바쁘면 오히려 지켜보기 안타까울지도. 여하튼 도시에서 지낼 때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 쿤은 감시자 보다는 아이들의 보모 같은 비올레의 감시 하에서도 어둠을 더듬어 근방을 돌아보거나 비올레가 하는 양을 지켜보며 시간을 떼웠다. 쿤이 오히려 비올레의 감시자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으로 말이다. 느낀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을 보면 쿤은 도대체 비올레가 어떻게 산주가 될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아버지는 자기 생각 이외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기 때문에 틀렸다는 인식도 없이 수많은 생각들을 무너뜨리는 그를 견디다 못해 쿤이 떠나온 참이었다. 입으로는 수백수천번 소중하다 했어도 그는 쿤의 생각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쿤이 그의 저택을 벗어난 뒤로도.

"쿤씨도 도망칠 곳이 필요하셨던 거군요."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니지."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뭔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이방인에게 그렇게까지 친절한 동네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저는 쿤씨가 이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거든요."

"하?"

영업중이라는 간판도 없는 쿤의 병원은 달랑 간이침대 하나만 있었는데, 환자 없이 의사만 있는 시간에는 그 침대가 쿤의 의자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런 쿤의 곁에 대놓고 자신의 자리를 마련한 비올레는 그와 함께 이 근처까지 왔던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며 골목을 누비게 두었다. 낮인지 밤인지 시간의 구분이 없는 곳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세상을 온전히 누릴 권리가 있었다. 삼합회는 밖에서는 악명높은 범죄조직일지라도 이 곳 주민들을 박대하지는 않았고, 때문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길 잃을 걱정도 없는지 제 세상을 누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비올레는 또 그런 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앉았다.

"쿤씨는 반짝반짝해요."

타고난 색채가 워낙에 밝은 탓에 쿤은 어두운 곳에서 더 눈에 띄었다. 밝은 곳이었다 해도 아시아계가 대부분인 이 곳에서 그의 이국적인 외모는 돋보였을 것이었으나 비올레에겐 당장이 더 황홀했다. 이방인이 있다는 보고를 듣고 그를 처음 본 순간에 반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마치 빛과 같은 사람이라서, 이 곳에서 나고자란 비올레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했다. 삼합회에서나 자신의 부하들이나 쿤 가문은 대부분 쿤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비올레게 첫번째 쿤은 눈 앞의 그였으니까.

"곁에 있으면 밝아지는 기분이 나거든요."

게다가 그는 사람을 살릴 줄 안다. 죽이는 법만 아는 비올레와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 뭍 사람들이 가리키는 대로라면 그는 비올레의 천사임에 틀림없었다.

"난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점조직의 산주가 됬는지가 신기하다."

"그게 왜요? 당연히 가장 강한 사람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는 거잖아요."

"네가 제일 강하다고?"

"그런데요."

"......."

"어.... 보여드릴까요?"

"뭘. 아니, 됐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이 비좁은 공간에서, 그것도 아이들만이 뛰놀고 있는 곳에서 힘자랑이라니.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쿤은 확인에 대한 마음은 접어두었다. 사실 확인 같은 걸 해서 무얼 하겠는가? 비올레가 싸움의 달인이라해도 어차피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래도 한 무리를 이끄는 녀석이라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짓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아무리 할 일이 없다지만 비올레와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건 쿤의 성미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아이처럼 순수해서, 밖에서 별별 광경을 보며 쿤이 잊어버린 동심을 자꾸만 건들였다. 어차피 잠깐인데 모든걸 내려 놓는 게 어떠냐고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루어진 방심이 결국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 것임을 알기에 쿤은 비올레의 한정없는 호의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두려 애썼다.

"우두머리라면 책임도 있는 것 아냐."

"지금 절..."

"산주!!"

비올레를 부르는 남자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쿤은 발을 걷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세상과 동떨어진 것 같아 보이는 마경도 사람이 사는 이상엔 밖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매일 카이탁 공항의 비행기 소리가 구룡채성을 뒤흔들 듯이 밖의 세파는 성채의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영국이 이 땅을 중국에 반환하면 어차피 중국의 것이었던 성채를 포함하여 홍콩 전부가 다시 중국의 영토가 될 것이다. 이후엔 이 곳도 역시 관리할 정부가 생기게 될 것이고 제대로된 치안조직의 관리를 받게 될 터였다.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는 구룡채성은 당연히 그 역사상 최고의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그들의 영토를 지켜준 성채의 주민들을 중국 정부가 시민으로 받아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홍콩에 정착하길 원하는 불법체류자들은 성채로의 진입을 강행했다. 어차피 부평초 같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외지인의 출입을 막을 이유는 없겠으나 끔찍한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구룡채성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성채의 철거에 대한 이야기가 윤곽을 제대로 드러낸 지금, 밖에서 살기 위해 빠르게 돈을 긁어 모아야하는 성채민들에게는 이방인이 가장 노리기 좋은 표적이었다. 법의 개념이라는 게 없는 이들은 자기 발 밑의 사람도 가축으로밖에 보지 않았으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이방인 무리와 성채민들의 다툼은 일상화 되어 있었다. 오늘도 혼돈은 이어주는 중이었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조직원들의 고함에 밀려 사라진 지 오래였다.

*

구룡채성은 몸싸움을 벌이기엔 협소한 공간들로 짜여진 곳이었으나 비올레는 달랐다. 그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제대로 된 벽보다 그거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한 얄팍한 가벽이 더 많은 이 곳에서는 지형물과 적을 함께 부숴버리는 비올레 식 격술의 효용이 더 좋은 건지도 몰랐다. 어둠에도 방해에도 개의치 않고 흑표처럼 금안의 궤적만을 남기는 비올레를 보았다면 쿤도 그가 어찌 산주가 되었는지 단번에 납득하고도 남았으련만. 하지만 그런 일에 미련을 두는 일 없이 비올레는 자신의 영역에서 약탈을 시도했다는 난민 무리를 차례차례 격파해갔다. 그들의 사정도 건너 듣기는 했지만 비올레에게는 그와 좀 더 많은 시간을 공유한, 성채민들이 더 중요했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라면 자신의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온전히 지켜내고 싶었다. 자신은 결국 '밖'에서 범죄자로 낙인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머물 곳을 허락했는데 왜 약탈을 감행한 겁니까."

"하! 그 자리에서 굶어 죽는 걸 허락한 거겠지 이 악독한 놈들!!"

"......."

약탈이란 얼마든지 무력 충돌을 예상할 수 있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사나흘 전에 악천후를 탓하며 외곽의 치과 두어개를 점거한 무리들 중에서도 약탈단은 건장한 사내들로만 꾸려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노려서는 안된다는 법이 없으니 삼합회의 일원들은 더러는 밖에서도 고가에 거래되는 좋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기에, 패기밖에 남지 않은 약탈단은 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심지어 맨손에 나이도 어린 비올레에게까지 제압당해 버렸으니 무력감이 악에 받힐만큼 차오른 건지도.

"이판사판인데 우리가 무슨 짓이든 못할 것 같아?"

"산주!"

"하게는 둘 것 같습니까?"

억지로 쌓아올린 건물들. 조금이라도 더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통로조차 없이 자리한 생활집기들. 그런 환경으로 인해 구룡채성은 확실히 화재에 취약했다. 같이 죽자는 말이 틀리지 않아서 폭도가 최후의 수단으로 준비한 미제 라이터에 흑사회의 조직원들도 일부 당황을 감추지 못했으나 비올레는 차분했다. 어둠 속에서 더 눈에 띄는 빛. 그것만을 쫓았다. 붙을 붙이기 위해 기름칠을 해 두었을 그들의 공간에서 저 불꽃을 밀어내야 했다. 한 번에 해내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 그렇기에 흔들릴 수 없었다. 걷어낼 곳이 없으니 삼켜내는 것이다. 자신의 수하들이 그렇듯 수장인 자신 역시도 죽음은 두렵지 않으므로, 비올레는 화상을 입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라이터를 붙잡아 불씨를 꺼뜨렸다. 그 어디에도 쓸데없는 움직임 하나 없는 신속함이 냉정한 속내를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적나라했다.

"저도 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걸요."

달칵!

라이터가 닫히는 소리는 경쾌했지만 살갖이 눌어붙을 정도로 전체가 이미 달궈진 뒤였다. 산주의 화상에 격분하는 조직원들과 다르게 아까보다도 차가워진 금안에는 푸른 안광이 비쳤다. 그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선득해질 것처럼.

"악독하다고요?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

"산주. 잔당들의 말로는 이게 녀석들의 연락책이라고 합니다."

"주세요."

"저.. 손은..."

"곧 의사에게 보일 겁니다. 걱정 말고 그거나 넘겨 주세요."

휴대전화라는 것이 쓰이기 시작한지는 좀 되었지만 기지국이 없는 성채에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먹통이다. 그러니 전파가 닿는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이 가능할텐데,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짧은 시간에 조직화하고 삼합회에 대항하는 데 그런 비효율적인 연락수단을 택했다는 게 비올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산주들은 그들의 구역에 이와같이 문제를 일으킬만큼 무리를 이룬 이방인을 불허하고 있었다. 외곽에 닿아있어 어쩔 수 없이 공간이라도 내어주는 것도 극소수. 심야 경비까지 하며 외곽에 터전을 둔 치과의사들과 매춘부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운 좋게 나뉘어 성채에 진입했다 하더라도 다시 연락이 닿을만한 곳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비올레에게는 아직 묵직하게 느껴지는 휴대전화는 그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곧 비올레의 손에서 벨을 울렸다. 폭동이 성공했다고 확신한다는 뜻일까?

"산주?"

비올레는 자신을 부르는 조직원을 빈 손을 들어 멈추게한 뒤 전화를 받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사실 비올레조차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정보라도 건지면 성채는 더 안전해질테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이었다.

"거기 흑사회의 산주 계신가?"

전화 속의 목소리는 유쾌하게 비올레를 찾았다. 유창한 중국어였으나 억양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연락책이 아니라 비올레는 찾는 것 부터가 이상했다. 그는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다. 성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이 아니라 아마도...

"당신이 이들을 매수했습니까?"

"그런 잔챙이들에게 쓸 돈은 없지. 혀만 좀 굴리면 알아서 불에 뛰어드는데 말이야."

"단화씨, 아까 그 사람들.."

"듣던대로 무르군. 그 녀석들 사정 봐 줄만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닐텐데, 쥬 비올레 그레이스. 성채 개방 전에 한 몫 챙기려면 네 수하들에겐 그런 희생양이 필요하잖아? 장기든 몸이든 팔아치울 수 있는."

"...왜 절 찾으셨죠?"

"거래를 위해서지. 자넨 그래도 투자할 가치가 있으니까."

"절 한 번도 보지 못 하셨을텐데 뭘 믿고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난 자네를 본 적 없네. 하지만 아게로가 골랐다면 얘기가 다르거든."

아게로.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비올레와 같은 방식의 이름을 쓰는 이가 구룡채성엔 흔치 않았기에 그는 어렵지않게 이름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쿤. 전화 속의 사내가 원하는 것은 쿤이 틀림 없었다.

"당신이 쿤 에드안?"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 애를 데려온다면 자네도 자네의 조직원들도 '밖'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손을 써 주지. 이건 자네 인생에 다신 없을 기회야."

*

비올레가 찾을 의사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상처를 입는 순간에도 쿤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에 내심 기뻤던 것 같다. 표정을 얼굴에 드러낼 시간이 없었거니와 에드안과의 통화 이후로 머릿속이 엉켜버려 아직까지도 여유는 생기지 않았지만. 무뚝뚝한 얼굴이라 그가 며칠간 봐 온 비올레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비올레를 병실에서 맞딱뜨린 쿤은 그가 말 없이 상처입은 손을 내밀자 역시 별 말 없이 침상에 끌어다 앉혔다. 화상을 입은 면적이 작기에 망정이지 화상 자체는 심각한 것이었다. 제대로 소독을 하고 깨끗한 거즈로 꼼꼼하게 드레싱을 해 나가는 쿤에게 비올레가 드디어 입을 뗐다.

"처음 뵜을 때 잠시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셨었죠."

"그래."

"여길 나가면 어디로 가실 생각이세요?"

"알아서 뭐 하려고."

"....여기서는 할 수 없는 일인가 싶어서요."

"그런 셈이지."

"언제 떠나세요?"

"곧."

"......저도 데려가 줄 수는 없으신가요?"

"내가 왜."

단호한 대답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런 비올레의 반응에도 무심하게 아직까지는 힘을 풀고 있어야 한다며 의사로서 저지한 쿤은 비올레가 원한 대답 대신 상처의 치료에 대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았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고, 특히 물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거즈는 새 것으로 하루에 한번 정도는 다시 감는 것이 좋다는 것. 흉터는 남겠지만 기능을 회복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과 못해도 3주 정도는 회복에 힘써야 한다는 것까지.

"그럼 3주 동안만 절 돌봐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그 전에 중공군이 몰려올 걸. 환수는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어." "어차피 이 곳이 무너지면 숨을 곳도 없잖아요."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난 밖에서 왔으니 밖에서 살아가는 것도 문제 없지만 넌 아니잖아? 부하나 너 자신이나 모르는 사람 손에 아무렇지도 않게 맡겨버리고 말야. 그런 순진한 면을 보여주면 밖에서는 무사하기 힘들다고. 이 지경이라도 여긴 많은 이들의 피난처라고 했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밖은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라는 소리야. 좋은 집이 있고 빛이 있다 하더라도 훨씬 끔찍한 곳이라고. 넌 아무나 믿는 그런 점을 좀 고칠 필요가 있어."

말을 마친 쿤은 치료비의 청구도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치료가 끝났으니 이만 나가보라는 의미였을 터다. 그와 만난지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는데 비올레의 생각을 쿤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분명 무리겠지만 서운했다. 그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앞으로도 에드안의 눈을 피해 살아가려면 비올레는 방해라는 뜻일까? 그러는 쿤은 에드안이 구룡채성 밖에서 그가 제 발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내일 다시 올게요."

"......"

"그 때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에드안의 손길이 미치기 전에 그가 비올레의 손을 잡아 주었으면 했다. 그래야 지금의 마음이 비올레를 뒤틀어 버리지 않을테니까.

"하아.."

비올레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쿤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였다. 형형한 눈빛을 뿜을 때의 그는 삼합회의 일원 다웠지만 그 밖의 행동에서는 생각이 죄다 읽혔다.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매달리는 것을 보니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 없었다. 심한 화상을 입고도 아프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정도로 싸움에 익숙한 그가 동요하는 것을 보면 성채의 개방과 관련하여 엄청난 사실을 들었거나....

'아버지..겠지.'

삼합회를 통해 에드안에게 자신의 정보가 알려지기를 재고 있던 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비올레에게 에드안의 접촉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캐물을 생각은 없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그는 쿤이 이 곳을 떠난 이후에도 그를 찾아내려 한동안은 애쓸 것이다. 그리고 에드안 또한 자신의 흔적을 놓칠 리가 없으니.

'내 일정이 궁금해 진 걸 보면 아무래도 아버지겠지. 성채에서 나고 자란 비올레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개방 자체를 와 닿게 느끼긴 쉽지 않을테니.'

고대하던 시간이 왔으니 쿤은 기다릴 것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올레에게 줄 새로운 대답을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늘 이 곳을 나갈 거니까.

*

불. 불이 났다. 구룡채성은 물리적 구조상으로도 사회적 구조상으로도 화재에 취약했다. 때문에 비올레가 몸을 던져 그를 막았건만, 늦은 저녁에 다시금 들이닥친 화마는 흑사회가 아닌 임화문의 구역에서 시작되었고 삽시간에 중앙까지 번졌다. 유치원과 양로원이 있는 중앙에는 그래도 구호인력의 거처가 있어서인지 대응이 빨랐다. 성채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화재현장을 찾아 손에서 손으로 물을 길러 날랐다. 굳 철거될 건물이라지만 그들의 터전은 이 곳이었기에 갑작스레 찾아온 빛이 반갑지 않았다. 제대로 된 소방수도 화재에 대한 조사를 할 감식반도 없었지만 구전되는 이야기로는 합선이 화재의 원인이라고들 했다. 훔쳐 쓰는 전기였지만 수요가 많았기에 아무렇게나 전선을 이어붙여 전기를 사용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제대로된 관리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니 언전가는 일어날 사고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성채가 자신의 수명이 다 하고 있음을 성채민들에게 알리는 중일지도 몰랐다. 씁쓸하게도 성채의 개방은 성채민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인 것이었다. 개운치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 삼합회의 인솔에 따라 비올레 역시 부상자임에도 화마의 제압에 앞장섰다. 움직이지 말라는 것도, 물이 닿으면 안된다는 것도 전부 들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짓물이 터져 엉망이 된 거즈를 갈기 위해 계획보다 일찍 쿤의 병원을 다시 찾은 비올레는 묘하게 평소보다 넓어보이는 공간에 고개를 갸웃 했다.

"쿤씨?"

그가 가져온 집기의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옷과 약은 그대로인데 뭔가가 비었다. 밖에 대해 잘 모르는 비올레에게 쿤은 그것을 베터리라고 설명해 주었었다. 전기를 저장하고 공급하는 장치라고. 마음을 주었음에도 비올레는 쿤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지만, 밖에서 그 에드안에게 여러가지를 배워온 쿤은 비올레에 비해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영리한 그가 여기까지 베터리를 챙겨온 것이 단순히 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비올레는 생각했어야 했다.

"쿤씨!!"

비올레의 행동이 쿤에게 그리 큰 위협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뭔가 알아챘다면, 움직였을 수도 있다. 비올레는 쿤의 목적을 모르니 그가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지 예상할 수 없지만 미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합리적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방금 성채에 불을 지른 게 쿤이 아닐까 하는. 비올레는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자리를 비웠고, 다른 감시자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실력자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번 큰 일을 겪어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산주로서 쉽게 무너질 수 없는 비올레는 숨을 불어내어 흑사회에 소집령을 내렸다.

"쿤 가문 의사를 붙잡아 오세요. 지금 당장."

*

우려와는 달리 수많은 철거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구룡채성의 철거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성채 철거 전에 일어난 몇몇 사고들이 성채민들에게 그 곳이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덕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성채의 철거는 홍콩만이 아니라 중국 전역에 대단한 뉴스거리로 연일 대서특필 되었다. 심지어는 마경의 철거를 보러 홍콩을 찾는 관광객까지 있을 정도로 여파는 엄청났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장신의 남자 또한 성채의 철거 모습을 눈에 담고 근처의 가판대에서 1면에 성채 철거 소식이 담긴 신문을 샀다.

"지금은 '스물다섯번째 밤' 군이라고 했나?"

"......."

"아무래도 아게로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자네인 모양이야."

"이미 조사는 끝냈을 것 아닙니까."

"그랬지. 하지만 워낙 영리한 아이라서 말이야. 생사조차 알 수 없더군."

"그래서요?"

"자넨 그 애가 살아있을거라 생각하나 죽었을 거라 생각하나."

성채의 잔해를 향해 셔터를 누르기 바쁜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공원의 난간에 등을 기댄 에드안은 가판대를 지키고 있는 짧은 머리 소년에게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말을 걸었다. 어찌보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고 통화까지 한 사이니까 말이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야박하군."

"......."

물론 밤이 원하는 건 쿤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 단서를 붙잡기 위해 밤은 아직까지도 성채의 망령처럼 여태 이 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에드안 또한 그럴 것이다. 그가 직접 걸음한 이유에 대해서 밤만큼 정확하게 이유를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꿈을 꾸고 있으니까.

"저는 쿤씨를 잠깐 밖에 보지 못해서 가끔 제가 꿈을 꾼 건지 신기루를 본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는데, 당신을 보니 그렇진 않은 모양이네요. 다행스럽게도."

"이게 다행인가?"

"네.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럼 좀 더 확인해 볼텐가? 나는 아직 그 애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거든."

"쿤씨는 당신에게서 도망쳤으니 살아있다고 해도 당신 곁으로 돌아오진 않겠죠."

"....."

"그래도 같이 갈게요. 저는 당신과 같은 생각이고, 당신처럼... 확인받고 싶으니까."

 

 

 

 

 

 

 

 

 

 

 

 

 

이 글은 트친이신 오복님(@obok_5)의 리퀘스트였습다.
구룡성채 밤쿤이라 중화풍 느와르를 썼어야 했는데 이런 되디만 글이라 죄송합니다 ㅠㅠ
오랜만에 썼더니 더 엉망이네요..
오복님께서 예쁜 눈으로 자체필터 해주세요 부디 ㅠㅠㅠ
대로 다시 니다..(

 

 

 

 

 

 

Khun`s Day 교류회지 유료공개

신의 탑/단편

 

 

 쿤 생일파티이자 쿤른판 교류회였던 Khun`s Day 교류글을 포스타입 유료공개합니다.

티스토리에는 링크만 남겨 두겠습니다.

내용을 덧붙이고 글도 좀 더 다듬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정말 약간만 손 본 상태입니다.

'기회와 기약'의 후속편으로 쓰여진 만큼 미리보기는 따로 없습니다.

구매 전에 전편에 해당하는 글을 먼저 읽어보시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구매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몸상태는 상당히 나아진 편이긴 한데 여전히 원인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일단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어서 리퀘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고 트위터도 곧 복귀할 것 같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멀지 않은 미래에 다른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포스타입 링크 : https://2nd-kiss.postype.com/post/5409295

 

기약의 완성

아래의 글은 Khun`s Day의 교류용으로 작성된, '기회와 기약'의 후속편입니다. 수위글도 아니고, 첫 회지라 미숙하오니 꼭 읽고 싶은 분만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2nd-kiss.postype.com

 

 

 

 

[신의 탑- 밤 x 쿤] 세상의 중심

신의 탑/단편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신 분 계시나요?

 

아주 오랜만에 받은 친우의 연락에 응한 이는 왕난과 이수, 그리고 라크였다. 밤이 아를렌의 예언에 따라 자하드를 꺾고 탑의 해방을 가져온 지도 어언 백 여 년이 흘렀다. 그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랴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여야했던 이들이 서서히 여유를 찾아갈 즈음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을 밤이 갑자기 도움을 청할 일에 대해서라면 연락을 아주 끊고 지내지만 않았다면 누구나 짐작할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수 아저씨, 왕난 아저씨, 라크 아저씨!!"

"안녕, 스텔라. 아빠들은 어디 있어? 참, 쿤은 본가에 갔겠구나?"

"네! 아버지께서 부르셨죠?"

"하하, 어째서 그런 결론일까..?"

"아버지는 아빠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거든요."

 

만 여년 간 탑의 최정상에 군림해 오던 자하드를 꺾고 탑의 운명을 바꾼 밤이 외동딸의 말을 들었다면 퍽이나 서운하겠으나 일단 이수가 그녀의 사고방식을 교정한다는 건 어려운 문제다. 이 도도한 꼬마 아가씨는 밤을 꼭 닮아서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넘쳐났고, 설상가상으로 최강의 부모를 둔 최강자이기까지 했다. 그녀를 다룰 수 있는 건 오늘은 부재중인 그녀의 또 다른 아버지뿐이니 그가 알아서 잘 해 줄거라 믿어야지.

 

"같은 아버지인데 취급이 왜 이렇게 다른거야, 비올레?"

"저도 궁금하네요. 쿤 씨한테는 얌전하게 구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요."

"아버지가 나쁘니까 그렇죠!"

"제가 언제요? 이유를 가르쳐 줘야죠, 스텔라."

"전에 그 빨간머리 언니랑 그랬잖아요! 아버지가 아빠한테 스텔라를..."

"스텔라..? 그건 아빠들끼리 이야기가 끝난 문제라고 했잖아요."

 

다급하게 딸의 입을 틀어막은 밤은 난감함이 가득한 미소와 함께 패배를 선언했다. 그런 이유라면 자신이 나쁘다고 순순히 인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과에도 마음이 풀리지 않은 스텔라는 아버지가 아닌, 그녀를 특히 귀여워해 주는 아버지의 친구, 왕난에게 매달렸다. 밤만큼이나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품에 안은 왕난이었지만 여하튼 스텔라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스텔라가 많이 조숙하네....?"

"왜 애한테 그런 것까지 말했어, 밤?"

"얘기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쿤씨가 그 때 오해를 풀어주긴 했지만 충격이 컸던 모양이에요."

"빨간 거북이가 왔다간 거냐?"

"오늘은 아니고요. 일단 들어오세요. 점심은 드셨어요?"

 

딸과 불완전하게나마 타협을 이루자 밤은 모두의 점심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동성 커플인 밤과 쿤이 아이를 갖게 된 건 사실 밤 쪽의 사정에 기인하였다. 종교집단이자 변화의 주류였던 FUG는 밤이 그들의 신으로서 숙원을 이루어 준 이후에도 강력히 후계자를 지목하길 바랬다. 말이 후계자 지목이지 적대해왔던 10가문의 자제와의 관계를 청산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시작되자, 밤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측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쿤에 대한 평가는 그들 사이에서도 갈렸기 때문에 이렇다할 조언이 한동안 없다가 어느 날엔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천만 의외로 화련이었다.

 

적당히 후사만 보면 되는 거잖아? 내가 도와주지. 하지만 너도 날 도와줘야해.

 

화련의 방법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엔류의 신수를 쿤에게 먹이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설명 없이 스텔라를 갖게 된 쿤은 당연히 불같이 화를 냈었다. 뒤늦게 이해를 구하고 다시 단란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지만 밤의 그릇된 선택이 지워지는 건 아니니 밤은 늘 쿤과 스텔라의 앞에서는 죄인이었다. 외동딸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쿤이 사실을 알게된 스텔라와 직접 이야기해서 잘 달래놓았다지만 딸에게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덕에 밤의 둘째 계획은 성사될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스텔라보다도 쿤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양식도 괜찮으신가요?"

"우리야 놀러왔는데 뭐 그런걸..."

"돈가스!!"

"네네. 라크씨를 위해서 하나 튀겨야겠네요."

"와, 그런 게 말만 한다고 바로 나와?"

"스텔라도 요즘 기름진 걸 좋아해서요. 성장기니까 잘 먹여야 한다고 쿤씨도 그러셔서.. 먹고 싶다고 하는 건 다 만들어 주는 편이에요."

"자기가 요리하는 거 아니라고 쿤이 너무 방임주의네."

"요리 자체는 재미있으니까 상관 없어요. 오히려 쿤씨가 잘 안드시는 게 고민이에요."

"걘 잘 안 먹는게 아니라 그냥 입이 짧은 거지."

 

더해서 밤과 스텔라는 대식가이고 말이다. 쿤보다는 밤 쪽을 훨씬 더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는 스텔라는 소싯적의 밤이 여장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정도로 밤과 판박이었다. 포니체일을 할 수 있을만큼 길게 자란 머리채는 윤기나고 풍성한 다갈빛이었고 겨우 다섯살이지만 성격까지도 어린 날의 밤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가부가 분명한 점과 고집이 센 부분이 딱 그랬다. FUG의 정통 후계자로서 아직 위력은 별 것 없다지만 화접공파술까지 시전하는 꼬마 아가씨를 볼 때면 혈통의 위대함을 깨닫기 딱 좋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신체 부위는 단 한군데. 푸른 보석과 같은 눈동자였다. 밤으로 부터 붉은 신수를 물려받은 덕에 푸르게 빛나는 일도 흔하지는 않다만.

 

"나도 돈가스!"

"네네. 그럼 두 개인가요?"

"네 개!"

"네개나 먹겠다고요?"

"뭐 그정도 튀겨야 라크가 먹지 않을까?"

"스텔라가 네 개!"

"헐?"

"음식 욕심은 좋지 않아요."

"그럼 세 개! 치즈도!"

 

정말 먹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양이지만 라크가 있으니 믿어보자는(?) 결론 하에 튀김기를 예열하는 밤의 표정은 실로 복잡했다. 탑의 영웅이자 최고의 슬레이어인 밤이라 하더라도 좋은 아버지가 되는 일은 녹록치 않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밥도 먹기 전에 후식으로 파란 젤리를 외치고 있으니 원. 같은 주문을 넣는 라크가 살짝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쿤은 언제 온데?"

"저녁식사 전에 돌아오신다고 하셨어요."

"근데 왜 걘 본가에 갈 땐 딸을 두고 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녀딸을 얼마나 귀여워 하시는데."

"글쎄요. 언제부터인가 그러시더라고요."

"에드안님이 또 한 소리 하셨겠지. 여하튼 부모는 쿤이잖아? 다 이유가 있을거야."

 

본인도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이니 금쪽같은 딸을 보여주기 싫다는 걸까? 보통 쿤의 고집에는 이유가 붙어있게 마련이라, 이수의 말까지 듣고보니 뭔가 있겠거니 싶어진 왕난은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스텔라. 아저씨들이 선물 사왔는데. 밤이 밥상 차릴 때까지 선물 구경 할까?"

 

*

 

"또 왜 혼자 오는 거냐? 자식은 많아도 손녀라고는 스텔라밖에 없는데 좀 보여주면 덧나냐?"

"덧나죠. 대체 그 어린 애한테 무슨 말씀을..."

"킬킬킬.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러냐. 수명이라는 게 의미 없는 윗세상에서는 당연한 논리이거늘."

"손 치우시죠."

"너라고 V의 아들녀석과 천년만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냐?"

"설령 밤이랑 소원해 진다고 해도 제가 스텔라를 여성으로 보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전 당신과 다르니까요, 아버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였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지 냉대를 당한 에드안은 오히려 자지러져라 웃었다. 에드안이 새로운 역사에 의해 아게로에게 가주 자리를 양위하고 물러난지도 백 여년. 밤이 자하드를 물리친 것과 꼭 같은 해만큼의 세월이 흘렀다. 밤과의 혼약을 계기로 아게로 또한 오래지 않아 가주 자리를 동생인 란에게 넘겼지만 에드안이든 란이든 일반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의 소유자이기 때문인지 쿤 가문에서는 간간히 아게로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가문에 인재가 그리 없다는 건 개탄스러운 일이었으나 자식까지 생긴 마당에 자신의 출신가문이 개차반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부름에 응한 쿤은 오늘도 시작부터 진을 다 뺀 기분이었다.

 

"아게로님! 와 주셨군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또 가주님께서 침실 출입을 금하셔서...."

"하... 이런 일은 저 노인네한테 시키면 안 돼?"

"그러기엔 저희가..."

"크하하하하! 너 정도 되는 배짱을 가진 놈이 흔한 줄 아느냐? 그래서 난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하는 일도 없으면 좀 안 보이는 곳에 쳐박혀 계시죠."

 

자하드와 함께 오랜 시간 지배자로 군림해 왔던 에드안은 지금이라고 약해지진 않았다. 아들에게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한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가문 내 최강자. 가주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아게로조차도 그와의 내기에서 이겨 가주 가리를 차지했을 뿐이지 힘으로 그를 꺾어 누른 것은 아니다. 다만 아게로의 반려인 밤은 실로 출중했기에 많은 사람들은 에드안이 밤의 힘을 두려워해 아게로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라고들 추측하곤 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에드안은 그런 뒷담화가 들리면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다. 설령 뒷 일을 감당 못하게 되더라도 아게로는 한번 품어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지 못하게 할 틈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니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이지. 에드안의 피를 물려받고도 어떻게 이리 다를 수 있나 싶을 만큼 그는 다른 쿤들과도 전연 달랐고 동시에 가장 에드안과 닮아 있었다. 이만큼 성장하고 보니 눈이 부시다고 느낄 정도로.

 

"아게로."

"아직도..."

"란을 깨우고 나면 내게 잠시 들리거라."

"제가 왜요?"

"왜긴. 건네줄 게 있으니 그러지. 네가 그리 딸아이를 숨기니 할아버지가 생일 선물을 줄 수가 없잖니. 넌 헛소리 취급 하겠지만 그 아이가 사랑스러운 것은 사실이란다. 자식과 손자는 확실히 다르더구나."

"......이따 뵙죠."

 

에드안이 V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아들에게 아게로를 내어준 것은 아까웠다. 조금만 더 빨리 그를 알아봤더라면 최소한 쿤의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가주 자리에 묶어두기라도 했을 것을. 아쉬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에드안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아게로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남겨진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더 먼 훗날의 언젠가를 기약해야겠지.

 

*

 

"엔도르시 언니다!"

"그러고보니 왜 엔도르시는 언니고 우리는 아저씨냐..."

"내버려 둬. 애가 뭘 알겠냐. 엔도르시가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니까 시킨대로 하는 거겠지."

 

여전히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인기를 구가중인 엔도르시가 출연하는 방송에 스텔라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자하드의 실각과 동시에 자하드의 공주라는 신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이미 한차례 그 능력과 외모를 검증받은 인물들인 만큼 그녀들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 중에서도 선별인원일 시절부터 발군의 인기를 자랑했던 엔도르시는 그녀의 안부가 전혀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여기저기에서 자주 보였다. 오늘도 화장품과 의류, 그리고 휴양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광고를 통해 옛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녀를 스텔라도 알아보고 반겼다. 밤과 쿤이 둘 만의 거처를 마련하고 집들이를 겸하여 친구들을 불러모았을 때, 유독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주었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비올레. 너도 쟤 못지 않게 돈 많지 않냐? 명색이 FUG의 신인데 좀 더 멋지고 좋은 집으로 가는 게 어때?"

"이사가고 싶을 때도 있긴 하지만 너무 주목을 받으니까요. FUG에서 구해준 거처는 쿤씨의 취향이 아니고, 부유선이라도 알아볼까 하면 주변 시세가 요동 친다고들 난리라서요.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안들면 쿤이 먼저 나설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만족하고 있나보네?"

"저한테는 잘 안 와 닿는데, 여기가 스텔라의 교육에 좋다나봐요. 공기도 깨끗하고 낚시도 할 수 있어서 나쁘진 않아요. 출퇴근이 좀 멀어서 그렇지."

"눈물나는 희생정신이구나... 아, 라크! 넌 뭐 좀 잡았어?"

"시끄럽다! 물고기 거북이가 다 도망가잖아!"

"너 때문이겠지...."

 

분명 낚시를 하겠다고 했으면서 투창을 들고 있는 라크를 보니 제 분을 못 이기고 종목을 바꾼 게 틀림 없어 보인다. 라크가 물고기를 잡지 않아도 외지에 있는 만큼 어느정도 식재료를 비축해 두는 밤 덕분에 먹을 것은 풍족했다. 이수와 왕난도 가볍게 맥주 한 캔씩은 걸친 차였고 정말로 세 개의 돈가스를 먹어치운 스텔라는 그 새 소화를 다 시킨건지 밤이 친구들에게 안주로 제공했던 마른 오징어에 손을 뻗었다. 밤의 부름에 응하긴 했어도 가끔 스텔라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 이외에는 영락없는 글램핑이라 호수가 바로 내다보이는 풀밭에서 캔맥주 하나를 비운 뒤 선배드 낮잠이라니 나쁘지 않은 휴일이다. 저녁때는 바비큐 파티가 예정되어 있으니까 느긋하게 엔도르시와 아닉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라도.....

 

"아빠!!"

"마중까지 나왔어, 우리 딸? 아빠 오늘은 많이 안 늦었는데."

"여, 쿤!"

"쿤씨!"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환한 쿤은 와락 달려와 안기응 스텔라는 품에 안은 채로 먼 곳까지 걸음해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엔도르시만큼은 아닐지라도 FUG의 신으로서 공식석상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밤과 달리 일찍 가주 가리를 넘기고 육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쿤은 이렇게 직접 연락하지 않으면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다. 슬레이어의 상징이 장발이기라도 한 것처럼 FUG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이래로 계속 머리를 길러온 밤과 달리 산뜻하고 가벼운 헤어스타일로 바꾼 쿤은 그래서인지 함께 탑을 오르던 시절보다 앳되어 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거창한 직함 같은게 없어도 그는 쿤 아게로 아그니스. 현존 최강의 영웅이 선택한 반려이자 밤과 친구들의 '위대한 여정'을 이끌어온 최고의 전략가 아닌가?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거야? 설마 우리 먹을 거?"

"아니... 본가에서 스텔라 생일이라고 선물을 전해달리길래. 난 너희가 와 있는 줄도 몰랐는걸."

"완전 서운하다! 네 딸만 챙기고!"

"몰랐다니까. 이제부터 챙겨주겠다잖아."

"파란 거북이! 나는 이쪽이다!!"

"쿤씨."

 

돌아오자마자 칭얼대는 딸과 한 마디씩 거드는 친구들 때문에 혼란스러운 시간을 뚫고, 쿤의 허리를 끌어안은 밤이 짧게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애정행각에 두 사람이 이미 부부라는 걸 알고 있는 친구들 마저도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잃었지만, 자신을 봐 주지 않았던 쿤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는 건지 밤은 쉽게 쿤을 놓아주지 않았다.

 

"에드안님께서 또 곤란하게 하시지는 않으셨죠? 란씨라던가 하츨링씨라던가 아센시오씨도."

"내가 당해줄 사람도 아니잖아? 스텔라. 이거 먼저 살펴보고 있을래? 아빠도 옷 좀 갈아입고 와야겠네?"

"응! 떨어져, 아버지."

"하하...."

"와. 멋있다, 스텔라."

 

탑의 영웅이자 새 시대의 주인. 그리고 FUG와 탑의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추앙받고 있는 현신(現神). 그것이 바로 스물다섯번째 밤이건만, 말 한마디로 먼지털 듯 밤을 떨어낸 스텔라는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천진한 미소로 쿤에게 인사했다.

 

"어서 다녀오세요, 아빠. "

 

확연한 온도차에 라크마저도 눈만 깜빡이는 동안 사랑스러운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쿤은 힘이 풀린 밤의 품을 빠져나가 유유히 집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쿤에게는 상냥해도 밤에게는 배려가 없는 스텔라는 여즉 그 자리에 허탈히 서 있는 밤이 아니라 쿤이 전해준 선물 꾸러미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옮겨갔고...

 

"원래 딸에는 좀 종잡을 수 없고 그렇데, 밤."

"그래그래. 아까까지 우리랑 잘 놀고 그랬잖아. 너무 상처받지 마, 비올레."

"강하게 크는 거다, 검은 거북이."

"넌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 제발."

 

밤을 위로하는 건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모두는 알고 있었다. 다시 문이 열리고 쿤이 돌아오면 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환하게 웃을테다. 어떤 준비에든 꽤 많은 시간 시간을 들이는 쿤이지만, 친구들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끌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는 또 뭘 하면서 여유를 부릴까? 손님으로 찾아온 친구들 마저도 기대하게 만드는 걸 보면 역시, 지금 이 작은 세상의 중심은 쿤임에 틀림 없어 보였다.

 

 

 

 

 

 

 

 

 

 

 

 

 

 

 

 

 

 

 

 이 글은 트친이신 사오님(@SAO_Humpty)의 리퀘입니다!

매우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더니 보통 글양식을 어찌 했었는지 가물가물할 지경이군요....

그래도 이제 마감도 끝났겠다 리퀘 라나만 더 해치우면 시간이 나지 않을까요?

내년이 되기 전에 얼마나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ㅠㅠ

 

 

 

 

Track 02

신의 탑/Exceptional

























방송에 오래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연예인의 눈부신 미모가 쉽게 빛바래지는 않을 터. 식당의 종업원들은 루프탑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를 향하고 있는 중년의 커플을 흘깃흘깃 곁눈질하기에 바빴다. 비싼 자리를 예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너무 출중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빗겨간 듯 잔주름 하나 없는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 군더더기 하나 없이 피팅된 수트의 모양새까지 완벽하게 연예인. 이름은 들어본 적 없지만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인의 다갈색 머리와 중년 신사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에피타이저가 나오기도 전에 식당은 소란스러워졌다.

“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쪽은 예약석이라 이미 다른 손님이 계세요.”

“내가 밥 먹겠다고 했냐? 그 손님한테 볼 일이 있다잖아!”

“그럼 제가 말씀을 전해 드릴 테니 잠시 저쪽 테이블에...”

“야, V!!!”

코트의 앞섶을 다 풀어 헤친 걸로 보아 추위를 그렇게 타는 체질도 아닌 것 같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전부 무언가로 감싼 괴한은 그 수상한 차림새에 입구부터 막아서는 종업원들을 억센 손으로 뿌리치며 기어코 식당 안쪽으로 발 하나를 들였다. 종업원의 수가 좀 되는 곳인지라 곧 2차 저지선에 다시 붙잡히긴 했지만 190은 족히 넘어보이는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완력에 젊은 장정들이 외려 진땀을 뺐다.

“....에드안?”

식당에 소란이 이는 와중이었으니 그림같은 잉꼬부부의 저녁식사도 당연히 순탄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 신사 덕에 종업원들은 수고를 덜었다. 목소리만으로 자신을 알아봤다는 게 그리 즐거운지 양팔을 머리 위로 흔들며 V를 반기는 모양새가 퍽이나 기뻐 보였다. 물론 얼굴마저도 마스크에 선글라스, 넥 워머를 하나 더 낀 상태로 가발에 후드까지 뒤집어써 그의 부모가 온다해도 알아볼 성 싶지 않은 괴상한 몰골이라는 게 문제였다. 코트 안쪽에 모자가 달린 조끼를 껴 입고 바지인지 롱스커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옷으로 발끝까지 감춘 옷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코트. 그 와중에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맨가슴을 드러냈으니..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기 전에 정신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지가 염려되는 차림새의 에드안을 보니 오랜 친구라는 V조차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곤란한 것은 식당의 종업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괴한으로 인하여 그들이 궁금해하던 왕년의 슈퍼스타, V의 정체를 속 시원히 알게된 것은 좋았지만 기괴한 차림의 거한이 쿤 에드안이라니. 글로벌 대스타의 방문에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것이 원래의 수순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차림새가 아니라 부탁한 쪽이 더 민망해 질 것 같았다. 본인은 그걸 알면서도 그 큰 덩치로 방방 뛰며 V를 반기는 걸까?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일단 좀...”

“나 좀 숨겨줘, V!”

“........ 뭐라고?”

오랜만의 데이트를 방해받은 아를렌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에드안이 싹싹 빌 때까지 패 놓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꾹꾹 눌러참으며 남편과 불청객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는 건 과거의 빚이 있어서다. 양가의 반대를 무릎쓰고 맨몸으로 집을 나와 혼인신고를 하고 한국을 떠났을 때, 두 사람이 묵을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 에드안이었다. 집은 물론이고 그가 생활비까지도 지원해 준 덕에 두 사람은 양가의 허락을 얻을 때까지 버틸 수 있었고, 외아들인 밤도 무사히 낳을 수 있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고작 데이트 한번 망쳤다고 타박하기는 그렇고 정말 그가 사기라도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찾아온 것이라 해도 한국에서 머물 수 있게 보살펴 주는 것이 도리겠지마는 천하의 에드안이 사기 같은 걸 당할 리가. 숨겨달라고 하는 이유가 빚쟁이가 아니라면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에 걸맞는 치정극 중이거나 몰상식한 경제활동의 대가로 원한을 가진 이가 뒤를 쫓고 있어야할 텐데 V에 비해서 그를 잘 모르는 아를렌이 생각하기에도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는 이야기다. 애초에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저 괴상한 옷차림부터가 아를렌의 상식을 아뜩히 뛰어넘어 있었다. 아를렌과 같은 이유로 차마 나무라진 못하고 있어도 그녀의 남편 또한 지금 머리 속이 많이 복잡할 것이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겠지.

“아게로가 내가 한국에 온 걸 알면 안 돼.”

“아...”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저 멀리서 암레스트에 턱을 괸 채로 남편과 옛 친구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던 아를렌도 알겠다는 뜻의 탄성을 터뜨렸다. 쿤 아게로 아그니스. 부부의 외아들과 같은 그룹 소속으로 아이돌 활동 중인 에드안의 아들. 그 도련님이라면 에드안의 기행도 전부 이해될 수 있었다. 어째 이번엔 조용히 한국에 넘어왔다 싶더라니 또 에드안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 모양이다. 물론 아버지 못지않게 비상한 수완을 가진 아게로라면 작정하고 에드안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전제 하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을 정상급 아이돌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데 기력을 낭비하고 있을 리는 없다.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비행기에서든 공항에서든 벌써 에드안에게 서슬 퍼런 경고를 보냈겠지.

“에디. 일단 그것 좀 벗고 같이 식사라도 할까? 어차피 내가 이름을 말한 마당에 변장은 소용 없을 것 같은데.”

“헉! 그럼 어떻게 하지?”

“그 쪽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지만 한국에서의 아게로군은 아이돌 가수니까 괜찮을 거야. 그 애 성격에 네가 움직이는 걸 알았으면 공항에서 이미 마주쳤겠지.”

“그런가... 설마 방송에 칼 들고 나오는 건 아니겠지..?”

“칼? 아니, 일단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 법에 저촉되는 일인 걸. 아게로군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 그런 게 허락되는 방송엔 못 나오잖아?”

운전면허야 곧 딸 수 있게 되겠지만 국내 법으로 성인이 되려면 아직 1년은 더 기다려야 할테니 에드안이 어떤 잘못을 했다고 해도 쿤이 흉기를 들고 방송에 나올 일은 없을 터다. V의 말에 납득한건지 에드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넥 워머와 마스크만 턱 밑으로 내렸을 뿐 변장을 아주 풀어 헤치지는 않았다. 한국은 인스타의 나라라는 걸 이미 조사하고 왔다나 뭐라나. 어쩔 수 없이 부부의 데이트는 포기하고 에드안에게도 한 자리를 내어준 아를렌은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인 에드안의 몰골에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곤란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걸 가게 앞에 세워두는 건 더 문제니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에드안?”

시선 처리가 곤란할 뿐이지 성격은 어디 가지 않은 아를렌은 에드안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돌직구를 날렸다. 물 한모금 마시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V보다 담담한 반응의 에드안은 선글라스 속의 시선을 유리 와인잔의 수면으로 떨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

“자존심 같은 거 때문이겠지.”

“....그 꼴로?”

“아를렌.”

“흥. 모양새가 다 무슨 상관이야. 뭐라도 했다는 게 중요한거잖아.”

절제라는 걸 알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틀어질 부자사이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번엔 아를렌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에드안의 말처럼 지금은 행동할 때다. 자존심 따위의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도 두려운 거겠지. 이미 두 번이나 겪어봤으니 일이 벌어진 다음의 후폭풍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일 터다. 아를렌은 잠시 눈을 감고, 먼 이국 땅에서 그녀와 V를 맞아주던 시절의 에드안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보다 젊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그는 야생마 같은 사내였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과 똑같이 바보 같고 똑같이 어리석었기에 더 행복했을 그를 생각하면 그녀 역시도 어쩔 수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




익셉셔널의 정규 3집 활동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국내 팬들은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그들의 화려한 컴백을 반겨주었다. 정상급 아이돌의 증거라는 음원차트 줄세우기부터 이미 뜨거운 반응은 예고 되었다. 국내의 모든 음원 사이트의 1위부터 12위까지를 이번 앨범의 수록곡으로 채운 익셉셔널의 인기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어느 가게에서나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악으로 존재감을 다졌다. 최근의 트랜드라고 할 수 있는 컴백 쇼케이스와 특정 플랫폼의 사전 방송을 건너뛰었음에도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게스트를 초대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너나할 것 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다. TV와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쇄도하는 출연 요청에 방송국의 전 스튜디오 순회라도 나서야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는 벌써부터 휴식기를 노리고 밤에게 드라마 촬영 제의마저 들어오고 있다고 했다. 이만하면 익셉셔널의 출연에 전 PD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비올레의 솔로 곡이 실물 앨범 특전 수록곡이라는 소식에 팬들의 성토가 쏟아졌지만 3집 음반이 날개돋힌 판매량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기획사든 유통사든 상술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어 질 것 같다.

“어? 쿤씨는 같이 출연 안 하나요?”

“아직은 미성년자니까 심야방송 출연은 좀 그렇지. 쉬는 건 아니고... 너 그 때 라크랑 같이 다른 쇼 프로 사녹 있어.”

“악어랑?”

“악어.... 걔가 왜 악어냐?”

“보자마자 떠오르지 않아?”

“그런가....? 요즘 애들 감성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여하튼 이제 이번 주 스케줄은 대충 알겠지? 이번 주도 화이팅 하고. 내가 있다가... 9시쯤 데리러 올테니까 옷 갈아 입고 헤어체크 받고 기다려.”

요즈음 아이돌 치고는 드물게 정규 앨범으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데뷔 2년 차에 3번째 정규 앨범이라는 것도 빠른 편이지만 데뷔부터 인기몰이를 했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숨가쁜 활동이 전혀 이상하진 않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시작부터 팀의 가장이었던 비올레가 여러 연예활동에 매진하며 성과를 올려 주었고 다른 멤버들도 뒤를 이었다. 그나마 개인사도 복잡하고 나이 때문에 방송 활동에 일부 제약이 있는 쿤만이 익셉셔널 이외의 활동이 없다시피 했는데, 조만간 모국 기준으로는 법적 성인이 되니까 휴식기에 접어든다고 해도 섭외 요청이 쇄도하지 않을까? 일단 미끼는 던져 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이 바닥의 특징이니. 활동이 있는 아침에는 거의 항상 숍에 들러서 정비를 받긴 하지만 오늘은 어제 저녁에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나오는 게 늦어서 일부 순서를 좀 뒤집었다. 그래서 더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고 벤에 올라타면 또 다들 깊은 잠에 빠진다. 물론 라우뢰처럼 그런 것과 아무 관계 없이 늘상 수면상태를 갈구하는 인물도 있긴 하지만.

“저기 쿤씨.. 주무세요?”

“아니? 왜?”

“엊그제 유 실장님이랑 무슨 얘기를 하셨나 해서요.”

“아.. 우리 아버지가 사고를 쳐서.”

“네?”

“지금은 잘 해결 됐어.”

“진짜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의 밤이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밤의 귀여운 표정에 쿤은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분명 연상이라고 들었는데 저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귀여움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환경상 쿤은 귀엽다는 칭찬은 받아본 일이 거의 없이 자랐다. 작고 앙증맞을 시절부터 귀여움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성인이 가까워 온 지금에는 더더욱 관련이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귀여움이라는 건, 혹은 애교라는 건 사랑받고 자라온 사람들이라는 증거 같은 거라고 쿤은 생각했다. 그저 맛만 본 정도인 자신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무언가를 밤이 가지고 있다는 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부럽다.

“응. 그러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

“무슨 사고를 치셨던..? 건데요?”

“그 말은 좀 이상하다?”

“말 돌리지 마시고요. 실장님 호출이라고 해서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

물론 밤도 말을 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쿤이 짚어주니까 부끄럽고, 그 분위기 대로 쿤이 대답을 회피할까봐 억울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겉으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고 해도 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어울려 주고 있던 쿤이 이런 사건들을 빌미로 활동을 그만 두겠다고 할까봐 밤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쿤은 밤의 걱정을 몰랐으면 싶다가도 막상 진짜 모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면 이렇게 억울해져 버리는 자신을 밤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언제 말똥말똥 귀여운 표정을 지었었냐는 듯이 쿤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을 들이미는 통에 정말로 놀란 쿤은 밤의 얼굴을 일단 밀어냈다.

“잘 해결 됬다니까. 그래서 이렇게 같이 활동 중인 거 아냐.”

“에드안씨가 정말로 위약금 물고 쿤씨를 데려가려고 했었어요?”

“뭐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였어?”

“아니요! 왜 그렇게 큰 일을 얘기 안 했어요?”

“안 한게 아니라 못 한거지. 스페인에 가 있을 때 알았고 그 길로 뛰어왔는 걸.”

“그럼 이제 괜찮은 거에요?”

“응. 어차피 곧 성인이니까 생일 지나면 바로 계약서 다시 쓰기로 했어. 혹시 모르잖아.”

“다행이네요. 그런데 쿤 씨의 본가는 아르헨티나에 있지 않던가요? 스페인쪽으로 자주 가시네요?”

“국적이 거긴데. 난 어머니쪽 성을 쓰잖아?”

“그런 거였어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고 눈으로 이야기하는 쿤을 보니 할 말도 없고 머쓱해진 밤은 머뭇머뭇 쿤의 어깨를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집안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쿤이 싫어하니까 못 한 거지만 지금 시시비비를 가려 무엇할까? 일이 잘 해결 되었다니까 그걸로 만족해야지. 밤이 납득한 분위기가 돌자 쿤도 곧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예민한 그 답지 않게 최근에는 잠을 잘 자고 있는 편이지만 과로로 입원까지 했던 몸이라 아직 피로한가보다. 졸다보니 자연스럽게 밤의 어깨에 기대는 쿤의 머리를 받혀주며 밤은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결과적으로 밤이 그를 위해 한 일은 아직도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만 쿤이 스스로 밤의 곁에 남기 위해 노력해 주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벅차올라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의 성격에 정말 한국에서의 아이돌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에드안을 핑계로 우선은 이 팀을 빠져 나갔을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랑 비슷한 건가?’

앉은 채로 키를 가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의 어깨얹힌 눈부신 색채의 머리통을 보며 밤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둘의 성장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쿤의 나이가 더 어린만큼 곧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테니까 말이다. 촬영을 할 때는 정해진 배치가 있고 또 그 배치를 따라 갔을 때 전체 그림이 좋게 나오도록 여러장치를 하기 때문에 당장의 실제 키를 가늠하긴 어렵다. 에드안이 장신이라더니 유전자의 힘인지 쿤은 처음 팀에 힙류할 시점부터도 나이에 비해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한번 앞지르고 나니 따라 잡힐까봐 신경이 쓰이게 된 밤이었다. 솔직히 너무 남자답게 자라서 밤이 좋아했던 모습이 전부 사라지면 어쩌나를 걱정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최근의 쿤은 너무 말라서 그런 걱정은 아예 잊어버렸다. 그래도 따라잡히는 건 싫으니까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키를 키워야지. 애초에 다른 사람의 성장을 밤이 원하는 방식대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였고 그럴 방법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을 보니 밤의 걱정은 기본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밤의 첫사랑일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의 사랑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제 몸은 좀 괜찮아지셨나 모르겠네..’

키는 지금 정도의 차이가 딱 좋다고 생각하지만 건강이 나빠져서 쿤이 더 크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활동이 이어지는 동안은 스스로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고있는 만큼 밤은 쿤의 몸 상태가 제일 걱정이었다. 자세히 들은 적은 없지만 쿤의 어머니도 쌍둥이 누나도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기에 그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걱정이 앞서곤 했다. 쿤은 아버지 쪽을 많이 닮았다고 하고 그 아버지 되는 에드안은 아직까지 물 건너의 연예계의 패왕이라지만 어머니쪽을 본 적이 없으니 다들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이야기 하는 건지도 모르잖는가?

“올레야, 이제 애들 좀 깨워라. 거의 도착 했거든?”

여하튼 밤이 고민을 이어갈 수 있는 시간은 오늘도 길지 않았다. 3집 활동은 이제 시작이다. 요즈음은 한 곡의 활동이 길지 않지만 그만큼 더 밀도 있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힘을 내서 어서 해치우고 다시 숨 돌릴 틈을 얻어야지. 아이돌의 주말은 그렇게 얻을 수 밖에 없으니까.




-




에드안은 결과적으로 V와 아를렌의 집 손님방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밤이 본가로 돌아올 일은 당분간 없을테니 에드안이 무리하게 외출을 강행하지만 않으면 한국에 있어도 쿤에게 들킬 염려는 거의 없는 셈이었다. 남은 문제는 에드안이 과연 자기 성질을 얼마나 죽일 수 있느냐.

“에디, 마스체니한테는 이야기를 잘 하고 온 거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어차피 요즘은 안 좋을 때야. 나랑 눈도 안 마주치는 걸.”

“그럼 아게로군이 더 힘들어 지는 것 아냐?”

“그래서인지 돌아올 마음이 없어 보이던데. 내가 직접 찾아온 것도 그것 때문이고.”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하겠다는 거야? 대단하네... 우리 아들도 그런 건 좀 배웠으면 좋으련만.”

“넌 왜 아들을 못 쫓아내서 안달이냐. 자식이라봐야 하나 밖에 없잖아.”

“내 쫓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결단력이 있다던가 심지가 굳다던가 하는 말들이랑은 거리가 멀거든 애가.”

자식을 상대로나 아내를 상대로나 팔불출 소리 듣기 딱 좋은 성격의 V가 왠일로 아들에 대한 푸념을 한다 했더니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는 흐름이다. 에드안이 아는 밤도 확실히 누가 등을 떠다 밀기 전까진 혼자 결정을 못하고 우유부단한 편이지만 어머니를 닮아서 한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밤이 아게로 같이 판단을 내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독불장군이 따로 없을텐데 차라리 지금이 낫지 않으려나? 여하튼 밤의 단점이 ‘우리 아들은 심성이 너무 고와서 말이야..’로 시작되는 아들 자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별 생각 없이 들어주며 에드안은 차 대신으로 V가 내어온 레드와인을 홀짝였다. 일단 친구의 취향을 잊지 않아준 것 까진 고마운데 아를렌이 없었다면 안목은 싸구려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친구답게 그렇게까지 고급스러운 풍미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까도 물어봤지만 아게로군을 만날 수도 없으면서 한국엔 왜 온 거야?”

“만날 거야. 먼저 어떻게든 설득을 좀 시키긴 해야겠지만.”

어떻게든이라고 하는 걸 보니 계획 없이 일단 한국에 와서 생각하자는 식으로 무작정 입국한 것에 틀림없어 보인다만, 변장이랍시고 걸쳤던 괴상한 옷 더미를 풀어놓은 에드안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표정을 지운 그 얼굴을 언제 봤었는지 떠올린 V는 허점을 찌르려다가 그만 두었다. 평소의 가벼운 분위기가 사라졌을 때의 에드안은 실로 위험한 남자였다. 물론 V가 두려워 하는 건 그의 힘이나 권력을 이길 수 없음에서 오는 무력감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성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될까? 사정을 알아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달쯤 전에 아게로가 갑자기 쓰러졌었어. 아주 늦은 시간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발견했지. 뭐, 진탕 마시고 들어오다 문을 잘못 연 것 뿐이었지만 여하튼 운이 좋았어.”

“설마..”

“맞아. 그 설마지. 난 당장 입원시키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어. 위험하니까. 그런데 아게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보다 본가에 붙어있는 게 더 싫었던 모양이야.”

“곤란하네.. 그러고 바로 한국으로 와 버린 거지?”

정확히 잘잘못을 가리지면 아게로가 본가에 있을 때 마저도 허랑방탕한 모습을 보인 에드안도 문제였겠지만 그것부터 나무라면 큰 맥을 짚을 수가 없다. V 내외의 외아들인 밤의 친구이기도 해서 그도 꾸준히 안부를 묻곤 했던 에드안의 아들이니 모르는 척 하기도 어렵다. 아니 그 전부터도 어쩌면....

“밤한테 연락이 닿으면 아게로군을 초대하라고 얘기를 해 볼게. 답답하겠지만 그 때까진 여기에서만 지내는 게 좋겠어. 들키면 안된다고 네 입으로도 얘기했었잖아?”

“으... 언제쯤 네 아들한테 연락할 수 있는데?”

“문자야 당장 해 보겠지만 애가 워낙 바빠서 말이지.. 이번 활동이 끝나야 하니까 한 한달쯤 걸리지 않겠어?”

“한달이나 걸린다고?!!!”

“네가 아게로군이랑 대화에 실패하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윽..”

“잘 생각해봐, 에디. 한달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야. 네가 좀 믿음직한 이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는게 아게로군을 설득하기엔 더 나을 거 아냐. 네가 변하지 않는데 아게로군이 본가에 돌아가려 하겠어? 그 집에 진짜 가족이라고 할만한 사람은 너 밖에 없는데 네가 잘 해야지.”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어 에드안의 머리는 V의 말이 길어질 수록 점점 더 깊이 숙여졌다. 에드안에게 아게로가 필요한 것이지 아게로는 아버지라면 학을 떼니까 노력해야 하는 쪽이 에드안이라는 건 정해진 사실이다. 다만 불리한 관계에 놓여본 적이 없으니 에드안의 본능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겠지. 긴 한숨을 푹푹 뱉어내긴 해도 에드안은 끝끝내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게로마저 없어지만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곁에 있으면 그나마 눈으로 확인 하면서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참는다고 해도 기약이 없으니 그게 문제지.

“한 달만 참으면 될까? 네가 잘 말해주면 아게로도 마음이 풀릴까?”

“솔직히 네가 지금까지 해댄 게 있으니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래도 이야기할 마음 정도는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는 안 돼! 난 더 힘들더라도 성과가 좋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그게 다 네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잖아, 에디. 그 애와 무슨 이야기를 할 지 고민하는 데 한달 정도는 써야하지 않겠어? 그런데 대체 아게로군이 뭐라고 했길래 당장 찾아가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는 거야?”

“....... 찾아오면 눈 앞에서 죽어버릴 거라고 했어.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못 할 것 같냐고.”

“...하.. 하하.... 무시무시한 협박이네..”

“걘 진짜 한다고! 쥐방울만할 때도 봐. 내 돈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한마디 했다가 정말 너희 집으로 가출 했잖아.”

생각해보니 V도 아게로의 결단력을 부러워해선 안될 것 같다. 밤은 지금의 밤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을 고쳐쓰며 V는 드디어 한달간 모범적으로 살아갈 결심이 선 것 같은 에드안의 넓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행 온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긴 정말 멋진 곳이거든요.

도피생활이었지만 에드안과 V 내외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남편의 오랜 친구라는 말에 몸소 찾아왔던 아그니스는 그들의 기억 속에선 온기 그 자체였다. 그 날의 햇살이 지금의 에드안을 붙잡아주고 있다는 걸 V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에드안 내외가 V와 아를렌을 돌봐준 건 밤을 얻을 때까지 3년 여. 그 시간에 힘입어 여태까지 행복을 유지한 V가 그녀의 피붙이와 관계된 일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들인 밤도 아게로를 무척 좋아하는 눈치이기까지 하니까.




-




“쿤? 그렇게 졸려?”

“이제 시작인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군.”

“뭐래. 카메라 앞에서만 안 그러면 되는 거지.”

인기인이면 아무래도 아무것도 없는 시절보다는 나은 구석이 많지만 아이돌 가수의 뿌리깊은 위계질서상 불합리하게도 선배 가수의 일정에 많은 것을 맞추어야 했다. 존경할 구석이 있다거나 융통성을 발휘할 때도 있는 선배라면야 원래 이 바닥의 규칙이 그렇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후배의 인기를 질투해 이렇게 눈에 보이는 행패를 부릴 때는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나마 팀 메이트들의 성격이 좋아서 시간 떼우는 건 문제 없는데 피로감이 가시지 않아 평소보다 몸이 무겁다. 당장은 대기 중이니까 상관 없지만 쿤이 실수를 연발한다던가 리허설 시간을 길게 잡아먹으면 재수없는 유한성 실장이 이때다 하면서 호출할테니까 바짝 신경 써야겠다. 한성은 소문처럼 에드안 안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까지 치사하게 물고 늘어지는 타입은 아니라서 본업만 완벽하게 처리한다면 의외로 따로 귀찮게 하진 않는 스타일이다. 한번씩 있는 상담을 늘 더럽게 마무리하는 건 어쩔 수 없고.

솔직히 전 이렇게까지 해서 쿤씨와의 계약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생각하면 골치만 더 아파질테니 억지로 머리를 휘휘 저어 생각을 흩어버린 쿤은 이수의 이어폰 한 쪽을 빌려 귀에 꽂았다. 팀의 프로듀서 답게 선곡센스가 좋은 이수는 이번에도 처음 듣지만 느낌은 좋은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채워 놓았기에 흡족하다.

난 너 까지도 그렇게 잃을 수는 없다.

가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 놀음에 겹쳐들리는, 두껍고 거칠지만 익숙한 그 목소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드디어 쓰네요...
이제 완결까지 한 우물을 팔 수 있을지에 대해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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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 - 하진성 x 쿤] 일탈

신의 탑/단편












요 근방의 치안이 좋지 않다는 걸 진성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만한 인물이기에 집값이 가장 저렴한 곳으로 주거지를 결정한 것일뿐. 사는 곳은 밤문화의 메카나 다름없는 유흥가지만 왠만한 소음에는 내성이 있는 진성이기에 이 동네는 그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진성 본인 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살기 좋은 동네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이 곳에서 익히 아는 얼굴을 발견한 진성은 바로 이마를 짚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도제교육을 맡게 된 제자의 친구였다. 제자인 밤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더 엄격한 환경에서 자란 집안 좋은 도련님이 어쩌다 이런 뒷골목으로 흘러들게 되었을까? 여하튼 진성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기에 그는 머지않아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슬럼가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쿤 가문의 외모가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든 다 아는 척 하고 보는 저 건방진 도련님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도 분명했고.

"어이, 꼬맹이."

아마도 처음보는 것들 밖에 없었을 거리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소년의 얼굴 빛이 바뀌었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분명 싫어하는 별명을 불렀다며 토라졌겠지만 당장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리라. 진성의 앞까지 제 스스로 다가오는 초유의 서비스까지 시전한 꼬맹이, 그러니까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보석같은 눈동자를 굴려 진성을 올려다 봤다. 고등학생이면 한참 클 나이라지만 진성에 비해서는 아직이었으니까.

"이 동네에는 어쩐 일이야?"

"내가 할 말이다 꼬맹아. 넌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아는 거냐? 네 운전기사라면 내려 달라고 해도 안 내려줬을 곳인데."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안 돌아 갈 건데."

"안 돌아간다고? 왜?"

싸웠으니까.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아들내미랑 싸워서 유치하게 이런 신경전을 벌이게 만든 사람이라면 잴 것 없이 그의 아버지인 에드안일 터였다. 보지 않아도 그려지는 풍경에 진성은 다시 한 번 이마를 감싸쥐었다. 그 불 같은 성미를 못 이기고 에드안이 당장 나가라 비슷한 소리를 한 것 같은데, 귀하게 자란 덕에 생활력도 없는 주제에 맹랑하기만한 도련님이 진짜로 뛰쳐 나왔으니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야 하려나. 안면이 없는 사이 같았으면 모른 척 했을 일인데 이미 그럴 수는 없었던 지라 하릴없이 진성은 손끝을 까딱여 아게로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주었다.

"아버지랑은 또 왜 싸운 거냐. 네가 진짜 안 돌아가면 그 놈 성격에 이 일대가 전부 난리일 텐데."

"몰라 그런 거. 나가래서 나왔으니 된 거잖아."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쿤 가문은."

잘못을 인정하라는 닥달을 곧이 곧대로 듣고 교복 차림으로 집을 나오다니. 또 나왔으면 친하게 지내는 친구 집이라도 찾아갈 것이지 왜 이 위험한 밤 거리를 헤매고 있냔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아게로가 정말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에드안의 손에 이 거리가 통째로 불도저로 밀리고도 남을 일이건만.

"하루 재워 줄 테니까 이 이상은 시끄럽게 하지 말고 당장 돌아가라. 꼰대들이 이 동네에서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니."

"굳이 따지자면 아저씨도 꼰대에 가까운 쪽 아냐?"

"잘 데가 따로 있나보지?"

"하긴 아저씨가 좀 젊게 살지."

".....밤한테 가 보는 게 나았을 텐데."

"싫어. 안 가."

"설마 밤이랑도 싸운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거기 있으면 아버지가 너무 금방 눈치채니까."

말하자면 상대가 아버지라고 해도 기싸움에서 쉽게 밀릴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익히 아는 대로 맹랑한 도련님이라지만 그런 아게로가 얌전히 자신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게 또 재미있어서 막 빼어 문 담배연기를 뱉는 진성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욕실은 저 쪽이다. 그런데 너, 갈아 입을 옷은 있는 거냐? 학교는?"

"없어. 학교도 안 갈거야."

"뭐?"

빈털터리라는 말은 뭐 그렇게 당당하게 하나 싶은 사이에 파란 머리통이 진성의 코 밑을 지나쳐서 욕실로 들어갔다. 같은 남자건만 짤 없이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리는 걸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진성은 확 미간을 좁히며 이제는 필터만 남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욱여넣었다. 일단 데려온 건 자신이니 내키진 않아도 책임을 져야 했기에 잠옷으로 쓸 만한 옷가지가 있는 지부터 살폈다. 혼자 산 지 30년도 더 되었고, 그간 옷차림에는 신경을 끄고 살았으니 일관되게 고집해왔던 셔츠밖에는 마땅한 게 없었지만 말이다. 최대한 닿는 감촉이 좋은 녀석으로 골라 욕실 앞에 던져둔 진성은 잠자리에 이어 냉장고까지 살폈다. 정말 맨 몸으로 집을 나왔다면 저녁을 먹었는지도 미심쩍기 때문이었다. 한참만에야 귀신같이 진성의 셔츠를 입고 나온 아게로는 10시가 넘으면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말로 호의를 거절하긴 했지만.

"내일 아침으로 줘."

"내가 네 식모냐. 아무튼 건방진 꼬맹이 넌 일단 여기서 자라. 네 침대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우리집에 제대로 된 침대는 그거 하나니까."

"아저씨는?"

"난 소파에서 잘 거다. 어차피 늘 그랬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진성의 셔츠가 아게로에게는 큰 사이즈긴 해서 미니드레스처럼 가릴 곳을 가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진성의 속옷마저 빌려주는 건 내키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던 게 걸려서, 묘하게 남사스럽고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는게 버거웠다. 집 주인이 쫓겨난 모양새로 침대까지 양보한 건 그래서였다. 소악마 같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 버린 건지 더러움이라고는 모르는 듯한 얼굴과 표정으로 진성의 뒤를 따르는 소년이 그는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중성적인 외모에 물기까지 어려 더욱이 청초한 미모가 부담 만큼의 죄책감을 안겨줬다고 해야할까? 비누향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고 해야할까. 잘 자라는 말로 억지로 떼어내진 아게로는 머리 속을 정리하기 위해 몇번 눈만 깜박이다 이내 진성의 침대에 몸을 뉘였다. 고민해야할 일이 산더미였지만 당장은 너무 피곤했다. 별세계 같았던 이 동네 밤 거리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해서 낯선 잠자리 같은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뜻밖의 배려에 마음까지 녹아버려서 더 아늑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이런 곳이 진짜 집이라면 더 없이 좋을텐데. 내일부터는 이 집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모략을 펼쳐 봐야겠다. 에드안과의 기싸움보다는 그 편이 훨씬 가치있을 것이다. 아마도.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트친이신 사이하이님의 리퀘입니다..
올리기만 하고 손보질 않아서 밀린게 많은데 오늘도 시간이 별로 없네요 ㅠㅠ
짧고 부족한 글이라 말씀해 주신 내용의 반도 못 담은 것 같습니다만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사이님 ㅠ

[신의 탑 - 밤 x 쿤] 첫키스

신의 탑/단편














분명 요리나 간식 준비에 관한 일로 누군가에게 타박을 들은 일은 없는데, 밤은 긴장한 눈빛을 옆으로 흘렸다. 오늘의 손님은 특별했다. 시험공부를 같이 하자는 말로 초대한 쿤은 밤이 안내한 거실의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실내의 곳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처음 본 공간에 대한 호기심 밖에 담겨있지 않은 시선이 고양이 같았다.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는 잠깐 기색을 살피려는 것 뿐이던 밤의 눈을 잡아두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밤은 망설임을 마치고, 간식이 든 트레이를 들고 돌아섰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쿤씨. 점심은 이따 시간 봐서 시켜먹으면 되겠죠?"

"아아.. 생각보다 아기자기한 집이라서 놀랐어. 인테리어도 취미인 거야?"

"아니요. 어머니 취향이에요."

친구사이에 '씨'라는 호칭은 매우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겠으나 밤이 그를 처음 만난 건 상류층 자제들 간의 사교모임에서였다. 그 때의 호칭이 지금에까지 굳어져 버린 것이다. 형제들의 손에 끌려 억지로 오기라도 한 건지 당시의 쿤은 모임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름을 알려주는 일도 없이 슬그머니 테라스 중의 하나로 숨어 버린 것이다. 밤이 그에게 첫 눈에 반해 그 움직임만 쫓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가 왔었다는 걸 기억할 수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퇴장이었다. 이름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패밀리 네임으로 말을 붙였던 것이었는데, 그러고 나서도 통성명 같은 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참 찾았잖아, A.A.

그의 형제가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그를 찾아올 때까지도 말이다. 예의 '쿤씨'를 찾으러 왔던 하츨링에게 캐물어 그가 밤이 재학 중인 대학에 원서를 넣었다는 걸 알게된 이후로 끈질기게 따라붙은 덕에 밤은 그와 교제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풀 네임을 들은 것은 그 이후에나 가능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처음 본 날부터 밤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그 때까지도 대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탓이다. 뿐만 아니라 쿤은 상류층 사회의 까다로운 예절이나 첨예한 화술에 대해서도 막히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단지 그런 자리에 끼어 있기를 싫어할뿐. 정리에도 소질이 없는 밤은 초대를 해 놓고 나서야 왜 자기 집으로 쿤을 초대했는지 후회했다. 급하게 정리도 하고 청소도 했지만 평소에도 완벽하던 그를 생각하면 그의 눈에 못 미치지 싶었던 것이었다. 매사에 정돈되어 있는 모습만 보이는 그의 눈에 밤의 노력이 어떻게 비칠까?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벌어진 일.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긴 했어도 진짜 허락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당장은 그 기쁨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어쩐지. 너랑 분위기가 좀 다르다 했어."

"제 분위기는 어떤데요?"

"그냥 이것 보다 좀 어두운 톤이 취향이 아닐까 했었거든."

"그렇죠. 전 밝은 색이 도통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그럼 나랑은 왜 사귀자고 한 거야?"

"그, 그, 파란색은 예외거든요?"

"아. 맞아. 그렇네."

연애하는 재주만은 물려받지 못한 것 같아 보이던 그가 밤과 교제를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밤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연일 화제였지만, 그래서인지 '진도'를 나갈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친구들이 입을 모아도 당사자인 밤이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쿤은 항상 다 아는 듯 웃고 있어도 가끔 밤과의 연애에 자신이 없어보였다. 밤은 분명 쿤이 알고 있는 정보의 반만큼도 모르겠지만 천하의 쿤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었다. 터무니 없게도 그는 스스로를 너무 몰랐다.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연애에 있어서는 수동적인 것이다. 밤은 두 사람이 연예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합리적 의심이 확신으로 변할 때 쯤, 그래서 밤은 무엇이 되든 행동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자신이 먼저 한 발 내딛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밤이라고 연애 경험이 풍부하다거나 스킨쉽의 대가 같은 건 아니었으나 그와 하고 싶은 일이 잔뜩 밀려있는 쪽이 밤이었으니까.

'분명 연인...이니까 그렇게 나쁜 마음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결심을 하고 나서도 망설이는 건 그만큼 쿤이 소중해서다.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무조건 밀어붙이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설상가상으로 밤의 재치있는 대답에 말갛게 웃는 그가 너무 예뻐서 더더욱.

"잘 어울려서 다행이야."

분명 밤은 쿤이 모르게 그의 등 뒤로 점점 뻗어가던 손을 거두었었는데 들릴 듯 말듯한 그의 목소리가 밤을 확 끌어당겼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 그 감정이 여하튼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그랬나보다. 청량한 색채의 모발에서 어째 달콤한 향이 났다. 이번에도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이끌려 눈을 감았다. 그간의 무던한 시도와 포기가 무색할만큼 순식간에 촉. 입술이 닿았다. 그를 상징하는 색채와는 완전히 다른, 온기의 촉감에 놀라 순식간보다 더 빨리 멀어지고 말았지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자 마자 머리 속에서 터져버린 열기에 당황해 쿤을 밀어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뜻밖의 봉변이었기에 마찬가지로 사고회로가 정지당했는지 쿤은 아무런 말 없이 아랫 입술에 손끝을 얹은 상태로 어디를 향하는 지 알 수 없는 눈을 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밤이 자신이 보았던 풍경을 슬로우 모션으로 전부 복기할 때까지도 말이다. 꽤 오랜 시간의 침묵 후에 사건의 끝에 닿은 밤이 넋이 나간 듯한 쿤을 발견하고도 말의 시작을 찾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무렵. 숨이 터지듯 가볍게 쿤이 웃었다.

"저... 쿤씨?"

"이런 속셈이 있었는 줄 몰랐네."

"아니,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안 돼지.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어, 네... 괜찮으셨어요?"

"괜찮은 건 아닌데...."

첫 키스가 거의 도둑키스였는데 괜찮을 리가..라고 곱씹고 잇는 밤의 마음이 보인다는 듯, 쿤은 눈빛을 누그러뜨려 밤을 위로했다. 쿤은 분명 밤보다 연하지만 말투 때문인지 아니면 아는 것이 많아서인지 오히려 연상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 꼭 지금 같은 때.

"나도 처음이었는데 뭐."

아니 방금 한 말 완전 취소. 홍조가 도는 듯한 얼굴이 보인 풋풋한 웃음에 밤의 내면에는 다시 한 번 폭풍이 몰아쳤다.





















이상 그림존잘 MA님의 리퀘였습니다.
분명 리퀘를 받을 때는 상큼달달이 땡겼는데,
쓰는 도중에 상큼달달이 다 죽어버렸고
연애세포는 태상부터 없다보니 ㅠㅠㅠㅠ
퇴고도 미루고 이꼴인 저를 용서해 주십쇼 ㅠㅠ
솔찍히 마님께서 그림그리시면 이거보다 명작이 나왔을 거에요 ㅠㅠ
허엉ㅠㅠ




다섯 송이

신의 탑/봄 꽃

 

 

 

 

 

 

 

 

여긴 어쩐 일이냐, 귀치장?”

 

교양 수업이 아닌 이상에야 인문관 쪽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쿤이 캠퍼스를 횡단하다시피 하는 거리에 있는 체육관을 찾은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는지 견원지간이나 다름 없는 사이임에도 하츠는 꽤나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싫어하는 별명으로 부르는 무슨 친절이냐고 쿤은 반박할수도 있겠으나, 육두문자 섞이지 않은 문장이 완성되었다는 어디냐고 둘을 지켜봤던 모두는 대답할 것이다. 감춰 두었어도 탐스러운 여우귀가 쫑긋거리는 휜히 들여다 보이는 표정인 하츠에 , 가문의 등장에 소란이 일고 있는 체육관에 한숨을 쿤은 바로 목적인 서류봉투를 던지듯 하츠의 품에 안겨 주었다.

 

네가 전단을 놓고 가서잖아. 오늘 실기동에 뿌린다고 해놓고는. 하여간 임원이라는 녀석이 책임감 없이.”

 

“...그.... 오후에 거라 두고 갔던 거다. 멋대로 방해하는 거냐.”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하지. 기껏 갖다 줬더니 말이야.”

 

다시 갖다 둬도 내가 점심 가져올 거다.”

 

뭐래. . 내가 돌리고 말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건 일이.”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저런 일로 싸우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으나 맡겨진 일에 대한 의무감이 투철한 하츠에게는 다른 어떤 말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그것이었기에 쿤은 하츠의 일을 자신이 처리 하겠노라 선언한 것이었고 효과는 굉장했다. 서류봉투의 사수를 위해 완전히 품에 안은 하츠는 연습용의 목도를 세워 방어태세를 취했다. 하츠의 목도는 날이 있는 진짜 검은 아니지만 그가 경호과이기에 소지할 있는 특혜품목인 만큼 둔기로서의 효용은 충분했다. 물론 수인들의 진짜 결투에서는 속성의 사용도 빈번하지만 당연히 캠퍼스에서 그런 류의 폭력이 허용될 리가 없었다.

 

항상 손이 먼저 나오시지.”

 

쿤은 하츠처럼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나갈 수는 없는 터라 싸울 자세를 잡는 대신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모방에 불과하지만 경쾌함은 살아있는 셔터음이 찰칵하고 사람 사이에 울려퍼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는 하츠를 뒤로하고 아쉬운 기색 없이 쿤은 돌아섰다.

 

해봐라, 머슴. 경호과 학생이 허가 무기로 위협했다고 게시판에 신고하기 전에.”

 

.....? ! 귀치장!”

 

무기 소유를 허가받는 대신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은 법규의 특성상 당연한 논리다. 열혈 청년인 경호과 내에서는 시비가 걸렸기로서니 이런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어서 몰랐는데 제대로 자세를 잡은 상태에서 사진을 찍혔으니 증언들이 하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더라도 며칠동안은 귀찮게 되어버렸다. 물론 쿤이라고 해서 당장에 경호과 학생에게 협박당했다는 신고를 접수하지는 않겠지만 골려먹혀진 하츠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던 하츠는 코너를 돌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에 혀를 찼다.

 

대체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녀석은...”

 

 

 

 

*

 

 

 

 

협탁을 손톱 끝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톡톡 일정한 박자를 때렸다. 에드안이 머리를 써야할 일은 많은 편이 아니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질 때마다 나오는 버릇은 아들인 아게로에게까지 이어졌다. 에드안의 소싯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게로를 보게 되면 에드안과 판박이라는 평가를 붙이곤 했으니 당연한 것일까? 아게로가 아무리 아버지를 자신의 인생에서 밀어내려 애써도 유전자에 새겨진 그의 근원이 결국 에드안에게 닿아있다는 아버지된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다. 생모인 아그니스가 그렇게나 탐내던 능력 사람이 잉태하고 있던 것일까?

 

“.....마리아의 보고가 석연치 않으십니까?”

 

애에게 기대를 적이 없으니 석연치 않을 것도 없지.”

 

에드안은 실로 자녀들에게 아무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그의 자식이라기 보다는 보좌에 가까운 역할을 맡고 있는 마스체니와 아센시오를 비롯하여 전원은 에드안에게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다. 그렇게에 장기말처럼 부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를 거쳐간 수많은 여인들도 그러했다. 그나마 잠자리 말고 다른 흥미를 끌어내기라도 했던 먼저 이혼을 제안했던 아그니스였다. 결과적으로 합은 에드안의 승리로 기록되긴 했으나 에드안은 그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 할만한 호적수라는 점은 인정했다. 여하튼 그녀는 에드안보다 앞서 아게로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에드안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보석을 존재조차 모르는 채로 도둑맞을 했으니 다른 여인들과 같은 취급은 할래야 그럴 수가 없었다.

 

다만천리안이라고 불리기는 해도 실로 그런 이능은 가진 아니니 여태 안에 있었던 건데... 미세한 균열을 너희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작당한 아니라면 아게로가 뭔갈 찾아다는 뜻이겠지.”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됐다. 아비의 흥을 깨지 말거라.”

 

판을 읽고 흐름을 바꾸는 능력이 출중한 아게로가 여태 에드안의 수중에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에드안이 가진 권력과 힘에서 기인한다. 에드안의 인맥이 아게로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내는 이만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제로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은 전부 에드안과 연결되어있다. 가족관계나 집안 간의 친분 같은 것들로 말이다. 헌데 간간히 끝없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비는 부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틈이라는 것은 없는 것과 조금이라도 있는 간의 상황 차이가 현저하다. 그건 아게로가 여전히 에드안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이기는 해도 자신을 굴러싼 굴레를 아주 조금씩 벗겨내는 일을 멈춘 적은 없었다는 의미다. 가슴이 뛰었다. 에드안에게는 낯선 감각이었다. 당장 엊그제만 해도 무기력한 몸을 떨며 독을 받아 마시더니, 뒤로는 맹랑히 에드안을 덮칠 파도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과연 에드안을 물어죽일 독사 답지 않느냐.”

 

 

 

 

*

 

 

 

 

인문관 쪽으로 모퉁이를 돌아서자 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괴한이 쿤의 옆을 덮쳤다. 담벼락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기라도 새까만 사내였지만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는 순간 일그러지는 주변의 풍경에 쿤은 오히려 표정을 밝혔다. 그가 익히 아는 자였다. 마음놓고 기댈 있는 쿤의 안식이자 .

 

비올레!”

 

갑자기 찾아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감시가 심해졌다고 하셨으면서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셔도 되는 건가요?”

 

그럴 오히려 방심하는 법인데 모르는 소릴 하시네.”

 

쿤씨를 믿긴 하지만 역시 걱정되는 걸요. 게다가 요즘엔 에드안님께서도 매일...”

 

예상했던 일인데 . 너야말로 조심해. 능력에 대해서 들키면 FUG 가만 두지 않을 .”

 

상처를 싸맸던 붕대를 풀듯이 검게 점철되었던 공간이 풀려나자 사람은 조그마한 한칸에 서로를 끌어안은 내려앉았다. 반지하의 단칸방이지만 실내만큼은 제법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비올레의 자취방은 이제 쿤에게도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으므로 가릴 없이 쿤은 비올레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들어 짧게 입을 맞췄다. 간단하지만 달콤한 연인 간의 안부 인사였다. 인사에 응해 쿤의 허리를 끌어안은 비올레는 지척에서 보니 황홀한 쿤의 혼인색을 이제야 마음껏 누릴 있었다. 오랜만의 밀회라고 쿤도 나름은 신경을 썼는지 화사한 색감의 셔츠에 파스텔톤의 니트 베스트가 그림같이 어울렸다. 타고난 피부도 눈부시게 희어서 산뜻한 색상들이 살아나는 기분이랄까. 비올레에게 쿤은 색채만큼이나 찬란한 빛이었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사정상 공개연애를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을 독차지할 있다는 사실에 매번 감사하게 만큼. 경계가 풀린 미소를 비올레의 품에 묻는 쿤을 내려다보는 비올레의 담황빛 눈동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럼 너는? 세상에 동명이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따지고 있어?

 

FUG 후계자, 스물다섯번째 밤이자 비올레 그레이스라는 소년의 경호를 위해 조직이 가려뽑은, 생김새가 동년배의 소년. 그렇기에 비올레는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FUG 사람들은 그들이 정한 순번에 따라 22번이라고만 불렀고, 별도의 이름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별개의 인생을 살도록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밤을 대신해 죽어줄 소모품일뿐. 살아갈 이유도 목표도 없었던 그에게 쿤과의 만남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발로 있게 주었다. 이를 테면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되찾게 주었다고 할까?

 

공강이라 찾아오셨겠지만.. 하츠씨가 많이 찾으실텐데요. 괜찮겠어요?”

 

둘러대는 거야 전공이지. 너무 걱정하지 .”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아무리 정리가 되어있다고 해도 비좁은 단칸방에 의지를 개나 두는 것은 힘들다보니 쿤은 제알아서 비올레의 침대를 차지했다. 사람의 연애가 온전히 이루어질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에 그간 번의 방문에 이은 학습 결과다. 마음이란 그리 쉽게 타인의 말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건만 쉽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남의 침대를 파고드는 연인을 비올레는 어쩔 없다는 눈으로 내려다보며 침대에 걸터 앉았다.

 

쿤씨 일인 걸요. 내내 피곤해 하시는 같던데 주무시겠어요?”

 

아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래버리면 너무 아깝지.”

 

자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머리칼을 쓸어주는 비올레의 손에 몸을 맡긴 쿤의 목소리는 제법 나른했다. 조금 흐트러졌을 망정 화사함은 그대로라 비올레의 손길을 허락하는 무방비함이 약간의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했다. 사실 쿤과 비올레의 관계는 매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쿤보다는 비올레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쿤의 친부모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수를 쓰고 있다는 맞지만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보호받고 있는 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비올레는 다르다. FUG 그를 거둔 그가 FUG 후계자와 비슷한 용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다. 심지어 이유를 만들어낸 필요가 밤을 대신한 죽음인만큼 FUG 쓸모 하나로 그를 거두어 가능성은 전무했다. 물론 쿤이 그에게 일러 주었듯이 그가 다루는공간원소 워낙에 희소한 속성이라 가치가 상당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치라는 비올레가 FUG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되는 이야기. 못할 것은 없다. 쿤을 만나기 전까지 비올레는 FUG 그늘에서 살아왔고 쿤과 함께가 아닐 때면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년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쿤을 만나기까지 FUG 은이 아예 없다고는 없으니 상황이 허락한다면 비올레는 기꺼이 FUG 정보원으로서의 삶도 받아들일 있었다. 하지만 다음 후계자라는 밤이, 그가 마음을 사람을 자신의 그림자 따위에게 빼앗기도고 오로지 가치만으로 비올레를 판단해 것인가?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밤과 비올레는 늑대 수인이다. 늑대 수인의각인 그들이 평생 바라볼 사람을 운명처럼 결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밤이 쿤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과정에 밤이나 비올레가 쿤을 다치게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비올레는 아직 자신의 욕망을 눌러담기 위해 노력했다. 쿤은 자신이 둘러대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노라고 자부했지만 비올레의 욕심을 터뜨리면 그만큼 쿤이 신경을 써야할 테니까. 그건 위험부담을 쿤에게만 부과하는 일이다. 비올레는 연인에게 그런 비겁한 짓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러니 쿤이 일러준 대로 밑에서 힘을 길러 FUG로부터 온전히 독립할 것이다. 그렇게 쿤의 보금자리가 되고 그를 품에 안을 터였다.

 

비올레.”

 

말씀하세요.”

 

심각한 표정인데 말은 듣고 있었나보네.”

 

당연하죠. 늑대 수인에게 반려란 그런 존재인걸요.”

 

.. 그럼 수인한테 반려는 어떤 존재일까?”

 

“..문제..인가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 분명하건만 그게 즐거운지 비올레의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그대로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며 마음을 간지럽히는 미소를 흩뿌렸다. 바람결에 떨어진 꽃잎이 수면 위를 물들이듯 미소가 눈동자를 꽃잎색으로 물둘였다. 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색채의 조합에 비올레의 머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생각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무리한 요구를 하며 쿤은 비올레의 손에 뺨을 기댔다. 자신과 다른 체온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쿤이 꿈결에 웅얼거리듯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농담을 던졌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눈에 보여서, 도도한 성격의 그가 부리는 앙탈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혹자가 봤으면 분명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고들 하겠지.

 

주무신다면서요. 졸지 말고 답을 알려 주세요.”

 

싫어. 최소한의 노력은 하고 말해.”

 

노력은 항상 하고 있는데요.”

 

. 감은 눈꺼풀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비올레는 소중한 연인을신의 품에 가뒀다. 그건 분명 치의 거짓도 없는, 완연한 진실이었다. 그를 위해서 비올레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가끔은 쿤이 사실을 아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비올레는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애교라고 하긴 한참 모자라지만 나름의 노력만큼은 엿보였던 만큼 마음이 풀어진 쿤은 여전히 매혹적인 혼인색을 뽐내는 눈을 들며 가까워진 비올레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나에게 너는 봄이야.”

 

뱀은 죽음과도 같았던 겨울잠의 끝에서, 낡은 허물을 벗고 혼인색으로 단장한 다음, 자신의 짝을 맞는다. 그들은 늑대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언제나 가장 새로운 것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계절의 시작을 반려와 함께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의 모든 최초는 오로지 자신의 연인을 위한 . 그렇기에 자신의 몸에 꽃잎의 색채가 만개하는 순간 쿤은 비올레의 입맞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계절의 주인이 제대로 찾아와 주었으니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완결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 글을 오래 잡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영 마음대로 안 써져서 ㅠㅠ

마무리가 허술한게 느껴지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올레쿤은 봄 꽃의 소재를 제공하신 홍련님의 리퀘였는데,

늦기도 너무 늦었을 뿐더러 내용도 부족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퇴고 못했고 해서 시간이 나면 손을 좀 볼 수는 있겠지만 봄 꽃은일단 여기서 끝입니다.

그간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글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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